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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님의 [가우크와 다른 구동독 사회주의 지성인 - 토마스 브라쉬] 에 관련된 글.
베를린 도로테엔 공동묘지에 누워있는 토마스 브라쉬.
좀 헤맸다. 기억엔 "철의 천사 (Engel aus Eisen)"가 굉장히 컸다. 큰 동상을 찾아 돌았으나 찾지 못했다. 안내판을 다시 보고 가 보니 "철의 천사"가 생각보다 작다.
Was ich habe, will ich nicht verlieren, aber
wo ich bin will ich nicht bleiben, aber
die ich liebe will ich nicht verlassen, aber
die ich kenne will ich nicht mehr sehen, aber
wo ich lebe will ich nicht sterben, aber
wo ich sterbe, da will ich nicht hin
bleiben will ich, wo ich nie gewesen bin.
내가 가진 것, 그건 잃고 싶지 않다, 나아가
내가 있는 곳에 머물고 싶지 않다, 나아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고 싶지 않다, 나아가
내가 아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나아가
내가 사는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 나아가
내가 죽는 곳, 거긴 가고 싶지 않다,
머물고 싶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그] 곳에.
내가 가진 것, 그건 잃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있고 싶은 곳엔 머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사람들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죽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죽는 곳, 거긴 가고 싶지 않다
머물고 싶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그]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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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크와 다른 구동독사회주의 지성인 - 토마스 브라쉬(Thomas Brasch)
토마스 브라쉬(1945-2001)는 동독체제 비판 때문에 감옥생활까지 한 동독 작가, 시인, 영화제작자. 70년대 말 볼프 비어만의 국적박탈 등에 항의하다 동독을 떠남. 아래는1981년 바이에른 주 영화상을 받게 된 ‚철의 천사’(Engel aus Eisen) 수상식에서 브라쉬가 한 연설을 번역한 것임. 당시 바이에른 주 총리였던 슈트라우스는, 극우는 아닐지라도, 극우가 기민/기사연합의 오른쪽에 당을 세우는 것을 막아내는 역할을 한 최우파 인사. 동독은 떠났지만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토마스 브라쉬와 슈트라우스가 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아이러니했다.
연설을 글로 옮긴 것은 여기 (해당 사이트의 두번째 단락 이하)
토마스 브라쉬 연설은 약 2분 20초 쯤에서 시작됨.
번역
내 정치적 입장과 정반대인 바이에른 주 총리 [슈트라우스]의 손에서 이 상을 받게 되는 상황을 놓고 내 친구들 사이에 논쟁이 불거졌다. 나는 이 자리를 빌려 내가 왜 이 상을 혹은 다른 상을 받거나 거절하는 것이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밝히고 싶다. 이런 문제제기의 뒷면에서 사실 더 중요한 문제가 드러난다.
휴전과 전쟁, 국가라는 질서의 붕괴와 그 질서가 살아남기 위해서 미쳐 날뛰는 몸부림, 죽었지만 죽지 않고 우리를 지배하는 낡은 것과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것 등 이 시대를 휘정거리게 하는 모순에 비하면 내가 일하면서 처해있는 모순관계는 하찮은 것처럼 보인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할 권리를 주장하는 아나키스트적 목소리 높임(Anspruch)에 기념비를 세우려고 하는 한편 동시에 바로 그런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바라고 또 불가능하게 만들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즉 지배자의 배려로 이런 일을 하는 모순이다. 이 모순이,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다지 중요한 모순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모순에 처해있는 당사자에게는, 국가의 돈으로 [작품]활동하는 동시에 [그 작품으로] 국가를 공격하는, 체제 전복적인 아웃싸이더를 작품의 주제로 삼음과 동시에 권력에 동조하는 모순이 결정적인 것이 된다.
이 모순은 돈이 지배하는 시대에 활동하는 모든 예술가들이 처해 있는 모순이며, 단지 표면상으로만 해소되는 모순이다. [공공의 공간에서] 뒷걸음질 쳐 예술생산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든지 그렇다. 둘 다 참다운(wirklich) 해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피해 옆으로 비껴가는 모순이 바로 희망이기 때문이다. [모순을 직면하여 발생한] 희망이 비로소 [능력을 요구하고 떡고물을 주는] 능력사회와 국가권력을 관통하고 또 모든 사회 일원을 관통하는 균열의 크기를 제대로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그런 모순을 생산했고 예술을 [떡고물에 연연하는] 비굴함과 재능을 고집하는 것 사이에서 자신을 찢어야 하는 상황으로 끌고갔다. 예술이 이 모순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예술은 이 모순에 자신을 갖다 던지고 더 적합하게 서술하는 일외 [달리 할 일이 없다]. 인간존엄성에 대치되는,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의 말소에 기여하는 모든 세력의 [협력만]이 이 모순을 해소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내가 제작한 영화의 주제다. 범죄자들을 주제로 삼았지만 그렇다. [범죄는 단지 범법행위만이 아니다.] 대려 범법행위는 반항의 가장 본연적인 표현이다. 나는 이 상을 처음 언급한 모순의 표현으로 받는다. 내 작품활동은 계속 모순을 견디어 내고 더욱 첨예화하는데 집중할 것이다.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영화도 역시 그런 영화가 될 것이고 상으로 받는 5만 마르크는 이 영화 제작에 필요한 돈으로 쓰여질 것이다. 나는 나를 훈련한 동독의 영화대학에 감사한다. 이 영화를 뽑은 심사원들에게 감사한다. 이 영화를 가능하게 하고 함게 일했던 모든 이에게 , 프로듀서, 캇터, 배우, 장식, 촬영 등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세상은 떠났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두 범죄자, 글라도우와 푈펠에게 감사한다.
"나는 나를 교육시킨 동독 영화대학에 감사한다."란 말에 관중이 야유한다.
"동독 나뻐"했으면 기립박수했겠지... 지금도 다르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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