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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을 통한 변화와 북한인권법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기조가 되었던 에곤 바르의 발제 “Wandel durch Annährung”이 “접근을 통한 변화”로 번역되어 알려져 있다.

 

우선 이 번역에서 건너오지 못하고 ‘번역’을 기다리고 있는 게 혹시 있지 않나 살펴보고자 한다.

 

“접근을 통한 변화”를 번역하기에 앞서 그 사상의 기조가 기독교적인 정신과 인본주의가 사상이라고 했다. 막연하게 내던진 말이고 공허하다. 말은 또한 약속이므로 이 공허한 공간이 채워져야 할 것이다. “Wandel durch Annährung"이 함유하는 사상의 기조를 말의 의미를 음미해 봄으로써 약속을 지켜보고자 한다.


1. Annährung-접근(接近; 사귈 접, 가까울 근)

 

1) 첫 접근-erste Annährung (!)

 

예수님은 유대인과 그 이웃 사람들이 사는 땅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치유의 역사를 행하셨다. ‘역사’라고 하지만 별로 거창한 일을 하지 않으셨다. 머리에 손을 얹고 세게 기도하는 등 장풍을 날리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복잡한 심리상담을 하지 않으셨다. ‘가까이 가’ 주셨거나 ‘가까이 오’도록 허락하셨다. 그리고 몇 마디 하셨다. 이게 다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변화, 즉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2) 어원

 

‘접근’(Annährung)의 주구성부 ‘Nährung’은 genesen(낫다, 회복하다)과 어원이 같다. genesen의 어근 ‘nes-'는 ’[위험, 병 등에서] 빠져 나오다, 면하다, 생명을 혹은 건장을 유지하다. 운 좋게 귀가하다‘ 등의 의미가 있다. 위험에서 벗어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 혹은 바탕에 주목하는 (古)인도어 ’nasate‘는  '[누구의] 동무가 되다, [누구와] 결합/연합하다‘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혼자의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어 neomai(운 좋게 귀가하다/도착하다), Nestor(네스토르=항상 운 좋게 귀가하는 사람) 등도 어근 ’nes-'를 갖고 있다. (두덴/Duden 어원사전 참조)

 

,Nahrung'(양분, 양식)과 어원이 같은 'nähren'은 ‘[위험 등에서] 벗어나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양분이다. 이 양분은 앞의 말 연장선에서 보면 연합/결사다.

 

3) 'an'

 

가장 골치 아픈 독어 전치사. 방향성(라. ad)과 더불어 ‘가까이 감’의 도착점을 말해주고 있다. 어디까지 가까이 가야 하는가? 다다를 때까지. 매우 기독교적인 운동이고 [정신]자세다. 나병환자와 몸이 부딪칠 때까지. 하나 될 때까지. 아무런 전제조건이 없는 운동이다.

 

2. Wandel(변화)

 

카프가의 ‘변신’(Verwandlung)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난다. 오비디우스도 ‘변신 이야기’(Metamorphoseon libri)의 들어가는 말에서 변신의 원인이 신에게 있고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진행형이라고 한다.

 

정신현상학 서설 §24(http://blog.jinbo.net/ou_topia/80)의 ‘wirklich'를 좀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목에서 [근데 이건 뭐야, <>안의 독어들이 하나도 안보이네. 시간 내서 다시 삽입해야겠네.] wirklich(현실적), werden(되다), Werk(작품), wenden(뒤집다) 등에 이어 Wurm(지렁이)까지 어원이 같다고 했다.

 

‘Wandel’(변화)도 여기에 속한다. 지렁이가 구불구불 기어가는 뒤집어지기(wenden)의 연속성, 진행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행위 자체이지 어떤 목적의 수단이 되는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접근을 통한 변화’의 'Wandel'을 루터가 남긴 말 ‘Handel und Wandel’의 의미로 이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적 사상에 물든 이해다. ‘Handel'은 사는 행위이고, ’Wandel'은 이윤을 붙여 다시 돈으로 바꾸는, 변형시키는 행위다. 그러나 ‘접근을 통한 변화’는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는 접근을 이야기하고 있다.

 

3.

 

앞에서 얘기한 것들이 나로 하여금 ‘접근과 변화’는 기독교적인 사상과 인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우선 기독교인의 기본자세인 겸손을 엿볼 수 있다. 기독교의 겸손이란 그저 자신을 낮추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가 높을 줄 다 알면 날 낮추는 게 무지 쉬운 그런 겸손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 앞에 서있다는 걸 인식하고 그게 내면화된 의식이다.

 

'북한인권법'을 외치고 “서독이 인권유린 감시하자 동독 주민 탄압 줄었다.”라는 식의 보도는 ‘접근을 통한 변화’에서 배우자고 하면서 그 정신은 멀리하는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나열되는 사실들은 정신이 빠져있는 허섭스레기일 뿐이다. ‘인권침해를 모니터링하기 위한 중앙기록보존소를 설립하는 등 압박도 병행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한다. 주지하다시피 중앙기록보존소는 1961년에 설립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 실시된 ‘접근을 통한 변화’의 정책과 병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권을 수단으로 삼아 압박을 가하는 것을 폐기하고, 다시 말해서 인권을 등에 업고 인권을 무기로 휘두르는 교만을 포기하고, 자신도 역시 인권의 지배아래 두고 인권 앞에서 모든 행동을 신중하게 고려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와 같은 자세를 인권 앞에서 취한 것이다.

 

“인권의 관철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에 기여하는 것 외 절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연방정부에게는 인권정책이 다른 국가들에게 우리의 국가 및 사회모델을 강요하는 수단이 아니다. 인도적인 편익[을 증진하는 조치들은](Erleichterungen) 독일연방공화국 정치/정책의 중요한 요소다. 연방정부는 동독(DDR)과의 관계에서 한편으로는 인권상황 개선을 위한 법적, 정치적 가능성들을 전부(voll) 사용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못지않게(aber) 또한 이것과 [=모든 가능성을 다 사용해야 하는 의무와] 관련된 [우리의] 행동이 동독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항상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연방정부는 독일 상황의 특수성 앞에서 어떤 경우든, 어떤 행동을 혹은 말을 하기 전에, 미리 우리의 행위가 [야기할] 생각가능한 모든 사실적인 결과들을 더할 수 없는 성실성을 다해 검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1979.9.20 연방정부의 인권정책에 대한 야당(기민기사연합)의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한국정부가 취해야 할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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