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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과 말, 함부로 빌려줄 일이 아니다

얼굴과 말, 함부로 빌려줄 일이 아니다.

독일에  법학교수에다 연방국방부장관을 지낸 기민당 소속 루퍼어트 숄쯔(Rupert Scholz)란 사람이 있다. 근데, 말 한번 잘못 빌려줬다가 신세 조지게 됐다. 씨원하다.

경력이 화려한 사회저명인사를 광고모델로 기용하거나 그런 사람 말을 인용하여 신뢰도를 높이려는 금융상품 광고에 등장한 것이 불씨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 적.녹 연정하 대대적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사회복지제도 개악의 제 1 사업으로 부과식  공적(법적)연금을 약화하고, 소위 ‚리스터 연금’이라는 적립식 사적연금을 입법화한다. 그 입법과정에서는 금융계의 막대한 정치자금이 연방하원에 진출한 정당으로 흘러 들어가고 (관련 브레멘 대학 Diana Wehlau의 박사논문 „Lobbyismus und Rentenreform/로비활동과 연금개혁“ 참조), 사회고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대중매체가 떠들썩하게 사이드지원을 했다. 부과식을 고집하면 지금까진 일하는 사람 수명이 연금수령자 한명을 먹여 살렸는데 앞으로는 일하는 사람 한명이 연금수령자 수명을 먹여 살리게 될 거라고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경제학자 Robert von Weizsäcker 교수에 따르면 이건 생산력상승, 즉 사회적 부의 성장을 사상한 접근이라는 것. 연경제성장 1%만 가정해도 사회고령화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대려 남아돌아간다는 것. 이런 접근은 결국 사회의 부를 은행.금융계의 물레방아로 돌리려는 의도하에 진행되었다는 것, 결국 분배가 문제라는 것. 독일 제일국영방송 ARD의 1월 9일 방송 „Das Riester-Dilemma – Portrait einer Jahrhundertreform“ 참조http://www.ardmediathek.de/ard/servlet/content/3517136?documentId=9216678).

‚리스터 연금’이란 적립식 사적연금제도의 입법으로 결국 공적연금제도로 유입될 돈이 은행과 금융계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고, 신자유주의 개악을 추진한 사민당 전 총리 슈뢰더를 많이 먹인 Maschmeyer같은 인간들은 이건 노다지라고 하면서 금융회사를 만들어 챙길대로 챙겼다.

루퍼트 숄쯔가 이런 유의 금융회사 „MSF Master Star Fund“가 발급한 노후대책용 상품이 안전하다고 말하고 MSF사는 그 내용를 광고지에 첨부하여 돌린 것이다. MSF사는 물론 망했고, 고객들은 급기야 루퍼트 숄쯔를 상대로 소송을 건 것이다.

1심 2심에서는 판결이 엇갈리다 연방대법원이 불완전 판매를 넘어서 금융상품 광고에 출연한 사람들에게까지 손실배상의무의 범위를 확대시킨 것이다 (2011.11.17 연방대법원/Bundesgerichtshof 판결(Az.: III ZR 103/10).

씨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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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흐 테제 받아들이기 힘들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읽어 본 사람이 한두명은 아닐 것이다. 노동운동하는 사람이라면 자본론은 읽어 보지 않았을지라도 몇 장 안되는 포이에르바흐 테제는 틀림없이 읽어 보았을 것이다. 11번째 테제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알만한 것이다. 이 정도 모르면 이제 교양없는 사람이 된다.   

포이에르바흐 테제가 인생의 기로를 바꾼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포이에르바흐 테제가 학생들로 하여금 노동 현장에 뛰어들게 했다는 말이 아니다. 포이에르바흐 테제가 노동 현장에 뛰어든 학생들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는 의식화교육의 자료에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의식화자료로 쓰기에도 알맞다. 양이 그렇고 내용이 그렇고 특히 말의 흐름이 그렇다. 뭔가 새로운 것에 동참한다는 힘차고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오래만에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읽어보고 내키는데로 번역해 보았다. 힘들다. 번역이 아니라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우선 이디오진크라지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는 아마 수많은 비판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포이에르바흐 테제에 기댄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참 힘든 비판이었다. 내용보다 어투가 마음을 상하게 했고 결국 관계까지 파괴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 안에는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거부하는 뭔가가 있다. 두번째로는 맑스가 후에 포이에르바흐 테제에서 멀어졌다는 느낌이다. 이는 맑스가 쓴 글을 조목조목 인용하면서 주장해야겠지만 우선 맑스가 노동현장에 뛰어들지 않고 영국국립도서관에 10년동안 쳐 밖혀 자본의 운동을 담아내는 개념사업을 했다는 것으로 대체해 본다.

실천이란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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