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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푸른 눈, 갈색 눈』(윌리엄 피더스 저)

 

다른 이의 신발을 신고 걷는다는 것 (레디앙, 오탁근 학생. 연세대 노수석 생활도서관 / 2012년 7월 28일, 3:31 PM)
[서평]『푸른 눈, 갈색 눈』(윌리엄 피더스 저/ 한겨레출판)
자리에 앉을 때 그녀는 학생들과 함께 인디언 천막을 세운 뒤 가르치려고 계획했던 아메리카 인디언 수족(Sioux)의 기도문이 앞에 놓여있는 걸 보았다. “오, 위대한 영(靈)이여. 내가 상대방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걷기 전에는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 p.14
『푸른 눈, 갈색 눈』은 한 초등학교 교사 제인 엘리어트가 60년대에 마틴 루터 킹의 암살 직후에 충격을 받고, 교사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인종차별 관련 교육이자 한 실험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 날은 갈색 눈을 가진 사람은 우월한 날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날은 푸른색 눈을 가진 사람이 우월한 날이었다. 제인은 실험 내내 정말 교묘하게 사람들의 인식을 조장하고, 특정 색의 눈을 가진 사람이 우월하다는 “설정”에 피험자 모두를 깊숙이 빠져들게 만든다. 실험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꾸준히 이루어지다가 나중에는 성인에게까지 진행하게 된다.
이 실험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있다. 당당하던 사람들이 정말 말하는 대로 위축되고 소심해진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친하던 아이들이 혹은 알지도 못하던 성인들이 계급을 이루게 되는 것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에 따라 수반되는 폭력들은 구성원들에게 너무 쉽게 용인된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푸른 눈” 혹은 “갈색 눈”과 같은 단순한 사실 묘사들이 상대방을 비하하는 단어로 쓰이기 시작한다. 차별적인 시선이 만들어내는 편견이 실제로 “사실”이 되어가는 것이 보인다.
사실 『푸른 눈, 갈색 눈』은 엄밀한 사회학 혹은 교육학 학술서는 아니다. 어떤 메커니즘으로 차별이 생기고, 어떤 메커니즘으로 편견이 생기고, 어떤 메커니즘으로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 시키는지 책의 주인공 교사도 저자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단지 보여준다. ”푸른 눈, 갈색 눈“이란 이름의 실험이 어떤 방식으로 어느 집단에서 어떤 모습으로 진행이 됐는지 보여준다.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이 상황을 인지하고, 어떤 과정으로 변해가고, 어떤 모습으로 폭력을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읽는 이는 다시 한 번 왜 사람들이 저렇게 행동하게 되었을까 고민하게 만든다.
사회과학의 이론은 자연과학의 이론과 달리 통계적 접근 말고는 반증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론에 맞지 않는 데이터는 “소수의 무시할 수 있는 예외“로 취급당하기 쉽고 심지어 통계를 통해 접근해도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왜곡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이 학술적으로는 얼마나 통하는지는 모르나,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통념과 맞지 않는 경우를 보았을 때 쉽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물론 못생긴 애들 중 착한 애들이 있지, 하지만 그들은 예외일 뿐이고 일반적으로는 성격이 더럽다”
“내 주변에 똑똑한 흑인이 있지, 하지만 대부분은 멍청하잖아?“
“그래 네 주변에 더럽지 않은 게이가 있다 쳐. 하지만 걔가 예외겠지. 그리고 네가 걔가 안 더러운지 어떻게 알아“
이런 방식의 사고방식으로 편견을 마음속으로도 더욱 굳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본인의 모습에서 어떠한 소수자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들지만 각각 소수자성을 가진 사람들이 왜 타인의 소수자성을 당연히 이상하다고 바라볼까. 어떤 상황을 거치고서야 이런 이야기들에 당당하게 “좆까”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될까.
누가 이런 폭력적인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일까. 왜 제인이 있던 마을 사람들은 “푸른 눈, 갈색 눈“ 실험이 본인들을 인종차별주의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을까. 이들은 정말 인종차별주의적인 행동을 내재화시키지 않았을까. “갈색 눈”은 왜 사실 묘사가 아니라 폭력적인 말이었을까.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 권력적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는지 확신하는 것은 얼마나 기만적인 것일까.
이런 의문들 속에서 한걸음 나아가기위해 무엇보다 다른 이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고자 한다. 물론 이렇게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본다고 타인이 될 수는 없다. 단지 비슷한 경험을 할 뿐이다.
이런 한계를 “푸른 눈, 갈색 눈” 실험이 그 자체만으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책 내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한 백인 여성이 실험 속에서 체험을 해 보았으나, 그 뒤 뒤따라오는 한 흑인 여성 자신이 평소 인종차별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느끼는지 얘기하기 전에는 명확히 이해했다고 보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허나, 좀 더 마음을 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백인 여성이 실험을 거친 후에 흑인 여성의 일상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흑인 여성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처럼.
공교롭게도 오늘(28일 토요일) 오후 네 시에 탑골공원에서 잡년행진이 있다. 잡년행진은 어찌 보면 ”여성들이 성폭력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창녀(slut)처럼 옷을 헤프게 입지 말아야 한다.”라는 누군가에게는 마땅한 이야기라고 생각된 이야기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겐 너무나 폭력적인 이야기였고, 그 경찰관은 왜 이것을 폭력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다른 이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지 않은 채로 이야기하지 않아서 아닐까. 오늘 한번 같이 걸어보며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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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속기고] 통합진보당 사태의 정치적 의미

 

http://www.redian.org/archive/8451
“누가 되어도 진보정치 혁신 어렵다” (레디앙, 김민하 진보신당 기획국장 / 2012년 7월 12일, 11:26 AM)
[연속기고①] 통합진보당 사태 보는 진보신당 당원 시각
진보신당에게는 통합진보당의 미래를 염려하고 도래할 파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교훈을 찾아 새로운 진보정치를 만들어 나가야 할 사명이 있다. 통합진보당의 운명은 곧 진보정치의 이정표를 바꾸는 것이 되는데, 이것에 한데 묶여 함께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의 미래를 전망하며, 새로운 진보정치를 위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뜯어 고쳐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소위 혁신파가 내세우는 혁신의 방향이 진보의 혁신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국민정당, 포괄정당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민주통합당이다. 통합진보당의 혁신파가 내세우는 진보정치의 혁신이라는 것은 이것과 거의 동일한 전술을 구사하면서 자신들이 민주통합당보다 이것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당장은 민주통합당과 비슷하니까 국민들이 일시적으로 지지를 표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정적인 국면에서 국민들은 진보정치를 선택하기 보다는 민주통합당을 그냥 선택할 것이다.
혁신파가 승리하더라도 이것이 진보정치의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두 번째 이유는 결국 이것이 민주통합당과의 선거연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 색채의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이 정부가 대중의 욕망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할 경우 대중들은 다른 대안을 찾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진보정치로부터 새로운 대안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 오히려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은 극우정치이다. 
2012년에 등장할 민주정부가 실패하고 나면 대중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대안을 찾게 될 것이다. 이때 진보정치가 대안을 제출할 수 있을 정도의 선명성을 확보하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연 2012년의 민주정부 구성에 참여하고 나서도 통합진보당이 대중들에게 ‘우리는 진보정당이므로 민주정부와는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닐 것이다. ‘진보적 정권교체’와 함께 흥한 진보정치는 민주정부의 쇠락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여의도 정치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현실에 부합하는 정책의 코디네이팅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확한 깃발을 드는 것이다. 민주정부와 그 친구들의 좌측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정도의 진보정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의 혁신파는 이것을 사실상 거부한다.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은 ‘민주정부와 통합진보당의 좌측에 새로운 진보정치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가?’, ‘통합진보당 사태로부터 새로운 진보정치가 얻어야 할 교훈은 어떤 것이 있는가?’와 같은 것들이다. 
 
http://www.redian.org/archive/8785
‘진성당원제’와 진보정당, 그 복합성 (레디앙, 한윤형 '미디어스' 기자. 미디어비평가 / 2012년 7월 16일, 12:16 PM)
[연속기고②] 목적 아닌 수단이되, 회피할 수 없는 수단
민주노동당엔 각 정파끼리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기제가 필요했고, 또한 매번 그 중재의 결론이 다르게 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원들의 투표에 의해 권력이 창출된다는 원칙은 그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장집과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정당 내 민주주의’의 강조가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하고 카리스마적 정치인을 희구해도 한국의 진보정당은 진성당원제를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진성당원제는 당연히 진보정당 운동의 목표가 아닌 수단에 불과하지만, 한국 사회 실정에서 재정과 조직화의 문제에 있어 ‘회피할 수 없는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3연합과 참여계, 그리고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는 과거 민주노동당의 정파연합보다도 훨씬 이질적이며 이들 역시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어떤 심급을 필요로 한다. 진성당원제에 대한 일정한 후퇴를 함의한다고도 볼 수 있는 혁신안에 대한 평가도 여기에서 가능할 수 있다.
‘과반 투표 과반 찬성’ 규정을 없앤 것은 경쟁을 줄이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진보세력은 그간 여러 사회운동 단체에서 과반 투표를 위해 미투표자를 독려하다 보니 조직투표와 대리투표가 일어나는 상황을 겪었고, 통합진보당의 선거 문화 역시 이 토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경쟁은 완화될 수 있는 걸까. ‘비례대표에 대한 100% 전략 공천’이란 개선책은 결국 하나의 선거를 생략하는 대신 당권선거에 걸린 ‘지분’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역사에서 평당원들이 본인에게 주어진 권리들을 주체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정파의 선택에 포섭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새로나기’ 특위의 쇄신안은 결과적으로 볼 때 그 ‘포섭’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포섭될 이들의 선택권을 제약하자는 쪽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통합진보당의 쇄신안은 진성당원제를 결정적으로 후퇴시켜서 문제인 게 아니라, 진성당원제를 결정적으로 후퇴시킬 수는 없는 상황에서 (차라리 그게 가능했다면 장단점을 따져볼 만한 일이었으리라) 진성당원제의 가능성마저 잘라버리는 근시안적인 대책이 나온 상황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그 ‘조직’이란 것의 실체는 투표에 대한 정보 및 관심을 위임하는 일종의 느슨한 사적 네트워크다. 자주파가 평등파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해왔던 조직화의 실체도 ‘구국의 강철대오’의 조직이 아니라 이러한 네트워크에서의 우위였다.
그리고 이는 한국 사회 시민들의 삶의 형식과 정서에 밀착한 것이었다. ‘인간적이고 술 잘 사주는 어떤 선배’에 의해 운동으로 이끌린 그들은 선거 때마다 누구를 찍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도 들었고 지침이 없을 경우 스스로 전화를 걸어 “누구를 찍어야 해요?”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통합진보당에게 다른 상황은, 이 당에 있어 2012년은 당의 명운이 결정적으로 달려 있는 중요한 해라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 기존 당원이나 새로 들어가는 당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사실상 이번 선거에서 끝났다는 것이 통합진보당원의 처지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다. 따라서 정치에 관심있는 시민에게 ‘통합진보당 입당’이 현명한 선택지가 아닌 것은 당권선거 이전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더 난감한 것은 여기서 통합진보당이 잘 하기만을 바라야 하는 진보신당원의 사정이다. 만약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함께 정권교체에 성공한다면, 이후에 통합진보당 외부의 진보세력 분파에게도 역할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정권교체에 실패한다면, 아마도 통합진보당은 민주통합당에 각을 세우면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할 것이고 외부 분파의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사태의 향방이 바뀔 수는 없다는 것이 또한 객관적인 현실이다. 통합진보당은 진성당원제를 수용한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12년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돋보이게, 진보정당 운동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을 논평가로 후퇴(?)시켜버렸다. 
 
http://www.redian.org/archive/8952
진보좌파의 ‘재벌개혁론’은 어디? (레디앙,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소수의견><88만원 세대> 저자 / 2012년 7월 18일, 2:36 PM)
[연속기고③] 좌파의 안목을 가진 경제개혁 담론 부재
장하준‧정승일‧이종태 등과 김상조‧이병천‧유종일‧정태인 등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주주자본주의 논쟁이니 신자유주의 논쟁이니 재벌개혁 논쟁이라는 말로 부르는 경우는 있어도 재벌해체 논쟁이라 부르는 경우는 없다.
대타협론자 대 재벌개혁론자의 논쟁은 사실 재벌개혁 문제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반적인 한국경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논쟁이었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논리를 가지고 논쟁에 참여해왔다.
10년간 재벌타협론과 재벌개혁론이 논쟁해왔고, 10년 전에 비하면 양자의 입장은 눈에 띠게 좁혀졌다. 아니, 애초부터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양자 모두 자신이 ‘진짜 진보’라는 양, 상대를 “좌파 신자유주의자”로 규정하거나 ‘박정희주의자’라는 식으로 몰아갔지만 본질적인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성장전략을 중심으로 국민경제를 사고한다는 점이다. 흔히, 주주자본주의의 원칙이 1원 1표(또는 1주 1표)라면, 이해당사자 자본주의의 원칙은 1인 1표라고 말한다.
장하준 모델에서 핵심은 국가가 산업정책을 기획하고 은행을 통해 재벌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관료의 ‘창조적’ 역할은 틈만 나면 강조되지만 노동자의 역량은 그렇게 평가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민주적 참여가 배제된 재벌개혁은 그것이 아무리 ‘민족경제’니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더라도 좌파의 ‘재벌개혁론’이라 말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이를테면 과거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시절 송태경이 정교화시킨 노동자기업소유 및 우리사주 전략과 현실적용 사례들, 그리고 철학자 김상봉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갈파한 노동자 경영참여의 철학 말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생산/경영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이다. 물론 노동자 경영참가나 기업소유가 여전히 여러 가지 이론적‧실천적 난맥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좌파의 결론이 될 순 없더라도 좌파적 재벌개혁론의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http://www.redian.org/archive/9068
통합진보당 사태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모색 (레디앙, 이현대 사회진보연대 운영위원 / 2012년 7월 20일, 10:09 AM)
[연속기고④] 민주노조운동 혁신·재건 전략 필수적
통합진보당의 출범, 총선에서의 야권연대 실패와 새누리당의 승리, 총선 이후 불거진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이후 당권파와 비당권파 간의 폭력을 수반한 첨예한 갈등은 두 개의 커다란 효과를 낳았다. 하나는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 등 지배세력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이념, 색깔공세를 야기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 민중운동 세력에게 통합진보당을 대체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혹은 새로운 노동자정치세력화운동의 절박함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구 당권파는 신 당권파가 통진당을 민주당화시킨다고 비판하지만, 구 당권파와 신당권파 모두 민주통합당과의 선거연합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다는 전략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선거연합이지 온 국민의 지탄거리로 전락한 통진당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민통당과의 선거연합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혁신이라는 미명으로 탈운동화, 자유주의화의 경향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미 민주노동당 활동과정에서 드러났던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론으로 그들을 지지, 묵인해온 것이 현재의 통진당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반기부터 진행된 ‘3자 통합당 반대 선언운동본부’ 활동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당 건설에 대한 선언운동본부 내부에 이견이 부각되면서,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전국·지역 투쟁전선 구축을 위한 공동활동,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논의는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각 정파의 주요 관심사가 모두 당 건설에 쏠려 있다는 반증이다. 
당 건설 논의가 중심이 되면서 구체적인 현장, 지역의 공동실천 논의는 상대화되고 있다. 현장 활동가들의 논의가 당 건설을 중심으로 진행될 경우 당의 성격과 노선, 건설경로 등에 대한 이견으로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공동 논의와 실천조차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현재와 같이 지역, 현장의 운동역량이 취약한 조건에서 노동자정당 건설을 중심으로 역량을 배치할 경우, 민주노조운동을 혁신·재건하기 위한 역량은 그 만큼 취약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정당 건설 추진 세력들이 현재의 지역과 현장의 주체적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당 건설로 역량을 집중할 경우 민주노조 운동의 활동력을 더욱 축소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 동안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실패는 한편으로는 진보정당의 대리정치, 의회와 선거 중심의 활동에 원인이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총이 민주노조답게 조합원을 정치적 주체로 세우기 위한 현장 활동(학습과 투쟁, 정치적 실천)을 소홀히 하고, 노조를 진보정당운동의 동원부대로 전락시킨 것에 더 큰 문제점이 있다.
민주노총이 투쟁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굳건히 하지 않을 때, 진보정당은 노조운동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당의 우경적 노선전환과 원내 정당화 경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중운동의 취약한 토대를 강화시키는 계획 없이 ‘집권’을 위해 노조의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데 매몰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노조의 민주성·연대성·투쟁성을 바탕으로 계급적 단결과 투쟁력,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
재벌(자본)-보수정당·자유주의정당-관료집단-검찰·경찰 등 억압적 국가장치-보수언론 등 이데올로기장치의 강고한 동맹을 깨뜨리고 사회적 관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사회적 세력과 힘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선거를 통한 집권은 가능할 수도 있지만 사회구조의 변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은 노동자계급이 이념적, 조직적으로 보수주의 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과는 분별 정립하여 정치적, 사회적으로 투쟁력과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운동 전략을 말한다. 그 동안 추진되어온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정치적으로 파산한 상황에서 이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라는 개념의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계급적 단결을 통해 노동해방, 평등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노동조합운동’과 ‘변혁적인 노동자정당’, ‘민중연대 투쟁전선’을 포함하는 운동 전략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 동안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실패의 교훈을 곱씹으며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입체적인 운동전략을 세워야 할 때이다.
첫째,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공세와 타임오프, 복수노조 악법을 앞세운 노조탄압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통진당 사태로 인해 진보정당운동 또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자칫 새로운 노동자정당/진보정당 건설의 전망도 확보하지 못하고, 민주노조운동 또한 혁신의 계기를 확보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상호 입장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생하기 위한 협력과 연대가 절실한 시점이다. 현재 각 정치세력 독자적으로 운동의 전망을 개척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인 만큼 협력과 경쟁의 지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금속을 중심으로 산별과 지역의 활동가들이 결집하고 있는 변혁정치모임이 현재적 수준에서 한계가 많지만, 활동가들의 지역별 공동논의와 공동실천의 틀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 건설 논의 과정이 민주노조의 혁신과 강화를 위한 자기 활동을 방기하는 과정이 되지 않도록 당의 성격, 정강정책, 건설경로 등을 중심으로 각 조직의 입장을 논쟁하는 방식 보다는 노조운동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 정당운동의 의미를 재정립하고, 지역과 현장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의 혁신방안과 지역/현장에서의 공동투쟁과 정치활동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쟁점을 중심으로 실천적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변혁적인 노동자정당, 사회운동적인 노동자정당은 노선의 선명함과 주체들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민주노조 운동, 대중운동의 역량과 투쟁력이 취약한 조건에서 조급하게 노동자정당을 추진한다면 정당으로서의 사회적 영향력이 거의 없거나, 통진당처럼 자유주의화/우경화의 길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둘째, 지난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현 시기 노동자정당/진보정당의 위상과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의회진출만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 선거주의-의회주의 정당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사회운동의 활성화, 이를 토대로 한 민중연대 투쟁전선의 강화를 자신의 분명한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정당이라는 방향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 또한 현재와 같은 취약한 운동조건에서 인적, 물적 자원을 당으로 집중시키겠다는 사고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과 신자유주의에 맞서 대안적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민주적, 계급적 사회운동의 역량과의 협력과 연대를 통해 당의 전략과 노선, 활동가 양성프로그램을 수립해야 한다.
당 정책단위의 아이디어성 정책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과 민중연대 투쟁전선의 요구를 바탕으로 당의 정강 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공동논의와 공동투쟁을 통해 대중운동의 요구와 당의 노선을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
지역 당 조직의 경우 지역의 노조와 사회운동을 혁신·재건시키기 위한 연대와 협력의 센터로서 자기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역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기본 역량을 갖추지도 못한 채 선거구별 선거대응 조직으로 전락하고 있는 당의 지역조직을 혁신하고 지원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정부/지자체로부터의 자주적이고,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저항하는 지역운동을 형성하기 위한 지역 당 조직과 건강한 사회운동, 노조의 연대와 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기이다.
셋째, 노동현장의 조직화와 관련하여 당으로의 자원 동원(당원 가입을 통한 재정확보, 당직/공직 선거에서의 표 동원)에만 관심을 갖는 기존의 관성을 전면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현장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여전히 투표권조차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중소영세 비정규사업장 노동자들의 무권리 상태를 개선하지 않고 현장 노동자들이 지역의 정치활동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쉽지 않다. 무권리의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노조운동과 어떻게 연대하고 협력할 것인지 공동의 전략마련이 필요하다.
그 나마 조직된 노동자 당원들의 경우 선거 때 당의 선거운동원으로 동원하는 것을 넘어서 현장에서의 정치활동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민주노조운동의 혁신과 강화를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쳐야 하는지 당의 입장과 계획이 있어야 한다.
재벌문제와 관련해서도 탈삼성과 같은 모호한 아이디어성 기획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조직 확대와 주체적 역량 강화, 재벌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위한 제도적 요구가 함께 결합될 수 있도록 노조운동과의 공동전략수립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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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정치 사이 – ‘패권주의’ 문제 (레디앙, 최태섭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공동저자 / 2012년 7월 24일, 12:24 PM)
[연속기고⑤] 사람의 고통과 상식에서 출발하는 진짜 헤게모니를 찾아야
우리가 목격한 패권주의적 행태의 요란함 뒤에는 방향과 목적의 상실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패권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그다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구 당권파는 자신의 이념이나 비전을 드러내지 않고 계속해서 자유주의적인 사상의 자유나, 검찰의 탄압 같은 것 뒤에 숨었다. ‘대체 왜 저 북한이 내 북한이다 말을 못해!’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그들은 계속해서 숨을 곳만을 찾아다녔다. 이들은 기껏해야 북한의 3대 세습, 인권탄압, 미사일발사 같은 사안들에 대해 과감하게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런 북한의 부재는 오늘날 북한이 남한사회에서 갖는 위상의 급격한 변화 때문일 것이다. 냉전구도를 체화한 채로 이루어졌던 건국과, 한국전쟁, 이어진 남북간의 진영대결에서 북한은 그야말로 주적이자, 실제의 위협이고, 유혹이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꽤 오랜 시간동안 남한보다 더 나은 경제적 여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제가 급성장함과 동시에 남북간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에서 북한이 갖는 위치는 놀랍게도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결과 남한의 대중은 북한과의 통일에 들어갈 통일비용을 걱정하고, 남북관계가 국내 경제에 미칠 여파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남한정부의 색깔몰이에 시큰둥해하는 합리적 인간이 되었다. 즉 단순히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먹고살기 바빠 기각되면서 북한의 존재는 남한사회에서 점점 흐려졌다.
분단문제는 전혀 새로운 조건과 사람들 속에서 급격한 위상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의 담지자를 자처했던 이들은 그 변화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하기보다는 그것을 일종의 신화로 만드는 길을 택했다. 그 이후의 행보는 세속화된 종교들의 논리와 매우 흡사하게 돌아갔다. 문제의 근본과 대면하는 것을 피하며 그것을 절대화 할 때, 현실에서 그것의 공백을 메우며 작동했던 것은 힘과 조직의 논리였다.
이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 내기보다는 신화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들로부터 찾았다. 이 불안정한 존재방식을 보충하는 것은 논리나 설득이 아니라 ‘힘’이었다. 힘의 이러한 사용방식은 이들이 끝없는 권력의지를 갖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힘은 점차 정당성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 순환 속에서 조직은 괴물이 되어갔다.
이 역사적 희생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기를 그만두었고, 이들은 고약한 농담 같은 역사적 뒤틀림을 고스란히 체현하며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갔다.
중요한 것은 이 방향의 상실이 단지 이들에게만 한정된 조건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아쉽게도 과거의 영광이 앞으로의 갈 길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뒤이은 통진당 사태가 보여준 것들을 여기에 더하면 이념, 조직, 정치세력화를 포함하여 민주화로부터 비롯된 진보의 흐름이 모두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NLPDR도, 끈끈한 조직력도, 야권통합도 이 사태를 구원하지 못하며, 민주화원로들과 진보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민주화가 소환된다면 그것은 민주화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존하는 세력에 대한 안티테제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민주화는 이미 그 자체의 길을 계속 이어갈 동력을 상실했고, 정당성이나 도덕성을 손쉽게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한국이 다시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민주화는 수구적 우파만 ‘당한 것’이 아니라, 민주 진보에도 동시에 주어진 동일한 환경이다.
자본주의 질서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이 민주 진보에 의해 신자유주의가 추동된 덕에 우파진영의 페널티는 상당부분 사라졌다. 한미FTA, 미국산쇠고기수입, 강정해군기지 등등의 문제에서 각을 세울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이미 이전 정부부터 추진되었던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정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손에 쥐고 있는 한줌거리도 안 되는 것들을 지키겠다는 부질없는 움직임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 또 핵심의 부재를 우회하려는 얄팍한 술수들 속에도 정치는 없다.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리고 있는 태도 속에도 정치는 없다. 정확한 방법은 나도 모르겠으나, 시작 지점만은 확실하다. 사람들의 고통과 상식에서 출발하되, 거기에 영합하거나 부화뇌동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넘어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진짜 헤게모니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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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되어도 진보정치 혁신 어렵다” (레디앙, 김민하 진보신당 기획국장 / 2012년 7월 12일, 11:26 AM)
[연속기고①] 통합진보당 사태 보는 진보신당 당원 시각
진보신당에게는 통합진보당의 미래를 염려하고 도래할 파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교훈을 찾아 새로운 진보정치를 만들어 나가야 할 사명이 있다. 통합진보당의 운명은 곧 진보정치의 이정표를 바꾸는 것이 되는데, 이것에 한데 묶여 함께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의 미래를 전망하며, 새로운 진보정치를 위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뜯어 고쳐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소위 혁신파가 내세우는 혁신의 방향이 진보의 혁신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국민정당, 포괄정당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민주통합당이다. 통합진보당의 혁신파가 내세우는 진보정치의 혁신이라는 것은 이것과 거의 동일한 전술을 구사하면서 자신들이 민주통합당보다 이것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당장은 민주통합당과 비슷하니까 국민들이 일시적으로 지지를 표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정적인 국면에서 국민들은 진보정치를 선택하기 보다는 민주통합당을 그냥 선택할 것이다.
혁신파가 승리하더라도 이것이 진보정치의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두 번째 이유는 결국 이것이 민주통합당과의 선거연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 색채의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이 정부가 대중의 욕망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할 경우 대중들은 다른 대안을 찾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진보정치로부터 새로운 대안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 오히려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은 극우정치이다. 
2012년에 등장할 민주정부가 실패하고 나면 대중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대안을 찾게 될 것이다. 이때 진보정치가 대안을 제출할 수 있을 정도의 선명성을 확보하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연 2012년의 민주정부 구성에 참여하고 나서도 통합진보당이 대중들에게 ‘우리는 진보정당이므로 민주정부와는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닐 것이다. ‘진보적 정권교체’와 함께 흥한 진보정치는 민주정부의 쇠락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여의도 정치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현실에 부합하는 정책의 코디네이팅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확한 깃발을 드는 것이다. 민주정부와 그 친구들의 좌측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정도의 진보정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의 혁신파는 이것을 사실상 거부한다.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은 ‘민주정부와 통합진보당의 좌측에 새로운 진보정치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가?’, ‘통합진보당 사태로부터 새로운 진보정치가 얻어야 할 교훈은 어떤 것이 있는가?’와 같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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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당원제’와 진보정당, 그 복합성 (레디앙, 한윤형 '미디어스' 기자. 미디어비평가 / 2012년 7월 16일, 12:16 PM)
[연속기고②] 목적 아닌 수단이되, 회피할 수 없는 수단
민주노동당엔 각 정파끼리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기제가 필요했고, 또한 매번 그 중재의 결론이 다르게 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원들의 투표에 의해 권력이 창출된다는 원칙은 그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장집과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정당 내 민주주의’의 강조가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하고 카리스마적 정치인을 희구해도 한국의 진보정당은 진성당원제를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진성당원제는 당연히 진보정당 운동의 목표가 아닌 수단에 불과하지만, 한국 사회 실정에서 재정과 조직화의 문제에 있어 ‘회피할 수 없는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3연합과 참여계, 그리고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는 과거 민주노동당의 정파연합보다도 훨씬 이질적이며 이들 역시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어떤 심급을 필요로 한다. 진성당원제에 대한 일정한 후퇴를 함의한다고도 볼 수 있는 혁신안에 대한 평가도 여기에서 가능할 수 있다.
‘과반 투표 과반 찬성’ 규정을 없앤 것은 경쟁을 줄이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진보세력은 그간 여러 사회운동 단체에서 과반 투표를 위해 미투표자를 독려하다 보니 조직투표와 대리투표가 일어나는 상황을 겪었고, 통합진보당의 선거 문화 역시 이 토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경쟁은 완화될 수 있는 걸까. ‘비례대표에 대한 100% 전략 공천’이란 개선책은 결국 하나의 선거를 생략하는 대신 당권선거에 걸린 ‘지분’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역사에서 평당원들이 본인에게 주어진 권리들을 주체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정파의 선택에 포섭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새로나기’ 특위의 쇄신안은 결과적으로 볼 때 그 ‘포섭’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포섭될 이들의 선택권을 제약하자는 쪽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통합진보당의 쇄신안은 진성당원제를 결정적으로 후퇴시켜서 문제인 게 아니라, 진성당원제를 결정적으로 후퇴시킬 수는 없는 상황에서 (차라리 그게 가능했다면 장단점을 따져볼 만한 일이었으리라) 진성당원제의 가능성마저 잘라버리는 근시안적인 대책이 나온 상황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그 ‘조직’이란 것의 실체는 투표에 대한 정보 및 관심을 위임하는 일종의 느슨한 사적 네트워크다. 자주파가 평등파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해왔던 조직화의 실체도 ‘구국의 강철대오’의 조직이 아니라 이러한 네트워크에서의 우위였다.
그리고 이는 한국 사회 시민들의 삶의 형식과 정서에 밀착한 것이었다. ‘인간적이고 술 잘 사주는 어떤 선배’에 의해 운동으로 이끌린 그들은 선거 때마다 누구를 찍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도 들었고 지침이 없을 경우 스스로 전화를 걸어 “누구를 찍어야 해요?”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통합진보당에게 다른 상황은, 이 당에 있어 2012년은 당의 명운이 결정적으로 달려 있는 중요한 해라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 기존 당원이나 새로 들어가는 당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사실상 이번 선거에서 끝났다는 것이 통합진보당원의 처지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다. 따라서 정치에 관심있는 시민에게 ‘통합진보당 입당’이 현명한 선택지가 아닌 것은 당권선거 이전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더 난감한 것은 여기서 통합진보당이 잘 하기만을 바라야 하는 진보신당원의 사정이다. 만약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함께 정권교체에 성공한다면, 이후에 통합진보당 외부의 진보세력 분파에게도 역할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정권교체에 실패한다면, 아마도 통합진보당은 민주통합당에 각을 세우면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할 것이고 외부 분파의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사태의 향방이 바뀔 수는 없다는 것이 또한 객관적인 현실이다. 통합진보당은 진성당원제를 수용한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12년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돋보이게, 진보정당 운동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을 논평가로 후퇴(?)시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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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좌파의 ‘재벌개혁론’은 어디? (레디앙,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소수의견><88만원 세대> 저자 / 2012년 7월 18일, 2:36 PM)
[연속기고③] 좌파의 안목을 가진 경제개혁 담론 부재
장하준‧정승일‧이종태 등과 김상조‧이병천‧유종일‧정태인 등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주주자본주의 논쟁이니 신자유주의 논쟁이니 재벌개혁 논쟁이라는 말로 부르는 경우는 있어도 재벌해체 논쟁이라 부르는 경우는 없다.
대타협론자 대 재벌개혁론자의 논쟁은 사실 재벌개혁 문제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반적인 한국경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논쟁이었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논리를 가지고 논쟁에 참여해왔다.
10년간 재벌타협론과 재벌개혁론이 논쟁해왔고, 10년 전에 비하면 양자의 입장은 눈에 띠게 좁혀졌다. 아니, 애초부터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양자 모두 자신이 ‘진짜 진보’라는 양, 상대를 “좌파 신자유주의자”로 규정하거나 ‘박정희주의자’라는 식으로 몰아갔지만 본질적인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성장전략을 중심으로 국민경제를 사고한다는 점이다. 흔히, 주주자본주의의 원칙이 1원 1표(또는 1주 1표)라면, 이해당사자 자본주의의 원칙은 1인 1표라고 말한다.
장하준 모델에서 핵심은 국가가 산업정책을 기획하고 은행을 통해 재벌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관료의 ‘창조적’ 역할은 틈만 나면 강조되지만 노동자의 역량은 그렇게 평가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민주적 참여가 배제된 재벌개혁은 그것이 아무리 ‘민족경제’니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더라도 좌파의 ‘재벌개혁론’이라 말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이를테면 과거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시절 송태경이 정교화시킨 노동자기업소유 및 우리사주 전략과 현실적용 사례들, 그리고 철학자 김상봉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갈파한 노동자 경영참여의 철학 말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생산/경영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이다. 물론 노동자 경영참가나 기업소유가 여전히 여러 가지 이론적‧실천적 난맥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좌파의 결론이 될 순 없더라도 좌파적 재벌개혁론의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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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사태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모색 (레디앙, 이현대 사회진보연대 운영위원 / 2012년 7월 20일, 10:09 AM)
[연속기고④] 민주노조운동 혁신·재건 전략 필수적
통합진보당의 출범, 총선에서의 야권연대 실패와 새누리당의 승리, 총선 이후 불거진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이후 당권파와 비당권파 간의 폭력을 수반한 첨예한 갈등은 두 개의 커다란 효과를 낳았다. 하나는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 등 지배세력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이념, 색깔공세를 야기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 민중운동 세력에게 통합진보당을 대체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혹은 새로운 노동자정치세력화운동의 절박함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구 당권파는 신 당권파가 통진당을 민주당화시킨다고 비판하지만, 구 당권파와 신당권파 모두 민주통합당과의 선거연합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다는 전략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선거연합이지 온 국민의 지탄거리로 전락한 통진당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민통당과의 선거연합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혁신이라는 미명으로 탈운동화, 자유주의화의 경향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미 민주노동당 활동과정에서 드러났던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론으로 그들을 지지, 묵인해온 것이 현재의 통진당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반기부터 진행된 ‘3자 통합당 반대 선언운동본부’ 활동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당 건설에 대한 선언운동본부 내부에 이견이 부각되면서,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전국·지역 투쟁전선 구축을 위한 공동활동,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논의는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각 정파의 주요 관심사가 모두 당 건설에 쏠려 있다는 반증이다. 
당 건설 논의가 중심이 되면서 구체적인 현장, 지역의 공동실천 논의는 상대화되고 있다. 현장 활동가들의 논의가 당 건설을 중심으로 진행될 경우 당의 성격과 노선, 건설경로 등에 대한 이견으로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공동 논의와 실천조차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현재와 같이 지역, 현장의 운동역량이 취약한 조건에서 노동자정당 건설을 중심으로 역량을 배치할 경우, 민주노조운동을 혁신·재건하기 위한 역량은 그 만큼 취약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정당 건설 추진 세력들이 현재의 지역과 현장의 주체적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당 건설로 역량을 집중할 경우 민주노조 운동의 활동력을 더욱 축소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 동안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실패는 한편으로는 진보정당의 대리정치, 의회와 선거 중심의 활동에 원인이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총이 민주노조답게 조합원을 정치적 주체로 세우기 위한 현장 활동(학습과 투쟁, 정치적 실천)을 소홀히 하고, 노조를 진보정당운동의 동원부대로 전락시킨 것에 더 큰 문제점이 있다.
민주노총이 투쟁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굳건히 하지 않을 때, 진보정당은 노조운동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당의 우경적 노선전환과 원내 정당화 경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중운동의 취약한 토대를 강화시키는 계획 없이 ‘집권’을 위해 노조의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데 매몰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노조의 민주성·연대성·투쟁성을 바탕으로 계급적 단결과 투쟁력,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
재벌(자본)-보수정당·자유주의정당-관료집단-검찰·경찰 등 억압적 국가장치-보수언론 등 이데올로기장치의 강고한 동맹을 깨뜨리고 사회적 관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사회적 세력과 힘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선거를 통한 집권은 가능할 수도 있지만 사회구조의 변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은 노동자계급이 이념적, 조직적으로 보수주의 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과는 분별 정립하여 정치적, 사회적으로 투쟁력과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운동 전략을 말한다. 그 동안 추진되어온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정치적으로 파산한 상황에서 이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라는 개념의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계급적 단결을 통해 노동해방, 평등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노동조합운동’과 ‘변혁적인 노동자정당’, ‘민중연대 투쟁전선’을 포함하는 운동 전략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 동안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실패의 교훈을 곱씹으며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입체적인 운동전략을 세워야 할 때이다.
첫째,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공세와 타임오프, 복수노조 악법을 앞세운 노조탄압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통진당 사태로 인해 진보정당운동 또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자칫 새로운 노동자정당/진보정당 건설의 전망도 확보하지 못하고, 민주노조운동 또한 혁신의 계기를 확보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상호 입장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생하기 위한 협력과 연대가 절실한 시점이다. 현재 각 정치세력 독자적으로 운동의 전망을 개척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인 만큼 협력과 경쟁의 지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금속을 중심으로 산별과 지역의 활동가들이 결집하고 있는 변혁정치모임이 현재적 수준에서 한계가 많지만, 활동가들의 지역별 공동논의와 공동실천의 틀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 건설 논의 과정이 민주노조의 혁신과 강화를 위한 자기 활동을 방기하는 과정이 되지 않도록 당의 성격, 정강정책, 건설경로 등을 중심으로 각 조직의 입장을 논쟁하는 방식 보다는 노조운동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 정당운동의 의미를 재정립하고, 지역과 현장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의 혁신방안과 지역/현장에서의 공동투쟁과 정치활동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쟁점을 중심으로 실천적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변혁적인 노동자정당, 사회운동적인 노동자정당은 노선의 선명함과 주체들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민주노조 운동, 대중운동의 역량과 투쟁력이 취약한 조건에서 조급하게 노동자정당을 추진한다면 정당으로서의 사회적 영향력이 거의 없거나, 통진당처럼 자유주의화/우경화의 길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둘째, 지난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현 시기 노동자정당/진보정당의 위상과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의회진출만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 선거주의-의회주의 정당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사회운동의 활성화, 이를 토대로 한 민중연대 투쟁전선의 강화를 자신의 분명한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정당이라는 방향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 또한 현재와 같은 취약한 운동조건에서 인적, 물적 자원을 당으로 집중시키겠다는 사고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과 신자유주의에 맞서 대안적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민주적, 계급적 사회운동의 역량과의 협력과 연대를 통해 당의 전략과 노선, 활동가 양성프로그램을 수립해야 한다.
당 정책단위의 아이디어성 정책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과 민중연대 투쟁전선의 요구를 바탕으로 당의 정강 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공동논의와 공동투쟁을 통해 대중운동의 요구와 당의 노선을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
지역 당 조직의 경우 지역의 노조와 사회운동을 혁신·재건시키기 위한 연대와 협력의 센터로서 자기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역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기본 역량을 갖추지도 못한 채 선거구별 선거대응 조직으로 전락하고 있는 당의 지역조직을 혁신하고 지원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정부/지자체로부터의 자주적이고,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저항하는 지역운동을 형성하기 위한 지역 당 조직과 건강한 사회운동, 노조의 연대와 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기이다.
셋째, 노동현장의 조직화와 관련하여 당으로의 자원 동원(당원 가입을 통한 재정확보, 당직/공직 선거에서의 표 동원)에만 관심을 갖는 기존의 관성을 전면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현장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여전히 투표권조차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중소영세 비정규사업장 노동자들의 무권리 상태를 개선하지 않고 현장 노동자들이 지역의 정치활동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쉽지 않다. 무권리의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노조운동과 어떻게 연대하고 협력할 것인지 공동의 전략마련이 필요하다.
그 나마 조직된 노동자 당원들의 경우 선거 때 당의 선거운동원으로 동원하는 것을 넘어서 현장에서의 정치활동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민주노조운동의 혁신과 강화를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쳐야 하는지 당의 입장과 계획이 있어야 한다.
재벌문제와 관련해서도 탈삼성과 같은 모호한 아이디어성 기획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조직 확대와 주체적 역량 강화, 재벌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위한 제도적 요구가 함께 결합될 수 있도록 노조운동과의 공동전략수립이 필요한 것이다.
 
http://www.redian.org/archive/9386
신화와 정치 사이 – ‘패권주의’ 문제 (레디앙, 최태섭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공동저자 / 2012년 7월 24일, 12:24 PM)
[연속기고⑤] 사람의 고통과 상식에서 출발하는 진짜 헤게모니를 찾아야
우리가 목격한 패권주의적 행태의 요란함 뒤에는 방향과 목적의 상실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패권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그다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구 당권파는 자신의 이념이나 비전을 드러내지 않고 계속해서 자유주의적인 사상의 자유나, 검찰의 탄압 같은 것 뒤에 숨었다. ‘대체 왜 저 북한이 내 북한이다 말을 못해!’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그들은 계속해서 숨을 곳만을 찾아다녔다. 이들은 기껏해야 북한의 3대 세습, 인권탄압, 미사일발사 같은 사안들에 대해 과감하게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런 북한의 부재는 오늘날 북한이 남한사회에서 갖는 위상의 급격한 변화 때문일 것이다. 냉전구도를 체화한 채로 이루어졌던 건국과, 한국전쟁, 이어진 남북간의 진영대결에서 북한은 그야말로 주적이자, 실제의 위협이고, 유혹이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꽤 오랜 시간동안 남한보다 더 나은 경제적 여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제가 급성장함과 동시에 남북간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에서 북한이 갖는 위치는 놀랍게도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결과 남한의 대중은 북한과의 통일에 들어갈 통일비용을 걱정하고, 남북관계가 국내 경제에 미칠 여파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남한정부의 색깔몰이에 시큰둥해하는 합리적 인간이 되었다. 즉 단순히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먹고살기 바빠 기각되면서 북한의 존재는 남한사회에서 점점 흐려졌다.
분단문제는 전혀 새로운 조건과 사람들 속에서 급격한 위상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의 담지자를 자처했던 이들은 그 변화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하기보다는 그것을 일종의 신화로 만드는 길을 택했다. 그 이후의 행보는 세속화된 종교들의 논리와 매우 흡사하게 돌아갔다. 문제의 근본과 대면하는 것을 피하며 그것을 절대화 할 때, 현실에서 그것의 공백을 메우며 작동했던 것은 힘과 조직의 논리였다.
이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 내기보다는 신화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들로부터 찾았다. 이 불안정한 존재방식을 보충하는 것은 논리나 설득이 아니라 ‘힘’이었다. 힘의 이러한 사용방식은 이들이 끝없는 권력의지를 갖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힘은 점차 정당성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 순환 속에서 조직은 괴물이 되어갔다.
이 역사적 희생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기를 그만두었고, 이들은 고약한 농담 같은 역사적 뒤틀림을 고스란히 체현하며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갔다.
중요한 것은 이 방향의 상실이 단지 이들에게만 한정된 조건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아쉽게도 과거의 영광이 앞으로의 갈 길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뒤이은 통진당 사태가 보여준 것들을 여기에 더하면 이념, 조직, 정치세력화를 포함하여 민주화로부터 비롯된 진보의 흐름이 모두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NLPDR도, 끈끈한 조직력도, 야권통합도 이 사태를 구원하지 못하며, 민주화원로들과 진보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민주화가 소환된다면 그것은 민주화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존하는 세력에 대한 안티테제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민주화는 이미 그 자체의 길을 계속 이어갈 동력을 상실했고, 정당성이나 도덕성을 손쉽게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한국이 다시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민주화는 수구적 우파만 ‘당한 것’이 아니라, 민주 진보에도 동시에 주어진 동일한 환경이다.
자본주의 질서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이 민주 진보에 의해 신자유주의가 추동된 덕에 우파진영의 페널티는 상당부분 사라졌다. 한미FTA, 미국산쇠고기수입, 강정해군기지 등등의 문제에서 각을 세울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이미 이전 정부부터 추진되었던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정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손에 쥐고 있는 한줌거리도 안 되는 것들을 지키겠다는 부질없는 움직임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 또 핵심의 부재를 우회하려는 얄팍한 술수들 속에도 정치는 없다.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리고 있는 태도 속에도 정치는 없다. 정확한 방법은 나도 모르겠으나, 시작 지점만은 확실하다. 사람들의 고통과 상식에서 출발하되, 거기에 영합하거나 부화뇌동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넘어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진짜 헤게모니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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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진보정당인가? (레디앙, 이택광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 / 2012년 7월 27일, 11:31 AM)
[연속기고⑥]좌파성,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로 드러나야
19대 총선의 의미를 되새기자면, 그동안 미약하나마 명맥을 유지해왔던 진보의 이념이 부르주아 정치 무대에서 일방적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민주당의 왼쪽을 담당하는 역할로 자신을 한정함으로써 통합진보당은 ‘원내진출’을 다시 이루어낼 수가 있었다.
진보신당과 녹색당이 후보를 내고 선거에 참여했지만, 그 지지율은 한 자리 수 밑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최소한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에서 진보의 이념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에서 과연 진보정당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녹색당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로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이들은 현실주의와 급진주의의 대립으로 치부하면서 전자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나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문제는 급진주의를 버리고 현실주의로 간다면 진보도 대중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정당제도가 더 이상 인민의 요구를 적절하게 재현해주지 못하는 위기의 국면이 도래했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타당하다. 지난 10여 년간 본격화하기 시작한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가 이 위기를 추동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진실에 주목해야한다.
‘시민’을 어떤 특정 장소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의 존재로 규정했을 때, 한국 사회가 변화해온 방향은 이런 ‘시민’의 소멸, 다시 말해서 시민사회의 붕괴를 부추겨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흐르는 속성’을 띠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흐르는 자본주의’는 쉽게 말해서 주거권과 노동권 같은 기본적인 권리가 의문에 부쳐지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위계의 상층에 속하지 않는 한, 삶의 안정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흐르는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높아진 비정규직 비율과 실업률 증가가 이런 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유동적인 삶이 대세로 굳어짐으로 인해서 정당정치 자체가 위기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택배 기사나 시급 아르바이트생이 투표를 위해 자신의 노동시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활황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중산층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설정했던 한국의 정당정치가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른 삶의 형식이 전환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원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부동층의 증가는 예상 득표율을 미궁에 빠트린다는 문제를 넘어서서 정당정치를 이념보다도 대중추수주의에 의존하게 만들어, 정당의 존립 근거 자체를 무너뜨린다.
진보정당이 한국의 정치풍경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절 한 번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겉늙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한때 도시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넓혀갔던 진보의 이념도 그 중간계급의 붕괴에 따라서 점점 옛말이 되어온 셈이다. 중간계급은 자신의 몰락을 저지하기 위해 복지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진보정당도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정치적 대의로 내걸고 이에 호응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진보정당 못지않게 위기에 빠진 보수정당이 복지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기 시작하자 상황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진보정당 입장에서야 보수정당이 자신들의 정책을 빼앗아간 것처럼 보이겠지만, 보수정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만 위기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들도 위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안철수 현상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한다. 안철수 현상은 국회를 정치인의 이익집단으로 간주하고 대통령을 ‘국민의 대표’로 생각하는 한국 특유의 대의민주주의 제도 때문에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은 한국 정당정치 구조의 한계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동시에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실망감을 받아서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 이 둘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안철수 현상의 특징이다. 전자가 단기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는 장기적이고 이념적인 문제이다.
정당정치 구조의 문제라면 안철수로서 일정하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부르주아 정치의 문제라고 한다면 안철수는 적절한 대안일 수가 없다. 지금 상황은 두 문제가 하나로 겹쳐져서 마치 전자를 해결하면 후자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부르주아 정당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안철수라는 ‘특출한 개인’으로 수렴되는 것은 양가적인 측면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안철수 또는 중간계급의 지지를 이어 받은 어떤 정치인이 정치개혁에 성공해 전자의 문제를 일정하게 해결해주고 자유주의 가치를 삶의 형식으로 보편화시킬 수 있다면, 진보정당은 본격적으로 후자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단계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되풀이해서 지적하자면,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정당정치의 위기 내에 진보정당이 담당해야하는 일정한 의제들이 숨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 의제들을 발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진보정당운동이다. 따라서 안철수 현상과 진보정당은 서로 무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지지를 받지 못했던 사실에서 이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이 보수정당과 동일하게 중간계급의 의제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만의 의제를 만들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 의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보편성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보편성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 내에서 합의되는 보편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중의 생활에 뿌리박을 수 있는 이념의 보편성이다. 이것을 통해 진보는 국제주의를 체현할 수 있다. 서구에서 유행하는 이념을 수입해서 보편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럽의 좌파들이 자신의 처지를 혁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좌파들도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한국의 좌파들에게 중요한 것은 따라서 한국의 현실이다. 이 현실에서 진보정당운동을 재정립하는 것이 이를테면 지금 한국의 좌파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하겠다. 한국의 좌파들이 세계체제 전체의 변혁을 책임질 수는 없다. 한국의 NL이나 아랍근본주의자들이라면 모를까, 이 세상 어떤 정치세력도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이 재현의 장치라고 한다면, 향후 진보정당은 어떤 정치를 재현할 것인지 고민해야할 것이다. 보수정당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보의 가치를 알려낼 수 있다는 생각은 그렇게 큰 설득력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가장 구체적으로 삶의 형식에 파고드는 ‘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하방’을 총화하고 종합할 수 있는 장소로서 진보정당이 기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진보의 가치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의 위기가 좌파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문제는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패러다임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집결하는 지점들을 비추는 ‘거울’로서 진보정당이 몫을 다해야하는 것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정당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좌파성의 강화라는 것은 오직 급진주의로 정당을 포장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고쳐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민주당이나 통합진보당과 다른 근본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렵다. 훌륭한 정책을 내놓으면 대중이 선택해줄 것이라는 ‘문화진화주의’에 매몰된다면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정상성’의 범주에 근거해서 본다면, 진보정당이 보수정당보다 훌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진보정당이 필요한 것인지, 그 이념의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http://www.redian.org/archive/9673
무엇을 위한 진보정당인가? (레디앙, 이택광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 / 2012년 7월 27일, 11:31 AM)
[연속기고⑥]좌파성,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로 드러나야
19대 총선의 의미를 되새기자면, 그동안 미약하나마 명맥을 유지해왔던 진보의 이념이 부르주아 정치 무대에서 일방적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민주당의 왼쪽을 담당하는 역할로 자신을 한정함으로써 통합진보당은 ‘원내진출’을 다시 이루어낼 수가 있었다.
진보신당과 녹색당이 후보를 내고 선거에 참여했지만, 그 지지율은 한 자리 수 밑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최소한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에서 진보의 이념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에서 과연 진보정당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녹색당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로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이들은 현실주의와 급진주의의 대립으로 치부하면서 전자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나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문제는 급진주의를 버리고 현실주의로 간다면 진보도 대중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정당제도가 더 이상 인민의 요구를 적절하게 재현해주지 못하는 위기의 국면이 도래했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타당하다. 지난 10여 년간 본격화하기 시작한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가 이 위기를 추동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진실에 주목해야한다.
‘시민’을 어떤 특정 장소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의 존재로 규정했을 때, 한국 사회가 변화해온 방향은 이런 ‘시민’의 소멸, 다시 말해서 시민사회의 붕괴를 부추겨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흐르는 속성’을 띠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흐르는 자본주의’는 쉽게 말해서 주거권과 노동권 같은 기본적인 권리가 의문에 부쳐지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위계의 상층에 속하지 않는 한, 삶의 안정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흐르는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높아진 비정규직 비율과 실업률 증가가 이런 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유동적인 삶이 대세로 굳어짐으로 인해서 정당정치 자체가 위기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택배 기사나 시급 아르바이트생이 투표를 위해 자신의 노동시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활황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중산층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설정했던 한국의 정당정치가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른 삶의 형식이 전환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원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부동층의 증가는 예상 득표율을 미궁에 빠트린다는 문제를 넘어서서 정당정치를 이념보다도 대중추수주의에 의존하게 만들어, 정당의 존립 근거 자체를 무너뜨린다.
진보정당이 한국의 정치풍경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절 한 번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겉늙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한때 도시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넓혀갔던 진보의 이념도 그 중간계급의 붕괴에 따라서 점점 옛말이 되어온 셈이다. 중간계급은 자신의 몰락을 저지하기 위해 복지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진보정당도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정치적 대의로 내걸고 이에 호응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진보정당 못지않게 위기에 빠진 보수정당이 복지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기 시작하자 상황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진보정당 입장에서야 보수정당이 자신들의 정책을 빼앗아간 것처럼 보이겠지만, 보수정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만 위기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들도 위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안철수 현상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한다. 안철수 현상은 국회를 정치인의 이익집단으로 간주하고 대통령을 ‘국민의 대표’로 생각하는 한국 특유의 대의민주주의 제도 때문에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은 한국 정당정치 구조의 한계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동시에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실망감을 받아서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 이 둘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안철수 현상의 특징이다. 전자가 단기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는 장기적이고 이념적인 문제이다.
정당정치 구조의 문제라면 안철수로서 일정하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부르주아 정치의 문제라고 한다면 안철수는 적절한 대안일 수가 없다. 지금 상황은 두 문제가 하나로 겹쳐져서 마치 전자를 해결하면 후자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부르주아 정당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안철수라는 ‘특출한 개인’으로 수렴되는 것은 양가적인 측면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안철수 또는 중간계급의 지지를 이어 받은 어떤 정치인이 정치개혁에 성공해 전자의 문제를 일정하게 해결해주고 자유주의 가치를 삶의 형식으로 보편화시킬 수 있다면, 진보정당은 본격적으로 후자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단계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되풀이해서 지적하자면,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정당정치의 위기 내에 진보정당이 담당해야하는 일정한 의제들이 숨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 의제들을 발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진보정당운동이다. 따라서 안철수 현상과 진보정당은 서로 무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지지를 받지 못했던 사실에서 이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이 보수정당과 동일하게 중간계급의 의제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만의 의제를 만들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 의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보편성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보편성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 내에서 합의되는 보편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중의 생활에 뿌리박을 수 있는 이념의 보편성이다. 이것을 통해 진보는 국제주의를 체현할 수 있다. 서구에서 유행하는 이념을 수입해서 보편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럽의 좌파들이 자신의 처지를 혁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좌파들도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한국의 좌파들에게 중요한 것은 따라서 한국의 현실이다. 이 현실에서 진보정당운동을 재정립하는 것이 이를테면 지금 한국의 좌파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하겠다. 한국의 좌파들이 세계체제 전체의 변혁을 책임질 수는 없다. 한국의 NL이나 아랍근본주의자들이라면 모를까, 이 세상 어떤 정치세력도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이 재현의 장치라고 한다면, 향후 진보정당은 어떤 정치를 재현할 것인지 고민해야할 것이다. 보수정당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보의 가치를 알려낼 수 있다는 생각은 그렇게 큰 설득력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가장 구체적으로 삶의 형식에 파고드는 ‘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하방’을 총화하고 종합할 수 있는 장소로서 진보정당이 기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진보의 가치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의 위기가 좌파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문제는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패러다임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집결하는 지점들을 비추는 ‘거울’로서 진보정당이 몫을 다해야하는 것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정당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좌파성의 강화라는 것은 오직 급진주의로 정당을 포장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고쳐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민주당이나 통합진보당과 다른 근본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렵다. 훌륭한 정책을 내놓으면 대중이 선택해줄 것이라는 ‘문화진화주의’에 매몰된다면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정상성’의 범주에 근거해서 본다면, 진보정당이 보수정당보다 훌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진보정당이 필요한 것인지, 그 이념의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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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승자독식 시스템과 미국 빈곤

 

http://www.redian.org/archive/9583
잔인한 승자독식 시스템과 미국 빈곤 (레디앙, 신희영 / 2012년 7월 26일, 4:39 PM)
[inside국제경제]극단화되는 빈익빈 부익부, 신자유주의의 냉정한 결론
지난 해 가을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는 미국 인구통계국(Census Bureau)이 발표한 보도 자료를 인용해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 때 신문 기사는 전미 평균 전체 인구의 15% 대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미 연방정부가 정한 빈곤선(Poverty threshold)을 밑도는 소득을 벌며 생존을 도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미국 평균 4인 가구 기준 중간 가계소득 (median family income)은 46,000달러 (원화로 대략 4천 7백만원)였고, 소득 기준 상위 10% 이상의 부유층들은 연평균 250,000 달러 (원화로 대략 2억 6천만 원)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연방 정부는 그 가운데 4인 가구 기준으로 연평균 22,314 달러(원화로 대략 2천 3백만 원) 이하의 소득을 얻거나 1인 기준으로 연 11,139달러(원화로 대략 천 2백만 원) 이하의 소득을 버는 사람들을 빈곤선 이하로 분류했다. 그 기준에 따라 전체 인구 가운데 약 15%에 상당하는 사람들이 연방 정부가 정한 빈곤층에 해당되는 것이다.
물론, 미 연방 정부가 마련한 이 빈곤선 기준이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일부 진보적 성향의 학자들은 연방정부가 설정하는 이 기준이 더이상 적절하지 못하며, 주나 시 등 거주지 별로 평균 주거 임대료와 일반 소비자 물가를 참조하여 최소 생계비를 산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거주지 별로 빈곤선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뉴욕이나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중남부 주의 이름없는 시골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감당하는 생활비와 체감 물가 수준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같은 빈곤선 기준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행 빈곤 기준을 따르면서 15%대의 빈곤율을 미국 전체 인구 대비 절대 수준으로 환산할 경우 약 4천 6백만명의 사람들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 절대 빈곤율을 다시 각 주별로, 그리고 인종과 학력 그리고 나이별로 세분화해 보면 사태의 심각성이 더 커진다. 뉴욕 주의 경우 주 평균 빈곤률은 16.5%에 이르고, 흑인의 경우에는 30% 이상의 인구가 하루 평균 $1의 가처분 소득(disposable income)을 가지지 못한 가운데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전미 평균 22%대의 아동 (10명 중 2명의 아이들)이 빈곤 가정에서 태어나서 배고픔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고 있고, (각종 의학 자료를 종합할 경우) 압도적인 다수의 빈곤층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그들의 생애 주기(life cycle) 내내 각종 호흡기 질환이나 피부병 그리고 영양결핍에 따른 장기적인 정신적 신체적 결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악화될대로 악화된 이같은 사태에 대한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이 빈곤층의 비율이 앞으로도 몇 년간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데 있다. 수많은 빈곤 문제 전문가들이 현재의 빈곤률 상승이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금융 및 경제 위기와 연동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낮아질 줄 모르는 실업률과 전체 실업자들 가운데 점점 더 높아지는 장기 실업자들의 비중, 그리고 여전히 떨어질 줄 모르는 주택 손배압류(mortgage foreclosure) 등은, 설사 미국 경제가 본격적인 회복기에 접어들어서 3-4%대의 전례없이 높은 경제 성장률을 달성한다고 해도, 당분간 이 빈곤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사회의 빈곤 문제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또 한 가지 자료는 미국의 소득 분배 상황에 관한 통계 자료다. 먼저, 미국에서 상위 1%의 소득은 전체 국민총소득 대비 18%대(1914년 기준)에 머물러 있다가 1930년대 대공황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24%대로 치솟았다.
대공황 이후 루즈벨트 행정부 하에서 취해진 진보적 조세 정책 (예를 들어, 자본 소득에 최고 80% 이상의 누진세를 부과했던 정책) 덕분에 상위 1%의 소득은 1950년대 중반에는 10%대로 하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때부터 1980년대 초까지 약 30여년 간 이들의 소득은 약간의 등락이 있긴 하지만 줄곧10%대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다가 레이건 행정부가 집권한 이후 취해진 일련의 역진적 조세 정책 등에 힘입어 상위 1%의 소득 비율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0년 초에는 이들의 소득 분배율이20%를 회복하고 다시 2007년에는 대공황 바로 직전에 다라랐던 24%대로 치솟았다. 사람의 머릿수로 환산할 때 몇 만 명에 불과한 상위 1%의 부유층이 한 나라가 일년 동안 창출한 국민 소득의 1/4을 가져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뉴욕주와 뉴욕시로 시야를 좁혀보면, 미국 사회 전반을 감싸고 있는 이같은 소득불평등 문제는 그 심각성을 더한다. 뉴욕 주 정부 산하 재정 조세국(Department of Finance and Taxation)이 보유하고 있는 시계열 자료의 한계 때문에 소득 분배 상황에 대한 분석은 1981년도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 조세 자료를 분석한 결과, 뉴욕 주의 경우 소득 기준 상위 1%의 부유층은 1981년 전미 평균에 준하는 10%대의 소득을 점하고 있었다. 뉴욕 시의 경우는 그보다 약간 높은 12%의 전체 시 소득을 상위 1%가 가져갔다.
그런데 2007년도에 이르러서는 뉴욕 시의 경우 상위 1%의 부유층이 전체 뉴욕시 소득의 45%를, 뉴욕 주의 경우는 상위 1%의 부유층이 전체 주 소득의35%를 가져간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군으로 따지자면, 몇 만명도 안되는 은행과 보험업계의 최고 경영자들과 각종 투자 은행 및 헤지펀드의 자산 운용가들이 뉴욕 주와 뉴욕 시 가처분 소득의 절반 이상을 가져간 셈이다. 반면 같은 기간 소득 기준 하위 50%의 압도적인 다수의 뉴욕 주 거주자들의 소득 점유율은 1981년 20%에 약간 못미치는 수준에서 2007년 10%대 미만으로 떨어졌다.
다시 말해, 뉴욕 주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전체 연간 주 총소득의 1/10에 못미치는 소득을 벌면서 생존의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2007년 미국 주택시장의 버블 붕괴에서 비롯된 미국발 국제 금융 위기의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미국민들의 점증하는 가계 부채’ 문제는 이같은 극심한 소득 불평등이 야기한 구조적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 문제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진단을 내린 바 있다. 혹자는 미국의 소득 불평등 문제는 산업 구조의 변동 때문이라고 주장해왔다. 경제가 성숙기에 접어들어 전통적인 제조업보다는 금융과 보험 산업 등의 서비스 업종 분야가 전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그 분야들이 요구하는 기술 숙련을 갖추지 못한 일반 노동자들이 점차 주변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사람들은 세계화(Globalization)에 따른 국제 경쟁의 심화와 급격한 기술 변동 등을 현재와 같은 소득 불평등을 야기한 원인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산업 구조가 변동한다고 해서, 그리고 기술 변화가 나타난다고 해서 반드시 이와 같은 소득 불평등 문제가 나타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미국과 유사하게 산업 구조의 변동을 경험해왔던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나라들이 미국과는 전혀 다르게 양호한 소득 분배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나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와 같은 극단적인 소득 및 재산 불평등은 거대 금융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이 일반 노동자 임금의 150여배나 되는 임금 외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데서 나타나는 것처럼, 서비스업 중심의 산업 구조 고도화나 기술 변화와는 무관한 다른 요인들 때문에 빚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집권 이후 공화당 행정부가 집권을 할 때마다 취해왔던 부유층에 대한 조세 감면 혜택이 야기한 비대칭적인 효과이다. 그들은 조세 감면을 통해 기업 투자가 늘어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도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부유층에 편향된 조세 감면 조치는 그 이전까지 부유층이 부담하던 조세 부담율만을 낮추었을 뿐 그 어떠한 경제 성장 효과도 야기하지 못했다.
오히려 부자들에 대한 감세 정책은 결과적으로 미 연방 정부의 재정 적자 폭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고, 오늘날과 같은 경제 위기 국면에서 정작 필요한 케인즈주의적 확대 재정 정책을 국가 채무 위험 때문에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정치 체제의 변화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올 12월의 대선을 맞아 민주-공화 양당의 대선 후보들은 앞다투어 내놓고 있는 경제 성장 공약을 살펴봐도 그렇다. 특히 당내 경선을 통해서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밋 롬니(Mitt Romney)는 부자에 대한 감세, 각종 금융 및 환경 관련 규제 조치의 철폐 등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심지어는 미 연방 정부가 관할하는 사회연기금을 민영화하고 “개인 책임 사회 (Individual Responsibility)”를 구현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법안으로 통과시킨 전국민 의료보장제도나 금융 시장 개혁에 관한 법안들을 집권과 동시에 철회시키겠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대자본이 운영하는 농업 식량 분야와 환경 관련 분야의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금융업 분야에 대한 정부 간섭을 급진적으로 철폐하겠다는 예의 낡은 주장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거론하고 있다.
일부 민주당원들도 동조하는, 공화당 의원들의 이같은 각종 정치 구호와 헛소리들을 듣고 있자면, 그들이 발딪고 서 있는 현실은, 적어도 뉴욕 거주민들 가운데 16%에 달하는, 돈과 음식을 구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빈민층이 하루하루 마주 대하는 현실과는 확연히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밋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를 비롯한 미국의 극우주의자들이 부자들의 조세 분담률을 높히자고 말했던 오바마 대통령에게 “계급 투쟁을 선동”하는 “매우 위험천만한 발언”이라고 비난했을 때, 이미 압도적인 다수의 미국인들은 미국의 극우 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개인 소유 사회”라는 게임 룰에 얽매여 거의 매일같이 “계급 투쟁”의 생체 실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상황이 비단 미국 사회만의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미국 시스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의 행태를 통해 조만간 한국 사회에도 이식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한국 사회는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추진된 ‘세계화’를 통해, 동아시아 외환 위기를 통해, 또는 동북아 금융허브론과 한미 FTA를 통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부터 미국식 승자독식 사회 시스템의 부정적 효과와 문제점들에 직면하고 있다. 게다가 집권 초기부터 ‘강부자,’ ‘고소영’ 정권이라고 조롱과 비난을 받았던 현 이명박 정부 하에서, 한층 더 미국식 승자 독식의 사회에 근접하고 있는 현실이다.
소위 4대강 사업에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붙고 각종 비리와 전횡을 일삼으면서도 굶는 아이들에게 밥먹이자는 것에 대해서는 생래적인 거부감을 보였던 이들, 벌이는 사업마다 국회 청문회나 국정 조사의 대상이 되고,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법과 비리의 온상이 되어 버린 이 정권의 실세들, 그러면서도 각종 국가안보 상업주의와 뿌리깊은 친일친미 이념을 강변하면서 제 나라의 국민을 통치와 훈육의 대상으로만 삼는 정권 밑에서 좌절하고 갈등하고 탄압받는 사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의 한 주로 이미 편입되어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남는 문제는 다가오는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빚을 내지 않고서는 그럴 듯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미국이라는 이름의 야만적인 체제’와는 다른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을 자신의 충실한 종복으로 뽑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http://www.redian.org/archive/9583
잔인한 승자독식 시스템과 미국 빈곤 (레디앙, 신희영 / 2012년 7월 26일, 4:39 PM)
[inside국제경제]극단화되는 빈익빈 부익부, 신자유주의의 냉정한 결론
지난 해 가을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는 미국 인구통계국(Census Bureau)이 발표한 보도 자료를 인용해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 때 신문 기사는 전미 평균 전체 인구의 15% 대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미 연방정부가 정한 빈곤선(Poverty threshold)을 밑도는 소득을 벌며 생존을 도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미국 평균 4인 가구 기준 중간 가계소득 (median family income)은 46,000달러 (원화로 대략 4천 7백만원)였고, 소득 기준 상위 10% 이상의 부유층들은 연평균 250,000 달러 (원화로 대략 2억 6천만 원)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연방 정부는 그 가운데 4인 가구 기준으로 연평균 22,314 달러(원화로 대략 2천 3백만 원) 이하의 소득을 얻거나 1인 기준으로 연 11,139달러(원화로 대략 천 2백만 원) 이하의 소득을 버는 사람들을 빈곤선 이하로 분류했다. 그 기준에 따라 전체 인구 가운데 약 15%에 상당하는 사람들이 연방 정부가 정한 빈곤층에 해당되는 것이다.
물론, 미 연방 정부가 마련한 이 빈곤선 기준이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일부 진보적 성향의 학자들은 연방정부가 설정하는 이 기준이 더이상 적절하지 못하며, 주나 시 등 거주지 별로 평균 주거 임대료와 일반 소비자 물가를 참조하여 최소 생계비를 산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거주지 별로 빈곤선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뉴욕이나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중남부 주의 이름없는 시골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감당하는 생활비와 체감 물가 수준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같은 빈곤선 기준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행 빈곤 기준을 따르면서 15%대의 빈곤율을 미국 전체 인구 대비 절대 수준으로 환산할 경우 약 4천 6백만명의 사람들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 절대 빈곤율을 다시 각 주별로, 그리고 인종과 학력 그리고 나이별로 세분화해 보면 사태의 심각성이 더 커진다. 뉴욕 주의 경우 주 평균 빈곤률은 16.5%에 이르고, 흑인의 경우에는 30% 이상의 인구가 하루 평균 $1의 가처분 소득(disposable income)을 가지지 못한 가운데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전미 평균 22%대의 아동 (10명 중 2명의 아이들)이 빈곤 가정에서 태어나서 배고픔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고 있고, (각종 의학 자료를 종합할 경우) 압도적인 다수의 빈곤층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그들의 생애 주기(life cycle) 내내 각종 호흡기 질환이나 피부병 그리고 영양결핍에 따른 장기적인 정신적 신체적 결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악화될대로 악화된 이같은 사태에 대한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이 빈곤층의 비율이 앞으로도 몇 년간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데 있다. 수많은 빈곤 문제 전문가들이 현재의 빈곤률 상승이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금융 및 경제 위기와 연동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낮아질 줄 모르는 실업률과 전체 실업자들 가운데 점점 더 높아지는 장기 실업자들의 비중, 그리고 여전히 떨어질 줄 모르는 주택 손배압류(mortgage foreclosure) 등은, 설사 미국 경제가 본격적인 회복기에 접어들어서 3-4%대의 전례없이 높은 경제 성장률을 달성한다고 해도, 당분간 이 빈곤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사회의 빈곤 문제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또 한 가지 자료는 미국의 소득 분배 상황에 관한 통계 자료다. 먼저, 미국에서 상위 1%의 소득은 전체 국민총소득 대비 18%대(1914년 기준)에 머물러 있다가 1930년대 대공황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24%대로 치솟았다.
대공황 이후 루즈벨트 행정부 하에서 취해진 진보적 조세 정책 (예를 들어, 자본 소득에 최고 80% 이상의 누진세를 부과했던 정책) 덕분에 상위 1%의 소득은 1950년대 중반에는 10%대로 하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때부터 1980년대 초까지 약 30여년 간 이들의 소득은 약간의 등락이 있긴 하지만 줄곧10%대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다가 레이건 행정부가 집권한 이후 취해진 일련의 역진적 조세 정책 등에 힘입어 상위 1%의 소득 비율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0년 초에는 이들의 소득 분배율이20%를 회복하고 다시 2007년에는 대공황 바로 직전에 다라랐던 24%대로 치솟았다. 사람의 머릿수로 환산할 때 몇 만 명에 불과한 상위 1%의 부유층이 한 나라가 일년 동안 창출한 국민 소득의 1/4을 가져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뉴욕주와 뉴욕시로 시야를 좁혀보면, 미국 사회 전반을 감싸고 있는 이같은 소득불평등 문제는 그 심각성을 더한다. 뉴욕 주 정부 산하 재정 조세국(Department of Finance and Taxation)이 보유하고 있는 시계열 자료의 한계 때문에 소득 분배 상황에 대한 분석은 1981년도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 조세 자료를 분석한 결과, 뉴욕 주의 경우 소득 기준 상위 1%의 부유층은 1981년 전미 평균에 준하는 10%대의 소득을 점하고 있었다. 뉴욕 시의 경우는 그보다 약간 높은 12%의 전체 시 소득을 상위 1%가 가져갔다.
그런데 2007년도에 이르러서는 뉴욕 시의 경우 상위 1%의 부유층이 전체 뉴욕시 소득의 45%를, 뉴욕 주의 경우는 상위 1%의 부유층이 전체 주 소득의35%를 가져간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군으로 따지자면, 몇 만명도 안되는 은행과 보험업계의 최고 경영자들과 각종 투자 은행 및 헤지펀드의 자산 운용가들이 뉴욕 주와 뉴욕 시 가처분 소득의 절반 이상을 가져간 셈이다. 반면 같은 기간 소득 기준 하위 50%의 압도적인 다수의 뉴욕 주 거주자들의 소득 점유율은 1981년 20%에 약간 못미치는 수준에서 2007년 10%대 미만으로 떨어졌다.
다시 말해, 뉴욕 주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전체 연간 주 총소득의 1/10에 못미치는 소득을 벌면서 생존의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2007년 미국 주택시장의 버블 붕괴에서 비롯된 미국발 국제 금융 위기의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미국민들의 점증하는 가계 부채’ 문제는 이같은 극심한 소득 불평등이 야기한 구조적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 문제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진단을 내린 바 있다. 혹자는 미국의 소득 불평등 문제는 산업 구조의 변동 때문이라고 주장해왔다. 경제가 성숙기에 접어들어 전통적인 제조업보다는 금융과 보험 산업 등의 서비스 업종 분야가 전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그 분야들이 요구하는 기술 숙련을 갖추지 못한 일반 노동자들이 점차 주변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사람들은 세계화(Globalization)에 따른 국제 경쟁의 심화와 급격한 기술 변동 등을 현재와 같은 소득 불평등을 야기한 원인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산업 구조가 변동한다고 해서, 그리고 기술 변화가 나타난다고 해서 반드시 이와 같은 소득 불평등 문제가 나타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미국과 유사하게 산업 구조의 변동을 경험해왔던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나라들이 미국과는 전혀 다르게 양호한 소득 분배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나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와 같은 극단적인 소득 및 재산 불평등은 거대 금융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이 일반 노동자 임금의 150여배나 되는 임금 외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데서 나타나는 것처럼, 서비스업 중심의 산업 구조 고도화나 기술 변화와는 무관한 다른 요인들 때문에 빚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집권 이후 공화당 행정부가 집권을 할 때마다 취해왔던 부유층에 대한 조세 감면 혜택이 야기한 비대칭적인 효과이다. 그들은 조세 감면을 통해 기업 투자가 늘어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도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부유층에 편향된 조세 감면 조치는 그 이전까지 부유층이 부담하던 조세 부담율만을 낮추었을 뿐 그 어떠한 경제 성장 효과도 야기하지 못했다.
오히려 부자들에 대한 감세 정책은 결과적으로 미 연방 정부의 재정 적자 폭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고, 오늘날과 같은 경제 위기 국면에서 정작 필요한 케인즈주의적 확대 재정 정책을 국가 채무 위험 때문에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정치 체제의 변화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올 12월의 대선을 맞아 민주-공화 양당의 대선 후보들은 앞다투어 내놓고 있는 경제 성장 공약을 살펴봐도 그렇다. 특히 당내 경선을 통해서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밋 롬니(Mitt Romney)는 부자에 대한 감세, 각종 금융 및 환경 관련 규제 조치의 철폐 등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심지어는 미 연방 정부가 관할하는 사회연기금을 민영화하고 “개인 책임 사회 (Individual Responsibility)”를 구현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법안으로 통과시킨 전국민 의료보장제도나 금융 시장 개혁에 관한 법안들을 집권과 동시에 철회시키겠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대자본이 운영하는 농업 식량 분야와 환경 관련 분야의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금융업 분야에 대한 정부 간섭을 급진적으로 철폐하겠다는 예의 낡은 주장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거론하고 있다.
일부 민주당원들도 동조하는, 공화당 의원들의 이같은 각종 정치 구호와 헛소리들을 듣고 있자면, 그들이 발딪고 서 있는 현실은, 적어도 뉴욕 거주민들 가운데 16%에 달하는, 돈과 음식을 구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빈민층이 하루하루 마주 대하는 현실과는 확연히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밋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를 비롯한 미국의 극우주의자들이 부자들의 조세 분담률을 높히자고 말했던 오바마 대통령에게 “계급 투쟁을 선동”하는 “매우 위험천만한 발언”이라고 비난했을 때, 이미 압도적인 다수의 미국인들은 미국의 극우 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개인 소유 사회”라는 게임 룰에 얽매여 거의 매일같이 “계급 투쟁”의 생체 실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상황이 비단 미국 사회만의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미국 시스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의 행태를 통해 조만간 한국 사회에도 이식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한국 사회는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추진된 ‘세계화’를 통해, 동아시아 외환 위기를 통해, 또는 동북아 금융허브론과 한미 FTA를 통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부터 미국식 승자독식 사회 시스템의 부정적 효과와 문제점들에 직면하고 있다. 게다가 집권 초기부터 ‘강부자,’ ‘고소영’ 정권이라고 조롱과 비난을 받았던 현 이명박 정부 하에서, 한층 더 미국식 승자 독식의 사회에 근접하고 있는 현실이다.
소위 4대강 사업에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붙고 각종 비리와 전횡을 일삼으면서도 굶는 아이들에게 밥먹이자는 것에 대해서는 생래적인 거부감을 보였던 이들, 벌이는 사업마다 국회 청문회나 국정 조사의 대상이 되고,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법과 비리의 온상이 되어 버린 이 정권의 실세들, 그러면서도 각종 국가안보 상업주의와 뿌리깊은 친일친미 이념을 강변하면서 제 나라의 국민을 통치와 훈육의 대상으로만 삼는 정권 밑에서 좌절하고 갈등하고 탄압받는 사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의 한 주로 이미 편입되어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남는 문제는 다가오는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빚을 내지 않고서는 그럴 듯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미국이라는 이름의 야만적인 체제’와는 다른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을 자신의 충실한 종복으로 뽑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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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122155155&code=970201
미국 중산층 급속 몰락… 3년 새 자산 39 % 줄었다 (경향, 워싱턴 | 유신모 특파원, 2012-06-12 21:55:15)
ㆍ연방준비제도 보고서
미국을 강타한 금융위기로 최근 3년간 중산층의 평균 재산이 38.8%나 줄어드는 등 중산층 몰락과 경제적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11일 공개한 소비자금융보고서에서 “2007년 금융위기가 시작돼 공식적으로 종료된 2010년까지 3년 동안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중간층 소득은 4만9000달러에서 4만5000달러로 7.7% 감소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중간층의 순자산 가치는 12만6000달러에서 7만7000달러로 38.8%나 급감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소득 기준으로 60~79.9%에 해당하는 계층의 자산가치는 40.4%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분석 결과는 중산층의 보유 자산가치가 1992년 이후 18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금융위기와 부동산 버블 붕괴 등의 여파로 미국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보고서에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은 상·하류층 간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상위 10%에 속하는 소득 상류층의 경우 자산소득이 1.8%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과 하위 20%에 속하는 하류층의 자산 규모의 격차는 192배로 2001년 106배보다 크게 늘어났다.
보고서는 “이처럼 중산층의 자산가치가 집중적으로 감소한 것은 별다른 자산 없이 주택 등 만을 소유하고 있는 중산층이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부유층의 경우 부동산 외에 다른 자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 전체 자산에서 부동산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지 않지만, 중산층은 대부분 주택 이외에 다른 자산을 갖고 있지 않아 부동산 가격 하락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7년 11월 이후 3년 동안 뉴욕 증시 S&P 500 지수는 14% 하락한 반면 미국의 주택가격을 나타내는 S&P 케이스실러 지수는 23%나 떨어져 상대적으로 부동산 가격의 하락폭이 훨씬 컸다.
보고서는 또 이 같은 경제위기 속에 미국민들이 개인 부채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했다. 신용카드 빚을 안고 있는 미국인들의 비율은 현재 39.4%로 금융위기가 시작되기 전인 2007년에 비해 6.7%포인트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으며, 평균 신용카드 빚도 16.1% 줄어든 2600달러를 기록했다.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가계 비율도 3년 동안 2.8%포인트 떨어진 15.1%를 나타냈다.
미국의 경제전문 매체 마켓워치는 연방준비제도의 이번 보고서에 대해 “미국이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결과는 놀랄 일은 아니지만 경제위기가 중산층 가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537338.html
미 중산층 자산·소득 1990년대 수준 추락 (한겨레, 이춘재 기자, 2012.06.12 19:04)
경제위기 여파로 미국 중산층의 경제력이 1990년대 수준으로 돌아간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11일(현지시각) 발간한 소비자 금융 보고서에서 “소득 분포상 중간에 위치한 미국 가구의 순자산이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에 12만6400달러였으나, 금융위기 이후인 2010년에는 7만7300달러로 무려 38% 이상 급감했다”고 밝혔다. 또 미국의 중간가계소득(median family income)도 2007년 4만9600달러에서 2010년 4만5800달러로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따라 미국 중산층의 자산가치와 소득수준이 1990년대 초반과 비슷해졌다고 <뉴욕 타임스> 등이 이날 전했다.
연준의 조사 결과는 경제위기 여파로 미국에서 가장 큰 타격을 본 계층이 중산층임을 보여준다고 외신은 분석했다. 중산층의 경제적 손실이 상대적으로 큰 이유는 이들이 주로 부동산 형태로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부동산 거품이 꺼져 가치가 크게 하락하는 바람에 중산층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동산의 중간값은 2007년 11만달러에서 2010년 7만5000달러로 급락했다. 금융위기 이후 3년 동안 다른 형태의 자산은 대부분 원래 가치를 회복했으나, 부동산은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증산층의 소득 하락도 다른 계층에 비해 컸다. 소득 하위 20%인 저소득층의 소득은 정부보조금 등으로 2007~2010년 오히려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소득층도 증시 호황 등에 따른 투자소득의 증가로 손실을 대부분 만회했다.
경제위기로 가계부채는 감소했으나, 주정부의 교육예산 감소에 따른 학자금 융자 증가 탓에 교육 관련 부채는 2007년 15.2%에서 2010년 19.2%로 증가했다. 가계저축도 56.4%에서 52%로 감소했는데, 특히 교육이나 노후를 대비해 저축하는 가계는 거의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613003006
美중산층 1990년 수준 몰락 (서울, 박찬구기자, 2012-06-13 3면)
3년새 순자산 38.8% 증발, 소득차 192배… 양극화 심화
2007년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이후 3년 동안 미국 중산층의 순자산가치 감소 규모가 38.8%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2010년 기준으로 소득 상위 가구와 하위 가구 간 순자산가치 격차가 192배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뉴욕타임스와 AP 등 미국 언론들은 “거의 20년간 축적된 부(富)가 사라지면서 미국의 중산층이 1990년대 초와 비슷한 수준으로 몰락했다.”며 중산층 붕괴 현상을 우려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는 11일(현지시간) 소비자 금융 보고서를 통해 금융위기가 닥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 중간가구의 순자산이 12만 6400달러에서 7만 7300달러로 38.8% 줄었다고 밝혔다. 중간가구란 미국 전체 가구에서 소득 상위 50%와 하위 50%의 중간에 위치한 가상의 가구를 의미한다. 보고서는 1989년 이후 Fed가 미국 가구의 자산 및 부채 추이, 소득 규모 등을 3년 단위로 분석한 것으로, 이번에 조사된 중산층의 순자산가치는 1992년 이후 18년 만에 가장 낮은 규모다. 보고서는 중산층이 입은 손실 가운데 4분의3은 주택가격 하락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평균 부동산 가치는 2007년 11만 달러에서 2010년 7만 5000달러로 떨어졌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보고서는 또 중간가구의 소득이 3년 사이 7.7% 규모인 3800달러 줄어든 반면 이들의 부채 비율은 같은 기간 14.8%에서 16.4%로 높아졌다고 밝혔다. Fed는 “순자산과 소득 모두 중산층의 손실이 가장 컸으며, 이 때문에 이들의 소비 능력과 의지가 제한됐다.”고 밝혔다. 예산 및 정책우선순위센터(CBPP)의 경제학자 자레드 번스타인은 “중산층이 얼마나 철저히 붕괴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고 뉴욕타임스에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는 2010년 기준으로 소득 상위 10% 가구의 순자산가치가 평균 119만 달러로, 소득 하위 20%의 6200달러에 비해 192배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하위 간 자산 격차는 2001년 106배, 2007년 138배에 이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전체 가구 가운데 신용카드 관련 부채가 있는 가구 비율이 3년 사이 6.7% 포인트 줄었지만 학자금 대출로 빚을 진 가구는 2007년 15.2%에서 2010년 19.2%로 증가했다. Fed는 “학자금 대출이 자동차 대출보다 평균 가구의 부채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면서 “이 같은 현상은 조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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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예산안'의 진짜 패자는 빈곤층"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 2012-02-14 오후 6:21:03)
부자증세·경기부양 천명했지만…'작은 정부'는 공화당과 판박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부자증세와 경기부양, 장기 재정적자 감축 등을 골자로 한 2013 회계연도 예산안을 발표했다. 이번 예산안은 오바마가 재선을 앞두고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공화당과의 정면승부를 펼치려는 정치적 노림수라는 평가가 많지만, 정작 그 결과가 경제위기에 신음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냉소도 나온다.
13일(현지시간) 발표된 오바마 대통령의 예산안은 그 동안 강조해왔던 경기회복과 재정적자 감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내용으로 짜여졌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철군으로 절약되는 예산을 사회 인프라 사업에 투입하고, '버핏세'로 불리우는 부자증세로 1조5000억 달러 규모의 세수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또 불공평한 미국 세제의 핵심 중 하나인 부유층의 배당소득액도 현재 15%에서 39.6%로 올려 지난해 워렌 버핏이 '사장이 직원보다 세율이 더 낮다' 주장했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재정적자 문제를 미국 경제위기의 핵심으로 내세우면서 부자증세에 반대하고 있는 공화당이 이러한 예산안을 받을 리 없다. 공화당은 전폭적인 사회보장 프로그램 삭감으로 정부지출을 줄이는 새로운 예산안을 짜 대안으로 내세울 예정이다. 올해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양당은 타협보다는 정치적 대립과 갈등을 반복하면서 선거에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이 각각 내세우는 예산안이 결과적으로는 별 다를 바 없다는 양비론도 나온다. 제프리 삭스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날 <파이낸셜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예산안은 민주당이 '계급투쟁'을 한다는 공화당과 공화당이 부자들만 애지중지한다고 비난하는 민주당의 '독설 배틀'을 촉발할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그런 싸움의 대부분은 (정치적) '쇼'"라고 꼬집었다.
오바마의 예산안에 따르면 미 정부의 지출이 2011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22.6%에서 2020년 19.3%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는 지난해 공화당의 폴 라이언 하원 예산위원장이 2020년 정부지출을 GDP의 17%까지 낮추자고 제안한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삭스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감축은 교육과 환경보호, 아동 영양지원, 직업 교육 등 정부 사업을 후려칠 것"이라고 비판했다.
삭스 교수는 "미국 정치의 본성이 양당의 뜨거운 정치적 논쟁 때문에 감춰져 있다"며 "양당은 모두 월가, 대형 석유회사, 민간 보험업체, 군수업자 등으로부터 기부금을 받고 감세와 제한 없는 경영진 보수, 기업규제 완화 등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삭스 교수는 이어서 "양당의 경제 정책이 동일하지 않다는 건 사실이지만 오바마의 평범한 증세 제안은 국회에서 공화당에게 저지당할 것이고 그 역시 공화당의 빈곤층 지원 프로그램 삭감 시도에 저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부유층들은 현재 누리고 있는 감세 혜택에 덜 타격을 받고, 경제 양극화에 시달리는 저소득층들의 삶도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예산안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삭스 교수는 "공화당의 금권정치가들은 약간의 증세나 빈곤층을 위한 약간의 혜택도 미국 내 '일자리 창출자'의 자유를 끝장낼 것처럼 오바마의 평범한 제안를 꾸짖는다"며 "대중은 오바마의 재선을 지지하겠지만, 그들이 투표의 결과로 받을 보상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삭스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미국의 정치가 '중위 투표자 이론'(median voter theorem, 양당의 정책이 가장 중도 성향인 유권자층을 향해 수렴한다는 이론)을 따르고 있지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기업들의 막대한 기부금에 의존하는 미 정당들은 중도 성향의 유권자가 아닌 오른쪽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나오는 것보다는 낫지만 빈곤층과 노동계층 중에서 오바마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러한 현실 때문에 패자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삭스 교수는 "고용상황이 최근 호전됐음에도 중산층은 감소하고, 미국인의 절반은 저소득층이며, 25~29세 미국인 중 3분의 1만이 대학졸업자"라며 "오바마의 정책은 이러한 현실에 공화당보다는 약간 더 관심을 보이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정부지출 감축이 미국의 교육과 인프라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할 것이라는 데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민주당이 오바마의 증세제안에 박수를 보내고 공화당이 비난하는 그 순간에도 미국의 빈곤층과 노동계층에는 이번 예산안이 실제로 더 암울한 뉴스로 다가온다"며 "미국 정치와 사회에 드리워진 돈의 옥죄임을 부수기 위해서는 비어있는 진짜 중도와 좌파 지형을 점령할 제3의 정당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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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중산층의 몰락 뒤엔 ‘지속적 부자감세’ (한겨레, 뉴욕/이재명, 바르셀로나/류이근 기자, 20111208 20:23)
“월가는 이익 늘었다는데…”
부의 재분배 균형 깨지며 소득 양극화 점점 심해져
반복되는 위기 ‘화이트스완’ 시대 ③ 위기의 희생양 중산층

지난달 5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만난 래리는 3년 전만 해도 안정적인 여생을 보장받은 직장인이었다. 20년 넘게 금융회사에서 일하며 중산층 뉴요커의 삶을 누렸다. 국외 채권 투자와 관련한 보조업무를 하는 데 불과했지만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고, 노후도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탄탄했던 일상은 금융위기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해고가 되니 갑자기 생계가 막막해지더군요. 한해에 1만달러가 넘는 보험료도 낼 수 없어 건강보험 혜택조차 받을 수 없게 됐답니다.” 그는 “월가는 금융위기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내고 있다는데 과연 우리 자녀들은 뭘 먹고 살아야 하느냐”고 한탄했다.
스스로를 ‘중산층의 나라’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던 미국에선 요즘 ‘부자 아니면 가난뱅이만 있다’는 자조가 넘쳐난다. 국가경제의 허리인 중산층은 줄어드는 일자리, 제자리걸음인 소득, 축소되는 사회보장에 갈수록 잘록해지고 있다. 계속되는 경제위기가 미국의 인구지도에서 중산층을 지우고 있는 셈이다. 미국 인구통계국이 지난 10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미국 중산층 가구의 실질소득은 4만9445달러(5594만원)로 1999년 5만3253달러를 정점으로 10년 넘게 줄어들고 있다. 중산층에겐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국 중산층의 몰락은 최근 들어 더욱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민간 연구기관인 센티어연구소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미국 가계의 평균소득은 경기가 회복 국면에 들어선 최근 2년 사이에 되레 6.8%나 줄었다. 금융위기 전후인 2007~2009년 소득감소율 2.4%보다 감소폭이 더 커진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25~64살)의 지난해 실질소득은 4만8000달러로 1979년 이후 30여년간 늘지 않았다. 단기계약직이나 시간제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미국 남성의 실질소득은 1970년 이후 28%나 떨어졌다.
미국도 스페인도 경제 커졌는데 중산층은 쪼그라들어
중산층 몰락 뒤엔 부자감세
경제위기 이후 뉴욕주
저임금 일자리 8만2천개 ↑
중·고소득 일자리는 25만개 ↓

중산층의 위기는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청에서 5년 동안 근무했던 아나는 얼마 전 정부가 공무원 수를 줄이면서 대량해고의 쓰나미에 휩쓸렸다. 지난 2일 만난 그는 정부가 운영하는 일자리센터에서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오는 길이었다. 임신 7개월인 그가 한달에 손에 쥐는 실업급여는 1000유로(150만원) 정도다. 예전에 비해 수입이 30%쯤 줄었다. 문화재 재건 관련 일을 하는 남편이 매달 1000유로가량을 벌지만, 최근엔 일감이 줄어 걱정이 태산이다.
더 큰 문제는 아이가 태어나고 실업급여가 끊긴 이후다. 집세로 매달 800유로를 내야 하는데 지금 형편으론 도무지 감당할 길이 없다. 바르셀로나에서 차로 1시간쯤 떨어진 부모집 근처로 이사갈 계획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거기서는 400~500유로면 월셋집을 구할 수 있다. 집세도 버거운 판에 외식은 이제 사치다. 친구들도 웬만하면 만나지 않거나 집으로 부른다. 그는 “지금보다 더 힘든 때는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도 스페인도 경제 규모는 과거보다 커졌는데, 왜 중산층은 쪼그라들고 있는 것일까? 경제성장의 과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워싱턴에 있는 미국 경제정책연구소의 분석을 보면 그 답이 명확해진다. 1979년 이후 미국 소득 상위 20% 가구의 소득은 49% 늘어났지만 중산층 가구는 겨우 11.2%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하위 20% 가구의 소득은 오히려 7.4% 감소했다. 소득이 대부분 부자들에게 흘러간 것이다.
금융자본의 심장부인 뉴욕주는 소득 불균형이 더 심각하다. 뉴욕주의 평균 가계소득은 2007년 이후 3년 동안 3.2% 줄었다. 반면 상위 1%는 뉴욕주 전체 소득의 35%를 가져갔다. 중산층 50%가 가져간 몫과 같은 수준이다. 미국이 황금기를 구가하던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산층과 빈곤층 가구의 소득증가율은 100%를 넘었다. 이 연구에 참가한 신희영 뉴욕재정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중산층 가구의 실질소득이 감소하기 시작한 건 로널드 레이건 집권기를 거친 1980년대 후반부터였다”며 “부자감세가 계속되면서 소득세율이 급격히 낮아진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부자감세는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미국 경제의 활력을 깨뜨렸다. 교육을 받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면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는 아메리칸드림은 실은 조세정책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만든 신화였다고 신 연구위원은 지적한다. 부의 재분배가 부자를 향해 역류하면서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사람은 더 많아졌다. 지난해 미국 빈곤가구(4인 가구 기준 연소득 2만2314달러 이하)는 15.3%로 2008년(13.2%)보다 늘어났다.
자산거품 붕괴도 중산층을 위축시키고 있다. 특히 집값 하락은 직격탄이 됐다. 집값의 80%까지 빚을 냈던 중산층은 집값이 떨어지자 파산하거나 저소득층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했다. 집을 가진 4명 가운데 1명은 실제 집값보다 많은 주택담보대출을 떠안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주택소유자의 20%가량이 주택담보대출을 갚을 수 없거나 갚을 의사가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집을 압류당한 중산층들은 부모집에 들어가 살거나, 친척끼리 모여 사는 새로운 세태를 만들고 있다.
중국과 신흥국의 성장, 개방으로 인한 미국 제조업의 붕괴, 노조활동 위축에 따른 실질임금 하락도 중산층의 몰락을 부추겼다. 노동 변호사이자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의 저자 토머스 게이건은 “소득 불균형 악화는 숙련도를 요구하지 않는 일자리에서 특히 심각하다”며 “미국 정부의 자유무역 정책으로 기업들이 공장을 국외로 이전하고, 지속적인 노조파괴 정책으로 노조의 교섭력이 약화된 것도 실질임금을 떨어뜨린 원인”이라고 말했다.
경제위기는 중산층의 기반인 좋은 일자리를 찌그러뜨렸다. 제조업·건설업·금융업의 일자리는 줄고, 청소나 보모와 같은 시간제 일자리는 늘어나는 일자리 양극화 때문이다. 뉴욕주의 경우 경제위기 이후 저임금 노동(연평균 4만5000달러 이하) 일자리는 8만2000개 늘었지만 중·고소득 일자리는 무려 25만개가 사라졌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미국과 같은 주주자본주의 체제는 단기간에 기업이윤을 많이 내야 한다”며 “이런 압박에 놓인 경영자들이 중간관리층 일자리를 많이 줄이면서 중산층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회원국 22개국 가운데 17개국이 1980년에 견줘 소득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중산층 붕괴라는 위협에 직면했다고 경고했다. 오이시디 보고서는 “소득 양극화 수준이 훨씬 일상적이고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며 “심지어 덴마크, 독일, 스웨덴 등 전통적으로 소득 불균형이 심하지 않은 나라도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는 중산층 붕괴의 신호탄인 소득 양극화 문제를 다시 뉴스의 중심부로 끌어들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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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마트에 줄서기, 미국인의 삶은 지금 최악 (시사IN [226호] 2012.01.25  09:06:39,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미국인의 삶이 사상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로부터 생계 보조를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미국인이 4450만명에 이르렀다. 1730만명은 주기적으로 끼니를 거른다. 이 수치는 계속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미국인 8명 중 1명꼴로 비상식량을 지원받고 있다. 이 중 1730만명은 주기적으로 끼니를 거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5명 중 1명이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며, 장기실업자는 이미 880만명을 넘어섰다. 미국이 이제 ‘빈곤 대국’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인구조사국(Census Bureau)에 따르면 미국의 빈곤선은 2010년 4인 가족 기준으로 연 소득 2만4323달러(약 2820만원). 이보다 소득이 낮으면 빈곤 계층으로 분류된다.
공동 세탁장에서 매일 빵을 가져간다는 래리 스미스 씨(49)는 “무료 빵과 식품이 생활비를 아끼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 주는 푸드 스탬프(정부 생계보조 식권)로 600여 달러(약 70만원)를 받지만 23세·15세인 두 아들과 아내, 이렇게 네 식구가 살기에는 역부족이다. 스미스 씨는 “나는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집을 압류당하고 나서 우리가 얼마나 환상에 젖어 살아왔는지 알게 됐다. 지금 마트에서 무언가 살 때는 아주 신중해진다. 우리는 스스로를 빈곤층이라 생각한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청년이었을 때는 고등학교를 나오면 그래도 먹고살 정도의 일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 일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려면 우리 아들을 보면 된다.” 큰아들 엘리엇은 고등학교를 나온 뒤 아버지를 따라 자동차 정비 일을 배웠지만 그를 써주는 곳은 없었다.
스미스 씨 가족은 모두 매월 1일을 기다린다. 정부에서 주는 푸드 스탬프 식량 카드가 1일 자정에 충전되기 때문이다. 매달 마지막 날 밤 11시가 넘으면 가족 모두 차를 타고 인근 대형마트로 향한다. 마트에 도착한 그들은 각각 흩어졌다. 그리고 각자 맡은 섹션에서 밀가루·달걀·우유·빵 등 기본 식량을 바구니에 담았다. 밤 12시 정각이 되자 가족 모두 계산대로 달려가 줄을 섰다. 계산대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줄을 서 있다. 모두 이날만을 기다린 빈곤층 가족들이다.
지난해 6월 말 기준으로 정부로부터 생계 보조를 받는 미국인은 4450만명. 역대 최고 기록이다. 미국인 중 14.6%가 스미스 씨처럼 정부의 보조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 수치는 계속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2007년 말, 금융위기가 미국에 닥치기 시작했을 때 정부로부터 생계 보조를 받는 사람은 2600만여 명이었으나 3년6개월 만에 1800만명이 추가되면서 거의 70% 가까이 증가했다.
미국 전국크레딧카운슬링협회(NFCC)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64%가 비상시에 대비한 현금을 1000달러(약 116만원)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NFCC 대변인은 “미국 소비자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저축할 돈은커녕 위급한 상황에 사용할 예비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만약 당신이 위급하게 1000달러가 필요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응답자 가운데 17%가 “신용카드 대금이나 주택대출 상환금을 내지 않고 그 돈으로 사용하겠다”라고 대답했다. 12%는 가진 물건을 팔거나 전당포에서 돈을 마련할 것, 17%는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빌릴 것이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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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66% “부자-빈자 충돌 거세지고 있다” (한겨레, 전정윤 기자, 20120112 20:50)
‘빈부갈등 심각’ 응답 3년새 19%p↑
이민자갈등·흑백갈등보다 높아

미국의 ‘빈부격차’가 전통적인 사회갈등의 도화선이었던 민족·인종 갈등을 밀어내고 가장 강력한 ‘긴장의 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충돌’이 거세지고 있다고 보는 미국인들이 몇년새 급증한 것이다.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는 12일 “미국인 3분의2(66%)가 부자와 빈자의 충돌이 거세지고 있다고 믿는다”고 발표했다. 조사 결과, 빈부갈등이 “매우 강하다” 혹은 “강하다”고 응답한 이 비율은 지난 2009년 47%에 비해 19%포인트 급증했다. 특히 빈부갈등이 심각하다고 한 수치는 본토인과 이민자 갈등이 심각하다(62%)는 수치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흑인과 백인간 갈등이 심각하다고 대답한 이는 38%로 2009년보다 1%포인트 줄었다.
이런 결과는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나타났다. 가구 소득이 일년에 2만달러 이하인 응답자나 7만5000달러 이상인 사람의 응답 결과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또 응답자의 46%는 ‘부자는 타고나거나 인맥을 통해 된다’고 생각하며 43%만 ‘노력·야망·교육으로 부자가 된다’고 믿는다고 대답해 ‘아메리칸 드림’을 부정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리처드 모린 퓨리서치 수석 편집자는 “단기간에 걸친 이 기념비적인 측정치 변화는 ‘월가 점령 운동’의 메시지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부의 분배’의 (불공정한) 변화에 대한 시민의 자각이 성장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 퓨리서치는 최근 몇년동안 미국 상위 1% 고소득층의 부가 늘어나고 그들이 전체 부의 3분의 1 이상을 소유하게 된 반면, 저소득층의 소득은 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라스베이거스 출신의 은퇴 사진작가로 이번 연구에 참여한 이라 엘리스(64)는 “사람들은 엄청난 부자들을 볼 수 있으며, 거기엔 그 어느 때보다도 상황이 나빠진 가난한 사람들의 질투도 함께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런 인식 변화와 맞물려 빈부갈등이 올해 대선에서 가장 주요한 이슈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신문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달 연설에서 ‘중산층 가치의 회복’을 선언했으며, 보수적인 공화당은 선거 국면에서 빈부갈등에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에 대해 초조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사회의 최대 갈등… 인종차별 아닌 ‘빈부차’ (경향, 조찬제 기자, 2012-01-12 21:50:01)
미국인이 느끼는 가장 큰 사회 갈등은 계층 간 빈부차인 것으로 조사됐다. 인종 갈등이 심각한 미국에서 빈부 갈등이 두드러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처럼 빈부 갈등이 심각한 것은 부가 부자에게 편중되는 소득 불평등 현상과 이를 집중 고발한 월가 점령 시위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미국 민간 비영리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는 지난해 미국인이 느낀 빈부 갈등, 이민자와 토박이 갈등, 흑인과 백인 갈등, 젊은이와 노인 갈등을 2009년과 비교한 결과 빈부 갈등 비율이 66%로 가장 컸다고 11일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빈부 갈등 비율은 1992년 이후 가장 높았다고 전했다. 2009년 조사에서 가장 큰 사회 갈등이던 이민자와 토박이 갈등은 62%, 흑인과 백인 갈등은 38%, 젊은이와 노인 갈등은 34%였다. 빈부 갈등이 2년 만에 이민자·토박이 갈등을 제치고 미국 사회 가장 큰 갈등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퓨리서치센터는 지난해 12월 미국 성인 2048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미국 빈부 갈등은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늘어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세대나 남녀, 정치적 성향, 인종에 따라 차이가 났다. 젊은이와 여성, 민주당 지지자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노인과 남자, 공화당 지지자, 백인이나 히스패닉보다 컸다.
눈에 띄는 점은 빈부 갈등을 느끼는 백인 비율이 2년 전보다 급증했다는 것이다. 2009년 빈부 갈등을 느낀 백인은 43%였지만 지난해엔 65%로 22%포인트 늘어났다. 같은 기간 빈부 갈등을 느낀 흑인 비율이 8%포인트 증가한 데 비하면 특기할 만하다.
빈부 갈등이 미국 사회의 가장 큰 갈등으로 자리잡은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으로 보인다고 퓨리서치센터는 분석했다. 하나는 지난해 9월 중순부터 시작된 월가 점령 시위다. 월가 금융인의 탐욕에 저항해 일어난 점령 시위는 미국인의 소득 불평등 실태를 낱낱이 공개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인 가운데 상위 10%의 부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미 인구조사국은 미국인 부자 상위 10%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부동산, 유가증권, 보석류를 비롯한 부가 2005년 49%에서 2009년 56%로 늘었다고 밝혔다.
빈부 갈등이 미국 사회의 가장 큰 갈등으로 등장했지만 부자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미국인들은 ‘왜 부자들이 갈수록 부자가 되는가’를 묻는 질문에 46%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43%는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이는 같은 질문에 각각 46%와 42%로 응답한 2008년 퓨리서치센터 조사 결과와 비슷했다. 이번 조사를 책임진 퓨리서치센터의 리처드 모린 연구원은 뉴욕타임스에 “소득 불평등은 더 이상 경제학자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다”라며 “소득 불평등 뉴스는 신문 경제면에서 1면으로 옮겨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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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양극화도 문제지만 '아메리칸 드림'도 사라져"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 2012-01-06 오후 12:10:53)
<뉴욕타임스> "'기회의 평등' 주장하던 공화당 의원들도…"
미국 내 빈부격차 문제가 '부익부 빈익빈' 논란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미국 내 보수진영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아메리칸 드림'으로 인한 활발한 계층 이동성을 들며 반박해 왔지만 이를 뒤집는 연구 결과들이 쏟아지면서 할말을 잃게 됐다.
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는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미국식 사고는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웃국가인 캐나다나 유럽 국가들보다 미국의 경제적 이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예전부터 학계의 주된 논쟁거리였지만, 전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 이제 시민들까지 나서서 이를 적극 제기하기 시작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심지어 그동안 '1%'만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오던 미 공화당 의원들도 아메리칸 드림의 실종 현상에 대해 유권자들을 의식한 발언을 내놓고 있다. 공화당 대선주자 중 한명인 릭 샌토럼 전 상원의원은 지난해 가을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저소득 계층의 숫자가 유럽에 비해 뒤쳐지는 현상을 경고한 바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지 <내셔널 리뷰> 역시 다른 영미권 국가들이 미국보다 계층 이동성이 활발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미국 내 보수진영은 그동안 '기회의 평등'을 내세우며 빈부격차 논쟁을 '계급투쟁'과 같은 이념상의 문제로만 치부했지만, 신문은 빈부격차 자체가 아메리칸 드림을 가로막은 원인 중 하나가 된다고 설명했다. 미국 내에서도 대학 졸업장이 성공을 좌우하는 요소로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반면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결국 부유층 자제들이 다시 고소득 가정을 이루는 구조적 연관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신문은 이러한 가설을 증명하는 최근 수 년간의 연구 보고서들을 소개했다. 마크루스 잔티 스웨덴대 교수는 미국에서 소득 하위 20% 가정에서 자란 자녀의 42%는 성년이 되고도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지만 덴마크와 영국에서 이 비율은 각각 25%, 30%에 그쳤다. 하위 20% 가정의 자녀가 상위 20% 안에 진입하는 비율 역시 미국은 8%였지만 영국은 12%, 덴마크는 14%에 달했다.
퓨 자선신탁(PCT)의 보고서에서도 미국에서 소득 상위 20% 가정의 자녀가 상위 40%에 머무는 비율은 62%였지만, 하위 20% 가정의 자녀 중 65%는 자라서도 하위 40%를 벗어나지 못했다.
신문은 유럽과 미국이 문화와 인구 구성이 달라 비교가 힘들다는 주장을 감안해 비슷한 환경의 캐나다와 비교해 봐도 결과는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마이클 코라크 캐나다 오타와대 교수는 캐나다에서 소득 하위 10% 가정의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 같은 수준에 머무는 비율은 16%지만 미국은 22%에 달한다고 밝혔다. 반면에 캐나다 소득 상위 10% 가정의 자녀 중 18%가 같은 수준의 소득을 올리지만 미국은 26%로 더 많았다.
코라크 교수는 이러한 차이의 원인은 미국에서 성공하는데 '집안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부유한 가정이 자녀들을 교육시키는데 더 많은 투자를 하려고 애쓰는 반면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취약한 미국의 사회보장제도 속에서 미숙련 노동자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빈부 격차가 계층 이동성을 제약하고, 계층 이동성의 제약이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는 악순환을 일으키고 있다는 얘기다.
한편, 빈부격차와 계층 이동성 문제를 해결해야할 역할을 맡은 미 정치권에 쏠리는 곱지 않은 시선도 여전한다. 지난달 <뉴욕타임스>가 미국 상·하원의원 535명 중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백만장자 반열에 올라섰다고 보도한데 이어, 미 책임정치센터(CRP)가 운영하는 블로그 '오픈시크릿'은 극우 시민네크워크 '티파티'의 지지를 받는 공화당 의원들의 재산이 다른 공화당 의원들보다 더 많다고 폭로했다.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티파티에 속한 공화당 하원의원들의 평균 순자산은 2010년 기준 180만 달러로 전체 하원의원의 75만5000달러를 2배 이상 웃돌았다. 또 티파티 소속이 아닌 공화당 하원의원들의 평균 순자산 77만4280달러보다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티파티 운동이 미국 중산층의 몰락을 지적하면서 출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지지를 받는 의원이 '양극화의 승리자'라는 사실은 역설이라는 지적이다. 또 이들이 빈부격차를 초래한 현재 경제시스템에서 각종 투자와 사업으로 배를 불린 점을 감안하면 '변화'를 요구하는 유권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나 적극적인 경제 개혁에 나설지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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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노년층-젊은층 자산 차이 47배로 역대 최고치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 2011-11-08 오후 2:33:46)
업종·세대별 양극화 통계 잇따라…재분배 정책 변화 올까
미국에서 65세 이상 가구와 35세 이하 가구의 자산 차이가 50배 가까이 나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월가 시위 이후 소득과 자산 격차가 업종과 소득, 세대 등 전방위에 걸쳐 다양한 양태로 확대됐다는 분석이 잇따라 나오면서 시위대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7일(현지시간) <AP> 통신이 이날 발표된 미국 인구통계 조사 결과를 분석해 보도한 이 조사 결과는 미국의 양극화가 세대별로 처한 경제 상황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새롭게 보여준다.
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가구의 평균 순자산은 35세 이하 가구의 순자산보다 47배 많아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지난 2005년 대비 2배 이상, 25년 전에 비해 5배 가까이 벌어진 수치다. 미국의 조사전문기관 퓨리서치센터도 이 통계를 분석했는데, 65세 이상 가구의 순자산 중간값은 17만494달러로 25년 전에 비해 42% 증가했다. 반면 35세 이하 가구의 순자산 중간값은 3662달러로 같은 기간 동안 무려 68% 감소해 충격을 던져줬다.
이러한 분석은 경기 침체의 충격이 고령 가구보다 젊은 세대에 더 큰 고통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통신은 설명했다. 예전보다 대학 진학 희망자가 늘어나면서 졸업 후 직장을 찾을 때까지 학자금 대출을 받은 이들이 늘어났고, 부동산 거품이 터진 이후에는 주택담보대출금(모기지) 부담까지 늘어났기 때문이다.
반면 고령층은 대부분 주택대출금을 다 갚았고, 저축과 투자 소득을 축적한 상태로 부담이 덜하다. 또 순자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택 가치에서도 고령층은 부동산 경기가 과열되기 전에 집을 구입한 경우가 많아 부동산 거품이 터진 후에도 오히려 가치가 증가했다. 그 결과 청년 가구층 중 순자산이 아예 없거나 마이너스를 기록한 비율이 25년 전보다 2배로 늘어난 37%를 기록한 반면, 고령층 가구 중 자산이 없거나 마이너스인 가구는 8%에 불과했다.
게다가 고령층 가구가 상대적으로 근속연수가 길어 저축을 할 여유가 많았지만, 빚에 눌려있는 청년층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9% 대의 실업률 속에서 이중고를 겪고 있다. 이 때문에 1967년 이후 고령 가구의 소득 증가율은 청년층 가구의 4배에 달한다.
이번 통계는 현재 미 정부의 재정 감축 방향이 고령층을 위한 사회 안정망과 건강보험은 유지하면서 저소득 가정 학생의 교육 지원 프로그램이나 빈곤 가구에 대한 자금 지원을 대규모로 삭감하려는 상황에서 나와 시사점을 던져준다.
현재 고령 가구의 소득 중 사회보장연금의 비율은 55%로 25년 전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들의 퇴직 연금은 물가 수준에 연동돼 안정적인 소득원이 된다. 하지만 청년층은 해마다 오르는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 때문에 예산 감축 방안을 논의하는 미 의회 초당위원회는 저소득층 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학 지원 프로그램 감축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다. 조지타운대의 해리 홀저 교수는 <AP>에 "은퇴자 지원과 그들의 건강보험에 쓰이는 막대한 재원 중 일부가 그들보다 더 심한 고통을 받는 계층에 재배치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99%'를 표방하는 월가 시위대가 '1%'의 탐욕과 미국의 양극화를 비판하고 나선 이후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통계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미국의 민간연구소들이 소득 양극화 문제를 끊임 없이 지적한데 이어 지난달 26일 미 의회예산국(CBO)도 지난 수십년간 미국에서 '부익부 빈익빅' 현상이 가속화되고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다는 통계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워렌 버핏과 같은 '슈퍼 부자'들까지 소득 불균형과 미국의 불합리한 조세 제도를 비판하고 나선 가운데 금융권에서도 이러한 양극화를 인정하는 조사가 나왔다. 7일 <AFP>에 따르면 영국 런던에서 금융업 종사자 515명을 상대로 설문을 벌인 결과 양극화 현상이 너무 심하다는 응답이 75%에 이르렀다.
이 조사는 월가 시위에 동조해 일어난 '런던을 점령하라'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는 런던 세인트폴 성당이 운영하는 조사 기관에 의해 실시됐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금융 종사자의 연봉 윤리에 대한 이번 설문에서 금융인 대부분이 소득 양극화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금융업에 종사하는 가장 큰 동기는 높은 연봉이며,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보너스는 회사의 장기 성과에 의거해 주어진다며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월가의 수익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다른 이들까지 금융인들의 주장에 얼마나 동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7일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뱅크오브아메리카, 씨티그룹 등 월가 대형은행들의 올해 상반기 수익은 340억 달러로 금융위기 발발 직전인 2007년 한 해 수익과 비슷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증권사들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후 지금까지 2년 반 동안 830억 달러의 수익을 냈는데 이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재임했던 8년 간 벌어들인 770억 달러보다 더 많다. 또 월가 금융회사들의 지난해 평균 급여는 1년 전보다 16.1% 늘어난 36만1330달러로 다른 업종의 노동자보다 5배나 높았다. 오바마 행정부가 쏟아부은 구제금융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기 보다는 자기 배를 불리기에 바빴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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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조사국, "상위 20%가 소득 절반 차지" 양극화 공식 확인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 2011-10-27 오후 6:55:09)
오바마 "우리는 더 기다릴 수 없다"라지만…반응은 냉담
미국에서 지난 30년 동안 상위 1%의 부(富)가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두 배로 늘어난 반면 저소득 계층이 차지하는 비율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1%의 탐욕'을 거부하는 월스트리트 시위대의 저항은 결국 미국 정부가 부의 재분배 역할을 하는 조세 정책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지 못해 빚어진 결과라는 지적이다.
26일(현지시간) <AP>에 따르면 미 의회예산국(CBO)은 미 국세청과 인구통계국이 보유한 1979~2007년 자료를 이용해 미국 가구의 세후소득 변화를 분석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물가 상승을 반영한 소득 상위 1% 가구의 세후소득은 275% 증가한 반면 중간층 가구(소득 상위 40~60% 사이)는 40%, 소득 하위 20% 가구는 18% 늘어나는데 그쳤다.
상위 20%가 전체 가구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1979년 43%에서 2007년 53%로 늘어나 나머지 80%의 비율(47%)보다 더 많아졌다. 이 중에서 상위 1%의 비율은 1979년 8%에서 2007년 17%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반면에 하위 20%가 차지하는 비율은 7%에서 5%로 더 떨어져 부의 집중 현상이 심화됐음을 보여준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30년 간 연방 소득세의 재분배 기능이 약화되어 왔다는 것을 이번 보고서가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CBO 관계자가 신문에 "연방 소득세 구성이 소득세(income tax. 투자 이익을 포함한 소득에 대한 세금)에서 급여소득세(payroll tax. 단순 급여소득에 대한 세금) 중심으로 이동해 왔다"고 말했듯이 투자 소득에 대한 세율이 낮은 탓에 부자들이 낮은 세율을 적용받으면서 부를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월가 시위가 보여주듯 불공평한 부의 배분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만은 누적되고 있다. <뉴욕타임스>와 <CBS>가 19~24일까지 1650명의 미국 성인을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3명 중 2명이 미국의 부가 좀 더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미 상원이 지난 11일 부자 증세안이 포함된 일자리 법안을 부결시킨 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더 기다릴 수 없다"는 구호를 앞세워 친서민 코드를 더욱 강화하고 있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차가운 편이다. 설문조사에서 28%가 오바마가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중산층을 위한 정책이라는 응답은 23%,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책이라는 응답은 17%에 그쳤다.
<뉴욕타임스>는 초당적 기관인 CBO가 승인한 이번 보고서가 그 동안 민간 연구기관들이 주장해온 사실과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연방 세제의 공정성과 정부 지출 감축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미 의회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민주당은 이 보고서에 대해 "소득 불균형 심화를 경고하는 가장 최신의 증거"라고 평가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의 부자 증세에 힘을 실어줄 기세다. 하지만 공화당은 여전히 증세보다는 복지 혜택 등을 줄여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미 하원 예산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폴 라이언 의원(공화당)은 이날도 오바마의 정책을 "계급 투쟁"이라고 비난하면서 공화당이 추진하고 있는 정책은 사람들에게 '기회의 평등'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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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빈곤층 '4620만 명'…52년 만에 최대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 2011-09-14 오후 2:25:05)
<뉴욕타임스> "고용난과 소득 양극화가 빈곤 부추겨"
미국의 지난해 빈곤율이 1983년 이후 17년 만에 최악을 기록했다. 경기 침체에서 좀처럼 탈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는 수치로, 가중되는 실업난과 소득 양극화가 원인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미국 인구통계국이 13일(현시시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0년 미국의 빈곤층은 260만 명이 늘어난 4620만 명이다. 이는 인구통계국이 통계를 작성한 지난 52년 동안 가장 높은 수치다. 이에 따라 미국의 빈곤율은 15.1%로 1983년 이후 가장 높았던 1993년과 같은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의 빈곤율은 4인 가구 기준 연간 최저생계비인 2만2314달러(약 2451만 원) 을 밑도는 가구를 대상으로 산정된다. 2인 가구는 1만4218달러(약1561만 원), 1인 가구는 1만1139달러(약 1223만 원)가 기준이다.
중산층의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는 중간 계층 가구의 연간 소득도 4만9445달러(약 5431만 원)로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1997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처럼 중산층의 실질 소득이 후퇴한 것은 대공황 이후 처음이라고 로렌스 카츠 하버드대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빈곤율은 인종별로도 다르게 나타났다. 흑인은 2009년 25%에서 27%로 뛰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히스패닉계은 25%에서 26%로 늘었다. 백인의 경우 9.4%에서 9.9%로 소폭 늘었고 아시아계은 12.1%로 변화가 없었다.
이번 조사는 정부가 제공하는 식품 보조권(푸드 스탬프) 등의 사회안전망이나 기존에 보유한 재산까지 고려한 조사는 아니어서 빈곤율이 실제보다 부풀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주거비 증가와 의료·에너지 관련 지출 증가 같은 요소 역시 반영되지 않아 결과에 큰 차이는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 미국의 지난 50여 년간 빈곤인구 및 빈곤율 추이 ⓒ미 인구통계청
미국의 빈곤율 상승은 고용난이 부추기고 있다는 게 다수의 평가다. 18~64세 인구 중 4800만 명이 지난해 단 1주일도 일하지 못했으며 이는 2009년 4500만 명에서 300만 명 늘어난 수치다.
<뉴욕타임스>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악화된 것이라며 2008년 금융위기를 포함한 지난 10년 동안 중산층과 빈곤층의 부담이 계속 늘어왔다고 분석했다. 경제위기와 실업뿐 아니라 실질소득 감소와 양극화가 빈곤율 상승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소득 하위 10%의 중간소득(median income)은 최고치를 기록했던 1999년 대비 12% 떨어졌다. 반면 상위 10%의 중간소득은 같은 기간 1.5% 감소했을 뿐이다. 게다가 경기 활황기였던 2001년에서 2007년 사이 경제활동이 가능한 인구의 실질 소득은 오히려 더 떨어졌다.
경제활동 가능 인구의 중간소득이 전반적으로 감소했지만 특히 15세에서 24세까지의 청년층 소득이 급격히 하락했다. 또 25세에서 34세 사이 미국인 중 부모와 함께 사는 비중은 2007년 대비 현재 25% 뛰었다. 이중 절반은 부모의 소득을 제외했을 때 빈곤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풀타임 일자리를 가진 미국 성인 남성의 지난해 중위소득은 4만7715달러로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1973년 수준에서 거의 바뀌지 않았다.
경제학자들은 올해 역시 이러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고 전망했다. 정부의 부양정책은 거의 끝나가는 반면 지방정부는 공무원 감축과 사회보장 프로그램 예산 삭감에 나서 빈곤 상태에 빠질 가구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현재 추세라면 경기 침체로 인해 향후 5년간 1000만 명의 빈곤층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미국인들은 2009년보다 90만 명 늘어난 4990만 명으로 집계됐다.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의료보험을 제공받는 이들의 비율은 2000년 65%에서 지난해 55%로 하락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보고서가 최근 오바마 대통령이 내놓은 일자리 대책이 긴급한 사안임을 강조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면서도 공화당 역시 내년 대선을 앞두고 오바마의 실정을 부각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빈곤율 15.1% 가난해진 미국인… 17년만에 최고치 (국민일보 쿠키뉴스, 워싱턴=김명호 특파원, 2011.09.14 17:59)
미국 국민들이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경기회복 둔화 등으로 미국의 지난해 빈곤율이 1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또 지난해에만 빈곤층이 260만명 늘어났다.
미국 인구통계국이 13일(현지시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빈곤율은 15.1%로 전년(14.3%) 대비 0.8% 올랐다. 이는 1993년의 15.1%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빈곤율은 전체 가구 중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소득을 벌어들인 가구의 비율을 말한다. 최저생계비 기준은 세전 현금소득이 4인 가구 2만2314달러, 2인 가구 1만4218달러, 1인 가구 1만1139달러다. 여기에 정부가 지급하는 식품보조권(푸드스탬프)과 기존 보유 재산은 포함되지 않는다.
미국 빈곤율은 조사가 시작된 1959년에 22.4%였다. 1983년에 15.2%를 찍고 해마다 줄어들어 13%대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1993년에 15.1%를 기록했다. 이후 2000년에 11.3%까지 줄어들다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빈곤율이 증가했다. 양극화 현상이 뚜렷하게 진행된 것이다.
빈곤층에 속한 인구는 지난해 4620만명이나 된다. 전년도(4360만명)보다 260만명이나 늘어난 것이다. 매사추세츠공대(MIT) 폴 오스터만 교수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실업률(9.1%)을 감안한다면 빈곤율 상승은 그다지 놀랄 일이 못 된다”면서 “미국 국민들이 얼마나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수치”라고 말했다.
빈곤층 확대로 중산층이 점점 축소돼 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소득 중간계층 가구의 한 해 소득이 4만9445달러로 전년의 4만9777달러에 비해 소폭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30년 동안 중간층의 소득 수준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동안 진행된 인플레이션으로 중산층은 1980년에 비해 겨우 11% 정도의 소득 증가만 있었다. 또 전체 가구 중 60%가 지난해에 비해 소득이 감소됐다.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들은 5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비해 상위 5% 부자들은 소득이 42%나 치솟았다.
18세 이하 어린아이들의 빈곤율은 더 열악하다. 지난해 이들의 빈곤율은 22%나 된다. 이는 미국 아이들 5명당 1명꼴로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어른들의 빈곤율(18∼64세)은 13.7%다. 이에 따라 점차 성인이 된 젊은이(25∼34세)들이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해 이들 연령층 590만명이 부모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기침체 이전에는 470만명 수준이었다. 
 
몰락하는 미국 중산층 (한겨레,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20110914 20:57)
빈곤층 4620만명…전체인구 15.1% 17년래 최고
중산층 소득 10년간 계속 하락 “대공황 이후 처음” 

장기화되는 경기침체로 미국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 미 인구통계국이 13일 발표한 미국의 지난해 빈곤율은 15.1%로, 전년(14.3%)보다 0.8%포인트 상승해 1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빈곤율은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소득을 벌어들인 가구의 비율을 말하는 것으로, 지난해의 경우 세전 현금소득이 4인 가구 기준 2만2314달러(2464만원)였다. 미국의 빈곤층은 모두 4620만명으로 전년(4360만명)보다 260만명 늘어났다. 미국의 빈곤율은 해당 조사가 시작된 지난 1959년 22.4%에서 출발해 계속 하락해 지난 2000년에는 11.3%까지 떨어졌으나, 최근 10년간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경기침체가 이어지면서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중산층 가구의 추락이 두드러졌다. 지난해 소득 중간계층 가구의 소득도 4만9445달러(5480만원)로, 전년의 4만9777달러에 비해 소폭 감소했다. 소득 중간계층 가구의 소득은 1999년 5만3252달러를 정점으로, 이후 10년간 계속 하락하고 있다. 로렌스 카츠 하버드대 교수(경제학)는 이를 ‘잃어버린 10년’이라며 “중산층 가구의 소득이 10년 이상 하락한 것은 대공황 이후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미 중산층 가구는 실업, 집값 하락, 주가 하락 등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휘청이고 있다. 이번 조사와 별도로 연방준비제도(연준) 통계를 보면,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미국 가정이 소유하고 있는 주택 순자산가치(주택가격에서 담보대출을 뺀 것)는 6조1000억달러로 지난 2006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중산층 가정의 순자산도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연간 2.4%씩 상승하다 이후 2년간 26.2%나 곤두박질했다.
인종별로는 흑인의 빈곤율이 27%로 가장 높았고, 히스패닉의 빈곤율은 25%, 아시안은 12.1%, 백인은 9.4%로 인종별 차이도 컸다. 특히 실업난에 시달리는 25~34살의 청년층 중에서는 거의 절반이 빈곤층인 것으로 조사됐다. 티모시 스미딩 위스콘신 주립대 빈곤 연구소장은 <뉴욕타임스>를 통해 “새로운 하류계층이 나타나고 있다”며 “젊고, 교육을 덜 받은, 남성들이 실업으로 인해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들의 아이들도 부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지금같은 경기침체가 계속되면, 10년 안에 1000만명의 빈곤층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조사에선 의료보험이 없는 국민도 90만명이 더 늘어나 4990만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유에스에이(USA) 투데이>는 미국 보험조사위원회 자료를 통해 미국 내 자동차 7대 중 1대꼴로 무보험 차량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난 12일 보도했다. 
 
美 빈곤층 4620만명… 52년만에 최고치 (세계일보,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2011.09.14 (수) 20:17)
작년 한해만 260만명 전락… “경제상황 생각보다 심각”
가계 실질중간소득 대공황이후 첫 하락… 양극화 심화

미국 경제가 일반인이나 경제학자의 생각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인구통계국은 지난해에만 260만명이 빈곤층으로 전락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13일 밝혔다. 이로써 미국에서 빈곤층은 4620만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미국 인구의 15.1%에 해당된다. 빈곤층의 비율을 기준으로 하면 이는 1993년 이후 17년 만에 최고치이다.

미국의 빈곤층 규모는 인구통계국이 조사를 시작한 지 5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 중산층의 중간소득 수준도 1997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미국 가계의 연간 중간소득이 5만 달러 아래로 떨어졌으며, 이는 1996년 이후 처음이다. 미국이 ‘잃어버린 10년’을 보냈다는 사실이 이번에 확인됐다.
2009년부터 2010년 사이에 실질 중간소득이 2.3%가 하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경기 침체기를 겪은 이후의 미국 경제 상황이 1970년 이후 미국이 겪었던 어느 경기 침체기 이후보다 더 나쁜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이 1930년대 대공황을 겪은 이후 인플레이션 등을 감안해 가계의 실질 중간소득이 오르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에 미국 가계의 연간 중간소득은 4만9445달러로 집계됐다. 이는 1999년 당시의 최고치 5만3252달러에 비해 7%가 감소한 것이다. 미국의 가구 구성원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도 중간소득이 감소한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고 전문가들이 밝혔다.
미국이 경기 침체기를 겪으면서 중산층의 일부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또 경기 침체기 이후에 이뤄진 경기 회복에도 불구하고 저소득층의 살림살이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에서 빈곤층 기준점은 지난해를 기준으로 4인 가족 연간 가계소득 2만2314달러이다. 또 2인 가구는 1만4218달러, 1인 가구는 1만1139달러 등이다.
미국에서는 인종 간 빈부 격차도 심화되고 있다. 지난해 흑인 빈곤층은 27%에 달해 전년도의 25%보다 늘어났다. 또 히스패닉 빈곤층 비율은 2009년에 25%였으나 지난해에는 26%로 늘었다. 그렇지만 백인 빈곤층 비율은 2009년 9.4%에서 지난해에 9.9%로 0.5%포인트가 늘어나는 데 그쳤다. 아시안 빈곤층 비율은 12.1%로 변화가 없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지난번 경기 침체로 인해 2015년까지 약 1000만명의 빈곤층 인구가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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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과도한 재정지출 ‘쌍둥이 적자’ 눈덩이 (경향, 김희연 기자, 2011-06-09 21:25:59)
ㆍ채무 한도 확대도 의회 갈등으로 ‘발목’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와 무디스, 그리고 피치 등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들의 잇따른 채무불이행(디폴트) 가능성 경고. 이어진 국채 값 하락을 가져오는 신용등급 하향 조정 및 추가 하향 검토. 미국의 재정적자와 정부부채 급증이 세계 경제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9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미국 전체 정부(연방+지방)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올해 10.8%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는 10.6%였다. 미국 정부 총부채는 지난해 말 13조4190억달러로 GDP의 91.6%에 달했다. 문제는 부채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총부채는 2015년 말 19조683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GDP의 109.4%에 달한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2009년부터 급속하게 확대됐다. 금융위기가 터져 가계와 기업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경제성장이 뒷걸음질친 탓이다.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확대 정책을 폈다. 정부에서 국채를 발행하면 연준(Fed)이 1, 2차 양적완화 정책으로 달러를 찍어내 미 국채를 사들여왔다. 삼성경제연구소 곽수종 수석연구위원은 “금융위기 전에도 미국은 이라크, 아프간 테러 전쟁을 수행하면서 과도하게 재정 지출을 확대해왔다”면서 “이와함께 경상수지와 재정수지가 함께 적자인 이른바 ‘쌍둥이 적자’로 재정상황이 악화됐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중국의 위안화 절상을 강요하는 것도 경상수지 적자 등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총부채(공공채무)는 미 정부 지급보증 한도인 14조3000억원에 도달했다. 의회 승인을 거쳐 한도액을 늘리지 않으면 만기가 돌아오는 국채를 정부가 매입할 수 없는 일시적 채무불이행과 정부 활동이 멈추는 ‘정부 폐쇄’ 등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한도 확대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깊다. 미국에서는 공화당이 재정지출 규모의 대폭 삭감을 공약하며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다수당이 됐다. 재정적자 감축 논의가 정치권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오바마 대통령(민주당)은 재정 적자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건강보험 및 사회보장부문 지출 삭감을 최소화하는 대신 부유층 중심의 세수증대 방안에 중점을 두고 있다. 반대로 공화당은 세수 증대는 최소화하고 대신 건강보험 및 사회보장부문 지출을 대폭 삭감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공공채무 한도 확대를 두고 갈등을 빚는 배경이다.
오는 7월 중순까지 공공채무 한도 확대 승인이 이뤄지지 않으면 신용평가사들의 경고처럼 일시적 디폴트의 위험도 있다. 디폴트가 발생하면 미국 신용등급 하락과 함께 미 국채금리가 뛰어오른다. 그만큼 정부의 이자부담은 증가하고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하게 된다. 국제금융센터 김종만 박사는 “미 국채는 국제 금융시장의 지표금리로 국내는 물론 국제금융시장의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며 “또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위상이 하락해 금융시장 전체의 불안을 증폭시킬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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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181010125&code=990000
[국제칼럼]미국의 부채 논쟁, 한국의 복지 논쟁 (경향, 손열|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2011-07-18 10:10:12)
요즘 미국 워싱턴 정가는 무더위와 함께 부채 논쟁으로 뜨겁다. 14조3000억달러 규모의 정부채무한도를 넘어선 오바마 정부는 채무불이행(디폴트)을 면하기 위해 공화당과 힘겨운 협상을 벌이고 있다.
공화당은 한도 증액의 조건으로 정부지출의 대폭삭감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민주당 정부는 지출삭감과 함께 부유층에 대한 세금인상으로 재정균형을 이루고자 한다. 미국과 세계경제를 일거에 혼란으로 몰고 갈 시한폭탄은 불과 3주를 남기고 있지만 양측은 좀처럼 타협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 기저에서 강고한 이념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공화당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채가 높은 실업률과 경기침체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현 정부가 적자재정으로 방만한 지출을 해 왔으나 경기부양은 되지 않고 적자만 늘어났므로 사회복지 관련 예산 삭감을 포함한 정부지출을 대폭 축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이 제안한 부자(대기업) 증세에 대해서도 결사반대하고 있다. 미국에 일자리를 제공하는 이들에게 세금을 더 받아서는 안된다는 논리이다. 공화당은 작은 정부와 감세를 통해 시장규율을 회복하는 것이 회생과 번영의 지름길이라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재현하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부시 정부 시절의 부자감세정책을 지목하면서 대기업의 이윤축적이 사회전반의 소비와 소득증가로 이어지는 이른바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대기업은 수익을 투자나 고용창출에 사용하기보다는 배당지급, 자사주 매입, 부채 축소 혹은 해외투자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막대한 현금을 묻어두고 있는 이유는 민간수요의 부족 때문이므로 부자에게 세수를 확대하여 재정적자를 감축하는 한편 정부지출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수요를 진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케인스주의 노선이다.
이런 점에서 공방의 핵심은 재정균형이 아니라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이념적 입장이다. 지난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계기로 각국은 시장의 과잉, 경제전반의 금융화가 파국을 가져왔다는 인식하에 국가의 역할을 복원함으로써 시장을 견제하는 새로운 제도 만들기에 국내적, 국제적 노력을 기울여 왔다. 미국이 주도해 온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혹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패권적 지위는 추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저명한 경제인류학자 카를 폴라니(Karl Polanyi)가 예리하게 통찰하였듯이, 자본주의 질서는 그동안 시장과 국가 사이를 시계추처럼 움직여 왔다. 19세기 세상을 풍미한 영국의 시장자본주의는 1930년대 대공황을 계기로 국가개입적 자본주의로 대체되었으며, 이는 1990년대 들면서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위세에 밀려 힘을 잃었다. 이제 2008년의 위기로 인해 미국질서가 동요하고 있지만 대안프로그램이 마땅치 않다.
미국의 경우 민주당 정부가 새 세상을 여는 자본주의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이에 공화당의 신자유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의 부채 논쟁 이면에 벌어지고 있는 날카로운 자본주의 논쟁은 복지 논쟁에 여념이 없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한국은 지금 복지 편승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있다. 무상급식, 무상보육, 반값 등록금 등 여야,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어디에 얼마나 쓸 것인가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복지는 구질서의 대안이 아니라 다가오는 신질서의 일부분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과제는 복지의 우선순위나 재원마련 차원을 넘어서 이것들을 어떠한 자본주의적 생산체계에 담을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다. 소득불균형과 관련된 좁은 의미의 복지 개념을 넘어서서 기후변화, 자원고갈, 식량안보, 인구변화, 이민 등 21세기적 과제를 복합적으로 담아내는 큰 복지개념을 세워야 하고, 이를 생산체계와 유연하게 연계하는 신자본주의 질서를 모색해야 한다.
우리의 복지논쟁이 빛바랜 20세기 유럽의 복지국가모델 수준에 머무를 경우 머지않아 시장의 역습을 불러올 수 있다.
 
http://foog.com/10565/
서민들이 우익정당을 지지하는 이유에 대한 단초 (foog.com, July 18, 2011)
“월스트리는 너무 추상적이고 대침체를 초래한 금융 게임들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감지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에 대한 정부의 구제금융은 거의 모든 이들이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티파티의 등장이 월스트리트의 구제금융의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티파티를 지지하는 한 지인은 “정부가 힘 있는 자들에 의해 포섭되어, 우리 세금을 가져가고, 우리의 점심을 먹기 때문에” 정부를 싫어한다고 내게 설명했다.
동시에 보통 사람들을 돕기 위해 정부가 하는 일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너무나 조밀하게 엮여져 있어 거의 정부가 하고 있다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의 헬스케어 예산안에 대항하기 위해 의회의 주민회의에 나타나 “내 메디케어를 뺏어가지 마라!”라고 소리치던 분개한 유권자를 생각해보라.
코넬의 정치학자 Suzanne Mettler의 최근 논문에 따르면 얼마나 많은 정부보조의 수혜자가 그들이 여하한의 혜택도 받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소셜시큐리티 수혜자의 44% 이상이 자신들이 “정부의 어떠한 사회 프로그램도 이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부보증의 학생대출을 받는 가구의 반절 이상, 홈모기지의 이자공제를 받는 이들의 60%, 실업보험을 수혜자의 43%, 그리고 소셜시큐리티 장애급여 수령자의 30% 역시 같은 대답을 했다.”[The Rise of the Wrecking-Ball Right]
서민들이 먹고살기 힘들다면서, 힘 있는 것들이 싫다면서 왜 우익정당을 지지하는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Robert Reich의 설명이다. 즉, 일반유권자들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시장의 작동원리보다는 그 시장과 협잡해 세금을 갈취해가는(!) 정부에 더 분노하기 쉽고, 우익은 이러한 심리를 이용하여 “작은 정부”라는 ? 실질적으로는 “더 큰 시장”이라는 ? 그들의 목표를 위해 유권자를 포섭한다는 것이 민주당 지지자인 Reich의 설명이다.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정부의 복지기능을 인지하지 못하는 유권자들은 ‘정부가 혈세로 엉뚱한 짓을 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역할을 축소시켜야 하고, 나아가 큰 정부를 지지하는 진보세력을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할 개연성이 있다. 즉, 정부의 형태를 진보적으로 바꿔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관철한다는 대자적 목표는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프로파간다에 정부일반에 대한 혐오감이라는 즉자적 대응으로 치환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선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는 현실이 유권자의 염세주의를 부추기고 대자적인 정치행위를 무력화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클린턴 행정부의 노동부 장관을 지낸 Robert Reich로서는 민주당을 변호하고 싶겠지만, 결국 오바마의 민주당 정권 역시 경제운용에서 보자면 공화당의 민간금융기업과의 회전문식 인선을 답습하고 있고, 염세주의를 부추긴 월스트리트 구제금융의 장본인이니 말이다.
우리의 경우는 더욱 심해 한나라당과 민주당 간의 정치적 입장차에 비해 경제적 입장차가 매우 좁은 형편이다. 둘 다 성장주의적, 친재벌적 경제운용을 지향하여 왔고, 큰 정부나 복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최근에서야 재야에서 제도권으로 진입한 진보정당의 그것을 많이 차용했다. 그러다보니 정치적으로 극단적으로 민주당 정권을 저주하던 보수정당과 보수지가 한미FTA 등의 신자유주의 정책에서는 한 목소리로 칭송하는 상황까지 연출하였다.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이러한 나라들의 양당정치가 갈수록 퇴보하는 것은 기업정치와 자본의 세계화가 한 나라의 행정권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결국 생존을 위해 그들에게 생존을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 강화되면서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기업은 번영을 위해 점점 더 정부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정부가 필요한 서민들이 염세주의적으로 계급모순적인 정치행위를 하게 되는 상황은 지금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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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5/17/0200000000AKR20110517000400071.HTML
美재무부 "정부채무 법정한도 도달"(종합) (워싱턴=연합뉴스, 이승관 특파원, 2011/05/17 00:13)
2개 펀드투자 중단..백악관 "심각한 결과 초래"
미국 재무부는 16일 "연방정부의 부채가 법정 한도인 14조2천940억달러에 도달했다"면서 "이에 따라 투자억제를 위한 조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재무부는 이날 총 720억달러의 채권과 지폐를 발행할 예정이며, 이에 따라 이날중 법정한도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됐다.
이와 관련,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이날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인 해리 리드 의원 등에게 보낸 서한에서 "미국의 신뢰도를 보호하고 국민이 겪을 수 있는 재앙을 막기 위해 채무한도를 증액해 달라"고 거듭 촉구했다. 그는 특히 대출 여력을 확보하기 위해 공무원 퇴직.복지 펀드와 증권투자펀드 등 2개 정부펀드에 대한 투자를 중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도 이날 미시시피강 범람 피해가 발생한 테네시주 멤피스로 향하는 에어포스원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채무한도 초과 사태와 관련, "한도를 증액하지 않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면서 "이에 반대하는 측은 상황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은 내년 회계연도에 대폭적인 지출삭감이 보장되지 않는 한 채무한도 증액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이를 놓고 진통이 예상된다. 실제로 공화당 소속 폴 라이언 하원 예산위원장은 지난달 말 CBS방송에 출연한 자리에서 "공화당은 정부 채무한도를 높이는 데 무조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추가적인 지출감축 조치와 연계할 것을 요구한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재무부는 의회가 당장 채무한도 증액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연방준비제도(연준. Fed)에 예치해둔 현금 1천억달러를 동원하고 2천억달러 규모의 특수목적 차입의 일시 중단 등을 통해 8월초까지는 디폴트(채무상환 불이행)사태는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0000&newsid=20110517042206749
美정부 `8월 디폴트 위기'..파장은 (워싱턴=연합뉴스, 이승관 특파원, 2011.05.17 04:22)
정치권 기싸움 불구 현실화 가능성 낮아
현실화땐 "금융시스템 와해.복지시스템 마비 등 우려"
미국 연방정부의 부채가 16일 법정한도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면서 `정부 디폴트(채무상환 불이행)' 사태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민주.공화 양당 지도부가 채무한도 증액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 이런 사태가 실제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나 현실화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은 이날 의원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채권발행유예'를 선언하며 채무한도 증액을 거듭 압박했다. 그는 특히 "미국의 신뢰도를 보호하고 국민이 겪을 수 있는 재앙을 막기 위해 채무한도를 증액해야 한다"고 주장, 의회가 협조하지 않을 경우 `국가적 재앙'에 직면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물론 의회가 당장 채무한도 증액조치를 하지 않더라도 미 정부는 연방준비제도(연준. Fed)에 예치해둔 현금 1천억달러를 동원하고 2천억달러 규모의 특수목적 차입을 일시 중단하는 조치 등을 통해 8월초까지는 디폴트 사태를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가이트너 장관이 이날 서한에서 채권발행유예기간을 `8월 2일'까지로 설정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문제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재정적자 감축방안에 대해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민주.공화 양당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할 경우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미 CBS방송은 "정부가 1달러를 사용한다고 가정할 때 60센트는 세금에서 나오고 나머지 40센트는 빌리는 것"이라면서 "결국 채무한도를 높이는 것은 경제성장과 사회보장제도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즉, 채무한도를 높이지 못할 경우 정부지출이 중단될 수 밖에 없고, 이는 연금 및 식량배급권 지급, 학자금 대출 등과 같은 사회복지시스템의 기능 마비는 물론 경제성장 중단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시장에서도 미국 국채보유자들에 대한 이자 지급은 법으로 보장되고 신탁기금 수익도 정해진 일정에 따라 지급될 가능성이 높지만 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최근 상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채무한도 증액이 합의되지 않을 경우 최악의 시나리오는 금융시스템이 또다시 와해되는 것"이라면서 "리먼브러더스 사태에 버금가는 엄청난 타격이 가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차입금리가 상승하면 가뜩이나 심각한 재정적자가 실질적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거시경제 측면에서도 미 정부가 중요한 투자를 줄일 수 밖에 없어 최근의 경기회복세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실제 워싱턴D.C. 소재 싱크탱크인 `서드웨이(Third Way)'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정부 디폴트 사태가 현실화할 경우 최소 64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이자율 상승으로 주택시장 불안이 재현돼 미국이 또다시 불경기에 빠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또 금융서비스업체 '재니 몽고메리 스콧'의 연구자료를 인용, 뉴욕증시의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 & P) 500' 지수가 3개월만에 6.3% 하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오는 8월초까지 채무한도 증액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미 정부는 4천억달러 상당의 금, 800억달러 어치의 석유, 1천억달러 규모의 주택저당증권(MBS)과 국유지 및 국유건물, 공공서비스사업 매각 등을 통해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실제 보수성향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의 론 우트 선임연구원은 정부가 켄터키주(州) 군사기지 포트녹스에 저장된 금 약 1억4천700만 온스를 처분해 부채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1/05/17/0608000000AKR20110517034900071.HTML
빚이 빚을 낳는 악순환에 빠진 美정부 (워싱턴=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2011/05/17 08:55)
14조달러 채무한도 초과..대공황 이후 흑자재정은 12번뿐
부채 이자로만 한달 1천300억달러..향후 10년간 6조달러 필요
빚더미에 올라 있는 미국의 연방정부가 16일로 법정 채무한도를 초과, 비상수단으로 연명하는 신세가 됐다. 미 연방정부의 부채는 지난해 말로 14조달러를 돌파했고 이날 의회가 설정한 부채한도인 14조2천940억달러를 넘어선 것이다. 이같은 천문학적 규모의 부채 때문에 연방정부가 한 달에 갚아야 하는 이자만 1천300억달러에 달한다.
부채한도가 초과했기 때문에 신규 차입이 불가능하고, 이자를 갚지 못하면 정부가 디폴트(채무상환 불이행) 상태에 빠져 파산하는 것이 순리지만, 미 정부는 중앙은행에 예치해둔 현금을 끌어다 쓰고 몇몇 정부기금에 대한 투자지출을 줄임으로써 오는 8월 초까지는 디폴트 사태를 면하는 비상조치를 시행키로 했다.
미국의 부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34년 이후 지금까지 76년 동안 미 연방정부가 흑자재정을 기록한 것은 단 12차례에 불과하다. 64차례는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재정을 꾸려온 것이다. 기축통화인 달러화를 찍어내는 기계가 없었더라면 미국은 벌써 파산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적자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 정녕 불가능한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앞으로 10년 이내는 불가능하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21%에 해당하는 재정지출을 단행하고 있다. 이에 비해 재정수입은 GDP 대비 19%에 그친다. 경기침체로 인해 재정지출의 GDP 대비 비중이 25%로 늘어난 적도 있다.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것은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이른바 `의무적인 지출'의 비중이 워낙 큰 탓이다.
노령연금과 극빈자ㆍ노인층을 위한 의료비 지원 등 3대 사회보장비가 연방정부 지출의 약 3분의 2를 차지한다. 이런 사회안전망 지출을 손대지 않고서는 적자 문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구조다.
미국의 재정수입 부문에서는 개인 소득세가 전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지만, 세금감면 규모가 연간 1조달러에 달하는 기형적인 세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세금감면을 폐지하는 것은 세금인상과 다름없어, 사회보장 시스템의 개혁과 마찬가지로 정치권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뜨거운 감자'다.
이런 형편이니 수입와 지출을 제대로 맞춰 흑자는커녕 균형재정을 이루기도 어려운 것이 미국의 실상이다. 앞으로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춰 간다고 하더라도 14조달러가 넘는 부채의 이자는 미국의 재정을 압박하면서 빚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향후 10년간 5조6천400억달러가 부채 이자로 지급돼야 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CBO의 분석에 따르면 10년 후인 2021년의 재정적자는 1조1천600억달러로 추산되는데 이 적자의 80%인 9천310억달러는 채무 이자가 차지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172144545&code=970201
美 국가 부채 한도 초과 ‘빨간불’ (경향, 워싱턴 | 유신모 특파원, 2011-05-17 21:44:54)
ㆍ변칙 예산운영 디폴트 모면
재정적자 감축 문제로 민주·공화 양당이 국가 채무 법정한도 증액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국가 채무가 마침내 한도를 넘어섰다. 미 행정부는 연금 지출을 늦추는 등의 변칙적인 예산운용으로 국채 이자를 지급하고 있어 디폴트(채무 불이행) 상황을 모면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는 16일 “정부의 부채가 법정한도인 14조3000억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날 총 720억달러의 채권과 지폐를 발행함으로써 한도를 넘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미 정부는 만기가 돌아오는 국채를 연장하거나 이자 지급, 정부 발주 공사대금 지급 등이 불가능해지는 디폴트 상태에 처했다.
재무부는 이를 막기 위해 예산의 변칙운용에 들어갔다. 당장 이날 연방공무원 연금 펀드 등 2개의 정부 관련 편드에 대한 투자를 중단했다. 또 사회보장보험과 메디케어(노년층 의료보험) 지원을 늦추는 식으로 지출을 조정하면서 의회 회기 마지막 날인 8월2일까지 버텨보겠다는 계획이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518006007
[美 디폴트 위기 직면] ‘트리핀의 딜레마’ 다시 주목 (서울, 강국진기자, 2011-05-18  6면)
50년前 “달러 아닌 별도 기축통화 만들어라”
http://img.seoul.co.kr/img/upload/2011/05/18/SSI_20110518030604_V.jpg
‘달러의 역설’을 50년도 더 전에 경고한 학자가 있었다. 벨기에 출신으로 예일대 교수였던 로버트 트리핀은 1960년 미 의회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미국이 경상적자를 허용하지 않고 국제 유동성 공급을 중단하면 세계 경제는 위축될 것이지만, 반대로 재정적자 상태가 지속돼 달러화가 과잉 공급되면 달러화 가치가 하락해 준비자산으로서 신뢰도가 떨어지고 브레턴우즈체제도 붕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바로 ‘트리핀의 딜레마’다.

그가 내놓은 대안은 달러가 아닌 별도의 국제기축통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달러가 기축통화가 되는 국제통화시스템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국제공용 기축통화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생전에 브레턴우즈체제 창설 당시에도 강하게 주장했지만 미국이 거부했던 방안이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트리핀의 경고를 1971년까진 철저히 외면했다. ‘트리핀의 딜레마’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1년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면서 전후 국제경제를 지탱하던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되면서부터다. 트리핀 교수는 미국의 정책에 항의하며 1977년 미국 시민권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트리핀은 이후 남은 여생을 유럽단일통화 창설을 위해 매진했다.
‘트리핀의 딜레마’는 2007년부터 전 세계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다시 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저우샤오촨 중국인민은행 행장은 2009년 3월 “트리핀의 딜레마에 갇힌 달러화 대신 국제통화기금의 특별인출권(SDR)을 기축통화로 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일국의 통화가 아닌 상호신용에 의한 국제통화면 금환본위제, 즉 달러본위제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518006008
[美 디폴트 위기 직면] 공화당 ‘적반하장’ (서울, 강국진·유대근기자, 2011-05-18  6면)
집권 때마다 막대한 재정적자 초래
미국 하원 다수를 점하고 있는 공화당은 16일(현지시간)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의 정부부채 법정한도 증액 요청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막대한 재정적자와 정부부채를 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물려준 당사자인 공화당이 오히려 “정부 지출부터 줄이라.”고 요구하는 것을 두고 ‘적반하장’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공화당 소속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16일(현지시간) “정부가 진지한 예산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채무한도 증가도 없을 것”이라면서 “정부의 지출한도 삭감폭이 채무한도 증가폭보다 커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당 소속인 폴 라이언 하원 예산위원장 역시 “우리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돈 이상을 예산 삭감을 통해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다.”면서 “공화당은 채무한도를 높이는 데 무조건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어떤 형태의 세금인상에도 반대한다.”고 못박았다.
공화당은 지난 조지 W 부시 행정부를 포함해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부터 연방정부 부채를 극적으로 높여 놓은 ‘원죄’가 있다.

미국 연방정부 부채 추이를 보면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겨냥해 공격적인 군비확장에 나서고 대대적인 감세를 단행하면서 재정상황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주정부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면서 지방재정 위기까지 초래했다. 1990년대 들어 빌 클린턴 행정부 8년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서 재정적자를 흑자로 돌려놓는 등 상황이 호전됐지만 부시 행정부 들어 다시 부채가 폭증했다. 거기다 부시 임기 말 금융위기는 재정악화에 치명타를 가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518006009
[美 디폴트 위기 직면] 美 부채 법정한도 도달… 초강대국 빚더미 ‘쇠락의 길’ 걷나 (서울, 강국진기자, 2011-05-18  6면)
가이트너 재무, 의회에 채무한도 증액 요청
http://img.seoul.co.kr/img/upload/2011/05/18/SSI_20110518030528_V.jpg
무한정 찍어 내는 돈으로 언제까지고 소비를 즐길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할까. 적어도 지금까진 미국이 그런 나라였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부채를 줄이기도 쉽지 않지만 지금 방식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높아진다.
미국 재무부는 16일(현지시간) “연방정부 부채가 법정 한도인 14조 2940억 달러에 도달했다.”면서 “이에 따라 투자 억제를 위한 조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재무부는 이날 총 720억 달러의 채권과 지폐를 발행, 이날 부로 법정한도를 넘어섰다.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의원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채권발행유예’를 선언하며 채무한도 증액을 압박하고 나섰다. 그는 “미국의 신뢰도를 보호하고 국민이 겪을 수 있는 재앙을 막기 위해 채무한도를 증액해야 한다.”면서 의회가 협조해 주지 않으면 ‘국가적 재앙’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8월 디폴트 가능성은 낮지만…
일각에선 자연스레 미국이 채무상환 불이행(디폴트)에 몰리는 것 아니냐는 ‘위기설’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실제 디폴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의회가 결국엔 채무한도 증액에 합의할 가능성이 높은 데다 설령 정부 요청을 당장 받아주지 않더라도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Fed)에 예치해 둔 현금 1000억 달러를 활용하거나 2000억 달러 규모의 특수목적 차입을 일시 중단하는 조치 등을 통해 8월까지 시간을 벌 수 있다. 그 이후에도 4000억 달러어치 금과 800억 달러어치 석유 등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
정작 더 큰 문제는 현 상황이 미국의 쇠퇴 징조로 비친다는 데 있다. 세계를 호령하는 유일 초강대국이 알고 보니 빚더미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자체가 미국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근원에는 달러가 미국이라는 한 나라의 통화인 동시에 전 세계의 기축통화로 기능하면서 발생하는 긴장관계가 존재한다. 달러를 국제 기축통화로 삼는 현 국제경제질서는 달러가 국제시장에서 신뢰를 잃는 즉시 붕괴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달러를 계속 찍어 내 유동성 부족을 막아야 한다. 미국의 무역 흑자는 한국이나 중국 같은 무역상대국의 경상수지를 악화시켜 세계경제 위축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국에 경상수지 적자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계속되면 달러가 세계시장에 너무 많이 풀리면서 달러 가치가 떨어져 기축통화로서 신뢰도가 떨어지게 된다. 바로 미국의 대외부채가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달러가치가 하락하고 이는 다시 미 국채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이 현 상황의 핵심이다. 현재 미국은 달러의 역설을 표현한 ‘트리핀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딜레마에 빠진 달러 헤게모니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이후 쌍둥이적자(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적자)에 시달리자 미국은 1993년 이후 ‘강한 달러 정책’을 통해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했다. 무역적자 축소는 사실상 포기한 채 재정적자 감소를 통해 달러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 들어 감세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침공, 거기다 금융위기까지 맞으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2006년 당시 국내총생산(GDP) 대비 63.9%였던 연방정부 부채는 올해 102.6%로 5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먼저 미국은 부채한도를 상향조정하고 무역적자를 지속하는 대신 각국은 미 국채를 계속 구입하는 식으로 세계경제를 떠받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미국이 얼마나 더 경상적자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미국에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요구하는 것은 심각한 경기침체를 각오해야 한다. 과거 존 케인스 등이 주창했던 것처럼 새 기축통화를 창설하거나 유로화 등 지역 단일 화폐 체제로 가는 방안도 있다. 이는 전후 국제질서를 통째로 뒤집는 결과를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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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0411134152
'서남표식 개혁'이 추종한 미국의 충격적 현실 (프레시안, 이승선 기자, 2011-04-11 오후 2:24:03)
[해외시각] 스티글리츠 "미국은 1%의, 1%에 의한, 1%를 위한 사회"
이미 현실로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을 아닌 것처럼 부인해봤자 소용없다. 미국인의 상위 1%는 연간 미국의 소득 중 거의 4분의 1를 벌어들이고 있다. 소득을 포함한 자산 전체로 본다면 상위 1%가 4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부가 늘어나는 경제시스템으로 모두가 더 잘 살게 된다는 '낙수효과'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지난 10년간 미국의 상위 1%의 소득이 18%가 늘어나는 동안 미국의 중산층의 소득은 하락했다.
소득 평등의 관점에서 미국은 조지 W. 부시가 조롱하던 '늙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뒤쳐져 있다. 미국과 가장 가깝게 비교될 나라들 중에는 소수 재벌이 지배하는 러시아와 이란을 들 수 있다. 중남미에서 소득 불평등으로 악명높았던 나라 중 브라질은 지난 몇 년동안 빈곤 개선과 소득격차 완화의 진전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미국의 불평등은 늘어났다.
소득격차를 옹호하는 대표적인 경제학적 논리는 '한계생산성 이론'이다. 생산성이 높아 소득이 많아지고 사회에도 기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을 보면 이 이론은 현실과 맞지 않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초래한 금융기업들의 경영진들은 경제와 자기 기업에게 파탄을 몰고 오고도 거액의 보수를 받아왔다. 
"중요한 것은 파이의 크기이지, 어떻게 분배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미국처럼 매년 대부분의 구성원들의 소득은 줄어드는 경제는 장기적으로 잘 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로 몇 가지를 들어보겠다.
첫째, 소득불평등 증가는 '기회 불평등'의 다른 면이다. 사회적으로 가장 소중한 자산들이 가장 생산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특정 분야에 보상이 몰리는 사회는 경제의 효율성을 저해한다. 예를 들어 엄청난 보수를 챙길 수 있는 금융산업에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세번째,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으로 현대경제는 '사회적 기반' 위에 성립된다는 점이다. 정부가 기반시설, 교육, 기술 등에 투자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기반시설 투자를 오랫동안 등한시해왔다(미국의 고속도로, 교량, 철도, 공항 등의 상태를 보라). 교육과 의료복지 등도 마찬가지다.
부의 불평등이 심할수록 부자들은 공동체를 위한 지출을 더욱 꺼려하게 된다. 부자는 공원, 교육, 의료, 치안 등을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그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사회가 변해가면 부자들은 예전에 가졌던 적이 있을 수 있는 공감 능력마저 잃으면서 보통사람들과 거리가 멀어져간다.
미국이 왜 이런 사회가 되었는지 경제학자들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상위 1%가 이런 불평등 사회를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세정책은 가장 뚜렷한 보기다. 부자들이 소득의 상당 부분을 올리는 자본 이득세를 낮춤으로써 미국에서 가장 부자들은 무임승차에 가까운 특혜를 누리고 있다. 특히 공화당 정부 때면 반독점법이 느슨하게 적용되면서 상위 1%에게는 횡재를 안겨주었다. 오늘날 미국의 불평등 중 상당부분은 금융시스템이 금융산업에게 이득이 돌아가도록 바뀐 탓이다.
미국 정부는 금융업체들에게 제로 금리로 자금을 빌려주고 망하면 관대한 조건의 공적자금을 제공했다. 규제당국은 금융업체들의 불투명한 경영과 이해관계 상충에 대해 까막눈이 되었다.
문제는 이런 사회를 만든 조건들은 '자기 강화'의 길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부는 권력을 낳고, 권력은 부를 낳는다. 최근 미국의 대법원은 기업이 정부를 돈으로 움직일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선거비용 지출 제한을 철폐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사적 관계와 정치적 관계가 완벽히 일치하고 있다. 사실상 미국의 모든 상원의원, 그리고 하원 의원 대부분은 선출되는 순간 상위 1%의 돈으로 유지되는 상위 1%의 멤버들이 된다. 그들은 현직에 있을 때 상위 1%를 위해 일하면 그들이 공직을 떠날 때 상위 1%에 의해 보상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무역과 경제정책의 핵심 고위관료들은 대체로 상위 1% 출신들이다. 제약업체들은 최대 구매자인 정부가 가격협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관철시켜 몇 조 달러의 혜택을 챙기고 있다.
부자 감세가 포함되지 않은 어떠한 세제법안도 의회를 통과할 수 없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상위 1%의 힘을 고려하면, 미국의 시스템이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미국의 불평등은 사회 전반에 걸쳐 왜곡현상을 가져오고 있다. 상위 1%를 제외한 사람들은 갈수록 소득보다 지출이 많아지는 삶을 살고 있다. 미국의 외교안보정책도 변질되고 있다. 상위 1% 출신이 군 복무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최상류층은 미국이 전쟁에 예산을 퍼붓고 있었도 세금 때문에 쪼들리지 않는다. 외교정책은 국익과 국가 자원의 균형점에서 결정된다. 상위 1%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균형과 절제에 대한 개념은 상실된다.
미국은 전쟁을 일삼고, 기업들은 그 전쟁에서 이득을 취할 뿐이다. 경제의 세계화는 부자를 위해 고안된 것같다. 국제경쟁력이라는 미명하에 법인세를 낮추라고 요구하고, 보건과 환경을 위한 보호막은 약화된다. 단체협상이라는 노조의 핵심 권리도 약화되고 있다.
만일 노동자들끼리 국제경쟁을 하는 세계화라면, 정부들은 사회적 보호망을 확충하고 일반 노동자의 임금에 대해 감세하고, 양질의 교육과 깨끗한 환경을 제공하려고 경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미국의 정부는 상위 1%의 국제경쟁력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상위 1%가 미국 사회에 초래하는 손실 중 가장 큰 것은 이것이다. 공정경쟁, 기회의 균등, 공동체 의식 등 미국인의 정체성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기회를 갖는 공정한 사회라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통계가 보여주는 현실을 전혀 다르다. 가난한 시민, 심지어 중산층 출신 시민들도 미국의 상층부에 들어갈 기회는 유럽의 많은 나라들보다 적다. 미국의 청년실업률은 20% 정도된다(일부 지역, 일부 사회계층에서는 그 두배에 이른다). 상근직을 원하는 미국인 중 6명의 1명 꼴로 그런 직업을 갖지 못한 상태다. 미국인 7명 중 1명꼴로 식권으로 살아간다. 이처럼 상위 1%의 소득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분배되는 이른바 '낙수효과'를 무엇인가 차단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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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개통과 지방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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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도 영욕의 60년(아시아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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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불평등, 조너선 코졸 지음, 문예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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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美공교육은 실패했을까 (서울, 박록삼기자, 2010-01-23  18면)
【야만적 불평등】조너선 코졸 지음, 김명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뉴욕 할렘과 보스턴의 소외 지역 등 40여년 동안 도심의 빈민 거주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미국의 교육과 사회 정의 문제에 전념했던 교육학자 조너선 코졸의 ‘야만적 불평등’(김명신 옮김·문예출판사 펴냄)은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 등을 구체적 사례와 함께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교육 현장 보고서다. 미국 교육에 대한 것중 대표적 저서이며 한국 교육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던져 준다.
 
1988~1990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워싱턴DC, 뉴욕, 샌안토니오 등 미국의 30여곳을 돌며 학생, 교사, 교육행정 관료 등을 만난 내용을 적은 르포성 보고서다. 이를 통해 미국 사회의 근원적 문제인 빈부의 양극화, 인종 갈등 등은 교육의 불평등성과 계급 종속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코졸이 질타하는 미국 공교육의 모순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교육 재정의 문제다. 미국의 공립학교는 기초 재정을 그 지역 재산세에 의존하고 있다. 빈민층 구역의 학교가 부유층 구역 학교에 비해 교육재정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연방정부 역시 재산세를 세금공제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어 교육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1987년 뉴욕 공립학교 학생 1인당 평균 교육비 지출액은 5500달러(약 630만원)인 반면 뉴욕 교외 지구 학교 학생은 1인당 1만 5000달러였다.
 
둘째, 인종문제다. 코졸이 방문한 도심 지역 학교의 95~99% 학생은 유색인종이었다. 대법원의 인종분리 학교 위헌 판결이 나온 지 30년이 넘었음에도 마틴 루터 킹을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현실이 코졸 보고서 속의 미국이었다. 남학생은 범죄와 마약에 쉽게 노출되고, 여학생의 3분의1은 임신을 하고, 중도 탈락률이 50%를 넘나드는 학교들이 코졸이 접한 충격적인 실상이었다.
 
셋째, 대안의 부재다. 사회계층간 불균형 해소와 우수학생 유치를 위해 마련된 ‘마그넷 스쿨’이 오히려 교육 불균형을 키우고 있다. 마그넷 스쿨 또는 선발제 학교 역시 정보 입수 능력, 추천서 받는 요령 등 입시 정보를 충분히 확인한 부모의 자녀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마그넷 스쿨로 학생과 교사가 몰리면서 나머지 공립학교는 운동장이나 미술, 음악교사도 없이 15년 전 교과서를 갖고 수업하기 일쑤다.
 
현 정부 출범 첫 해인 2008년 1급 이상의 해외파 관료 중 72%가 미국파라는 통계가 나와 입방아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미국식 교육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미국식 교육 제도의 핵심인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은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대학별 본고사와 사실상 기여입학제로 가는 첫 물꼬를 텄다고 좋아하거나, 혹은 심각하게 우려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다. 꼬박 20년 전, 게다가 먼 나라 미국의 얘기임에도 그 울림은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하다. 저자 코졸은 올해 하반기 인문학 독서모임인 ‘인디고 서원’의 초청으로 부산을 방문한다. 한국과 미국 교육의 문제점과 대안이 좀더 입체적으로 얘기될 수 있겠다. 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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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미국 vs 2010년 한국 (프레시안, 선명수 기자, 2010-01-30 오후 12:42:27)
[화제의 책] 조너선 코졸의 <야만적 불평등>
 
한 장의 유명한 사진이 있다. 1957년, 총을 든 군인들이 고등학생의 등굣길을 '호위'하는 모습. 1954년 미국 대법원이 흑백 분리 교육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자, 아칸소주의 리틀록센트럴고등학교는 1957년 '흑백 공학'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입학 원서를 낸 흑인 학생은 고작 17명. 그나마 백인들의 온갖 협박에 못 이겨 8명은 등록을 포기했고, 나머지 9명에 대해서도 백인들은 등교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심지어 주지사가 주방위군과 경찰을 동원해 이들의 등교를 막았다. 결국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은 연방 공수사단 병력까지 투입해 이들의 등교를 보호했다. 그 유명한 '리틀록 나인(Littlerock nine)' 사건이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한 동네는 화려한 주상복합건물과 무허가 판자촌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유명하다. 서울에 이보다 더 '극적인' 곳도 없기에, 이미 언론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이 지역은 1988년 올림픽 전후 철거민들이 이주해 현재까지 무허가 집단촌을 형성하고 있다. 한 쪽의 아이들이 방과 후에도 학원과 과외를 전전하며 쉴 틈이 없는 동안, 다른 한 쪽의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을 하며 시간을 죽인다. 판자촌 안에는 학교가 없어, 큰 길 건너 학교로 등교하는 아이들은 머리가 크면 자신의 거주지를 숨긴다. 두 마을 사이를 갈라놓는 양재천만이 '넘을 수 없는 곳'의 선을 그어주듯 무심하게 흘러간다.
 
50년 전 미국의 흑백 분리 학교와 다를 것 없는, 21세기 형 '게토'. 1950년대 미국에서 엄격한 분리가 이뤄진 기준이 피부색이었다면, 2010년 대한민국의 기준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경제력일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얘기가 옛말이 돼가는 오늘,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춰주는 책 한 권이 국내에 소개됐다. <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로 유명한 교육학자 조너선 코졸의 책, <야만적 불평등>(김명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이 그것이다.
 
'미국의 공교육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저자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미국의 도심 빈민가 30여 곳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미국 교육 현장의 생생한 보고서다. 그는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에서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어떻게 '분리'되고 '배제'되는지 집요하게 추적한다. 숱한 도시를 돌며 저자가 목격한 것은 바로 '공교육 제도의 야만성'이다. 그는 빈부 격차·인종 갈등과 맞물린 교육 불평등의 참혹상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폭로한다. 그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미국 독립선언서의 문구가 유독 적용되지 않는 분야가 교육"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지목하는 미국 학교의 모순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재산세의 불균형으로 인한 공교육의 불평등이다. 미국의 공립학교는 대부분 기초 재정을 그 지역의 재산세에 의존한다. 이에 따라 부유층이 거주하는 교외 지역은 가난한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보다 학생 수 대비 더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빈민 지역의 학교와 교외의 학교는 시설도, 학생들의 생활도, 교육의 질도, 심지어는 교과서조차도 '천지 차이'다.
 
리틀록 나인 사건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인종 문제 역시 거의 모든 곳에서 "경악스러울 정도로 많이" 남아있다. 공립학교에서의 인종 분리는 이미 1954년 위헌으로 결론 났지만, 저자가 방문한 도심 지역 학교의 대부분은 학생 95~99퍼센트가 유색 인종이었다. 마틴 루터 킹에 관한 언급은 조심스러웠고, 킹 목사의 '꿈'은 단단히 봉인된 채 흑인 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팸플릿에서나 확인 가능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당장 통계 수치에서도 드러났다. 1987년 뉴욕시의 학생 1인당 평균 교육비 지출액이 약 5500 달러인 반면, 백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뉴욕 교외 지구의 교육비 지출액은 1만5000 달러였다. 또 흑인 밀집 지역인 도심 학교의 경우, 학생들이 학업을 중도에 탈락하는 비율은 약 50퍼센트에 육박했다. 고학년이 될수록 남학생들은 범죄와 마약에 빠졌고, 여학생의 3분의1은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 그렇듯, 교육을 통해 바랄 수 있는 희망은 "한 줌도 되지 못했다".
 
코졸은 이렇듯 계층과 인종 문제가 얽혀있는 사례로 미국의 선발제 학교인 '마그넷 스쿨'을 지적한다. 마그넷 스쿨은 인종 분리와 사회 계층 간 불균형 해소를 위해 만들어진 공립학교로, 보다 수준 높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우수한 교사와 학생을 마치 '마그넷(자석)'처럼 끌어당긴다는 의미에서 '마그넷 스쿨'이라 불린다. 공립학교에 불만이 있는 돈 많은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거나 공립 중에서도 마그넷 스쿨 같은 선발제 고등학교에 보내려고 애쓴다. 반면, 빈민층 부모들은 입학지원서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입학 시험을 위해 어떤 공부를 시켜야 하는지, 추천서는 무엇을 받아야 하는지 정보가 거의 없다. 자연스럽게 '인종 분리'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그넷 스쿨에 가난한 흑인 입학생은 거의 없다.
 
문제는 더 있다. 마그넷 스쿨에 좋은 교사와 우수한 학생이 몰리면서, 그 인근의 학교들은 운동장이나 미술 교사도 없이 15년 전 교과서를 갖고 수업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도 한 차례 문제가 된 적 있는 외국어고와 자사고 등, 선발제 학교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서울 강북구의 한 중학교는 '한 학교 두 교복'으로 논란이 됐다. 지난해 이 학교에 '국제 특성화 과정', 즉 국제중이 생겨나면서 순식간에 '일반 과정'이 된 재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구역이 하나 늘었다. 일반 과정 학생들은 깔끔하게 새로 지어진 국제중 건물로 출입이 금지됐고, 남학생들은 운동장 구석에 세워 놓은 국제중 학부모들의 외제차에 농구할 공간을 잃었다. 한 학기 등록금도, 받는 교육의 수준도, 심지어 교복조차도 현저하게 다른 '한 학교 두 공간'의 모습이다. 2010년 판 '게토'의 모습이다.
 
책은 꼬박 20년 전, 먼 나라 미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책이 전달하는 울림은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하다.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함께 뛰어노는" 마틴 루터 킹의 '봉인된 꿈'은 일반중 학생과 국제중 학생이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냉혹한 현실로 이곳에도 이어졌다. 코졸은 130년 전 영국의 역사가 액턴 경이 미국에 대해 쓴 글을 읽을 때마다 "아이러니와 슬픔을 느낀다"고 썼다. "계층 간 차별이 없는 나라에서는 아이가 태어날 때 부모의 지위를 물려받기보다 사상과 노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상찬에 대한 무한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는 모든 젊은이에게 가능한 평등한 삶의 조건을 부여하는 평등 이론에 부합되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어느 누구도 어린 시절에 경쟁의 수단을 박탈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코졸이 말하는 '아이러니'는 바로 마지막 문장에 있다. 경쟁 수단이 거부되는 상황, 그것은 "유독 가난한 아이들에게만 제공되는 교육의 가장 일관되고도 유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어느 누구도 어린 시절에 경쟁의 수단을 박탈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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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혁명하라> 김영수, 메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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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상상과 혁명적 실천의 길라잡이 (참세상, 정병기(영남대)  / 2009년09월08일 12시51분)
[서평] <민주주의를 혁명하라> 김영수, 메이데이
 
촛불집회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나라 정치 전반에 대한 상상 혁명을 시도한 책이 나왔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을 꿈꾸던 김영수 박사가 금년에 내놓은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메이데이)가 바로 그 책이다. 책머리에서 저자는 촛불시위가 이 책을 쓴 동기이며 촛불시위 참가 청소년.소녀들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또한 브레히트의 영감을 받은 듯 진정으로 그가 하고 싶었던 정부와 국가의 해산을 통해 새로운 민주 공동체를 구상하였다. 그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현되는, 권리주체들의 민주주의이다.
 
저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다른 표현인 대의민주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통제하는 자치민주주의를 구상한다. 이러한 혁명적 구상은 상상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혁명을 위한 저항권 및 소환권과 관련해 그는 헌법효력정지권, 국가기관업무중지권, 국민헌법재판권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통치구조로서 입법권, 생활안전권, 권력통제권이라는 새로운 3권 분립을 제창한다.
 
또한 이 새로운 세 통치부서는 부문대표, 지역대표, 업종대표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차등투표, 순위투표, 기명투표제 등을 제안하기도 하며, 악법에 대한 비합법성기소제도를 제시하고, 만 명까지 가능한 국회의원 수 증가와 정당국보조금 폐지 및 정치인들의 무보수 봉사를 주장하며, 청소년들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러한 그의 착상은 어디까지나 국민이 국가기관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해야 하며, 모든 국가기관은 집행기관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의 관심은 통일과 평화 구성으로도 이어져 ‘1민족 2체제 3국가 3정부’라는 획기적인 평화동맹국가론을 고안했다. 유럽연합처럼 남북 체제를 유지한 채 평화와 통일만을 추구하는 새로운 연합국가를 창설한다는 이 구상은 실로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설명은 질박하면서도 상상과 논리는 웅숭깊은 텍스트다.
 
그의 상상은 항상 혁명을 동반한다. 혁명적 상상으로 상상은 혁명을 낳는다는 논리가 문장마다 끈끈하게 배어 있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을 요구하며 사람들의 뇌세포를 자극하려는 그의 의도가 훌륭하게 성공할 듯하다. 이 책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의 뇌도 그의 자극에 철저히 노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극 속에서도 상상의 틈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의 새로운 3권분립 구도에서 생활안전권은 행정권과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사법권이 권력통제원에 속한다면 개인이나 비권력기구에 대한 재판권은 어디에 속하는가? 정치인들에게 보수를 주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인은 돈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무엇보다 커다란 틈은 국민을 선하고 단일한 주체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국민은 단일한 의지를 가진 선한 존재인가?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한편으로 지금까지의 국민을 참된 민주주의를 몰랐던 주체로 가정하고 새로운 상상혁명을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국민은 지금까지의 국민과 어떻게 다른가? 이 책의 상상력을 보건대 이러한 과제는 다음 기회에 충분히 풀릴 것으로 기대할 수 있으리라. 혁명적 상상을 꿈꾸는 자와 상상의 혁명적 실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신선한 자극과 희망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자극과 희망에는 가시적 길도 함께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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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도 선거권을…상상력이 민주주의를 바꾼다" (프레시안, 이철호 학벌없는 사회 운영위원, 배문중 교사, 2009-09-13 오후 2:34:33)
[화제의 책] <민주주의를 혁명하라>
 
국민국가라는 단위로 분할되어 있는 지금 시대에 민주주의는 자기 삶에 대한 스스로의 통제라는 기본적인 원칙은 실종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라는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 그것조차도 간접민주주의, 특히 정당과 의회로 상징되는 대의제가 마치 민주주의 그 자체인양 간주되고 있다. 현대사회의 복잡한 구조와 기능 분화로 인민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는 실행이 어려우며 다만 특정한 경우에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논리의 핵심이지만 이야말로 대중을 대상화하는 지독한 엘리트주의나 계급차별의식이다.
 
2008년 촛불 광장에서 진지하게 던져진 물음은 '대한민국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이명박 정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아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광장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광장에서의 촛불이 꺼지고 용산으로 평택으로 사그러들어 가는 지금, 김영수는 '민주주의를 혁명하라'고 민주주의를 다시 상상하자고 진지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 책은 민주주의 자체를 혁명해야 한다고 한다, 기존에 알고 있던 민주주의의 내용을 규정했던 몇 가지 형식들은 잘못이다, 지금 이곳과 이것에 머무르는 한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 없이는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일깨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사회는 위기임에 틀림없으며 그 위기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기성세대의 상상력 고갈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새로운 세대의 상상력조차 봉쇄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상상력이 봉쇄당한 채 죽음과도 같은 입시전쟁과 학습 노동의 지옥에서 인권이 말살당하고 있는 청소년·소녀들에게서 희망을 찾아 낸 데에 있다. 책머리에서 저자는 2008년 여름학교에서 배웠던 자유민주주의를 전복해 버린 그들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헌사를 보낸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꿰뚫고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근거로 상상적 대안을 제출한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형식적인 사고의 틀에 갇혀 있는 독자들에게 상상력의 끝이 어디까지인가를 보여 준다. 형식을 깨는 순간 무한한 창조와 창의의 힘이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그것은 의식혁명이기도 하고 제도혁명이기도 하다. 선언적인 주장에 머물러 버리는 혁명은 우리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지만,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은 곧 내 안에서 꿈틀대는 변화의 욕망을 자극할 것이다. 상상은 몽상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하는 미래의 꿈이다.
  
이 책에서 상상은 네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상상혁명 첫 번째인 헌법에서 글쓴이는 헌법이 정말 국민주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헌법을 분석하고 있다. 김영수는 헌법의 구조 및 주요 조항 등을 근거로 현행 헌법은 국민의 헌법이 아니라 국가와 지배세력의 헌법이라는 점을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헌법 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3국가 통일방안을 제시하면서, 통일헌법이 어떻게 구성되고 만들어져야 하는가를 상상하고 있다.
 
상상혁명 두 번째인 국가에서는 국가가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민이 국가를 위한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3권 분립,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 등의 정부형태 등을 비판하면서 행정부와 사법부를 폐지한 새로운 정부형태를 제시한다. 특히 국민이 직접 국가에 대한 감사 및 평가를 넘어서서 정책까지도 생산할 수 있는 대안적 제도를 상상하고 있다.
 
상상혁명 세 번째인 선거에서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거기까지만 허용하고 있는 선거제도를 비판하고 있다. 1인 1표, 과반수 결정제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제한 등을 비판하면서 저자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제시하고 있는 대안은 차등투표제, 기명투표제, 선호 투표제 등이다. 또한 저자는 국민의 주권을 실질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선거제도를 상상하고 있다. 그리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연령이 왜 분리되어 있는가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15세 청소년·소녀들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상혁명 마지막에서는 특권을 누리는 제도정치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저자의 상상은 국회의원을 1만 명으로 확대, 무료로 봉사하는 대통령, 정당 국고보조금을 폐지하는 대신 그 돈을 국민의 생활안정기금으로 전환, 주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지방자치 등이다. 이러한 상상은 정치의 실질적 주체인 국민을 대상화하고 소외시키고 있는 현 정치를 극복하고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포장으로 법과 제도를 통해 국민들을 조작하고 통제한다. 일상생활이나 관심은 자본의 이해를 충족시키기 위해 욕망이 조작된다. 그리고 개인의 상상공간이 전체의 상상공간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한다. 민주주의는 자기지배의 실현이기에 일상생활과 정치에서 국민 스스로 자신과 국가를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국민주권이란 바로 국민스스로 선의 정치를 일궈내기 위해 권리의 차별을 없애거나 지배세력의 특권을 없애면서 국가 중심의 정치를 소멸시켜 나가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이 과정에서 혁명적으로 진화한다. 국민이 권력과 국가를 지배하는 상상혁명!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혁명하는 국민주권의 희망이라고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필자가 상상하는 것만이 민주주의라거나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거나 현재를 규정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상상력의 공간을 열어젖히는 시도로는 충분하다.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상상과 희망은 언제나 함께하기 마련이다. 불행한 미래를 꿈꾸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억압과 피지배 관계들을 해소, 극복하고자 하는 대중의 모든 직접적인 실천들이야말로 자기지배의 실현을 위한 민주주의 투쟁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새로운 정치는 국민의 자치체제가 지향해야 할 법과 제도를 현실에서 재구성해야 한다.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국민에서 정치의 주체로 다시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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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 '민주주의를 혁명하라' (미디어스, 2009년 11월 27일 (금) 23:58:57 유영주 객원기자)
[주말 그리고 말랑한 미디어] 'Just it book' 
 
과반수는 다수를 결정하는 데 보편적이면서도 손쉬운 방법이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우세하게 결정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 의견의 비중이 비슷한 상황에서는 과반수 결정방식이 등장한다. 의사결정의 주체들을 대부분 홀수로 구성하는 것이나 우리 나라 국회의원 총수가 299명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되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은 다수의 힘을 좌우한다. 만약 3개의 정당이 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2개 정당의 국회의원 수가 각각 149명 동수이고 나머지 1개 정당의 국회의원이 1명일 경우에 문제가 발생한다. 국회의원 총회에서 그 1명의 국회의원이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법률의 향방이 결정된다. 입법권의 절대적인 힘을 1명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정당이 가진다.
이러한 현상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떻게 1명이 298명보다 정당할 수 있느냐는 의식이다. 그 반대의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각각 149명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2개의 정당이 문제투성이인 법률을 놓고 서로 싸울 수 있다. 이때 1명의 국회의원이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악을 저지할 수 있는 경우이다.
뭔가를 선택하는 데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방식 자체가 보편화되고 있다. 정말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수가 결정하면 곧 선이고 소수는 악이고 오류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분법적인 판단의 굴레를 벗어나는 순간 다수가 항상 선인 경우도 없지만 소수도 항상 선일 수 없다. 문제는 다수가 항상 선으로 인정되는 의사결정방식이다. 의사결정방식이 과반수라는 사실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과반수 의사결정도 선을 결정할 수도 있고 악을 결정할 수도 있다. 결정하는 내용이 국민주권을 실현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선과 악으로 규정될 뿐이다. 그렇다면 과반수는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데 유용한 의사결정방식인가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 중략 -
국민주권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들의 대표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의사결정방식이 존재한다. 대표자의 대표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모든 선거에서 전체 유권자의 1/2 혹은 2/3 이상의 득표를 했을 경우에만 당선시키는 방안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종의 선거에서 여러 번 투표해서 결정해야만 할 것이고 투표도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 동안 투표하는 방안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특별결의방식(유권자의 2/3 이상)으로 선출하여 대표자들의 대표성을 강화시키는 대신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대한 탄핵소추나 제명을 1/3 이상의 결의로 하게 하면 된다.
대통령 탄핵 소추 및 국회의원 제명 권한도 국회위원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도 부여할 수 있다. 전체 유권자의 1/3 이상이 탄핵소추나 제명에 서명하거나 동의하면 직무를 정지시키고 국민이 직접선거로 결정하는 것이다. 탄핵이나 제명의 권한을 국민이 가지고 있는 이상, 한번 선출되었다고 거드름 피우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없어질 것이다.
 
‘민주주의를 혁명하라’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김영수 선생은 과반수 다수결 문제에 의문을 달고 더 좋은 의사결정방식이 없는가를 살폈다. 김영수 선생의 제안대로 하려면 헌법, 선거법, 국회법 등 관련 법률의 관련 조항을 죄다 바꿔야 한다. 관련 법률의 관련 조항을 바꾸려면 다시 현행 법률이 규정하는 의결 방식을 따라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이렇게 하자면 정말 민주주의를 혁명해야만 가능하다.
 
사람들은 곧잘 상상력의 혁명 또는 혁명적 상상력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냉대하곤 한다. 하지만 굳어 박제처럼 되어버린 현실을 바꿔낼 마뜩한 방법이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 쉬 절망하곤 한다. 어느 시점에선가 시민들은 스스로 만들고 누려온 민주주의의 족쇄에 갇혀버렸다. 오늘날 절차민주주의가 시민들의 민주주의적 삶을 역규정하는 사건, 사고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유권자 과반에 가까운 지지를 얻은 이명박 대통령과 개헌 저지선을 무너뜨린 보수 성향의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유무형의 폭력들. 입법, 사법, 행정을 관통하는 권력의 작동 메카니즘과 그 효과들... 1월19일의 참사와 7월22일의 희극과 10월29일의 비극...
 
KBS 사장은 제적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득표로 선출한다. KBS노조 등이 특별다수제(2/3 이상)로 사장을 선출하자고 요구했으나 이사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사회 정관을 바꾸는 일인데 다수가 반대하니 뾰족한 수가 나질 않았다. 김인규 씨는 제적 인원 11명 중 과반수인 6명의 표를 얻어 KBS 사장으로 임명제청됐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물으면 어떤 응답이 가능할까.
 
그러니까 지금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는 선동이 아니다. 앞으로 어떤 민주주의를 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인 셈이다.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를 읽으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비현실적인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데, 어느 대목에선가 정신이 퍼뜩 들거나 하면 그런 게 하나의 실마리가 되지 않겠나 싶다. 다만 한국사회 40대 이상의 머리는 대체로 바닥을 보였으니 욕심을 부리지는 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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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 억압받는 자들의 희망 (한겨레21 2009.04.03 제754호, 번역|조은섭)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이라는 책을 읽어본다고 하면서도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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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 억압받는 자들의 희망 (한겨레21 2009.04.03 제754호, 번역|조은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3월호]
프란츠 파농 '흑백, 억압·피억압의 도구로부터 해방' 선언
저서<검은 피부…> 식민주의에 대한 역사적·철학적 성찰

 
"이 책을 쓰는 이유? 물론 그 누구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내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말이다. 글쎄? 이유를 굳이 대라면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아둔한 자들 때문이라고나 할까? 내친 김에 그 증거를 대겠다.
새로운 휴머니즘을 위하여,
인간과 인간 간의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하여,
나의 동포인 유색인종을 위하여,
내가 믿는 인류를 위하여,
인종편견 때문에,
사랑과 이해를 위하여....,"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가면> 서문에서
 
2차 대전 이후 서구 지식인 사회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1952년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흑인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1)이라는 도발적인 내용의 책이 출간됐기 때문이다. 이 저서의 서문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을 피부색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흰색과 검은색 두 진영으로 갈라져 다투기 때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저자 프란츠 파농(1925-1961)은 의사, 정신분석학자, 수필가로서 알제리 독립 운동2)을 지지했으며, FLN(알제리 민족 해방전선)과 함께 정치투쟁을 이끈 투사였다.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마르트니크 출신의 파농은 프랑스가 줄곧 수용하기를 꺼려했던 흑인지식인 집단에 속해 있었다. 그는 급진적인 반식민주의자, '실패한 예언가'3)로 낙인찍힌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탁월한 문학적, 사상가적인 글을 쓴 파농은 우리 시대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우리의 토론과 성찰을 보다 명확하게 밝히는데 기여하였다.
 
파농이 지적한 '두 진영 간'의 마찰은 두 피부색 간의 마찰뿐만 아니라, '억압자'와 '억압받는자'들의 광범위한 마찰을 의미한다. 사실, 식민주의의적 인종차별주의는 여타 인종차별주의와 다르지 않다. 파농의 사상은 강력한 식민지배 아래에서 시적이고 수사학적인 산문으로 표출되었다. 자신에게 금지된 세계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식민지 해방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원주민은 정체된 존재다. 차별정책(apartheid)은 식민지 세계의 구역 나누기의 원칙일 뿐이다. 원주민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것은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원주민들의 꿈은 근육을 쓰는 꿈들이다. 나는 높이 뛰고, 수영하고, 달리고, 기어오른다. 폭소를 터뜨리고, 큰 걸음으로 강을 건너뛰고, 한 무리의 차량들이 날 뒤쫓지만 난 절대로 잡히지 않는 꿈을 꾼다. 식민 시대에, 식민지인들은 저녁 9시에서 새벽 6시 사이에 도주를 부단히 꿈꿨다."
 
이와 관련, 시대는 다르지만 폴 니잔은 "인간은 완벽해지지 않는 한,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주는 땅을 자신의 다리로 자유롭게 딛고 서지 못하는 한, 밤에 꿈을 꿀 수 밖에 없을 것"4)이라고 주장했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백인들이 흑인에게 부당하게 설정한 비정상적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이 책은 비록 그 범위가 다양하기는 하지만 흑인 예찬론자들과 사르트르의 <검은 오르페우스>5)의 텍스트를 연상 시키는 대목들을 담고 있다. 몸과 시선에 대한 은유적이고 분석적인 어휘 계통이 특히 그렇다.
 
파농은 어쩌면 저들보다 더 몸을 가까이서 다루고 있다. 왜냐 하면 그는 "이 책의 초고를 마치 연설자가 자리를 서성이며 외치듯,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몸의 리듬과 숨결의 스타일6)을 딱딱 끊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농은 현실을 은유로 접근한다. "백인을 처음 볼 때, 그는 자신의 멜라닌 색소의 무게를 느낀다."고 했다.
 
흑인들에게 있어 수 세기 동안의 노예생활 및 식민생활이 타인과의 관계와 시선을 고착시켰다. 그래서 그 시선에서 헤어나기란 쉽지 않다. 파농은 이렇게 지적한다. "사람들이 날 좋아할 때는 그들은 내 피부색에도 불구하고 날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들이 날 싫어할 때는 내 피부색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어쨌든 난 악순환의 고리에 갇힌 포로다."
 
인종차별주의는 또한 검은 색을 지칭하는 방식에도 도입된다. 예로부터 검은 색이 암시하는 내용은 분명했다. 그리고 거의 필연적으로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파농은 "검은색은 모호함, 그늘, 어둠, 밤, 대지의 미궁, 심연, 누군가의 명성을 더럽힘 등을 의미하며, 흰색은 순결하고, 밝은 시선, 평화의 흰 비둘기, 천상의 마법의 빛 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언어도 이러한 암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특히 "죄를 검은 색으로, 미덕을 흰색"으로 보는 고도의 종교적인 암시가 그렇다. 이 분석은 이런 저런 책들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파농은 이 문제를 보다 깊이 다루고 있다.
 
그의 마지막 저서 <지상의 저주받은 자들(1961)>7)은 인종차별사회와 식민사회에서의 <구역나누기>는 필연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생산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따금 그는 끝장논리로 "이 흑백논리가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사르트르가 알제리 전쟁8) 당시 지적한 것처럼, "식민 시스템이 '인간 이하의' 시스템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굴절된 식민 시스템의 언어
나아가 파농은 "엄밀히 말해서, 식민 시스템은 인간을 동물화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은 원주민의 비굴한 동작, 원주민 마을에서 풍기는 냄새, 유랑민, 악취, 우글거림, 증식, 꿈틀거림 등을 연상한다. 폭발적인 인구증가, 히스테릭한 대중, 인간성이 말살된 얼굴들, 더 이상 아무 것하고도 닮은 데가 없는 뚱뚱한 몸, 종잡을 수 없는 무리,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 태양 아래 늘어져 있는 나른함, 식물적인 리듬, 이 모든 것들이 식민 사고의 어휘들이다."
 
이 식민사고의 어휘들은 그룹 '제브다'가 노래 '소음과 냄새'9)에서 지적했듯,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힘을 발하고 있다. 원주민의 '인간성 말살'은 그들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규율을 따르게 하고, 조련하고, 두들겨 패고, 그리고 요즘은 평화를 유지토록 하는 것 등이 식민 지배 영토에서 가장 흔히 쓰는 어휘들이다." 알제리 전쟁은 '힘'과 경멸위에 세운 최고의 영속 시스템이다.
 
따라서 파농은 그의 저서 <알제리 혁명 5년(1959)>10) 서문에서 전쟁 초기부터 "프랑스의 식민주의가 공포의 근본주의나 혹은 고문의 근본주의 등 그 어떤 근본주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도약을 깨는 것과는 거리가 먼 억압들이 민족적 양심의 진보를 외치는 오산을 낳고 있다"고 저서<지상의 저주받은 자들>에서 분석했다.
 
"만약 내 삶이 지배자의 삶과 똑같은 무게를 지녔다면, 그의 시선이 날 더 이상 두렵게 하지도, 날 옴짝달싹 못하게 하지도 못할 것이며, 그의 목소리가 날 더 이상 화석화 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그의 면전에서 난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도 않을 것이다. 실상, 내가 그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그의 존재가 날 방해하지 못하는 것만 아니라, 내가 이미 그를 괴롭힐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가 도망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육체적인 해방이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부르고, 몸을 던져 독립투쟁을 하게 만든다.
 
비식민지화 투쟁과 필연적 폭력
어떤 여건에서 독립 투쟁이 이루어질까? <지상의 저주받은 자들>은 "비식민지화 투쟁이 항상 폭력적인 현상을 유발시킨다고" 말했다. 왜냐 하면 폭력이 폭력을 부르기 때문이다. 억압자들의 폭력이 영토의 조그만 틈새만 침범해도, 평화적으로 그것에 대항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페데르브, 리오테, 뷔조, 병장 브랑당 등 정복자들은 하나 같이 "우리는 총검의 힘으로 이곳에 왔다. 우리는 쉽게 정복을 이뤘다"고 외쳐 댔다.
 
피억압자들의 반란은 당연한 것이다. 이 반격은 여타 지배를 받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문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파농이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는 걸까? 그가 모든 운동에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알제리 혁명 5년> 서문에서 그는 "우리는 처참한 심정으로 케케묵은 압제를 지속시키며 거의 생리적인 폭력성을 휘두르고 있는 형제들을 비난한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적어도 파농은 우리에게 폭력의 기원과 피억압자들의 유일한 해방구가 폭력임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한다. 파농은 '군대와 경찰서에서 표시한 국경'이니 '공유 노선'이니 하는 것들과 같은 식민사회의 '구역 나누기'가 우리를 안전지대로 밀어 넣었지만, 그것은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먼 맞서 싸워야 할 '근본주의'를 양산했다고 주장한다.
 
파농의 통찰력은 또한 식민 치하에서 해방된 국가가 온당치 못한 민족부르주아 계층이 권력을 잡고 국민들에게 지적, 기술적 자산을 제공하지 않을 때마다,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분석도 하고 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를 예로 들며, 나라를 서양 부르주아들의 의도대로 요양시설로 전락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고 경고한다. 냉소적인 부르주아 성향의 계층이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있어 국가 통합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인종과 부족들이 이끄는 이 무자비한 투쟁, 즉 외국인들이 떠난 공석을 차지하려는 이 암투가 종교경쟁을 낳고 있으며, 우리는 이슬람과 가톨릭, 이 거대한 두 종교 사이에서 불거지는 갈등을 보게 된다" 결론지었다. 심지어 파농은 국민들을 '잠재우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정당이 "과거 식민시대의 기억을 상기해보라거나, 혹은 여태 걸어온 멀고 먼 길의 길이를 재보라"고 주문하며 과거를 들먹이는 현실을 경고했다.
 
반식민주의적 '탈 유럽' 주창
식민주의의 반사적 개념으로 소위 흑인문화를 유일한 지평처럼 내세워서도 안 된다. 만약 아프리카의 소양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인종적인 것으로 만들고, 민족문화보다는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역사적인 의무'때문이라면, 그것은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것이다.
 
파농의 투쟁은 '흑인운동'을 세계화시키겠다는 의지, 그리고 투쟁의 영역을 분류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파농은 그의 첫 저서에서 "나는 현재와 미래에 의존하며 과거를 예찬하고 싶지 않다."고 자신의 신조를 밝혔다. 그래서 그는 1952년엔 어떤 경우라도 유럽역사에 기댄 식민주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멈출 수가 없다고 못박았다.
 
사실 식민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시 돌이켜 봐야 할 가치위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파농은 "만약 지식이나 혹은 철학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또한 그 이름으로 사람들은 그것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1961년 극렬한 비난이 확산되면서 "인간과 마주치는 곳곳, 모든 거리, 세계 구석구석에서 인간을 학살하며 끊임없이 인간 얘기를 하고 있는 유럽을 떠나자"고 사람들은 외쳤다. 한줄기 구원의 불빛 속에서 프랑스에 맞서야 한다고 외쳤다. 나치즘에서 해방되자마자 나라를 재건하더니 세티프(1945년 5월)와 마다카스카르(1947년 3월)의 대학살을 자행한 프랑스에 대항하자고 외쳤다. 전쟁이 종식되자마자 프랑스가 세네갈과 모로코의 형제 병사들에게 등을 돌렸다고 외쳤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엄연한 이런 진실을 우리는 경청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유럽을 흉내 내고, 유럽을 따라잡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유럽은 광적이고 무질서한 속도에 휩싸여 있다. 그 어떤 기사나 이성도 그 속도를 통제할 수가 없다. 유럽은 현기증을 유발하는 놀라운 속력으로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어, 되도록이면 서둘러 유럽과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다."
 
파농은 자신이 어떤 유럽에 대해 말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던 유대인이나, 사방에서 독립의 이유를 지지했던 프랑스인들에게 경의를 표했던 사람이다. 파농의 행동은 보편적인 것이다. "흑인인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다. 결코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지 않기를 바라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굴종은 영원히 중단되기를 바란다.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그런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바로 '당신'이라는 세계를 건축하도록 나의 자유가 나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희망한다. 이 세계가 나와 더불어 활짝 열린 모든 종류의 의식의 문을 느낄 수 있기를 말이다."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가면>에서
 
1)출판사 Seuil, 파리, 프랑시스 장송이 서문을 씀. 장송은 1965년 재출간 된 이 책의 발문도 썼다. 이 저서는 컬렉션 〈Points essais〉로 만날 수 있다.
2)파농은 1957년부터 FLN의 대변인을 지냈다. 1953년부터 그는 알제리 블리다-조앵빌 병원 정신과 과장을 역임했다.
3)수필가 로타르 베에르의 멋진 텍스트 참조. 출판사 아곤느, 제 33호, 마르세유 2005년 4월.
4)폴 니잔, 앙트완 블로에(1933), 출판사 <그라세>, <붉은 노트>, 파리, 2005년
5)장-폴 사르트르 <검은 오르페우스>,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의 서문<흑인과 마다카스카르인의 시집>, <프랑스 대학 프레스>, 파리 1948년
6)알리스 케르키, <프란츠 파농, 초상화>, 출판사 Seuil, 2000, p.46
7)출판사 프랑수와 마스페로에서 사르트르 서문과 함께 출간되었지만 곧 판금 조치 당함. 백혈병에 걸려 곧 죽게 될 것을 알았던 파농은 매 페이지를 불러주며 적게 했다. 그는 막 출간 된 책 한부를 받았고, 3일 후 미국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다. 그의 시신은 그의 유언대로 해방된 알제리 땅, 튀니지 국경 근처에 묻혔다.
8)참조 '장-폴 사르트르와 알제리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11월 참조
9)이민자들이 유발시키는 '소음과 냄새'에 대한 작크 시락의 성명에서 영감을 따 만든 곡임.
10)출판사 마스페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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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동원된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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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 성장, 저항의 힘을 농축시키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10-01-08 오후 08:07:58)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모순적 이중성
과실 커질수록 비판의식 늘어나 ‘파국’
〈동원된 근대화〉조희연 지음/후마니타스·2만원
 
 
<동원된 근대화>는 박정희 독재체제를 붙들고 숙고해온 사회학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의 야심작이다. 지은이는 2007년 출간한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에서 박정희 시대의 역사를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조망한 바 있다. <동원된 근대화>는 이 역사 서술을 전제로 삼아 박정희 체제의 근본성격과 작동방식을 복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박정희 시대 이해의 지평을 넓혀 놓는다.
 
지은이는 박정희 독재를 규정하는 핵심 용어로 ‘개발동원체제’를 제안한다. 지은이의 설명을 따르면, 개발동원체제는 후발 국가들이 국민을 동원하여, 개발·발전·성장으로 요약되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체제다. 이 체제는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후발 국가들에서 특히 전형적으로 나타나는데, 박정희 체제는 바로 ‘후-후발 국가의 개발동원체제’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 ‘복합적 분석’의 중요함이다. 박정희 체제를 ‘폭압 독재’의 틀로만 이해하거나 반대로 ‘발전국가’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단선적·일면적 시선은 이 시대의 복합적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적 이중성’에서 말하는 ‘이중성’이 이 복합적 성격을 가리킨다. 박정희 체제는 국민을 억누르고 쥐어짜는 ‘수탈국가’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발전국가’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두 성격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돼 상호작용했으며, 이 상호작용을 통해 체제가 작동하고 위기를 겪고 파국으로 나아갔다고 이 책은 말한다.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에서 지은이가 먼저 주목하는 것이 ‘동원’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국민을 동원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때 국가 또는 권력이 국민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심리적 전제가 필요한데, 지은이는 그 전제를 ‘결손국가·결손국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나라가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경제적 종속상태·후진상태에 있다는 국민적 인식이 이 ‘결손’에 담긴 의미다. 그렇다면 어서 빨리 경제를 발전시켜 정상국가·정상국민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심리적 공감대에서 동원체제가 작동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경우, 이승만 시대에 형성된 ‘반공규율사회’가 사회적 조건으로 따라붙었다. 이런 조건 위에서 박정희 체제는 ‘반공주의’와 ‘개발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가동해 국민을 끌어들였다.
 
지은이가 두 번째로 주목하는 것이자 이 책의 몸통에 해당하는 것이 ‘헤게모니 분석’이다. 지은이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재구성해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삼는다. 그람시가 말하는 헤게모니는 지배권력이 순전히 강압으로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피지배집단이 지배에 동의할 때 안정적 지배가 이루어지는데, 이 동의를 이끌어내는 지적·도덕적·문화적 주도권이 헤게모니다. 그람시는 그런 헤게모니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이와 달리 지은이가 눈여겨보는 것은 헤게모니 형성이 아니라 헤게모니 균열이다. 헤게모니란 언제나 분열·갈등·적대를 내적 속성으로 안고 있다. 일시적·잠정적으로 그 틈이 봉합될 뿐이다. 이 봉합이 뜯겨 그 내부의 갈등과 적대가 드러나는 것이 헤게모니의 균열이다.
 
지은이가 볼 때 박정희 개발동원체제는 이 헤게모니가 일시적으로 형성됐다가 이후 봉합이 해체되면서 균열이 드러나고 커지는 과정을 거쳤다. 박정희 체제는 폭력과 강압을 일상적으로 활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절반 정도를 위수령·계엄령·긴급조치 따위로 연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강력한 반공주의·개발주의 이데올로기로 국민을 규합해 동의를 끌어내기도 했다. 박정희 체제는 나라를 준군사적 총력동원체제로 바꾸어 경제성장의 ‘효율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 효율성이 관철되면 될수록 균열성과 파괴성이 함께 커졌다는 데 박정희 체제의 ‘모순적 이중성’이 있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경제가 성장해 그 과실의 일부가 국민에게 돌아가자 생각의 여유, 곧 권리의식이 커졌고, 또 동시에 그 과실이 한쪽에 편중됨으로써 국민의 비판의식이 커졌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국민은 저항주체, 곧 민중이 되어갔다. 1960년대에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부분적으로 얻었던 박정희 개발동원체제는 1970년대에 들어와 그 동의의 근거를 상실했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체제를 세워 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순전한 강압과 폭력이었고, 동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 최종 결과가 박정희 체제의 파국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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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동원된 근대화 (2010 01/19 위클리경향 859호, 정원식 기자)
ㆍ박정희 정권은 ‘능동적 대중 동의’ 못 받았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는 평가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극과 극을 이루면서 정권 붕괴 후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불꽃 튀는 ‘해석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인화성 강한 연료 구실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해석 경쟁 가운데 하나는 2004년 <대중독재론>의 출간 이후 벌어진 학계의 논쟁이다. 한양대 임지현 교수를 중심으로 제기된 대중독재론의 핵심은 박정희 정권이 공권력의 철권에 의존한 폭압적 정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광범위한 동의를 바탕으로 유지된 정권이라는 것이다. ‘사악한 소수 독재 세력 대 선하고 핍박받는 대중’이라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진보 진영의 기존 인식에 충격을 가한 도발적 문제 제기였다.
 
당시 논쟁의 당사자이기도 했던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임 교수의 대중독재론에 일단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기존의 독재 연구 또는 파시즘 분석을 뛰어넘는 새로운 통찰력과 넓은 연구 지평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저자가 보기에 진보적 논의는 “다양한 새로운 연구들을 개방적으로 흡수하고 내포화하지 못해 ‘앙상’해진 측면이 있다.”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2007)를 잇는 조 교수의 박정희 정권 연구서 <동원된 근대화>의 문제 의식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책이 겨냥하는 것은 정권의 폭압적 성격을 강조하는 진보적 관점에서 대중독재론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진보적 재해석’을 위해 저자가 동원하는 수단은 박정희 정권을 ‘개발동원체제’로 규정한 후 그 체제가 헤게모니 형성과 헤게모니 균열이 모순적으로 공존한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헤게모니 형성 과정이 동시에 헤게모니가 균열되는 과정과 중첩돼 있었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 추진’이라는 국민적·민족적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획득한 도덕적 선도성을 바탕으로 사회의 자원을 총동원하는 ‘개발동원체제’였다. 그러나 ‘동원된 근대화’는 근대화된 대중을 낳았고, 이렇게 탄생한 근대화된 대중은 자신을 낳은 체제와 불화하는 관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대중의 동의는 결코 지속적이거나 능동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박정희 체제에는 정치적·경제적 성취와 위기가 공존했다. 개발동원체제는 근대화라는 목표를 성취하는 데는 효율적이었지만 그 강압성으로 인해 위기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국의 산업화가 촉진됐다는 보수적 시각과 박정희 체제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저항에 의해 붕괴했다는 진보적 시각은 모두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저자는 진보든 보수든 박정희 정권에 대한 해석은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 “각자의 시각을 견지하면서 반대 시각이 제시하고 강조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해석적으로 내재화하는 방향으로 풍부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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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체제와 북한이 같을까? (레디앙, 2010년 01월 16일 (토) 09:25:19 이병천 / 강원대 교수)
[서평] 조희연, 『동원된 근대화』…‘개발동원체제’ 개념 불안정
  
1. 박정희 시대의 무게, 진보의 공백에 대한 응답
국민 대중은 단지 보수에 대한 비판 일변도를 넘어, 성공 대 자학의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 열린 진보의 새로운 근현대사론을 요구하고 있다. 그간 우리가 무엇을 성취했고 무엇을 잃었는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떤 새 길을 열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금 새로운 성찰을 기대하고 있다. 사정은 박정희 시대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진보의 재해석에 기여함은 물론, 진보의 한국근현대사관의 새로운 재구성을 위해서도, 나아가 저자가 ‘우리 안의 보편성’이라고 부른 한국적 특수성 속에 존재하는 일반성을 발견하는 작업에서도 새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2. 『동원된 근대화』의 핵심 논지 : 개발동원체제와 그 이중성
이번에 나온 『동원된 근대화』는 저자가 앞서 낸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가 역사서술 방식의 대중서 성격을 갖고 있다면, 『동원된 근대화』는 사회과학적 분석에 주안점을 둔 전문 학술서에 해당한다. 그렇다 해도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 또한 단순한 대중서는 아니었다. 『동원된 근대화』에서 핵심 개념으로 잡은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은 이미 그 책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그 사회과학적인 규정과 분석은 미루어져 있었던 터였다.
 
이제 새 책에서 저자는 ‘개발 동원 체제’ 개념을 과감하게 박정희 체제론의 핵심 개념으로 끌어 올려 체계적으로 장착시키고 있다. 그리고 개발동원 체제가 모순적인 이중성, 또는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고 봄으로써 박정희 체제의 구조적, 역사적 성격과 함께 그 작동 방식, 정치사회적 동학을 진보적 시각에서 해명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개발동원체제는 개발이라는 목표를 향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사회를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다. 그 때문에 이 체제는 국가주의적 체제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저자는 개발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특별히 새롭다 할 의미 내용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다. 성장, 발전, 근대화라는 말과 혼용되기도 한다. 반면 방점을 찍어 강조하는 것은 ‘동원’이라는 말이다. 책의 원제와 부제 모두에서 동원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동원은 개발, 또는 근대화 목표를 압축적 또는 전투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사회를 조직화하는 전략적 행위다. 그리고 개발이 경제적 변화과정이라면, 동원은 경제체제의 정치사회적 작동 양식이다.
 
평자가 보기에, 저자의 개발동원 체제 개념이 갖는 새로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점으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개발 동원 체제 개념을 한국의 박정희 체제를 넘어서 후발 근대화 이행 체제로 일반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와 제 3세계는 물론, 서구 후발 자본주의 근대화 체제도 이에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개발동원체제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에 걸치는 개념으로, 즉 체제 관통적인 개념으로 제시한다. 소련의 스탈린 체제, 북한의 초기건설 체제, 나아가 오늘날 개혁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조차 개발동원체제에 포함된다. 그리하여 박정희 체제는 이렇게 다양한 개발동원체제중 하나의 특수한 케이스로서 후후발,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 파악된다.
 
둘째, 저자는 개발동원체제의 국가중심성을 말하면서도 그간의 국가중심론을 넘어서고자 한다. 저자가 보기에 대표적 국가중심론이라 할 수 있는 개발국가론은 국가 자체의 주도적 개입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개발의 정치사회적 과정 또는 양식인 동원의 지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체제’(regime) 수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체제’라는 개념이 국가와 사회간의 특수한 관계가 작동하는 개발의 사회적 과정의 특성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국가 자체에 내재된 자율성과 개입 능력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계급적, 사회적 조건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하여 구체적으로 박정희 체제에서 그 특수한 조건들을 분석하고 있다.
 
다음으로 『동원된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개발동원체제, 그리하여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서 한국의 박정희 체제가 모순적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이중성’의 테제는 책의 부제로 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이 관점은 저자가 그람시, 제솝, 톰슨, 폴란차스 등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자원에서 길러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이중성론에 섬으로써 저자는 박정희 체제의 구조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역사적 동학도 보여 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모순적 이중성이란, 박정희 체제가 한편으로 경제적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는 성격과 또 다른 한편으로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성격, 그리하여 위기적 성격을 같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중성 또는 복합성은 또 달리 헤게모니적 성격과 ‘헤게모니 균열‘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저자의 모순적 이중성론은 혹시 이런 측면도, 저런 측면도 있다는 식의 병렬적 절충론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대답은 두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이론적 수준인데 저자는 그람시 헤게모니론이 강압과 동의를 상호 배제적으로 보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비판하고 동의와 강압의 통합적 이중성론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지배의 양측면으로서 강압과 동의가 어떤 방식으로 상호 침투하고 통합되는지에 대해 말한다. 또 구체 분석수준에서는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전시기에 걸쳐 동의와 강압, 또는 헤게모니적 측면과 그 균열의 측면이 어떤 역사적, 계급적 사회적 조건위에서 출현할 수 있었고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그 결합이 왜,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그리고 이 이중적 체제가 마침내 어떻게 아래로부터 ‘민중의 주체화’와 정치적 저항에 의해 파국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해 그 모순적 동학을 밝힌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차적으로 주목해 두어야 할 것은 저자의 모순적 이중성론이 박정희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일방적인 보수적 정당화론, 나아가 립셋, 헌팅턴 등이 대표하는 주류적 근대화론, 즉 권위주의적 산업화 연후에 정치적 민주화라는 단선적, 단계적인 진화론과 대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위인 박정희’론은 물론, 국가중심론을 벗어나 지배의 전략 대 저항의 전략, 지배의 동학 대 저항의 동학이 연출하는, 모순에 찬 발전 체제로서 박정희 체제를 파헤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에게 있어 박정희 반공 권위주의적 개발동원체제는 하나의 역사적 헤게모니 체제임을 인정하면서도, 무엇보다 뛰어나게 ‘헤게모니 균열’의 사례가 된다. 저자가 임지현의 대중독재론, 이영훈의 신보수적 근대화론과 논쟁하면서 보여주고자 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3. 토론: 개발동원체제 개념의 불안정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는 몇 가지 토론 지점들을 열어 놓고 있다. 토론점들은 꽤 많지만, 여기서는 아무래도 이 책의 육중한 무게를 떠받치는 핵심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토론해 보고자 한다. 과연 개발동원체제라는 말이 이 책에서 시도한대로 새로운 사회과학적 분석 개념으로서 구성, 정립될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라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다.
 
1). 한국의 박정희 체제, 동아시아와 제 3세계 국가들의 발전체제, 독일 비스마르크 체제를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의 후발 발전체제, 소련의 스탈린 체제, 북한 초기 사회주의 건설체제, 개혁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이 모두를 저자는 한 바구니에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의 개념 바구니에 너무 많은 것, 이질적인 것들을 담아서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개발을 위한 국가 주도의 사회 조직화라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이들을 같은 개념으로 묶을 수 있겠는가. 같이 묶을 수도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같이 묶은 개발동원 체제 개념이 얼마나 유의미한 함축을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2). 개발동원체제 개념의 중요한 난점은 하나의 사회구성에서 공(公)과 사(私), 국가와 사회, 국가권력과 사회 지배세력, 계획과 시장, 공유와 사유의 쌍에서 각각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 양자의 상호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것이 그 사회의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가지며 사회 발전 방식과 경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하는 문제가 너무 간단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발동원체제 개념에서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은 개발보다는 동원이다. 개발은 다분히 중심 과제, 중심 가치로 전제되어 있다. 동원의 측면에 더 조명을 줌으로써 새로운 것도 얻었지만 잃은 것은 없는가. 동원이라는 말은 그 자체 매우 국가중심적인 함축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동원주체는 국가이고, 사회는 동원대상이다. 그 때문에 저자는 국가중심론을 비판하고 국가의 계급적 사회적 조건을 강조하고 있지만, 오히려 의외로 개발주의 체제 개념에서 개발동원체제 개념으로 나아감으로써 국가 중심주의를 훨씬 더 강화시킨 의미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닌가.
 
사실 연구사상 개발국가론, 개발주의론에서도 동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미 개발주의체제가 민족주의적, 반공주의적 동원체제 성격을 중요한 특성으로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결코 동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동원과 같이 가는 협력이 중요하다. 개발주의론은 동원과 협력, 사기업에 대한 규율을 동반한 지원, 그리하여 국가와 사기업, 국가와 시장간 공사 협력의 시너지를 낳는 체제적 특성에 주목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개발동원 체제론에서는 국가중심주의가 한층 더 강화됨으로써 사회의 지배세력의 존재, 그리고 이들과 국가와의 특수한 관계 방식의 문제가 부차화되는 의미 변화 효과를 낳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저자는 국가의 계급적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 그리고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와 동학에서 자본가 계급, 지배 블록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론틀의 수준에서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주의체제론에 비해 국가 주도에 의한 사회동원을 체제의 핵심 골격으로 잡았다고 하겠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의외로 국가중심체제에 내장된 국가물신숭배의 위험, 그 정치적 반동성의 위험, 국가민족주의의 이중성의 위험에 대한 지적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동원된 근대화』에는 정치적 ‘반동성’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반동성’이라는 말보다 ‘작위성’이라는 개념적으로 애매한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3). 개발동원체제에서 공과 사의 위상 및 복합적 상호 관계에 시선을 두게 되면, 대중들이 단지 ’동원‘만 되는 것이 아니라 ’호응’하는 문제, 왜 어떤 방식으로 호응하는지 하는 문제가 퍽 중요해진다. 이 주제는 물론 대중독재 논쟁의 주제이기도 했고 저자 또한 그람시적인 ‘강압과 동의’의 문제틀 위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는 예를 들어 한국 박정희 개발주의의 경우, 국가주도 냉전반공주의, 국가민족주의의 대중 동원력뿐만 아니라 그 동원이 먹힐 수 있는 가족주의 기반의 문제가 별로 거론되고 있지 않다.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고 6.25전쟁 이후 새롭게 재구성된 가족주의와 생존을 위한 강렬한 소유집착주의, 그에 따른 국가동원에 대한 대중들의 호응 문제는 박정희 시대뿐만 아니라 민주화와 세계화시대 한국에서 공적 신뢰의 약함과 그에 따른 복지연대형성의 곤란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 개발주의시대 이후, 87년 민주화 이후 왜 시장주의 시대가 도래했고 진보가 ‘불신의 덫’에 빠지게 됐는가, 이는 다방면으로 심층 연구가 필요한 큰 주제인데, 나는 소유집착적, ‘사민’(私民)적, 경쟁적 가족주의에 오늘의 시장주의와 이어지는 중요한 하나의 연결 고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높은 교육열과 사교육 과열경쟁도 단지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며, 역사적 가족주의와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비대한 사교육은 이전부터 부동산 투자와 함께 복지 안전망이 빈약한 상황 속에서 대중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존, 안위 및 지위 상승을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미래 투자행위에 속한다.
 
4). 앞의 논의를 전제로 이제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의 이론적 계보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국가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저자는 개발동원체제론이 개발국가론, 그리고 평자가 제안한 바 있는 개발자본주의론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명은 너무 소략하고 간단히 처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정작 중요한 것은 내용적으로 그 연관성이 흐릿해 보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개발국가론의 주창자 존슨은 스탈린적 국가독점사회주의와 일본 및 동아시아 개발 자본주의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존슨의 개발국가론에 따르면, 전자는 ‘계획 이데올로기적’ 모델로서 실패한 반면, 후자는 ‘계획 합리적’ 모델, 국가와 시장간, 국가와 사기업간 ‘공사협력’모델로서 성공한 모델이다.
 
개발국가론, 개발주의론에서는 어떻게 그 체제가 공사협력의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기제, 제도형태를 갖고 있는지 하는 것이 핵심 관심사다. 반면에 조희연의 개발동원체제론에서는 존슨이 범주적으로 확연히 구분한 스탈린 모델과 동아시아 모델이 같은 개발동원체제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다. 또 그 체제의 작동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관계없이 모두 개발동원체제로 정의된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개념의 실질적 내용 부분에서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국가론 및 개발자본주의론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의 이론적 계보가 좀 묘연해 진다.
 
에번스의 ‘연계된 자율성’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도 중요한 급소를 찌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자율성‘과 함께 ’연계성‘이 개발국가론의 핵심이라는 대목은 덜 주목한 것 같다. 생각하기에 따라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은 내용적으로, 개발국가론의 계승, 극복론이라기 보다는 전혀 뜻밖에 헌팅턴류의 강한 국가론의 계승, 극복론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흥미로운 논란 지점이 될지 모른다.
 
5). 또 다른 이론적 계보 문제로서 개발동원체제론이 권위주의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동원된 근대화』가 박정희 시대의 정치사회학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중요하다. 저자는 박정희 체제를 개발동원체제의 특수한 사례로서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권위주의 체제라는 것이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적 성격과 동학을 파악함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빠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찍이 권위주의론의 제창자 린츠가 말한 대로, 이 체제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이분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회색지대를 지칭하는데, 제한된, 정치적 다원주의의 존재는 그 필수적 특징이다. 정치적 다원주의의 존재여부, 권위주의의 제도화수준이 낮은지 높은지, 어떤 방식의 제도화인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의 박정희 체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치적 다원주의 제도 그리하여 공적 경합 공간의 존재가 지배연합 대 저항연합의 각각의 능력과 어우러지면서 그 체제에 고유한 내적 모순과 불안정을 투입하면서 역동적 동학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와 대만정치의 차이도 이 지점에서 비교가능하다.
 
한국의 70년대 유신체제는 저자가 말하는 ‘민중의 주체화’뿐만 아니라, 60년대의 제한된 다원주의 공간마저 박정권이 폐쇄하려고 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하고 자기 무덤을 판 측면이 있다. 이렇게 봐야 개발동원체제의 ‘헤게모니 균열’과 그 이후에 대해서도 민중의 주체화와 저항에 의한 붕괴라는 단순 도식을 넘어 다양하게 열린, 복합적 경로를 논의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평자는 그간의 헤게모니적 ‘대중독재’ 대 ‘헤게모니 균열’의 논쟁 구도 이상으로, ‘어떤 균열인가’를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저자가 주장하는 개발동원체제의 모순적 이중성론과 뛰어난, 생동하는 동학론도 다원적 권위주의 체제와 그 다양한 제도화 방식 및 수준에 기반을 둠으로써 이론적, 경험적 분석의 빈틈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개발동원체제론은 전통적인 정치적 힘관계론과 이데올로기론을 벗어나지 못할 우려마져 없지 않다.
 
6). 위와 같이 말함으로써 나는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에서 제도론의 빈곤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개발동원 체제론이 선행한 개발국가론, 개발자본주의론 그리고 권위주의론과 이론적 관계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하고, 그럼으로써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적 성격과 동학을 파악함에 있어 중요한 난점을 갖게 된 데는 <동원된 근대화>에서 사회세력간 타협의 소산이면서도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관계의 ‘제 3항’으로서 제도의 이론, 제도의 정치사회학이 좀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다름아닌 개발동원의 ‘체제’(regime)를 말하면서 그것에 고유한 정치사회적, 경제적 제도 형태들, 그 배치방식과 연관들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개발주의 정치경제학이 그렇듯이,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학 또한 제도론적 전환을 통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제도론이 아니라 갈등과 쟁투의 계기를 삽입한 진보적, 역사적 제도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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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탄생했나? (프레시안, 황병주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2010-01-16 오후 1:37:52)
[화제의 책]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
 
박정희 체제는 현재 진행형
종말을 고한 지 한 세대를 넘겼음에도 박정희 체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것은 사회 현상으로서의 '신드롬'이나 퇴행적 향수 또는 정치 공학적 술수의 차원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의미한다.
 
박정희 체제 18년을 전후한 시기는 한국 근현대사의 결정적 국면이었다. 근대 세계 체제의 시민권은 곧 국민·민족 국가였고 박정희 체제기는 '국가 형성(nation building)'의 핵심 과정을 포함했다. 그 핵심 중의 핵심이 산업화였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재)생산 시스템의 비가역적 전화야말로 박정희 체제를 (재)생산하는 영구기관이다.
 
이른바 '국민 경제'의 구성과 확장은 '국민'의 형식적 포섭을 넘어 실질적 포섭을 가능케 했고 모든 구성원을 '집단 살림'의 식구로 만들었다. 집단 살림의 주기적 경기 변동이 영원한 운명을 대신했고, 이것을 떠난 개체의 삶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요컨대 국민 또는 민족은 운명 공동체를 넘어 생활 공동체가 되었고 공동의 운명이라는 추상적 긴박보다 생활 상의 일상적 구속을 통해 동질적 집단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산업혁명은 사회혁명을 추동했고 한국 사회 전체가 급속한 변화에 휘말리게 되었다. 사회적 유동성은 극단적으로 상승하였고 대중정치의 본격화는 민주주의를 비롯한 정치적 감각의 활성화를 초래했다. 역설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독재의 반정립으로 구성 확산되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조화로운 발전'이라는 김대중 정권의 슬로건은 박정희 체제와 단속적으로 연결될 것이며, 뉴타운은 새마을의 번역이다. 박정희 체제는 그것을 스스로 '조국 근대화'라 불렀다. 그러면 박정희 체제의 조국 근대화는 어떻게 가능했고 또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을 내세운 박정희 체제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박정희 체제='개발 동원 체제'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 발간된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후마니타스 펴냄)는 주목할 만한 책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오랫동안 한국의 진보 학계의 중심 역할을 해온 저자의 최근 고민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 2부 6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박정희 시대의 체제적 성격'을 규정한 다음 2부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대중적 동의 기반'을 집중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이미 2007년에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역사비평사 펴냄)를 통해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도했기에, 이번 책은 이론적, 사회과학적 분석에 집중하고 있다.
 
이 책을 관류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즉 저자는 '진보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보수적 시각에서 강조하는 경제 성장, 대중적 동의를 '진보적 시각의 확장' 속에서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복합적인' 진보적 분석틀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진보적 분석이 근본적으로 '실천의 과학'이기에 현실 '비평'이 아니라 현실 '변화'를 지향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실천의 논리를 위한 현실의 단순화가 초래한 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박정희 체제를 '특수한' 대상이 아니라 '일반적' 특성을 갖는 대상으로 파악하고자 함을 밝히고 마지막으로 '모순적 복합성'과 '헤게모니의 균열' 개념을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분석된 박정희 체제는 한 마디로 '개발 동원 체제'로 정의된다. 그 의미는 '근대화'라는 국민적·민족적 목표를 향해 국가가 위로부터 사회를 강력하게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이다. 이로부터 '동원된 근대화'라는 이 책의 제목이 도출된다.
 
국가-권력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해 중요하게 동원된 것이 곧 '결손 국가'와 '결손 국민'이었다. 서구적 근대 국가 및 국민을 기준으로 하여 스스로를 후진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정상적 국가와 국민 형성이 전사회적 목표로 설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생체적, 도덕적, 국가주의적 훈육 국가로서 결손 국민을 정상 국민으로 전환하기 위한 국민화 프로젝트의 담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발 동원 체제는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동원의 작위성으로 말미암아 위기적 성격을 내재하게 된다. 저자는 박정희 개발 동원 체제의 정치사회적 이중성, 즉 효율성과 위기성의 공존을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표임을 강조했다. 위기성의 핵심은 '민중의 주체화'인데, 민중은 근대적인 권리 주체로서 '시민'적 존재이자, 계급적 저항 주체로 설명된다. 박정희 체제는 경제적 근대화를 지배적인 가치로 하고 개인의 자유와 시민사회의 자율성, 민주주의적 지배와 같은 근대의 또 다른 가치를 무시하는 '예외 국가'적 형태였기에 이를 대표한 것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이었다. 이러한 분석의 결과 저자는 폭압을 뚫고 성장한 한국의 민중과 민주주의는 백인만의 민주주의인 미국, "파시즘의 유산이 질곡하고 있는 일본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아시아의 '모범적인' 민주주의의 전형"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으로 의미 부여했다.
 
박정희 체제의 동의 기반이 협소했던 점은 민족주의와 반공주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박정희 체제는 민족주의를 지배 담론으로 적극 활용했지만, 그것은 '두 개의 국민'을 지향하는 모순적인 기획, 다시 말해 '민족과 대결하는 민족주의'에 불과했다고 한다.
 
결론에서는 '복합적 진보' 분석틀의 정립을 강조하고 한국의 근현대 역사상 재구성 문제를 논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한국 사회 발전의 '진보적 긍정'으로 요약된다. 즉 박정희 독재는 일본이나 독일과 달리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투쟁에 의해 극복되었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발전시켜 간 적극적 진통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안의 보편성'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면서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로부터 도덕적으로 존경받고 모범이 될 수 있는 공동체와 개인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와 연결되는 것으로 상정된다. 
 
박정희 체제 과연 '예외국가'였나?
박정희 체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으로까지 운위되는 만큼 그 실천적, 학문적 중요성은 누차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정치적 주장을 넘어선 진지한 학문적 접근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이 책의 출간은 매우 반가운 일이며 박정희 체제에 대한 학문적 인식 수준을 제고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이 책은 기존의 악무한적 '이항 대립' 구도의 지양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진보와 보수' 간의 극단적 낙차는 박정희 체제에 대한 냉정한 접근을 방해했고, 치밀한 분석과 논증 대신 정치적 주장만이 난무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진보적 시각을 완강하게 견지하면서도 보수적 견해까지 포괄하는 지적 성찰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 실천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다. 이 책은 박정희 체제를 주된 대상으로 삼되, 그에 국한되지 않으면서 한국 근현대사 전반에 대한 인식론적 성찰을 담고 있다. 즉 박정희 체제를 보다 넓은 역사적 맥락에 배치시킴으로써 인식론적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정치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참신한 이론적 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순적 복합성, 헤게모니의 균열, 우리 안의 보편성 등의 개념은 저자의 치열한 학문적 고민의 산물로 박정희 체제 분석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분석적 개념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시도한 분석의 참신성은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우리 안의 보편성'으로 표현된 문제의식이다. 식민주의적 인식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고민은 매우 소중한 것이나 그것이 또 다른 보편성의 구축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도 연결되는데, 미국의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모범이 아닌 것처럼 한국의 민주주의가 여타 사회의 모범으로 제시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세계는 보편이라는 추상 대신 특이성(singularity)으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보편성을 담지한 모범 대신, 특이성 간의 연대가 더 민주주의적이지 않을까?
 
둘째는 '모순적 복합성'이나 '헤게모니의 균열' 등으로 시도된 새로운 접근이 좀 더 명료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오직 하나의 요소로 구성되거나 유지되는 지배 질서는 없을 것이기에 복합성은 지극히 올바른 지적이며, 완벽한 무모순의 지배 질서도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모순의 강조도 이의가 있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순적 복합성을 함께 분석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박정희 체제가 일정한 동의 기반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동의적 강압'이었다고 하면 기존의 분석 패러다임과의 차별성이 선명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셋째는 근대화 담론의 국가적 사회적 확산과 관련된 문제이다. 주지하듯이 근대화 담론은 195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정립된 것이지만, 개항 이래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문명개화, 실력양성, 계몽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해왔다. 박정희 체제 성립 이전에 이미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근대화 담론을 강조했고, 박정희 체제는 그것을 국가적 수준에서 적용한 것일 뿐이었다.
 
'교수 정치'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박정희 체제는 지식인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동원했는데, '지식-권력'의 형성이라 할 만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었다. 지식-권력의 담론적 실천 결과로서의 근대화론은 사회진화론적 도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으며, 서구-근대에 대한 강렬한 콤플렉스와 오리엔탈리즘-옥시덴탈리즘에 사로잡힌 결과였다. 요컨대 근대화 담론의 사회적 확장은 식민화의 결과였다. 박정희 체제가 선동한 '5000년 가난' 운운의 '빈곤의 정치'는 그 정치적 수사였다. 저자는 근대화에 대한 '사회적 준(準)합의'가 존재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합의라기보다는 지식-권력의 담론적 실천 효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한다.
 
넷째는 '전통화된 지배'의 부재와 '평등주의적 전통'의 문제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은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지배와의 철저한 단절'이 이루어져 '전통화된 지배'가 부재했고, '민족적·인종적 동질성에 기인하는 강력한 평등주의적 전통'으로 인해서 박정희 체제에 대한 동의 기반이 협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주장이다. 성리학적 질서와 가치, 관습은 매우 오랫동안, 심지어 현재까지도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승만의 왕족의식은 유명한 것이었고 '부르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한국전쟁 당시 농촌 지역의 갈등은 신분제적 유제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았고 1960년대까지도 농촌 지역의 머슴은 인격적 예속상태에 있었다. 한국에서 철저한 사회혁명의 경험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왕조에서 공화제라는 국가 형식의 변화만으로 전통적 지배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을까 한다.
 
인종적·민족적 동질성에 입각한 평등주의적 전통 또한 역사적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전근대 시기까지 인종적·민족적 동질성은 운위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신분제적 차별 속에서 강렬한 평등주의적 열망이 구성되었다고 보인다. 예컨대, 만적의 난에 등장하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말은 민족적 동질성에 입각한 평등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전근대 조선사회는 남선과 북선의 격차가 매우 컸고 동질적 통합의 정도는 매우 낮았다. 일제시기 안창호가 주장했다고 하는 '일본은 우리를 20여 년간 지배하고 있지만 기호파는 우리를 500년 간 지배했다'는 말은 민족적 동질성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조선왕조 500년 간 서북 출신의 유명인은 홍경래가 유일할 것이다. 요컨대 민족적·인종적 동질화는 근대 이후 문제화된 의제이며 그것도 추상적 본질이라는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다섯째는 '예외국가' 또는 예외적 근대 권력으로서의 파시즘 인식과 관련된 문제이다. 저자는 박정희 체제와 파시즘을 개인 자유, 시민사회의 자율성, 민주주의 등을 부정하고 근대성의 특정 측면만을 극단화하는 예외국가, 예외적 권력으로 파악한다. 월러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술의 근대'와 '해방의 근대'를 구분하고 파시즘과 박정희 체제는 기술의 근대만을 추구했기에 해방의 근대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근대와 해방의 근대가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예외국가라는 규정이 정상국가에 대한 과잉정당화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인다. 전시 총동원체제기 일본의 여성운동은 국가의 해방적 기능에 주목해 전쟁에 적극 협력했으며, 파시즘과 거리가 먼 미국 또한 특정 정세 속에서 예외국가적 특성이 노골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파시즘을 근대의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하고 외과 수술하듯이 제거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라고 보인다. 오히려 파시즘은 근대의 고유한 일부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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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난 : 새로운 빈곤, 오래된 과제>

한국사회의 빈곤에 관한 종합 보고서라... 그러고 보면 외국 사례를 소개한 책은 있었지만, 이런 것은 없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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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가난에 관한 종합 보고서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2010-01-05 07:29)
〈한국의 가난〉 김수현·이현주·손병돈 지음/한울·2만3000원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빈곤에 관한 종합 보고서다. 가난이란 무엇인지, 누가 가난한지,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왜 가난한지, 가난을 이겨낼 방법은 무엇인지 두루 살펴보는 저자들은 "빈곤층이 15%가 넘는 시대에도 가난한 이들이 보호받을 권리는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된다"며 "우리의 가난을 정확히 바라보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들의 근본적인 시각은 가난이 개인적인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원인이 누적된 결과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일을 해도 가난한 근로빈곤층(Working Poor)까지 등장했다. 일을 할 수 없는 노인들이 가난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서구 복지국가에서는 노인이 다른 연령층에 비해 특히 더 가난하지는 않다. 노후소득 보장제도가 미흡해 자녀에게 노인복지를 내맡기는 우리나라에서는 일하지 못하는 노인들과 젊었을 때부터 가난했던 노인들뿐 아니라 자식이 가난한 노인들까지 가난하다. 가난한 노인들은 돈이 없어 주거 환경이 열악하며 건강 상태도 더 좋지 않고, 그 때문에 더 가난해지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21세기 들어 크게 늘어난 빈곤층은 일을 하거나 일할 수 있는데도 가난한 이들이다. 저자들은 근로빈곤층이 등장한 원인을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된 데서 찾는다. 기업이 기존 업무를 외부에 하청 주거나 해외 공장으로 이전하면서 '좋은 일자리'는 줄고 비정규직이 양산됐다는 것. 비정규직은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지위 때문에 일을 하면서도 가난하다.
 
저자들은 '가난은 모인다'는 특성에도 집중한다. 소득이 낮을수록 주거비 부담이 큰데, 설상가상으로 대도시 재개발이 계속되면서 빈곤층이 살 수 있는 저렴한 주택이 사라지고 있다. 재개발 사업 인근의 전ㆍ월세 주택이 품귀로 값이 폭등하고, 빈곤층은 더 열악한 주거지로 내몰린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반이 취약한 동네에 살 수밖에 없는데, 가난한 곳의 자치단체 역시 가난하므로 빈곤층을 구할 복지 혜택도 적다.
 
저자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이다. 이들은 "빈곤 '지역'에 대한 정책적 개입을 시도한 사례가 거의 없다"고 지적하면서 빈곤층과 비빈곤층이 함께 사는 혼합단지를 건설하는 등 지역 발전 격차를 줄이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또, 근로빈곤층 해결을 위해서는 기존 일자리를 여러 개로 나누는 방안, 공공부문에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방안 등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저자들은 "빈곤 대책은 사회, 경제, 문화, 복지 전 분야에 걸쳐 세워져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현행 정책이 3대 사회안전망 가운데 '마지막 안전망'인 공공부조 중심이므로 사회보험과 사회서비스 등 나머지 안전망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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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국격? 똑똑히 보라, 이 가난을 (부산일보, 임광명 기자, 17면 | 입력시간: 2010-01-09 [16:23:00)
 
책은 묻는다. 한국은 가난에서 벗어났는가? '아니올시다'라고 책은 답한다. 현 정부가 "원조 받던 나라로서는 최초"라며 OECD 개발원조위원회 가입을 자랑하는 판에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책이 보여주는 수치는 그 답을 수긍케 한다. 2007년 기준 한국의 가처분소득 기준 빈곤율(중위소득의 50%가 안되는 가구소속 인구의 비율)은 16.5%로 추산됐다. 2007년 한국 인구가 4천850만명 정도였으니, 약 800만명 정도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더욱이 2008년 세계적 경제위기 이후 빈곤율은 현저히 늘어나는 추세다.
 
노인 문제에 이르면 빈곤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2007년 기준 가처분소득 기준 노인 빈곤율은 35.6%로 나타났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부의 사회복지 지원금이나 세금감면 등의 혜택이 고려된 수치다. 이들을 뺀 시장소득 기준으로는 45.5%가 빈곤 노인으로 분류된다. 그런 노인들은 "밤에 불도 한 번 안 켜"고 "지독하게, 그냥 되는 대로" 살고 있다. 거기다 노숙인, 결혼이주 여성, 외국인 노동자, 탈북자 등으로까지 시선을 돌리면 한국 사회의 가난 문제는 "선진국", "OECD", "국격", "비전" 따위 호사스런 말잔치로 덮어질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가난을 정확히 바라보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한데, 책은 "사회적 원인이 누적된 결과"라고 설명한다.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 최근 급속히 양산되고 있는 점이 그 증거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된 것이 그 원인. 정규직은 줄고 비정규직이 양산된 것이다. 비정규직은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지위 때문에 일을 하면서도 가난하다.
 
가난 중 제일 오래고 깊은 고통이 주거 가난이다. 소득이 낮을수록 주거비 부담이 큰데, 설상가상으로 대도시 재개발이 계속되면서 빈곤층이 살 수 있는 저렴한 주택이 사라지고 있다. 재개발 사업을 한다지만 빈곤층은 오히려 더 열악한 주거지로 내몰린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한군데로 몰리게 되는데, 가난한 곳의 자치단체 역시 가난하므로 빈곤층을 구할 복지 혜택도 적다. 결국은 사회적 원인이 가난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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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여는 책]‘한국의 가난’ (내일, 차미례 언론인·번역가, 2010-01-15 오후 12:44:23)
빈곤의 책임 누구에게 물을까
‘비상업적 가난연구서’ … 한국인 관점에서 우리 자신 문제 다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면서 국민의 15%이상이 가난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철거민 노숙자 문제 연구가인 김수현(세종대 도시부동산대학원 ) , 차상위 빈곤층 연구와 빈곤에 관한 기존 논의를 정리했던 이현주(한국보건사회연구원 ), 대학에서 빈곤문제를 가르치며 ‘빈곤과 사회복지 정책’을 펴냈던 손병돈(평택’대 사회복지학과 ) 세명의 저자가 의기투합해서 가난에 관한 책을 냈다.
 
다른 개발도상국이나 선진국의 빈곤 문제를 다룬 책은 더러 출간된 적 있지만 이 책은 한국인의 관점에서 한국의 빈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전문가들의 일부 토론을 제외하고는 가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교재도, 대중적인 빈곤관련 독서물도 없는 판에 이 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고민거리를 전부 한 책에 담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엮었다.
 
한때 ‘잘살아보세’를 구호로 개발연대의 빈곤탈피를 구가하는 듯 하던 한국도 IMF이후 다시 급격한 빈곤층의 증가를 보게 된다. 어느 정도 경제회복이 된 후 2008년 미국발 경기침체를 계기로 빈곤층이 다시 늘어 이제는 15%, 6~7명중 한명 꼴로 빈곤층이다. 굶는 사람은 줄었지만 일을 열심히 해도 가난한 근로빈곤층은 점점 늘었다. 일을 할 수 있는데도 못하거나 안하고 있는 사람도 늘어난다. 외환위기를 겪는 동안 떠오른 ‘양극화’란 용어 뿐 아니라 이제는 ‘ 일하는 빈곤층 (워킹 푸어)’ 또는 ‘신 빈곤층’의 문제가 심각하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빈곤이라고 하는지,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 왜 가난해지며 어떻게 하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연구해야한다.
 
그래서 저자들은 이 책을 빈곤이란 무엇인가 , 가난의 모습, 왜 가난해 지는가, 빈곤 넘어서기의 4부로 나누어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가난의 모습’ 부분에서는 전체 노인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가난한 노인들, 누적된 가난과 소외의 상징인 노숙인들, 결혼이주 여성과 탈북자 등 늘어나는 신종 빈곤층 문제 등을 조명한다. 단순한 학문적 고찰 만이 아니라 저자들의 시각은 우리 대부분이 늘 보면서도 간과하고 있는 분명한 현상을 흥미롭게 포착하고 있어서 매우 창의적이다. 이를테면 ‘가난은 모인다’라는 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동네에 산다, 돌볼 사람이 떠난 농촌의 가난과 노인들만의 고립, 가난한 동네 이해하기, 가정문제를 넘어서는 ‘동네’로의 접근등 신선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가난을 개인과 가구단위 수치로만 보지 않고 지역단위로, 이를테면 ‘가난의 지리학’을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특히 수입이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절대빈곤층 외에도 중위소득의 40~60%이하로 정의되는 상대빈곤층의 개략적인 모습까지 정리한 점은 주목할만 하다. 거리의 노숙인만해도 가족도 집도 없이 떠도는 빈곤층의 극단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쪽방, 고시원, 심야 사우나 등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같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구층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그리 간단히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저자들은 보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수성가 신화는 문제를 올바로 보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가난은 당사자 책임으로 전가되며 그들이 보호받을 권리는 창피한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붕괴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은 더 늘어나는 한국사회 최대의 우려는 가난의 세습이다.  부모가 가난하면 자식도 가난속에서 희망 없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한 선진국의 제도는 재산정도와 관계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사회적 차별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만, 한국에선 어려서부터 가난에 따른 차별과 불이익을 피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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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깔만 고운 한국…‘빈곤의 생얼’ (한겨레, 전진식 기자, 2010-01-15 오후 09:21:51)
 
한국에서 빈곤층은 ‘공식 통계’로 15%에 이른다. 가난한 탓에 질병 치료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는 가구는 12%를 넘는다. 65살 이상 노인의 빈곤율은 50%에 가깝다. 빈곤 극복은 여전히 가장 무거운 과제다. 국제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처음으로 국제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받을 권리가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되는 사회, 여전히 자수성가의 신화가 가득한 사회 아니냐고 지은이들은 묻는다. 40년 전 청계천 노동자 전태일이 ‘나는 두 발로 일어서기가 너무 힘겹다’고 말했던 현실에서 한국은 얼마만큼 달아났는가.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사람의 정신을 잠식하는, 전쟁 같은 가난을 격퇴하는 데 한국 사회는 그동안 어떤 노력을 했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의 가난’을 정확히 바라보자는 지은이들의 주장엔 이런 절박함이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 빈곤문제 가운데,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제구조를 지은이들은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빈곤’이다. ‘고용 없는 성장’은 ‘희망 없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들이 보기에 한국은 ‘빈곤 위험 사회’로 치닫고 있다. 첫째, 빈곤의 위험 범위가 매우 넓어졌다. 경계선에 있는 이들을 더하면 빈곤율이 30%에 이른다는 연구도 있다. 둘째, 가난을 느끼는 영역이 넓어졌다. ‘밥은 먹고 산다’는 식의 생존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로 확장된 것이다. 주거·의료·교육 등에서 개선의 여지가 ‘거의’ 없다면 그것은 빈곤이다. 셋째, 가난의 결과가 물질적 결핍을 넘어 사회적 고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구임대아파트 지역에 사는 아이들을 다른 지역의 아이들이 ‘영구’라고 놀린다. 더 따질 것도 없이 ‘안타까운 상징’이다.
 
넷째,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마저 갈수록 엷어지고 있다. 소득이 기회를 낳는 세상에서 박봉은 박탈을 뜻한다. ‘스펙 쌓기’와 가난의 대물림이 하나의 함수관계로 굳어진 지 오래다. 노부모 봉양도 못하고 자녀 교육도 못한다. 결혼조차 ‘무기한 연장’하는 이들도 늘어난다. 오로지 생존에만 매달리고도 통장은 초라하다. 가족 가운데 큰 병을 앓는 이마저 있으면, 그건 나락으로 추락하는 걸 뜻한다. 불안만 있고 희망이 없는 노동은 이처럼 참혹하다. 사회복지의 현실은 어떤가. ‘가난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원하는’ 대증요법식 정책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느냐는 유행어에는 무시 못할 진실이 있는 셈이다.
 
그러면 해법은 무엇인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공공부조(국민기초생활보장제), 사회보험(국민연금·의료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 사회서비스의 강화다. ‘저인망식 사회안전망’이 절실하다. 일할 기회가 더 많이 마련되고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구조는 필수다. 하나도 새롭지 않지만 유일한 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면서도 복지국가 운운하는 정치인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과연 우리에게 희망은 있을까?” 비록 ‘희망 고문’이 될지언정 포기해선 안 된다고 지은이들은 강조한다. “우리의 꿈을 감히 빈곤 극복이라고 정하자.” 한국 사회 빈곤의 현실을 ‘빈곤이란 무엇인가, 가난의 모습, 왜 가난해지는가, 빈곤 넘어서기’로 나눠 정리했다. ‘슬픈 통계’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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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좋은 대한민국…부자에게만? (프레시안, 전홍기혜 기자, 2010-01-17 오후 5:27:19)
[화제의 책] <한국의 가난 : 새로운 빈곤, 오래된 과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가난의 수천년 인류 역사와 함께 한 가장 '오래된 사회 문제' 중 하나다. 2010년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동시에 '가난'은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어떤 상태가 가난한 건지, 왜 가난해지는지,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고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등은 끊임없이 변한다.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그 사회의 태도에 따라 가난의 규모에서부터 가난이 내포하는 비참함까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최근 발간된 <한국의 가난>(김수현.이현주.손병돈 지음, 한울 아카데미 펴냄)은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한국의 가난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는 책이다. 그동안 가난을 주제로 한 외국서적은 많이 출간돼 몇몇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지만 정작 우리의 가난을 주제로 한 사회과학서적은 많지 않았다.
 
빠른 경제성장으로 세계 13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경제대국이 됐다고 하지만 가난은 여전히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적 문제다. 1997년 외환위기를 포함해 두 번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됐다. 2007년 현재 한국의 빈곤율은 가처분소득 중위 50%(평균 가구소득의 절반)를 기준으로 16.5%다. 100명 중 16명이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빈곤율은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수준이다. 복지국가로 빈곤율이 가장 낮은 그룹에 속하는 스웨덴(2005년 기준)은 5.6%, 핀란드(2004년)는 6.5%로 우리의 3분의 1 수준이다. 프랑스( 7.3%)와 독일(8.4%)은 10% 미만의 빈곤율을 보이고 있고, 영국은 11.6%, 이탈리아도 12.8% 수준이다. 반면 한국경제의 일종의 롤 모델인 미국은 17.3%로 우리보다도 빈곤율이 높았다. 한국의 빈곤율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줄어들다가 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다시 상승했다. 경제성장이 곧 빈곤율과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미국의 빈곤율이 한국보다 높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한국은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의 빈곤율 차이가 1.7%포인트에 불과하다. 정부 정책을 통해 시장소득의 불균형이 거의 교정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이 수치가 7.2%포인트로 20%포인트 안팎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낮다. 정부 정책의 개입 정도가 그만큼 크지 않다는 뜻이다. 빈곤율이 27.3%나 되는 멕시코의 경우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의 빈곤율 차이는 -6.2%포인트였다. 정부 정책을 통해 오히려 시장 소득의 격차가 더 벌어진 셈이다. 정부 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빈곤층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은 노인, 장애인 등 '일을 할 수 없는 이들'이다. 여성가구주 등 일을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저임금인 이들은 가난에 더 쉽게 노출돼 있다. 2007년 노인의 빈곤율은 47.0%였다. 절반 가까운 노인들이 가난을 경험하고 있다. 장애인의 빈곤율은 34.6%, 여성가구주의 빈곤율은 21.8%였다.
 
외환위기 이후 급증하고 있는 문제는 '일하는 빈곤층'이다. '워킹 푸어(근로빈곤층)'이라는 용어는 한국에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일을 할 수 있어도 기회가 없어서('88만 원 세대'로 통칭되는 20대 청년 실업자), 일자리가 불안정해서(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이 낮아서(영세기업 노동자) 등 일을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런 '워킹 푸어'는 대표적인 신빈곤층이다. 이들 외에도 노숙인, 이주노동자, 결혼 이주 여성, 탈북자 등 가난한 이들의 범주는 더 다양해졌다. 이처럼 빈곤층의 구성이 더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은 빈곤 문제의 양상이 더 복잡해졌다는 얘기다. 특히 이주자의 문제는 세계화가 가난의 문제를 얼마나 복잡하게 만들고, 그 해결에도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 나라 안에서 높은 수준의 임금을 줄 수 있는 일자리를 마련하고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고, 낮은 임금으로 다른 나라의 일자리와 경쟁하도록 강요된다.
 
또 과거에 비해 '가난의 대물림'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가난한 어른이 되기 쉽다는 얘기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질병의 위험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노출돼 있고, '배제'라는 사회적 낙인찍기에 시달리며,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교육 시스템에서 패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설사 소위 명문대학에 진학한다 하더라도 1000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감당하기 어렵고, 학자금 대출로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괜찮은 일자리를 갖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만에 하나 취업을 하더라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학자금은 갚다보면 혼기를 놓치기 일쑤고, 어렵사리 결혼을 하더라도 수억 원대에 달하는 집 장만은 은퇴할 연령에나 꿈꿔볼 수 있는 일이 됐다. 이런 모든 관문을 개인의 힘으로 뛰어넘어 대물림되는 가난의 고리를 끊으라는 것은 억지에 가까운 얘기처럼 들린다.
 
6-7명 중 한명이 가난의 언저리에서 살고 있는 한국에서 가난은 여전히 예외적이고 부끄러운 일이며 개인의 게으름 내지는 무능력의 문제인가? 또 애써 무시하거나 외면한다고 사라질 문제인가? 이처럼 갈수록 심각해지는 가난의 문제에서 당신의 삶은 자유로운가?
 
현재의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미 세대의 문제로도 자리 잡은 가난은 그 영토를 더욱 확장시켜나갈 가능성이 크다. 2050년 한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골드만삭스의 전망이 현실이 된다고 하더라도 2010년의 미국처럼 높은 빈곤율에 신음하는 '선진국'이 될 것이다. 가난이라는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앞에서 살펴봤듯이 가난의 규모와 의미는 그 나라의 정책에 따라 얼마든지 재조정이 가능하다. 많은 부모가 자신의 노후의 삶은 포기하는 엄청난 '경제적 부담'과 '가정의 해체' 위험성까지 감수하면서 자녀를 '교육 이민'을 보내거나, 서너살부터 아이들을 영어유치원에 내몰아 입시 경쟁 체제에 편입시키는 상당수 중산층의 삶은 과연 우리 사회의 가난의 문제와 무관할까? 지금이라도 <한국의 가난>에 대해 주목해야할 이유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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