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78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4/12
    기본소득 - 누가 누구하고 싸우는 싸움인가?(50)
    ou_topia
  2. 2010/04/11
    창작은 모방과 참조의 계기가 새겨져 있다.(1)
    ou_topia
  3. 2010/04/11
    독일에 빈곤이 확대되고 있다(2)
    ou_topia
  4. 2010/04/10
    정신현상학 서론 번역초안을 마치면서 1(3)
    ou_topia
  5. 2010/04/10
    정신현상학 서론 §16/17
    ou_topia
  6. 2010/04/09
    정신현상학 서론 §15
    ou_topia
  7. 2010/04/08
    정신현상학 서론 §14(1)
    ou_topia
  8. 2010/04/07
    정신현상학 서론 §13
    ou_topia
  9. 2010/04/06
    정신현상학 서론 §12
    ou_topia
  10. 2010/04/05
    정신현상학 서론 §11
    ou_topia

기본소득 - 누가 누구하고 싸우는 싸움인가?

* 민중언론 참세상[“실현가능성 희박한 기본소득론”] 에 관련된 글.

 

기본소득에 대한 정통 맑스주의에 입각한 논리 정연한 반론이다. 사이사이에 소명제를 삽입하여 논점을 명쾌하게 하고 그 필연성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듯 하다. 모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Statement. 그리고 동의한다.

하지만 난 박석삼님의 반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유는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박석삼님의 반론은 그가 비판하는 사람들과 기본적으로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왜 냐하면, 기본소득논쟁을 자본과 노동간에 있는 모순의 쟁점으로 보는 사람들을 비판하는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논점도 결국 그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반론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논쟁에 접근하는데 내가 취하는 입장은 매우 원시적이다. 나는 우선 누 가 누구하고 싸우는 싸움인가”, 그 다음 내 가 개입해야 하는 싸움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가 개입해야 하는 싸움이면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하는가물어본다.

난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이 자기반성적으로 발전한 자본내부에서 일어나는 싸움이지 자본과 노동간의 싸움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자 본과 노동간의 모순은 일면적인 모순이 아니다. 그 모순은 자본내부의 모순과 운동, 그리고 노동내부의 모순과 운동을 수반하는 입체적인 모순관계다. 이런 입체적인 모순관계와 운동을 정확하게 포착하면 그날그날의 행동강령이 명확해지고 투쟁에 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천 박한 단순논리에 붙잡혀 나의 적이 적으로 생각하는 편을 내 편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자본내부의 모순 때문에 자본 내부에 일어나는 싸움에서 자본내부의 양자는 원칙적으로 다 나의 적이다. 자본이 자기 내부의 한편에 적대적인 운동을 한다고 해서 그 편이 내편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오류를 박석삼님이 비판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인데, 박석삼님도 결국 그 오류에 붙잡혀 있다.

 그럼 기본소득이 자본내부의 싸움이라면 그건 누가 누구하고 하는 싸움인가. 독일의 경우 기본소득에 관한 논쟁의 지평은 기본법 해석을 둘러싼 헌법현실(Verfassungswirklichkeit)에 대한 논쟁이다. 독일기본법은 독일연방공화국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gewährleisten) 법치주의원칙을 준수하는 국가(Rechtstaatlichkeit)임과 동시에 개인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베푸는(gewähren) 사회복지국가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양자간의 긴장과 대립관계가 50년대 에른스트 포르스트호프와 볼프강 아벤트로트간의 첨예한 논쟁으로 불거진 이후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매개로 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복지국가원칙이 헌법 조항이 된 것은 노동운동이 성취한 것이 아니고 자본의 자기반성으로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 전후 사회주의권을 의식한 자본주의로 시작한 독일자본주의(관련 Christoph Butterwegge, Armut in einem reichen Land, 2009 참조)는 지금 자기 재생산의 토대를 걱정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자본주의로 발전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다양한 대책이 제시되고 그 대책간 갈등과 모순이 있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한속으로 본다. 차 이가 있다면 일할 의욕이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그럼 이 싸움에 개입해야 하는가? 그리고 개입해야 한다면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하는가? 물론, 개입해야 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전근대적인 귀족주의적인 사고, 자립과 자존정신으로 무장된 시민과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있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잘못과 절대(!) 연계시키지 않는다는데 있다. , 어떤 사람이 게으름뱅이어서 자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지라도 그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형편을 베푸는 것이다. 사 회주의 운동이 그 이하로 떨어질 수 없다.

그럼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하는가? 이기는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신자유주 의의 순정파 독일 자민당도 시민수당을 제안으로 내걸고 나오는 형편이다. 조건을 달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기반성적으로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대세는 기본소득 쪽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창작은 모방과 참조의 계기가 새겨져 있다.

독일에 빈곤이 확대되고 있다

독일에 빈곤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OECD보고나 빈곤에 관한 독일정부백서에 드러나는 이 현상을 조명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독일의 예를 들어 빈곤문제에 접근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데 나타나는 모순과 갈등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더불어 독일제도나 상황이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경향에 찬물도 한번 끼얹어 볼까 한다.

 

아래 내용은 베를린에 있는 노숙자와 연대하는 사단법인 “mob – obdachlose machen mobil”(mob - 집 없는 사람들이 움직인다)이 발간하는 신문 “Strassenfeger”(도로 청소하는 사람) 2010 35호에 실린 급식소 국가 빈곤과 자선”(Suppenküchenstaat – Armut und Mildtätigkeit)이라는 기사에서 발췌하고 역자가 접할 수 있는 정보와 상황으로 보충한 것이다.

 

 

0 빈곤층이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치적 활동이나 개입이 부정되고 배제되고 있음.

 

- 관련 유럽최대의 방송기업 RTL 1, 세계최대의 출판사 랜덤하우스, 유럽최대의 매거진 출판사 그루너+야르 등을 소유하는 세계적인 미디어업체이고 베르텔스만 재단을 통해서 독일사회정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베르텔스만 그룹이

 

- 사회구성원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이 문제라는 취지아래 여러 컴페인을 개시하는 가운데 그 일환으로 창설한 사회구성원”(die Gesellschafter)이란 단체의 최근 행적이 시사하는 바가 큼.

 

- “사회구성원은 최근 빈곤이란 주제아래 개최한 포럼에 급식소(Tafel)전문가인 스테판 셀케(Stefan Selke)를 초빙했다가 그가 제출한 논문이 너무 비판적이다라는 이유로 초대명단에서 누락시킴.

 

- 급식소 운영과 관련해서 셀케가 지적하는 것은 비교적 온순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빈곤문제의 접근은 자선활동이 독점하고 있는 실태임.

0 셀케는 급식소의 허상을 정확하게 파헤친 사회학 교수인데, 그가 지적하는 점은

 

- 1993년 시민운동차원에서 시작된 급식소(Tafel)가 지금에 와서는 확대되어 전국 주요도시에 850개 급식소를 두고, 4만 명의 자진봉사자와 그 외 수 천명의 „1 유로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과 형벌대신 일조치에 참여하는 수형자들이 약 100만 명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방대한 시스템으로 발전하였는데

 

- 셀케는 어떤 시스템이건 최우선 목적은 시스템유지이기 때문에 이렇게 급식소를 제도적인 차원으로 확대하여 운영하는 것은 빈곤을 퇴척하기 보다는 대려 영구화한다고 점과 [빈곤이 사라지면 그 시스템도 사라지니까]

 

- 그리고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단법인 „Tafel e.V.“„Tafel“이란 문구를 사용하는, 예를 들어 Kindertafel(어린이 급식소)이나 Tiertafel(동물급식소) 등의 단체를 상대로 하여 법적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보면 시민활동을 라벨화하여 자기만의 사업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임.

 

* 급식소(Tafel)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최근 자선사업과 관련된 비리사건이 시사하는 바가크다. 노숙자구제사업을 하는 „Treberhilfe“라는 단체가 있는데 그 이사장이 최고급 승용차인 마제라티를 타고 다니다가 카메라에 잡혀 방송되었다. 문제가 불거지자 손님용으로라고 얼머부리려 했지만 문제가 과대한 월급, 자기사람쓰기 등으로 확대되어 결국 물러나게 되는 일이 최근 베를린에서 벌어졌다.

 

- 또한 저렴 슈퍼마켓들은 유통기간이 거의 다 된 또는 더 이상 판매할 수 없는 물품을 가져가라고 제공하는데, 자선하는 것 같지만 사실 처리비용과 감세를 감안하고 또 이미지 향상을 보면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것.

 

0 셀케가  비판하는 점은  

 

- 급식소를 통한 빈곤구제사업의 효율성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에 속하는 독일에 빈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필히 논쟁이 진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불필요한 것처럼 여겨지게 만들고

 

- 이런 빈곤구제를 논하는데 있어서 당사자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에게 어떤 피해를 남겨주는가라는 문제는 망각한 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배고픔달래기만 진행하고

 

- 그것도 모든 빈곤자에게 배급되지 않고 여기에다가도 포함과 배제의 원리를 적용하여 그들을 빈곤상태에 묶어두는 역할을 하고

-
그래서 급식소 운영과 배급을 담당하는 시민단체들은 사실 연방정부와 기초단체정부들의 대리인 구실을 한다는 점임. 즉 연방정부가 발급하는 빈곤증에 기반하여 기초단체정부가 제공하는 저렴한 공간에서 자선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임.  

 

* 여기서 빈곤증이란 사민당.녹색당연정 슈뢰더정권이 진행한 아젠다2010개혁의 하르츠4번 일환으로 사회수당과(기초단체정부담당) 장기실업수당(연방정부담당)을 통합하여 신설한 JobCenter가 발급하는 증서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 증이 없으면 급식소에서 급식을 받을 수 없게 규정되어 있음.

 

0 이런 급식소운영을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 소위 겨울내기지원 재단“ (Stiftung Winterhilfswerk, 이하 WHW)이라는 자선사업이 예가 되겠는데

 

- 이 재단은 여러 사회복지단체들이 연합하여 설립한 재단이었지만 나중에 나치당이 흡수하고 결국 나치정권에 도움을 주는 재단이 됨.

 

-  WHW1931년부터 모금운동을 펼치고 1936/1937년 겨울에 들어서는 900만 명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대사업을 할 수 있는 제정능력을 갖게 됨. [1936 9월 이후 임금의 10%를 강제로 기부하게 만듬]

 

- 1939/40년에 들어서는 기부금이 복지사업에 투여된 정부예산을 넘어섬으로써 사회복지에 투여되는 정부예산의 짐을 현저하게 덜어줌.

 

- 당신 사람들이 쉬쉬하면서 이야기하기를 WHW <Wir hungern weiter>(우리의 계속 배고프다) 아니면 <Waffenhilfswerk>(무기생산지원사업)의 약어로 사용함. 사회복지부문에서 건진 자금으로  당시 무슨 짓을 했는지 꼬집으면서


0
바이에른 공영방송이 방영한 최근 내용에 따르면

 

- 독일에서 자진봉사로 창출되는 총 부가가치는 연 700억 유로 정도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서론 번역초안을 마치면서 1

우선 임석진 교수님께 큰절한다.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데 엄청나게 좋은 것을 하나 훔쳐와서 그렇다. 도둑놈한테 도둑질 잘하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절을 받으면 어떤 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절은 해야 할 것 같다.

 

음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성이 아닌가 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임석진 교수의 개정번역본을 읽으면서 정신현상학의 조성에 귀가 확 뚫리게 되었다. 거침없이 훔쳐왔다. 조성에 귀가 뚫리니 읽어 내려가는데 또한 거침이 없다.

 

웹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녀보니 정신현상학 번역에 대하여, 그리고 번역하는 일 자체에 대하여 이상한 생각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어처구니 없는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 한글 번역본>을 운운하면서 일본 번역본의 도움을 받아 원서를 읽어 내려가겠다는 의지다. 대단한 의지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원서를 일본 번역본을 <매체로> 하여 우리말로 <고스란히>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 깔려있는 기본정서는 <직역>이다. 악보를 읽을 줄 알면 다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혹시나 하고 가서 보니 독어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기 그지없다. 정신현상학을 읽어 내려가면서 <>자가 붙은 모든 것이 어떤 호통을 받는지 귀가 뚫렸으면 한다.

 

이것이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데 두 번째 어려움인 것 같다. 처음에는 귀가 뚫리지 않아서 헤맸는데, 이제 귀가 뚫리니 헤겔의 곤장이 나를 때리는 곤장소리다. 그냥 맞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리저리 피해보지만 잘도 때린다. 어쩌면 그렇게 내 안에 있는 끈적끈적하고, 우쭐거리고,덜 되고이런 생각들을 하나하나 들춰내는지 귀신 같다. 정신현상학에 들어가는 정문에는 라고 간판이 걸려있다. 내가 하는 짓이 심판대에 올라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 보인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서론 §16/17

(§16) 의식은 이와 같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두루 거치면서[1]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학문으로 향하는 이 도정 자체가 이미 [학문의 형식을 취하는] 학문이며 그 내용에 푹 빠져 들어가[2] 이름 짖는다면 의식이 하는 경험 속에 스며있는 학문이다[3].

(§17) 의식이 자기를 뛰어넘는 행위를 하면서 얻은 경험은[4] 그 개념상 의식이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담아내는 완성된 체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멈출 수가 없고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 완성된 체계가 바로 진리가 다스리는 온전한 정신 제국이다[5]. 이 제국은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것과는 달리] 이렇게 의식이 행하는 모든 경험을 담은 제국이기 때문에 거기서 진리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나타난다. 정신제국을 다스리는 진리의 몸체에는 마디마디마다[6] [의식이 도정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고비마다 의식의 몸체에 새겨지고 또 거기에 매듭지어진] 독특한 형태가[7] 스며들어 있다. 이렇게 진리의 몸체 마디마디에 새겨진 매듭들은[8] [의식의 구체적인 경험과정을 잘라내 버린 논리학에서 그러듯이] 추상적이고 투명한 [변증법적 운동의] 계기로[9] 나타나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것들이 의식에 대해서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의식이 그것과 관계하는 가운데 스스로 등장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정신제국을 온전한 총체로 만드는 대목에는[10] 의식이 고비마다 취한 형태가 [반드시] 있다. 의식은 참다운 모습으로 실존할 때까지 자신에게 거듭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마침내 자신의 궤도의 종착점에 이르게 되고 거기에 도달하면 의식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에서[11] 그 옷이 자기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얻어온 낯설은 것이고 아무리 두르고 있어도 그에게는 남의 것으로만 남아있다고 여기고 [자기가 진정 입어야 할 옷은 다른 것인데 하는 부끄러움,  허위의식, 기세 등 먼지 같은 모든 생각을] 털어내 버리고 [자기의 이런 찢긴 모습을 모두 품고서 아무런 허위의식이 없는] 본향으로 귀향하는 것이다.[12] 의식이 이런 자신의 궤도의 종착점에 이르면 의식에 대한 서술 역시 완성되고 드디어 정신이 군림하는 본래적인 학문의 장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의식은 자기의 본질을 두르고, 그리고 이 옷은 절대지가 정말 어떤 것이지 그 참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옷이 될 것이다.



[1] 원문 . 여기서 라는 문장에서 쓰여진 와 같은 의미로 번역해야 하겠다. <우리는 시내를 돌아 다녔다.> 그래서 <두루>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 원문 . 에 스며있는 의미와 관련하여 ou-topia의 블로그에서 <헤겔묘소에서 유럽유태인학살추모공원으로 간 이유> 참조

[3] 원문 . 애매모호한 표현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소유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즉 목적격적 소유격인지 아니면 주격적 소유격인지 그 답에 따라서 본문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번역될 수 있겠다. 그 중 <의식이 하는 경험에 대한 학문> <의식이 하는 경험 속에 스며있는 학문>이 대치되고 헤겔이 논하는 내용인 것 같다 (§15의 결론 참조)

[4] 원문 über sich macht>. 여기서 사용된 전치사 <über>가 어렵다. 과는 달리 여기서는 의식이 자신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는 점이 조명 되었다.

[5] 원문 . 단락은 §5에서 잠깐 내보인 것(Exposition)을 재개하여 진리가 다스리는 정신제국과 그에 상응하는 학문이 시작하는 점, 관점을 달리 해서 말하면 의식이 자기 도정을 마치고 진리가 다스리는 정신제국에 들어가는 지점을 설명하고 있다. §5에서는 의식의 도정을 서술하는 학문이 ümlichen Gestalt sich bewegende Wissenschaft>인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문과 함께 진리가 다스리는 정신제국은 자기 특유의 형태 안에서 온갖 요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제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제국)의 어원은 (풍요로움) (올바름)이란 낱말과 같다. 아무튼, 마르크스의 <자본론>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필연성이 다스리는 제국>(„Reich der Notwendigkeit“) <자유가 다스리는 제국>(„Reich der Freiheit“)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그리고 의식 경험의 완전한 체계와 진리가 다스리는 정신제국과의 관계가 <필연성이 다스리는 제국> <자유가 다스리는 제국>간의 그것과 유사하다. 틀린 점이 있다면 자유가 다스리는 제국이 되려면 <노동시간 단축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6] 원문 . 헤겔의 사용하는 terminus technicus 중에서 알듯하면서도 가장 애매모호한 개념이 다. 변증법적이진 않지만 따로 한번 정리해 보겠다.

[7] 원문 ümliche Bestimmtheit

[8] 원문

[9] 원문

[10] 원문 . 역자는 여기서 소유격을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파악한다.

[11] 원문 . 서설을 번역할 때 을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겠다. 그때 가서 자세히 보자. 본문에서 을 <벗다>(ablegen)해서 을 <옷>으로 옮겨 보았다.

[12] 원문 . 이 문단은 좀 고무된 분위기다. 이 분위기를 옮기는데 초점을 맞췄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서론 §15

(§15) 경험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관한 이와 같은 서술의 표면에는 언뜻 보기에 경험에 관한 통례적인 이해와 부합하지 않는 요소가[1] 스며있다. 이 요소는 첫번째 대상과 그에 대한 지에서 두 번째 대상으로 넘어가고 과도에[2] 있다. 사람들은 보통 두 번째 대상을 놓고 경험을 논하는데, 위에서 서술한 바에 따르면 과도란 첫번째 대상에 관한 지, 달리 표현하면 첫번째 Ansich가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필히 두 번째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3]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두 번째 대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은 위에서 서술된 경험과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4].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첫 개념의 비진리성을 경험하게 되는 상황은 우리가 첫번째 대상과 아무런 내적 연관성이 없이 우연히 접하는 전혀 다른, 뜻밖의 대상을 접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결과 이런 식의 경험에서 우리 몫으로 떨어지는 것이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대상의 운동에 직시하는 것과 반대로] 뭔가 아예 처음부터 불변의 완결무결한 상태로 있는 것을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갖추면 되는 것처럼[5] 보인다. 이와 달리 앞에서 서술된 견해에 따르면 새로운 대상은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식이 전복[6]됨으로써 생성된 과거를 갖는 것으로서 필연적인 [7] 것이다. 사태를 이렇게 살펴보아야만 비로소 의식이 하는 일련의 경험이 학문적인 발걸음으로 추대될 수 있는데, 사태를 이렇게 고찰하는 것은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첨부하는[8] 것이지 우리가 관조하는 의식이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9] 이런 상황은[10] 사실 위에서 의식에 대한 [학문의] 이 서술과 회의주의와의 관계를 다루면서 언급한 상황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11] 그때 한말을 상기하자면 참답지 않는 지에서 매번 얻어지는 결과가 모두 공허한 무가 되어서 흔적이 없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무엇의 결과로서의 무로서 그 무엇의 무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를 이렇게 결과로 파악하면 그 결과에는 이전에 행해졌던 지에 스며있는 참다운 것이 보존된다. 의식의 운동에 대한 이런 사연이 여기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처음엔 대상으로 나타나던 것이 대상에 관한 의식의 지로 침강하고,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 되고[12] 바로 이것이 새로운 대상이 된다는 것이며 이와 함께 또한 새로운 의식 형태가 등장하고 이렇게 새로 등장한 의식에게는 이전 의식에게 본질이 되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 본질이 된다는 것이다. 의식의 운동을 둘러싼 이런 궤도(軌道)가[13]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의식형태를 빠짐없이, 그리고 각자가 갖는 필연성에 따라서 이끌고 나아가는 것이다[14]. 여기에 회의주의를 서술하면서 이야기 한 것과 다름 점이 딱 하나 있는데[15], 그것은 이와 같은 필연성이[16], 달리 표현하면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는 것이 의식에게는 전혀 인지되지 않고 그저 숙명적인 우연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필연성은 마치 의식의 등뒤에서만[17] 벌어지는 사건인양 의식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만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만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의 운동에는 자신의 운동을 전혀 꿰뚫어보지 못하고 그 운동을 숙명적으로 이행하는, 아니면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만[18] 알고 있는 면이[19] 스며들어 있다. 달리 표현하면 의식의 운동에는 경험의 와중에 있는 의식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우리만 꿰뚫어 보고 우리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숙명적인[20] 면이 스며들어 있다. 더 정확하게 지적하자면[21]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생성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의 내용은 의식에 대해서 있는 것이며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단지 그 생성운동의 양식, 달리 표현하면 순수한 생성일 뿐이다. 생성된 것이 의식에 대해서는 단지 [그때 그때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만, 우리에 대해서는 동시에 운동과 깨쳐나감으로 [22] 존재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Übergang>

[3] 원문

[4] 원문

[5] 원문 ür sich ist>

[6] 원문 . 표현이 좀 불분명하다. 이 의식의 인지 아니면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도장을 찍듯이 의식에게 둘러 씌우는 것인지 좀 불분명하다.

[7] 원문 . 발생한 것으로 다시 거꾸로 어쩔 수가 없는 것. 와 유사한 것 같다.

[8] 원문

[9] 그러면 의식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데

[10] 원문 . 가 의식과 의식작용만 포함하는지 아니면 서술하는 학문도 포함하는지 이것이 문제다.

[11] 필자가 보기엔 이것은 단지 헤겔의 주장인 같다. 앞 문단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른 것이 없다는 주장이 최소한 명쾌하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12] §13에서는 war>, §14에서는 ist>에서 이 문단에서는 wird>로 변한 것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시간성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존재양식은 회의주의에 단계에 빠져있는 의식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학문(헤겔) 스스로 기술하고 있다. 이 미래형을 쓰게 하려고 헤겔은 다방면으로 노력하는데 회의주의가 스스로 수긍할 만은 것이 되는지 모르겠다. 회의주의가 이 미래형을 쓰지 않는 한, 변증법적 운동이 자력으로 전개된다는 주장에 문제제기를 할 수가 있겠다.

[13] 원문 . 이 문단의 논점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그리고 르네상스 비극과 그 이후 비극의 발전형태에 관한 토론과 유사하다. 관련 내용은 Peter Szondi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래서 를 어쩔 수 없이 딛고 나아가야 하는 의미가 있는 <궤도>로 옮겨 보았다. 

[14] 문제는 누가 이끌고 가느냐라는 것이다. 의식이 자력으로 아니면 학문이, 아니면 학문과 의식이 합심하여?

[15] 원문

[16] 원문 . 여기서 필연성이란 그리스 비극의 ananke와 유사한 것 같다. 오이디푸스의 전말을 아는 관람자와 합창단만 그가 숙명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과정을 꿰뚫어 보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알고 피해가려고 해도 숙명이 제시한 길에서 이탈할 수 없다.

[17] §8 상응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불교적인 아니면 관념적인 <피안> 아니라 의식을 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의식을 온전히 알아보려면 그것을 <뒤집어 까야> 한다는 것이다.

[18] 원문 ürunsseins>. 역자는 여기서 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 맞춰 <숙명적인 것>으로 번역하였다. ürunssein>이란 자기의 본성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자라나가기만 하는 식물에 있어서 씨앗에서 열매까지의 과정을 꿰뚫어 보는 우리만 그 숙명적인 본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19] 원문

[20] 원문 ürunssein>

[21] 원문

[22] 원문 . 괴테의 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여기서 은 조동사의 동명사가 아니라 완전동사의 동명사다. 그래서 <무엇이 되어라>라는 의미보다는 방해하는 뭔가를 깨부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죽음으로 모든 것을 깨부수고 앞으로 나가라>로 번역될 수가 있겠다. 생명력의 움직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서론 §14

(§14) 이런 운동을 놓고 우리는 변증법적 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1]  의식이 자기 안에서 운동하는 가운데[2], 지의 운동뿐만 아니라 대상이 하는 운동 안에서 볼 수 있는 변증법적 운동이[3], 이런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고 그 대상이 다시 참다운 대상이 되는 정황에 한해서[4], [우리가] 사용하는 경험이라는 낱말이 뜻하는 것의 핵심이다. 의식이 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이렇게 이해되는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바로 앞에서 [§13] 언급한 의식의 과정에서 드러나는[5] 한 면을[6] 끄집어내어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면을 아래와 같이 새롭게 조명해 보는 일은 [의식을 관조하는] 우리가 하는 일인데, 이렇게 조명해 보면 [의식이 하는 운동을 서술하는] 학문이 취하는 입장이 훤해지지 않을까 한다.[7] 조명해 보자.[8] 의식은 뭔가를 안다. 이렇게 의식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이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다. 이렇게 지에 대해서 불변하는 그 무엇이 다가 아니다[9]. 이 무엇은 또한 의식에 대한 불변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의식이 의미하는] 참다운 것이란 원래 불변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라는 의미였는데 사태가 이렇게 되면[10] 진리가 엇갈리는 것이 된다.[11] 우리가 보기에 이제 의식은 두개의 대상을 갖고 있다. 하나는 [원래적인 의미로서의] 맨 처음의  불변하는 그 무엇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에 대한 그 불변하는 그 무엇이다. 후자는 회의주의가 서슴없이 말하듯이[12] 의식이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분명[13] 보인다. 뭔가를 다시 자기 앞에 갖다 놓는 것이 아니라[14] 첫번째 대상이 되었던 불변하는 그 무엇에 관한 지를 자기 앞에 갖다 놓는다는 것인데, 이때 불변하는 그 무엇을 대상으로 삼았던 지의 행위만이 반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우리가 위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렇지 않다. 회의주의가 관념적으로 그러듯이 이때 첫번째 대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15] 변화하여 다가간다. 그래서 이 대상은 더 이상 홀로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 된다.[16] 이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과로 귀착된다. 즉,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참다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더 살펴보면[17] 참다운 것이 본질이 되기 때문에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이제 의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대상이 바로 첫번째 대상의  허무함을 내포하고 있는바 첫번째 대상을 딛고 올라서면서 얻은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다.



[1] 원문 .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 하고 난 다음 잠깐 멈추고 에 액센트를 주고 계속 읽어나가게 된다. 우리말에서도 말을 하는 도중에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그>하고 잠깐 멈춰 눈길을 내면으로 돌리고(innehalten), 그리고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하여 [의식의] 눈앞에 갖다 놓고(vorstellen) 그 Vorstellung에 부합하는 개념이 떠오르면 말을 계속 이어간다. 그래서 원문은 <그.변증법적인 운동> 정도로 옮겨지겠는데, 이런 <목소리>가 복제될 수 있는가, <이편에서 저편으로 옮겨질 수 있는가/번역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데리다가 붙들고 싸웠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는 지금까지 살펴본 의식의 운동을 종합해서 표현하는 terminus technicus이기 때문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설명하면 대려 설명하는 사람의 엉뚱한 생각이 될 수가 있겠다.

[2] 원문 §12 첫 문장에 등장하는 표현인데, 거기서 살펴보았다. 거기서 했던 추측, 즉 의식이 어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 움직인다는, 자기소외운동을 한다는, 그리고 다시 자기로 돌아오는 운동을 한다는 추측을 해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이런 운동을 문법상 틀린, 그러나 사태에 맞는, 그래서 결국 다시 문법에 맞는 란 표현으로 표현했다고 추측해 보았다.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데 있어서 문장을 시작할 때의 <주어>가 문장을 다 끝내고 나면 다른 <주어>가 되어있는 이런 사변적인(spekulativ) 운동이 독어가 지니는 특성이며 또 독일이상주의 특성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주어가 움직이는 운동을 담아내는 논리는 대체 어떤 논리인지 궁금하다.

[3] 지의 운동과 대상의 운동을 통합해서 의식의 운동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Einheit der Einheit und Differenz의 근거가 되는 상황이 아닌가 한다.

[4] 강조는 역자. 회의주의에서는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13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an sich> 가 단지 ür es an sich>였다는 과거로 떨어지는 한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운동이 있을 수 없다. 과거가 현재완료형이 되어 지나간 것이지만 현재에 결과로 남아있어야 한다. 이 이것을 담보하고 있지만 그 <제한적 부정>의 힘이 정말 회의주의 힘을 꺾는 힘이 되는지  헤겔은 보여줘야 한다. <정신현상학>을 읽어 내려가는 과정에서 길목길목에 이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헤겔이 여기서 이 문제는 보류한다는 느낌을 주는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회의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개연성도 참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때 가서 실지로(ernsthaft) 따져보자.

[5] 원문 . 이 갖는 <표면적>이라는 의미를 <드러나는>으로 옮겼다.

[6] 원문 .

[7] 이 문장은 헤겔이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좀 두리뭉실하게 표현하였는데, 한가지만 집고 넘어가자면 에서 이 주격적 소유격인지 목적격적 소유격인지 확실하게 해주지 않았다. 헤겔의 논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본문을 <아래 서술이 갖는 학문적인 면>으로 번역하면 이 문단과 다음 문단이 아리달송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서술을 하는 학문의 입장>으로 옮겼다.

[8] <정신현상학>의 담론적 성격을 살렸다.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이런 담론적 성격 외 독어의 특성이 애로사항이 된다고 역자가 지적한 적이 있다.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정신현상학>에 무수히 쓰이는 문장기호다. 적절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 damit tritt die Zweitdeutigkeit dieses Wahren ein.> <이중의미>로 번역하지 않고 에 가깝게 <헷갈리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이유는 여기서 사용되는 세미콜론은 본문이 앞의 내용과 물론 관련이 있다고 보여주고 있지만, 그보다 뒤에 나오는 내용과 더욱 밀착되어 있고, 이것과 비교해 볼 때 앞의 내용과는 거의 단절되는 있는 상태에 가까운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앞의 내용을 따르면 <두개>란 의미가 강하겠지만 뒤에 오는 내용을 따르면 의식의 진리와 의식을 관조하는 우리의 진리가 엇갈린다는 것이 핵심내용이 아닌가 한다.

[12] 원문 <zunächst>. 여기서 줄곧 담론의 대상이 되는 것은 회의주의이기 때문에 이렇게 옮겨 보았다.

[13] 원문 . §13 에 관한 역자주 참조.

[14] 원문

[15] 의식에게

[16] 원문 ört auf [,] das Ansich zu sein, und wird ihm zu einem solchen, der nur für es das Ansich ist; somit aber ist dann dies: das Für-es-sein dieses Ansich, das Wahre, das heißt aber, dies ist das Wesen, oder sein Gegenstand.>(강조는 역자). 우선 문장체(Textkörper)에 주목하자. 이 문장은 §13에 등장하는 문장 Ansich war, nicht an sich ist, oder dass es nur fuer es an sich war.> [의식을 관조하는] 학문의 입장에서 반복한 것이다. §13의 문장은 물론 의식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문장체에 나타나는 차이는 라는 과거형이 라는 현재형으로 대치된 점이다. <정신현상학>의 문제는 이 차이를 설명하는데, 이 차이를 납득이 가게 전개하는데 있다고 본다. 독어에서 현재형(Präsens)과 과거형(Präteritum)은 현재/과거완료형이나 미래형과는 달리 과거를 상기하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그런 시간의식(Tempus-Perspektive)이 없는 시제다. 이런 면에서 양자간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는 자기가 속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현재는 접하고 있는 세계를 논의하는 면이 있다는 점이다 (Harald Weinrich, 213, 219쪽 참조). 그래서 구체적인 대화나 담론상황을 보면 과거는 이렇게 [주관적으로]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화자에게 그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에 대한 연기(Aufschub)를 허용하는 반면, 현재는 화자와 피화자가 처해있는 세계를 논하기 때문에 화자건 피화자건 논의된 내용에 자기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의식이 이야기하는 세계와 학문이 논의하는 세계간 아무런 연관이 없거나 서로 평행하게 존속하는데 헤겔은 양문장에서 란 시간의식을 표현하는 동사를 사용해서 두 세계를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역자가 지적하고 물고 늘어지는 점은 이것이 억지라는 것이다. 최소한, 그것이 서론에서 명쾌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헤겔은 의식이 사용하는 과거형을 고대그리스어의 적인 시제로 이해하는 것 같다. 아오리스트라는 시제는 어떤 사태가 존속하거나 발전하는 최종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하면 <나는 과거 왕이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다>라는 현재완료적인 의미를 갖고 자기반성과 함께 자지실체와 실재가 눈에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 전개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의식은 자기이해에서 반복의 의미를 갖는 <과거형>을 사용하는 것 같다. 이런 과거형을 적용해서 하면 <나는 [이런 저런 시도를 했으나 다른 것이 되지 못하고] 매번 왕으로 머물렀다.>라는 의미가 있다.

[17] 원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서론 §13

(§13) 의식을 가름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1] 개념과 대상, 척도와 잣대질의 대상이 모두 의식 내에 있다는 면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가 더욱 유의해야 할 점은[2] 양자를 비교하는 본격적인[3] 조사 또한  우리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4]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이 자기자신을 스스로 가름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일이란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5] 것뿐이다. 왜냐하면, 의식이란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한 의식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참다운 것에 대한 의식임과 동시에 이렇게 참다운 것을 알고 있다는 의식, 즉 이와 같은 [대상에 대한] 지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자가 다 의식의 행위이기[6] 때문에 의식이 하는 이런 행위 자체가 진리와 지를 비교하는 것이 되고 대상에 대한 지와 대상과의 일치여부 역시 의식의 행위 안에서 의식에게 벌어지는[7] 사건이 된다. 그런데 모두가 이렇게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고 또 그런 사건만으로 제한한다면[8] 대상은[9] 의식에 대한 대상으로서 단지 의식이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 밖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추궁이 그럴 듯 하다[10]. 왜냐하면, 의식은 자기가 알고 있는 대상을 마치 꿰뚫어 보듯이 하여 그 뒷면에 의식행위와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는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 아는 대상에는 이렇게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의식은 무엇을 무엇에 갖다 대보는 식으로, 즉 [의식에 대한] 대상을 [즉자적인] 대상에[11] 갖다 대보는 식으로 조사를 진행하여 지의 진위여부를 가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지 않다. 의식이 대상을 안다고 하는 그 행위 자체를 통해서 의식에게는 [막연하지만] 뭔가가 [의식과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고, 다른 뭔가는 지, 즉 의식에 대한 대상의 존재라는 구별이 주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주어진 구별에 기반하여 비교조사가 진행된다. 이런 비교에서 양자가 일치하지 않으면 의식은 지를 변경하여 대상에 부합하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의 변화는 사실 지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의 변화까지 몰고 온다. 왜냐하면, 주어진 지는 본질적으로 대상에 관한 지이기 때문이다. 지가 변하면 동시에 대상도 다른 것이 된다. 왜냐하면, 대상은 본질적으로 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면 의식은 자기가 이전에 das Ansich라고 했던 것이 이제 와서 보니 사실 불변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단지 의식에 대해서 [한때] 불변하는 것으로 있었던 것이었다고 의식하는 새로운 의식이 된다.[12] 사태가 이렇게 되면, 즉 의식이 자기의 대상에 자기의 지를 가름해보고 지가 여기에 일치하지 않게 되면 대상 그 자체도 의식의 이런 운동에 견딜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조사의 잣대도, 그 잣대를 가지고 조사한 것이 그 조사에서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란 단지 지의 조사에 머무르지 않고 지를 조사하는 잣대의 조사가 되는 것이다.



[1] 원문 를 이렇게 장황하게 옮겼다. 여기서 는 <다되었다>라고 안심하는 마음에 더 유의해야 할 점을 지적하고 다짐하는 대화체 불편화사로 사용되고 있다. 아주 강조된 다.

[2] 역자주 107 참조. 강조된 가 갖는 의미를 <더욱>으로 옮겼다.

[3] 원문

[4] 원문 <überhoben>. (직무에서 물러나다>라는 의미로 옮겼다. <überheben> 의미는 여기서 같은 의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다면 <überheben> <überheblich>, 즉 팔장 끼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교만>에 좀 있다.

[5] 원문

[6] 원문 ür dasselbe>. 왜 그냥 이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머리 아픈 표현을 계속 쓰는지. ür dasselbe>§8에서 §10 <für sich>와 연계하여 살펴본 적이 있다. 한번 더 엄밀하게 고찰해야 할 문제로 남아있지만 잠정적인 결과로 얻는 <의식의 행위>라는 의미를 그대로 사용해 본다. 

[7] 원문 ür dasselbe>. 여기서 에 주목하자. 미래형이다. 의식이 앞으로 나가고 있다. 정신현상학 서론을 읽고 나서 꼭 따져봐야 할 문제는 의식이 정말 자력으로 앞으로 나아가 정신까지 가느냐의 문제다. 달리 표현하면 정말 정신의 경지에 올라간 사람, 즉 정신의 도움이나 강제가 의식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전혀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다. 이점과 관련해서 역자는 지금까지 좀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을 번역할 때마다 강제성이 부여된 <끌려나아감>을 사용하였다. 아니면 이런 것인가.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내 희망의 바탕이 되는 나의 주인이여, 나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지옥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내가 천국을 찾아갈/올 수 있게 여기저기] 당신의 흔적을 남겨둔 주인이여 (O donna in cui la mia speranza vige,/e che soffristi per la mia salute/in Inferno lasciar le tue vestige... 단테, 신곡, 천국편 31)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정신의 도움으로 정신의 경지에 다 올라간 뒤에 마지막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인가. 단테의 신곡에서 또 재미있는 것은 <당신의 흔적>이란 표현과 관련해서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흔적을 찾아내고 따라 갔다는 것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단테가 베아트리체가 웃는 모습을 단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은 애타는 마음이었고 이런 마음을 죽 간직하고 있었지만 죽어버린 베아트리체의 웃음을 다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신곡>을 지어서 베아트리체의 웃음을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하였다는 재미있는 견해를 내 논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연이 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철학이 <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다.

[8] 원문 를 이렇게 장황하게 옮겼다.

[9] [우리가 학문의 입장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지의 대상과 진리로 구분되지 않고]

[10] 원문 . 은 따로 살펴봐야 할 개념이다. 우선 크게 <근거가 있는 schein>하고 <전혀 근거가 없는 schein>으로 구별하고 지나가겠다. 전자는 <그럴듯한> 근거가 있는 것이고, 후자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겉치레>(bloßer Schein)가 되겠다.

[11] 원문

[12] 원문 nur fuer es an sich war.> (강조는 역자). 회의주의(Skeptizismus), 또는 <불행한 의식>(unglückliches Bewusstsein)과 관련하여 중요한 대목이다. 지가 이와 같은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서 스스로, 외부로부터 첨가되는 것이 없이, 필연적으로 학문이 되는 과정에서 또는 의식이 정신이 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회의주의다. 이 문제를 <제한된 부정>을 통해서 해소했다. 학문이 수수방관하는 의식이 회의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가 보여주듯이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역자는 이것을 따지기에 충분한 근거가 여기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의식이 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오로지 für es an sich 였던(war)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an sich 가 für es an sich가 됨과 동시에 다시 an sich가 되어서 새로운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an sich이 아무것도 아닌 오로지 für es an sich밖에 아닌 것으로서 과거로 떨어지는, 즉 공허한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완전한 의식이 갖는 회의주의였고, 불행한 의식의 본질이 아닌가 한다. 이 것을 극복하는 것이 정신현상학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회의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변증법적인 운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식이 되었다는 것을 담보해 주는 이란 동사의 사용의 실재를 역자는 보지 못한다. 아니면 아직 이해하지 못했나 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서론 §12

(§12) 지야 <네 잣대와 내 잣대는 틀리다>라고 하고, 아니 법리와 같이 눈부신 논증을 가지고 위와 같은 분절과 그 전제를 논할 수야 있겠지만 그러나 [1]  우리의 대상이 되는 지의 본질은 우리가 이런 분절논리에 걸리지 않게 한다. 조금만 더 파헤쳐보면 의식은 자신과 씨름 하는 가운데 매번 필요한 잣대들을 스스로 마련한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2]. 그렇기 때문에 이 조사는 의식이 자기자신을 자기와 비교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진리와 지간의 구별은 의식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의식 내부를 살펴보면 한편으로 뭔가가 타자에 대해서 있음으로써 어떤 형식이든지 의식 그 자체가 지로 향하는 규정성을[3] 지니게 되며, 동시에 이 타자가 의식에 대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관계 밖에서도 존재하는 것으로, 즉 불변하는 즉자적인 것으로[4] 의식에 나타나기 때문에 의식은 진리로 뻗어가는 방향성이[5] 있다. 그래서 의식이 자기 내부에 있는 것 중에서 불변하는 즉자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참다운 것이라고 선언하고 또 그렇게 드러난 것에서[6] 우리는 의식이 스스로 내세운 척도를 얻고 이 척도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지를 재보는 것이다. 여기서 지를 개념이라고 부르고 본질 또는 참다운 것을 존재자 또는 대상이라고 부른다면 진위를 가르는 우리가 하는 일이란 단지 개념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그냥 바라보기만[7] 하는 것이다. 반대로 대상의 본질 또는 불변하는 즉작적인 것을  개념이라 하고 타자에 대해서 있는 대상을 말 그대로[8], 달리 표현하면 의식에 대해서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로서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때 진위를 가르는데 우리가 하는 일이란 역시 단지 대상이 그의 개념과 일치하는지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양쪽이 다 똑같다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양대 요소가[9], 이것을 개념과 대상으로 표현하든 아니면 대타존재니[10]  즉자존재니[11] 하는 것들로 표현하든, 하여간 양대 요소 모두 우리가 조사하고자 하는 지 그 자체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조사가 끝날 때까지 견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척도를 마련할 필요가 없고, 우리에게 언뜻 떠오르는 착안이나 생각을 조사에 적용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것들을 다 잘라 내야만[12] 비로소 우리는 사태 그 자체의 운동을 허심탄회한 [13]  마음가짐으로 관찰하는 경지에 들어서서 사태를 온전히 인식하게 된다.



[1] 원문 . <대화체 불변화사>로서 는 기대에 어긋한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2] 원문 ßstab an ihm selbst.> 정말 머리 아픈 문장에다 머리 아픈 전치사 이다. 위 문장은 사실, 문법상 틀린 문장이다. 은 여기서 이 주어인 을 가리키기 때문에[재귀하기 때문에] 사실 가 와야 한다. 그러면 ßstab an sich selbt.>가 된다. 이렇게 하면 당시에 흔히 쓰이던 하고 혼동될 우려가 있어서 문법상 틀린 표현을 헤겔이 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고 헤겔은 이렇게 문법상의 오류를 무릅쓰고 이렇게 표현했을까? 위 문장은 간단하게 ßstab.>(의식은 스스로 척도를 마련한다.> 이러면 충분하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혹시, 문법상 틀린 문장이 사태의 실재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문법상 틀린 문장이 올바른 문장이고 또 문법상에도 맞는 문장이 아니겠는가? 정말 그렇다면 위 문장의 주어인 <의식>이 재귀의 대상으로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사이 움직이고 이동해서 그전과 달라져야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주어인 <의식>은 자기소외(Sebstentfremdung) 운동을 하는 것일까. 그럼 운동하는 것을 어떻게 주어가 고정되어 있는 한 문장에 담을 수가 있단 말인가. 빙글 돌게 머리가 아프지만 참고 함께 춤추면서 이 문장이 무슨 춤을 추는지 살펴보자. 의식이 추는 이 춤을 헤겔이 이 문단에서 전개하는 것 같다. 일단 이라는 전치사만 살펴보고 넘어가자.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an ihn?> 할 수도 있고 ihm nicht einfach?> 할 수도 있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익히 알고 있듯이 <접촉>을 표현하는 전치사다. 그래서 전자는 교제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편지를 쓴다는 의미가 있고, 반면 후자는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고 그에게 마음을 쏟는 편지를 쓴다는 의미가 있다. (Harald Weinrich, 2007, 622f 참조.) 그래서 여기서 에는 <다리를 놓다/중개하다/매개하다>라는 의미가 묻어있다. 이렇게 보면 위의 추측, 즉 주어로 사용된 <의식>이 자기소외운동을 통해서 자기와 멀어지고 이렇게 멀어진 자기와 다시 소통한다는 추측이 그다지 틀린 추측이 아닌 것 같다. 은 또 <어떤 것의 표면에>라는 의미가 있는데 하면 표면적으로 붓을 들고서 그림을 그린 때는 언제였나 물어보는 질문이다. 반면 하면 목적의식적 행위의 대상으로서의 그림을 언제 완성했느냐의 의미가 있다. 이런 자기소외적인 관계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프로세스를 <조금만 더 파헤쳐보면 의식은 자신과 씨름 하는 가운데 매번 필요한 잣대들을 스스로 마련한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나는데>라고 옮겨보았다.

[3] 원문 는 나중에 따로 고찰해 보겠다, 여기서는 이정도로 번역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다.

[4] an sich

[5] 원문 . 여기서도 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아주 쉽게 물리적인 돌리는 힘으로 이해하고 <어디로 향하게 하는 힘>이라는 의미로 옮겼다.

[6] 원문 . 역자주 참조

[7] 원문 . 정말 바라보기만 하는지 강제하는지 나중에 엄밀하게 살펴봐야 할 문제다.

[8] 원문 .

[9] 원문

[10] 원문 üreinanderessein>

[11] 원문

[12] 원문 . 역자는 훗셀의 의 의미에 주목한 것 같다.

[13] 원문 ür sich>. ür sich>는 자기자신을 완전히 전개하고 정신으로 승화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지를 관조하는 우리가 취해서 하는 마음가짐(Verhaltungsweise)에 더 주목하는 것 같다. 이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은 헤겔이 대신에 를 사용한데 있다. 그래서 ür sich>을 옮기는데 <무엇> 초점을 맞추지 않고 <어떻게> 해야 의식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의식이란 운동하는 것이라는 면을 부각시키고, 그 운동을 따라 잡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조명해서 <허심탄회>란 낱말을 사용해 보았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서론 §11

(§11) 우리가[1] 이와 같이 준비하고 난 다음[2] 지의 진리를 조사하는 일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의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또 지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즉자적으로[3] 있는 것이 무엇인지[4] 조사하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태는 그리 간단하지 않고, 또 우리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5] 즉, 이 조사에서는 [우리가 잣대로 사용하려고 하는 진리로서의] 즉자적인 것이 우리의 대상, 즉 우리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이[6]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조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즉자는 [지에 대한 즉자가 아니라] 우리에 대하여 있는 지의 모습이다[7]. 우리가 지의 본질이라고[8] 주장하는 것이 지의 진리이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그 본질에 관한 우리의 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9] 이러면 본질 또는 척도는 [지를 관조하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되므로 이 잣대와 비교되고 또 이 비교에 의해 진위여부가 결정되는 대상으로서의 지는 그런 잣대를 꼭 인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1] 누가 조사를 진행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자연적 의식을 비판하는 우리인가 아니면 자연적 의식이 스스로 조사를 진행하는가의 문제다.  

[2] 원문

[3] 원문

[4] 원문 . 이 질문은 §1 같은 것처럼 보인다. 역자는 당시 이것을 소크라테스의 질문방식 의 종속절로 처리하고 넘어갔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철학이 해야 하는 일, 즉 를 실지로 인식하는 일이 여기의 를 알아보는 일을 훨씬 더 뛰어넘는 일로 드러난다. 숙고해야 문제가 되었다.

[5] 원문 . 이하 토론은 <정황적 대인 논증>(argumentum ad hominem)을 사용하는 법적논쟁과 유사하다. <정황적 對人 논증>으로는 예를 들어 <너도 역시>(tu quoque)라는 법리가 있는데 <너는 그러면서 나는 왜 못해>라는 정황에 기대어 상대방에게 논박하는 것이다.

[6] fuer uns

[7] 원문 ür uns>. 여기서 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모습>으로 옮겼다.

[8] 원문

[9] 지를 관조하는 우리의 지나 자연적인 인식의 지나 법리에 입각하여 보면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