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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Die Arbeiter haben kein Vaterland.”)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아무런 설명이 필요없는 자명한 사실로 애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보면 그리 자명하지 않다. 상당히 많은 전제와 설명을 요구하는 주장임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즉, “노동자들에게 없는 것을 그들에게서 빼앗을 수는 없다”(Man kann ihnen nicht nehmen, was sie nicht haben.”)란 문장에서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란 서술이 “지구는 자전한다”란 명제와는 다른 의미구조를 갖고 있음이 인지된다. 이 문장의 진리조건이 역사임을 알 수 있다.
노동자의 형성은 ‘고향’(patria=아버지가 산 곳)의 상실을 전제한다. 이 상실은 역사가 애기해 준다. 그리고 노동자가 마주하는 ‘조국’은 ‘고향’의 형식이 아니라 국가의 형식이라는 것 또한 역사가 말해준다.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와 조국과의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다.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란 문장에는 뭔가 빠져있다. 노동자와 조국의 관계는 부르주아지로 매개된 관계다. 달리 표현하면, 노동자와 조국과의 관계에는 노동자와 부르주아지와의 관계가 깔려있다. 노동자와 조국과의 ‘참다운’ 관계는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공산당 선언은 이 투쟁의 길이 민족적이라고 한다. “첫 단계에서”(zunaechst)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통치권”을 장악하여 “민족적 계급”(“nationale Klasse”) 또는 “민족의 영도적 계급”(fuehrende Klasse der Nation)이 되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민족으로 세워야 하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이 필연이라고 한다(“Indem … muss”). (밑줄 ou)
국제주의가 추상 이상의 것이 아니며 무능력하게 느껴지는 게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란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닌지.... 내용(국제주의)와 형식(민족)의 변증법은?
2021/05/15 |
2021/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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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고향은 관습이 비교(秘敎)적인 코드로 암호화되어 [실재하는] 거주공간(Wohnung)이다. 이 공간에서는 관습이 신성화되어 있다. 고향에 뭍혀 사는 사람은(der Beheimatete) 그를 그곳의 사람과 사물에 은밀하게 묶어 놓는 그물망에 엮어져 있다. 이 그물망의 실은 깨어있는 의식을 넘어서 말못하는 갓난아이의, 태아의, 어쩌면 더 깊은 심령(Psyche)의 영역까지 이어져있다. 이 실은 대부분 의식할 수 없기 때문에 감정으로 장전되어 있다. [그래서] 고향의 사람과 사물은 사랑의 대상, 아니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 실이 산천초목, 주택, 혹은 기후와 같은 사물과 관계되어 있는 경우, 그 실을 끊어 버려야 하는 실로 인식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런 것들은 사물의 의인화, 즉 어떤 것과 어떤 이를 착오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물을 향한 사랑을 그리스 철학자들은 뮈투스로, 유대 선지자들은 이교로 하여 대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저 실이 가족, 이웃, 그리고 이른바 이들의 ‘개성’과 관계되어 있는 경우, 그 실을 자유의 [발목]을 결박하는 관습으로 밝히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실은 [의인화의 경우처럼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주고 받는 말이 그 근간을 이루고(dialogisch), 고향에 뭍혀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포에(Mitmenschen) 대하여 책임을 지게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책임감은 자유를 동반하는 현상이다. 이런 실은 – 예컨대 구아타마가 그랬던 것처럼 – 거침없이 끊어 버릴 수 없는 실이다. 그래서 고향에서 강제로 뽑혀지는 게 (혹은 스스로 자신을 뽑아내는 게) 아픈 것이다.
(빌렘 플루서, Heimat und Heimatlosigkeit: Das brasilianische Beispiel, in: Dericum, Christa/Wambolt, Philipp (Hrsg.), Heimat und Heimatlosigkeit, Berlin-Neukölln 1987, S. 43)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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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장 큰 불안으로, 그리고 영생을 얻기 위한 소망을 가장 강력한 소망으로 팔아 먹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어제 종합병원 대기실에서 어느 한 돌팔이 의사가 사람은 죽은 후에도 어딘가에서 계속 살게 된다고, 지구는 아니지만 다른 위성으로 옮겨져서 계속 살게 된다고 소란스럽게 주장하자 거기서 기다리던 할머니들은 더할 수 없는 근심걱정에 사로잡혔다. 한 할머니는 심지어 격분하기까지 했다. 마치 관청에서 그녀에게 죽은 후에 다른 구로 혹은 비엔나의 신개발도시로 아니면 린츠와 같은 [휘황찬란한] 이국적인 도시로 이주하라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것처럼 말이다. 타향에 대한 불안에 맞선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불안은 전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이 정 그렇다면 난 기꺼이 여기에 묻혀 누워있겠다. 이 자리는 내가 잘 아는 자리로서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자리가 아닌가.” 라고 말했다. 그러자 기다리던 할머니들이 다 갑자기 그런 죽음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귄터 안더스: Philosophische Stenogramme, Muenchen 1965, S.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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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주제로 삼으면 쉽게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이 있다. 향토학자들은 한동안 아편을 피우는 사람처럼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런가하면 아직 오늘날까지 알프스 영양 수컷의 등털[로 꾸민 고유복장 모자]를 보면 칼날같이 예리한 지식인이 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고향은 특히 남부독일에 있는 것 같다. (…) 고향, 이건 분명 [따라가기 싫은?] 뒤처짐을 일겉는 데 사용되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래, 함부르크에 면방센티미터당 대졸자[Abiture/고졸]가 더 많고, 베를린에 안경당 책이 더 많고, 뒤셀도르프에 두당 20세기가 더 많다고 기꺼이 시인한다. 허나, 베를린함부르크뒤셀도르프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너무 많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곧 따라갈 거다. 따져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현지시간이 70년전에야 비로소 중앙유럽표준시에 종속되지 않았던가. 반면 이곳 시민들의 [행진]드럼은 [독일제국건국의 마지막 전투인] 세당[전투] 후에도 25년동안이나 [프랑스 혁명] 트리콜로르의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25년이 지나 후에야 비로소 [프로이센 주도 북부독일연맹/독일제국/나치제국 기의 색인] 흑백적에 장단을 마췄다. 덧붙이자면 슈바벤 짜이퉁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독일민주공화국[DDR-동독]이 인용부호없이 [떠떳하게] 등장했다. 물론, 이 지역에서 이런 걸 말할 때 저 일간지를 주교에 밀고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는게 사실이지만 말이다."
(마르틴 발저의 1968년 에세이 "향토학"에서 발췌)
Wenn es sich um Heimat handelt, wird man leicht bedenkenlos. Volkskundler waren eine Zeit lang gefährdet wie Opium-Raucher. Andererseits gibt es heute noch Leute, die können keinen Gamsbart sehen, ohne sich gleich als schneidige Intellektuelle zu fühlen. Heimat scheint es vor allem in Süddeutschland zu geben. (...) Heimat, das ist sicher der schönste Name für Zurückgebliebenheit. Ach wir geben es doch zu, Hamburg hat mehr Abiture pro Quadratzentimeter, Berlin mehr Bücher pro Brille, Düsseldorf mehr 20. Jahrhundert pro Kopf. Trotzdem sollte man sich in Berlinhamburgdüsseldorf nicht zu viele Sorgen um uns machen. Wir kommen schon nach. Schließlich wurden unsere Ortszeiten erst vor 70 Jahren der mitteleuropäischen Zeit unterworfen. Dafür waren aber auch hiesige Stadttrommeln noch 25 Jahre nach Sedan mit den Farben der Trikolore bemalt; dann erst wurde hier schwarweißrot getrommelt. In der Schwäbischen Zeitung wiederum steht seit Jahr und Tag DDR ohne Anführungszeichen. Allerdings, man kann so etwas hier nicht notieren, ohne das Gefühl zu haben, man hätte die Zeitung dadurch beim Bischof denunziert. (Martin Walzer: „Heimatkunde“, in: Heimatkunde. Aufsätze und Reden, Frankfurt a. M. 1968, S.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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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님의 [어린이를 뮈토스화하는 독일 개혁교육학 비판] 에 관련된 글.
"Der Mensch lebt noch überall in der Vorgeschichte, ja alles und jedes steht noch vor Erschaffung der Welt, als einer rechten. Die wirkliche Genesis ist nicht am Anfang, sondern am Ende, und sie beginnt erst anzufangen, wenn Gesellschaft und Dasein radikal werden, das heißt sich an der Wurzel fassen. Die Wurzel der Geschichte aber ist der arbeitende, schaffende, die Gegebenheiten umbildende und überholende Mensch. Hat er sich erfaßt und das Seine ohne Entäußerung und Entfremdung in realer Demokratie begründet, so entsteht in der Welt etwas, das allen in die Kindheit scheint und worin noch niemand war: Heimat."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 원리, 마지막 부분)
"인간은 어떤 곳에 살든지 아직 역사의 문턱 바깥에서 살고 있다. 아니 전체와 그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아직 세계창조를, 올바른 세계로서의 창조를 기다리고 있다. 참다운 창조는 태초가 아니라 끝[장]에 있다. 이 창조는 사회와 현존재가 급진적이 될 때, 즉 자신에게 손대는데 있어서 뿌리까지 내려갈 때 비로소 착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근데 역사의 뿌리는 분명 노동하는, 창조하는, 주어진 것을 뒤집어 바꿔 새로 짜 맞추는 가운데 그것을 뛰어넘는 인간이다. 그가 자신을 스스로 움켜쥐고 자기주변을 외화와 소외 없이 현실화된 민주주의 바탕에 굳게 세우고 그것이 완성될 때 비로소 세상에 생성되는 것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번득이면서 유아기로 비춰 내려가는 것, 하지만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 바로 고향이다."(ou_topia)
이 말이 일부가 거짓임을 알게 된 것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될 때였다. 이 희망의 세계가 참작하는 욕망이 아무런 매개 없이 충족되는 유아기는 어린이를 감싸고도는 부르주아의 유년기임을 한 순간에 깨닫게 되었다. 왜 거짓이냐고? "모두에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 한 사람을 내 주장의 증인으로 세울 수 있다.
한국에 나가면 가능하면 바로 시골 고향에 간다.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라 상수도, 하수도가 없고, 화장실도 물론 재래식이다. 그러나 전혀 불편하지 않다. 모든 것이 좋다.
어렸을 때 말 안 듣고 부잡하기로 유명했다. 매를 때리려고 해도 도망가 버려서 맞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먹히는 주문이 하나 있었다. “계속해서 그러면 00에게 장가보낸다.” 란 말이었다. 옆집에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살았는데 정말 못 생겼었다 (미안해!). 장가간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건 나에게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그 여자아이를 몇 년 전에 만났다. 얼마만인가? 머리가 희끗희끗한 가정주부였다. 그녀의 언니가 아직 시골 고향에 살고 있는데 내가 고향에 갈 때마다 늘 00이가 날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래서 큰맘 먹고 전화했다.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다. 너무나 반가와 한다. 짝지랑 같이 만났는데, 짝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녁을 같이 하는 동안 내내 내 옆에 앉아서 내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내가 니를 언만큼 조아했는지 니 아냐. 00댁은 참 행복하시겠어요." 숨어서 날 훔쳐봤단다. 내가 피해 도망 다녀서. 이젠 죽어도 한이 없단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갔다. 00이는 식구와 함께 일찍 고향을 떠났다.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손은 시베리아에서 벌목하다 독일로 이주하여 공장에서 막일하는 독일계 아저씨의 손, 석면제거공사장 막일노동자의 손과 다름없다. 거칠다.
00이네는 정말 못살았다. 이건 내가 그 당시 알았던 것이 아니다. 당시 알 리가 없었다. 배고픔이 무엇인지, 힘겨운 일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 집에서 빌어먹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런 걱정 없이 자란 내개 알 리가 없었다. 지금 안다는 것도 한국의 70/80년대에서 무산자가 어떻게 살았을 거라는 추상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고향을 떠난 후 고향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한 번도 없단다. 그리고 가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단다. 그때 순간적으로 고향이 다 고향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 정체성의 본질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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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는 말은 정치적 권력이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권한이 없는 사람들, 우리말 인민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프레시안 기사에서 나타나듯이 그들이 말하는 인민이란 공문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http://m.pressian.com/section_view.html?no=119942
"인민주권의 직접 민주주의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민이 직접 주권을 행사하고 직접 정치를 하면 된다."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중산층도 돈벌면 빚잔치하기 바쁜데 나머지 부스러기들이 어떻게 직접 정치를 한단 말입니까. 저런 주장은 대인민기만입니다.
http://consortiumnews.com/2014/09/03/the-whys-behind-the-ukraine-crisis/
A senior U.S. diplomat told me recently that if Russia were to occupy all of Ukraine and even neighboring Belarus that there would be zero impact on U.S. national interests.
우크라이나 사태는 러시아 침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건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개입한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http://www.thecommonsenseshow.com/2013/03/27/what-will-follow-the-death-of-the-petrodollar/
The situation is somewhat reminiscent with happened in the lead up to the 2003 Gulf War when Iraq tried its hand at circumventing the Petrodollar system with under the table deals with France and Germany in which the Euro would be used to purchase oil. Saddam Hussein underestimated the Federal Reserve Board’s reach and paid for this miscalculation with his life because he did not have the support of powerful military allies. Iran is quite a different matter as they have friends, very dangerous friends who mean America harm.
이코노미저널 2012년 12월호는 2000년 말 프랑스와 일부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사담 후세인에게 석유를 유로로 팔라고 설득했고 그해 11월 후세인은 원유결제통화를 달러에서 유로로 전환한다고 선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유럽이 이라크전에 참전하지 않기로 결정해서 영국과 미국만 달랑 이라크에 갔는데 럼스펠트는 프랑스와 독일을 낡은 유럽이라면서 비난했습니다.
http://www.marketoracle.co.uk/Article47197.html
No mask can cover the fact that the Ukraine War is to protect the USDollar, [...] The Europeans will not let their nations be wrecked in order to defend the violent corrupted cancerous USDollar. They will choose the Gold Standard, promoted by Russia & China. They will choose to preserve their economies and their national livelihoods.
[...]
The Germans will instead defend their economy, defend their industry, and defend their laborers, as they work constructively with the BRICS nations in the non-USD alternative.
독일인들은 연준을 폐지하길 원합니다. 미국인들은 연준이 새로운 봉건주의를 준비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집 사느라 빚내고 월세내고 학자금 대출받고 결국 자기들은 은행의 노예라는겁니다.
달러 붕괴되면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http://www.bbc.com/news/uk-politics-24184728
"If you can't buy food or petrol or medicine for your kids, people will just start breaking the windows and helping themselves.
"And as soon as people see that on TV, that's the end, because everyone will think that's OK now, that's just what we all have to do. It'll be anarchy. That's what could happen 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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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이 말하는 노동자는 “현대의 노동자”(“die modernen Arbeiter”)를 의미하고, 이 현대의 노동자를 “프롤레타리아”(“die Proletarier”)라고 합니다. 현대의 노동자는 “기계복합체”(“Maschinerie”)와 분업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공업”(“die moderne Industrie”)에서 한낱 “기계의 부속물”이 되는 추상노동의 소유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대공업 자체의 산물”(“das Proletariat ist ihr [=der grossen Industrie] eigenstes Produkt”)입니다.인민의 개념 역시 자세히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인민을 독어로 ‘Volk’가 되겠는데, 공산당 선언에서는 ‘Volk’란 단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 한번은 봉건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에서, 다른 한번은 ‘참된’ 사회주의라고 자칭하는 독일[식]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에서 입니다. 독일식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에서는 ‘Volksmasse’란 단어의 일부가 되는 형태로 등장합니다.
이때 ‘Volk’는 ‘인민’으로 번역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멋모르고 따라다니는, 멍청한 사람들’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공산당 선언의 노동자를 그대로 인민이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Volk’의 긍정적인 의미는 ‘ethnos’, 즉 역사적으로 다른 집단과 구별되게 발전하여 고유성이 있고 그 멤버들이 [주로 감정적인 차원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으로서 ‘인민’보다는 ‘민족’이 더 정확한 번역이 될 것 같습니다.
이 ethnos와 nation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공산당 선언이 말하는 nation의 개념도 흔들립니다. 한편으로는 민족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일국)로 번역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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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tire system is supported by Zero Interest Rate Policy (ZIRP) which distorts asset values and discourages savings."(http://www.marketoracle.co.uk/Article47197.html)유럽중앙은행이 연준의 제로 금리 (심지어는 부분적으로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어제 ECB가 기준금리를 0.05%로 내렸습니다.
관련 중요한 건 독일연방은행장 바이드만은 "ECB가 Bad Bank"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http://uk.reuters.com/article/2014/06/25/uk-ecb-securitisation-idUKKBN0F01VV20140625)
근데 이번 조치로 ECB가 은행의 securitised debt를 사들여 Bad Bank가 되었다고 합니다(http://www.tagesschau.de/wirtschaft/euroschau1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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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은 조국이 없다. 그 단락 다음에 바로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민족들의 국민적 분리와 대립들은 이미 부르주아지의 발전과 더불어, 상업의 자유, 세계 시장, 공업 생산의 천편일률성 및 그에 상응하는 생활 상태의 천편일률성 등과 더불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Die nationalen Absonderungen und Gegensätze der Völker verschwinden mehr und mehr schon mit der Entwicklung der Bourgeoisie, mit der Handelsfreiheit, dem Weltmarkt, der Gleichförmigkeit der industriellen Produktion und der ihr entsprechenden Lebensverhältnisse.
여기서 Volk를 민족으로 번역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민족들의 국민적 분리와 대립이 부르주아지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친후이와 쑤원이 쓴 "전원시와 광시곡"을 보면 인민이라는 말이 농민공동체에 기반한 농민민주주의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로 '받들어진' '인민'이란 분리될 수 없는 추상적인 전체이며, 개개의 구체적인 '인' 또는 '민'은 모두 이 추상적 전체에 부속되어 그것의 보호를 받고 속박도 받으므로 인민의 구체적인 가치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추상적 '인민'이 부여한 권한을 획득한 '나'는 개개의 구체적인 '인'과 '민'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갖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란 인민을 대표하여 정치하는 자이며 그 합법성은 민의와 인심에 순응한 데서 나온다고 합니다. "하늘에 응하고 사람을 따라 세상의 임금이 되어 다스린다"
저자들은 유럽 봉건제와 중국 봉건제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유럽 농민은 지연공동체의 속박을 받았고" 토지에 묶여 있었다는 말이겠죠 "그들의 부자유는 법률로 규정된 것이었으나 중국의 종법농민은 종법 혈연공동체의 속박을 받았으며" 종법이란 가부장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부자유는 자연인의 본성으로부터 직접 유래된 것이다. 법률상의 부자유는 결국 범위가 한정되지만 자연인의 부자유는 사회 각 구석구석까지 미쳤다. 서유럽의 부자유는 입법을 통해 폐지하거나 봉건법권의 통제를 벗어나(도시로 도망치면) 중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아무리 깊은 산골이라도 자유로운 구석이 없었다.(화목한 무릉도원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두려움'의 윤리가 바로 이른바 인정이다. 인정은 부자간의 장유의 정으로부터 군신간의 정, 은혜를 베푸는 주인과 피보호자간의 정, 좌주와 문생간의 정, 교주와 신도간의 정, 지도자와 추종자간의 정으로까지 확장되고, 형제간의 수족의 정으로부터 고향, 본가, 길드, 파벌, 동갑나기의 정에까지 미친다. 이처럼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는 인정문화의 아주 넓은 그물망에서 인성, 곧 자유개성은 정말로 천지간에 도망할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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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정신이란 “느끼고 직관하는 것으로서는 감각적인 것, 환타지로서는 상, 의지로서는는 목적 등 이런 것들을 대상으로 삼는 가운데, 이런 그의 대상화된 현존형식에 대립하는 아니면 그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그의 고귀한 내면성, 즉 사유에 [눈을 돌려] [사유의 결핍을] 만족시키고 사유를 [완전무결하게?] 그의 대상으로 획득하려는 욕구”가 있는 것이라고 하고, 이어 사유는 이런 욕구때문에 [사유의 작용인] 생각(Gedanke)의 “견고한 비동질성” 속으로 빠져 들어가 자신를 상실하고 모순에 허덕인다고 하는데 대체 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네요. (엔치클로페디아 §11)‘견고한’ 것이 저런 ‘정의 그물망’ 같은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내재화된 외적 법칙, 규정 등을 따라 만들어진 생각(Gedanke)의 외적 형식이 아닐까 합니다. 언어 차원에서 말하자면 문법적/논리적으로 제대로 만들어진 문장처럼 다른 사람들이 얼른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근데 이런 ‘문장’이 정신이 엄연하게 느끼고 직관하는 ‘내용’과 맞아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하는 것인지 …
내용의 엄연성은 아픔에서 가장 생생한 것. 형식논리가 아픔의 엄연성을 담아내는 논리가 되어야 한다는 게 헤겔이 애기하는 것? 그 길이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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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9일 뉴욕타임스는 홍은희의 신간 “The Birth of Korean Cool: How One Nation Is Conquering the World Through Pop Culture,”을 소개하는 글을 실었습니다.http://www.nytimes.com/2014/08/31/books/review/the-birth-of-korean-cool-by-euny-hong.html?_r=0
Hong finds that “many Koreans ascribe Korean success to han,” even though others claim that han can kill you: There’s even a medically recognized disease called hwa-byong, which means “anger illness.”
홍은희는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의 성공을 '한'에 돌린다고 했지만 거꾸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외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억울', '분' 같은 정서는 한국의 사회경제적 분석이 없다면 굉장히 설명하기 힘든 겁니다.
"영화 내용은 저질이었으나 나에게는 많은 감동을 주었다. 영자라는 한 소녀가 돈을 벌겠다는 굳은 각오로 서울에 왔다가 순결을 잃고 직장 생활에도 만족을 못 느껴 버스 차장을 한다. 그러다가 교통 사고로 팔병신이 되어 끝내는 창녀로 타락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영자는 버스회사에서 받은 30만원을 집에 보내며 자기의 그런 비극은 조금도 알리지 않았다. 영자가 편지를 쓸 때 난 막 울고 싶었지만 눈화장 때문에 억지로 참아야했다." 석정남, 불타는 눈물(어느 여공의 일기)
한국인들은 서러웠어요. 그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한류의 성공은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라고 주장하는 글이 있습니다.
http://www.newsweek.com/2014/08/15/korean-cool-ultimate-national-marketing-ploy-263505.html
What’s the secret to Korea’s success? Some experts believe it’s simpler than it appears. Koreans, says Lee, are highly skilled at packaging and marketing. “In K-pop, the songwriters are not Korean. They’re European. The people who do the editing studied in the United States; they’re multinational. The dance choreographers are from everywhere. It’s really a factory.” But can packaging and marketing really be the silver bullet that pulls an entire national industry from total obscurity? “Look at Samsung,” Lee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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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아시아타임즈에 소개된 Henry C K Liu의 글 "Korea under Park Chung-hee"을 잠깐 소개할까 합니다. 이 글의 앞부분을 번역했습니다. 계속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는데까지 해보려고 해요. 제가 이 글을 번역하는 이유는 현재 언론에서 지겹도록 계속되고 있는 박정희 비판은 뭔가 이상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http://www.atimes.com/atimes/Korea/HJ25Dg01.html
1954년 남한은 유엔 제네바 회의에서 통일을 위해 총선을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북한은 남한이 미국 식민지이며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고 있는 한 자유로운 선거는 가능하지 않다며 이 제안을 거부했다. 남한의 인구가 북한의 두 배이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총선을 실시하는 것은 북한에게는 자살행위였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억압적인 정부 밑에서 15년이 지난 뒤, 미국이 임명한 한국의 허수아비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은 광범위한 부패와 전제적인 통치에 반대하는 학생 대중시위에 의해 1960년 4월 26일 자리에서 물러나 망명을 떠난다. 전반적인 정치 혼란과 마비 사태 속에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1917-79)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뒤이어 반부패 캠페인은 일반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박정희는 군 경력 초기 남한 군대 내부의 공산주의자 세포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지만 한국 전쟁 당시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오클라호마주 실 요새(Fort Sill)에서 1년간 특별 훈련을 받았다.
박정희는 중앙계획과 산업정책을 실시했고 전후 일본을 남한 경제개발을 위한 모델로 생각했다. 박정희 행정부는 극우적이며 반시장적이었기 때문에, 상인을 천시하는 유교문화를 떠오르게 했다. 박정희는 산업정책을 통한 경제개발을 위해 은행을 국유화하고 국채를 사용해서 외환거래를 엄격히 통제했으며, 냉전 기간 미국의 반공산주의를 활용하여 미국 시장에 우선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수출을 보조했다.
박정희는 일본 모델을 따라서 남한경제를 현대화하기 위해 핵심기관 세 개를 설립했다. 경재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경제계획위원회, 산업정책과 수출 지원을 위한 상공부, 경제계획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 발행을 위한 재무부. 네 번째 기관이며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지도 아래 형성된 한국중앙정보부(KCIA)는 국가안보를 위한 박정희의 기구였다. 국내에서 대규모 반일 대중시위 속에서 박정희는 1965년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박정희는 정부의 개발계획에서 수익을 챙기려는 가족통제 대기업인 재벌에게 철강업과 같은 기본산업을 국영기업으로 남겨두라고 압력을 가했다. 박정희는 경제 개발을 위해 급속한 산업화와 국가번영을 위해서는 시장 근본주의보다 산업정책에 정보를 적용하는 계획경제가 더 효과적인 체제라는 것을 증명했다.
박정희는 베트남에 30만 장병을 파병한 덕분에 미국은 전쟁구매를 통해 한국경제를 지원하고 그의 지배를 정치적으로 용인하는 것으로 보상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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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희생된 남한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일본식 기생파티를 하던 도중 암살되었다. 암살범은 미국 중앙정보부와 긴밀히 협력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다.
암살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라고 의심했던 미국 중앙정보부의 승인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미국 외교정책은 냉전 기간 전아시아의 전제적인 동맹국들인 남한, 대만,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나라들에게 “민주주의”를 향한 이름뿐인 정치개혁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박정희 암살은 남한 상층부에서 공산주의 동조라는 암을 제거했다.
박정희는 미국과 소비에트 사이의 데탕트(긴장완화)를 틈타 통일을 위한 시도를 했다. 통일의 기본 원칙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5월 평양을 방문한 뒤, 역사적인 1972년 7월 4일 공동성명에 나와 있다. 통일을 향한 움직임은 박정희에 대한 암살 협박 후 돌연 보류되었고 박정희는 미국 중앙정보부의 강요에 못이겨 이후락을 해고하고 김재규로 교체했다.
박정희의 암살은 한국 통일을 위한 발전을 30년간 연기했다. 그 사건은 1974년 8월 8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사임으로 이끌었던 지정학적 암류의 영향이었다. 당시 많은 관찰자들은 닉슨의 역사적인 공산주의 중국 방문에 대한 국내의 반대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지고 난 뒤 닉슨의 데탕트 정책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미중관계 정상화의 가속도도 마찬가지였다. 지미 카터 대통령 하에서, 미중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건은 대만을 중국 국내 문제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에서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이 통과됨에 따라 대만을 완전한 정상화에 대한 걸림돌로 남겨두는 것으로 바뀌었다. 미국 국내법인 이 법은 중국 주권과 국내 문제에 노골적으로 관여한다. 미국은 대만 정권이 “민주주의”가 되었다면서 대만을 군사 방어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당시 장징궈 대만 대통령에게 미국은 정치 개혁 여부에 따라 대만을 지원하겠다고 조언했다.
20년간의 박정희 지배는 지금까지도 한국 정치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Cui bono(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이론을 적용하면, 미국과 재벌 양쪽 모두 박정희의 암살에서 이득을 얻었다. 미국은 한국 통일을 막았고 재벌은 국가 통제로부터 더 많은 시장의 자유를 얻었다. 그 뒤 이 재벌들은 남한에서 신자유주의적 시장근본주의를 향한 길을 텄으며, 20년 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경제를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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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2일 시작된 태국 금융전염병이 1997년 12월 남한에 번졌을 때, 아시아 금융위기는 지역적인 것이 아닌 글로벌한 것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이 국가부채에 대한 디폴트 선언을 하기 바로 직전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을 통해 미국 행정부가 남한을 구제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그 이유는 브라질 은행이 한국 채권과 고정환율을 쓰는 통화 사이에 금리차익을 통해 “캐리 트레이드” 수익을 챙기는데 사용되는 토털 리턴 스왑(TRS)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한국의 디폴트 선언은 남미로 빨리 번졌을 것이고, 과거에 그랬던 것보다 미국 경제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미국의 다국적 은행들, 재무부, 연방준비은행은 미국 은행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목적으로 남한의 부실채권을 분류하는 문제에서 충돌했다. 그러나 그러한 유연함을 즐기는 한국 은행은 없었다.
아시아 금융위기가 사신(邪神)으로서의 신자유주의 시장근본주의와 약탈적인 상어들의 대양으로서의 세계화에 노출되기 전인 1980년대와 90년대에 중국의 개혁가들은 남한과 일본의 개발 모델을 둘 다 면밀히 연구했다. 1997년 이후로, 남한과 일본 양국 모두 아시아의 신 경제질서를 위한 잠재력으로서 중국과 긴밀한 상호무역관계를 발전시키려고 해왔다.
박정희는 1969년 세 번째 임기에 출마하기 위해 헌법을 수정하려고 했다. 가톨릭 신자이며 신민주당 대선후보인 야당 지도자 김대중은 1971년 박정희에 대항해 출마했으나 실패했다.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는 유신헌법을 국회를 통해 밀어붙였다.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에서 박정희 정권 반대 캠페인을 주도했다. 1973년 8월,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도쿄 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강한 반응이 나오자 1주일 뒤 김대중은 서울에서 석방되었고 즉시 자택연금을 당했다.
1976년 3월 1일 김대중은 다른 민주주의 활동가들과 함께 “민주화를 위한 광복절 선언”을 발표했다. 그 후 그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78년 자택연금에서 풀려났다. 1979년 10월 박정희 암살 직후, 김대중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는 복구되었다. 몇 달 동안 정치적 불안이 있은 뒤, 군부 내 또 다른 조직이 권력을 잡았고 김대중은 1980년 5월 반역죄로 다시 투옥되었다.
그 해 11월 군사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82년 12월, 그는 형집행정지로 미국으로 갈 수 있었고, 그의 망명은 2년 뒤인 1985년 초에 끝났다.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자택연금을 당했다. 1987년 7월, 그는 모든 혐의에서 벗어났고 그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는 완전히 복구되었다. 그는 대선에 출마했지만 1987년과 1992년에 패배했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전염병이 쓰나미처럼 남한을 강타했던 1997년 12월, 김대중은 40.3%의 표를 얻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례없는 금융위기의 한복판에서 정부를 인수한 김대중은 나라를 파산일보직전에서 구출하기 위해 워싱턴 컨센서스에 기반한 국제통화기금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집권 초기에 시작된 개혁과 구조조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경제를 완전히 복구할 가망이 거의 없는 영구적인 쇠퇴로 몰아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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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하이네가 알제리로 이민가는 동포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뭔가 다짐하는 대목에서 박정희대통령이 파독 광산노동자/간호사들을 얼싸않고 울었다는 애기가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뇌리를 스친 건 왠일? 파독 광산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을 보고 이북으로 망명해 버린 대사관 노무관도 겹치고...저의 주제로 다시 돌아와...
변증법이란? 정반합이니 하는 또다른 형식논리말고.
저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해 봅니다.
1.우선 과학적인 방법으로서 우리의 세계와의 관계(Weltbezug)가 주제다.
2.우리와 세계와의 관계는 우리가 세계와 어떤 교제(Umgang)를 나누는 가에 있다.
3.이 교제는 열려있다.
4.열려 있다는 말은 교제의 법칙(규율, 예의 등등)이 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교제하는 가운데 주제화(비판, 토론, 교정, 파기, 발전 등등) 된다는 말이다. 형식논리는 단지 하나의 교제법칙일 뿐이다.
5.이게 반성(Reflexion)이다.
6.반성의 매체는 말(logos)이다. 외형화되어야 한다.
7.주체뿐만 아니라 대상도 자기안으로 반성되어(“in sich reflektiert”) 있다.
8.대상의 반성의 매체는 역사다.
9.변증법은 이런 3가지 차원을 함께 반성하는 가운데 세계와 교제하는 과학적인 방법이다.
10.그래서 교제는 끝이 없다 (“unendliche Reflexion”). 반면, 모든 교제법칙은 파기
된다.
11.지양은 파기를 전제한다. (* 기독는 죽음을 믿는다. 모든 것이 남김없이 죽는다는 것이다. 영혼까지. 그리고 부활을 믿는다. 뭔가 죽지 않는 것이 불씨처럼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아니다. 헤겔도 영생을 주제화하지 않는다. 헤겔이 말하는 무한(Unendlichkeit)은 반성의 무한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프롤레타이아트 정의도 남김없이 죽은 자만 부활할 수 있다는 예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12.무한한 반성은 교제가 열려있다는 말이다.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는 말도 자기 안으로 반성되어 있다. 형식논리적으로 해결되는 문장이 아니다. 이 말이 맞는가 하면 바로 그 정반대 “노동자는 조국이 있다”란 말도 맞는다. 이걸 두고 “미래에 건설될 조국”을 운운하지만, 이건 형식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형식논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역사로 내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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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한겨레나 경향 같은 언론이 하는 말이 너무 수상해서 그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프레시안, 오마이 할 것 없이 하나도 믿을 수가 없어요. 외신은 입만 열면 박근혜한테 독재자 딸이라고 하는데 자기들이 그렇게 말하면 열받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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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제일 타겟은 교제를 가두는 제반 허섭스레기다. 제일의 적은 사유의 국정원 형식논리이고 한반도의 교제를 가두는 냉전/분단이데올로기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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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딸을 대통령으로 뽑으면 우린 이라크인들처럼 죽어야하나요? 한국사람들이 그거 보고 좋아하면 미친 짓이에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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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얼마나 부분적으로 복구되었건 간에, 그것은 워싱턴의 지시에 따른 김대중의 잘못된 경제정책때문이 아니라 그것에도 불구하고였다. 하버드대 경제학자 마틴 펠스타인(Martin Feldstein)은 금융위기는 위기가 발생하기 전 한국의 경제개발 모델의 구조적 실패가 아니라 국경을 넘는 핫머니(투기성 단기자금) 운동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IMF의 실패를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그것은 금융시장 탈규제를 통한 세계화의 실패였다. 효율적이고 성공할 수도 있었던 한국 기업들은 금융위기의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없어서 파산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강력한 수요를 갖고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떨 때는 100%까지 뛰어오르기도 했던 금리와 남한 통화를 위기 이전의 극히 일부 수준으로 떨어뜨려버린 환율의 급작스럽고 폭넓은 변동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이 집권했을 때 남한에서 두 번째로 큰 대기업이었던 대우는 도산했다. 재벌체제의 대량파괴로 인해 남한 경제는 성장을 위한 강력한 엔진을 빼앗겼으며, 글로벌 경제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실행가능한 대체를 찾을 수 없었다.
금융대란에서 대체를 찾으려던 김대중은 실패한 경제정책에 새로운 탄력을 주기 위해 대북 포용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30년 전 박정희의 통일 구상을 부활시킨 것이었다. 부상하는 중국과 강한 무역관계를 가진 통일 한국은 IMF의 세계화된 시장 근본주의가 제공할 수 없는 경제 활성의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1972년 7월 4일 공동성명을 통해 남북은 통일을 위한 원칙에 합의했다. 1. 통일은 외세에 대한 의존이나 간섭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2. 통일은 양측 모두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3. 양측은 이념과 정치체제의 차이를 극복하고 한겨레로서 국가통일을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들은 워싱턴에게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는데 모든 진전은 중단되었고 1979년 박정희 암살 후 완전히 매장되었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과 북한 지도자 김정일은 통일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박정희의 첫 시도 후 30년이 지나서,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공동선언은 “평화적인 국가통일을 갈망하는 한민족의 숭고한 뜻에 따라”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서 가진 역사적 만남과 정상회담의 결과였다. 한국 통일에 대한 공헌 덕분에 김대중은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공동선언의 서명자 중 한 명인 김정일에게는 이 상이 수여되지 않은 것은 노벨 위원회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중략]
1997년 당시 57개 계열사와 미화 6백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남한 최대의 산업체 현대의 후계자이며 남한의 대북 화해정책의 배후에 있는 재벌 지도자였던 정몽헌(55세)은 2004년 8월 3일 본사건물 12층에서 투신자살했다. 정몽헌은 2000년 봄 남한정부를 통해 비밀리에 북한에게 1억 달러를 건네준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이 돈은 김정일이 김대중의 평양방문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유인책이었다고 했다.
정몽헌의 아버지이며 현대그룹 설립자인 정주영은 북한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들은 현대와 북한과의 거래를 다루었다. 아버지는 1992년 대선에서 실패했다. 2004년 초 현대는 2000년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관광특구, 공업단지, 스포츠단지, 댐, 공항, 통신시설, 발전소를 위한 계약을 따내기 위해 총 4억 달러의 대북송금을 불법조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계약들은 북한에서 현대를 “해외” 선두기업으로 만들었다.
2000년 회담은 철도와 거대한 개성공단 건설계획을 포함하는 상업 프로젝트의 형태로 계속되었던 두 한국의 화해 프로세스의 시작이었다. 여전히 현대 그룹의 핵심 기업 중 하나인 엔지니어링과 건설은 이 프로젝트에서 최초 계약업체 중 하나가 될 예정이었다.
아들들에게 기업을 분배했던 정주영의 다섯 번째 아들인 정몽헌은 뉴저지주 러더포드에 위치한 페얼리 딕킨슨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83년 현대전자가 설립된 뒤 기업을 운영했으나 1997년에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은 뒤 자신의 지분을 포기했고 이름을 하이닉스 반도체로 바꾸었다. 모회사인 현대전자산업주식회사에 대한 마지막 구조조정은 2001년에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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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과 2001년 1월이 만기인 50억 달러의 부채가 만든 “유동성 경색”이 회사의 당면 문제였기 때문에 10억 달러의 자산을 국내와 해외에 팔아버리고 7천명의 노동자를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국영 한국산업은행이 같은 달 만기예정인 4억 달러가 넘는 현대전자 채권을 연장해주기로 결정을 하고 나서 물의를 일으키자 타이밍을 맞춰 이 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현대전자에게까지 미친 관용행위는 1998년까지 최대 재벌이었던 현대그룹을 포함하여 남한 산업의 거물들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 계획의 일환이었으며, 재정난을 겪고 있는 기업들이 상반기만 넘기면 버틸 수 있다는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또 한국산업은행은 현대그룹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현대 엔지니어링, 현대건설, 현대상선이 발행한 1억2천5백 달러의 채권을 연장해주었다. 주로 정부가 통제했던 상업은행은 수억 달러의 대출상환을 유예해주었다. 한국산업은행은 과도한 부채를 떠안고 있던 현대엔지니어링과 현대건설의 회사채를 지원했다. 구조조정 계획은 2001년에 만기인 42억 달러 부채의 상환을 요구했는데, 그 절반 이상의 자금을 한국산업은행이 조달했다.
해외 신자유주의 애널리스트들은 주요 기업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곤경에 처한 재벌이 구조조정 계획에 순응하게 해서 워싱턴 컨센서스와 IMF의 조건에 따라 수익을 못내는 기업체들을 팔아치우기로 한 김대중 대통령의 약속과 어긋난다고 비난했다. 시장 근본주의자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에 처한 기업들을 지원하는 정부의 노력은 투자자들 사이에서 일정하게 신뢰를 얻은 것처럼 보였다. 2001년까지 그 가치의 약 50%를 잃어서 약 500으로 떨어진 코스피지수는 이번 주 목요일 약 1,330에 거래되었다.
독점금지와 특허권침해 소동과 미국, 유럽연합이 부과한 상계관세에도 불구하고, 하이닉스 반도체는 2004년 하반기 D램 시장에서 영역을 계속 넓혀갔고, 심지어 또 다른 한국 거물인 삼성전자 다음으로 세계 2위의 메모리칩 제조업체가 되었다.
2002년 5월 11-14일부터 암살된 박정희의 딸이며 국회의원인 박근혜는 고도의 정치 드라마를 위한 행동으로서 북한의 민족화해위원회의 초청을 받고 평양을 비공식 방문했다. 상징적으로 그녀는 북경에서 평양까지 북한 전세비행기를 탔으며, 38선에 중무장한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마을인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돌아왔다.
박근혜의 깜짝 방문은 남한의 복잡한 정치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그녀는 북한 관리들이 “반민족적, 반통일적, 친미 배신자”라고 딱지를 붙인 이회창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하면서 극단적 보수 성향의 야당인 한나라당에서 탈퇴했다. 또한 2002년 12월 대선이 다가오면서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이 대선에서 승리한 새 대통령이 화해를 위한 “햇볕정책”의 옹호자인 김대중과 교체될 예정이었다. “한국의 미래를 위한 통일”을 위한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새 정당을 만든 박근혜는 대통령감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박근혜의 북한 방문은 그녀가 담당하고 있는 유럽-코리아재단과 연관되었으며, 김정일과의 만남은 장자크 그로하(Jean-Jacques Grauhar)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 소장이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6년부터 1992년까지 7년간 그로하는 평양에서 컨설턴트였고 사업상의 이유로 평양과 서울을 계속 왕래했으며 북한 투자와 관련하여 유럽 기업들을 지도했다.
그는 박근혜의 평양방문에 동행했으며, 이 방문은 정지된 남북관계와 1995년 중반 이래 경제협력면에서 유럽연합이 평양을 위해 했던 것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위해 북한 경제학자들을 위한 북경의 훈련원을 설립하고 민간 기업과 공장을 시장에서 운영하기 위한 전문 노동력을 생산할 수 있도록 승인을 얻은 것은 박근혜가 고위 직책을 맡고 있는 유럽-코리아 재단의 공이었다.
박근혜의 2002년 평양 방문은 전임자인 빌 클린터의 정책을 뒤집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비효율적 대북정책에 대한 남측과 유럽연합의 이탈을 암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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