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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2

(§2) 오늘날에 와서는 오류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근심걱정이 이런저런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아는 체 하고 무게를 잡는 일 없이[1] 바로 철학이 해야 하는 일에 착수하고[2] 실질적으로 인식하는[3] 학문을 불신으로 대하기까지 이르렀는데, 사태가 진정 이렇다면 이건 눈뜨고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일로서 이젠 역으로 이런 불신을 불신으로 대하고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이미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맞섬과 동시에 이에 대한 구제책을 강구하지[4]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사실 이런 근심걱정은 뭔가를 전제할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그것의 이런저런 변형을 내놓고 그것에 기반하여 이리저리 몸을 사리는 궁리들을 짜내고 어떤 바라짐하지 않는 결과에 귀착하게 되는지 보여주기 일상인데, 그런 식의 전제가 정말 올바른 것인지 먼저 조사해봐야 할 일이다. 이 근심걱정이 전제하는 것을 말하자면 인식을 도구나 매체로 보는 생각이며 또한 이와 같은 인식과 우리 자신은 별다른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가장 어처구니 없는[5] 것은 절대자는 이편에 서 있고 인식은 따로[6] 저편에 서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인식이 절대자와 단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이 실재적인 것을 담은[7] 것이라는 주장과 다름이 없다. 달리 표현하면, 절대자의 외곽을 맴도는 인식은 당연히 진리밖에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것이라고 전제하는 짓이다. 인식에 대하여 근심걱정하는 자들이 전제하는 것을 겨우 이런 가정으로서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오류를 두려워 한다는 거창한 이름표를 붙이고 나오지만 알고 보면 사실 진리에 대한 두려움에 가깝다는 것이다.



[1] 원어 . 어떤 일을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일을 방해하는 사람을 독일에서는 폄하하여 äger>라고 부른다. 특히 사회개혁안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거의 직업적으로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를 놓고 이렇게 부른다. 정신현상학 때문에 쉘링과 헤겔이 절교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신현상학이 쉘링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다. 이런 점에서 역자는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면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헤겔의 말투(Tonlage)를 살리려고 노력한다.

[2] 원어 . 이것은 §1 와 똑 같은 내용이다. §1의 역자주 2번 참조.

[3] §1의 역자주 4번 참조

[4] 원어 . §1의 역자주 11번 참조. 헤겔은 여기서 이런 구제책을 마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약속하는데(Versprechen), 정말 약속을 지켜 그런 구제책을 제시하는지는(einlösen) 두고 볼 일이다. 정신현상학이 바로 이 구제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헤겔이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정신현상학도 역시 그가 비판하는 잡다한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헤겔이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내다보는 것 같은데(vorgreifen) 한번 믿고 따라가 보자.

[5] 원어 <vorzüglich>. <으뜸가는>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는데, 여기서는 상당히 빈정대는 투로 사용되고 있다.

[6] 원어 ür sich>

[7] 원어 . (사실을 담은/실재를 담은)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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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5

(§5) 그러나 이 서술은 단지 무대에 올라와 뭐가 뭔지도 모르고 몸부림하는 지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학문의 모양, 즉 학문 특유의 형태 안에서 온갖 요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고 또 학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완성된 학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서술은 참다운 지를 향해 몸부림치는[1] 자연적인 의식이 거쳐가야 하는 길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다. 또는 혼이 거쳐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혼은 이 도정에서 그 본성이 미리 예비한 일련의 형태를 하나하나 취하고 두루 거치면서 [2],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경험함으로써 본래적인[3] 자신을 알게 되고 마침내 정신으로 순화된다.



[1] 본문 . 아리스토텔레스의 oregesthai (형이상학, 980a 21), ephiesthai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4a)의 <무엇을 향해 뻗어 나가다>의 의미로 번역했다.

[2] 플라톤의 국가 10권 마지막 부분 에르 신화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에르는 아르메니오스의 아들로서 어떤 전투에서 전사한다. 전사 후 10일째 되는 날 다른 전사자들은 이미 부패한 상태였는데 에르는 그렇지 않게 온전하게 집에 안치되었다. 12일째 되는 날 화장하려고 나무장작위에 갖다 올려놓았더니 다시 살아나고 저승에서 경험한 것을 보고한다. 이 보고내용이 플란톤의 에르 신화다. 주요 내용은 혼이 죽은 후 지옥과 천당에 간다는 것과, 너무 악해서 영원히 타타로스에 던져지지 않은 이상 혼은 다시 이승으로 온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혼이 다시 이승으로 오는 과정인데 제비 뽑기로 순서를 정하고 차레대로 삶의 기본모형(bion paradeigmata, 국가 617d)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재수가 있고 없는 문제는 떠나서 운명은 이렇게 선택의 여지라는 것이다. 쉴러의 발렌슈타인에서 피콜로미니가 발렌슈타인에게 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하늘이 아니라 <네 가슴속에 네 운명의 별이 있다>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플라톤도 모든 것이 원칙적으로 자업자득이라는 면을 강조하는데 <다이몬이 너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자신이 [너희 삶을 주관하는 신인] 다이몬을 선택한다.>(국가, 617e). 결국 선택한 삶을 선택한 다이몬의 주관아래 살게 된다는 것이다. 선택이 다 끝나면 혼은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레테 강물을 마시고 새 몸으로 이승에 다시 오게 된다.    

[3] an s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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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묘소에서 유럽유태인학살추모공원으로 간 이유

헤겔 묘소에서 유럽유태인추모공원으로 향하게 된 이유를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마음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였다라고만 한 것이 무성의하고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래와 같이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런 느낌은 괴테와 쉴러의 도시 바이마르에 가도 마찬가지다. 바이마르에 가면 반드시 바로 그 옆에 있는 작센하우센 유태인 수용소에 들린다. 그래야 마음이 균형이 잡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60년대 70년대에 68세대의 영향아래 독일에서 성인으로 접어든 사람이면 (Sozialisation) 어는 정도 이런 마음가짐이 있을 것이다.

 

아도르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nach Ausschwitz 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화비평은 문화와 야만간의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와 맞서있다: nach Ausschwitz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다. 그리고 이런 야만성은 오늘날에 와서 왜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는지 목소리를 높이는 인식의 목청에도 이미 들어와 있는 상태다. (Kulturkritik findet sich der letzten Stufe der Dialektik von Kultur und Barbarei gegenüber: 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und das frisst auch die Erkenntnis an, die ausspricht, warum es unmöglich ward, heute Gedichte zu schreiben.) (Kulturkritik und Gesellschaft, (1951). In: Adorno: Gesammelte Schriften, Bd. 10.1. Frankfurt/M. 1980. S. 11-30)

 

nach Ausschwitz. 번역하기 참 힘든 문구다. 아우슈비츠 이후? 아니다. 에 지역이름이 따르면 보통 방향을 말한다. 그리고 예를 들어 에서와 같이 지역이나 도시이름이 특별한 경우에는 그 도시가 상징하는 것을 취하려 가는 그런 방향성을 말하고  이런 경우 는 거의 항상 긍정적인 면을 향해나가는 방향성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Novalis가 했던 말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항상 본향으로./ 는 그냥 <집으로>라는 뜻이다.)을 이해할 수 있다.

 

nach Ausschwitz. 그러면 아우슈비츠에 가란 말인가. 그렇다. Nach Aus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이 말은 독일인이 아우슈비츠가서 시를 쓰는 행위는 야만적인 행위다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아도르노는 정말 아우슈비츠에 갔다. 그리고 그는 독일의 혼이 유태인과 함께 흔적이 없이 재로 날라간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모든 긍정이 사라진 변증법을 이야기했다. 혼이 죽어버렸는데 더 이상 무슨 긍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독일의 혼이 다시 살아난다면 아우슈비츠를 통과한 혼일 것이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어린애한데 물어보듯 <헤겔하고 아도르노하고 누가 더 좋아>라고 물어오면 <아도르노가 더 좋아.>라고 대답할 것이다. 괴테보다는 파울 체란이 물론 더 좋고. 항상 내편이었던 누나 같은 의 데리다가 가장 좋기는 하지만. 그러나 헤겔이 옳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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