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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연대다

 

종종 번역이 뭘까 묻는다. 번역이론으로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번역학이란게 나온다. 그니까 번역과학(Übersetzungswissenschaft)이다. 번역을 여태 경험을 요구하는 기술(Techne), 이론이 있다면 경험담(translation studies) 정도로 생각했는데 웬걸 체계적인 과학이란다.

 

번역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않고, 경험도 풍부하지 않은지라 번역해 놓고도 늘 자신감이 없고 만족하지 못한다.

 

근데 만족할 때가 있다. 이럴 때다.

 

아주 일상적인 표현인데 사전적으로(키케로의 표현을 빌리자면verbum pro verbo) 번역해 놓고 보면 뭔가 아닐 때가 있다. 그럴 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웅성웅성 수많은 독일말, 우리말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다가 독일말 목소리와 우리말 목소리가 딱 만날 때가 있다.

 

이럴 때 번역은 어디를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출발한 양자가 어디서 만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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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의 때로서의 교육

일요일 아침이면 도이취란트라디오(Deutschlandradio)“ 9.30-10.00 연재프로그램 에세이와 담론(Essay & Diskurs)"듣는다.  „인문주의 교육이념이 남긴 빈공간누가 교육 .교양의 정의를 둘러 싼 싸움에서 이길까?(Nach dem humanistischen Vakuum – Wer siegt im Definitionskampf um die Bildung?)“제하 지난 87방송된 베른하르트 타우렉(Bernhard Taureck) 교수의 에세이를 번역.소개한다.

 

[Bildung은 교육.교양으로 번역했다. 교육(Erziehung/Education), 교육학(Pädagogik=어린이를 지도하다) 등은 둘다 수동적이고 강제적인 요소가 있다. 반면 Bildung에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요소가 스며있다. 교육은 시키는 것이지만 교양은 쌓아가는 것이다.]

 

원본

 

남성 화자1:

우리에겐 교육부, 교육정책, 교육계획, 교육개혁, 교육위원회, 교육위임, 교육연구 등이 있다. 교육.교양이 있단 말인가? 교육정책, 교육부 등이 각기 뭘 의미하는지 제시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럼 교육.교양은 뭘 가리키는가? 이 질문엔 아마 말문이 막힐 것이다.

교육.교양이란 많은 이들에게 잘해봤자 외국어능력 정도로 통용된다. 외국어를 할 줄 알면 장점이 있다. 그러나 외국어능력이 없어서 결코 가난에 빠지지는 않는다. 교육.교양은 한 사람이 갖추고 있는 지적 능력에 첨부되는 것 정도로 생각된다. 지적능력 없이 교육.교양이 있을 수 없지만, 지적능력이 있으면 교양을 꼭 갖춰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남성화자 2:

첫째, 인문주의 교육.교양. 이건 이젠 사라져 버린 교육.교양이다.

 

여성 화자:

200여년 전 까지만 해도 독일에 교육정책, 교육개혁 등이 없었다. 대신 교육.교양이 뭘 의미하는지 주저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었다. „인간본성이 자력으로 개발되는 것(Selbstentfaltung des Wesens des Menschen)“이 교육.교양이라고 독일, 아니 유럽에서 공통되게 이야기 되었다.

이어 대답하기를 인간에게는 인간 특유의 본질이 있는데, 이 본질은 대략 „정신과 이성의 지도아래, 그리고 자기와 똑 같은 다른 사람과 조화하고 교류하는 가운데 뭔가를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삶(Antriebe)을 다듬는 것“이라고 하였다.

 

남성 화자 1:

이 대답은 오늘날에 와서 주로 빌헬름 폰 훔볼트란 이름과 함께 이야기 되지만 200년 전에는 상식이었다. 교육.교양에 대한 이런 생각을 교육.교양의 인문주의적 비전 혹은 버전이라고 한다. „인문주의“란 이름은 „사람이면 갖춰야 하는“ 이란 의미의 „humanus“란 라틴어 형용사에서 따 온 것만은 아니다. 인문주의는 뭔가 좀 다른 것을 의향하기도 한다. 인문주의는 인간의 본성, 즉 그 정신성과 사회적 조화를 완벽하게 이룩하여 모든 다른 문화의 모범과 척도가 될 수 있는 문화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모범적인 문화가 고대 희랍-로마 문화였다고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고집한다.

 

여성 화자:

이걸 받아 들이고 따르면 희랍 전설.신화를, 플라톤 철학을, 로마시인 호라티우스의 시를 더 많이 이해하면 할 수록 더 인간이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트로이를 둘러싼 싸움, 소름끼치는 오이디푸스 이야기,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안티고네의 저항 등 희랍 전설.신화는 오늘날까지 틀림없이 현혹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희랍 문화 전체를 개관할 수는 없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이념]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따른다. 희랍어, 라틴어는 수백년 전부터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이런 말들을 사용하는 나라에 가서 그런 말들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배울 수 있는 말들이 아니다. 고대 희랍인이나 로마인이 우리들의 희랍어, 라틴어 실력을 평가하게 된다면 그들은 아마 우리가 희랍어, 라틴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이따금 폭소를 터뜨릴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다시 지구에 나타난다면 그 어떤 희랍어 학자도 그와 정말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라틴어 학자도 케사르와 말을 주고 받는 대화를 성사시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와 케사르는 [뭔 말인가 하려고 애쓰는 상대가]  희랍어, 라틴어 교수가 아니라 실지로는 개그맨일 것이라는 추측으로 상황을 정리할 것이다.

 

남성 화자 1:

여기서 인문주의 교육.교양에 귀결되는 것은 뭔가? 우리가 고대를 다 알아야만 비로서 온전한 인간이 된다면 우리는 겨우 몇 퍼센트 정도의 인간밖에 될 수 없다. 인문주의 교육.교양버전은 우리가 1내지 10퍼센트 정도의 인간만이 되게 한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이 제시하는 교육.교양은 명백하게 어떤 사람도 거기에 축 뒤쳐질 수밖에 없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했던 희랍의사 히포크라테스를 인용하면서 마음을 달랠 수가 있겠다. 또 신들로부터 바위 덩어리를 산꼭대기 위로 굴려 올라가야 하는 벌을 받고 매번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바위덩어리를 놓치는 시시포스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무자비했다라고 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했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인간을 [위에서 이야기 된] 인간 [특유의]  본질로 인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길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 화자:

앞에서 이야기 된 어려움에 다른 어려움이 한 짝이 되어 있다. 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우는 것은 사회에서 발언권이 있는 계층의 특권이었다. 단지 몇몇만이 이런 언어를 배웠다. 그중 다수가 좌절했다. 항상 소수만 끝까지 남았다. 그래서 인문주의 교육.교양이 요구하는 것은 내용상과 실천상의 이중 모순을 갖는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가 고대를 습득함으로써 참다운 인간이 된다면, 이런 습득은 초인간적인 목표가 되고, 우리 모두는 항상 그 목표 달성에 뒤쳐지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고대습득을 통해서 인간존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모든사람이 인문주의적으로 교육.교양을 쌓아가게 해야지 단지 소수만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남성 화자 1:

고대에 대한 지식으로 인간이 된다는 [교육.교양은] 사회가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한 것이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이젠 사라져 버린 교육.교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 교육.교양이 아직도 매력을 행사하는데, 그 매력은 우리가 인문주의 교육.교양에서 멀어지면 멀어 질수록 더 크게 보인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의 말소와 함께 교육.교양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자체가 제거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남성 화자 2:

둘째, 암묵적으로 [관철되는]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의 교육.교양 패러다임

 

여성 화자:

누가 교육을 담당하는가? 교사들인가? 물론이다. 그러나 교사들은 단지 급여를 받으면서 능력주위 사회의 요구를 수용하여 공공기관이 작성한 교육프로그램을 이행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능력주의 사회 그 자체가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회 안에는 견고한 토대를 갖춘 교육.교양의 역량이 있다. 이 역량의 목소리는 사회학, 심리학, 그리고 교육학이 진행하는 연구에서 나오는 목소리다. 상황이 이렇다면 사회엔 이중적인 교육담당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나는 돈, 권력, 그리고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民.公적인 능력주의 사회의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교육과정에 전제되는 것, 그 진행, 그리고 그 결과를 탐구하는사회학, 심리학, 그리고 교육학 일부다.

 

남성 화자 1:

권력, 돈,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영향력을 다른 사회구성원보다 더 많이 소유하는 능력주의 사회의 민.공 세력은 그들의 권력을 효율적인 조직, 상호연대, 엘리트 특유의 자기정당화, 재원 독점, 그리고 꼭 최후 수단으로만 사용되지 않는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으로 견고하게 할 줄 안다. 사회적 권력형성과 권력유지의 과정은 보통 이와 같은 특징을 동반한다.

 

여성 화자:

이런 특징은 [가치]평가적인 차원에서 이야기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사실이다. 사회에는 조직적으로 효율적인 행동을 취하고, 조직원들간 연대하고, 엘리트란 자기이해, 리소스 독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그룹들이 있다. 여기서 기술되는 것은 무슨 범죄집단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있는 아주 평범한 사회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용되는 무력은 예를 들자면 승진방해, 이직, 정직, 아니면 단순하게 해고 등이다. 위협 자체가 무력의 일부를 이룬다. 위협하면 이직, 정직, 해고 등에 대한 불안으로 번뇌한다는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참여하기로 동의한 사회적 관계에서 요구되는 것을 충족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되는 것에 대한 불안.번뇌(Angst)다.

 

남성 화자 1:

그렇다고 해서 권력, 돈, 그리고 대중매체 영향력을 점유하는 사람들이 [지들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도 역시 [지배적인 사회이념으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 사회이념을] 나름대로 고려해야 하는 일정한 숙제로(vorgaben)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권력, 소유자산, 대중매체를 통한 영향력 등 그들의 지위를 상실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준수해야  하는 보편주위란 법적 제한을 받는 다는 것도 알고있다. 그들은 이 보편주의를 다른  이질적인 사회일 경우 항상 요구한다. 모든 사람은 똑 같이 여러 권리와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과 자산소유자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인권의 보편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특권을 보호한다.

 

여성 화자:

권력자와 자산소유자는 말하기를 인권은 보편적으로 유효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사회는 어쩔 수  없이 제한된구성원으로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전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해서 자국민에게도 복지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그들은 그들에게 표를 던져주는 유권자(Klientel)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정상이고 심지어 그렇게 해야 좋다고 줄지어 이야기 한다. 보편성에 대한 진정어린 고백이 강력한 자기이익 보호주의와 한 짝이 되는 순간이다.

 

남성 화자 1:

교육.교양에 대한 어떤 생각이 이 능력주의 사회그룹에 부합할까? 이 답은 아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교육.교양은 가치 높은 재산(ein hohes Gut)이다. 아니 가치평가의 원천 그 자체다(die ursprünglichste Wertschätzung überhaupt). 교육.교양이 가장 원천적인 가치평가 를 제시하기 때문에 가치생산에 기반하는 경제사회가(in einer ökonomischen Verwertungsgesellschaft) 절대 상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관철시킨다. 그들의 교육.교양을 말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가치평가로서의 교육.교양은 가격평가를 포함해야 한다. 교육.교양은 [차후] 소득을 보장하는 가치인증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견해로 보면 시험점수 혹은 학교성적은 교육.교양의 가치인증에 필수적인 구성요소가 되고, 이렇게 교육.교양의 가치인증은 주식과 금괴를 유치한 금고와 같이 짜여진다. 교육.교양은 [내가 시험성적 등으로 이미 보여준] 검증된 능력으로서 역량의 형태를 띄고, 이런 역량으로서의 교육.교양은 [차후] 급여의 형태로 내게 돌아올 반대급부를 위한 것이다.

 

여성 화자:

Bachelor라고 일컬어지는 대학의 첫 단계에서는 학기마다 30 점(Credits)을 배당하여, 6학기 동안 180점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여기서 교육.교양은 셀 수 있는 Input이 된다. 그런데 Input과 output의 관계산정이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기업이 Bachelor를 어디서나 환전해 주지 않는다. 게다가 Bachelor로 Master 과정에 진학할 수 있는가를놓고 다투고 있다. 시장경제는 알다시피 유동하고(instabil) 위험이 따른다. 이런 논리는 대학졸업장이란 Output보장[증]  역시 유동성 있게 유지 되어야 한다고 한다.

 

남성 화자 1:

당사자들이 이걸 고분고분 받아 들일까?  [1989년] 유럽전환의 해 이전1988년부터 대학생들이 반복해서 교육파업(Bildungsstreik)에 들어서고, 이에 초.중.고등학생과 학부모들이 합류한다. 그들은 교육.교양 지출이 너무 많이 삭감되었다고 한다. 정부는 유럽전환의 해 이전과 그 이후 어떤 반응을 보여 주고 있는가? 정부는 아무 일 없다고달래면서 눈가리기로 교육에 좀 더 지출하는 척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삭감정책을 펴고 있다. 

 

남성 화자 2:

셋째, 교육관련 학과들의 미미한 항변

 

여성 화자: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교육학 등 교육.교양관련 제2 사회실상(Instanz)은 교육.교양을 현저하게 다르게 본다. 이들간 특히 교육.교양분석에 적합한 방법을 놓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교육.교양에 가치-가격-관계가 통상적으로 적용되는 실정에 대비해 보면, 이들은 그 차이를 소통하여 교육.교양은 뭔가 좀 다른 것이라고 합의할 수 있겠다.  권력과 자산소유 엘리트는 교육.교양과정에서 인간의 지적, 창조적 잠재력이 현실[적인 힘으]로 (Geltung) 출현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 간과하는 것 같다. 학교수업이 어느 정도 그리고 정말로 그 잠재력을 적절하게 장려하는지, 아니면 대려 왜곡하거나 장려에 실패하는지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학교성적에서 당사자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유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학교성적이 마치 화폐가 유통되듯이 [대학진학 등] 어디엔가 들어갈  수 있는 권리[증으]로 유통된다면, 이건 [분명] 위조화폐일 것이다.

 

남성 화자 1:

권력엘리트가 염려하는 것은 학교가 교육.교양관련 학문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교육.교양관련 학문은 수업을 통해서 학습잠재력이 왜곡되고 돈으로 학습상의 이익을 구매하는 것은 저지되어야  한다고 한다.

 

여성 화자:

교육관련 학문과 권력엘리트간 서로 무시하고 배제하는 게임은 얻을 것이 없고 재미없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권력점유자는 교육.교양관련 학문을 지적으로 당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관련] 학자들은 이런 장점을 활용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조그마하기 짝이 없는 실험앞마당을 가꾸는 것에 만족하고(sich beschränken) [저 멀리] 큰 밭은 권력, 돈, 대중매체영향력 소유자들에게 다 내준 상태다.

 

남성 화자 1:

그들의 태도에 전혀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문주의 교육.교양 이후의 모든교육.교양은 더 이상 예전처럼 총체적인 성격(umfassender Zug)을 띄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교양은 [내가 시험성적 등으로 보여준]  능력으로, 즉 이런 역량의 대가로 내게 돌아 올 반대급부, 즉 급여로 이해 될 뿐이다.

 

남성 화자 2:

넷째, 특권으로서의 교육.교양과 철학에 기반한 교육.교양간의 대립

 

여성 화자:

교육.교양에 대하여 총체적인 안목으로(im Ganzen) 평가할 수 있는 다른 사회실상은 없는가? 있다. 예술활동, 그리고 철학적 사유가 그것이다. 이런 말은 들으면 공론장에 등장하기를 꺼리는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의 구성원은 틀림없이 흐뭇해 할 것이다. 예술적, 그리고 철학적 활동!  이건 그들이 보기 좋아하고,기꺼이 장려하고, 인용하고, [궁에] 초대하여 상을주는 문화를 생산하는 소수다. 이들은 절대 불편하게 하기 않기 때문에 잡아다가 감옥에 처 넣을 필요가 없다. 대려 자유롭게 내버려두는데, [궁정] 광대이기 때문이다.

 

남성 화자 1: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류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교육.교양이 그들을 죽음과 화해시켰기 때문이다. 아무런 사치품 없이 살면서 정복자에게 햇빛 가리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은 디오게네스류의 사람들이다. 법이란 가면을 둘러 쓴 폭군을 폭로하는 사람들은 안티고네류의 사람들이다. 자신을 장교로 착각하고 [배타적인 개인]소유 없이 마음의 조화를 재료로 하여 건설될 새로운 황금시대를 되돌려주는 사람들은 이리저리 떠도는 (nomadisch) 돈키호테류의 사람들이다. 정도에서 빗나간 시대를 바로 잡으려고 길에 오르는 사람들은 햄릿류의 사람들이다. 인간살육(Menschenschlachtung)의 제국을 인간존중(Menschenachtung)의 제국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괴테의 이피케니류의 사람들이다.

 

여성 화자:

예를 들어 살펴보자. 풍자가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건 1789년 프랑스에서그랬던 것처럼 오직 저들이 이미 위기에 빠져 있을 때만 그렇다. 당시 희극에서 하인 피가로가 주인의 초야권에 반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때가 아니면 풍자가 까고 또 까도 권력엘리트는 이에 개의치 않고 예전과 다름없이 행동한다. 이건 스페인의 영화대가이며 초현실주의를 추종한 루이 브누엘 감독의 1972년 작품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La charme dicret de la bourgeoisie>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부르주아를 환영(Fantasma)에 쫓기고, 그 환영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여준다. 자진해체(Selbstauflösung) 된다는 환영이다. 요리와 성적 쾌락 등 욕망 대상을 즐길 겨를이 더 이상 없다. 코카인을 매매하면서 테러와 카운터테러로 범벅 된 길을 목적없이 배회한다. 권력-돈 엘리트는교육.교양의 저편에서 행동한다. 교육.교양은 이미 소득과 교환해 버린  것이다.

 

남성 화자 1:

이 영화는 영화사의 대작으로서 우리 문화의 일부다. 그리고 자진해체의 환영은? 그 영화가 제작된지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어쩌면 브누엘 감독이 意圖했던 것을 따라, 어쩌면 자기가  민주주의의 기둥이라는 권력엘리트의 자기이해의 연장선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브누엘의 영화에서는 아직 부르주아가 그들을 떠나지 않고 귀찮게 하는 자진해체라는 환영때문에 행위 무능하게 보이지만 오늘날에 와선 모든 것이 달라졌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자진해체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연출에서 질서유지세력(Ordnungsmacht)으로 등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금융-경제위기도 양면성이 있다. 이런 위기는 전체시스템을 위협하는 영역이지만 동시에 전체시스템을 구조하는 영역(Ort)도 된다.

 

여성 화자:

이 모든 것은 교육.교양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에게 교육.교양이란 물질적인 output을 위한 비물질적인 Input일 뿐이다. 비물질적인교육.교양input의 저편에서는 현실(Wirklichkeit)이 조작된다. 이건 새로운 통찰이 아니라고 한마디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이런 조작에 새로운 위협적인 요소가(Züge) 결합되어 있다. 권력엘리트는그들의 종말에 대한 위험을 알고 있다. 그들은 곧 죽을 것이라고 통보받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산다는 것을 믿는 가운데 자신들의 신변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권력엘리트는 민주주의를 살아남는 것이 관심거리다. 권력엘리트는 점점 더 세상은 교육.교양저편에 있고, 조작 가능한 모든 것이라는 확신에 빠질 수도 있다.

 

남성 화자 1:

그럼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에 대립하는교육.교양의 사회실상으로서(Gengeninstanz) 예술적 철학적 활동이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가 임의적으로 점점 더 전권을 갈취하는(Selbstermächtigung) 상황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뭔가라는 질문은 당연하다. 예술적, 철학적 옵션이 교육.교양에 대한 정의를 내릴 아무런 권력, 돈, 대중매체에 기반한 영향력, 실증적인 절차(empirisches Verfahren) 등이 없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부정적인 기술은 이 정도면 되겠는데 긍정적으로 표기할 수는 없을까?

 

여성 화자: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가능한 것을 모델링하는 것이 교육.교양이다. 이것이 예술적, 철학적 활동이 교육.교양테마관련 기여하는 긍정적인 것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권력엘리트는 대대적인 조작[세계]로 부상하기 위해서 교육.교양을 졸업한다. 이 조작의 목적은 그들의 해체를 연출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생명을 보존하는데 있다고 해야겠다. 이렇게 가짜를 생산하는 조작에 모델링은 대립되는 것이 아닐까.

 

남성 화자 1:

가능한 것의 모델링? 이 교육.교양정의가 공론장에서 토론된다면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처음엔 아무런 문제를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역으로 좋다고 할 것이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이런 교육.교양에서 픽션텍스트의 해석을 포함한 음학적인 과목이 목적하는 것 정도를  볼 것이다. [그들은] 가능한 것의 모델링도 [성적 등의 인증을 거쳐서] 소득요구에 근거를 제시하는 비물질적인 교육.교양의 일부로 [여긴다]. 하지만 사태가 그리 단순하지는만은 않다. 권력엘리트는 여기서 뭔가를 혼동하고 있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가능한 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예술, 음악, 문학수업은 그들이 보기에 비현실적인 것을 다룬다. 이건 성적을 통해서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 화자:

이런 자리에 철학적 사유가 참여하면 가능한 것의 모델링은 한편으로는 비현실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안티고네는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녀에게 편지를 쓸 수 없고, 그녀를 만날 수 도 없으며, 그녀와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방식, 국법에 대한 저항, 그리고 그런 법이 독재자의 폭군적인 의지일 뿐이라는폭로 등은 모든 사람이 가능한 행위로 생각하고 가능에서 현실로 옮길 수 있는 행위다. 그래서 안티고네-읽기는 비무력적, 무력적(zivil und nicht zivil) 불순종을 야기할 수 있다.

 

남성 화자 1: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항상 자신들이 청소년소녀, 문화, 교육.교양을 장려하고 관대하다는 소식을 널리 알린다. 하지만 관대는사회도 보호해야  한다고 한다. 학교는 불순종의 학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적나라하게 보면 저 결합체는 그들에게 위협할 수 있는 [공]권력이 있다는 것이다.

 

여성 화자:

공론장에 발동이 걸려 토론이 진행된다는 전제 아래 가능한 것의 모델링이 교육.교양이라고 정의하려는 노력은 첨예화될 수도 있다. 질서[유지명령권] 소유자는 순종을 요구한다. „생각은 모든 사람이 지 알아서 해도 되지만, 순종은 달리 해야 한다.“(„Jeder denke selber, aber er gehorche!“)라고 칸트가 프로이센 계몽주의를 대변해서 말했다. 계몽주의 절대군주는 법에 대한 순종의 대가로 생각의 자유를 허락했다. 이와 달리 민주주의는 지배가 인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민을 통해서 행해진다는 것에 기반한다. 그래서 모두에게서 나와서 모두를 굽히는 일반의지가 요구된다. 이것이 모든 사람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게하는 민주주의 사회계약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세운 규율을 준수한다. 그러나 이것은 루소가 이미 명백하게 인식하였듯이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민주적인 사회계약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권력엘리트의 손으로 떨어진다. 그들은 일반질서 대변자로 행세하면서 순종하라고 명령한다.

 

남성 화자 1: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는 일반질서는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앞에서 이미 지적한데 있다. 전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주의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자국민복지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몇몇 시민이 그들이 소유하는 부때문에 다른 시민들보다 더 쓸모있기 때문에 보편주의에 대한 냉대한 인정은 소수를 감싸고 도는 뜨거운 보호와 한 짝을 이룬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전인류의 이름으로 특권자들의 일(Sache)을 공표하고 추진할 줄 안다. 이런 권력의 한 리소스는 교육.교양이란  [내가 이미 보여준] 검증된 비물질적인 능력이 차후 소득이라는 물질적인 반대급부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이해다. 특권자들을 위한 교육.교양이다. 앞에서 지적한 철학적 시각은 이에 대립된다. 교육.교양이란 모든 사람을 위한 가능한 것의 모델링이다. 이때 가능한 것이란 기존질서에 의문을 제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여성 화자:

이렇게 되면 특권자들을 위한 특권으로서의 교육.교양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가능한 것의 모델링으로서의 교육.교양간의 대립이 확연해 질 것이다. 이런 대립이 없다고 하거나 침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립은 다시 출현하거나 아니면 예전보다 더 큰소리로 이야기 될 것이다. 시스템은 이 대립을 권력점유자에게 유리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그들의 해체를 연출하여 시스템을 존속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연장하려는 시도는 여기서 작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진해체의 연출을 권력엘리트가 스스로 [기획하고]  착수 했을 때만 작동하는 것이다. 불만에 가득 찬 남녀학생들이, 내외적인 압박에 감응저항을 보이는 남녀교사들이 저항의 가능성을 모델링하는데 정성을 다 쏟는다면 그들은  [권력-돈-대중매체결합체]의 조정을 받지 않는 판을 깨는 파손자가 된다.

 

남성 화자 1:

초인간적인, 소수에 적용되는 인문주의 교육.교양이 사라진 후 교육.교양은 지속적으로 고소득에 접근하는 특권으로 이행 가능하게 하게끔 교육정책, 교육개혁, 교육계획 등을 완전히 행정적으로 관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가상은 기만이다. 민주사회에서 교육.교양은 소수의 특권과 모든 사람을 위한 가능성모델링이란 대립을 빗을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교육.교양의 정의는 전혀 자명한 것이 아니다. 또 말없는 권력행사(Machtsetzungen)로 단락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 화자:

언제 이 대립이 나타나는가?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가 교육.교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공공연히 이야기되는 순간 이 대립은 나타난다. 사실적으로(faktisch) 관철된 교육.교양정의에 대한 일괄적인 침묵을깨는 순간 이 대립은 나타난다. 교육.교양정의에 대한 침묵의 종말과 함께 비로서 교육.교양을 둘러 싼 정의에 대한 경쟁이 일어날 수 있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이 문제를 잘 처리하여(sorgen) 지금까지 침묵을 키키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자신의 지적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말하는 것이 그들의 강점이 아니다.

 

남성 화자 2:

다섯째: 선입관 파괴로서의 교육.교양?

 

남성 화자 1:

교육.교양은 가능한 것을 모델링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교육.교양은 가능한 것의 현실적인 모델링으로 진행된다. 현실적인 모델링이란 아무도 혼자 떨어져서 교육.교양을 쌓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교육.교양은 주기 전에 먼저 뭔가를 취한다.  괴테의 토르쿠와토 타쏘를 인용하자면 „어떤 이가 무엇이 되는 것은 내내 갚을 수 없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다.“ 모델링은 함께, 공유하는 것을 위해서 진행된다. 가능한 것의 현실적인 모델링은 그래서 사회적인 플라스마다.

 

여성 화자:

사회적 플라스마란 의미로서의 교육.교양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조그만 스토리 하나 를  이야기하겠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이야기되는 동굴비유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이 이야기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시사적인 이야기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이 이야기를 현대화하여 현실적인 모델링으로 새롭게 발견하지 못했다.

 

남성 화자 1:

우리는 모두 다 고정관념에 쇠사슬로 묶여있다.  저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을 우리는 진실로 여긴다. 신문, TV 채널, 인터넷사이트 등은 뭐가 사실인지 신뢰할 수 있게 제공한다.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우리는 사물과 사람의 그림자를 사물과 사람으로 여기는데, 우린 기꺼이 장님이 되어 이런 오인에 빠진다.

 

여성 화자: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우리는 지식사회에서 산다고 한다. 그러나 지식이 뭔지 제시할 수 있는가? 우리는 보통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뭔가를 안다고 믿는다라고. 우리는 지식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믿는다. 믿음과 앎이 뒤섞인 참 이상야릇한 표현이다. 믿는다라는 것이 그렇지 않다는 근거들을 무효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뭔가가 이렇고 저렇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면 뭘 의미하겠는가. 반면 내가 뭔가를 알면, 반대근거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뭔가를 긍정하는 것이다.  앎과 믿음은 이렇게 비교적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어 [따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최대 악질은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이란 믿음 외 다른 것이 아닌데 앎의 행세를 하는 것이다.

 

남성 화자 1:

고정관념의 쇠사슬은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둔함, 관습, 그리고 게으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단 하나의 인식판단만 있으며 그 사슬은 나노 초에  파괴된다. 가능한 것을 현실적으로 모델링하는 것은 우둔함, 관습, 그리고 게으름으로 만들어진 쇠사슬을 깨부수는 파괴에서 시작된다. 나의 나노 초가 너의 나노 초가 되고 또그의 나노 초가 된다. 근데 아직 사슬에 묶여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숨통을 죄어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지들이 뭐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우리는 뭐라고? 그림자? 그림자가 그림자를 질식시키겠다고?

 

여성 화자:

소리높여 외치자.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한다. 그러면 나노 초에 일어나는  파괴의 한 순간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는]파괴의 때가 될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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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1 (다시 읽은 것을 다시 읽기 - 첫번째 두 문장)

II. 지각[1]; 더 정확히 말해서[2] 사물과 착각[3]

 

(§1) 대상에 찰싹 붙어있는 확신은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망태에] 담은 것을 놓고 자기가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4]왜냐하면, 그가 [망태에] 담게 되는 것은[5]항상[6] 보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장대 끝에 달린] <이것>을 [포기하지 않고] 취하려고 욕망하기[7]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각은 [현실{원칙}에 충실하여]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을[8] 보편적인 것으로[9] 받아들인다.



[1]여기서 <Wahrnehmung>이 영어 <sensation>과 <perception>이, 즉 <impression>으로서의 수동적인 것과 <perception>으로서의 능동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는 것 같다. <감각적 확신> 마지막 문장에서 <Wahrnehmung>이 한편으로는 <aufnehmen>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aufzeigen>으로 등장한다. <aufnehmen>은 수동적인 <impression>으로, <aufzeigen>은 능동적인 <perception>으로 이해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2]원문 <oder/혹은>을 이렇게 번역해 보았다.

[3]원문 <Täuschung>. <착각>으로 번역해야 하는지 아니면<기만>으로 번역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아낙사고라스 등은 지각(aesthesis)을<pseudeis>, 즉 기만적이라고 한다[철학개념사사전의Artikel <Wahrnehmung> 참조]. 그런가 하면 케네스 웨스트팔(Kenneth R. Westhphal)은 헤겔이<정신현상학>을 쓰기 전에 흄(David Hume)의<인성론>, 그 중에서 특히4권2부<Of sceptism with regard to senses>를 읽었을 것이라고 한다. [Kenneth Kenneht R. Westphal: Hegel, Hume und die Identitaet wahrnembarer Dinge, 1998 참조]. 그렇다면<Täuschung>은<illusion>의 번역이 될 텐데, <illusion>은<착각>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기만>이 능동적인 행위라면<착각>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한다.

[4]이 번역은 <정신현상학>을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린 번역이다. 정신현상학이 단지 의식이 진보하는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이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던 것을 정말 갖다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행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호롱불이 없어서 밤이면 어두운 방에서 바느질하는 순이네 엄마 곁에 갖다 주려고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에 올라 달을 딴 아이들의 망태에 달이 들어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기가 된 번역이다. 이런 동기의 연장선에서 첫 문장<Die Unmittelbare Gewissheit nimmt sich nicht das Wahre, …>을 어떻게 이해하고 번역해야 할지 고민했다. <das Wahre>를 <참다운 것>, 혹은 <진리>로 번역하면 직접적 확신이 참다운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데 [임석진 번역 참조], 이건 받아들일 수 없다. 직접적 확신이 찍어 담는 것이 결국 추상적인 보편성이라 할지라고 그게 참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려 바로 그런 보편성이, <Das Ganze ist das Unwahre>라고 한 <부정 변증법>의 아도르노에 기대에, 참답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보편성이 참다운 것이라고 할지라고 그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날 행복하게 해주는 것, 또는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추상적인 보편성>이 아니라 <그때 그사람>, 혹은 <그때 그것>, 즉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기 때문에, 즉 직접적 확신이 지향하는 것이 참다운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das Wahre>의 이해와 번역이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 확신에 참답지 않는 요소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직접적 확신의 비진리성은 수행적 자기모순과 유사하게 행위의 意圖와 결과가 일치하지 않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과 동기 때문에 <das Wahre>를 <참다운 것>으로 번역하지 않고 <bewahren/보존하다>, <das Gesicht wahren/체면을 지키다> 등에 기대어 <[망태에] 담은 것/담게 되는 것>으로 번역했다.

[5]원문 <ihre Wahrheit/진리>.

[6]여기서 사용되는 현재형 시제를 역사적인 현재형으로 이해하고 <항상>, 그리고 <언제나>로 보충했다. 문제는 이 <항상>이 시시포스적인 반복의 역사인지 아니면 <그때>로 표현되는 성취(Erfüllung)가 스며있는(eingelassen) 역사인지 판가름하는데 있다. <정신현상학>이 다루는 문제가 이 문제가 아닌가 한다. 관련 <그때>의 시간성도 문제가 된다. 이 시간성은 독어 <einst>에서 처럼 지나간 <그때>인지, 앞으로 올 <그때>인지, 아니면 역사의 밑바닥에 줄곧 깔려있는(eingelassen) <그때>인지 부동한다. <das Wahre>를 <담은 것>으로, <die Wahrheit>를 <담게 되는 것>으로 옮긴 번역에도 이런 부동(浮動/Schweben)이 반영되어 있다.

[7]원문의 <wollen>을 <욕망하다>로 옮겼다. 직접적 확신의 행위를 욕망의 범주에 놓고 보면 역주 3에서 이야기된 모순은 직접적 확신의 욕망에 내재하는 모순이 되는 것 같다. 직접적 확신이 보편성을 대리만족(Ersatzbefriedigung)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이면 정상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리는 것인가?

[8]원문 <was ihr das Seiende ist>. 여기서 <das Seiende>는 역주 7의 연장선에서 현실원칙을 받아들인 터전에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번역했다.

[9]<Allgemeines>는 <감각적 확신> §7에서 이렇게 정의된다. “Ein solches Einfaches, das durch Negation ist, weder Dieses noch Jenes, ein Nichtdieses, und ebenso gleichgueltig, auch Dieses wie Jenes zu sein, nennen wir ein Allgemeines. (부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이와 같은 단순한 것,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딱 찍어 잡아 들어 보여줄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여기에 개의치 않고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가운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을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이어 § 21에서 „ein einfaches Zusammen vieler/다수가 [한군데] 하나로 모여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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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받기

얼마 전 아주 대조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서)베를린 비텐베르크플라쯔 근방에 있는 베트남 수퍼 <빈로이>에 시장 보러 가다가 눈에 띈 광경이다.

 

초여름이지만 햇살이 따가운 토요일이다. 정오의 햇빛을 피해 60이 훨씬 넘어보이는 노숙자가 모자를 앞에 놓고 나무그늘아래 편히 앉아있다.

 

<빈로이>는 현찰거래만 하는데, 그날도 현찰이 없어서 KDW 백화점 맞은 편 길 모퉁이에 있는 <도이춰 방크>에서 현금을 뽑으러 가다가 무심코 본 광경이다.

 

길을 돌아서자 토요일이면 항상 은행 문 앞에서 동냥하는 아저씨가 문을 열어 재키고선 4번째 자동인출기는 고장이 났으니 다른 인출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고객서비스(?)를 한다. 휠체어에 앉아서 업무시간외에는 카드로 문을 따야 하는 번거러움을 덜어주는 서비스를 하는 아저씨다.

 

순간 동냥하는 두 모습이 아주 대조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한 사람은 주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편히 앉아있는데 다른 사람은 뭔가를 제공하면서 그 대가를 바란다.

 

마음이 불편하다. 주든 말든 내 맘인데 원하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뭔가를 바라는 다소 적극적인 동냥방법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아니 이런 마음의 불편을 노린다는 생각이 들자 화도 좀 난다. <Do ut des/너에게서 받으려고 [먼저] 준다>라는 거래의 논리가 거래의 영역이 아닌 곳에까지 침투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주고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냥 주고 그냥 받을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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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남성의 상상 - 보토 슈트라우스

„나는 Nadja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살을 다 드러낸 팔을 내게로 뻗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한번 더 쓰다듬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순간 그녀의 팔이 내 엉덩이를 감쌌다. 그녀는 남성이 사랑하는 여성이 아니었다.  반면 끝없이 곁에 두고 싶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원천적인 욕망(das Ursprüngiche des Wollens)과 엇갈리는 사랑의 감정과는(die Zwiespältigkeit der Liebe) 거리가 먼(fremd) 여성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모든 것에 무위로 일관하는(Gleichgültige) 그런 여성은 아니었다. 상처를 받으면 분명 비명을 지를 그런 여성이었다. 물론, 그녀에겐 아무것도 당장 처리해야 하는 시급한 것이 없었고, [내가] 다른 여성을 애무하는 동안 묵묵히 기다렸을 것이지만 말이다. 지금와서 보면 그녀는 수정과 같이 맑은 산의 시냇물속에서 좌우로 사뿐히 흔들리는 풀과  같았다. 정말 그랬다. 지금까지 마주하고 경험했던 모든 사랑의 종류에서 그녀의 만짐은, 비교하자면, 에워싸는 식물의 덩굴(Umrankung einer Pflanze)과 같았다.

아무튼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녀에게 앗아 취하려는 욕심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불감증에 걸려 사랑을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항상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뭔가 좀 뚜렷한 것이 없고,  너무 부드러운, 어쩌면 생식역사에 죽음과 섹스가 등장하기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무척추동물식의 사랑이었지만 말이다. 아름답게 뿌리내린(schön Angewachsene) 그녀와의 사랑은 이러했다. 그녀는 만짐을 통해서, 그리고 만져짐으로써 살아가는 여성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딘가에 정열적으로 푹 빠지는(hingerissen) 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어딘가에 정열적으로 푹 빠진다는 것은 그녀가 뿌리를 내리고 영양소를 섭취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터전에서 통째로 뽑혀 나오는 것과 같은(wie herausgerissen)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를 그 터전에서 뽑아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기 전에 이미 모든 이를 그녀의 어렴풋한 사랑에(in das Halb und Halb ihrer Liebe) 초대하여그녀와 유사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조심스러움으로(Vorsicht), 그리고 그녀 외 다른 사람들 사이엔남아 있지 않아 찾아볼 수 없는, 머리로는 다다를 수 없는(unvordenklich) 아낌과보살핌(Schonen)으로 감염시켰지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와 작별했다.“

(Botho Strauß, die Unbeholfenen(어설픈 사람들), dtv, S. 122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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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과 촉각의 확신

알츠하이머 작가 윌리엄 워터몰렌의 자화상 - 사라지는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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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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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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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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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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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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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감관은 어떤 것일까. 후각과 온 몸, 특히 손에 있는  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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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다시읽기) §1

II. 지각Wahrnehmung1;

 

사물Ding2과 착각Täuschung3

 

(§1) 대상에 찰싹 붙어있는unmittelbar 확신은 뭔가를 취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참으로 취하지 못한다.4 왜냐하면, 그가 [망태에] 담게 되는 것은 항상5 보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장대 끝에 달린] <이것>을das Diese 포기하지 않고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각은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을6 보편적인 것으로Allgemeines7 받아들인다. [감각적 확신과 달리] 지각은 [이렇게] 온통8 보편성의 지배를9 받는 터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지각 안에서 바로unmittelbar 구별되는 두 갈래의 축도Momente 역시 항상 보편적인 것이다. 즉 <나>라는 것은 항상 보편자로서의 자아이며 <나>가 마주하는 대상 역시 항상 보편자로서의 대상인 것이다. [보편성이 지각의 존재근거가 된다]라는 원리는 [헤겔/우리가 감각적 확신을 관조하는 가운데] 생성되어 헤겔/우리 앞에10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지각에 대한 헤겔/우리의 태도는 더 이상 [갓 등장하는] 감각적 확신에서와 같지 않다. 거기서는 헤겔/우리 역시 갓 등장하였는바, [감각적 확신과 눈높이를 같이하고 애 달래듯] 그가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ein erscheinendes Aufnehmen. 그러나 이젠 그런 수용이 아니라 [지각을 관통하는 엄연한] 필연성에 따른 수용이ein notwendiges [Aufnehmen] 되었다. 이런 [필연성으로서의] 원리의 발생과 동시에 [위에서 이야기한] 두 갈래의 축이die beiden Momente 감각적 확신의 등장에서는an ihrer Erscheinung11 단지 헤겔/우리가 감각적 확신을 쿡쿡 찔러서 밖으로 떨어져 나오게 한 것이지만 [지각에 와서는] 생성된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두 갈래 축의 하나는 뭔가를 들어올려 보여주는 [이리저리 갈라지는] 운동의die Bewegung des Aufzeigens [결과로] 생성된 것이고, 다른 하나 역시 똑 같은 운동의 [결과로] 생성된 것인데, 단지12 [<이것> <저것>을 들여올려 보여주고 보여주는 가운데에도 이리저리 갈라지지 않는] 단일체로Einfaches 생성된 것이다. 전자가 지각함이고das Wahrnehmen 후자가 지각함이 마주하는 대상이다Gegenstand. 대상은 본질적으로 [지각하는] 운동[의 속성]과was die Bewegung ist 동일한 것이다.13 지각하는 운동은 [통시적인 그때그때마다의, 아니면 공시적인 가지갖가지의??] Momente14 전개하고 구별하는 것이고 대상은 이런Momente들이 함께 묶여있는Zusammengefaßtsein 것이다. 우리만 알고 지각은 모르지만für uns oder an sich 지각의 존재근거가Prinzip 되는 보편성[만]이 [모든 것을 두루 관통하는] 본질/바탕이Wesen 된다. 이런 [존재근거로서의 원칙이라는] 추상의 터전에서 일어나는 지각에서 구별되는 양대 축, 즉 지각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은 이에 비해 부수적인 것에Unwesentliche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양쪽 다 [보편성을 집행하는 것으로서] 실제로는 보편적인 것, 즉 본질이므로 둘 다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지각 안에서는] 양대 축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관계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둘 중 하나만이 꼰대/본질적인 것일das Wesentliche 수밖에 없고, 꼰대das Wesentliche와 들러리das Unwesentliche라는 차이가 이쪽 저쪽으로 나뉘어 질 수밖에 없다. 이중 단일체로das Einfache15 규정되는 쪽, 즉 대상이 꼰대가das Wesen 되고, 이런 대상은 지각되든 안되든 지각함에 구애 받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반면, 지각함은 운동으로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내구성이 없는 들러리가das Unwesentliche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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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서 <Wahrnehmung>은 <sensation>과 <perception>, 즉 <impression>으로서의 수동적인 것과 <perception>으로서의 능동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는 것 같다. <감각적 확신> 마지막 문장에서 <Wahrnehmung>이 한편으로는 <aufnehmen>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aufzeigen>으로 등장한다. <aufnehmen>은 수동적인 <impression>으로, <aufzeigen>은 능동적인 <perception>으로 이해해도 되는지 모르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여기서 <Ding>은 <감각적인 확신>의 결과로 나타난 <보편자/das Allgemeine>를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하다. 근데 이 <보편자=Ding>가 <지각>의 저편[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각> 내재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여기서 <착각>의 주체가 누군지 궁금하다. <immpression>으로서의 <지각>은 착각일 수 없다. <짠 맛>에 착각이 있을 수 없다. 그럼 <착각>은 어디서 일어나는 사건인가? <perception>으로서의 <지각>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지각> 저편에 있는 [지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뭔가를 잘못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각 내재적으로 대상이 되는 <Ding>에서 [회피할 수 없는 논리적/필연적인??] 착각이 있다는 말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4. 이 번역은 <정신현상학>을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고자 싶어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린 번역이다. 정신현상학이 단지 의식이 진보하는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이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던 것을 정말 갖다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불을 못 켜서 밤이면 바느질을 못하는 순이네 엄마의 방에 갖다 주려고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에 올라 달을 딴 아이들의 망태에 달이 들어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ihre Wahrheit>. <진리>의 한 요소인 <영구성>을 [pars pro toto 식으로] <항상>으로 옮겼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was ihr das Seiende ist/지각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 역주 2)에서 이야기 된 내용의 연장선에서 여기서 <das Seiende/존재하는 것>은 지각의 대상이란 의미다. 이것이 <자신>과 <대상>을 분리하는 <지각>의 원초적인 반성(Reflexion)인가?텍스트로 돌아가기
  7. <Allgemeines>는 <감각적 확신> §7에서 이렇게 정의된다. “Ein solches Einfaches, das durch Negation ist, weder Dieses noch Jenes, ein Nichtdieses, und ebenso gleichgueltig, auch Dieses wie Jenes zu sein, nennen wir ein Allgemeines. (부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이와 같은 단순한 것,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딱 찍어 잡아 들어 보여줄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여기에 개의치 않고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가운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을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이어 § 21에서 „ein einfaches Zusammen vieler/다수가 [한군데] 하나로 모여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8. 원문 <überhaupt>텍스트로 돌아가기
  9. 원문 <Prinzip/원리>. <Arche>에 기대어 <지배>라는 의미를 살려 번역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0. 여기서 <우리>가 누구를 포함하는지 불분명하다. 지금까지는 <우리>에 <의식>을 관조하는 헤겔과 철학하는 우리만 속하고 의식, 즉 <감각적 확신>으로서의 의식은 속하지 않았다. 근데 <우리/헤겔>과 똑같이 자기대상을 <보편자>로 알아차린 <지각>으로서의 의식에 와서는 상황이 좀 다르지 않는가? 텍스트로 돌아가기
  11. 여기서 <ihr>가 <감각적 확신>을 지시하는지 아니면 <지각>을 지시하는지 불분명하다. 내용상 <감각적 확신>을 지시하는 것 같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12. 원문 <aber>. 제한적인 의미로서의 <aber>텍스트로 돌아가기
  13. <Der Gegenstand ist dem Wesen nach dasselbe, was die Bewegung ist.> 이 문장은 <정신현상학> <서론> §1에서 인식과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인식론을 비판하고 대상[절대자]가 이미 <an und für sich> 우리 곁에 와 있다고 한 것과 비교해 볼 수 있겠다. 이 테제를 완벽하게 증명하는 것이 어쩌면 <정신현상학>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문장에서 대상과 지각운동(인식)이 <본질적으로/dem Wesen nach> 동일하다는 말은 역으로 (지각에서는) 아직 그렇지 않다는 말인 것 같다. 관조하는 우리만, 즉 <für uns> 혹은 <an sich>적으로만 대상과 지각운동(인식)이 동일하고 <지각운동>은 그것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각에게는 이것이 아직 für sich가 아니다라는] 말이지 않나 한다. 대상과 인식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지각에게 아직 <für sich>가 아니기 때문에 지각이 모순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4. 여기서 이야기되는 <Momente>들이 나중에 <Eigenschaften/성질들>이 되는 것 같은데,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5. 여기서 <das Einfache>는 <das Unbeständige>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자기동일성>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ein einfaches Zusammen vieler>가 이렇게 지각함(=다수)과 대상(=하나)으로 분리되는 것 같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다시 읽기) §7

{헤겔의 볍증법을 폼내다 <지각>을 엉망으로 읽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한 칼로 곪은 것을 좀 찢어야 겠다. 우선 §7부터 교정해 나갈 생각이다.}

 

 

(§7) 이제 의식이 지각행위를 펼쳐가는 가운데 실지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지켜보자. 다만, 지켜보는 우리들은/헤겔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이 전개되는 과정과 또 그 대상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에서 이미 의식이 하는 경험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의식이 어떤 모순에 빠지고 어떻게 허우적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지] 의식의 태도[경험도정]에 널려있는 모순의 전개과정만 살펴보면 된다. — 지각으로서의 자아가 받아들이는 대상은 순수한 일개의 것으로1 제시된다. 의식은 또한 일개로 제시되는 대상에서 보편적인 성질을2 지각한다. 그런데 성질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개성Einzelheit안에 있지 않고 그것의 밖에 있다. 그 결과 의식은 대상으로 자기 곁에 와 있는 것의3 존재양식을4 일개성의 존재양식으로 파악했는데, 그것이 대상의 참다운 존재양식이 아니었다고 하게 된다. 이어 의식은 대상이  참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에 어긋나는 참답지 않는 일은das Unwahre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결론 짖고 자기가 대상을 잘못 파악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의식은 성질의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 대상으로 자기 곁에 와 있는 것을5 [일개가 아니라] 오히려 [같은 종에 속하는 모든 일개성을 관통하는] 공동성으로eineGemeinschaft überhaupt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의식은 여기서 멈출 수 없고 나아가[또한] 다른 대상과 대립하고 그것을 배제하는 제한된bestimmte성질을6 지각하게 된다.7 그 결과 의식은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 다른 것들과의 공동성으로, 달리 표현하면 다른 것들과 이어지는 연속성으로 규정했을 때 사실 잘못 파악했다고 하고, 오히려 성질의 제한성Bestimmtheit der Eigenschaft담아내기 위해서는 연속성을 절단하고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 배타적인 <하나>로ausschließendes Eins자리매김할 수 밖에 없게 된다.8 그런데 이렇게 절단되어 있는 <하나>에서 지각하는 의식은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지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다수의 성질들도9 발견한다.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은 대상을 배타적인 <하나>로 지각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대상은 이젠 오히려 앞에서 이야기된 [같은 종의 개물들을 관통하는] 연속성과die Kontinuität überhaupt 같은 것이 되어, [쓴맛, 크고 작음, 부드러움 등] 감각적인 보편성들로서의10 다수의 성질들이 각기 홀로 있고jede für sich, [각 감각에 따라] 규정된 것으로서 서로 다른 성질을 배척하는 가운데 공존하는 보편적인 매체가allgemeines gemeinschaftliches Medium된다. 그러나 자아가 [예지적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실로 지각하는 것은[쓴맛이면 오로지 쓴맛일 뿐인] 단순하고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으로서11 보편적인 매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따로따로für sich 있는하나하나의einzelne [감각적인] 성질일 뿐이다. 이런 [감각적인] 성질은 성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뭔가 하얀 것>과 같은 구조를 갖는] 특정한 존재가bestimmtes Sein 아니다.12 왜냐하면, [감각적인] 성질은 [tode ti와 같은] 어떤 종이로서의 <하나>에 있는 것도 아닐an einem Eins 뿐만 아니라 [to ti esti와 같은 <ousia>로서의] 다른 것과의 관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성질은 이렇게 오로지 [tode ti와 같은 어떤 종으로서의] <하나>에 달려있거나 [to ti esti와 같은 <ousia>로서의] 다른 것과의 관계 안에 있을 때만 규정되고 [존재하는] 것이다. [뚝 떨어져 홀로 있는 감각적] 성질은 더 이상 스스로 부정[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순수하게 자기자신과만 관계하는것으로dies reine Sichaufsichselbstbeziehen 머무르는, 온통 감각적 존재sinnliches Sein 뿐이다. [이 단계에 오면] 의식은 [결국] 감각적 존재를 대하게 되어 단지 하나의 사념이ein Meinen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은 결국 [예지적?] 지각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일이 따 끝나지 않고 한 쌍을 이루는] 감각적 존재와 사념이Meinen 스스로 지각행위로 다시 넘어간다는 데 있다. 자아는 이렇게 {시시포스가 애써 정상에 굴려 올려놓은 돌이 다시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이 애써 지각한 것이 결국 감각적 존재가 되어 다시 지각의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함께} 원점으로 굴러 떨어져 다시 처음부터 똑 같은 운동을 반복해야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되풀이에Kreislauf 휘말려 들어가 {시시포스가 다음에 돌을 굴려 올라갈 때에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되고 저기서는 저렇게 하면 되고 전체적으로는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좀 쉽게 할 수 없듯이} 매 순간마다의 애씀과 모든 애씀이 아무런 흔적과 결과를 허용하지 않는 파기에 의해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을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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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als rein Einer>.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순수하다>란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대상에서 모든 것이 사상되어(abstrahiert) <휠레/Hyle>와 같은 <뭔가>가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이 <일개>로 제시된다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 된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단지 맛만 감각으로 남아있다고 해보자. 소금의 짠맛을 지각하면서 <일개>라는 것이 과연 의식의 표상으로 나타나는가? 여기서 <일개>라는 것은 시각이 지배적인 역할을 할 때 그런 것 같다. <순수하다>를 모든 것이 사상되어 어떤 언명도 불가능한 상태로 이해하면 <순수한 일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이야기한 개물(個物/Einzelding/Individual)로 이해할 수 있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 1a 19이하에서 명제(Aussage)의 4가지 유형을 토론한다. 언어적인 차원과 존재적인 차원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기서 주어부에 해당하는 것을 <바탕/hypokeimenon>, 그리고 술어부에 해당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to on>이라고 하면서 <to on>과 <hypokeimenon>간의 유형을 1) <x는 사람이다>에서와 같이 <to on/여기서는 사람>이 x(바탕)에 대하여 언명되지만 x(바탕)안에 들어있지 않는 경우, 2) <문법지식/grammatike>이 <혼/>에 들어 있지만 그것에 대하여 언명될 수 없듯이 [<혼은 문법지식이다>하면 말이 안 된다.] <to on/여기서는 문법지식>이 <hypokeimenon/바탕>안에 있는 경우, 3) <지식/episteme>과 같이 <바탕>(예컨대 혼)에 들어있으면서 또한 <바탕>에 대하여 (예컨대 문법지식/grammatikē는 지식이다) 언명되는 경우, 그리고 4) 어떤 <바탕>에도 들어있지 않고 또 그 <바탕>에 대하여 언명되지도 않는 경우, 즉 <여기 이 사람/ho tis anthropos>, 혹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개물/Einzelding/Individual>을 구별한다. 그리고 <개물>로서의 이 네 번째 <to on>을 엄밀하고 첫째가고(protōs) 본래적인 의미로서의 <ousia/“본질“>이라고 한다 (범주론 2a 11).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die Eigenschaft … , die allgemein ist>. 이 표현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형이상학>에 기대어 이해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7권 1028a 10-15에서 <to on>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to ti esti/“이것은 [본질적으로]무엇이냐“에 대한 답>, 2) <tode ti/어떤 종으로서의 이것>, 3) 양과 질, 그리고 4) 양과 질과 같은 방식으로 카테고리가 되는 것들로 구분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되는 <보편적인 성질/allgemeine Eigenschaft>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에서와 같이 <사람>이라는 종으로서 1)에 해당한다고 해야겠다. <보편적인 성질>은 이런 <ousia>로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필연적인 성질/essentielle Eigenschaft>이다. 이런 성질은 <범주론>에서 보았듯이 <소크라테스>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das gegenständliche Wesen>. 여기서 <Wesen>을 <Anwesenheit>란 의미로 번역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 원문 <das Sein>. 여기서 <Sein>은 <ousia>란 의미인 것 같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das gegenständliche Wesen>. 위와 마찬가지로 <Wesen>을 <Anwesenheit>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6. 여기서 <Eigenschaft>는 <to ti esti/본질적인 성질>이 될 수 없다. 그럼 어떤 성질인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구별하는 성질이 아닌가 한다. 두 대상을 연결하는 것이 둘 다 똑 같은 사람이라는 <to ti esti>였다면, 이 둘을 구별하고 서로 배제하는 것은 <몸>으로 매개된 <Diesdaheit/여기 이것 성(性)>가 아닌가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7. 원문 <Ich nehme nun ferner die Eigenschaft wahr als bestimmte, anderem entgegengesetzte und es ausschließende>. 알쏭달쏭한 문장이다. 여기서 <Eigenschaft>는 뭐고 또 <Eingenschaft als bestimmte>란 무슨 말인지, 그리고 뭐하고 어떻게 대립하고 배제한다는 말인지 알쏭달쏭하다. 우선 짚고 넘어가자면 성질과 다른 성질이 대립한다는 번역은 분명 오류인 것 같다. 문법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질과 성질이 대립한다고 하려면 <anderem>이 아니라 여성인 <Eigenschaft>를 받는 여성형 <anderer>나 복수형 <anderen>이 와야 한다. 근데 남성형 <anderem>이 와 있다. <anderem>이 다시 중성 <es>로 받아지는 것을 보면 <anderem>은 <gegenständliches Wesen>을 지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tode ti>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8. 이 <배타적인 하나>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tode ti/어떤 종으로서의 이것>이 아닌가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9. 여기서 <성질/Eigenschaft>이 복수로 등장한다. 그전에는 단수일 수 밖에 없었다. <to ti esti>로서의 성질이 다수일 수 없고 <tode ti>도 역시 한 몸으로서 다수가 될 수 없다. 성질이 다수가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비본질적인 성질>, 즉 양과 질, 그리고 양과 질과 같은 방식으로 카테고리가 되는 것들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성질들은 몸의 생김새, 성격 등 <tode ti>에 대하여 언명되는 성질(술어)들이라고 해야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0. <감각적인 보편성>이 있다는 것은 다른 <보편성>, 즉 예지적(intelligibel) 혹은 noumenal 한 보편성도 있다는 말인데, <to ti esti> 또는 <tode ti>가 이런 보편성인가? 그렇다면 지각이 단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오성 혹은 이성과도 관계하는 것이란 말인가?텍스트로 돌아가기
  11. 원문 <das Einfache und das Wahre>. 데카르트의 제3성찰에 나오는 <clara et distincta>란 표현이 연상된다. <wahr>를 하이데거의 <aletheia/진리>해석에 기대어 번역해 보았다. <wahr>에 어원적으로 <aletheia>란 의미가 스며있는지는 모르겠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12.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살펴보자. <본질적인 성질>이 아닌 <부수적인/감각적인 성질>은 <ousia>에서 떨어져서 <to on>할 수 없다고 한다(oute chōrizesthai dynaton tēs ousias/형이상학 1028a 23-24). 그래서 <부수적/감각적인 성질>은 오로지 <ousia>에 붙어 있어야만 성질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걸어간다>에서 <걸어간다> 그 자체는 <소크라테스>에서 떨어져서 있을 수 없고, 또 <소크라테스는 술 취했다>에서의 <술 취하다> 그 자체는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란 명제에서 떨어져 나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테러

페르골레지, "Stabat mater dolorosa"
 

 

 

KMFDM (Kein Mehrheit für die Mitleid/동정 편에 다수가 서게 하지 말자란 뜻의 문법을 무시한 표현), Te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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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 requ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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