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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새로운 사회화의 질은 필연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의 개념을 확장하고, 전개되지 않은 [시원]원리에서부터 이미 쭉 그랬던 [노동]개념의 총체성을 [이제] 분업적인 총체성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내 준다. “자연시스템에서 머리와 손이 함께 있는 것과 같이, 노동과정이 머리노동과 손노동을 통합한다. 이 둘은 나중에 갈라서고 상호 적대적인 대립까지 간다. [이제] 생산물은 전반적으로 개별적인 생산자의 직접적인 생산물에서 사회적인 생산물로, 총노동자의 공동생산물로, 즉 노동대상의 손질하기에서 가까이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마디마디로 분절되고, 그때그때의 계기를 이루는] 일원들로 결합된 노동[총]인원의 공동생산물로 전화된다. 때문에 노동과정의 협동적인 성격 자체와 함께 필연적으로 생산적인 노동과 그 기체(基體)Träger[휘포케이메논]의, 즉 생산적인 노동자의 개념이 확장된다. 생산적으로 노동하기 위해서 이젠 더 이상 스스로[직접] 손을 놀릴 필요가 없다. 총노동자의 기관으로, 즉 총노동자의 하위기능 중 그 어떠한 하나를 집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본론 1권, 537쪽)
- 체계적으로 19세기 말부터 추진되었던 - 과학의 고정자본적인 기계시스템 안으로의 기술적인 전환과 자동화 경향은 마르크스가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이라고 표현했던 것에 변화를 가져왔다. 실질적인 종속이 단지 형식적인 종속과 다른 점은, 실질적 종속은 노동, 분업, 그리고 과학의 사회적 생산력들의 체계적인 적용을 통해서 직접적인 노동과정의 테크놀로지적인 구조까지 질적으로 변화시킨다는데 있다. 인간들과 자연간의 물질대사로서의 노동과정이 말하자면 그 내부 자체에서 사회화된다.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의 가장 두드러지는 성질 하나는 “사회적 발전의 일반적인 생산물인 과학을 직접적인 생산과정에” 의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재결과, 50쪽, 프랑크푸르트 1969).
마르크스가『그룬트리쎄』에서 상술하고 있는 것처럼, 개별적인 노동능력/역능이 점점 더 순간화.계기화되고 노동시간의 가치척도가 고정자본과 사실적인 생산과정의 현실과의 관계에서 점점 더 극적인 모순에 들어서는 가운데, 사회적 결합/결사는 생산의 과학화와 함께 생산을 점점 더 총노동자로 총체화한다. 기술과 과학의 전개는 [현재] 시스템을 폭발시키는 정도까지 생산적으로 이행된 상태에 이르렀다. 생산의 테크놀로지적인 과학화에 의한 생산적인 노동의 새로운 사회화의 질은 그의[=새로운 사회화의 질의] 자본주의적 강제의 양식으로의 대상화를 더 이상 관용할 수 없게 한다. 독점자본과 자동화의 관계는 또한 계급이론적으로도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의 중대한 변화의 본질은 이룬다.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 또는 특수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함께 [더 이상] 개별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점점 더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능력/역능이 총노동과정의 실질적인 기능자가 되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 경쟁하면서 총생산적인 기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노동역능/능력들이 매우 다양한 다른 방식으로 상품의 - 혹은 여기에 더 적합하게 말하자면 생산물형성의 - 직접적인 과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자는 손을 더 많이 써서, 저자는 머리로 더 많이 써서 노동하고, 이자는 매니저, 엔지니어, 기술학자 등으로, 저자는 감독자overlooker로, 제3자는 직접적인 노동자로 혹은 심지어 단지 [기구/도구를 받쳐 들고 있다고 지시에 따라 건네주는] 보조자Handlanger로 노동하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노동능력/역능의 기능들이 생산적인 노동의 직접적인 개념 아래로, 그리고 그 기체들이 생산적인 노동자의, 즉 직접적으로 자본에 의해서 착취되고, 그리고 자본의 가치증식과 생산과정 전반에 종속되는 노동자의 개념 아래로 정렬된다.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재결과, 66쪽)1
과학들이 그것들의 기술적인 전환[가능성]에 따라서, 그리고 그런 과학의 기체, 즉 정신노동자들이 생산적인 총노동자 안으로의 통합이 완성되면, 그러면 사회혁명적인 전략들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거의 배타적으로 산업프롤레타리아만을 참조하면 된다는 식의 가정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지성이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산업프롤레타리아적인 계급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어떻게 직접적인 생산자의 개념이, 그리고 이와 함께 노동하는 계급의 개념이 전반적으로 변화되었는가에 있다.
진척되는 자본 및 생산적인 노동의 사회화와 생산의 테크놀로지적인 과학화와 함께 직접적인 산업프롤레타리아 역시 점점 더 총노동과정의 요소/계기가 된다. [한편] 산업프롤레타리아는 그 어는 때보다 덜 생산적인 노동의 총체성을 대표한다. [다른 한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극적인 첨예화에도 불구하고 정신노동이 더 이상 [자신을] 단지 [숭고하게] 드높은 것으로 하는 추상노동의 반영(反影)으로, 그리고 이와 함께 부르주아적인 문화전유와 과학프로세스의 소시민적인 조직형식들의 대표/재현으로 다루어질 없고, 오히려 조직된, 그리고 집단적인 형식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계급의식의 형성과 정치적인 계급 조직의 형성에 있어서 [거짓이 아닌, 후기자본주의에 터전에서 생성된 자연적인] 순수한 형성요소/계기가 된다.
계급투쟁에서의 과학적인 지성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정신노동] 개별자의 계급배신(대개 루카치의 계급투쟁에서의 인텔리겐치아의 역할의 규정을 참조하면서)이라는 전통적인 이론들에, 조직된 생산적인 과학적인 지성 없이는 부르주아 사회 전반에 관련된 계급의식의 형성이 산업프롤레타리아 안에서도 역시[=단지 과학적 지성 안에서만은 불가능하듯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로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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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크랄에게 [살아 있다면] 새로게 형성된/될 계급의식의 무기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 산업프롤레타리아의 무기는 파업이었다. 물론 계급의식이 먼저 있고 그 다음 파업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파업을 통해서 계급의식이 형성됨과 동시에 재현된다. 촛불시위, 점거(occupy) 운동 등등이 새롭게 형성된/될 계급의식의 무기인가? 이건 뭔가 좀 부족한 것 같다. 크랄의 분석이 현실적이라면 자본주의의 심장을 뚜르는 [유물적인] 무기는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의 노동운동과 관련해서 전국노조에서 산별노조로 이행한 것이 과도가 아니라 혹시 전도가 아닌가라는 의문을 이곳 뽀삼님의 "안산노동운동의 형성과 전개"라는 글에 기대어 제기한 적이 있다. 전노협이란 지역노조에 기반한 전국노조형식이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하는 산별 금속노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독일의 친사민당 조직(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진보적 교회조직 등)들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의 상황을 잘 모르지만, 한국의 노동운동의 방향이 전노협에서 산별노조로 넘어감으로써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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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해서 이어지는 생각은 이집트 혁명을 '페이스북 혁명'이라고 하는데, 이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같다. 혁명의 요는 누가 정권을 창출하는가에 있다.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가 정권을 창출하는 혁명이다. 그래서 '페이스북 혁명'이라면 '페이스북'이 정권을 창출했어야 하는데, 이집트에서 과연 그런가?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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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하의 태업(사보타주), 노동거부가 무기가 될 수 있을까? 노동자계급은 "위협하는/drohend" 무기대신 "때려쳐 부수는/schlagend"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이 겹친다. 태업, 노동거부는 단지 위협하는 무기일 뿐이 아닌가? 그런 위협에 자본은 "알았어, 뭐가 불편하니? 니 말대로 해줄께."하지 않을까?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