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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06
    2011/04/06
    ou_topia
  2. 2011/04/06
    SBS 가증스럽다(1)
    ou_topia
  3. 2011/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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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04/04
    알랭 바디우를 받아들일 수 없다.(30)
    ou_topia
  5. 2011/04/03
    노래로 본 70년대 후반 독일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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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1/04/02
    아랍혁명을 사유하는 바디우 - 인민주의론, 공산주의론, 그리고 국제주의론(5)
    ou_topia
  7. 2011/03/31
    품질관리매니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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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1/03/30
    2011/03/30
    ou_topia
  9. 2011/03/30
    연합뉴스 수준
    ou_topia
  10. 2011/03/29
    독일 슈바벤 사람들 이야기 - 루이제 하러 "천천히 먹고 오래 씹어라"
    ou_topia

2011/04/06

Denken als Tanz, als pas de de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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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가증스럽다

나토 공습에 부상당한 이북 의사부부를 두고

 

“폭격당한 북 외화벌이꾼”

 

이란 자막을 단 SBS 가증스럽다.

 

 

이북도 그랬을까? 당시 독일 탄광에서 일하는 이남 광산노동자들을 보여주면서

 

“몸을 파는 남조선 외화벌이꾼”

 

이라고?

 

 

등치 큰 사람의 손에 맞게 만들어진 기구를 들고 혹사 노동하는 이남 광산노동자들을 보고 당시 주독한국대사관에 노무관으로 나왔던 유성근씨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이북으로 망명했다고 어떤 광산노동자에게서 들었다.

 

 

왠지 구역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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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지

짝지와 난, 만나기는 일찍 만났는데 늦게 합해져서 아이가 없다. 그래서 아이 둘을 데려다가 키우고, 한 녀석은 커서 날아갔고, 다른 녀석도 곧 날아갈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잔소리가 많아졌다. 인생은 이러니저러니, 학문은 이러니저러니. 야단도 많이 친다. 옛날에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4과목만 보았는데, 학제간 연구에 눈이 뜨이게 한다는 취지로 그러는지 수학-자연과학분야, 예술-언어분야, 그리고 역사-사회분야로 구분된 분야에서 서로 다른 분야에 속한 두 과목을 골라 한 테마를 만들어 다루고 프레젠테이션을 작성하여 한 20분 발표해야 하는 것이 추가되었다.

 

근데, 요놈이 6개월 시간을 주었는데 미루다가 발표할 날이 닥치자 허둥지둥이다. “그 사이 담당선생님과 몇 번 만났어?” 침묵. 공부는 선생을 찾아가야 한다. 선생 찾아가지 않으면 공부 못한다. 공부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선생을 자주 찾아가야 내가 모르는 것이 뭔지 안다. 등등의 잔소리. 발표도 마찬가지라고. 아는 것보다 ‘내가 모르는 것이 이것입니다’라고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려고 안달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기도 한다.

 

뭔가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없다. 문득, ‘주지 않아도 가지고 갈 것은 다 가지고 가겠지’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광산 촌 신문에서 오려내 책상에 세워놓은 사진이 생각나서다. 80년대 초반 이스라엘 군에 쫓기던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해방군을 이끌고 베이루트에서 튀니지로 철수하기 위해서 배를 타기 전 한 갓난아이를 번쩍 쳐들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에 대하여 아버지와 주고 받은 말은 없었지만 종종 머리에 떠오르는 사진이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이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고, 자식이 부모님들로부터 가지고 가는 것은 무엇일까?

 

살다 보면 짜증나는 일이 많다. 특히, 하루를 시작하는데, 코 앞에서 [시간 맞춰 다니는] 버스가 떠나버리면 정말 짜증 난다. 뛰어오는 것을 뻔히 보고서, 버스 문 앞에 헐레덕 거리며 서면 문을 닫고 출발해 버리는 버스. 그 운전수 아저씨 정말 때려 죽이고 싶다.

 

근데, 이상하다. 짝지는 다르다. 막 뛰어가면 기다려 준다. 안 기다려 준 것을 못 보았다. 아니, 운전수 아저씨가 뛰지 말라고 손짓하면서 대려 천천히 앞으로 와서 선다. 참.

 

왜 그러지? 내 얼굴이 뭐가 잘못되었나? 짝지가 멋있게 뛰어서 그러나? 그건 아닌데. 대려 멋이 하나도 없는데. 사지를 허우적거리면서 뛰는 모습이 마치 갓난아이가 뛰는 모습이다. 아, 그렇구나. 측은한 마음! 아이가 아장거리는 것을 보면 발동하는 측은한 마음!

 

보토 슈트라우스(Botho Strauss)의 <짝짓는 사람, 스쳐가는 사람/Paare Passanten>에서 그랬던가, 애인이 길 건너편에서 우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에 흡족한 남성이 실망에 빠지는 이야기가 있다. 애인이 발을 잘못 디뎌 그 우아한 모습이 흥크러지는 것을 보고서 남자가 실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하이힐을 신고서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성이 삐그덕하면 너무 초라하게 보이는 느낌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

 

폼이 무너지면 참 초라해 보인다. 그래서 다들 폼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그 폼을 유지하기 위한 코르셋을 입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코르셋은 부모의 “안돼”하는 눈길로 엮어져 있지 않나 한다.

 

근데, 짝지는 “안돼”하는 눈길로 엮어진 폼을 배우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짝지는 아직도 사지를 흔들면서 뛰나 보다. 버스 잡는 것 외에도 장점이 참 많다.

 

(초등학교 4학년에서 5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담임선생 짝지에게)

담임선생: 구구법 못하면 시집 못 가.

(짝지 엄마한테 가서)

짝지: 엄마, 구구법 못하면 시집 못 간데.

엄마: 괜찮아. 내가 다 보내 주마.

(짝지, 담임선생한테 가서)

짝지: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요. 구구법 못해도 저 시집갈 수 있데요.

선생: 구구법 못하면 시집가서도 물건값 계산을 못하기 때문에 속고 살아.

(짝지 다시 엄마한테 가서)

짝지: 엄마, 구구법 못하면 물건값 계산을 못해서 속고 산데.

엄마: 걱정하지 마라. 구구법 잘하는 사람 딸려 시집 보내 주마

 

아무튼 짝지는 5학년이 거의 다 끝나갈 때까지 구구법을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할 일 다하고, 할 공부 다하고, 남에게 줄 것 다 주고 살았다. 그 힘이 어디서 왔을까 늘 생각하다가 오늘 몇 자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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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를 받아들일 수 없다.

ou_topia님의 [아랍혁명을 사유하는 바디우 - 인민주의론, 공산주의론, 그리고 국제주의론] 에 관련된 글.

 

“For two centuries the only political problem has been how to set up in the long run the inventions of the communism of movement?”

 

이 문장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해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대중]운동의 최종목적은 국가가 해왔던 일을 국가없이 하는데 있다.

- 공산주의는 [대중]운동 밖에 없다.

- [대중]운동 안에서 가시화되는공산주의가 발견한 것을 지속적으로(!) set-up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문제되어왔다.

 

공산주의적 발견을 지속적으로 set-up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말이 없다.

믿음 외에 내놓은 것이 없다.

 

바디우가 말하는 모든 가능성을 창조하는 “joy”는 연애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대항해서 집단적으로 싸워 본 사람들도 다 알 것이고. 5.18 민중항쟁을 바디우와 같이 “ästetisch”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든다.

 

대중운동안에서 가시화된다는공산주의를 “지속적으로 set-up”하면 필경 뭔가가 조직화되지 않는가? 제도(Institution) 같은 것이? 그리고 이런 제도화된 것은 필경 운동 밖에 존재하게 되지 않는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속혁명”을 해야 하는가? 옛 것을 다 부수는 “문화혁명”?

 

모든 것을 운동 안에 있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이 반향하는 „한울림(resonance)“이 된다는 것이 나치파쇼운동의, 하이데거식의„움직여짐의 운동“(Bewegung der Bewegtheit)과 뭐가 다른가?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흡수한 운동개념이 배출한 것이 [운동 안에 다시 hierachy를 만드는] 이북의 수령관 같은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제도“(Institution)에 관하여 필사적으로 사유한 헤겔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 그리고 Vernunft와 Wirklichkeit간의 변증법에 대하여 더 생각해 보는 편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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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본 70년대 후반 독일 좌파

magister님의 [1970년대 후반] 에 관련된 글.

 

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Franz Josef Degenhardt)의 1977년 LP <Wildledermantelmann>의 발라드 <론도 파스토랄레>를 소개한다. 데겐하르트는 68세대를 발라드로 동반한 공산주의자, 법학박사.

 

 

 

그래, 여기 있는 너희들 찾기 쉽지 않았어. 나무울타리도 높고 빽빽하고.
거기다 망가진 조그만 문에 문패도 없고.
아냐, 너희들은 변하지 않았어, 살이 좀 빠진 것 같기는 하지만.
손수 뜨개질해서 입은 옷들이 잘 어울려.  – 아니, 건강에 좋게 보인다고.
그래, 정말 환상적인 정원이야, 모든 것이 제멋대로 자라고, 튀미안 냄새가 나네.
아냐, 너희들의 손은 아주 건조해, 전혀 열난 사람 손 같지 않아.
그래, 저기 저 라이락덩굴 사이 피아노에 앉아있는 소녀가 에메야.
에메의 화관은 크레세로 만든 거야. 항상 똑같은 곡을 쳐.

그래, 너희들 벽돌집 정말 오래됐고 멋있어. 지붕은 갈대로 덮었고.
너희들이 재배한 토마토, 정말 토마토 맛이 나. 너희들이 키웠다는 맛이 나.
아냐, 우리 손위에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장난하는 태양이 뜨겁지 않아.
그리고 너희들 가운데 아무런 두려움, 아무런 싸늘함이 안 느껴져.
그래, 수년이 지난 지금 헤아려 보는 해들, 도시에선 더 이상 느끼지도 못하지.
그래, 우리 투쟁은 변하지 않았어. 상당히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고.
아냐, 너희들은 뺑소니치지 않았어. 사람들이 쉽게 떠드는 것처럼.
너희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 흐물흐물해져 버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좋아, 찔레열매로 빚은 검은 술 한잔 더하자.
책상 위에 고양이와 발 옆에 앉아 있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그래, 동지들은, 그때의 동지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몇은 눈을 감았지.
그러나 많은 사람이 계속하고 있어, 왜 계속하는지 알면서 말이야.
아냐, 난 몰라, 왜 루디가 효소유기비료를 별볼일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그래, 비가 다시 쏟아지지 전에 지붕 수리를 해야겠지.
아냐, 울리케가 남미원주민들과 살고 있다는 건 믿을 수 없어.
정말, 에메 피아노 잘 쳐. 아냐, 에메가 아무 말 하지 않는 것 중요하지 않아.

그래, 아이들과 함께 고속도로에서 산보하는 것,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다.
아냐, 매번 새로 돋는 예전의 싹이 아직 임대아파트 벽을 뚫지 못했어.
그래, 너희들 수양버들피리, 마치 양치는 목자피리의 저녁기도소리처럼 들려.
아냐, 난 앉아있게 내버려두고 계속 춤춰. 그리고 이젠 천천히 다시 갈 때가 되었다.
그래, 언젠가 다시 올 깨. 7년10년 후에?
장미꽃넝쿨들이 어지럽게 자라고 또 자란다. 너희들을 볼 수 없게 되겠구나.
피아노소리와 피리소리가 들리네, 어디서 온 소리인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너희들을 정말로 이해하고 싶다. 다시 한번 허심탄회하게 노력하겠다.

 

 

Ja. war nicht leicht, euch hier zu finden, weil, die Hecke steht sehr hoch und dicht.
Und ein Namensschild an dem kaputten Törchen gibt es ja auch nicht.
Nein, ihr habt euch nicht verändert, bißchen dünner seid ihr vielleicht,
und eure selbstgewebten Kleider stehn euch gut - nein, ich mein, sind gesund.
Ja, der Garten ist phantastisch, wuchert wild, ich riech den Thymian.
Nein, eure Hände sind ganz trocken, fühlt sich überhaupt nicht fiebrig an.
Ja, das Mädchen am Klavier da zwischen Fliederbüschen ist Aimée,
und ihr Haarkranz ist aus Kresse, spielt das gleiche Stück wie eh und je.

Ja. euer Haus aus Ziegelsteinen ist sehr alt und schön das Dach aus Ried.
Eure Tomaten schmecken wirklich nach Tomaten, So, wie ihr sie zieht.
Nein, die Sonne, die auf unsren Händen mit dem Schatten spielt, ist nicht zu heiß.
Und ich spüre keine Angst und keine Kälte hier in eurem Kreis.
Ja, die Jahre zähl'n nach Jahren, in den Städten merkt man das nicht mehr.
Ja, unser Kampf ist noch der gleiche, und noch immer ist er ziemlich schwer.
Nein, ihr seid nicht abgehauen, wie man das so einfach daherquatscht.
Und ihr habt auch eure Gründe. Niemand sagt, ihr wärt reichlich vermatscht.

Ja. ich trinke noch ein Glas von eurem schwarzen Hagebuttenwein,
und ich streichele die Katzen auf dem Tisch, den Hund an meinem Bein.
Ja, verstreut sind die Genossen, die von damals, ja, und einige ruhn.
Aber viele machen weiter, und sie wissen auch, warum sie's tun.
Nein, ich weiß nicht, warum Rudi nichts von der Enzymbedüngung hält.
Ja, das Dach werdet ihr flicken, eh der große Regen wieder fällt.
Nein, daß Ulrike in Peru bei Indianern lebt, das glaub ich nicht.
Ja. Aimée spielt wirklich gut. Nein, ist nicht wichtig, daß sie gar nicht spricht.

Ja, auf Autobahnen wandern mit den Kindern, das wär wirklich schön.
Nein, aus den Beton-Miethäusern bricht noch immer nicht das alte, junge Grün.
Ja, eure Weidenflöten klingen wie wenn Hirtenflöten abends flehn.
Nein, laßt mich sitzen. wenn ihr tanzt, und so allmählich muß ich jetzt auch gehn.
Ja, vielleicht komm ich mal wieder, so in sieben Jahren oder zehn.
Und die Rosenhecke wuchert immer weiter. Ich werd euch nicht sehn.
Ein Klavier hör ich und Flöten, und ich rat, woher die Töne wehn.
Und ich werd nochmal versuchen, ehrlich, euch auch wirklich zu verste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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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혁명을 사유하는 바디우 - 인민주의론, 공산주의론, 그리고 국제주의론

알랭 바디우를 전혀 모른다. 이곳 진보넷에 블로그를 만들고 헤겔을 번역한답시고 하고 있을 때 어떤 블로거가 지나가다 알랭 바디우를 운운해서 그런 사람이 있구나 했다. 그러다가 작년 6월 베를린 <인민극장/Volksbühne>에서 개최된 <공산주의이상> 에 초대된 요즘 유행하는 3인방 네그리, 지첵, 바디우를 건성으로 언급하는 몇 개 기사를 읽어본 것이 다다.

 

그리고 여기 진보넷에서 바디우의 글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것도 영어로 번역된 글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글이다. 그래서 바디우가 이러니저러니 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눈에 띄는 것 한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1889년 파리 엑스포에서 „카이로의 거리“란 것이 있었다. 한 거리를 아랍분위기가 돌게 셋팅한 유흥거리였다. 아랫배춤부터 시작해서 당다귀를 타는 바보, 아랍식 도사, 물담배 등 서커스분위기가 조성된 거리였다. (관련 스위스 예술 역사학자 Beat Wyss의 „Bilder von der Globalisierung/글로벌화의 이미지“, 2011; 그리고 독일 꼴통우파 신문 „Die Welt“지의 베아트비스와의인터부 참조)

 

이 이미지가 지금까지 서구가 오리엔트(아랍)을 사유하는 패턴이 아니었나 한다. 그리고 이런 패턴이 현재 진행중인 아랍혁명으로 인해서 붕괴되고 있지 않나 한다.  

 

아랍혁명을 유럽식으로 사유하는 한 예를 들자면 [신자유주의 골수분자] 독일 외부부장관 기도 베스터벨레가 타히르광장을 방문하여 이집트혁명을 1989년 동독혁명과 비교한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비교의 리트머스테스트는 동유럽을EU에 편입시켰듯이 아랍국가를 EU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터키의 EU 가입문제와 함께 리비아 등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국가들을 „철성 유럽“에 난민이 못 들어오게 자물쇠를 채우는 정책에 필요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버리고 지중해를 정말 „공동의 바다“로 만드는 데 있을 것이다.

 

물론 „mare nostra“란 구호아래 지중해를 지배했던 로마, 폼페이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지중해의 해적을 다스린다는 빌미로 지중해와 연안국가들을 프랑스가 지배하는 „우리 바다“의 한 부속물로 만든 프랑스, 같은 구호아래 로마를 재건한다는 무솔리니의 제국주의 등 „mare nostra“란 청사진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진행중인 아랍혁명이 „mare nostra“란 구호아래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할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mare nostra“를 „우리의 바다“라고 번역하지 않고 „공동의 바다“로 번역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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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관리매니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옛날에 한적한 산야에서 양치는 목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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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먼지를 일으키며 공장에서 막 뽑은 체로키 짚차가 달려와 급 브레이크를 걸더니 양치는 목자 옆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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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오니 양복에  체루티 구두를 신고 레이 밴 썬글라스에다가 YSL 넥타이를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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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청년이 차에서 내리더니 “당신이 치고 있는 양이 몇 마리인지 알아 맞추면 양 한 마리를 내게 주겠소?” 한다.

 

양치는 목자는 그 젊은 청년과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해보소” 한다.

 

젊은 청년은 노트북을 꺼내 스마트폰에 연결시켜 NASA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GPS 인공위선 네비게이션시스템으로 양치는 지역을 스캔하고사용자 삽입 이미지

 

엑셀파일을 열어 무수한 공식으로 뭔가를 만들더니

 

소형 최첨단 프린터에 150페이지나 되는 보고서를 출력시킨다.

 

 

 

 

 

그리고 양치는 목자에게 “당신이 치고 있는 양은 정확하게1586마리다”라고 한다.

 

양치는 목자가 말하기를: “맞다. 한 마리 골라라.”

 

젊은 청년은 양 한 마리를 골라 차에 싣는다.

 

양치는 목자가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묻는다.

 

“내가 당신의 직업이 뭔지 알아 맞추면 그 양을 다시 돌려 주겠소?”

 

젊은 청년이 대답하기를: "기꺼이”

 

양치는 목자가 말하기를: “품질관리매니저”

 

“맞아요.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젊은 청년이 의아해 한다.

 

“아주 간단해.”라고 양치는 목자가 대답한다.

“첫째,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 여기에 왔고, 둘째, 당신의 도움 없이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고 나서 그 대가로 양 한 마리를 달라고 했고, 셋째,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오.”라고 하고 나서

 

“이젠 내 강아지를 다시 내려 놓으시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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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30

큰붓님의 [마지막 살아남은 사람 [송경동 시인]] 에 관련된 글.

 

was tun... womit begin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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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수준

<버섯 따고 채소심고> … 평화로운 체르노빌>

저주하지 말고 참자...

 

 

 

“우리는 체르노빌이 25년 지난 오늘날에 살고 있지 않고 25년 동안 체르노빌를 안고 살고 있다. … 원전은 우리들 집에 온수와 전기를 갖고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기뻐했다. 그러나 평화롭다는 원자력은 실지로 우리에게 병과 죽음을, 그리고 무기력과 앞날을 모두 잃은 허무감을 갖다 주었다. … 원전과 원자력의 평화로운 사용은 과학기술의 발전이라고 찬양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오늘 일본원전에 대한 영상을 보면, 어린이들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단지 지진과 쓰나미의 후유증만 대하고 있는 주민을 보면서, 나는 이미 그들의 미래를 본다. “체르노빌 – 미래에 대한 기록”이란 스베틀라나 알레씨에비치가 지은 좋은 책이 있다. 이 책에 원자력을 이렇게 계속 사용하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적혀있다.

 

[체르노빌 이후의] 삶은 아무렇지 않고 정상적으로 보인다. 단지 표면적으로 그럴 뿐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진실을 알게되면 고통과 병과 상실을 동반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체르노빌 어린이를 위한” 우리재단만 보더라고 지난 수년 동안 50세도 되지 않는 아주 많은 사람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그들은 다양한 종류의 암에 걸려 죽었다. 30-50세 사이의 여성들, … 그리고 이젠 체르노빌사태 때 어린이였던 사람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는데, 많은 아이들이 병들고 기형아로 태어나고 있다. 체르노빌을 거꾸로 세워놓은 피라미드와 비교하고자 한다. 사태 당일엔 한정된 피해만 발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피해는 점점 더 커진다. 그리고 체르노빌이 단지 기술적인 재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체르노빌은 인간을 삶을 파괴하는 재앙이다. 인간의 삶을 그 기본토대로부터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원전은, 원자력산업은1그램의 진실도 견디지 못한다.  … 원자력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 거기다 원자력이 우리에게 평화를 갖다 준다는 생각은 교만이다. 원자력은 인간에 대한 전쟁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사람의 골수에서 진행되고 있다. 어린이들의 골수와 그 다음 세대의 골수에서 진행중인 전쟁이다. 그들 몸 안에서 착칵착칵 가고 있는 시한폭탄이다…”

 

(독일 제2공영방송 <마이브리트 일르너/Maybritt Illner> 2011.3.17 토크쇼에서 <체르노빌 어린이을 위하여>란 재단을 만들어 반핵운동을 하는 이리나 구르세봐야 박사와의 인터뷰 내용. 중간중간 생략 혹은 내용만 번역)

 

민스크지역 어린이 발암관련 통계 (체르노빌지역에서 피난한 어린이 대비 민스크지역에서 태어난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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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슈바벤 사람들 이야기 - 루이제 하러 "천천히 먹고 오래 씹어라"

슈트트가르트 근방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 독일 서남부지역 슈바벤엔 종종 간다. 비행기에서 내려 친구가 살고 있는 동네에 가면 아주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산뜻하고 정돈된 길과 집들. 허허벌판 길거리에도 과일나무를 심어놓은 배려(?) (아니면 땅 놀리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거기에 가면 뭔가 근질근질한 베를린의 분산한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던 중 몹쓸 병에 걸려 슈발츠발트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이 지방 특유의 억양과 여성에 푹 빠진 기억, 그리고 오후 한나절 산야를 걷다가 선술집(Kneipe)에 들려 덜 빠개진 밀알로 만든 짙은 밤색의 <검은빵>에 슈발츠밸더 쉰켄을 두툼하게 잘라 올리고, 또 그 위에 싱싱한 양파를 둥글둥글 썰어 올린 간식, 밀알이 입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씹히는 맛 등 이 지역은 나에게 항상 훈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지역이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그 지역사람에 대한 글을 써봐야지 하고 있다. 늘 그러듯이 생각만 하고 있다가 오늘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이런 글이 있다. “슈바벤에대한 이미지– 한 지역성격의 구성”제하 튀빙엔 대학 실증(경험?)문화학과 프로젝트그룹이 진행한 연구결과를 묶어 편찬한 책이다. 거기에 프리데만 슈몰(Friedemann Schmoll)의 “천천히 먹고 오래 씹어라 – 루리제 하러(Luise Haarer)가 지은, 그럴 의도로 쓰지는 않았지만 슈바벤을 대표하는 토양요리책이 된 역사”란 논문이 눈에 띄고 재미있어 보인다. 요리는 좋아하고, 잘하고(smiley), 또 매일 해야 하니까(sad) 뭔가 건질 것이 있을 것 같아서 읽어보았다. 소개해 본다.

 

 

 

“기본요리법에 따른 요리와 [빵/케이크]굽기(Kochen und Backen nach Grundrezepten)”란 제목으로 1932년 처음 발간된 이후 지금까지 27번이나 재발간 되어 백만 권 이상 팔린 이 요리책을 슈몰은 이제 재대로 된 슈바벤의 부엌이라면 빠질 수 없는 책이라고 소개하고 그 발간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1932년 루이제 하러가 이 요리책을 처음 선보였을 때는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는 장르의 책이 붐을 일으키기 시작할 때였다. 그리고 이런 붐은 독일에서 살림하는 일이 폭 깊은 변화에 처하게 됨을 알리는 것이었다. 보살핌을 주역으로 하는 여성이미지가 밖에 나가서 취업하는 여성시대가 시작되면서 통째로 흔들리게 되었고, 기술혁명은 세탁기로부터 시작하여(1870년부터 수동세탁기 사용), 전기오븐(1891년 이후), 진공소재기(1906년 이후) 등 차쯤 살림살이를 정복하게 되었다. 일상생활의 지식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자연적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싱크대와 광 사이를 오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길잡이란 매체가 필요해 졌다. 지속되는 현대화 바람에 빠지게 된 살림살이는 전통적인 일상생활지식으론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끝없이 보이던 엄마와 할머니의 지식창고에 더 이상 기댈 수가 없게 되었고, 일목요연하게 체계적으로 정돈된 요리책이 요구되었다.

 

근데, 이런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시대의 유행에 따라서 멋있게 보이는, 이것이 좋다네 저것이 좋다네 하는 식생활습관의 어지러운 변동에 따라 많은 요리책이 발간되었는데 살아남은 책은 몇 권 안 된다. 그 중 하나가 이 요리책이다. 그 이유를 슈몰은 이렇게 설명한다.

 

루이제 하러의 요리책이 아는 사람들 사이엔 아직도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는 이유는 아래와 같은 마법공식에서 기인할 것이다. 알쏭달쏭한 요리법을 거추장스럽게 늘어놓는 대신 간단명료한 기본요리법을 요리기술의 왕도로 가르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개개인이 창조력과 기발한 착상을 착착 쌓아 나갈 수 있게 하였다. 이런 기본요리법의 원칙은 간직과 갱신의 맛나는 밸런스, 전통과 변화의 적절한 믹스, 잘 닦여진 것으로 전해 받은 것과 새로운 창조의 공전을 담보하고, 검증된 것을 바탕으로 한 주체적인 이니시어티브를 장려하는 원칙이었다.

 

1958년 판, 루이제 하러의 말을 들어보자.

 

기본요리법과 기본법칙이란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소개된] 요리에 변형을 주고 더 개발하는 수단이 모든 지각있는 여성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런사용자 삽입 이미지 책을 쓴 사람이 어찌 목사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겠는가. 루이제 하러는1892년 헤르츠펠트(Härtsfeld)에서 태어난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우라흐(Urach)로 이사해 여성가사학교(Frauenarbeitsschule)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한 영국인 가정에서 가사를 돌보는 일을(Haustochter) 한다. 약혼남이ㅜ1차 대전에서 전사한 후 독신으로 살다가 나중에 수(手)작업 교사 헬레네 뢰쉬(Helene Rösch)와 동거한다. 1917년 고향으로 돌아와 25세에 슈트트가르트 소재 슈바벤 여성단체의 가사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가사학과 교사 자격증을 딴 후 1923년부터 에쓰링엔(Esslingen)에 있는 직업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중 위 요리책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의 영향으로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문화부에서 가사학교에서 교육되어야 할 내용과 교사교육 및 재교육을 담당하는 고급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1957년 은퇴한다. 그리고1976년 헤렌베르크(Herrenberg)에 있는 양로원<저녁쉼터/Abendruh>에서 별세한다.

 

 

슈몰은 루이제 하러의 요리책이 단순한 요리책만이 아니라고 한다.

 

루이제 하러의 요리책은 단순한 레씨페 모음집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루이제 하러는 맛나게 하는 요리법들을 하나로 엮는 가운데 우리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책을 선사하고 덕과 몸가짐을 교육한다. 실용성, 깨끗함, 검소, 열심, 절약, 그리고(…) 허풍이 들어가진 않은 참신한 맛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이런 여성타입은 이젠 뷔르템베르크지역 개신교 여성동아리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런 여성타입을 만들어내는데] 루이제 하러도 한몫한 것이다.

 

그러나 쌀이 나무에서 열리는 것으로 알고, 슈퍼에서 사시사철 야채와 과일을 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이 요리책은 신선한 충고를 준다.

 

서구 공업화된 나라라면 사시사철 어떤 식품이라도 사 먹을 수 있게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루이제 하러는 잃어버린 계절의 리듬을, 예전에 논밭에서 계절 따라 나온 것으로 차린 반찬의 바뀜으로 맛볼 수 있었던 계절의 리듬을 다시 갖다 준다. 루이제 하러에게는 모든 것에 자기 시간이 있다. „항상 시장에 뭐가 나오는지 고려하라. 그리고 과일과 야채를 살 땐 잘 익은 시기를 기다리고, 생선을 살 땐 잡는 시기를 기다려 사라.“라고 충고한다. 루이제 하러의 요리나라는 유행을 따라가는 맛, 휘황찬란한 뭔가를 보여주려는 스타일이 지배하지 않고 자연이 다스리는 나라다.

 

뿐만이 아니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쌀독에 쌀이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넘쳐나는, 가난과 풍부함의 교차를 기억하라고 한다.

 

„살림살이할 돈이 부족할 경우, 누룩으로 과자를 만들어라. 누룩으로 만든 과자는 버터와 달걀이 들어가지 않아도 부스러지지 않고 맛있다.“

 

그리고 같은 요리에 약간의 변화를 줌으로써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일생생활과 특별한 날간의 미소한 차이를 느끼게, 하늘의 향한 일요일과 그저 그런 평일을 구별하게 한다.

 

루이제 하러의 요리책은 „단순한“, „정성들인“, 그리고 „좋은“ 애플케이크를 구별하고, 구겔호프(혹은 구겔후프/모자모양의 카스텔라)의 경우 심지어 „단순한“, „좀더 낳은“, „정성들인“ 그리고 „아주 정성들인“ 등으로 세분한다. 요리 대가 루이제 하러는 버터를50그램 더 넣거나 아니면 평소보다 달걀 한 개를 더 넣어 오늘이 쉬는 날인지 아닌지를 미소한 맛 차이에서 느끼게 한다.

 

목사가정에서, 그것도 모든 것을 하는데 있어서 성서에 근거를 두는 (예컨대16세기 이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전쟁의12가지 요구도 복음서에 근거를 두고 제기됨) 이 슈바벤 지역에서 태어난 루이제 하러가 청교도적인 절약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으랴.

 

„시장을 볼 때 항상 식품의 가격과 그 영양가치를 비교하여라.“ (…) 가스오븐의 불은 반듯이 요리준비를 다 마치고 솥을 올려놓은 다음에 켜라.“ 그리고 „불이 솥 밑에서 옆으로 나오지 않게 주의하라.“

 

이런 청교도적인 절약이 지배하는 살림살이의 최고봉은 남은 음식을 어떻게 처리하는데 있다. 슈바벤 부엌엔 물론 남은 음식을 버리는 쓰레기통이 있을 수 없다.

 

군지 오래된 검은빵(Schwarzbrot)은 야채와 함께 쉽게 먹을 수 있는 국으로 변화고, 딱딱해진 브뢰챈[주먹만한 빵. 보통Brötchen이라고 하는데 지역에 따라Weck, Semmel, Schrippen 등으로도 불린다.]은 갈아 반죽해서 크뇌델을 만들고, 김빠진 맥주는 싱크대 구멍에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라, 녹말분과 계란 몇 개를 넣어 걸쭉하게 만들고 그 위에 개피가루 뿌리는 둥 마는 둥 해서 먹는, 옛날 남독 아침식탁에 늘 등장하던 맥주국이 된다. 그리고 가이스부르크(Gaisburg)이란 슈트트가르트 변두리에 있는 노동자거주 도시의 이름을 따 만들고 뷔르템베르크주 군인들이 즐겨 먹던 „가이스부르거 행진(Gaisburger Marsch)“이란 수프 역시 이렇게 낡은 것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인 남은 음식 재활용에서 나온 것이다. 어제 먹고 남은 스페쯜레(Spätzle – 반죽을 강판에 밀어 만든 길이 짧은 국수, 멀게 우리 수제비와 비슷함.)를 그저께 먹고 남은 듬성등성 썰은 감자와 함께 육수에 섞어 만든 – 가계부가 허락하면 수프용 고기를 더하고, 허락하지 않으면 관두어도 괜찮은 – 국이다. 예전엔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으로 노동자와 농부의 살림살이 부엌 밖으론 나오지 못하다가, 지금 들어선 소위 미식가식당의 메뉴판에까지 올라가고 고급 문화유산으로 취급되고 있다.

 

루이제 하러의 요리책은 우리 머리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요리법을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려준다. 그리고 이 요리책은 이렇게 토양에 기반하기 때문에 몇 번 시도했지만 다른 지역에선 거의 판매되지 않았다. 사가는 사람은 어김없이 슈바벤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토양적인 요리, 지역주의, 그리고 가정주부문학간의 복잡한 상호영향관계를 파헤쳐보는 것이 음식민속학에서 해볼만한 연구과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빌헬름 하인리히 릴(Wilhelm Heinrich Riehl)이 일찍이 관찰했듯이 „여러 족속을 두고 볼 때 입과 위에 대한 것보다 더 보수적인 것은 없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되고 이듬해 독일 전국에 무게와 길이를 재는 하나의 잣대가 도입되면서 부엌문학부분에도 역시 획일화가 시도된다.

 

„담백하고, 좀더 우아한 시민식탁을 위한 대형 그림요리책“의 지은이 마틸데 에르하르트(Mathilde Ehrhardt)는 빌헬름[제국]시대의 요리책이 수행하는 목적이 제국의 부엌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있다고 한다.

 

„다수의 요리책에서 노출되는 취약성을 찾아내는 것에 발행인은 주목하였다. [이젠] 어떤 가정주부라도, 동서남북 어디에서 살든지 독일언어권내에서 생활하면, [요리에 관하여] 뭔가 궁금한 일이 생길 때 이 책을 열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제국이 선포되고 난 이후부터 토양적인 요리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요리책은 아마 국민국가(Nationalstaat)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역의 정치적 주권이 중앙정부로 넘어가는 상황에 맞서 부엌과 함께 맛을 음미하는 목구멍이라고 지켜야 한다는 움직임의 산물이 아닌가 한다.

 

이어 슈몰은 루이제 하러 요리책의 성공 비결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루이제 하러의 성공비결은[요즘 유행하는 슈바벤 하이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 기술발전으로 야기된 변화를 합목적이라면 받아들인다는 열린 마음과 막 전개되는 여성취업노동시대에 들어와 전통적인 여성의 자기역할이해에서 점진적이고 끈끈한 변화를 이야기한 이 요리책의 양면적인 모더니티에 있을 것이다. (…) 루이제 하러는 토양적으로 각인된 요리와 살림살이를 받아들이고 보살핌으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여성역할에 대한 전통이데올로기를 여성취업시대로 이행하는 보수주의를 고집했다. 일상생활에 관한 지식이 점점 더 과학으로 둔갑하는 시대에 [요리와 같이 다양한 작업이 동시에 아니면 줄지어 진행되어야 하는] 복합적인 일의 기본구조를 알게 하는데 성공했다.

 

아무튼 루이제 하러가 소개하는 요리는 요즘 들어 유행하는 소위 덜 가공화 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영양학자들이 재발견해내는 음식들이다. 그리고 루이제 하러의 성공은 체르노빌사태, 광우병, 몸매관리, 다이어트, 콜레스토롤 등 음식에 관한 조언이 난무하는 시대에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 정언적 명령과 같은 엄격하지만 친절한 명령에 대한 향수에 있을 수도 있겠다.

 

루이제 하러는 „밥을 먹을 땐 필요 없는 온 갓 잡음, 격렬한 대화, 그리고 독서, 라디오와 같은 정신 사납게 하는 여타 행동을 삼가라. 이 모든 것들이 소화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친절하고 지시하고 여유를 갖고 밥을 먹으라고 한다. „천천히 먹고 오래 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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