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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몰락- 미국의 패권은 어떻게 무너지는가〉가브리엘 콜코 지음·지소철 옮김/비아북

“상황은 숨가쁘게 변하고 있고, 무엇 하나 일반화할 수 없다. 언제라도, 심지어 내일이라도 변할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일단 현실을 이해하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실질적 기반이 확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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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과 한권의 책] ‘역사학계의 촘스키’ 美 패권 몰락을 ‘경고’하다 (세계, 박재호 비아북 편집장, 2009.11.27 (금) 17:42)
  
세계적인 패권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총(군사)과 달러(경제), 그리고 관용이 필수인데, 미국은 관용이 사라지고 있어서 제국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제국의 미래’의 저자인 에이미 추아는 분석한 바 있다. 그런데 이에 한술 더 떠서 미국은 관용뿐만 아니라 총과 달러까지 모두 잃어서 미국이 지배하던 세기는 끝났다고 경고하는 학자가 있다. 그는 가브리엘 콜코 교수다. 
 
그의 최신작 ‘제국의 몰락―미국의 패권은 어떻게 무너지는가’에서 콜코는 군사력 만능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핵무기의 확산과 값싼 미사일의 대량 보급 등 최첨단 군사기술은 중동국가들을 넘어 동아시아, 남아메리카 등의 국가뿐 아니라 게릴라 조직에게로 팔려나갔기 때문에 더 이상 세계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으며, 미국 또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더불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미국 경제의 위험수위가 도를 넘어섰음을 알렸고, ‘경찰국가’로 대변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하드파워 정책은 국제사회에서 외면받으면서 유럽연합(EU)과 중국 등 새롭게 부상하는 패권국들에게 크게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제국의 몰락’은 미국 패권이 약화된다는 주장에 머무르지 않고, 그 배후세력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지방정부를 먹여살리는 무기업자와 출세욕이 강한 정치 엘리트 세력의 결합, 고위험 고수익을 선호하는 미국 금융투기꾼, 군사력 만능주의에 빠진 정부 관계자가 그들이다. 또한 미국의 중동정책 개입을 비판하면서 이스라엘과 이란 등의 중동문제 해법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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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화근?…치료제 없는 ‘패권 중독증’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9-11-27 오후 08:21:36)
〈제국의 몰락- 미국의 패권은 어떻게 무너지는가〉가브리엘 콜코 지음·지소철 옮김/비아북·1만4500원 
 
미국의 실패와 몰락을 다룬 담론들은 이제 새삼스러울 게 없을 지경이 됐지만, 가브리엘 콜코(77) 캐나다 요크대 명예교수의 새 책 <제국의 몰락>은 그 주제를 달리 보게 만드는 중량감이 있다. 미국의 초기 신좌파(뉴레프트)를 이끈 수정주의 역사가로,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 등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콜코의 책에 붙은 원래 제목은 ‘위기에 처한 세계- 미국 세기의 종언’(World in Crisis: The End of the American Century)이다. 이는 이 책이 비중있게 다루는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 등의 네오콘(신보수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야유로도 들린다. 미국의 세기가 끝났다고 했을 때 콜코는 <위클리 스탠더드>를 운영한 네오콘의 이론가 윌리엄 크리스톨이나 로버트 케이건이 주도한 싱크탱크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2001년 9·11사태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테러와의 전쟁’ 선포 등을 거치면서 세계를 압도하듯 기세등등했던 미국의 ‘새로운’ 세기는 부시의 짧았던 치세와 더불어 그야말로 신기루처럼 사라져가고 있다. “미국의 리더십은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에도 좋다”며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을 외치던 그들의 위세와 오만은 옛말이 됐다.
 
콜코는 미국의 실패와 몰락을 크게 세가지 방향에서 살핀다. 하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화를 계기로 적나라하게 그 모순을 드러낸 미국경제의 금융투기자본주의화. 세계화와 ‘워싱턴 컨센서스’를 무기로 한 신자유주의정책은 미국 등 강국들의 자본이 파생금융상품 등을 앞세워 경제적 약자들로부터 일시적으로 막대한 이윤을 뽑아올릴 수 있게 만들어주었지만 탈규제와 자유화가 통제불능 상태로 치달아 자본주의 자체를 자살로 이끌고 있다는 게 콜코의 생각이다.
 
금융자본은 통제불능 상태다
대외정책은 수렁에 빠졌고 첨단무기 독점체제도 깨졌다
세계를 동반자살로 내몬 ‘제국’ 자본주의 이후에 희망은 있을까…
 
또 하나는 신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군사주의. 원래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국들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집중화된 목표물을 파괴할 목적으로 개발된 미국의 무기체계는 미군이 처음으로 승리할 수 없었던 한국전쟁 때부터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트남전, 최근의 아프간·이라크 침공에 이르기까지 게릴라전에서 모조리 미국에 패배를 안겼다.
 
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비롯해 크루즈 미사일, 견착식 대공미사일 등 최첨단 무기들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우위는 최근의 급속한 기술발전에 따라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예컨대 2006년 이스라엘이 기습작전을 펼친 제2차 레바논전쟁에서 미국제 첨단무기와 통신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군은 사상 처음으로 헤즈볼라 저항군에게 사실상 패배했다. 헤즈볼라 쪽도 러시아와 중국제 첨단무기로 무장했을 뿐 아니라 통신감청 기술은 부패와 오직, 사기저하로 휘청거리는 이스라엘군을 오히려 능가했다. 이스라엘 첨단 메르카바 탱크 20여대가 헤즈볼라의 대전차 로켓에 당했다. 콜코가 보기에 미국이 이란을 공격할 경우 미국의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정과 전투기들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이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항상적 현상이다. 이젠 누구나 쉽고 싸게 첨단무기들, 심지어 핵무기까지 입수해 활용할 수 있다. 파괴력의 ‘민주화’ ‘평준화’다. 미국은 장차 첨단무기로 무장한 정체불명의 적들과 미국 영토내에서 싸워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콜코는 미국의 실패를 부시와 공화당, 네오콘 탓으로만 돌려선 안 된다고 말한다. 미국의 실패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 3월, 그리스와 터키의 ‘좌파’혁명 위기를 과장하면서 냉전의 깃발을 올리고 미국의 패권을 위해 제3세계 등 외부세계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한 트루먼 독트린 때부터 본격화했다. 미국은 그때부터 이미 방향을 잘못 잡았고 그러지 않았다면 도래했을지도 모를 신세계 창출 역량을 소진하고 말았다. “1947년 미국이 은밀하게, 때로는 공개적으로 그 많은 정권들(미국은 위협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대부분이 중립적이고 개혁적이고 합법적이었다)을 전복하려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미국이 그토록 걱정스러워하는 극단주의자들은 훨씬 적었을 것이다.” 트루먼이 민주당이었지만 이런 공세적 대외정책을 펴는 데 공화당과 민주당이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부드러움으로 위장한 조지프 나이류의 민주당식 소프트파워가 실은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콜코는 지적한다.
 
이런 대외 개입주의가 콜코의 세번째 접근 포인트. 지금 미국이 당면한 대외문제 가운데 가장 중대한 문제는 이슬람세계와의 갈등이다. 이 문제는 1차 세계대전 뒤 해체된 오스만터키를 유럽 제국주의국가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마음대로 갈라놓고 그 한복판에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관철하기 위한 일종의 유럽 위성국 이스라엘을 만들어놓은 게 화근이다.
 
콜코가 볼 때 이스라엘이 아랍국들과의 대결정책을 고수하는 한 출구가 없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무력 우위를 급속히 상실해갈 것이며 전쟁 스트레스 속에 고급 인력들 중심으로 해외이민이 급증하면서 인구학적으로도 불리해질 수밖에 없어 화해 없는 대결은 이스라엘 쪽의 비극으로 끝나게 될 공산이 크다. 석유 국유화를 도모한 이란의 모사데그 민족주의정권을 영국과 합작해 전복하고, 사담 후세인을 지원해 시아파의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했으며, 아프간에선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탈레반을 키웠던 미국의 중동공작이 앞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프간·이라크 침공은 석유 가격을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미국이 가장 꺼려온 이란의 중동내 영향력을 오히려 압도적으로 키우는 역효과만 낳았다. 미국은 이란을 공격할 여력이 없다.
 
콜코는 1949년에 출범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도 미국이 유럽의 독자세력화를 막고 자국에 복속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며, 소련과 그 동맹체제의 위협이나 반공주의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마치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의 반공주의가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숨기고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듯이. 그 나토도 유럽과의 이해대립으로 조만간 해체될 것으로 콜코는 본다. 동맹해체와 전쟁 포기가 해법이다. 냉전붕괴 뒤 적들의 부재 속에 방만한 금융투기와 막대한 재정·무역적자를 조장하고, 군산복합체와 출세주의·기회주의에 사로잡힌 정치적 야심가들만 살찌워 놓은 채 전 세계를 동반자살로 몰아가는 미국. 콜코는 기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이후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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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BOOK] 미국의 쇠락을 말하는 여러 가지 징후들 (중앙, 이은주 기자, 2009.11.27 19:37)
 
콜코는 제국의 필수요소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중심으로 한 미국이 더 이상 초월적 힘을 발휘하는 패권국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로 중앙은행이 통제 할 수 없는 금융시스템, 미국의 불안정한 대외정책, 특히 중동정책의 한계 등을 꼬집었다. 금융위기에 대해 저자는 “정말 심각한 것은 구조적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각국의 중앙은행들과 IMF등 현존하는 국제기구가 지금과 같은 현실에 대처할 수 있게 설계돼 있지 않으며 현실을 통제할 힘과 지식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좌파들만이 미숙하고 순진한 건 아니다”며 “사건의 진로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보수주의자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또 이념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도 미국의 혼란을 부추겼단다. ‘공산주의’란 적(敵)이 없어져 동맹이 시들해졌고, ‘테러리즘’에 맞서고자 했지만 오히려 적의 힘을 강화시키는 역효과만 낳았다는 설명이다. 이밖에 그는 2차대전 이후 가장 비싼 전쟁이 된 이라크전, 이란과의 대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유럽, 자기기만과 정치적 편의성으로 자초한 정보의 한계 등을 쇠락의 요인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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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美 패권은 없다 (서울, 박록삼기자, 2009-11-28  18면)
 
가브리엘 콜코(77)가 쓴 ‘제국의 몰락(World in crisis)’(지소철 옮김·비아북 펴냄)은 경제학, 군사학, 정치학, 역사학, 철학을 넘나들며 세계 패권국가인 미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등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대 중동정책, 중앙은행의 통제를 넘어선 불안정한 금융 정책, 미 엘리트 그룹의 허술한 의사결정 시스템, 세계적으로 만연한 핵 확산, 값싼 무기의 세계적 대량 보급 등 미국 안팎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통렬히 지적한다.
 
그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며 미국의 쇠퇴가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의도는 반공산주의가 아니라 전 세계적 헤게모니의 추구임을 고스란히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이라크 전쟁까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서 세계 금융위기까지 풍성한 사례를 들고 있다. 또한 유럽연합(EU)과 중국, 이슬람 등 새로운 세력의 출현 자체가 이미 미국의 패권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콜코는 미국의 패권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1부 덫에 걸린 자본-미국의 금융위기 ▲2부 소멸하는 패권-불안한 미국의 대내외 정책 ▲3부 준비된 재앙-중동 정책의 한계 ▲4부 정보와 기술, 그리고 미래의 전쟁-향후 국제관계의 미래 등 네 부문으로 나눠서 풀어낸다.
 
1부에서는 고위험 고수익을 추구하는 금융투기꾼들과 예측 불가능한 금융상품의 등장으로 인한 미래 예측 불확실성, 리스크의 불명료성 등이 높아지고 이로 인해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등이 야기되고 자본주의가 불안정해짐을 지적한다. 핵심적인 문제는 미국 중앙은행은 물론 각종 금융관련 국제기구들이 이러한 현실에 대처하고 통제할 법적인 힘과 지식도 없다는 점임을 강조한다. 두 번째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비용이 들고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이라크전쟁이 미국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다고 분석했다. 콜코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이 자신의 힘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50년 전에 품었던 야망을 고수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미국의 세계 지배력이 쇠락하는 배경 또는 한 근거로 중국 양안(兩岸)관계의 해빙 상황을 든 점과 한국이 미국의 통제와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례라고 든 점 등은 동아시아의 상황을 피상적으로 인식하고 있거나 무리하게 논리를 편 듯해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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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그렇게 건방떨고도 멀쩡할 줄 알았나?" (조선, 이한우 기자, 2009.11.27 22:17)
 
"해외에서 벌이는 모험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에 경제적 모순들이 더해져서 미국의 힘은 필연적으로 쇠약해질 것이며 미국이 누리던 오만의 시대는 끝날 것이다." 저자의 생각은 이 한마디에 다 녹아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 미국의 극심한 국제수지 적자, 과도한 국고채 차입,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쟁 등에 금융위기가 겹치면서 미국은 사면초가의 지경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경제위기는 2007년 여름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규제철폐'와 '세계화'라고 완곡하게 불리며 20년간 계속돼온 방종의 결과이다."
 
저자는 석유와 원자재 가격의 폭등 또한 미국에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 메커니즘을 풀어낸다. 석유는 러시아와 이란의 경제력을 급속도로 강화시켜 주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부시 정권을 거치며 두 나라와 적대적 관계로 바뀌었다.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의 탈미(脫美) 도미노 또한 유가 급등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물론 지금은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이들 국가가 위기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 등이 유대를 강화해온 것도 반미(反美) 코드를 공유하게 된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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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417억달러’ 적자 최대… 美부채 GDP의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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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000,000,000’ 적자 최대… 美부채 GDP의 85% (서울, 강국진 오달란기자, 2009-11-24  18면)
 
쓸 돈은 많은데 세입은 적다.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와 국가 부채 때문에 미국의 시름이 깊어간다. 한편으로 미국 시민들은 전임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시행한 감세정책의 영향으로 최저 수준의 세금을 내고 있다. 경제위기 극복과 건강보험 교육의 부담을 진 버락 오바마 정부는 고육지책으로 세금을 늘리려 하지만 공화당 등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최고의 재정적자와 최저의 세수’라는 딜레마에 빠진 미국의 현실을 진단해 봤다.
 
미국이 급증하는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로 체면이 말이 아니다. 2009회계연도(2008년 10월~2009년 9월) 미국 재정적자는 1조 4170억달러로 지난해보다 9620억달러나 늘었다. 당초 예상했던 1조 5800억달러보다는 적지만 미국 역사상 최고기록이다. 우리 돈으로는 무려 1641조원이 넘는다. 국가부채도 국내총생산(GDP)의 84.8%로 역대 최고다. 
 
내년엔 상황이 더 심각하다. 백악관 관리예산처(OMB)는 2010회계연도 재정적자를 올해보다 850억달러 늘어난 1조 5020억달러로 전망했다. 2011회계연도부터 점차 축소되어 2015년 7390억달러에 이른 뒤 2016년부터는 노령화로 인한 사회보장비 증가로 다시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쏟아붓는 전쟁비용도 골치다. 올해 지출한 국방비가 6620억달러에 이른다. 여기에 미 의회는 내년도 예산에 아프가니스탄 관련 비용으로 1300억달러를 승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18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폭증하는 정부 부채를 억제하기 위한 긴급 조치가 없으면 미국 경제는 더블딥 불황에 들어설 수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더블딥이란 경기침체 후 잠시 회복세를 보이다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현상이다.
 
대규모 재정적자는 지난해 가을 발생한 금융위기를 조기진화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측면이 강하다. 금융기관에 지원한 구제금융만 해도 7000억달러나 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미국 재정 건전성의 토대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요인이 있다. 역대 최저수준의 세금부담률이다.
 
싱크탱크인 ‘예산과 정책 우선순위 센터(CBPP)’ 보고서에 따르면 중산층 가구의 세금부담수준은 최근 수십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최상위계층의 세금부담도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 CBPP는 “소득 최상위 가구의 연방 세금부담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부시 행정부에서 이뤄진 세금감면이 주된 원인이었다.”면서 “세금감면으로 부유층 세금부담이 줄어든 만큼 정부세입도 감소된다.”고 밝혔다. 또 “재정적자의 이면에는 조세감면과 국방비 지출증대, 국토안보와 이라크·아프간 활동비, 경기침체 등 요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낮은 세금부담은 소득 불평등도 악화시키고 있다. 미 의회 예산사무처(CBO)는 세금감면 혜택의 3분의1이 상위 1%에, 혜택의 3분의2는 상위 20% 소득계층에 돌아간다고 분석했다. 또 세금감면액의 4분의1이 연간 소득 100만달러 이상인 최상위 0.3% 가구에 혜택이 돌아가는 반면 하위 60% 가구에 돌아가는 혜택은 전체 세금감면의 6분의1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막대한 재정지출을 감수해야 하는 오바마 정부로서는 증세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화당을 비롯, 국민들의 광범위한 납세 거부 정서를 극복하는 게 쉽지 않다. 오바마 행정부는 당장 35%인 현재 최고 소득세율을 2011년 빌 클린턴 정부 당시인 39.6%로 되돌리려 한다. 고소득층이 모기지 이자와 자선단체 기부금에 대해 얻는 공제액도 제한하고자 한다. 그러나 공화당을 비롯한 납세자 저항이 만만치 않다. 지난 4월15일 연방 세금보고 마감일을 즈음해 미국 전역에서는 세금 납부에 항의하는 이른바 ‘티 파티 저항(Tea Party Protest)’이라는 시위가 발생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증세정책은 세금제도가 경제성장을 확실히 돕는 방향으로 개편된다면 후유증이 덜할 것”이라면서 “무엇보다도 세금 공제를 없애서 세수의 폭을 넓히고 탄소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오바마 대통령은 내년 초부터 예산을 안정화하고 국가부채를 줄이는 방향으로 예산정책을 펴야 한다.”면서 “의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돼야 하는데 감세정책을 고수하는 공화당을 설득하는 게 관건이다.”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라는 쌍둥이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와 달리 유럽과 일본이 환율조정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도 낮고 막대한 전쟁비용을 쏟아붓고 있다. 무역적자를 줄이면 세입도 늘고 경제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보호주의 완화 요구 등 공세적인 무역정책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중국 등 주요 무역대상국에 평가절상 등 환율조정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한국처럼 대미 수출비중이 높은 국가들이 단기적으로 불리해진다. 이는 다시 일부 국가에서 무역적자 증가로 이어지면서 외환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을 증가시키고 이는 세계경제에 불안정성을 가중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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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세·법인세 인하로 레이건이후 성장 둔화” (서울, 강국진기자, 2009-11-24  18면)
 
미국에서 세금부담이 줄어든 계기는 1981년 레이건 대통령 취임 이후 등장한 새로운 경제정책 때문이었다. 대선 당시 레이건은 소득세와 법인세를 줄이고 국방예산을 늘리겠지만 연방예산이 균형을 찾도록 하겠다고 공약했다. 그 이론적 기반이 바로 ‘공급경제학’이었다. 공급경제학은 부자에게 낮은 소득세와 자본이득세를 부과하면 저축과 투자가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낙수효과’다. 이는 안팎으로 많은 논쟁을 촉발시켰다. 가령 ‘맨큐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자신의 책 초판에서 공급경제학파를 “괴짜 사기꾼들”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라비 바트라 서던메소디스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그린스펀 경제학의 위험한 유산’이라는 책에서 1950년대 최상위 소득계층의 평균세율은 89%, 법인세율은 52%에 달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당시 20만달러(2005년 가치로 100만달러)가 넘는 소득에 대해 1달러 당 89센트를 정부에 세금으로 냈다는 것을 뜻한다. 60~70년대까지도 최상위 소득계층에 대한 소득세율은 70%를 웃돌았다. 바트라 교수는 “레이건 정부 이후 최상위소득세율을 39%로 대폭 줄이는 급격한 감세정책을 실시했고 이와 동시에 경제성장률도 둔화됐다.”면서 “1980년대 이후 성장률이 정체된 것은 가파른 최상위 소득계층 세율인하, 법인세 대폭 인하, 역진적인 세금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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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비상 캘리포니아주는 (서울, 강국진기자, 2009-11-24  18면)
주립대 등록금 32% 인상 재산세 못 올려 증세 어려워 
 
미국 재정적자로 인한 갈등과 혼란을 잘 보여주는 곳은 캘리포니아 주다. 주 정부는 지난 7월 재정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008회계연도에 260억달러(약 30조원) 규모의 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주 의회는 교육·복지 부문에서 155억달러를 삭감해서 2009회계연도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교사 3만여명이 해고됐다. 이는 수업 부실화로 이어졌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평의회(UCBR)가 지난 19일(현지시간) 내년 등록금을 32%나 올리기로 하면서 학생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인상안이 확정될 경우 현재 7788달러인 연간 등록금이 내년 1월 8373달러, 8월 1만 302달러로 오른다.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UC버클리의 경우 전기를 아끼기 위해 시험기간 중 도서관 24시간 개방제도를 없애고 토요일마다 도서관 문을 닫는다.
 
급증하는 재정적자와 이로 인한 복지·교육여건 악화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에선 증세를 하기가 힘들다는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주민발의 13호’ 때문이다. 1978년 6월 통과된 주민발의 13호는 캘리포니아에서 기본법적 효력을 갖는다. 주민발의 13호 제1조 a항은 “부동산 재산세 최대치는 해당 부동산 현재가격의 1%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매년 재산세 인상률이 2%를 넘을 수 없도록 했으며 향후 주 정부가 세금을 인상시키고자 할 때는 주 의회의 3분의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주택가격이 아무리 올라도 재산세는 크게 늘지 않는다. 가령 10만달러 주택이 10년 뒤 50만달러가 되어도 세금은 20%만 오를 뿐이다. 주택가격의 상승에 견줘볼 때 재산세는 사실상 줄어드는 셈이다. 미국 주정부의 교육재정은 재산세에서 나오기 때문에 주민발의 13호의 규정은 공교육 재정을 위협한다.
 
여기에 1980년대 이후 전력을 민영화하면서 주정부가 전력회사에 주는 보조금이 천문학적 액수로 늘어났다. 이로 인한 재정위기 때문에 민주당 소속 주지사가 탄핵당하고 아널드 슈워제네거 현 주지사가 당선됐지만 근본 해결책은 마련하지 못하고 미봉책에 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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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카스 R 선스타인 지음

1960년대 초 쿠바가 소련의 미사일을 도입하려고 했을 때 미국이 이를 막기 위해 해상봉쇄라는 무모한 정책결정을 내린 사례는 이후 정부 정책결정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사례이다. 이는 집단사고의 폐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며, 이후에 앨리슨(Graham T. Allison)이 쓴 [결정의 에센스](Essence of Decision: Explaining the Cuban Missile Crisis, 1971)에 잘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집단 의사결정이론에서 논의되었던 모형에 정치적 결정을 추가한 것으로 유명하다(합리모형, 조직과정모형, 그리고 정치모형). 
 
사실 더 중요했던 것은 집단사고(group thinking)가 집단 내의 이견이 결여되어 발생했다는 점인데, 정책학에서는 정책결정 모형 자체에 주목했을 뿐, 이견의 건강성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선스타인의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는 이 점에서 앨리슨의 책을 보완하여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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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방부제…그 이름은 ‘No 맨’ (한겨레, 이충신 기자, 2009-11-06 오후 09:10:20)
다수의 폭력 낳는 ‘집단사고’ 고발
편견·통념 뒤집는 이견의 건강성
사회 지키는 ‘딴지’의 중요성 강조
 
 
인간 행동 대부분은 정보와 평판에 따른 사회적 압력의 산물이다. 다른 사람들의 행위와 진술을 통해 전달된 정보와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으려는 보편적 열망 때문이다. 동조는 재판과 같은 사회적 현상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덜 보수적인 판사가 보수적인 두 명의 판사와 함께 판결을 내린다면 그 판사가 보수적인 판결을 내리는 경향은 강화된다. 그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동조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해 이견을 내지 못하게 한다. 사회적 압력은 개인과 조직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은폐, 히틀러에 대한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챌린저호를 발사하겠다는 나사(NASA)의 결정, 1941년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등은 모두 이런 ‘집단사고’의 결과다.
 
동조가 유행처럼 번지면 사회적 쏠림이 일어나고, 더 심해지면 집단 편향성으로 나타난다. 이는 일정한 유행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과장된 사회적 공포, 극단적 견해의 대립, 공황 등을 부른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는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동조 현상의 피해를 지적하고, 이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지은이는 “집단 영향과 그것이 내재하고 있는 유해한 효과를 잘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실마리를 던져 준다”고 주장한다. 집단 간 다툼, 극단주의, 테러, 전쟁, 기업의 실패와 성공, 언론 자유의 중요성과 핵심적 본질, 결사의 자유가 가진 장점과 단점, 법에 대한 순응과 불응, 여론과 헌법 해석 사이의 긴장 관계, 고등교육에서의 적극적 시정 조처를 둘러싼 논란 같은 사례들을 들고 이견의 중요성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기만적인 동조 현상은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쉽게 물리칠 수 없다. 지은이는 “이런 부정의, 억압, 집단폭력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선량한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만약 누군가가 잘못된 관행에 경종을 울리겠다고 집단적 합의에 내포된 모순점들을 밝히고자 한다면 그들은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또 직장을 잃거나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견 없는 사회, 갈등 없는 조직은 없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통념에 자극을 주는 것이 이견이다. 이견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이견을 억압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손실을 낳는다. 억압은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와 인류의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강도질’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다. 만약 이견이 옳다면 억압은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이견이 잘못된 정보라 하더라도, 그 이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켜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히 드러낼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조직이나 국가가 사회적 건강을 유지하려면 이견을 환영하고 개방성을 높여야 한다. 사회가 잘 작동하려면 구성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좀더 활발하게 이견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인의 의견이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과 달라도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미국 오바마 정부 규제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는 지은이는 “잘 작동되는 사회는 이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제도를 갖춰 동조가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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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소리' 참모 있었다면 히틀러는 없었다 (한국, 박광희기자, 2009/11/06 22:15:30)
美 쿠바 침공 실패·나치즘의 집단 망령… 이견 용납 안되는 쏠림이 불행 만들어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카스 R 선스타인 지음ㆍ박지우 등 옮김/후마니타스 발행ㆍ368쪽ㆍ1만5,000원

 
쿠바 침공의 실패와 그것에 대한 후회는 다른 생각을 표출하지 못할 때 한 사회 혹은 한 조직이 얼마나 큰 손해를 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에서 저자인 카스 R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생각이 같은 사회는 위험하고 생각이 다른 사회는 건강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저자가 이견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로 든 것은 투자클럽이다. 투자클럽은 자금을 공동 출자하고 공동 투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수익이 가장 낮은 클럽은 구성원들이 사교적이었다. 공개적인 논쟁을 거의 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만장일치로 처리했다. 반면 수익이 가장 높은 클럽은 구성원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냈고 사교적 관계에 빠지지도 않았다.
 
동조 내지 쏠림 현상은 법원 판결에서도 확인된다. 3명의 판사로 구성된 미국 연방법원 재판부가 1995~2002년 기업가 승소 판결을 내린 비율을 보면 판사 3명이 모두 공화당 지명을 받았을 때는 69%, 2명일 때는 52%, 1명일 때는 44%로 나타났다. 공화당 지명 판사가 모일수록 보수적 판결이 많았고 반대로 민주당 지명 판사가 많을수록 자유주의적 판결을 내리는 경향이 컸다. 이견을 밝히기 어려운 것은 평범한 일반인이나 법적 판단을 내리는 법원이나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견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회는 불행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 사회적 쏠림을 낳고 그 쏠림이 집단편향성을 불러오면 히틀러의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남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다수의 견해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우선 꼽는다. 다수의 그것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대개 인기가 없고 따돌림을 받으며 심지어 사회적으로 위협을 받기도 한다. 게다가 다수 의견에 동조하면 편하게 무임승차할 수도 있다.
 
물론 국가, 기업 등이 굴러가려면 거기에 맞는 시스템이나 논리가 필요하고 동질적 의식이 요구된다. 모든 이견을 다 높이 평가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설령 이견에 문제가 있더라도 이견은 그 자체로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이견 없는 사회 즉 갈등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견과 갈등을 좋은 사회와 좋은 조직의 원리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이 이견을 환영하면 번영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저자는 그래서 이견을 존중하고 장려하기 위한 장치를 일부러라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내부고발자를 환영하고, 잘못된 관행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는 직원을 처벌하지 않으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 보상하겠다고 밝히는 것 등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장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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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자동차의 실패를 기억한다면…" (프레시안, 성현석 기자, 2009-11-07 오전 10:23:36)
[화제의 책]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삼성 그룹이 곧 오너 경영체제로 복귀하리라는 예상이 종종 나온다. 대개는 삼성 관계자들의 희망사항이다. "전문경영인 체제에서는 책임지고 의사결정할 사람이 없다"는 게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다. 이런 주장의 바탕에는 "조직을 이끄는 결정은 최고권력자가 혼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여럿이 모여 토론하는 방식으로는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없다는 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비슷한 생각인 경우가 많다.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 앞에서 옳고 그름을 놓고 따지는 일은 대개 부질없이 끝나곤 한다. 이건희나 박정희와 같은 의사결정방식이 옳지 않다는 점을 입증해도, 이들은 이런 믿음을 고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럿이 모여 토론하는 일이 비효율적이라고 믿는다. 의견이 다양해지면, 조직은 '사공이 많은 배'처럼 돼 버린다는 게다. 이런 믿음이 깨지지 않는 한, 이건희나 박정희와 같은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라는 책이 나왔다. 제목 그대로다. '사공이 많은 배'가 더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운항한다는 내용이다. 이 책에는 이견, 즉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아서 실패한 사례가 가득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CIA가 1961년 추진한 쿠바 피그스 만 침공이다. 쿠바 혁명 지도자 카스트로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지원하려던 이 계획은, 거꾸로 카스트로에게 더 큰 힘을 싣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계획이 실패한 뒤, 당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모들을 탓했다고 한다. 케네디의 참모들은 무능했던 걸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다른 생각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분위기가 문제였다는 게다. 당시 참모들은 대부분 출중한 인재들이었지만, 아무도 피그스 만 침공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지 않았다. 침공 계획에 회의적인 이들이 제법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열린 회의는 실패가 예정된 결정을 내렸다.
 
특정 견해가 세를 불리기 시작하면, 그 방향으로 '쏠림 현상'이 생겨나는 게 한 이유다. 어떤 이들은 정보가 부족해서 남들의 주장에 동조한다. '왠지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속에서 올라와도 그냥 삼키고 만다.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탓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평판' 때문에 '쏠림 현상'의 포로가 된다. 특정 견해가 윤리적으로도 옳다는 믿음은, 선명성 경쟁을 낳는다. 강경한 주장을 낼수록 좋은 평판을 얻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회의적인 목소리를 내기란 쉽지 않다. 이런 주장을 비난하는 게 선명성 경쟁의 한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의적인 목소리를 얼마나 세게 짓밟는지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면, 아예 다른 생각은 싹이 잘려버린다. 케네디 대통령의 참모들은 '온건파'라는 낙인을 두려워 했다.
 
이런 분위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반공 이념이 맹위를 떨치던 시절이 이랬다. 운동권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도 가끔 이런 식이었다. 이건희 전 회장이 자동차 사업에 무모한 투자를 할 때, 삼성 내부 분위기도 비슷했다. 황우석 사태가 한창일 때와도 닮았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군사정부가 철권통치를 하던 때라면, 피그스 만 침공 당시처럼 이념 대립에 따른 냉전이 한창일 때라면, 이견을 무시하는 분위기를 설명하는 게 쉽다. 그러나 이런 시기가 지난 뒤에도 여전히 획일적인 목소리만 나오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책은 투자 클럽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자금을 공동으로 출자하고 주식시장에서 공동으로 투자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어느 투자 클럽은 몹시 사교적이었다. 구성원끼리 자주 만났고 친분이 두터웠다. 그런데 수익률은? 최악이었다.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곳은 사교적 관계가 제한된 모임이었다. 논쟁의 유무가 차이를 갈랐다. 사교적인 모임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른 의견을 냈다가 친분이 깨질 것을 우려한 이들 사이에선 '쏠림 현상'이 생겨났다. 민주적인 사회에서도 획일적인 목소리가 나오는 한 이유가 '친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그렇다면, '친분 쌓기'가 꼭 나쁘기만 한 걸까. 그럴 리는 없다. 다른 생각을 과감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진짜 친한 사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내 생각은 너와 달라"라고 말하길 주저한다. 논쟁을 승부로 여기는 문화 탓이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도전으로 여긴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승자와 패자를 갈라야 한다고 본다. 이러니 친분과 논쟁이 양립하기 어려울 밖에. '사공이 많은 배'를 몰아본 경험이 없는 사회일수록 이런 문화가 두드러진다. 다른 의견과 친분 가운데 하나를 버리기를 강요하면, 대개는 친분을 지키려 든다. 결국 수익률 최악의 투자 클럽 사례는 반복된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히는 과정을 잘 관리하는 일이다. 한 의견이 기각되고 다른 의견이 채택되는 과정이 패배와 승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게다. 그래야만 자존심을 내세워 무턱대고 우겨대는, 소모적인 논쟁을 피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카스 R. 선스타인 미국 하버드대 법학 대학원 교수는 <넛지>의 공저자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올해 여름 휴가 기간에 읽었다는 바로 그 책이다.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해 유독 민감해 하는 이 대통령이 선스타인 교수의 다른 책도 함께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울러 경영복귀설이 나도는 이건희 전 회장에게도. 그가 자동차 사업의 실패를 잊지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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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이견에 귀 기울여라 (서울, 심재억기자, 2009-11-07  18면)
 
사람들은 법치(法治)를 ‘인간이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달리 어떤 경우에도 통치가 법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법 자체가 사람에 의해 운용되며, 법 해석도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를 보자. 모두가 같은 법복을 입고 있지만 어느 정당에서 누가 임명했느냐에 따라 이들의 판결은 크게 달라진다. 당연히 판사 조직에서도 결정의 쏠림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쏠림현상이 집단편향성을 낳고, 이는 사회적 공포의 과장이나 극단적인 견해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이런 사회가 다른 의견을 긍정적인 가치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사회적 이견(異見)에 주목한 새 책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카스 R 선스타인 지음, 박지수·송호창 옮김)가 나왔다.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인 저자는 국가든, 사회든 아니면 기업이나 투자조직 혹은 가정 등 사람의 조직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이견의 가치에 주목한다. 이견을 말하고, 강요를 거부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이런 이견의 관점에서 그는 동조, 다른 사람 따라하기, 복종과 불복종, 무리짓기, 이웃의 생각과 언론의 자유 등 민주주의에서 발현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그렇다고 그가 동조나 (법적 판결에 대한)복종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책이 특히 주목받는 것은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전체주의적 가치 때문이다. ‘총화단결’, ‘국론통일’이 그렇고 ‘모난 놈 정 맞는다.’는 의식이 그렇다. 중요한 것은 이견 없는 사회나 갈등 없는 조직을 만들려 하기보다 이견과 갈등을 좋은 사회, 좋은 조직의 제도적 원리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지금 누구도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보는 대로 말하는 한 소년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외침을 가당찮은 이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처음엔 그 외침이 이견이었고 이단이었지만 이제 그 소리는 진리다. 이렇듯 이견이 항상 ‘턱없는 생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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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다른 의견도 사회 전체에 이롭다 (2009 11/17   위클리경향 850호, 정원식 기자)
 
1961년 4월, 쿠바 혁명 후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 1500여 명이 쿠바 남부 피그스 만을 침공했다. 미국은 이들을 훈련시키고 무기와 물자를 지원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300여 명이 사살되고 1200여 명이 포로가 됐다. 국제적으로 망신살이 뻗친 데다 쿠바와 소련이 더욱 밀착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침공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한 한 관료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계획은 그 어떤 반대도 없이 추진됐다. 단 한 명의 관료라도 반대했다면 케네디가 그 계획을 취소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침묵은 미국의 국익에 해를 끼쳤다. 이처럼 어떤 계획이 실패할 개연성이 명백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별다른 이견이 제출되지 않는 현상은 비단 행정부만이 아니라 모든 수준의 조직과 집단에서 발생한다. 왜 그런 것일까.
 
저자는 ‘동조’라는 키워드를 실마리로 삼아 그 이유를 풀어나간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 가운데 상당수는 집단이 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 달리 말해 사회적 압력의 영향을 받는다. 개인을 사회적 압력의 자기장 안에 묶어 놓는 것은 두 가지 유형의 동조다. 먼저 개인은 다수의 타인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보다 더 많은 정보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에서 타인의 견해에 동조한다. 이를 저자는 ‘정보에 의한 동조’라고 부른다. 다음으로 개인은 같은 집단 내 다른 구성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타인의 견해에 동조한다. ‘평판에 의한 동조’다. 이 두 유형의 동조로 말미암아 개인은 다수의 견해나 지배적인 흐름을 거스르는 견해를 제시하는 일을 꺼리게 된다.
 
동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동조는 사회적 연대를 강화시킨다. 문제는 동조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쏠림 현상과 집단 편향성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드러나는 경우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의 광기가 대표적이다.
 
동조는 일종의 무임승차 행위다. 동조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어떤 것도 보태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의 행위로부터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사회에 필요한 건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정보나 아이디어를 공동체에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득을 준다.”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사회가 절름발이 인식에 사로잡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 주는 방파제 구실을 한다.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따돌림이나 추방 같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견의 허용이 어떤 조직이나 사회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조직과 사회는 이견의 발언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과 직결되는 대목이다.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들은 구성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좀 더 활발하게 이견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이와 같은 노력은 부분적으로는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오히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책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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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예산 대해부 (강원일보, 08-08-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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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예산 대해부>(상)계획과 다른 예산서 (강원일보, 신형철기자, 2008-08-05)
  
최근 10년간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규모는 크게 증가했다. 1995년 47조152억원에서 10년 만인 2004년에는 98조8,924억원으로 두배 이상 늘었다. 정부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04년 161조2,627억원의 61.3%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그만큼 지방자치단체 예산의 중요도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민선 이후 각 지자체마다 선심성 및 정치적인 것을 고려한 예산 편성과 불투명한 회계 등이 거듭되면서 지방 예산에 대한 곱지않은 시각도 늘고 있다. 강원일보는 도내 지자체 예산의 투명성과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문제점과 대안 등을 3회에 걸쳐 싣는다.
 
당초예산-중기계획 수천억원이나 차이
도와 시·군의 예산이 당초 마련한 계획과 다르게 작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강원일보사가 4일 강원도와 춘천 원주 강릉의 2007년 및 2008년 세입·세출 예산과 각 지자체가 작성한 중기지방재정계획을 비교 분석한 결과 당초 계획과 실제 예산이 크게 다른 것으로 조사됐다.
 
중기지방재정계획은 각 지자체가 3∼5년 정도의 기간을 정해 수립하는 수입 및 지출에 관한 재정 계획으로 중장기 관점에서 사업 계획과 재정 계획을 연계시키는 제도이다. 도의 경우 2007∼2011 중기지방재정계획에 따라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매년 4.7%씩 세입과 세출 예산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같은 전망은 당장 지난 2007년부터 어긋났다. 2007년 예산은 2조4,567억2,100만원인 반면 중기지방재정계획은 2조7,651억9,000만원으로 3,084억6,900만원의 차이가 발생했다.
 
2008년에도 차이가 났다. 도의 예산은 2조6,589억9,500만원이지만 중기지방재정계획은 2조9,090억9,300만원으로 2,500억9,800만원의 간격이 있다. 도 예산의 계획적 합리적 운용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무분별한 사업을 지양하기 위해 마련한 중장기 계획이 시작부터 틀어진 것이다.
 
하지만 재정자립도가 22.8%에 불과한 도의 여건과 수시로 바뀌는 정부의 재정정책을 감안한다면 이같은 차이는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도 관계자는 “중기지방재정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정부 보조금과 교부세로 재정을 추진하는 현재 상황에서 일관성을 갖기는 조금 어렵다”며 “도의 경우 지난해 미분양 아파트 속출에 따른 세수 부족의 돌출 현상이 있는 등 각종 변수도 계획에 따라 추진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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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예산 대해부>(중)지자체 재정운용 전국 하위권 (강원일보, 뉴욕=신형철기자, 2008-08-06)
낭비요소 줄이고 견제·감시 강화  
  
민선 이후 자치단체의 예산이 크게 늘었다. 지자체는 각종 사업을 벌이고 주요 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 다양한 문제도 노출되고 있다. 행정전문가들은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매년 상반기 지자체의 재정 운용을 분석, 평가하는 결과서를 내놓고 있다. 지자체 재정 운용의 문제점을 파악한 뒤 개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지자체는 각종 사업이 공약에 따른 것이고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며 이 같은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지자체는 예산 투입에 따른 효율성보다 중장기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평창 정선 화천 인제 제외 재정 평가 하위권
각종 사업 추진 ‘시작하고 본다’ 의식 팽배
도 관계자 “주민들 의지 반영 위해 불가피”

 
■ 도내 지자체 재정운용 바닥
행정안전부가 올 초 발표한 2007 지방재정분석에 따르면 도는 제주도를 제외한 8개 광역도 중 충북과 함께 하위인 C등급을 받았다. 지방재정분석은 지자체의 결산자료와 세입과 세출의 30여개 지표를 기준으로 재정을 평가하는 것으로 가장 높은 A부터 가장 낮은 E까지 5등급으로 나뉜다.
 
시·군중에는 정선 화천이 A등급, 평창 인제가 B등급에 각각 올랐다. 반면 강릉 삼척 철원 양구는 C등급, 원주 태백 횡성 영월은 D등급, 춘천 동해 속초 홍천 고성 양양 등은 E등급에 그쳤다. 문제는 수직 상승한 화천 평창을 제외하고는 도내 지자체 순위가 전년도와 거의 비슷하다는데 있다. 그나마 화천 평창이 2006년 각각 D, E 등급에서 A, B 등급으로 크게 상승한 점은 주목할만 하다.
 
재정의 효율적 운용이 가능한 것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도 관계자는 “작고 한정된 예산을 여러 부문에 쪼개서 활용하다 보면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다”며 “각 지표 중 지방세수 안정도와 경상세외수입 안정도 등 일부 부문에서는 도내 지자체들의 효율이 높다”고 강조했다.
 
2007 지방재정분석에 참여했던 박기관 상지대 행정학부 교수는 “지방세 징수율 증감률과 경상징수율 증감률 등 일부 지표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이 도내 지자체의 좋지 않은 성적의 이유로 보인다”며 “안정적 재정운용을 위해 주민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적정한 지방세를 확보하고 재정운용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의욕 앞서는 지자체
국내 대부분 지자체들은 각종 사업을 추진하면서 ‘일단 시작하고 본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당장 충분한 예산을 받기는 힘들지만 국회와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기만 하면 언젠가는 사업 추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각 지자체들은 정부가 매년 상·하반기 실시하는 투·융자 심사에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도내 지자체의 중앙정부 투·융자사업 심사 통과율은 높지 않다. 지난해 상·하반기 모두 32건 1조6,993억원의 심사 중 적정 판정은 13건에 불과하고 조건부 17건, 재검토 2건 등이었다. 2006년에는 27건 중 적정이 7건에 그쳤고 조건부 13건, 재검토 7건, 2005년에는 21건 중 적정은 8건, 나머지 13건은 조건부였다.
 
이유 중 상당수는 국비지원 계획 및 재원확보 후 추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도내 지자체들은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 개발을 위해 부득이하게 투·융자 심사에 주력한다는 입장이다. 당장 투·융자 심사에 명단을 올려야만 중기지방재정계획에 개발안을 포함시킬 수 있고, 이는 향후 지역 개발과 국비 요구의 명분이 된다는 주장이다. 도 관계자는 “지자체들은 투·융자 심사 결과와 상관없이 해당 사업을 지자체의 미래 계획에 포함시킨다”며 “이에 따라 중기지방재정계획의 예산이 다소 늘어나 실제 예산과 차이가 발생할 수 있지만 주민의 의지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지자체들이 이 같이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 예산은 주민의 것, 감시가 필요
같은 주민을 위한 것이지만 미국의 방식은 국내와는 사뭇 다르다. 미국 연방정부 및 주정부와 상·하원의원들의 정치적 행보도 있지만 미의회 및 지자체 감사 기구가 주민을 위해 감시자로 나서고 있다. 이들 감시자는 개발도 주민을 위한 것이지만 세금의 적정한 운용을 살피는 것도 주민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미의회는 정부의 예산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의회 예산처(Congressional Budget Office)를 따로 두고 있다. 연방정부가 추진하는 예산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견제의 역할을 하는 기구다. 의회 예산처의 목표는 주민의 세금으로 짜여지는 예산의 낭비를 줄이고 효율성을 갖추는 것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부 예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자체 중 뉴욕시의 독립예산기구(New York City Independent Budget Office)는 독특하다. 뉴욕시장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1996년 도입된 기구로 시 행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돼 시 재정을 감시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시가 재정 확충을 위해 세금이나 각종 공공요금을 올릴 경우 이유가 타당한지를 분석한 뒤, 그 자료를 시의회와 언론, 시민단체에 통보해 지자체를 견제하고 있다. 더그 투렛스키 뉴욕시 독립예산기구 사무국장은 “시가 공정하게 예산을 어디에 써야 할지를 분석하는 것이 주요 업무”라며 “선거를 의식한 선심성 행정이 이뤄지지 않도록 공정한 분석과 의견 개진에 주력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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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예산 대해부>(하) 재정운용 주민참여 확대해야 (강원일보, 뉴욕=신형철기자, 2008-08-07)
설계부터 결정까지 주민 참여가 목적 
 
최근 자치단체의 예산 계획 수립부터 주민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가 2006년 주민참여예산제 조례안 시안을 발표한 뒤 도를 비롯 각 지자체별로 주민참여예산제 정착을 위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도와 시·군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 정선과 평창 등에서는 지난해 조례를 제정했다. 하지만 주민참여예산제에 대한 세부 방식에 지자체와 시민·사회단체 등이 이견을 보여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민단체 지역별 주민교육 관련 조례안 제정 주장
도 “주민 참여 시대적 흐름 적정 시스템 도입 계획”
예산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 개진 절차 마련이 우선

 
■주민에게 더 많은 권한을
도내 시민·사회단체들은 시·군별로 위원을 두고 지역별 논의기구 및 제도를 마련, 주민 교육을 병행하는 내용을 주민참여예산제 조례안에 담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방식은 주민참여예산제를 가장 먼저 도입해 성공적으로 운영한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레시와 유사한 것이다.
 
포르투알레그레시는 1989년 주민참여예산제를 도입, 1996년 유엔으로부터 세계 40대 훌륭한 시민제도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복규 강릉경실련사무국장은 “예산의 설계부터 최종 결정까지 주민이 참여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도 조례와 시·군 조례를 함께 검토해 주민이 예산을 포괄적으로 운용하는 방안도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주민참여 서서히
도는 예산 편성을 위해 별도의 위원을 둘 경우 시·군 및 광역의원과의 충돌이 발생할 수 있고, 위원회에 참여하는 주민 범위도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서서히 진행한다는 입장으로 내년 예산의 경우 주민의견 수렴 설문조사를 마쳤다. 또 지방의원과 학계, 시민·사회단체 등이 참여하는 주요 7개 분야별 예산정책 토론회를 다음 달에 열어 내년 예산 정책을 위한 의견을 듣는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가장 큰 고민은 지역 실정에 맞는 주민참여형예산제에 대한 자료가 절대 부족하다는 점이다. 도 관계자는 “주민의 예산 참여는 시대적 흐름으로 주민의 요구와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우선 운영하고 있다”며 “여러 가지 방식을 실시한 뒤 적정한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이라고 했다.
 
■모든 주민에게 오픈된 참여제
미국의 주민 참여 방식은 브라질과는 다소 다르다. 연방정부는 예산안을 마련할 때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친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자리에 참석, 예산과 관련된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며 연방정부는 필요한 내용을 정책에 반영하는 형식이다.
 
예산의 투명성을 확대하기 위해 구성된 단체인 뉴욕의 국제예산기구(International Budget Project) 하리카 마수트씨는 “여러 다른 단체가 자유롭게 예산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며 “시민·사회단체는 제안된 의견이 예산에 반영됐는지를 확인하고, 그렇지 않았을 경우 언론 등을 통해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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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 반대한다-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알피 콘 지음·이영노 옮김/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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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인간 본성? 생존엔 협력이 적합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2009-10-21 16:27)
'경쟁에 반대한다' 번역, 출간
 
인간은 늘 경쟁을 하며 산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자연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므로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경쟁심 역시 자연스러운 본능이자 본성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미국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은 '경쟁에 반대한다'(산눈 펴냄)에서 경쟁심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는 것은 경쟁을 부추기려는 사람들의 핑계일 뿐이지 사실 경쟁심은 오로지 학습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다윈 역시 '생존 투쟁'이란 용어를 다른 생물에 의존하는 것을 포함해 아주 폭넓고 비유적인 뜻으로 사용했다"면서 '자연선택'에서 생존이란 후손을 볼 정도로 환경에 잘 적응하는지가 문제이지 치열한 경쟁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쟁심이 인간 본성이 아니라면 답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학습'이다. 인간은 집에서부터 유치원, 학교, 직장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경쟁하며 자란다. 아주 작은 문제 풀이 하나를 놓고도 다른 사람에 대한 열등감과 우월감에 빠지게 되므로 경쟁 심리는 마음속에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나간다.
 
한국인들은 흔히 국내 학교가 유독 경쟁이 심하며 선진국은 덜한다고 생각하나 이 책에 제시된 사례들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저자는 최근 미국에서도 "더 좋은 유아원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위해 젖먹이에게도 준비학습이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했다"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이미 1등에 대한 압박은 새로울 것도 없고 경쟁이 체계화, 수치화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경쟁이 생존과 관계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치'라고도 말한다. 원시적인 삶에 좀 더 가까운 부족들의 생활 방식을 보면 자연과 생사를 건 투쟁을 할지는 몰라도 사회적 투쟁이라는 '사치'는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쟁을 둘러싼 또 하나의 오해는 경쟁이란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남을 누르려고 애쓰는 것'이 다른 차원이라는 점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예술가들이 경쟁을 중시하면 무대 위에서 탁월한 예술성보다 얄팍한 기술력을 강조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결과가 생기며, 경쟁심은 공장에서 품질을 높이는 역할보다 안정성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경쟁심이 적당한 자극을 넘어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되면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인간을 경쟁 사회로 몰아넣는 '희소성의 가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저자는 희소성이라는 개념도, 경쟁에서 이겼을 때 얻는 보상도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가치일 뿐이지 실재하는 가치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제목 그대로 '경쟁에 반대(원제 No Contest)'하는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협력'이다. 자연으로 돌아가 보면, 각 개체가 서로 싸우기보다 힘을 합치는 편이 오히려 생존율을 높여준다. 학교와 직장에서도 협력은 개개인에게 자신감과 자존심을 높이며,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낸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나 독자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의문이 떠오를 법하다. 이미 이 사회가 경쟁 시스템을 갖춰 놓았는데 경쟁을 포기한다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겠는가.
 
교육심리학자인 저자는 이에 대한 답변을 교육으로 돌린다. "우리가 두 가지 노력을 동시에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아이들에게 사회에 나가서 맞닥뜨릴 일을 준비시키는 동시에, 그 일들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이미 승패의 구조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경쟁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핵심인 경쟁에 대한 더 넓은 안목과 협력적 제도의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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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숭배’ 사회에 구역질을 허하라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9-10-23 오후 07:45:52)
경쟁이 인간본성이라는 ‘거짓 신화’ 해부
‘기득권 재생산’ 합리화 모순구조 한눈에

〈경쟁에 반대한다-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알피 콘 지음·이영노 옮김/산눈·1만5000원/368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도 하는데 미국이 못할 게 뭐 있겠느냐고 했다는 몇 가지 얘기들 가운데 교육문제도 들어 있었다. 그는 한국 학생들의 긴 학과공부시간을 부러워했다는데, 그게 마치 한국 학교교육의 우수성을 검증받기라도 한 양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유포했다. 그가 유독 한국과만 그런 비교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미국 교육체제를 거침없이 비판해온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의 <경쟁에 반대한다>(산눈)를 보면 납득이 가는 구석이 있다. 콘은 미국 학교교육의 근본문제는 책 제목부터 그렇듯이 바로 경쟁제일주의라 지적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동원한 많은 구체적 사실과 비판논리들, 문제의식은 뜻밖에도 한국 교육에 그대로 적용해도 별문제가 없을 정도인데, 그것은 말하자면 한국교육이 그만큼 철저히 미국화돼 있다는 또 하나의 방증이겠다.
 
오바마 대통령이 하필 한국 교육을 거론한 것은 아마도 그게 미국 교육의 판박이여서 단순 평면비교가 가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두 나라 경쟁 위주 교육이 질적으로 큰 편차가 없다면 미국 교육이 한국 교육에 뒤지는 것은 양적 결손, 곧 연간 학업시간이 미국 쪽이 한국보다 월등 짧다는 것이고, 그래서 한국만큼 학교공부 시간과 과목 수만 늘리면 문제는 해결된다는 식의 결론이라도 혹시 내린 게 아닐까. 만에 하나 그랬다면 오바마는 번지수를 영 잘못 짚었다. 미국 교육이 망가진 근본원인은 바로 경쟁제일주의 때문이라는 게 알피 콘의 생각이다. 따라서 콘의 분석이 옳다면, 한국 교육도 조만간 미국 교육의 실패를 뒤따를 가능성이 높다.
 
<경쟁에 반대한다>에 따르면, 경쟁제일주의는 “너무나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근거 없는 “네 개의 신화”를 토대로 삼고 있다. 첫째는 경쟁이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라는 것, 둘째는 경쟁이야말로 우리가 최선을 다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경쟁이 없으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 그리고 셋째는 경쟁하는 게 재미난 삶을 꾸리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 마지막 신화는 경쟁이 인격을 형성하고 자신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기득권 유지에 집착하는 보수세력이 대체로 이런 신화를 열렬히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른바 진보세력조차 과도하고 불공정한 경쟁이 문제지 ‘적당한 균형’만 잡을 수 있다면 경쟁은 생산적이고 즐겁고 활기찬 것이라고 여긴다면서, 그게 아니라고 콘은 말한다. “경쟁의 문제는 경쟁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 연구를 통해 확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콘에 따르면 경쟁이 필연이라는 주장은 검증된 적이 없다. 오히려 인간사회에서 협력은 필수적이며, 경쟁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입·학습되고 사회화된 현상이며 경쟁심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문화적 규범이라는 것이다. 인간세계를 포함한 다양한 자연의 재생산은 투쟁보다는 대부분 평화적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고 콘은 지적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이나 동아시아 민족들과 비교하더라도 경쟁제일주의는 서구문명에 특이한 현상이며 특히 미국에서 과도하다.
 
경쟁이 생산적이라는 신화에 대해서도 협력이 오히려 더 생산적인 현실의 다양한 사례들로 반박한다. 경쟁은 왜 실패하는가? 콘은 존 놀스의 소설 <갈라진 평화>에 등장하는, 볼테르의 <캉디드>를 읽고 빠져들어 볼테르의 다른 저작들을 섭렵한 체트 더글러스와 오로지 1등을 하기 위해 성적 내기에 필요한 것들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댄 주인공 ‘나’를 대비시킨다. 그는 “학생들에게 여러 과목을 학습시키는 이유는 그들의 인생을 돕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그 자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며 성적 따기 경쟁은 공부의 내적 동기 및 정말 꼭 배워야 할 무엇인가를 배제해버린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학생들에게 하찮고 경멸스러운 보상들-‘참 잘했어요’라는 도장, 100점이라는 표시를 한 채 벽에 붙어 있는 시험지, A라고 쓴 성적표, 우등생 명단,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클럽의 열쇠, 곧 간단히 말하면 다른 학생들보다 내가 좀 낫다는 저열한 만족감-을 장려하고 강요하는 것으로 아이들의 그 의지를 꺾어버린다.”(<아이들은 어떻게 실패하나> 존 홀트) 나의 승리와 기쁨은 남의 실패와 비참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고, 오로지 상대를 꺼꾸러뜨려야만 내가 이기는 제로섬 게임인 경쟁은 우주론적으로 보면 허상에 가까운 개별적 자아의 절대성에 모든 걸 기대고 있다.
 
또 그는 경쟁하지 않는 놀이가 더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 경쟁에 기초한 스포츠가 현실의 지배구조와 관료화된 사회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사회화 구실을 하며, 경쟁 없는 게임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런 사회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파헤친다. 그리고 경쟁은 자존심과 인격을 키우는 게 아니라 파괴하며, 경쟁에서의 패배는 실패일 순 있어도 나쁜 일은 아니라는 그럴듯한 얘기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경쟁은 결과 지향성, 양자택일의 흑백논리, 순응적 태도와 획일성을 낳는다. 그 결과 경쟁사회의 탈락자조차 문제의 해결책을 그런 사회를 거부하고 바꾸는 데서 찾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타자들을 패배시키고 자신이 올라서겠다는 불가능한 환상에서 찾고 자신의 실패 원인을 자신의 무능과 불운 탓으로 돌린다. 불공정한 계급재생산 구조는 그렇게 해서 완성된다. 이를 반기며 기뻐할 사람들은 그 구조 덕에 권력과 힘을 영속시킬 수 있는 기득권층이다.
 
전국 일제고사와 수능성적으로 성적순 줄세우기를 하고, 그 상위에 자신들의 자식들을 줄 세우기 위해 특목고를 만들고 위장전입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른바 ‘사회 지도층’의 비열함, 도덕적 저열성이 기득권(계급) 재생산을 겨냥한 것이고, 경쟁제일주의가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수단이 되는 한국사회 모순구조가 알피 콘을 읽으면 한결 명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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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 콘의 제안 “경쟁교육 대신 협력학습”
적극적 상호의존 통해 공동의 목표 갖는 공부법

 
“이젠 병원, 학교, 기업, 그리고 정부도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이는 타인을 이기는 것과 일을 잘하는 것을 전혀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경쟁에 대한 개념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경쟁력을 강화하면 어떤 일을 탁월하게 잘할 수 있느냐고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의 학교는 이제 너무 경쟁적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알피 콘은 <경쟁에 반대한다> 1992년판(초판은 1986년)에 자신의 책 <경쟁 대 탁월성>(Competition vs Excellence)에서 따온 이 구절을 인용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동안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사회 모든 분야에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얘기도 결국 미국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로널드 레이건 정부 이래 30년 가까이 계속된 공화당 주도 신자유주의 정책하의 미국 역대 정부(1990년대 8년간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이 이어졌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한 점에선 공화당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경쟁 제일주의 교육이 재앙을 부를 것이라는 콘의 경고를 무시했고, 이제 무참하게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교육과 비교하며 미국 교육의 실패를 거론한 것이 관심을 끄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오바마는 자신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교육이 경쟁제일주의의 미국제 교육이념을 직수입해 약간 손질한 것이라는 것, 이대로 가면 한국 교육도 결국 미국의 실패를 뒤따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콘이 경쟁제일주의 교육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협력학습’이다. 협력학습이란 “학생들이 짝을 이루거나 작은 그룹을 만들고, 적극적인 상호의존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갖고 함께 공부하는 것”이다. 잠시의 학습 분위기 전환이나 그룹 간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기존 그룹별 수업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협력학습은 그룹 내, 그룹 간 경쟁요소는 배제했으며 잘잘못에 대한 보상과 벌도 없는 완전자율 학습구조다. 단답식 정답을 요구하지도 않고 일치된 의견이나 동의를 구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함께 배우고 경쟁하지 않으면서 구성원의 자존심과 상호의존·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높이고 학업 성취도도 높이는 방법이다.
 
콘은 아이들이 외적 보상 등의 유인 요소가 있을 때만 협력할 것이라는 추정은 인간 본성에 대한 매우 냉소적인 견해라며 배격한다. 제대로 된 환경에서는 남을 돌보는 것이 자신을 돌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쟁제일주의는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구조가 낳은 것이자 그 구조를 확대재생산하는 장치인 셈이다.
 
콘은 여러 연구 결과들을 분석해 협력학습이 경쟁에 의존하는 기존 표준학습방식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낳은 케이스가 수백 건의 검토 사례의 87%에 이른다는 실증자료들도 제시했다. 그는 협력학습을 경쟁문화와 개인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또 교사의 교실 통제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교사들, 그리고 훌륭한 인격체보다는 표준시험지 답안지를 잘 작성하는 학생을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는 그들의 불안감이 협력학습 도입을 막는 견고한 장애물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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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여는 책]‘경쟁에 반대한다’ (내일, 박상주 칼럼니스트, 2009-10-30 오후 12:38:18)
경쟁보다 협력이 낫다
이기기 위한 경주에 낭비하는 삶의 질곡 지적

 
경쟁에 목숨을 거는 사회다. 영어 조기교육 경쟁은 초등학교에서 유치원, 유아 단계를 넘어 서더니 이젠 태아에게 영어교육을 시키는 단계로까지 돌입했다. 뱃속의 아이들에게 영어 동요와 이야기 테이프를 틀어준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어린이들에게 미국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가르치고, 유치원 아이들에게 원어민 회화수업을 시킨다는 소리를 들은 게 엊그제인데, 영어 태교까지 나갔다면 다소 이성을 잃은 단계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자꾸 든다. 초등학교 때부터 국제중학이다 외국어고다 입시준비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고등학교는 소수점 이하까지 계산된 점수대로 서열이 매겨져 신문에 발표된다.
 
아이들만 경쟁에 시달리는 게 아니다. 직장에 다니는 부모들은 승진 경쟁과 구조조정에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해야 한다. 동료를 밟아야 내가 살 수 있는 사회구조다. 토마스 홉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한민국은 ‘만인의 만인에 투쟁’으로 치닫고 있다. 태아 때부터 경쟁을 강요받기 시작한 이 땅의 인생들은 죽을 때까지 경쟁으로 시들고 진이 빠진다. 이처럼 경쟁 속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우리사회에 누군가 화들짝 정신을 들게 하는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
 
미국의 교육심리학자인 알피 콘의 저작인 ‘경쟁에 반대한다’(산눈 출판사)라는 책이 던지는 도발적 질문이다. 한마디로 경쟁은 백해무익하므로 한시바삐 지구에서 몰아내야한다는 게 책의 요지다. 경쟁은 학교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는 데나, 공장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나, 연구소의 연구 실적을 높이는 데나 어디에서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인 것이다. 심지어 ‘건전한 경쟁’ 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순이라는 확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성취와 경쟁과의 연관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한정된 자원이 경쟁을 유발한다는 주장 역시 근거 없는 허구라고 주장한다.
 
“한 사회 안에서 경쟁심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문화적 규범이지 자원의 풍족함이나 부족함에 의한 것은 아니다. 미드가 말했듯이 사회 구성원이 경쟁하여 획득할 것이냐, 협력하여 나눌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그 필요한 재화의 실제 공급량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개인간의 경쟁이나 협력 중 무엇을 더 강화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59쪽)
 
책은 이미 경쟁 이데올로기 속에 깊숙이 세뇌된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다. 책은 묻는다. ‘경쟁은 필연적인가? 그것은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것인가?’ 책은 인간이 경쟁의 속성을 본능적으로 타고난다는 주장은 허구라고 일축한다. 인간은 이기려는 동기나 경쟁하려는 성향을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 경쟁을 학습한다는 것이다.
 
책은 또한 ‘경쟁이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무너트린다. 경쟁은 생산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헬름라이히는 또 다시 두 건의 연구를 진행했는데, 하나는 남성 기업인에 대해 그들의 연봉으로 성취도를 측정했고. 또 하나는 1300명의 남녀 대학생에 대해 그들의 평균 학점으로 성취도를 측정하였다. 그 결과 경쟁심과 성취도 사이에는 서로 부정적인 연관관계가 조재한다는 것을 알아냈다.”(77쪽)
 
헬름라이히는 특히 이 실험을 통해 “보통 성공적인 기업인은 매우 경쟁적이다”라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기업가로 성공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로서 경쟁심을 꼽는 것은 편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책은 경쟁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협력을 제시한다. 생산성을 높이고 성취감을 얻는 데 경쟁보다는 협력이 훨씬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서로 힘을 합쳐 페인트를 칠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요리를 하면서 격려와 배려, 의사소통, 신뢰 등 긍정적인 상호관계가 형성되면서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경쟁과 비교하여 협력체제에서 보상의 분배는 개인과 집단의 생산성, 개인의 학습능력, 인간관계, 자존심, 일을 대하는 태도, 타인에 대한 책임감, 등에 더 좋은 영향을 미친다. (…)일반화된 사회적 관념과는 맞지 않지만, 충분히 연구된, 믿을 만한 결과이다.”(235~236쪽)
 
그렇다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경쟁을 몰아내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책은 구조적 경쟁을 협력으로 바꾸는 데에는 집단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집단적인 행동을 위해서는 교육과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경쟁의 폐해를 확실히 인식하고, 이를 생산적인 협력 구조로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개인 인식의 변화, 그리고 그것을 통한 집단적인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교육을 줄이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정치인들과 교육당국 관계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갈수록 학생들을 무한경쟁 속으로 몰아넣는 방향으로 교육제도는 바꾸면서 사교육을 잡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야말로 병 주고 약주는 이율배반적 행위다. 학생들을 경쟁으로 몰아넣는 점수 줄 세우기 교육을 중단한다면 사교육 광풍은 금방 수그러들 것이다. 그 피 말리는 경쟁을 조금만이라도 누그러트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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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한겨레 2009.10.30 제783호, 구둘래 기자)
[출판] ‘소거법’으로 경쟁의 필요성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경쟁에 반대한다> 
 
교육심리학자인 알피 콘은 지난 10년 동안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 붙잡고 경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결론은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경쟁 완화’라는 당위적 주장일까? 그는 아예 경쟁이라는 물건이 쓸모없다고 말한다. 물고기가 물이 없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듯이, 인간도 단지 ‘경쟁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할 뿐이다. 저자는 ‘소거법’으로 경쟁에 대한 무의식적·의식적 동의를 제거해나간다.
 
먼저 경쟁이란 인간의 본성인가? 수많은 문헌에서 당연시하는 말이지만 경쟁을 본성에서 나왔다고 ‘증명’하는(혹은 증명할 수 있는) 과학 논문은 없다. 일부 사회생물학자는 ‘자연선택’을 ‘적자생존’으로 번안했는데, 이 용어는 다윈이 아니라 스펜서가 사용했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경쟁을 요구하는 진화란 없다고 말한다. “성공을 더 많은 자손을 남기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 목표는 상호부조와 공생을 포함하는 다양한 전략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쟁은 교육현장에서 필수적일까? 마거릿 플리퍼드의 초등학교 5학년 어휘력 학습, 모턴 골드먼의 철자 바꾸기 게임, 어바이네 워키의 카드놀이 연구 등에서 나온 결론은 이렇다. ‘경쟁보다 협력할 때 더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비슷한 122건의 연구 중 이와 같은 결론은 65건, 반대는 8건, 차이가 없다는 36건이었다.
 
그래도 자본주의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경쟁’인데? 경제제도의 경쟁은 희소성의 원칙에서 나왔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유일한 필수품이란 거의 없다.”(에이미 페피톤) 수요·공급 곡선은 ‘완전경쟁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일 뿐이다. 실물경제에서 실제로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는데, 진보학자조차도 ‘불공정 경쟁’만을 문제 삼을 뿐 엉터리 ‘경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포츠는? 승리의 짜릿한 전율이 없다면 무슨 재미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도전과 경쟁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된다.” 오락 활동 요소를 분석하면 대부분이 경쟁과는 관련이 없다. 말하자면, 어제 한국시리즈를 본 뒤 응원하는 팀이 이겨서 기뻐 술을 마신 사람은? 져도 술 마실 사람들이다.
 
‘미쿡 사람’인 저자는 미국이 유난히 더 경쟁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일화를 전한다. 미국인 교사가 영국 초등학교를 방문해 물었다. “이 중 누가 가장 영리하지?” 아이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학습장의 ‘잘했어요’ 도장, 칠판에 나가 문제를 못 풀고 있는 아이 뒤통수에서 “저요, 저요!”라고 외치게 만드는 환경이 “모두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라고 묻는 아이를 바꿔놓는다. 이 미국인 교사가 한국에 와서 물었다면 질문을 받은 아이는 “쟤가 1등이고요, 저는 23등입니다”라고 답했을지도 모른다.
 
경쟁이란 군중 속에서 까치발을 드는 것이다. 한 명이 들기 시작하면 모두 까치발을 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경쟁이란 어디에 쓰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없애야 할 물건이다. “무엇인가 필연적이라는 주장들(특히 인간 본성과 같이)은 전형적으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다.” 현상을 유지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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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체제/찰스 린드블롬 지음/한상석 옮김/후마니타스/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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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 시장체제 위한 ‘뚝심 제안’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09-04-17 오후 09:53:29)
〈시장 체제〉
 
찰스 린드블롬은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를 쓴 로버트 달과 함께 예일대 정치학과의 양대 기둥을 이루는 사람이다. 경제학과 정치학을 동시에 깊이 공부한 린드블롬은 경제학을 가르치는 정치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시장 체제>는 그가 85살 되던 2001년에 펴낸 책이다. 그의 대표작 <정치와 시장>의 문제의식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 이 책이다.

그의 발상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시장지상주의자들은 그를 시장부정론자로 몰아붙였고 급진 탈시장주의자들은 그를 시장논리에 갇힌 자라고 비판했다. 이런 반발에 대해 그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밀고 나가는데, 그런 뚝심의 근거가 되는 것이 시장과 시장 체제를 구분하는 유력한 논법이다. 그는 시장이란 어디서든 나타난다고 말한다. 시장을 사악한 것으로 보았던 마오쩌둥 시기의 중국이나 공산주의 시기 소련에서도 ‘암시장’ 형태로 시장이 번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장을 시장 체제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여기서 린드블롬의 논리가 확연해진다. 시장 체제는 거래 활동을 사회 전체 차원에서 조율하는 체제를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시장 체제가 국가를 파트너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국가는 시장 체제의 최대 구매자이자 최대 통제자이다. 국가의 개입과 통제는 시장 체제 작동의 내적 요인이다. 린드블롬은 시장 체제와 민주주의가 서로 경쟁관계에 있음을 인정한다. “시장은 자유의 동지이기도 하지만 자유의 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시장 체제를 조율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한상석 옮김/후마니타스·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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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 설킨 시장…경제를 넘어 사회현상 지배 (세계, 이덕재 고려대 경제연구소 연구교수, 2009.04.24 (금) 18:17)
시장체제/찰스 린드블롬 지음/한상석 옮김/후마니타스/1만5000원
 
린드블롬은 ‘시장’이라는 협소한 정의를 넘어 하나의 사회적 조정체계로서 ‘시장체제(the market system)’를 설명하면서 지속적으로 “경제는 잊고, 사회를 생각하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현재의 세계적 위기 국면에서 소개된 그의 ‘시장체제’는 더할 나위 없이 시의적절하다. 왜냐하면 이번에 위기의 주범은 정확히 ‘시장’ 그 자체로서 시장이 곧 경제라는 사고의 오류를 폭로하고 시장의 ‘사회성’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시장체제-시장체제란 무엇이고 어떻게 움직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기존의 시장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시장의 지지자든 철폐론자든-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밀라노의 수입업자 사무실에서 연필을 물고 있는 회계담당자를 생각해보자. 연필제공에 100명, 연필 끝의 지우개 제작에 100명, 연필공장 건설에 100명, 전력생산 및 송전에 1000명 이상, 송전용 금속전선 제작에 1000명 이상, 끝으로 광석채굴·정련·용해 및 운반에 수천 명이 각각 참여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없다. 연쇄는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시장체제는 복잡한 사회적 협력의 연쇄과정에 다름 아니며 실제 경쟁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시장을 경쟁으로 동일시하는 견해가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이다. 반면, 불타는 적대감으로 시장의 장점, 즉 사회적 협력과 평화유지능력을 보지 못하는 시장체제 비판 역시 이데올로기적이다. 린드블롬이 이념적 논쟁을 벗어나 냉정하게 “시장체제라고 불리는 사회조직의 전체적인 구조”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이유이다.
 
주로 “전통적 관습과 정치적 권위”에 의존했던 사회적 조정원리가 시장체제로 대체된 것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부터다. 시장체제의 작동에 필요한 핵심요소는 근대사회의 주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자유권, 재산권, 응분보상원칙, 화폐, 판매를 위한 생산, 중개인, 기업가와 법인기업 그리고 국가 등과 관련된 문제들이 그것인데, 이 책 1부의 주요 내용들이다.
 
2부에서는 시장체제의 핵심쟁점들을 다룬다. 작동원리로서 시장에 기여한 만큼 얻어간다는 ‘응분보상원칙’의 의미, 효율성 및 비효율성의 문제들,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문제 등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정치학과 경제학을 함께 전공한 저자의 박식함과 균형감이 돋보이는 이 책의 정수 부분을 이룬다.
 
현재 구조적 위기와 관련, 당장 관심을 갖게 하는 마지막 부분 3부의 ‘대안들’은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전체 19개 장에서 2개의 장에 그쳐 양적으로도 작은 비중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제시된 대안이 철저하게 시장체제의 기능강화에서 찾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를 사회적 조정체계의 위기로 본다면 함의는 깊어진다. 린드블롬에게 민주주의는 “살아 있고 상처받고 열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권리와 권력”인데 사회적 조정체계의 위기는 결국 민주주의의 위기이고 나아가 결국 사회의 위기에 다름 아니다. 결론 부분이 “사회를 생각하고 경제를 잊어라!”로 매듭지어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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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체제》市場, 받들 것인가 활용할 것인가 (이코노믹 리뷰, 아시아경제신문 박소연 기자, 2009년 04월 27일 20시 19분)
 
시장체제는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방식임이 분명하다. 시장 사회에 빈곤으로 허덕이는 계층이 많지만, 일반 대중들이 가장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리는 곳은 시장 사회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든 목표는 경제 살리기, 순수한 시장경제의 회복과 작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회를 조율하고 보호하기 위해 시장체제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시장체제와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가 활용되고 있는 형국이다.
 
새 책 《시장체제》는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위해 시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 책은, 시장이 결정하는 사회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위해 시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일관된 관점에서 작성되었다. “시장체제의 경계를 이해하려면 시장체제는 경제라는 이름의 특정 활동으로 국한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장체제의 범위는 경제활동이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다. 이것이 사회를 생각하고 경제는 생각하지 말라고 한 이유다.” 저자의 이 같은 말은 저자가 이 책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시장주의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그야말로 불경스럽기 짝이 없다. 시장체제란 인간이 관습과 법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피조물이며 시장체제에 어떤 범위와 역할을 맡길 것인지는 사회가 결정할 일이라는 지은이의 관점은 시장 근본주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은 반시장주의적 급진파나 시장체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혁명주의자들에게도 매우 불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은 시장체제의 장점을 단호하게 인정하고 있으며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경제체제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시장체제나 그 유사한 어떤 것이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놀라운 성취에 대해 누구보다 더 강렬하게 찬사를 보냈지만 자본주의를 넘어선 혁명적 대안을 추구했던 마르크스와 달리, 지은이는 시장체제의 장점으로 인간과 사회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지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 범위는 실로 방대하다. 바로 생각나는 대로만 적어도 금방 수십 개를 나열할 수 있다. 시장체제란 무엇인가. 시장과 시장체제는 어떻게 다른가. 시장체제는 경제적 번영을 가져오는가 아니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가. 시장체제와 민주주의 사이의 상관성은 어떤가. 시장체제는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가. 시장체제가 효율적이라는 주장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사실이 아닌가. 시장체제는 인격과 문화를 타락시키고 환경을 오염시키는가. 국가와 시장체제는 대립적인가. 기업은 시장체제적 요소인가 아닌가. 시장체제와 계획은 양립할 수 없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안적 시장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시장체제 없는 사회는 가능한가. 우리는 대체 시장체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이 책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과 설명을 따라 읽다 보면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얼마나 많은 혼란과 왜곡, 비논리와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를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시장체제를 둘러싼 잘못된 신화와 상식을 해체하는 데 이 책만큼 강력한 논증은 없어 보인다. 이 책은 결코 간단한 책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증을 통해 지은이가 일관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장체제를 만든 것도 인간이고 시장체제를 움직이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시장체제냐 아니냐의 투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이냐를 둘러싼 투쟁이다. 이를 통해 좀 더 인간적이고 공동체적인 선택을 확대해 가는 것이 중요하며 그런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시장체제를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책은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말한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을 의식하지 못하고 우리는 대기를 의식하지 못한다. 이미 상식처럼 믿고 있는 명제들도 새삼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책은 말한다. 저자는 시장체제의 경계를 이해하려면 시장체제는 경제라는 이름의 특정활동으로 국한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시장체제의 범위는 경제활동이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다고 강조한다.
 
미국 예일대학 정치학 교수인 지은이는 미국 정치학계에서 경제학을 가장 잘 아는 정치학자로 꼽힌다. 미국의 학계에서조차 매우 드물게 정치학과와 경제학과 두 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정치학과 경제학이 만나는 영역의 문제를 광범하게 연구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폭넓은 관심과 연구의 결정판이 1977년에 출간된 그의 책 《정치와 시장:세계의 정치경제체제》였다.
 
당시 이 책이 나왔을 때 반응은 대단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갖고 있는 내용 가운데, 시장체제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제도와 관습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기업 엘리트는 매우 특권적 위치를 갖고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중들이 생각할 수 있는 대안 역시 이들이 허용하고자 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등의 내용은 당시 미국 정치학계와 경제학계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학술서로는 드물게 <타임>지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저자는 당시의 문제의식을 24년 후에 출간된 이번 책 《시장체제》에서 더욱 분명하고 발전된 내용으로 표현하고 있다. 8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 이 책을 쓰면서 지은이는 지금까지 자신의 평생 연구를 총결산하는 한편, 매우 흥미로운 시도를 했다. 그것은 전문용어와 경제학 이론 혹은 수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가능한 한 자신의 생각을 일상어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전문 연구자들이 아니더라도 해당 주제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게 글을 쓰는 것, 그는 이를 학자로서의 마지막 사회적 역할이라 생각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회적 소명 의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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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은 국민 모두에게 전액 무상 공급해야 한다” (보건의료단체연합, 09-10-22)


[성명] 신종플루 백신 접종비 1조 원을 국민에게 전가하지 말라 (2009년 10월 22일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백신은 국민 모두에게 전액 무상 공급해야 한다” 
 
질병관리본부는 1천7백16만 명에 대해 국가예방접종을 시행한다고 했다. 이는 전 국민의 35퍼센트에 해당한다. 신종플루의 전파를 막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백신접종이다. 그런데 정부의 백신 공급은 매우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정부는 신종플루 예방접종에 소요되는 경비의 대부분을 국민에게 전가하고 있다.
 
첫째, 정부가 35퍼센트 국민에게만 국가 예방접종을 실시하겠다는 것은 나머지 국민 65퍼센트 즉 3천만 명에게는 국민이 능력껏 자비로 접종받으라는 것이다. 영국, 캐나다, 독일, 네덜란드 등의 국가들은 국민 모두에게 1백 퍼센트 접종할 수 있는 백신을 확보하고 있고 국가예방접종을 시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겨우 국민의 35퍼센트에게만 국가 예방접종을 시행하겠다고 한다. 우리 국민 3천만 명은 결국 자비로 예방접종을 받아야 한다. 이번 가을에 시행된 계절 독감 백신의 경우 우리 국민들은 3만 원을 부담하며 독감백신을 맞아야 했다. 신종플루의 경우 이보다 더 비싸게 공급될 가능성이 크다. 최소 3만 원에 공급될 경우라 가정할 경우 65퍼센트의 국민들이 모두 신종플루 백신을 접종받을 경우 9천억 원을 부담해야 한다. 신종플루와 같은 공중보건의 위기상황에서 국가는 국민건강은 나몰라하며 내팽개치고 있는 것이다.
 
둘째, 35퍼센트의 국민에게 국가가 예방접종을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국민에게 불필요한 의료비 부담을 전가하고 있다. 현재 정부는 65세 이상의 건강한 노인과 군인, 초․중․고 학생들은 보건소와 같은 공공보건의료기관에서 전액 무상으로 접종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6세 미만의 영유아, 임산부, 만성질환자들은 의료기관에 위탁해 예방접종을 시행할 예정이다. 이 경우 백신은 무상으로 제공하고 1만5천 원 정도의 접종비를 부담해야 한다. 민간 의료기관에서 접종받아야 할 대상자는 약 5백만 명에 이른다. 이 경우 약 7백50억 원을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민간위탁이 아닌 보건소와 같은 국가보건의료기관에서 제공할 경우 그대로 절약할 수 있는 돈이다.
 
셋째, 왜 접종비가 1만5천 원이어야 하는지 그 근거가 불분명하다. 동네의원에서 영유아가 진찰을 받을 경우 초진료는 1만1천 원정도이며 재진료는 9천 원 수준이다. 그것도 영유아의 경우 본인부담액은 전체진료비의 21퍼센트에 불과해 실제로 3천 원 수준이면 진료가 가능하다. 그런데 1만5천 원을 접종비로 책정한 것은 의료기관에게 주려는 특혜로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백신 공급 대책을 전면 재검토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신종플루 백신은 필요한 국민 모두에 전액 무상공급을 해야 한다. 신종플루는 수개월에 걸쳐 전 국민의 건강을 위협했다. 특히 전 세계가 공중보건의 위기를 맞아 전체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대다수의 선진국들이 전체 국민에게 1백 퍼센트 백신접종을 할 수 있는 양을 구비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 백신접종으로 인한 불필요한 의료비 낭비를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간위탁보다 국가가 직접 백신접종을 해야 한다. 국가가 백신공급을 전액무상으로 할 경우 총 5000억 원이면 전 국민에게 접종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다. 그러나, 현재의 정부 방침대로 라면 우리 전체 국민이 백신을 접종받을 경우 대략 1조 원 정도(9천 억+7백50억)가 소요된다. 똑같은 백신을 접종받는데 국가의 부담 여하에 따라 우리 국민은 5천억 원의 의료비를 추가로 지출해야 하는 것이다.
 
세째, 백신은 민간위탁방식으로 공급할 것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신종플루 대응조치를 시행한 보건소와 치료지정병원중심으로 공급돼야 한다. 백신은 일시에 조달되지 않고 순차적으로 공급된다. 그에 따라 보건소와 지역거점병원에서 전액 무상으로 공급한다면 아무런 혼란없이 최소 비용으로 접종이 가능하다. 민간위탁을 하더라도 국민의 건강과 의료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최소비용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민간의료기관이 솔선수범해야해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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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민들이 교육청 내년 사업예산 직접 짠다

경기도 교육청에서 도민참여예산제를 도입하겠다고 하는데, 이건 지금까지 일반 지방정부에서 실시했던 것과 어떻게 차이가 날까?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서 파악하진 못하겠지만, 흥미롭게 지켜볼 만하다.
 
실제 경기도 교육청은 각 시군단위 교육청에서 간담회를 가지면서 도민참여예산제에 대해 알려나가고 있다. 주민참여예산제를 도입했다고 하는 기존의 지방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도다. 
 
게다가 여기에서는 그 근거법령으로서 참여예산운영조례 비슷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와 같이 법적 근거 없이 정치력으로 시도한다는 것일까. 경기도 교육청에 직접 문의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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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교육청, 주민의견 들어 예산 짠다 (수원=연합뉴스, 박기성 기자, 2009/08/26 07:32)
교육적 요구 반영 위한 첫 시도
 
경기도교육청이 내년도 예산 편성에 주민들을 참여시키기로 했다. 도교육청은 내년도 예산 편성에 교육 수요자인 도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도민참여예산제'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26일 밝혔다. 처음 도입되는 도민참여예산제는 도민들의 교육적 요구를 수용해 예산 편성의 타당성과 신뢰를 확보하라는 김상곤 교육감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도교육청은 도민참여예산제의 취지와 참여 방식을 소개하는 설명회를 교직원 및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이날과 28일 도교육청 본청과 제2청에서 각각 갖는다. 도민 참여는 주민공청회와 자문위원회를 통한 의견 제시, 의견서 제출 등의 방식으로 이뤄진다.
 
먼저 도교육청이 각 과별로 기본예산안을 짠 뒤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권역별 공청회를 열어 주민 의견을 수렴한다. 아울러 교육전문가와 시민사회단체, 주민 대표 등 40~50명으로 구성되는 자문위원회를 통해서도 의견을 듣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주민들이 제시한 의견 가운데 타당성이 있는 내용을 반영해 최종 예산안을 확정하게 된다.
 
도교육청은 주민 참여로 인해 예산 편성이 늦어지지 않도록 예년보다 이른 9월부터 본격적인 예산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기본적인 예산 편성도 전체 예산 항목을 대상으로 원점에서 출발해 과거의 실적과 우선순위를 다시 분석하는 '제로 베이스' 방식을 적용하기로 했다. 이성대 정책기획담당 사무관은 "새롭게 시도되는 제로베이스 예산정책 및 주민참여예산제가 성공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도민과 교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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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들이 교육청 내년 사업예산 직접 짠다 (경기도 교육청 공보담당관실 보도자료, 2009-08-25 오후 5:23:00)
'도민참여예산제 도민설명회'  26, 28일 양일간, 전문가 초빙 강의도
 
참여와 소통의 교육문화를 중시하는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새롭게 도입하는 도민참여예산제의 도민설명회가 26일과 28일 이틀에 걸쳐 도교육청과 2청에서 각각 열릴 예정이다. 주민참여예산제는 도교육청이 내년도 교육 사업을 설정함에 있어, 수요자인 도민들의 민주적 참여기회를 보장하고 교육적 요구를 직접 수용하여, 교육청 사업에 대한 타당성과 신뢰를 확보하기 위하여 올해 처음으로 시도되는 제도이다.
 
경기도교육청은 주민참여예산제가 지닌 근본 취지가 제대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주민참여예산제 운영의 필요성 및 참여방법을 구체적으로 홍보하여 도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 있다고 보고 있다.
 
주민설명회는 26일과 28일 모두 오후 2시에 본청 대강당과 2청 대강당에서 열릴 계획으로, 본청 및 지역교육청 예산담당공무원 전원이 참여하는 것은 물론, 참여를 원하는 일반도민 및 학부모 교직원등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방식으로 운영된다.
 
설명회는 예산담당과장 및 담당관이 직접 우리 교육청 주민참여예산제 추진계획 및 예산현황을 직접 설명하고, ‘함께하는 시민행동’ 오관영 사무처장 및 제주대 하승수 교수 등 전문가들이 ‘참여예산제의 의미 및 주민 역할’을 주제로 특강도 진행될 예정이다.
 
道교육청 정책기획담당 이성대 사무관은 “새롭게 시도되는 제로베이스 예산정책 및 주민참여예산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되는 것은 주민직선 교육감에 의한 진정한 교육자치가 실현되는 과정”이라며 “도민과 교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모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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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진화론과 진보의 패러다임 (진보평론 2009년 가을호,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 기념)

 재미있기는 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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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의 시선에 비친 진화론은?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9-17 오후 06:52:44)
진보평론 가을호 ‘진화론’ 특집
우생학·파시즘에 오용된 진화론 복원
“목적론에 갇힌 진보 ‘다윈’서 출구 발견

 
진보주의의 시선에 포착된 진화론은 어떤 모습일까. 진보의 필연성에 대한 과학적 보증자인가, 우승열패를 정당화하는 약육강식의 정글논리인가. 계간 <진보평론>이 다윈의 <종의 기원> 발간 150년을 맞아 진화론 특집을 선보였다. ‘다윈의 진화론과 진보의 패러다임’이란 주제 아래 5편의 논문을 묶었다. ‘진화’와 ‘진보’의 관계를 규명하고, 진보 담론에 녹아든 진화론적 사고의 빛과 그림자를 성찰하는 글들이다.
 
공교롭게도 진보주의와 진화론의 핵심 개념은 왜곡과 오용의 20세기를 함께 겪었다. 진화는 우생학과 파시즘에 의해, 진보는 스탈린식 생산력주의와 일당 독재에 의해 더럽혀졌다. 세기가 바뀐 지금 진보주의와 진화론이 직면한 처지는 확연히 다르다. 진화생물학이 유전학과 생명공학의 성취에 힘입어 모든 분과학문을 아우르는 통합과학의 중핵적 지위를 넘보고 있는 반면, 진보의 견인차를 자임하던 사회주의는 동구권 몰락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갈라놓았고, 엇갈린 둘의 운명은 또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최종덕 상지대 교수는 진보주의를 타락시킨 목적론과 본질주의를 비판하면서 다윈 진화론에서 진보의 출구를 모색한다. 최 교수에 따르면 진보는 ‘형이상학적 진보’와 ‘자유주의적 진보’, ‘사회적 진보’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한 지향점이 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진보에서는 ‘이데아의 세계’나 ‘종말’ ‘유토피아’가 진보의 목적지라면 자유주의적 진보에서는 자유의 확대가, 사회적 진보에서는 지배와 불평등의 해소가 곧 진보다.
 
문제는 진보가 특정한 목적지를 갖는 이상 언제든 현실 권력에 봉사하는 지배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농민의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던 캄보디아가 생지옥 킬링필드로 변하고, 노동자 천국을 표방하던 소련이 관료의 낙원으로 전락한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진보주의에서 목적지를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진보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게 최 교수의 주장인데, 그는 이 ‘목적 없는 진보’의 가능성을 진화론에서 발견한다.
 
다윈이 말했던 진화론의 핵심은 생명 자체가 지금도 변화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진화론은 기존 서구철학의 전통과 달리 생명종(種)의 고정된 본질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진화론은 반실체주의이며 반본질주의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가 보기에도 다윈의 진화론은 ‘목적론’과 무관하다. 다윈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선택’은 다양한 변이들 가운데 그때그때 환경에 가장 적합한 종이 선택되고 그렇지 않은 종은 점차 사멸하는 과정인데, 선택된 것은 우월한 특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당시의 우연적 환경에 더 적합해서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목적이나 지향점도 없다는 게 홍 교수의 설명이다. 마르크스가 다윈 진화론이 자연세계의 목적론을 일소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인간 사회에 대해선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못한다고 불평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홍 교수는 이런 다윈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한두 가지 이론적 성과에 의존해 사회와 인간의 진보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신중한 태도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회의 진보는 (변화가) 꾸준히 누적되면서 일어날 수 있지만, 진화와 마찬가지로 우연적 변화의 연속일 수도 있고, 진화의 방향이 필연적이지 않듯 사회의 발전 방향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는 다윈 진화론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에 눈길을 돌린다. 그는 150년에 걸친 진화 논쟁에서 드러난 대표적 오류로 우승열패와 직선적 진보의 신화를 꼽는데, 강 교수가 볼 때 다윈 진화론은 인내와 관찰이 이뤄낸 과학적 성과지만, 동시에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지배하던 시대의 산물이기도 했다. 특히 다윈 진화론을 계기로 ‘적자생존’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과학이란 권위의 옷을 입고 전세계적으로 확산됐던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본다. 실제 다윈주의를 사회현상의 해석에 적용한 사회다윈주의자들은 적자가 선택되고 부적자가 도태되는 자연법칙이 구현되기 위해선 모든 인위적 개입이 사라져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펼쳤다. 강 교수는 다윈의 진화론이 겪어야 했던 운명은 “진화론이란 담론이 지닐 수밖에 없는 물질성과 시대적 배경, 그 담론이 사회화되는 사회·정치·문화적 장의 필연적 효과인지도 모른다”며 “경쟁만이 진화의 유일한 메커니즘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생명현상을 경쟁과 협동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할 이론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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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과 이 시대 진보에 대한 사유 (참세상, 진보평론 / 2009년09월18일 11시17분)
진보평론 가을호,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 기념
 
필자들은 철학, 과학기술, 의학, 신학 등을 전공한 분들이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어 주제 접근, 전개, 결론의 차이와 그에 이르는 진지하고 풍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진보평론 특집을 따라가 보자. 근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근대를 만들면서 근대를 벗어났던 동시대의 거장들이 있다. 그들은 ‘진화’-‘진보’라는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다윈은 ‘진화론’의 체계적 대가로, 맑스는 ‘진보’의 급진적 혁명가로, 근대의 진보적 패러다임을 공유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급진화했다. 그러나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항상 그 대가를 요구한다. 텍스트들이 그들의 손을 떠났을 때, 그들 자신이 그러했듯이 지식은 권력 사회적 층위들과 중첩되며 새롭게 읽혀진다. 그러나 소위 대가들의 텍스트는, 그것이 가진 권위와 명성으로 더렵혀져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오해와 오독을 생산한다. 특히,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지적 혁명의 천재들은 그 이름으로 인해, 또는 그 권위로 인해 무수한 지적 사기꾼들과 지식-권력의 설계자들에 의해 인용되며 가공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사상과 문제의식, 지적 고뇌와 성실성을 읽어내는 대신에 그들의 지적 생산물을 주어진 권력 속에 삽입한다. 그래서 후세의 ‘-주의자’들은 위대한 지적 사기꾼들이 된다. 그 지적 사기를 피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특히, 그들이 한 시대를 지배했던 지배적 독단에 대항해 싸우고 지배의 메커니즘에 반기를 든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는 오늘날 누구나 들어서 알고 있는 이름들, 다윈뿐만 아니라 예수와 맑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오늘날 상품화된 사회에서의 ‘상품’이 되듯이, 맑스와 다윈 또한 이 길을 피하지 못했다. 적대자들에게 그들은 그들을 이용하는 자들과 지식-권력의 메커니즘 속에서 오해되고 적용되어 왔던 ‘악명’으로 존재하며 찬양자들에게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이해 속에서 변용되면서 나름의 창조성을 부여하는 ‘힘’이 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게 더럽혀진 이름은 ‘맑스’와 ‘다윈’일 것이다. ‘다윈’은 우생학과 골상학, 사회생물학, 파시즘에 의해 더렵혀졌고 ‘맑스’는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배외주의와 스탈린주의의 노동-생산력주의, 그리고 전체주의적 권력에 의해 더렵혀졌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오늘날 다윈만큼 잘못 이해되고 인용되고 적용되고 있는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윈만이 아니다. 맑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유독 그들의 이름은 더 격렬하게 더럽혀진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가장 분명한 적들, 가장 강력했던 권력의 대항자로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윈은 종교의 적이며 맑스는 자본이라는 새로운 체제의 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윈도 맑스도 언젠가 맑스가 말했듯이 ‘맑스주의자라는 의미에서 그 자신은 맑스주의자가 아니’며 ‘다윈주의자라는 의미에서 그 자신은 다윈주의자가 아닌지’도 모른다.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이면서 그가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종의 기원>이 출판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세계 곳곳에서는 다윈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윈에게 꼭 축복일까? 특히, 오늘날처럼 생물학이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내면서 다른 학문을 주도하고 산업화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윤을 생산하는 학문 영역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생물학자들은 생물학 중심으로 지식의 통합을 주창하고 나서고 있으며 BT산업은 ‘황금알의 낳는 거위’로 GNR혁명을 주도하고 그 흐름 속에서 다윈의 후예들로서 백만장자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다윈’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어쩌면 다윈이 없을 지도 모른다. 마치 오늘날 상업화된 교회에 예수가 없듯이 말이다.
 
다윈을 위대한 학자로 만들었던 것이 ‘진화(evolution)’로 번역된 ‘자연선택’라면 그를 오욕의 역사로 밀어 넣은 것도 ‘진화’로 번역된 ‘자연선택’이었다. ‘진화’와 ‘진보(progress)’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진보평론 41호의 글들은 진화와 진보가 동일한 개념이 아닐 뿐만 아니라 과학과 정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 속에서 착종된 변용들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강신익의 「진화-진보 담론의 빛과 그림자」는 다윈의 진화론이 아담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형성된 “시대의 산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세기 유럽의 시대정신을 이끈 선구”이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진화론의 변형과정을 “적자생존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과학이라는 권위의 옷을 입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과정으로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종덕의 「진보와 진화: 철학사의 조명」, 홍성욱의 「진화와 진보」, 김시천의 「동양학과 진화론-전통 유교담론과 진화론 내러티브의 진보적 재구성」, 이정희의 「헛발질하는 말들의 폭력-다윈을 재판하는 그리스도교의 헛발질에 대해」 등은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을 각기 자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제안을 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진보와 진화를 직접적으로 등치시키는 우리의 일상적 관념이나 맑스와 다윈 사이에 있었던 우화들에 대한 해체는 강신익의 「진화-진보 담론의 빛과 그림자」뿐만 아니라 홍성욱의 「진화와 진보」에서 생물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다루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는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의 이름으로 행사했던 다양한 오욕의 역사뿐만 아니라 진화론 내부에 존재했던 다양한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들을 체계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특히, 홍성욱은 진화와 진보의 관계를 다윈에서 시작하여 현대 생물학자들인 도킨스와 윌슨, 그리고 이에 대항했던 르원틴과 굴드를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홍성욱은 “인간의 본성은 결코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길들여 질 수 있”다고 하면서 “진화는 진보를 위한 한 가지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그의 진화 개념이 사용한 ‘자연선택’이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으로 변용되는 과정일 것이다.
 
강신익은 이 지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미 홍성욱이 보았듯이 유전자와 환경의 관계는 오랜 생물학의 역사, 자연선택(다윈주의)과 획득형질의 유전(라마르크주의)이라는 양자 간의 오랜 분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강신익은 이런 논란을 넘어서 서구제국주의의 논리를 제공했던 사회진화론과 미국과 독일의 우생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던 사회생물학, 그리고 하이예크의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의 논의를 고찰한다. 그리고 “경쟁만이 진화의 유일한 메커니즘일 수는 없다.”고 하면서 “이제 생명현상을 경쟁과 협동의 상보 작용으로 설명할 이론적 접근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곧 사실과 가치 사이의 특정한 괴리를 우리가 인정할 때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자연적 사실, 생존경쟁이나 유전 등을 사회적 현상이나 도덕적 법칙에 곧장 적용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가치는 자연적 사실이나 법칙으로부터 곧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강신익은 “가치는 과학적 사실이 발견되고 적용되는 과정을 제어한다. 과학은 사실과 가치의 관계가 진화하는 양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가치적 개념이 들어가 있는 ‘진보’라는 관념은 진화와 다르며 그 나름의 독특한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
 
최종덕은 「진보와 진화: 철학사의 조명」에서 바로 이런 진보의 역사를 철학사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는 ‘진보’라는 개념이 다면적이라고 주장한다. 진보는 철학사적으로, “형이상학적 시간관으로서 진보”, “자유주의로서의 진보”, “사회적 진보”, “진화론적 진보”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보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목적을 설정하고 있다. 또한, 특정한 목적에 기초한 가치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진화론적 진보를 주장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진화론은 반실체주의이며 반본질주의”이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적 구원관과 유토피아적 세계관’에서 분리된 ‘목적 없는 진화’로서의 ‘진화론적 진보’를 주장한다. 아울러 그는 “동양적 사유구조는 존재 자체가 항상 변화하는 진화존재론의 양상을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특색”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양에서의 진화적 진보의 개념을 모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김시천은 「동양학과 진화론-전통 유교담론과 진화론 내러티브의 진보적 재구성」에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이기주의에 대한 옹호로 읽는 오해를 비판하면서 맹자의 성선설과 생물학적 이타주의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과 도덕-윤리를 일직선으로 연결시키는데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맹자가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서 갈라져 나와 독특한 인간다움(humaneness)을 이루는 그 영역의 세계로부터 인간다움을 규정”하려 했다고 주장하면서 이 간극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옹호를 통해서 굴드나 르원틴과 같은 다윈주의 좌파의 작업을 설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진화, “생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여 보다 복잡하고 우수한 종류의 것으로 되어가는 일, 사물이 보다 좋고 보다 고도의 것으로 발전하는 일”이라는 뜻의 의미는 해체되어야 한다. 사실, 후자는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근대의 패러다임이었던 ‘진보’의 관념이며 이 둘을 연결하고 있는 ‘보다 나은 것, 보다 복잡하고 우수한 것으로 나아감’이라는 뜻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윈에게서 진화는 우연적이며 일직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정희는 「헛발질하는 말들의 폭력-다윈을 재판하는 그리스도교의 헛발질에 대해」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오랜 논쟁을 평가하면서 이 논쟁이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면서 “경전에 바탕을 둔 신학적 창조론은 바로 이 히브리 해방의 매트릭스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해방-정치적 담론이지, 결코 [자연]과학과의 관계 속에서 쟁론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를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의 논쟁이 아니라 “신학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해명”을 통해서 오히려 성서의 창조 서사를 “해방과 저항의 담론”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복적·해방적 상상력의 뿌리로 재영토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창조의 개념은 소외된 인간을 상정하기는커녕 양도할 수 없는 자립성을 인간에게 인정”하는 것이며 “히브리의 해방신학” “신권(身權)선언”으로 인권은 “신체의 권리”이다.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이 겪어야 했던 운명은 진화론이라는 담론이 지닐 수밖에 없는 물질성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그 담론이 사회화되는 사회-정치-문화적 장의 필연적 효과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생물학은 찬란한 성공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BT산업의 성공 속에서도,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관한 연구, 그리고 유전자의 형질이 표현되는 조건으로서 사회적 장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바야흐로 생물학은 우리 시대의 과학에서 전범(典範)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진화와 진보가 같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끊임없이 진화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진보를 묻는다. 급진주의자나 사회다윈주의자들 모두가 다윈의 후예를 자처해 왔으며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것은 어쩌면 다윈의 진화론이 열어주는 새로운 상상력의 공간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은 생물학과 사회학, 윤리학이 끊임없이 상호간섭적 관계를 가진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그들 사이에는 각각의 고유한 영역이나 관점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교섭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호 관계성이 특정한 관점과 분과학문적 가치들에 의해 포섭될 때이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특집의 필자들은 ‘생물학으로 환원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사회학을 생물학으로 환원하는 사회생물학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생물학의 성과와 상호 교섭적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최종덕은 이런 입장에서 ‘목적 없는 진보’로서의 진화론적 진보를 주창하고 있다. 이것은 진화의 목적론적 이념화를 경계하면서도 진화발생학의 성과를 수용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보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진보의 가치가 진화와 무관하다면 진보란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는 다시 가치와 사실, 본능과 양육, 유전자와 그것의 표현 사이에서 생명의 진화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연선택이 우연이라면, 그리고 유전자는 사회적 환경을 통해서 표현된다면, 그리고 이번 호의 특집에서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굴드가 비판했듯이 진화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단속평형斷續平衡’이라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은 어디에서 기원하며 어떤 방향성을 가진 것일까? 아마도 이 지점에서 우리가 사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화의 특이점들 속에서 생명현상을 다루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생명의 진화라는 연속적 내재성 속에서 윤리와 사회, 정치를 사유하면서도 그 특이점의 갈라짐 위에서 또한 고유한 특이성을 사유하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래로 이타주의는 이기주의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생명체의 진화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이 주류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글에서 이타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를 읽는 것은 왜일까? 단순히 오독이라고 해야 할까? 하이에크가 제시하고 있듯이 신자유주의 논리는 이기성 또는 이타성이 아니라 자생적인 질서 그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이기성과 결합된 이타주의를 추구했던 서구의 합리적 자유주의자들의 위험을 본다. 그들은 충분한 이타주의자들이다. 단, 그것이 내게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한에서 그렇다. 그것은 이기주의의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영민한 이기주의는 아닐까?
 
따라서 진보의 가치는 이기주의냐 이타주의냐의 논쟁에서 이타주의를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진화가 생성하는 이타성이 사회문화적인 가치로 전화하는 그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보의 가치, 이념은 이 분열의 지점을 통해서 한편으로 생물학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학이나 윤리학, 정치학과의 소통 속에서 각자의 고유한 층위들을 나누는 방식 속에서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점에서 우리는 진화가 말할 수 있는 진보의 가치와 말할 수 없는 진보의 가치는 무엇이며 진화의 특이점 위에서 생성되는 인간의 가치, 생명의 가치는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생명’이라는 화두 속에서 경계를 넘는, 이 사유의 여행을 이미 시작하였다.
 
특집 이외에도 비정규법과 용산 참사, 쌍용차투쟁을 둘러싼 2개의 다소 상이한 입장의 글을 실었고, 일반논문으로 통합적 학문연구의 필요성, 통섭에 대한 글과 재정은 건강보험에서 지출하고 서비스는 민간기관이 운영하는 장기요양보험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급진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격의 글인 민주주의의 급진화에 대한 글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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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참여예산제도, 성과와 전망 (울산노동뉴스, 이종호 기자 / 2006-03-23)

 

주민참여예산제도, 성과와 전망 (울산노동뉴스, 이종호 기자 / 2006-03-23 오후 11:03:40)
참여연대 토론회...한나라, 열우당 불참 빈축 
 
23일 오후 4시 30분 남구 삼산동 근로복지회관 5층 다목적실에서 '주민자치실현을 위한 주민참여예산제, 그 성과와 전망'을 주제로 동구청과 북구청, 울산참여연대가 주최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김병수 울산참여연대 지방자치센터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서 기조 발제를 맡은 안성민 울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주민참여예산제도는 행정부가 독점적으로 행사해왔던 예산편성권을 행정부와 지역주민들이 함께 행사하는 제도, 즉 예산편성과정에 해당 지역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주민참여제도"라며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시의 주민참여예산제도와 울산 동구, 북구의 사례에 대해 설명했다.
 
안교수는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가 의회에 대한 견제장치로서 역할했고, 정치적 합리성과 함께 경제적 합리성을 달성함으로써 도시의 통치력(governability)을 회복시켰으며, 주민들의 참여와 토론과정을 거쳐서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해갈 수 있는 '숙의민주주의'의 모형을 성공적으로 시행했다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울산 동구와 북구의 시민위원회는 지역주민들의 지역적 요구들을 분과위원회의 심의와 조정회의 및 협의회의 조정과정을 거쳐 적절하게 조정하고, 소관부처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주민의 행정수요를 반영함으로써 예산결정의 합리성을 높여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 "동구와 북구의 참여예산제가 아직 시행 초기이고, 제도운영의 환경이 포르투 알레그레와 다르지만 성공적인 거버넌스가 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하면서 "구 재정의 많은 부분을 조정교부금과 보조금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자체사업을 위한 가용재원의 범위를 미리 확정하기 어렵고 예산편성의 기간도 짧을 수밖에 없는 점이 참여예산제의 성공적인 정착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동구청에서 참여예산제 담당 팀장이었던 이상범씨(동구 방어동사무소)가 '행정에서 바라본 주민참여예산제의 성과와 의미'에 대해 발제했다. 이상범씨는 참여예산제를 통해 주민이 예산편성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는 재정민주주의의 시발점이 마련됐다고 평가하는 한편, 가용재원의 부족과 전문성 부족 등으로 분과위원회의 우선순위결정이 현실과 괴리되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예산책정의 합리적 기준과 축적된 데이터를 만들어야 하고 알기 쉬운 예산공개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남교용 북구주민참여예산제도 3분과위원장은 '북구 주민참여예산제도의 성과와 한계'를 발제하면서 한 분과에서 검토해야 할 사업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고 지적하고 북구청 홈페이지에 시민위원들이 소통할 수 있는 온,오프라인 공간을 다양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상미 동구주민참여예산 부위원장은 결혼하기 전 은행에 근무했던 경험이 있던 평범한 주부로서 처음에는 호기심 반 의구심 반으로 동참했다고 밝히고 자신이 이해하는 주민참여예산제도는 단체장이 갖고 있는 예산편성권을 시민에게 나눠주는 획기적인 제도라고 평가했다. 박상미 부위원장은 참여예산제 도입으로 주민 스스로 예산의 감시자 역할을 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고 일반회계와 특별회계 전체 예산으로 심의가 확대됨으로써 시민위원들의 역할도 확대됐다며 성과를 지적하고 시민위원들의 의회 방청, 예산용어 해설집 제작 배부, 누구나 보기 쉬운 예산안 자료 작성, 시민위원회 토론방 배너 개설 등 개선해야 할 점들을 꼼꼼하게 제시했다.
 
발제에 이어 토론이 진행됐는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불참한 가운데 민주노동당울산시당 이응순 정책위원장이 '주민참여예산제도의 새로운 전략'에 대해 발표했다. 이응순 정책위원장은 주민참여예산제도가 통반장, 동장 직접선출 등의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개선과 함께 가야 한다고 평가하고 동별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예산을 요구하고 결정하는 방식, 예를 들어 00동에 연간 5억원을 배정해주고 예산을 설계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제기했다.
 
김병수 소장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정책담당자들의 토론회 불참에 대해 참여연대와 선거연대 차원에서 두 당에 공개질의하고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 등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하고 5.31 지방선거가 건전한 정책선거가 될 수 있도록 각당 후보에게 주민참여예산제에 대한 정책토론회와 공청회 등을 제안하고 진행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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