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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 변증법 (5)

국제시장에서 이산가족찾기 자료화면에 겹친 패티김의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가 왜 그토록 심금을 울렸을까?

 

눈물의 현상학이 있을 법하다. 눈물이야말로 의식내재적 사건이지만, 크게 통제 가능한, 그리고 그렇지 않은 눈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식이 주인이 되어 통제=자제할 수 있는 눈물이 있는가하면, 반면 의식이, 자기 집에서, 외부의 그 무언가가 의해 제압되어 통제불가능하게, 걷잡을 수 없이 흘리는 눈물이 있다. 전자는 자기비애일 거고, 후자는 – 뭐지?

 

암튼, 이산가족찾기 자료화면에 겹친 패티김의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에 나온 눈물은 후자에 속했다.

 

살다보면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후자의 경험은 그리 흔하지 않다. 내 생에 한 3번 정도 있었다고 할까? 그래서 그런지 후자는 선명하다. 이번에 나온 눈물이 후자에 속한다고 장담할 수 있다.

 

 

 

딴나라 사람이 거의 다 된 후 어느날 가방 하나를 전달받았다. 우연에 우연이었다. 오래동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엄마가 보낸 가방이었다. 가방을 여는 순간부터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 두시간 정도 주저앉아 울었다. 가방은 남도의 음식으로 촘촘히 채워져 있었다. 가방에서 나오는 남도의 내음이 나를 제압했다. 나는 더이상 나가 아니었다.

 

장인장모의 묘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풀은 무성했고,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남도의 황토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파헤쳐져 있었고, 주민이 다 떠난 마을은 고요하기만 했다. 신도시건설공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짝지는 큰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이리저리 헤맸다. 묘소가 없어졌다. 짝지는 어린아이가 되어 울었다. 멈출줄을 몰랐다.

 

이번의 눈물은 좀 다르긴 하다. 내 집을 찾아온 뭔가가 나를 제압하고 주인이 되었다. 나는 내 집에서 손님이 되어, 내 집에서 주인이 된 그 뭔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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