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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를 받아들일 수 없다.

ou_topia님의 [아랍혁명을 사유하는 바디우 - 인민주의론, 공산주의론, 그리고 국제주의론] 에 관련된 글.

 

“For two centuries the only political problem has been how to set up in the long run the inventions of the communism of movement?”

 

이 문장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해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대중]운동의 최종목적은 국가가 해왔던 일을 국가없이 하는데 있다.

- 공산주의는 [대중]운동 밖에 없다.

- [대중]운동 안에서 가시화되는공산주의가 발견한 것을 지속적으로(!) set-up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문제되어왔다.

 

공산주의적 발견을 지속적으로 set-up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말이 없다.

믿음 외에 내놓은 것이 없다.

 

바디우가 말하는 모든 가능성을 창조하는 “joy”는 연애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대항해서 집단적으로 싸워 본 사람들도 다 알 것이고. 5.18 민중항쟁을 바디우와 같이 “ästetisch”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든다.

 

대중운동안에서 가시화된다는공산주의를 “지속적으로 set-up”하면 필경 뭔가가 조직화되지 않는가? 제도(Institution) 같은 것이? 그리고 이런 제도화된 것은 필경 운동 밖에 존재하게 되지 않는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속혁명”을 해야 하는가? 옛 것을 다 부수는 “문화혁명”?

 

모든 것을 운동 안에 있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이 반향하는 „한울림(resonance)“이 된다는 것이 나치파쇼운동의, 하이데거식의„움직여짐의 운동“(Bewegung der Bewegtheit)과 뭐가 다른가?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흡수한 운동개념이 배출한 것이 [운동 안에 다시 hierachy를 만드는] 이북의 수령관 같은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제도“(Institution)에 관하여 필사적으로 사유한 헤겔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 그리고 Vernunft와 Wirklichkeit간의 변증법에 대하여 더 생각해 보는 편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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