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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데이비드 그레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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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구원하라, 인류학이여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09-04-10 오후 07:49:18)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서정은 옮김/그린비2만5000ㆍ608쪽
대가없이 선물 주고받는 ‘선물경제’서 신자유주의 이겨내는 대안체제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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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은 자주 서구 제국주의 시대 욕망의 산물이거나 서구인들의 이국취미의 학문적 발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2001)은 이런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 책은 인류학이 대안적 세계에 대한 비전을 열어줌으로써 당대 지배체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으며 실제로 인류학의 전통 속에서 그런 투쟁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은이 데이비드 그레이버 자신이 학문과 투쟁을 병행하는 사람이자 학문을 투쟁의 장으로 삼는 사람이다. 뉴욕대 교수를 거쳐 런던대 교수(사회인류학)로 재직중인 그는 ‘지구적 민중행동’ ‘세계산업노동자조합’ 같은 급진 사회운동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나키스트 운동가이기도 하다.
 
이 책의 관심은 가치이론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제출하는 데 있다. 그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시장과 화폐를 가치의 중심으로 삼는 이 시대가, 인류학적 조망 아래서 보면 보편적이기는커녕 오히려 특수한 사례라는 인식이다. 그런 인식 위에서 그는 먼저 우리 시대의 지배 가치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논의를 풀어간다. 개인들이 자유로운 시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만인에게 결국 이익이 된다는 명제는 우리 시대의 거의 보편적인 믿음이 됐다. 지은이는 이런 믿음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개인도 시장도 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최근세사의 산물일 뿐이며, ‘자기 이익 극대화 노력’이라는 것도 서구에서 발전한 자본주의 질서에서만 뚜렷하게 확인되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유시장을 초역사적 보편 체제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강자·부자의 지배와 이익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 작업일 뿐이다.
 
이와 함께 지은이는 ‘포스트모더니즘’ 학문 조류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류가 일체의 보편적 평가기준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함으로써 결국 연대와 저항의 기반을 무너뜨렸다는 것이 지은이의 시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가 귀착한 것은 ‘개인의 창조적 자기형성’이었고, 그것은 결국 사회의 파편화일 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런 상대주의가 신자유주의의 총체적·보편적 가치평가 체제와 상응한다는 사실이다. 한쪽은 파편화하고 다른 한쪽은 그 파편적 존재들을 총체적 가치 체제에 복속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은이는 인류학이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더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살피는 사람이 인류학의 거인 마르셀 모스(1872~1950·사진)다. 지은이의 목표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과 모스의 인류학적 연구를 결합하는 것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마르크스와 모스는 서로에 대한 완벽한 보완물”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 투신했다면 모스는 비교인류학의 성과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했다.” 또 “마르크스는 지속적으로 인류학에 관심이 있는 사회주의자였으며, 모스는 평생 동안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던 인류학자였다.”
 
여기서 지은이가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사회주의’로 표출된 모스의 정치적 열망이다. 그의 대표작인 <증여론>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다른 어떤 저작보다 더 강렬한 정치적 열망의 산물”이었다. 이 저작에서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 바깥에 놓인 부족들을 연구함으로써 이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가치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북아메리카 북서부 원주민인 콰키우틀족의 ‘포틀래치’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콰키우틀족의 경우에서 보이는 교환양식을 ‘선물경제’라고 명명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물을 주고 그 선물을 받은 쪽은 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다시 선물하는 행위양식이 이 선물경제의 특징이다. ‘자기 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과는 아주 다른 교환양식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화폐의 가치, 상품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놓을 때, 선물경제권에서는 “공적으로 무언가를 선물하는 기쁨이나 관대한 분배의 기쁨, 공적이고 사적인 향연에서 베푸는 호의의 기쁨”이 최우선의 가치가 된다. 여기서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법칙이 작동하는 대안 체제를 찾아냈다.
 
지은이는 모스가 <증여론>을 발간하던 해에 <볼셰비즘에 대한 사회학적 평가>를 함께 출간했음을 상기시킨다. 모스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한편으로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그 혁명의 폭력적·당파적 성격에 의구심을 품었고, 특히 권력 중심적 사고에 거부감을 느꼈다. 지은이는 모스의 이런 우려를 수긍할 만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권력 문제를 회피하는 혁명 열망은 순진한 도덕주의로 귀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스의 도덕주의가 마르크스의 냉철한 이론과 결합한다면 대안을 창출하는 상상력을 발동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책은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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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워라 (한국, 유상호 기자, 2009/04/11 02:56:45)
  
이 책은 물신주의로 전락한 자본주의와 그것의 첨단 형태인 신자유주의 철학에 대한 대안을 인류학에서 찾는다. 런던대 사회인류학과 교수인 저자는 활발한 반세계화 운동으로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한 적도 있는 인류학자. 그는 이 책에서 칼 마르크스의 비판적 시각과 마르셀 모스의 대안적 상상력을 접목,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시장과 그 배후의 논리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저자는 우선 인류학에 씌워진 통념을 벗겨낸다. "인류학은 '원시사회'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사회에 대한 최적의 투쟁 무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원시사회의 증여와 교환을 분석한 모스의 인류학 이론에서 마르크스 비판사상이 가진 맹점을 보완할 논지를 캐낸다. 그리고 사회구성원 간의 총체적 의존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코뮨주의'의 한 형태를 궁극적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책은 '순환'되는 가치에 주목한다. 예컨대 파푸아 뉴기니의 바이닝 부족에서 가장 명예로운 행위는 음식 또는 소비할 수 있는 물건을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다. 가치는 '교환'되지 않고 행위를 통해 순환된다. 이는 상품과 화폐라는 물신화된 가치의 교환이 일어나는 근대적 시장과 차원이 다르다. 저자는 외형상 시장경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더라도, 거기서 시장경제의 교환을 넘어서는 가치의 실현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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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새마을 운동》 김영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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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눈으로 다시보는 새마을운동 (서울, 이순녀기자, 2009-06-10  23면)
 
박정희 정부는 농촌이 낙후된 원인을 게으름과 노름, 미신에 빠져 지내는 농민의 탓으로 돌렸지만 일제 식민치하, 해방, 전쟁 등을 거치며 농촌 근대화의 동력은 농민 사회 내부에서 오랜 시간 축적돼 왔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농촌 사회의 자발적인 노력과 에너지를 국가적으로 동원해낸 그 지점에 박정희의 영도력이 있었고 새마을 운동의 성공이 있었던 것”이라며 “농민의 참모습을 다시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새마을운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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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은 농촌 몰락의 시작이었다”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6-10 오후 09:02:11)
‘그들의 새마을 운동’ 쓴 김영미 교수
   
“새마을운동을 성공한 농촌 근대화운동으로 미화하든 농민에 대한 억압적 동원체제로 비판하든, 정부 정책에 초점을 둔 국가중심적 접근이란 점에선 마찬가지입니다. 농민이란 존재는 철저히 지워져 있어요.”
 
민중 경험 기초로 생활사적 접근
“유신체제 이식위한 농민동원운동”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역사학계의 첫번째 연구서라는 점 말고도, 민중의 경험세계를 통해 사건에 접근하는 생활사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새마을운동 시기 모범 마을로 선정돼 두 차례나 포상을 받은 경기 이천군의 작은마을 아미리와, 새마을운동의 기수가 돼 <대한뉴스>에까지 보도된 농촌운동가 이재영씨가 책의 주인공이다. 책을 쓴 김영미(42) 국민대 연구교수의 논지는 “새마을운동 이전에 ‘새 마을’과 ‘새 농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미리는 1930년대 일제가 펼친 농촌진흥운동에서도 모범 부락이었습니다. 과거부터 근대화를 위한 자발적 노력이 꾸준히 있어 왔던 곳입니다. 이재영씨 역시 1950년대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애향청년회라는 계몽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던 농촌운동가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정부의 정책보다 훨씬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었던 셈이죠.”
 
그런데 이런 자발적 흐름이 박정희 정부 시기 가시적 결실을 맺게 된 데는 정부의 물질적 지원과 평가, 포상이 모두 마을 단위로 이뤄짐으로써 마을공동체의 자치력과 마을간 경쟁심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 하나의 요인은 당시 마을공동체의 주도권을 둘러싼 신구세력간 권력 갈등이다.
 
“이농이 본격화되기 전이라 당시 농촌마을에는 중등교육을 받고 군대를 다녀와 근대성을 내면화한 청년 주체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연장자 중심의 마을 권력과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정부는 발전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충일된 청년들과 손잡음으로써 운동의 자발적 주도 세력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유신체제를 마을로 이식한 존재들이기도 했다. 연장자 중심의 마을공동체를 움직이기 위해선 국가의 권위와 행정력을 등에 업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청년들은 자기 마을을 박정희 정부의 지배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실을 했다는 얘기다. 물론 여기엔 3선개헌을 계기로 뚜렷하게 하락한 도시지역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농촌을 체제 유지의 거점으로 활용하려 했던 박정희 정부의 의지 또한 작용했다. 이런 점에서 새마을운동의 동원 방식은 소외계층의 욕망을 자극해 체제의 자발적 동조자로 포섭한 파시즘의 대중 동원과도 유사하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그런데 정작 농촌 마을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그토록 원하던 발전과 부를 성취했을까? 김 교수는 말한다. “거주 환경이야 나아졌죠. 문제는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농가부채가 급증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정부 시책에 따라 앞다퉈 고수익성 작물 재배에 뛰어들었는데 설비투자 비용은 물론 불투명한 판로와 널뛰는 가격 탓에 피해가 고스란히 농민에게 돌아갔던 것이죠. 80년대가 되면서 청년들은 더 빠른 속도로 고향을 등졌고, 농촌은 희망이 사라진 노인들의 휴식처로 전락합니다. 새마을운동은 역설적이게도 농촌 피폐화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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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초대석] 그들의 새마을운동 김영미 (한국, 유상호기자, 2009/06/13 03:03:15)
"새마을운동, 민중의 이야기로 재구성했어요"
 
김 교수는 "관(官) 주도의 것이나, 진보적 학계의 것이나 새마을운동의 의미를 기술한 기존의 역사는 모두 편향적"이라고 지적했다. '선구적인 농총 근대화 운동'도 '권위적ㆍ억압적 대중 동원'이라는 시각도 모두 단편적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그 오류가 "계몽의 대상으로서든, 동원의 대상으로서든, 민중을 주체가 아닌 무기력한 객체로 파악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이 유신체제의 유지에 이용된 측면이 있지만, 박정희 정권은 농촌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근대화 에너지를 포착한 겁니다. 지금도 농촌 주민들은 '그때가 활기가 넘친 시절이었다'는 향수를 갖고 있어요. 그게 정권의 추진력과 맞물리면서 전국적인 운동이 된 거죠. 물론 문제도 많습니다. 현실에 맞지 않고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투자, 예컨대 서구의 낙농선진국을 흉내내려 했던 것은 현재 농촌이 몰락한 원인이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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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 저자] 새마을운동 이전에 새마을과 새농민이 있었다 (조선, 이한수 기자, 2009.06.13 09:46)
《그들의 새마을 운동》 김영미 교수
 
"농민들을 만나 심층 인터뷰하면서 근대화를 위한 농민들의 지난한 노력이 새마을운동과 만나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됐어요. 새마을운동은 단지 1970년대의 현상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온 농민들의 노력이 국가주도 운동과 결합해서 나온 산물입니다."
 
김 교수가 출간한 《그들의 새마을 운동》(푸른역사)에서 말하는 '그들'이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개되기 훨씬 이전부터 자신의 마을을 '새마을'로 만들고자 노력했던 농민들을 말한다. 책의 주인공은 '아미리'라는 한 마을과 농촌지도자 '이재영'이라는 한 사람이다. 김 교수는 1999년부터 1년여간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아미리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함께 지내면서 마을 130여 가구를 모두 방문 조사했다. 70~80세 촌로(村老)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식 기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농민들의 경험세계를 파고들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성공마을로 두 차례 표창을 받은 아미리는 이미 1950년대부터 정미조합을 자율적으로 결성하고 마을의 공유재산을 축적하는 등 자발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천과 안성 지역에서 활동한 농촌 지도자 이재영씨는 국가 주도의 새마을운동이 오히려 그의 아이디어를 빌렸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사례다. 1950년대 후반 서울 경복고를 졸업하고 낙향한 후 '애향청년회'를 조직한 이씨는 마을 어른들에게 도박을 하지 마시라고 설득하고 야학에서 농민들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협동조합을 만들어 농기구와 비료를 공동으로 구매하고 공동으로 농산물 판로를 개척하는 '새마을' 활동을 벌였다.
 
그의 활동은 1971년 국가주도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씨는 대통령과 장관들이 월 1회 여는 정책협의회에서 자신의 경험을 직접 브리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농촌 지도자야말로 훌륭한 사람"이라며 그에게 '국민포장'을 수여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내의 새마을운동을 총괄하는 '새마을실장' 자리를 이씨에게 제의하기도 했다. 이씨는 새마을운동을 역설하는 박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유일하게 언급된 농촌지도자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농촌을 어떻게 근대화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없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이미 농촌 근대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이재영씨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죠." 김 교수는 "그런 점에서 새마을운동은 박정희만의 것으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뒤집으면 '새마을운동은 농민만의 것도 아니다'는 말도 된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하고 있던 새마을운동에 박정희라는 인물이 '불꽃'을 댕긴 것이다. 김 교수는 이렇게 균형을 잡았다. "새마을운동 이전에 이미 새마을과 새농민이 있었어요. 가난을 스스로 극복할 동력이 없는 나태하고 무능한 농촌은 아니었습니다. 국가는 이들의 자발성을 효과적으로 끌어주고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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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 책]새마을 운동은 성공한 운동이었을까 (2009 06/30 위클리경향 831호, 최재천<변호사>) 
 
이 책은 정치사·관변사에 익숙해온 우리 사회의 연구방식에,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 일종의 ‘뒤집기 한판승’을 거둔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있었기에 ‘새마을’이 생겨났다. 지금까지 공인된 역사나 통념은 그렇다. 아니다. ‘새마을’이 먼저 있었고, ‘새마을 지도자’가 아닌 ‘농촌 지도자’가 이미 있었다. 그런 다음 정부 주도의 ‘새마을운동’이 있었다. ‘새마을’과 ‘농촌 지도자’와 ‘새마을운동’이 결합하면서 비로소 우리 상식 속의 ‘새마을’이 탄생했다. ‘역사 대중화’에서 ‘대중의 역사화’로 방향을 바꾼 저자 김영미의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의 결론은 그렇다.
 
생경하다. 도발적인 목소리도 그렇고, 연구방법이나 저술방법도 그렇고, 저자의 결론도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새마을운동’ 시대를 살아왔기에 새마을운동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온 지독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1971년 정부는 전국 3만3267개 행정 리·동에 시멘트를 335부대씩 지원하여 전 리·동에서 일제히 새마을가꾸기운동을 추진하게 했다. 이 책의 무대가 된 경기 이천시 부발읍 아미리 사람들도 당시 시멘트 300부대와 리어카 한 대를 받았다. 다른 마을에서는 시멘트 사용법을 몰라서 처음 받은 이 물건을 내다버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아미리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아니고, 내무부 장관도 아니고, 새마을운동중앙회도 아니다. 도서관 공문서보다는 현장을, 정부자료보다는 구술을 택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정치사·관변사에 익숙해온 우리 사회의 연구방식에,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 일종의 ‘뒤집기 한판승’을 거둔다. 저자의 문제의식과 결론을 요약하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마을공동체의 자율적 운동이었을까. “국가의 정책은 효율성과 가시적인 성과를 중심으로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다. (…) 새마을운동에서 농민들이 운동의 자율적 주체였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잘살기운동으로 성공했을까. “새마을운동은 청년들이 농촌에서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데 실패했다. 1970년대 농촌 청년들은 더 빠른 속도로 도시로 유입되어 갔다.”
 
새마을운동은 순수한 사회운동이었을까. “박정희 정부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낙후된 농촌의 근대화, 정치적 위기 타개, 유신체제 지지 기반 마련이라는 세 가지 목적을 수행하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유신독재체제와 무관했을까. “새마을운동은 곧 공화당의 세력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유신체제에 대한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민층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도시 지역의 유신반대 여론을 상쇄시키고 이를 통해 집권을 연장할 수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운동이었을까. “(일제) 식민지 지배당국이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은 한 세대 후 박정희 정부가 주도한 새마을운동의 기원이 된다. (…) 새마을운동의 최고지도자인 박정희뿐 아니라 새마을운동을 주도했던 관료들이나 마을 청·장년들이 모두 농진운동의 유경험자들이라는 점은 두 운동의 직·간접적인 관련성을 유추케 한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이 책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역사학계의 첫 번째 연구서다. 논쟁의 시작인 셈이다. 그럼에도 감히 예언하자면, 이 책은 새마을운동사와 영원히 동행할 것이며, 더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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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와 <촛불, 어떻게 볼 것인가>, <미네르바의 촛불>



‘촛불 1돌’에 프리즘을 대다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4-23 오후 02:10:47)
책 출간·토론회 잇단 준비
대중 낙관론·반정치성 지적
생명정치 의미 높은 평가도

 
1987년 이후 최대의 ‘정치적 동원’으로 기록될 ‘2008년 촛불시위’ 1년을 앞두고 촛불의 의미를 성찰적으로 곱씹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2008 촛불’의 의미와 동학을 분석한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는 가운데, 진보 시민단체와 연구단체를 중심으로 촛불의 성과와 한계를 되짚는 토론회도 준비되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찬양론이 대세이던 ‘촛불 담론’의 폭이 눈에 띄게 넓어졌다는 점이다. 1년이란 시간이 사건의 규모와 스펙터클에 압도돼 있던 연구자들에게 적절한 ‘시점의 거리’를 확보할 여유를 가져다준 덕인지, 체험과 공감에 바탕한 이해적 서술보다는 거리두기를 통한 비판적 논의들에 힘이 실리는 형세다.

  
이런 흐름은 최근 1~2개월 새 출간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와 <촛불, 어떻게 볼 것인가>(울력)에서 확인된다. 앞의 책이 운동론적·정치적 비판에, 뒤의 책이 철학적 성찰에 무게를 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도달하려는 궁극이 ‘탈신화화를 통한 촛불의 전화와 도약’이란 점에서 일치한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가 펴낸 <그대는 왜…>는 촛불시위에 내장된 ‘반(反)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했던 기왕의 비판론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다. ‘촛불의 낙관주의에 대한 어떤 우려’를 쓴 백승욱 중앙대 교수는 ‘광장의 저항’이 대중의 각성과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점을 2008년 촛불의 가장 큰 한계로 꼽은 뒤 “7·8·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진 1987년의 경험만큼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기존 촛불 담론의 ‘대중 낙관론’을 직접 겨냥했다. 촛불은 “이명박 정부와 부르주아를 향해 ‘쾌락의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중간계급의 행동”이었으며, “여기에 불을 붙인 존재는 바로 이들 중간계급의 아들딸들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촛불 시민’들이 요구했던 것은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기에, 촛불 역시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만들고 혁명적 주체를 구성해낸 ‘진리적 사건’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촛불시위의 ‘순수성 강박’을 꼬집은 이상길 연세대 교수는 정치를 ‘불결한 것’ ‘오염된 것’으로 바라보는 정치적 상상력의 경계를 옮겨놓지 않는 한 촛불의 약속은 성취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촛불 주체들의 의지가 투표와 일상적 조직행동으로, ‘순수하지 않은’ 시위들에 대한 지지로, 그리고 ‘시민도 못 되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와 철학 연구회가 엮은 <촛불, 어떻게…>는 촛불에 대한 긍정론과 비판론을 비교적 균형 있게 담아냈다. 촛불의 생명정치적 의미를 높이 평가한 글(김상봉·박병섭 )이 있는가 하면, ‘욕망 정치론’과 ‘다중지성론’에 자리잡은 대중에 대한 지나친 힐난과 신비화를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나종석·박구용), 대중들의 참여가 분산적·일회적으로 이뤄짐으로써 저항의 터전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는 진단(권용혁)도 있다.
 
다만, 선우현 청주교대 교수는 “2008년 촛불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난립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넘어 지나치다 할 만큼 낙관적 기대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며 촛불에서 나타난 참여자의 능동성과 수동성, 성찰과 자기비판을 통해 제어되지 못한 이해관계와 욕망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촛불 1년’을 앞두고 쏟아지는 책들이 촛불의 성과와 한계를 냉정하게 인식함으로써 지리멸렬한 국면을 뚫고나갈 동력을 얻고자 한다면, 시민단체들이 주최하는 토론회에선 ‘촛불 시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려는 시도가 주목된다. 28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참여연대·참여사회연구소가 주최하는 ‘촛불 1년,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토론회에는 ‘촛불시민’ 3명이 발표자로 참석해 연구자, 시민단체 활동가와 함께 집단토론을 한다. 행사를 조직한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시민들은 촛불의 주역이었으면서도 그에 대한 평가의 자리에서는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으로 머물러 왔다”며 “그들이 원한 것이 무엇이었고, 어떤 기대를 품었는지, 1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공유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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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기동전, 촛불의 진지전 (시사IN [85호] 2009년 04월 27일 (월) 16:52:21 시사IN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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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촛불은 어두운 곳을 밝히지 못했나 (시사IN [85호] 2009년 04월 27일 (월) 14:30:34 이오성 기자)
촛불은 기적인 동시에 트라우마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가장 많은 이가 정치적 행위를 벌였다는 점에서 기적이고, 그 에너지가 일순 사그라졌다는 점에서 트라우마였다. ‘촛불은 과연 무엇이었나’를 자문하는 논의가 뜨겁게 분출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서 촛불은 일순 흔들린다. ‘왜 비정규직 문제나 용산 참사 때 촛불은 그렇게 미약했을까?’ ‘왜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공정택 후보가 승리했을까?’ ‘촛불집회의 탈정치적 분위기는 무얼 말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2008년 촛불의 한계를 과감하게 지적하고 나선 이들이 있다. 최근 출간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를 통해서다. 앞다투어 촛불 예찬에 나선 지난 비평들과 달리 촛불에 거리두기를 시도한 책이다.
 
촛불집회의 전개 과정에서 놀라운 점은 그토록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올 수 있었던 점이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와서 저항을 했음에도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담론도 체계적으로 형성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백승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학계에서 운동권, 그리고 저널리즘에서 누리꾼에 이르는 2008년의 불문율 가운데 하나는 ‘촛불을 사랑하라’는 명령이었다. 모두가 촛불을 사랑했다. …그러나 촛불 이후 우리 사회가 진보하기는커녕 촛불이 과연 있기나 했던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더욱 악화되는 현실 앞에서 그저 쓴웃음만 짓게 할 뿐이다.”(정용택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회원)
 
실제로 담론은 물론이고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도 촛불은 그 엄청난 열기를 반영할 만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촛불 지지자들이 가장 좌절했던 사건 중 하나가 지난해 7월30일 치러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공정택 후보가 당선한 일이다. 당시 촛불 시민에게 뜨거운 지지를 얻은 주경복 후보는 근소한 표차로 떨어졌다. 강남구·서초구·송파구 등 강남 3구에서 공 후보가 크게 앞선 탓에 ‘강남 몰표의 승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탈정치’ 징후를 포착한 이들도 있다. 가령 <88만원 세대> 공저자 박권일씨는 “MB는 꼴 보기 싫어하면서도 정작 교육감 선거에는 투표하지 않았던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 그것이 진짜 원인일 듯하다. 건조하게 말해서, 이들에게는 MB를 향한 분노보다 교육감 선거의 기회비용이 더 컸다”라며 정치 냉소주의가 창궐할 것을 염려했다. 실제로 당시 촛불시위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이 20%까지 떨어지는 와중에도 한나라당 지지율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MB OUT’ 구호가 ‘야당 지지’로 이어지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정치 이야기만 꺼내도 회원을 ‘강퇴’시키던 메이저리그 야구 동호회나 패션 카페 등이 촛불집회에 나온 것은 사실 정치적으로 뜻 깊은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런 촛불 시민 상당수가 여전히 현실 정치를 깊이 혐오한다는 점이다. ‘민주당 재수 없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설치지 마라’로 집약되는 다음 아고라 분위기는 오프라인 촛불집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확성기를 통해 집회 참가자를 선동하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민중운동 단체 ‘다함께’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택광 교수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이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립구도는 ‘좋은 정치 대 나쁜 정치’라기보다 ‘정치가 대 국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민이 정당정치 내로 들어가서 자기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와 국민의 힘 겨루기로 촛불집회를 파악하는 경향이 다분했다”라고 분석했다.
 
이런 ‘탈정치화’ 경향은 시위 내내 ‘비폭력’ 구호와 맞물리면서 더욱 깊어갔다. 예컨대 촛불집회에서 드라마틱한 순간 중 하나였던 6월10일 ‘명박산성’ 점령 때만 해도 그랬다. 당시 명박산성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참가자 사이에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산성을 넘는 순간 폭도로 몰릴 테니 그만두자는 쪽과, 산성 자체가 폭력인데 왜 가만히 있느냐는 쪽으로 갈렸다. 격론 끝에 스티로폼을 쌓고 컨테이너 위에 올라가 깃발을 흔드는 것으로 이날 집회의 대미를 장식했지만, 이들에게 명쾌한 정치적 선택지는 없었다. 유영주 인터넷 매체 ‘참세상’ 편집장은 “산성을 넘어야 한다는 절박함은 강렬했지만, 우리에게는 장벽을 넘은 다음 뭘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100만명이 모인 날 밤, 시민들은 대안 부재에 회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토로했다. 6월10일 이후 이명박 정부는 강경 진압을 펼쳤고, 시위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촛불의 또 다른 ‘어두움’은 촛불이 비정규직과 용산 철거민 등 사회 약자가 있는 곳을 밝히지 못했다는 데 있다. “비정규직 이슈가 촛불에 묻히는 걸 보면서 절망스러웠다”라는 김경욱 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의 말은 진보 진영 내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10년 뒤 광우병을 일으킬 수 있는 쇠고기 수입 반대에는 그렇게 열정적인 시민들이 당장 생존권을 박탈당한 비정규직 문제에는 의외로 차가웠다. 촛불은 아름다웠지만 계급 문제에 대해서는 무력하고 둔감했다”라는 이랜드 노조원의 말도 듣는 이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혹자는 이를 통해 촛불 시민의 ‘정체성’을 파악하기도 한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비정규직 노동자 여러 명을 인터뷰한 결과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들을 찾기 어려웠다며 이렇게 말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노동 형편이나 삶의 지위만 한국 사회에서 주변부인 것이 아니다. 촛불집회에 대한 인식이나 참여 역시 주변부였다. 촛불집회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결코 참여할 수 없는 이들도 있다. 내가 촛불집회 참석자 상당수가 중산층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 게 그때부터다.”
 
여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촛불시위의 주된 참가자는 여성이었다. ‘촛불 소녀’가 그랬고, ‘82cook’ ‘소울드레서’ 따위 참여 단체가 그랬다. 하지만 촛불은 여성 내부의 불평등은 비추지 못했다. 은수미 연구위원은 “촛불집회에 나올 수 있는 여성은 하루 12시간씩 일해야 간신히 월 100만원을 손에 쥘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 중산층 여성은 되어야 그 시간에 촛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촛불집회에 여성이 거론되는 건 강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촛불이 비추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어디인가를 보여주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촛불에 대한 이런 염려는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 동의하는 일부 학자의 것만은 아니다. 촛불의 스펙터클을 ‘긍정적으로’ 기록한 책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에서도 차병직 변호사는 “촛불집회 평가 작업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과도할 정도의 상찬 일색이었다. …우리 학자들은 시민권이 발동되는 역사의 현장을 구경하고 감상할 줄만 알았지. 정확히 평가하고 다수가 수긍할 만한 지침이라도 제시했는가”라며 촛불과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지식인들이)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는 대중 자율성의 낙관적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그 자율성이 넘어서지 못하는 경계들을 지적하고 그 한계를 드러냈어야 했다”라는 백승욱 교수의 지적과도 궤를 같이한다. 이런 지적은 결국 2008년 촛불의 의의를 새롭게 환기해준다.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촛불의 양질 전환’을 기대하는 이들이다. 촛불이 비정규직을 외면했다는 지적에 대해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애초 가족 이기주의로 시작한 미국 쇠고기 문제가 정부의 책임을 묻는 공공성 영역으로 확장됐듯이, 비정규직 문제도 사라지고 마는 게 아니라 앞으로 다른 사회 의제와 결합해 큰 이슈가 될 것이다”라며 낙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신진욱 교수 역시 “하나의 저항 행동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짊어진 문제를 다 담으려는 건 무리다.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다. 오히려 쇠고기 문제 때문에 거리에 나온 시민 중 일부가 추후 기륭전자 투쟁이나 미디어 공공성 문제에 대해 후원금을 내는 등 변화된 양상을 보이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라며 촛불시위를 성급하게 재단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신 교수는 특히 촛불집회에 참가한 중산층에 대해 해석을 달리한다. “촛불시위 참여자를 분석한 통계를 보니 지난 선거 때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찍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그들은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뉴타운 공약에 반대했다. 이들에게 이기적 중산층 이미지를 덧씌우는 건 정치적으로 옳지 못하다”라는 게 신 교수의 의견이다. 일부 비평가의 지적처럼 촛불 시민이 ‘부동산’과 ‘내 새끼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소시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촛불은 ‘청산’ 대상이 아니다. 촛불은 보이지 않는 ‘무형 자산’을 많이 남겼다. 윤여일 ‘수유+너머’ 연구원은 지난해 ‘레디앙’에 기고한 글에서 “아고라를 통해 국민이 사회 이슈를 학습하면서 뉴라이트, 조·중·동 등 우리 사회의 권력 관계에 대해 총체적으로 읽어내기 시작한 점이 중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은수미 연구위원도 “불과 2~3년 전만 해도 파업 노동자에게 욕설을 퍼붓던 ‘아고라’ 누리꾼이 지난해 화물연대와 YTN·MBC 노조의 파업이 정당하다며 지지하는 걸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라고 털어놓는다. 민노당의 한 관계자도 “촛불이 아니었다면 의료 민영화나 공교육 문제 등에서 진보 정당이 목소리를 높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김상곤 후보가 당선한 것도 그동안 축적된 촛불의 힘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이택광 교수도 “그동안 정치적으로 배제돼 있던 10대나 직장인 여성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한계를 느끼고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왜 촛불을 들었는지, 그들을 대의하는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게 지식인의 몫이다”라고 지적한다.
 
결국 양쪽의 생각은 비슷하다. 어찌해야 촛불의 힘이 구체적인 정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촛불이 계속 타오르기를 기대하는 이라면 다음과 같은 신진욱 교수의 생각에 희망을 걸어야 할 것 같다. “촛불은 워낙 스펙터클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은 촛불이 꺼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흩어진 것뿐이다. ‘언론소비자주권연대’ ‘진실을 알리는 시민’ 등 촛불집회 이후 새로 생긴 운동단체가 무척 많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흩어진 이들이 ‘촛불 민중’으로 다시 모여 새로운 정치적 힘을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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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패배했다고 말하지 말라 (참세상, 최인희 기자, 2009년05월13일 18시10분)
[새책] <미네르바의 촛불>, 조정환, 갈무리
 
지난 1년 동안 한국사회를 휩쓴 '촛불'은 시위, 축제, 저항으로서만의 촛불은 아니다. '조직적이지 못한' 촛불을 비관했던 일부가 촛불시위의 거대함을 체험하면서 보인 반응은 거칠게 두 가지다. 진정한 민주주의, 혹은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라고 칭송하며 받아들이거나, '도대체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며 머리를 감싸거나. 그리고 1년이 지나 촛불이 수그러들기 시작하면서 이들 일부는 짐짓 냉정하게 '촛불의 모순' 또는 '촛불의 실패 원인'을 평가하고 있다.
 
자율주의 학자인 조정환은 촛불에 과감하게 '봉기'를 붙였다. 이 책에선 직접행동에 대한 찬사와 더불어 촛불 이후 쏟아져 나온 이른바 '냉소주의적 촛불론'을 전면 비판하고 있다. 소위 '진보 엘리트'들이 촛불을 대상화하면서 내리는 해석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경찰, 법정, 감옥을 잇는 국가의 물리적 폭력과 대면해야 했던 촛불은 이제 자신에 대한 정신적 환멸과 해석의 폭력 앞에 직면했다. 그 환멸의 시선과 해석적 단죄가 이른바 '진보'를 자임하는 엘리뜨들로부터 나올 때 촛불은 역사와 사회로부터 총체적으로 추방당하는 셈이다."
 
촛불을 사회정치적 차원과 존재론적 차원으로 나누어 본다면 최소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촛불은 영원하고 승리한다"고 자신한다. "언제나 삶을 인도하는 것은 촛불이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것은 이 존재론적 촛불, 영혼의 촛불을 가시화하고 사회하는 행동이다"라는 찬사도 이어진다. 이의 근거는 이 책이 밝히고 있는대로 맑스의 노동이론, 푸코의 삶권력론, 들뢰즈의 잠재력론, 네그리의 다중론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70년대 재야운동, 80년대 민중운동, 90년대 시민운동과 다른 촛불운동의 특질을 연구한 결과기도 하다.
 
이는 "촛불이 폭발한 지점은 바로 이(FTA, 민영화) 자본순환의 고리에서였다. 촛불은 생명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는 자본의 세계화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쇠고기를 기폭제로 하여 터져나온 것이다"에서도 드러난다. 촛불봉기가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혁명'이라며 지난해의 촛불을 "우리는 아직 아무 것도 쟁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미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고 요약하기도 했다.
 
"촛불은 전 지구적 평화를 갈망하는 삶정치적 성찰의 무기이며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깃든 혁명적 불빛이다. (...) 생명이 영원한 만큼 촛불도 영원하다" 같은 애정과 희망이 일관되게 묻어나는 책. 2008년 3월부터 지난 달까지 하루하루 상세히 기록된 책 말미의 '촛불봉기 일지'도 돋보인다. 저자의 견해대로 촛불이 '혁명의 징조'이자 '자율적 봉기'이건, '실체 없는 환상'이자 '유령이거나 광기'로 불리건, 촛불 1주년인 현재에 다시금 '촛불논쟁'의 중심이 될 조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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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자율적 주체의 봉기” “중간계급의 ‘욕망 정치’”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5-14 오전 10:11:32)
조정환-이택광 온라인 논쟁
조 대표 “진행중인 승리” 이 교수 “실패한 행동”
저서 ‘미네르바의 촛불’ 계기 블로그로 4차례 공방 

 
“촛불이라는 판타지 너머의 실재를 직시하라.” “촛불이 판타지라는 당신 생각이 판타지다.”  
‘2008년 촛불’을 둘러싼 논쟁이 온라인을 달구고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와 도서출판 갈무리의 조정환 대표가 논쟁의 두 당사자다. 촛불의 성격을 각각 ‘욕망의 정치’(이택광)와 ‘자율적 봉기’(조정환)로 규정하는 이들의 견해는 촛불을 둘러싸고 형성된 진보적 담론 지형의 양 극단에 위치한다. 그만큼 이해와 공감의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표면상 싸움을 ‘도발’한 것은 이 교수다. 그는 지난 5일 자신의 블로그(http://wallflower.egloos.com)에 글을 올려 조 대표의 책 <미네르바의 촛불>에 대해 “정교한 분석이라기보다 (자율주의 정치이념의 우월성을 강변하는)정치 팸플릿의 느낌”을 풍긴다고 꼬집었다. 그러자 이틀 뒤인 7일 조 대표가 자기 블로그(http://blog.daum.net/nalsee)에서 이 교수의 비판을 “촛불을 유령이나 광기로 보는 조선일보의 시각과 다를 게 없다”고 반박했고, 이를 계기로 비판과 반비판이 꼬리를 물면서 일주일 새 네 차례의 날선 공방이 두 사람의 블로그를 오가며 펼쳐졌다.
 
12일 현재 논쟁의 초점은 이 교수가 독일 문예비평가 발터 베냐민의 도시경관 분석에서 빌려와 촛불 분석에 활용한 ‘환등상’(phantasmagoria·판타지) 개념이 본래의 현실비판적 함의를 담고 있는지에 맞춰져 있다. 요컨대 베냐민이 근대 도시의 풍경을 ‘환등상’으로 묘사할 때는 ‘허상’이란 의미와 함께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동시대인의 ‘유토피아적 열망’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 교수는 단지 ‘허상’과 ‘환상’이란 의미로만 사용하고 있지 않느냐는 게 조 대표의 생각이다.
 
하지만 대립의 지점들은 이것 말고도 많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촛불 참여자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다. 조 대표는 촛불시민을 ‘내적인 차이를 유지하면서 적극적 소통을 추구하는 자율적 주체들’로 규정한다. 대중들의 능력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 교수는 이들에게서 괴담과 유사과학에 휘둘릴 수 있는 “일정한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본다. 이런 그의 시선에 포착된 촛불의 주역은 이명박 정부를 향해 ‘우리도 부르주아가 누리는 쾌락에 동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중간계급과 이들의 아들딸”이다.
 
촛불의 ‘결과’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세우고 혁명적 주체를 만들어낸 사건으로 보기 어렵다”는 진술에서 드러나듯 이 교수에게 촛불은 사실상 실패한 “중간계급의 행동”이다. 그러나 조 대표가 볼 때 이런 이 교수의 관점은 눈앞의 성과물이 있느냐 없느냐로 성패를 따지는 ‘군사주의적 오류’에 빠져있다. 그에게 촛불은 참여자들이 ‘삶을 가꾸고 갱신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진행 중인 승리’다.
 
각자 의지하는 이론적 배경도 차이가 있다. 대중의 자율성과 자기해방 능력을 신뢰하는 조 대표의 논의가 네그리의 다중론과 집단지성론에 기반하고 있다면, 모든 정치·사회적 실천을 관통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욕망의 정치’에 주목하는 이 교수는 라캉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논쟁은 조 대표가 “틈 나는 대로 쟁점 주제들을 연재형식으로 다루고 최종적으로 그것들을 하나의 글로 묶거나 재서술하겠다”고 밝힌 데다, 이 교수 역시 “필요할 때마다 조 선생의 비판에 답변을 올리겠다”는 입장이어서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관전하는 블로거들 역시 두 사람의 게시글에 질문이나 훈수성 댓글을 달며 선전을 독려하고 있다.
 
이 논쟁에 대해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는 “촛불에 대한 담론이 현상기술의 차원을 넘어 이론적 분석과 효과적 저항 전략을 모색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촛불이 놓여있던 정치·사회적 맥락이나 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경향들에 대한 고려 없이 촛불을 하나의 동질적인 현상으로 몰아가려는 획일성이 엿보인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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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 〈법을 보는 법-법치주의의 겉과 속〉

 

“위법을 무릅쓴 투쟁, 법 진보의 동력” (한겨레, 허미경 기자, 2009-05-08 오후 09:01:00)
교통범칙금서 헌법까지 법 일반 쉽게 푼 안내서
근대사 배경 사례 담아  

〈법을 보는 법-법치주의의 겉과 속〉 김욱 지음/개마고원·1만2000원

 
여기 교통신호를 어긴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한 달 150만원을 버는 임시직 택시기사이고, 또 한 사람은 한 달 3000만원을 버는 고소득 기업 임원이라고 치자. 이 둘에게 ‘똑같이’ 6만원의 범칙금이 부과된다면 ‘평등한’ 법 집행일까? 아니면 각자의 소득 수준에 비례해 ‘차이나는’ 액수의 범칙금을 매기는 것이 ‘평등’할까?
 
<법을 보는 법-법치주의의 겉과 속>은 우리의 작은 일상에 끼어드는 교통범칙금에서부터 모든 법의 상위법인 헌법에 이르기까지 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로 안내하는 책이다. “법이 걸어온 근대 역사를 배경으로 법에 관해 체계적 이해를 하는 것을 목표로” 쓰인 책이다. 앞에서 든 교통범칙금 에피소드에서, 택시기사는 범칙금 6만원이면 하루 일당이 날아가지만 고소득 임원에게 그 돈은 껌값이다. 똑같은 잘못에 똑같이 처벌받는데도 어떤 사람은 큰 고통이고 어떤 사람은 별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과연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이 책의 화두 중 하나다. 한국을 비롯한 현대 국가들은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치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법 앞에 군림하는 사회적 강자들과 이를 방관하는 법치주의의 모습은 우리의 현실이다. “현실의 법은 오늘날까지도 틀림없이 강자의 법일 수밖에 없다.”
 
교통법칙금 ‘차등’부과제도가 일각에서 검토되고 있듯이, 지은이는 법적 정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법 규정들의 총체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실정법을 정의라 부른다 해도 그 정의는 ‘역사적 한계 속에서 변화하는 정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법이 이렇게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법을 바꾸는 힘은 무엇인가. 법이 제정되고 개정되는 동력은 역설적으로 ‘위법’이다. 우리가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여기는 헌법적 권리인 기본권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헌법에 열거돼 있는 재산권,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종교와 양심의 자유, 평등권 등의 기본권은 서구 시민혁명의 소산이다. 중세 봉건시대를 끝장내고 자본주의 시대를 개막시킨 근대 부르주아 계급은 이런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 ‘위법적으로’ 투쟁한 세력인 것이다.
 
지은이는 지난해 촛불시위가 흥미로웠던 것은 대의민주주의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한국에서, 진부할 정도로 오래된 역사적 논쟁이 아주 새로운 21세기적 방식으로 재연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촛불시위와 이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은 민의와 민의 대변자 사이의 모순을 드러냈다. 민주주의와 대의제의 충돌이다. 이른바 기관 구성권과 정책 결정권을 분리해서 국민에게는 기관 구성권만을 행사하게 하고 국회의원에게는 정책 결정권을 위임한다는 대의제 원리는 18세기 후반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 정식화됐다. 이런 대의제 주장은 17세기 시민혁명 속에서 부르주아의 지배권 확립을 고민했던 로크 시대가 아니라, 부르주아가 기득권자로 안정을 찾아가던 버크 시대에 비로소 나온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실정법의 정당성을 논하지 말고 법을 설명하고 그 주석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곧 법실증주의가 맹위를 떨쳤다.
  
부르주아 계급에 의한 자본주의 건설의 결정적 토대가 된 이데올로기이자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기본권을 만들어낸 17~18세기의 혁명적 자연법론은 왜 법실증주의에 자리를 양보해야 했을까? “자연법론은 중세를 무너뜨리는 혁명기가 아닌 자본주의의 안정기에는 다소 불편한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며 영국 대의제를 공격하던 미국 독립 지도자들도 신대륙의 통치계급이 되자 태도가 돌변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대표가 없는 한, 영국 의회가 식민지를 포함한 전체 이익을 실현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던 그들은 독립 뒤에는 “국민 대표를 통한 대중의 목소리는 국민의 직접적인 의견보다 공익에 더 부합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르주아는 기득권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대의제와 민주주의에 관한 역사적 논쟁에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피지배계급의 무기였으며 대의제는 지배계급의 무기였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와 대의제가 선택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호 대립하면서 상호 의존하는 모순관계 속에서 진보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니 헌법은 대의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것과 모순되는 국민투표, 국민발안, 국민소환제 등의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동시에 규정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법을 보는 눈만으로는 결코 (법이) 보이지 않는다. 법을 보는 눈은 법 밖을 보는 눈에 의해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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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의 <위기 그리고 그 이후>

 

[주말을 여는 책]자크 아탈리의 <위기 그리고 그 이후> (내일, 박순철 칼럼니스트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 2009-02-20 오후 2:10:56)
세계 경제위기의 공적 ‘정보선점자들’  
‘위기 그리고 그 이후’, 자크 아탈리/양영란 옮김/위즈덤하우스/1만2000원
 
소시민의 갇힌 분노는 21세기라고 다를 바 없다. 재래시장에서 몇 백 원, 몇 천 원을 바가지 썼다고 분노하지만 피땀 흘려 장만한 아파트 값이 몇 천 만원씩 떨어져도 속만 탄다. 그건 마치 천재지변 같아서 원망할 대상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자산가격 폭락, 도산, 실업, 가정 파탄. 미국발 금융위기가 초래한 음울한 풍경들이다. 뭉크의 비명이 세계 도처로 퍼져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게 천재지변인가? 물론 아니다. 큰 사고가 터지면 흔히 하는 말로 인재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잘못한 결과다.
 
자크 아탈리에게 분노의 대상은 분명하다. 그 이름은 ‘정보선점자들’이다. 유럽부흥개발은행의 총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저서 ‘위기 그리고 그 이후’에서 이들의 행태를 심지어 강도짓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는 정보선점자들이 시장의 위험을 잘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다면서, “그것은 은행금고에서 최대한 많은 금괴를 빼내기 위해 경찰이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범죄 현장을 떠나지 않는 강도들의 행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까지 비난한다. 특히 금융기관 내에 포진한 이들은 은행의 경영진마저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상품들을 계속 만들어 내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부채담보부증권, 신용부도스와프는 그 대표적 예일 뿐이다. 그 결과 부채는 팽창을 거듭해 마침내 통제 불능한 상태에 이르렀고, 드디어 그 한계점에서 집단 패닉현상을 낳기에 이르렀다. ‘빚의 빅뱅’이었다.
 
그렇지만 어디선가 이런 반론이 들리는 것 같다. 정보선점자들이 범법자였는가? 만일 그렇다면 왜 법으로 다스리지 않았는가? 만일 도덕적 근거에서 그들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마음껏 추구하라는 시장의 지상명령과는 어떻게 양립하는가?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활용했을 따름이 아닌가? 법과 도덕의 차원에서 풀어야 할 숙제의 한 가닥이다.
 
현실의 과제는 물론 더 절박하다. 우선 여기서 주어진 상황이란 무엇보다도 70년대쯤부터 미국 경제에 불어 닥친 총수요의 부족이다. 공정한 소득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중산층의 소비가 위축되자 빚에 의한 수요 진작이 정책적으로 시도되었다. 이를 위해 연준은 저금리체제를 선택했다. 가계뿐이 아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주식 가격의 상승에 따라 경영진에게 천문학적인 보수가 돌아가면서 빚에 의존해 단기적인 성과를 거두는 게 왕도였다. 기업 경영진들과 금융업자들은 아주 적은 자기 자본만으로 엄청난 대출을 일으켜 기업들을 사들였다. 금융위기의 ‘민스키 모멘트’가 운명적으로 예약돼 있었다.
 
신용시장이 자산가격에 의해 주도되는 한 신용의 수요와 공급은 균형을 잃어 금융위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경제학의 논리가 확인된 건 서브프라임 위기가 처음은 아니다. 20세기 후반 유럽의 선진국들에서도,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개도국들에서도, 금융자유화와 부동산 거품으로 대표되는 심각한 금융위기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아탈리는 ‘자본주의가 사라질 뻔한 날’이라는 드라마틱한 제목의 장에서 2008년 가을의 긴박했던 상황을 복기(復碁)한다. 선진국의 수뇌들이 사태의 중대성과 필요한 조치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던가가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결국 시장의 논리는 버림받았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전혀 개입하지 않고 시장의 자율과 무규제에 맡기는 것이 경제와 정치를 성공으로 이끄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보인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해 참으로 금석지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이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아탈리의 표현대로 ‘독약’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벌써 시작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고 말한다. 은행들은 기업대출을 꺼려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은행을 제외한 금융기관들이 파국을 맞으면서 자산 가치는 심각하게 하락하며, 돈줄 노릇을 했던 중국이 돈을 자국으로 되돌려 달러 가치는 추락하리라는 게 악몽의 일부다. 그는 2년에서 5년 정도 계속될 디플레에 이은 인플레의 위협도 잊지 않는다.
 
위기는 사물의 근본을 드러낸다는 말이 있다. 대공황에 비견되는 이번 위기는 세계경제의 지층 깊은 내부에서 요동치고 있던 불균형의 힘들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더 큰 지진들이 터지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그러나 결코 간단하지 않다. 그 가운데는 충분한 임금 지급으로 소득불균형을 해소해 총수요를 진작시키고, 금융 시장의 권력을 법의 권위 밑에 두는 것이 포함된다. 제대로 된 민주정치만이 제대로 된 법치를 마련할 수 있다면 이는 정치 발전과 경제 발전의 상호의존에 대한 근본적인 각성을 요구한다. 아탈리는 세계정부의 필요성까지 내비친다. 대공황은 케인즈주의를 등장시켰다. 8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초대형 위기가 이번에는 자본주의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 것인지.
 
이렇게 문제의 거대함을 보면서 김수영의 시가 고발했던 우리의 작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겁먹은 타조처럼 땅에 머리를 처박을 수도 없다. 사실 아탈리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어쩌면 약간의 낙관이 현재 필요한 구급약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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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소로, <시민불복종>

   

‘닫힌 귀’에 불복종할 양심 (한겨레, 박혜영 인하대 교수·영문학, 2009-06-19 오후 07:31:43)
시대를 읽는 문학 /
 
조용하고 아름다운 월든 호숫가에서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자급자립의 소박한 삶을 꿈꾸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2년 만에 다시 마을로 내려오게 된다. 당시 미국은 노예제 폐지 논쟁과 미국의 멕시코 침략 전쟁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마을로 돌아온 그는 <월든> 집필에 앞서 중요한 연설문을 먼저 발표하는데, 그것이 바로 1849년에 출판된 <시민 불복종>이다. 톨스토이와 간디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 글은 미국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은 이유로 감옥에 갇혔던 소로의 실제 경험에서 시작된다. 소로는 1846년에 일어난 미국의 멕시코 침략 전쟁에 반대하여 납세를 거부했지만 사실은 이미 6년 전부터 미국 정부의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인두세를 내지 않고 있었다. 비록 하룻밤 감옥생활이었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소로는 정부에 대한 시민의 의무, 정의에 대한 법의 의무,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인간의 의무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미국의 멕시코 침략은 서부를 개척하고 태평양까지 영토를 넓히는 것이야말로 신이 미국에 부여한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이른바 미국식 팽창주의 때문에 일어났다. 미국 이민자들이 많았던 텍사스가 공화국을 선포한 뒤 멕시코에서 독립하여 미국 연방의 28번째 주가 되자 미국과 멕시코 간의 영토분쟁은 본격화했다. 영토확장과 노예제 유지를 주장한 쪽과 전쟁반대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쪽으로 국론은 갈라졌고, 1848년 미국이 무력으로 멕시코 영토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기 전까지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멕시코 대통령도 한탄했듯이 멕시코는 신에게서는 너무 멀고, 미국과는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소로는 미국시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다시 말해 법이 아닌 양심과 정의에 따르기 위해 미국 정부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소로는 “우리는 시민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먼저 개발해야 한다”며 누구든 부당하게 사람을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인이 갈 곳은 감옥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소로는 이 연설문의 제목을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이라고 붙였다. <시민 불복종>이란 제목은 소로 사후에 출판사가 붙인 것이다. 소로는 이 제목으로 비록 선거로 정권을 잡은 시민정부라 하더라도 한 국가가 전쟁을 벌이거나 노예제와 같은 비인간적인 폭력을 휘두를 때는 여기에 저항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임을 분명히 했다. <매사추세츠의 노예제>라는 글에서 소로는 “지금 시급한 것은 다수결의 결정이나 헌법보다 더 상위의 법을 인지할 수 있는 인간의 고결성이다”라며 양심과 도덕을 국가의 법보다 더 우위의 법으로 놓았다. 시민 불복종 정신은 국가권력마저 보편적 인권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정부나 국가체제의 절대적 적법성을 부인한 급진적인 민주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아무리 합법적으로 선출된 국가체제라 할지라도 보편적인 정의와 인권에 어긋나면 그 존립의 적법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로는 일순간이라도 왜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을 입법자들에게 위임해야 하느냐며, 그렇다면 도대체 왜 모든 사람들이 양심을 가지고 있느냐고 반문했다.
 
‘양심’이란 영어 단어는 ‘모두 함께 안다’(con-scienc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곧 양심이란 서로 물어보지 않아도 인간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공통된 생각을 말한다. 인간 공동체가 모든 행위의 판단기준으로 오랫동안 의지해온 공통의 지혜가 바로 양심이기에 양심이란 마치 개별적인 판단처럼 보여도 실상은 사회 내에서 보편적인 도덕적 잣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소로는 자신이 낸 세금이 인간을 상품처럼 사고파는 노예매매에 쓰이거나 아니면 영토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양민을 죽이는 행위에 쓰인다면 시민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위는 보편적 양심에 따라 납세를 거부하고, 그로 인해 감옥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생각한 대로 실천했다.
 
소로는 노예매매와 멕시코 침략 전쟁 모두 오직 이윤만 추구하는 상업주의의 팽창 때문에 생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원칙 없는 삶>이란 글에서 온 세상이 온통 비즈니스로 뒤덮여 있다며 이렇게 한탄했다. “나는 범죄나 다른 그 어떤 것도 끊임없는 비즈니스보다 철학과 시, 아니 나아가 삶 자체에 대해 더 적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법과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오직 사적 이윤만 끊임없이 추구하는 팽창주의가 사회 전역으로 퍼질 때 보편적인 양심과 정의에 토대를 둔 공동체는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물론 그 붕괴는 사회의 가장 약자들부터 덮치게 마련이다. 소로는 월든 호수를 위협하던 벌목의 굉음과 기차 소리, 남부의 흑인 노예와 그보다 더 불쌍하다고 본 북부의 공장 노예들, 스페인에 이어 미국에도 땅을 뺏긴 멕시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다 동일한 붕괴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과연 소로의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을까. 경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비록 정체를 가렸지만 여전히 우리 정부도 시민들이 양심껏 납부한 세금으로 마치 쓰레기처럼 사람들을 쓰다 버리고, 그들이 살던 땅과 집을 빼앗고, 나아가 4대강을 상대로 벌이는 22조원의 개발전쟁에 쏟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들은 이런 일에 세금을 내야 하는가? 소로는 부당한 정부에 불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복종은 시민이 아닌 정부가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했다. ‘복종’(obedience)이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은 ‘귀를 기울인다’(ob-audio)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소로를 읽다보면 철거민들의 분노와 해고자들의 고통에, 그리고 개발의 굉음으로 온 국토를 휘감을 저 강과 계곡의 절규에 정작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정부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귀를 닫을 때 정부권력의 적법성은 사라지고, 마침내 시민불복종은 시작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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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조지프 히스

우파와 좌파가 저지르는 오류를 각각 6개씩 선정하여 그 허구를 파헤치고 있다. 저자는 좌파에 애정이 있다고 하지만, 좌파가 그렇게 무능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글쎄다.
 
노동력의 가치 문제. 저자는 철학자로서 경제학을 독학했다는 데, 그 경제학은 부르조아 경제학인 모양이다. 좌파 철학자라면 마르크스 경제학도 기본개념은 알아야 하고, 양자가 그 토대와 전제에서부터 다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사례를 통한 설명의 문제.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와 반대되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주장하는 바를 일반화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투덜거리기야 누가 못하나.
 
환경문제의 적이 성장이라는 주장 역시 지나치게 단편적인 발상? 자원이 한정되어있다고 한다면 그 성장이 과연 타당한지에서부터, 이를 통해 행복해졌는지도 검토해야 하지 않는가. 저자는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읽어보았을까.
 
암튼 읽어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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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아시아경제신문 박소연 기자, 2009.06.11 11:25)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사회정책 다툼은 결국 경제문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보수진영은 국가경쟁력을 주장하고, 진보진영에서는 공정성을 이야기한다. 새책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은 좌파와 우파가 모두 경제적인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데도 서로 눈치 채지 못한 채 제 주장만 하면서 논쟁이 헛도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은이의 비판은 이데올로기의 양 진영을 오고가는 탓에 양비론이라는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어 보이지만 지은이의 주장의 요지는 '실천 가능한 방편'을 찾자는 것. 지은이는 신랄한 필치로 시장과 자본을 예찬하기에 바쁜 경제학자들과 우파의 논리를 비판한다.
 
자본주의와 시장은 자연발생적이므로 외부의 간섭과 개입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가장 오래된 강력한 논리지만, 자본주의는 아주 정교한 사회적 구성물이지 결코 자연발생적 산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결국 제한된 정부와 자유방임적자본주의에 대한 굳은 신념이란, 원리원칙에 근거한 개인자유의 수호가 아닌 투자자금 보유자에 대한 자의적 특권 부여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즉 우파의 '작은 정부' 요구는 부유층에게 득이 되는 정부 프로그램은 놔두고 다른 건 전부 없애라는 요구에 해당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아울러 책은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반기를 든다. 인간이 행동하는 데에 인센티브가 중요하지만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며 이 마저도 지극히 복잡하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당장의 이익만큼이나 평판에 신경을 쓰며, ABS(자동차가 급제동할 때 바퀴가 잠기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개발된 특수 브레이크)를 장착했더니 오히려 사고율을 높아졌다는 이야기 등을 통해 효율성으로만 따질 수 없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이야기한다.
 
누구나 세금을 싫어하지만 특히 우파는 언제나 감세를 외친다. 세금을 걷어가는 정부를 향한 싸늘한 시선에는 정부는 부를 소비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지적이다. 책은 정부는 부의 소비자이며 민간 부문은 부의 생산자라는 것인데, 이런 관점은 완전한 착각이라며 사실상 국가는 시장과 정확히 동일한 양의 부를 창출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시장은 부를 창출하지 않으며 부를 산출하고 소비하는 주체는 사람이라는 것. 정부나 시장 같은 제도는 아무 것도 생산하거나 소비하지 않으며, 그저 사람들이 부의 생산 및 소비를 계획하고 조정할 수 있도록 일정한 장치가 되어줄 뿐이라고 강조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와 경제학을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대책 없이 반대만 할 뿐인 좌파에도 일침을 놓는다. 왜곡된 지배구조와 모든 분야에 뛰어드는 문어발 식의 확장때문에 반기업 정서가 더욱 심할 수 있지만 기업 그 자체를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윤은 악의 근원이 아니며 기업으로부터 직접 공익을 이끌어내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 협동조합이 자본주의의 첨병인 주식회사를 넘어서는 방식이라고 믿는 좌파들에게 주식회사도 특수한 종류의 협동조합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책은 "사기업한테 이윤 극대화뿐 아니라 공익까지 걱정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물개한테 생선만 좋아하지 말고 점프로 후프 통과하기도 좀 좋아해보라고 설득하는 것과 같다"며 "그보다는 물개가 후프를 통과할 때마다 생선을 주는 편이 훨씬 길들이기 쉽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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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곱씹은 좌·우파 경제오류 (경향신문, 김학순 선임기자, 2009-06-12-17:32:00)
ㆍ“세상은 자본주의를 미워해도 똑 떨어지는 대안은 없다, 머리를 맞대라”
 
<혁명을 팝니다>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조지프 히스 토론토대 철학과 교수는 최신작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원제 Filthy Lucre: Economics for People Who Hate Capitalism)에서 <해리슨 버저론>을 흥미롭게 예로 들며 좌파 진영의 아킬레스건을 파고든다. 제목만으로도 좌파 비평서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여름휴가 목적지인 하와이까지 가지 않고 하와이 근처까지만 데려다주는 항공권이 있다면 태평양 한가운데 떨어질 게 뻔한 이 항공권을 아무리 헐값이라도 누가 사겠는가. 이런 재미있는 비유로 경쟁만이 만병통치약이며 시장만이 해법이라는 우파의 단견들도 헤집는다. 시장을 가능한 한 경쟁적으로 만들기만 하면 이상에 근접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자본주의 옹호자들의 논리는 하와이가 아니라 하와이 근처까지 가는 황당한 항공권과 같다는 설명이다.
 
지은이는 먼저 우파들이 흔히 저지르는 경제적 오류들을 도마에 올려 칼질한다. 개인의 게으르고 무지한 결과인 가난을 정부와 사회가 책임질 이유가 없다며 복지혜택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우파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우파가 도덕적 해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도덕적 해이가 하나의 변수인 것은 분명하나 공공부조 제도를 통째로 포기할 근거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감세는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견해도 정부가 소비자라는 그릇된 신화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오류라고 저자는 통박한다. 이는 우파가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을 내세우는 근거로 편리하게 이용하는 마술모자 역할을 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시장만 있으면 모든 게 잘 돌아가니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는 논리는 ‘부유층에게 득이 되는 정부프로그램은 놔두고 다른 것은 모두 없애라’는 요구나 다름없다고 지은이는 반박한다. 복지국가 스웨덴의 자본주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보다 더 높은 수준의 소득평등을 이루었다는 점을 역설하며.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의 저자 토머스 프리드먼이 지나치게 앞세우는 국가경쟁력은 정부와 기업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논박한다. 무역은 기본적으로 경쟁우위가 아니라 비교우위라는 점을 우파가 잊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좌파가 흔히 빠지는 함정 가운데 첫 번째로 공정가격과 공정무역을 든다. ‘노동에 대한 적절한 가치를 지급하는 무역의 도덕성’이라는 모토가 유행처럼 호응을 얻고 있으나 여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근본 치료는 젖혀 두고 증상만 슬쩍 완화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빈곤은 가격조정이 아니라 소득분배로 해결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기업의 이윤추구에 알레르기 반응이나 반기업정서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눈을 흘긴다. 
 
저자는 우파가 자기들 견해의 근거로 내세우는 쓰레기 같은 논거를 대부분의 좌파들이 제대로 지적해내지 못한다는 점을 좌파의 경제학적 무지가 부르는 첫 번째 문제로 꼽는다. 의도는 좋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없거나 돕고자 하는 수혜자에게 막상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을 만들고 선전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는 사실이 또 다른 문제점이다.
 
그러고 보면 우파와 좌파가 저지른 경제 오류를 싸잡아 비판하고 있어 양비론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수 있겠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이에 대한 대답도 준비하고 있다. 경제학이 빈곤, 불평등, 사회적 배제 등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해결책으로 풀 수 없다는 점을 떠올리려 한다. 지은이는 특히 비용편익분석을 하면서 좌·우파 공히 십중팔구 저지르는 오류를 족집게처럼 집어낸다. 자신이 싫어하는 정책의 온갖 비용은 모두 합치고 편익은 싹 무시해버린 다음 ‘사회악’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두고 저자는 ‘비용은 넣고 편익은 빼자 오류’라고 부른다.
 
세상은 자본주의를 그렇게도 미워하고 의심하지만 이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란 지독히도 어려우니 이를 개선하는 궁리에 머리를 맞대보자는 게 결론이다.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닌 철학자인 점에 신뢰를 삭감할지도 모르겠으나 매우 기본적이고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있는 오류들을 실례로 들어 설명하는 미덕이 돋보인다. 문체도 때로는 가시가 돋았고 때로는 넘치는 재기로 번뜩인다.
 
저자는 좌파에게 정신이 번쩍 드는 똥침을 놓지만 겨냥하는 주독자층은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들인 것으로 보인다. 매에 애정을 담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을 전공한 좌파이자 환경론자이기도 하다. 상업주의가 돼버린 반문화를 비판한 히스의 전작 <혁명을 팝니다>를 감흥 깊게 읽은 독자라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노시내 옮김. 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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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 ‘보이는 손’ 둘 다 고쳐라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9-06-12 오후 07:08:10)
“하와이까지 98%만 가면 태평양 풍덩” 100% 완전경쟁 근접 가정한 시장주의 비판
“절전형 전구로도 전력소모 못줄여” 튀는 사례 제시하며 좌파에도 “더 공부하라”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조지프 히스 지음·노시내 옮김/마티·1만6000원

 
달걀프라이, 스테이크, 베이컨 같은 지방과 단백질만 섭취하고 탄수화물 섭취를 완전히 차단하는 식이요법 황제 다이어트. 정말 몸을 날씬하게 만들어줄까? 그렇게 하면 몸이 굶주리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저장돼 있는 지방을 분해·연소하게 된다고 한다. 한데, 이론대로 성공하려면 몸이 그런 착각을 해야 하고, 또 그렇게 유도하기 위해선 탄수화물 섭취는 절대 엄금이다. 이 요건을 100% 충족시킬 수 있다면 체중이 엄청 감소한다고 한다. 만일 그 요건을 99%만 충족시키면 어떻게 될까? <혁명을 팝니다>라는 책으로 알려진 조지프 히스 캐나다 토론토대학 철학과 교수의 신작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Filthy Lucre: Economics for people who hate capitalism)은 이 얘기를 시카고학파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완전경쟁 신화를 논박하는 도구로 쓴다.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요건을 99% 충족시켜서는, 말하자면 탄수화물을 조금이라도 섭취했다가는 오히려 엄청난 역효과가 난다. 99% 요건을 충족시켰으니 99% 다이어트 효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탄수화물이 몸에 들어오는 순간 몸은 굶주리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자체 저장 지방 분해·연소를 중단한다. 그렇게 되면 다량 섭취한 지방과 단백질 때문에 체중은 오히려 엄청나게 불어난다. 결국 안 하느니만 못하다.
 
완전경쟁 시장에선 ‘보이지 않는 손’이 완전효율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 신화가 지닌 허점도 이와 같다. 실험실이 아닌 현실에서 완전경쟁이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완전경쟁을 상정한 시장은 그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역효과만 더욱 키우는 셈이 된다.
 
미국 본토에서 하와이까지 거리의 98% 지점이라면 태평양 한복판이다. 거기서 내리면 98%는커녕 0.1%의 만족도도 건질 수 없다. 인생 자체가 끝장이다. 히스 교수는 완전경쟁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거기에 가능한 한 근접하는 길을 추구하는 것이 다른 선택보다는 낫지 않으냐는 우파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그런 비유로 한 방 먹였다. 좌우파 경제학 모두 외면해온 켈빈 랭커스터와 리처드 립시의 ‘차선이론’을 차용했다.
 
경제학을 독학한 좌파 철학도 히스는 ‘자본주의는 자연발생적이다’라는 우파의 또다른 명제도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의 약점을 원용해 격파한다. 예컨대 공작새는 수컷이 꼬리가 길고 화려할수록 암컷을 유인하고 번식하는 데 유리하지만, 큰 꼬리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할 뿐 아니라 나는 데도 불리하다. 모든 수컷이 성공한 큰 꼬리의 특정 수컷 모델을 뒤쫓아 진화하게 되면 공작새 전체 종은 결국 절멸하게 될 것이다. 가능한 한 다른 나무들보다 더 높이 자라 햇빛을 많이 차지하려는 나무도 특정의 개별 나무는 그렇게 해서 진화상의 이점을 차지할 수 있겠지만 나무 전체가 그 추세를 따라가면 연약해지고 물과 양분 공급로도 길어져 오히려 무리 전체는 집합적 자멸로 갈 수 있다. 다윈 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접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배경에 깔고 있는 자유경쟁 시장만능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최고 효율을 향한 진화의 무한질주 그 자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도 같은 맥락에서 살핀다.
 
히스 교수는 이 밖에 인간 행위를 좌우하는 것은 인센티브라고 보는 표준경제이론을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조건이 되면 오히려 일찍 귀가하는 택시기사들의 사례로 반박하며, 역시 신자유주의·세계화·자유무역의 사도들이 지난 수십년간 읊조려온 ‘국가경쟁력’의 허구를 까발린다. 히스는 우파가 허구한 날 입에 올리는 ‘국가경쟁력’은 기업과 국가의 작동기제를 혼동한 결과이며, 가진 자들이 임금 삭감, 세금 인하, 규제 완화, 환경기준 약화, 안전기준 면제, 노동 유연성 제고 등을 협박하기 위한 무기로 동원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를 의심하는…>은 이처럼 우파들의 낡은 레퍼토리만 겨냥하고 있는 게 아니다. 책 2부는 좌파의 오류를 비판한다. 요즘 떠오르고 있는 ‘공정가격’ 운동을 백열등을 절전형 전구로 바꾸거나 전기값을 내린다고 해서 전력 소모가 줄지 않는다는 것,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심리적 이완효과 때문에 휘발유 소비를 오히려 늘릴 수 있다는 것, 옥스팸 같은 사회단체나 더바디숍 같은 기업의 원자재값 올려주기가 과잉생산과 현지 경제 난조를 오히려 심화시킨 예를 들며 비판한다. 또 이윤추구를 ‘정신병’으로 매도하는 데 반대하며, 각국 임금 격차는 생산성 차이 때문이고 성장정책이 그 문제를 푸는 지름길이며 환경 파괴 없는 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4대강 개발처럼 환경 파괴, 즉 외부효과 비용 증대로 이어지는 아둔한 성장정책을 그는 ‘비용은 빼고 편익만 (계산에) 넣자’ 오류라고 부른다.) 부의 분배나 평등한 임금, 하향평준화식 평등을 강제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고 부작용만 낳을 뿐이라는 이론도 설파한다.
 
에스에프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미래도시의 대형 전광판이 여전히 자본주의식 광고를 내보내고 있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히스는, 그러나 시장과 자본주의를 일단 긍정한다. 그는 우파가 신봉하는 시장만능 자본주의, 나아가 자본주의 자체를 인류가 종내에는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기존 좌파 이론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2부의 좌파 시각 비판은 “우파들 주장을 깨려면 그런 실효성 없는 ‘안티’ 논리로는 안 되니까, 이렇게 하라”고 코치라도 하는 듯하다. 좌파도 공부 좀 더 하란다. 히스가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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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편한 대로 세상 읽는 좌파 우파, 당신들 엉터리야 (중앙, 박태욱 경제담당 대기자, 2009.06.13 01:15)
 
이 책은 읽기에 결코 편한 책이 아니다.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붙들어온 생각에 대해-좌우의 어느 쪽에 서있건-힐난에 가까운 의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바쁜 세상, 책 읽는 게 시대착오적으로까지 보이는 세상에서, 마음에 안드는 책까지 읽어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우파라면, 부도덕하다는 비난보다는 스스로 논리의 기반으로 삼아왔던 ‘경쟁과 효율’ ‘인센티브’ 같은 일종의 우파적 공리를 엉터리 구랏발로 몰아치는 따가운 반대논리와 마주해야 한다. 좌파에겐 무능이라는 비판보다는 ‘공정’이나 ‘평등’이란 단어의 한 쪽 측면만 붙들어온 교조적 발상에 대한 엄혹한-저자가 좌파적 배경과 사고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할-질책이 더욱 편치 못할 터다. 게다가 말이나 고운가!
 
하지만 거북한 마음을 거두고 딱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이건 단점이 아니고 장점이다. 이 책은 되지도 않는 논리를 들먹여 우파의 반격에 쩔쩔매는 좌파들에게 우파 논리의 진짜 함정-양쪽 학자들의 동의 여부는 차치하고-을 일깨워주겠다는, 그러니 좀 제대로 싸워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다.
 
‘자기 시대의 주류 경제학을 누구보다 확실히 파악한 마르크스’만큼은 안돼도 우파의 뻔한 오류 정도는 잡아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일종의 실전 참고서다. 우파적 시각에서 봐도 미리 어디를 고치고 어디에 방어선을 쳐야 하는 지 다른 시각으로 되짚어 볼 수 있는 분명한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결코 눈꼴시게 볼 것은 없다. 경제학의 여러 논점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들이라면 더더욱 장점이 많다. 책 한 권에서 경제학의 여러 이슈에 대한 양측 논리와 허점을 한꺼번에 까발려 보여주는 책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많은 사례를 들고 그 바탕에 깔린 오류를 지적했지만 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복잡한 세상, 미묘한 심리 속에서 해결책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얘기한다. 자본주의를 미워하고 의심하지만 그 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는 지독히 어렵고, 지금까지 찾아낸 최선책은 ‘일련의 개선안 및 그 밖에 또 어떤 개선이 가능할지 궁리할 때 필요한 지적 도구 몇 개 뿐’이라고 책 말미에서 토로한다. 그렇다고 허망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니다. 붙잡고 궁리해 볼 화두를 좌우 모두에게 던져주고 있다는 점, 일반 독자에겐 관전 포인트를 꼭꼭 집어주고 있다는 점, 그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 조지프 히스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철학과 교수다. 전작 『혁명을 팝니다』로 세계적 주목을 받은 그에 따르면 빠르고 간단한 경제문제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좌파나 우파의 경제적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책을 썼다는 그의 결론은 “세상은 자본주의를 그렇게도 미워하고 의심하지만 자본주의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란 지독히도 어렵다”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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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예찬에 급급한 우파·무지한 좌파에 일침 (서울, 강아연기자, 2009-06-13  17면)
 
“우파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 도발적으로 들리는 이 질문에 발끈하는 사람들 많겠다. 그런 사람이라면 먼저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조지프 히스 지음, 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부터 읽어 보길 권한다. 심기를 불편하게 한 문구는 바로 이 책의 부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 우파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무료로 뭔가를 제공받으면 사람들은 그 서비스를 과도하게 이용하려 들까. 이런 논리 역시 우파의 흔한 주장이다. 저자는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한 공공부조 제도는 복지국가의 발명품이라기보다 수천년간 인간 사회를 존속시켜온 아주 보편적인 제도라고 말한다. 또 도덕적 해이를 핑계로 사회보장제도 축소를 외치는 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몇몇 경제학자들의 논리에도 반기를 든다. 인센티브가 인간의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며 영향을 끼칠 때조차 지극히 복잡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만큼이나 평판에 신경을 쓰는 등 인간의 복잡한 심리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좌파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저자는 상품이든 노동이든 가격을 직접 조절하려는 욕망을 자제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협동조합을 주식회사보다 더 윤리적이라 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각종 협동조합을 자본주의의 첨병인 주식회사를 넘어서는 형태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주식회사도 그저 특수한 형태의 협동조합에 불과하며 모든 협동조합은 소유자의 이익을 도모한다.”고 일깨워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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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매일신문, 조두진 기자, 2009년 06월 17일)
 
지은이는 인간 사회에서 시장과 자본주의의 영속성을 확신한다. 시장을 통한 거래는 형성 그 자체에 노력과 비용이 가장 덜 드는 자생적인 방식이라고 말한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생기고, 거래가 형성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마약 시장의 경우 치안당국의 서슬이 아무리 시퍼래도 판매자와 구매자는 서로를 귀신같이 찾아내고 끈질기게 시장을 형성한다. 이런 예는 시장의 자연스러운 형성을 막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억지로 막으려면 얼마나 큰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지은이는 시장이 없어지기를 기대하거나 시장의 제거에 막대한 노력과 자원을 투입하기보다는, 시장을 더 나은 환경으로 만드는 작업에 집중하는 편이 옳다고 말한다.
 
좌파 지식인들은 흔히 ‘자본이 대기업 대신 소규모 기업으로 더 많이 흘러든다면 경제에도 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은이는 ‘우리의 목표는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부의 창조여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의 예는 부의 창출과 일자리 창출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어느 엔지니어가 중국에 갔다가 삽과 곡괭이로 댐을 짓고 있는 한 무리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일꾼들에게 모터 달린 건설 장비를 주면 몇 달이 아니라 며칠이면 끝날 일이라고 엔지니어가 말하자 공사장 십장은 그런 기계는 일자리를 파괴한다고 대답했다. 엔지니어는 “아, 난 또 당신이 댐 짓는 데 관심이 있는 줄 알았죠.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일꾼들에게 삽 대신 숟가락을 주지 그래요?” '
 
이런 오류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흔히 발견된다. 지은이는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버스 안내양이 사라지는 것도, 엘리베이터걸이 사라지는 것도 한탄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그런 비생산적인 직업에서 해방되면 더욱 가치있는 일에 종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시적이고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일자리 창출은 일부러 도모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경제가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실한 노동자들은 허리가 휘도록 일하는 데 임금은 형편없다.’ 이 역시 좌파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다. 즉 ‘임금은 사회가 특정 노동에 부여하는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회적 인정의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임금은 사회는커녕 고용자가 노동에 부여하는 가치로도 결정되지 않는다. 사회적 인정이라는 오류에서 벗어나 사회 기여도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는 데도 임금이 적다, 그래서 ‘노동자들에게 더 잘해주자’는 말은 일리 있다. 그러나 ‘임금을 더 주자’는 주장은 틀렸으며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열심히 일하는 착한 사람에게 봉급을 충분히 주자는 소리는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자본주의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시장경제에서 임금은 대가이자 인센티브이다. 자선적 가격은 인센티브를 왜곡하고, 결과적으로 형편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우파의 오류에 대해서도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금을 싫어한다. 특히 우파들은 세금을 ‘정부가 소비하는 돈’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정부가 시장에 안기는 세금에 대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인다’고 비난한다. 즉 우파들은 ‘정부는 부의 소비자이며, 민간부문이 부의 생산자’라고 생각한다. 지은이는 ‘국가는 시장과 동일한 양의 부를 창출한다. 다시 말해 국가나 시장은 부를 창출하지 않는다. 부를 산출하거나 소비하는 주체는 사람이다. 치안이라는 임무를 맡은 자가 행하는 서비스는 그 사람이 국가에 속해 일하는 경찰이든 사설경비업체에 고용된 경비원이든 똑같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정부가 세금으로 거둬들인 돈을 땅에 묻어버리거나 태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쓰는 만큼 세금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물론 지나친 세금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경우는 있다. 여기서는 국가가 부여하는 세금을 개괄적으로 보고 있다.)
 
우파는 공공부조(사회복지 지출)가 사람들의 자립심을 방해하고 도덕적 해이를 가져온다고 믿기 십상이다.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한데 누가 일하려 하겠느냐는 것이다. 지은이는 ‘도덕적 해이는 분명히 하나의 변수다. 그러나 도덕적 해이를 걱정해서 공공부조를 통째로 포기할 필요는 없다. (공공보조는 광범위한 차원에서 보험이며, 이 보험을 통해 위험을 분산할 수 있다) 위험 분산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전반적인 효율 증가에 비해 도덕적 해이로 잃는 손실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 사유 재산을 원한다면 절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보험을 원한다면 도덕적 해이를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험 덕분에 거리마다 택시가 돌아다닐 수 있듯, 공공부조를 통해 사회가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다. 지은이는 공공부조(보험)는 만능 경제 윤활유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보험은 ‘개인적 책임’을 ‘사회적 책임’으로 만드는 제도이며, 개인이 책임지기 힘든 부분을 사회가 책임짐으로써 사회를 지키는 제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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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와 우파의 6가지 경제적 오류 (머니투데이, 김채영 리브로MD | 2009/07/04 10:01)
 
잘못된 우파와 좌파의 인식으로 각각 6개의 오류가 도마에 오른다. 우선 시장만능주의, 인센티브 및 경쟁 제일주의, 세금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 등 보수우파의 경제적 오류를 지적한다. 세금을 '정부가 소비하는 돈', '시장만 있으면 모든 게 잘 돌아가게 돼 있으므로 정부는 필요 없다'는 우파의 생각에 대해 오류를 짚어낸다.
 
시장은 경제적 이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개인의 이해관계는 간단히 하나의 집단적 이해로 뭉쳐지지 않는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 목표의 달성을 위해 전원이 행동을 취하게 만들기 위해선 정부의 '보이는 손'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우파의 공공부조가 사람들의 자립심을 방해하고 도덕적 해이를 가져온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저자는 '도덕적 해이'는 분명히 하나의 변수지만, 도덕적 해이를 걱정해서 공공부조를 통째로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위험 분산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전반적인 효율 증가에 비해 도덕적 해이로 잃는 손실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우파의 시각을 조목조목 지적한 후, 그 다음으로 좌파를 겨냥한다. 특히 좌파들이 경제학 공부를 게을리 하면서 무작정 자본주의를 비난만 하는 태도를 문제 삼는다. 자본주의가 의심스럽다고 해서 기초 경제학 지식도 없이 평등 정책을 밀어붙이는 진보좌파 지식인과 운동가들을 비판하면서, 가격 및 임금 조정, 자본주의 붕괴에 대한 환상, 하향평준화를 가벼이 여기는 태도 등 좌파가 저지르는 경제적 오류를 조목조목 짚어준다.
 
좌파는 흔히 자본이 대기업 대신 소규모 기업으로 더 많이 흘러든다면 경제에도 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우리의 목표는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부의 창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좌파의 오류 중 하나로 '공정가격의 오류'를 들어, 가격 조정으로 분배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잘못된 가격 통제가 수요 공급의 왜곡된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저자의 비판은 '좌ㆍ우'라는 양 진영을 오고 가는 탓에 전형적인 양비론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저자는 경제학원론에 기초해 매우 근본적이며 실증적인 방법론을 펼칠 뿐이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상식이 얼마나 오류가 많은지, 미디어에서 전하는 논평들이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 조목조목 따지면서 우리에게 좌우를 떠나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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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만이 아니다, 피터 J 리처슨 등

  

문화가 인간의 진화를 이끌었다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2009-08-05 15:13)
'유전자만이 아니다' 출간
 
진화론이 인류의 변화상을 상당 부분 그려줄 수는 있더라도 여전히 빈칸은 남는다. 인간이 생존에 꼭 필요하지 않는 성질조차 발달시키고 후손들에게 전해왔던 것이다. 이런 성질을 이끌어내는 것은 유전자도, 환경도 아닌 '문화'다. 문화는 진화론에서의 환경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독특한 것이다. 자연선택설에 따른다면 개인적인 학습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학습할 때 개인적 학습을 넘어서 그 행동에 깃든 의미까지 배우고 모방한다.
 
피터 J. 리처슨 미국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 캠퍼스 환경과학정책학부 교수와 로버트 보이드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인류학과 교수가 공저 '유전자만이 아니다'(이음 펴냄)에서 논하는 문화란 인간의 사회적 삶뿐만 아니라 인류의 진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생물학적인 개념이다. 진화론에서처럼 인간을 개개인이 모인 집단인 개체군으로 보고, 이 개체군의 문화가 다시 그 안의 개개인을 변형하면서 인류가 진화한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들은 인간의 힘과 문화의 힘 모두에 경이로운 시선을 보낸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 능동적으로 복잡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진화해 왔으나, 인간의 문화는 거대하고 복잡해져 개개인이 구속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화에 대단히 많이 관여한다. 우리 모두 어떤 문화적 변형을 채택하고 무시할 것인지 선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를 구속하려고 애쓰지만, 문화의 진화는 쉽게 구속당하기에는 너무나 크다. 우리는 집단 수준의 과정을 엄밀하게 관찰함으로써만 문화적 진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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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유전자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서울, 홍지민기자, 2009-08-08  14면)
 
유전자가 결정적인 요소라면 해외 입양아가 본디 태어난 곳보다 성장한 곳의 사람들과 비슷한 의식을 갖게 된다는 점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환경이 중요한 것일까. 이는 이민자 사회처럼 각기 다른 역사와 배경을 지닌 집단이 동일한 환경에서 살더라도 다른 행동을 한다는 인간 집단의 특징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미국 남부는 북부보다 폭력적이라는 통계를 살펴보자. 1865년부터 1915년까지 남부 살인율이 현재 미국 전체의 살인율보다 열 배나 높다고 한다. 현재 미국 남부의 살인율 또한 높다. 남부의 더운 기후 때문일까. 아니면 남부 사람들과 북부 사람들의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일까. 한 연구 결과는 이러한 차이가 문화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정착한 북부와는 달리 남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주로 목축업에 종사했고, 과거 목축 사회에서는 약탈 행위를 막기 위해 기꺼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 이른바 ‘명예의 문화’에 대해 잔뼈가 굵은 남부 사람들은 모욕적인 상황에서 북부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리적인 변화를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진화 사회과학자인 저자들은 문화를 켜켜이 쌓아가는 사회적 학습 과정을 유전자 승계와 같은 독립적인 전달체계로 생각한다면 유전자의 진화와 문화의 진화가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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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환경에 따라 유전자도 진화한다 (한국, 유상호기자, 2009/08/08 02:37:57)
유전자만이 아니다, 피터 J 리처슨 등 지음·김준홍 옮김, 이음 발행·511쪽·2만5,000원
 
저자 피터 J 리처슨과 로버트 보이스는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로 진화생물학의 분석 방법을 이용해 인간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현대 진화론에서는 자연선택의 단위, 곧 진화가 이뤄지는 기본 단위를 유전자로 인식한다. 저자들은 이런 지배적인 관점에서 탈피해 ‘문화’라는 요소 또한 인간의 진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에서는 유전자 중심의 진화심리학, 인간생태학과는 달리 인간 행동을 유전적ㆍ문화적ㆍ환경적 원인의 상호 작용으로 설명한다. 또 유전자의 변형은 심리학적, 동물행동학적 요인뿐 아니라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문화와 유전자의 상호영향에 대한 저자들의 관점은 ‘모든 문화는 진화론의 시각에서만 이치에 맞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는 인간 행동에 대한 통합 이론으로서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의 가능성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유전자와는 달리 문화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변이의 형태와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인간은 자신의 진화에 대단히 많이 관여하고 있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저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엄밀한 관찰을 통해 문화적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다. 문화의 진화에 대한 개요도를 손에 넣은 뒤에야 우리는 인간을 종종 고통에 빠뜨리는 작용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4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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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문화와 유전자는 ‘진화의 단짝’ (동아, 이새샘 기자, 2009-08-08 02:59)
식문화가 인간유전자 변화에 관여, 낙농지역 성인도 우유분해효소 지녀
모방-학습 통해 환경에 빠르게 적응, 유전자와 함께 폭발적 발전 가능케
 
저자들은 문화와 유전자의 상호작용이 영장류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던 선사시대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영장류가 처음 인류로의 발걸음을 내디딘 홍적세(洪積世·약 200만 년 전∼1만 년 전의 시기)는 기후변화가 심한 시기였다. 만약 인류가 온전히 유전자의 자연선택만을 따라 진화했다면 급격한 자연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멸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에게는 ‘문화’가 있었다. 여기서 문화란 점진적 누적적으로 축적된 정보의 집합, 즉 많은 세대에 걸쳐 진행된 환경에의 적응이 한데 저장된 것을 가리킨다. 인류는 함께 모여 살면서 타인의 경험을 모방하고 학습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축적된 지식은 인류가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자연선택을 통한 유전자의 진화에만 의존했던 다른 종과는 달리 인류는 문화적인 적응을 통해 경쟁에서 한발 앞설 수 있었다.
 
이 적응이 반복되면서 인류는 모방과 학습, 사회적 협동에 유리한 종으로 유전적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이 진화가 임계점을 넘어 자연에 적응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연을 인류에 맞춰 변화시킬 정도가 되면서 인류의 문화 수준은 현재와 같은 폭발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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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달라지면 유전자도 변형된다" (조선, 박돈규 기자, 2009.08.07 21:10)
 
이 책은 문화가 생물학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한다. 문화는 개인과 집단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준다. 어떤 문화적 변형은 잘 퍼지는데 어떤 것들은 사라진다. 문화적 변형이 유전자 변형만큼이나 실질적이고 중요한 진화를 이끄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성공을 모방한다. 미국 남부에서 명예를 중시하는 문화가 주는 이점이 없어진다면,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상승할 것이고 결국 명예의 문화는 사라지게 된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배달부'일 뿐이라고 주장한 리처드 도킨스와 비교하면 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진화를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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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피터 싱어 지음

 피터 싱어를 좋아하지만, 그가 소득 5% 기부와 관련하여 하고 있는 말에 전부 동의하기는 힘들다.
갑자기 한비야 논란이 생각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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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득 5%’ 기부하면 절대빈곤 사라진다 (한겨레, 정의길 선임기자, 2009-08-07 오후 09:23:11)
지구촌 인구 14억 가난에 허덕
아동 1천만명은 매년 굶어 죽어
거창한 구호보다 작은 도움 시급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피터 싱어 지음·함규진 옮김/산책자·1만2000원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다.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기를 봤다면 이를 구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냐며, 인간은 본래 선하다고 주장했다. 맹자의 성선설이 맞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지만, 맹자가 근거로 든 그 사례에서 사람의 대응은 거의 그대로 들어맞는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실천윤리학자로 현대 인류의 빈곤과 차별, 환경오염을 고발하고 싸워온 피터 싱어가 호소하는 ‘기부’ 역시 다른 일이 아니다.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기를 구하는 일은 정상적인 성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바지와 구두가 젖고, 또 출근시간이 늦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해서 아이를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부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바지나 구두가 젖고, 출근시간이 늦는 것보다 더 지장이 없는 기부를 함으로써,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 기부행위가 없다면 웅덩이에 빠진 아이가 죽는 것처럼 전세계 곳곳에서 매일 수천명의 아이들이 죽어간다. 그렇다면 결국 기부를 안 하는 것은 웅덩이에 빠진 아이를 그냥 지나치는 것과 같은 셈이다.
 
유엔아동기금의 자료를 보면, 매년 거의 1000만명에 이르는 5살 이하의 아동이 빈곤 때문에 죽는다. 매일 2만7000번이나 지구상에서 되풀이되는 이런 일은 우리가 영위하는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음료수, 외식, 옷, 영화 등에 지출되는 돈의 일부만 기부로 돌려진다면.
 
세계은행의 절대빈곤 기준은 하루 1.25달러다. 지구상에는 여전히 그 이하에 허덕이는 사람 수가 14억명이다. 반면 평균적인 미국인은 수입의 6%만을 먹을거리에 쓴다. 주당 40시간을 일하나, 겨우 2시간의 노동으로 1주일분의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다. 대부분의 돈은 소비재, 오락, 휴양 등에 쓰인다.
 
서방의 부유한 국가들은 지난 50년 동안 평균 매년 460억달러를 기부했다. 적지 않은 돈 같으나, 총소득 대비 0.3%에 불과하다. 곧 100달러를 벌어, 그중 30센트를 기부했다. 2001년 유명한 개발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는 모든 사람을 빈곤선 위로 끌어올리는 데 1240억달러가 든다고 계산했다. 같은 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국민총소득 20조달러의 0.62%이다. 곧 100달러를 벌 때마다 62센트를 기부하면 되는 것이다. 기존 기부보다는 두 배이나, 사실 30센트만 더 내면 된다.
 
2000년 유엔 밀레니엄 개발정상회의에서는 세계 절대빈곤 인구의 절반 감축, 모든 어린이들의 초등교육 등 빈곤 퇴치에 기초적인 8가지 과제를 설정했다. 유엔 특별위는 이를 위해서는 2006년에는 1210억달러, 2015년의 경우 1890억달러가 필요하다고 추정했다. 기존 원조와 기부를 고려하면, 각각 470억달러와 740억달러가 더 필요하다. 이는 앞서 지적한 대로 우리가 100달러를 벌 때 30~60센트 정도만 기부하면 되는 액수다.
 
싱어는 소득의 5% 기부를 주장한다. 특히는 그는 ‘부자’들, 곧 서방의 부자나라 클럽 중 가장 저소득 국가인 포르투갈의 평균 국민소득보다 소득이 많은 약 8억5500만명의 사람들이 매년 200달러씩만 내면 웅덩이에 빠져 죽는 아이는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기부되는 돈의 30~70%가 가난한 이들에게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기부단체나 원조단체의 운용비로 쓰이는 등 기부를 둘러싼 경제학 역시 복잡한 문제다. 싱어는 이런 문제들까지 짚어가며,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장 효율적이고 보람 있는 기부를 할 것인가 알져준다.
 
기부를 막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어쩌면 진보진영에서 나온다. 곧 ‘기부는 구조적 문제인 빈곤의 해결을 개인적인 시혜의 차원으로 만든다’는 논리다. 싱어는 답한다. “옥스팸과 같은 구호단체는 … 더욱 공정한 세계 경제 질서를 지지하는 활동을 추진한다. 빈곤의 원인을 연구하면 … 혁명적인 변화가 절실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시간, 에너지, 돈을 들여 세계 경제 체제를 그렇게 혁명적으로 바꾸려는 조직을 후원하는 일이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실천이 문제이며,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면,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더 나은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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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기부를 시작하라, 어렵지 않은 일이다 (경향,김종목기자, 2009-08-07 17:00:43)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책의 첫 번째 목표는 절대 빈곤의 덫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일깨우는 것이고, 두 번째는 더 많은 소득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통계 수치부터 제시한다. 유엔아동기금(UNICEF) 자료를 보면, 매년 1000만명의 5세 이하 아동이 빈곤 때문에 죽는다. 하루로 따지면 2만7000여명의 아이들이 질병, 굶주림으로 죽어나가는 셈이다.
 
구호·원조는 ‘바다에 돌 던지기’라는 식의 불신과 반론이 여전하다. 저자가 “(불신은) 나의 성금이 구체적 개인·가족·마을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며 든 이야기다. 윌리엄 이스털리 미 뉴욕대 교수는 2007년 세계경제포럼에서 “원조가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했다. 빌 게이츠의 반박이다. “가령 한 아이가 살아났다고 할 때 그것이 GNP 증가를 뜻하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생명 자체로 값지지요.”
 
저자는 철학·우화의 예를 들며 설득력 있게 기부·구호의 실천을 강조한다. 미국의 대외 원조를 받는 국가의 절반은 정치적 특수 관계에 놓인 중저 소득 국가라는 점도 꼬집는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경제 규모에 비춰보면 한국의 원조액은 아직 높은 수준이 못 된다”며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 대한 각자의 책임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저자는 소득의 5% 기부 같은 구체적 실천 방안 7가지를 제시한다. “절대빈곤의 문제 해결 동참에 뿌듯해하자”는 것도 실천 방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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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유아 970만명이 죽어가는데… (서울, 최여경기자, 2009-08-08  15면)
 
세계 인구의 5분의1이 하루 생활비 1.25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절대빈곤에 빠져 있으며, 해마다 5세 이하 유아 970만명이 죽어간다. 그는 이들을 돕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것처럼 인간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며, 부유한 사람들이 포기하고 희생하는 약간의 사치로 가난한 사람들은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책에서 수많은 연구와 통계 자료, 기부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전달하고 자연스럽게 기부를 유도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부를 하라.”는 말을 들을 때나 남을 도우려고 할 때 갖게 되는 의구심에 대해서도 간파한 듯, 꽤 설득력있게 설명을 덧댄다. 이를 테면 “남을 돕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비난할 수 있나.”, “내가 번 돈으로 차를 사고 집을 산들 누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남에게 해를 끼치며 돈을 모은 게 아닌데 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하지.” 등의 의문이다. 이에 대해 싱어는 물론 사람은 자기가 번 돈을 마음대로 쓸 권리가 있지만, 그런 권리를 갖는다고 해서 그것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치를 할 권리가 있더라도 당연히 사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당연히 해야 할 윤리적 행동을 외면한 비판을 피하기는 힘들다.
 
이제 문제는 ‘그렇다면 어떻게?’이다. 싱어의 방법은 ‘소득의 5% 기부’이다. 이는 연간 소득 10만~14만 8000달러인 사람들이 삶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고 행복감을 느끼는 적정선이다. 연소득이 이를 넘어서면 기부액을 조금씩 더 늘려나가도 생활하는 데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 “절대 빈곤을 줄이자는 것이지 독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려는 것은 아니다. 꼭 필요하지 않는 지불을 하고 있음을 일깨우며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도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점, 우리 모두가 더 많은 소득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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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가난할수록 우리의 마음도 가난해진다… 왜 망설이나 (한국, 오미환기자, 2009/08/08 03:01:34)
 
이 책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원제 ‘The Life You Can Save’)는 ‘그들’의 가난은 바로 ‘우리들’의 문제라고, 작은 실천으로 그들을 구할 수 있으니 지금 당장 행동하자고 주장한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이를 보면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일단 구하고 볼 일이듯, 가난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살리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왜 남을 도와야 하는지 설득하기 위해 그는 두 가지 목표, 절대 빈곤층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을 일깨우고 누구든 더 많은 소득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끔 주력한다. 우선 기부를 거부하거나 망설이는 이유부터 하나하나 짚는다. 그런 생각이 뭐가 잘못됐는지 논박한 다음, 어디에 얼마나 기부해야 좋을지, 기부가 활발해지려면 어떤 수단과 장치가 필요한지 많은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제안하고 설명한다.
 
빈곤 추방에 동참할 실천 전략이 겨우 기부라니, 너무 싱거워 보이기도 한다. 가난, 특히 목숨을 위협하는 절대빈곤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작은 선의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박애주의’는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부익부 빈익빈을 가져오는 세계 경제 시스템을 방조하는, 그리하여 가난을 추방할 근본적 해결책인 정치 개혁을 가로막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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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굶주린 아이들이 보이지 않나요? (동아, 민병선 기자, 2009-08-08 02:59)
 
저자는 사람들이 기부에 소극적인 이유를 밝히고 바람직한 실천 방안을 제시한다. 기부를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식 가능 희생자 효과’로 설명한다.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돈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가 돕겠지’라고 생각하는 ‘방관자 효과’도 기부를 가로막는 큰 요인이다.
 
저자는 이런 심리적 장벽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기부 모임에 가입할 것을 권한다. 남을 돕는 일에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면 선행에 더욱 적극적이 된다. 한편 ‘아프리카의 소녀 누구’라는 식으로 도울 대상을 구체화하라고 말한다. 친밀한 존재에게 마음이 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하는 기부의 가이드라인에도 눈길이 간다. 선진국 중산층의 경우 재산의 5%를 내놓아도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고 그는 설명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특히 한국의 인색함을 꼬집는다. “한국의 2008년 개발도상국 원조액은 7억9700만 달러로 국민총소득(GNI)의 0.09%밖에 안 된다. 스웨덴, 네덜란드는 0.7%가 넘고, 세계에서 하위권인 미국과 일본도 한국보다 두 배나 많은 0.18%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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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는 죄악인가〉 권혁범 지음

 민족, 과연 최상위 가치일까 (서울, 이순녀기자, 2009-07-15  23면)
권혁범 대전대 교수 ‘민족주의는 죄악인가’ 출간 
 
단일민족 신화에 기반한 한국 민족주의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강한 응집력으로 근대 산업화를 이룬 성장의 원동력인 동시에 ‘우리’와 다른 남을 철저히 차별하고 배제하는 획일성으로 비판받고 있다. 긍정적 요소를 강조하는 쪽은 우파 민족주의, 폐해를 인정하지만 유효성에 더 무게를 두는 쪽은 진보적 민족주의로 구분된다. 근래에는 민족주의를 폐기, 또는 약화하자는 탈민족주의도 민족담론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권혁범 대전대 정치언론홍보학과 교수는 최근 출간한 ‘민족주의는 죄악인가’(생각의 나무 펴냄)에서 이 세가지 민족주의를 둘러싼 논의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각각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나름의 균형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시도했다.
 
권 교수는 먼저 단일민족 의식은 근대민족국가 형성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국사와 국어 등 국가 교육을 통해 유포된 상상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민족을 최상위 가치로 두는 민족주의적 세계관은 생명, 자유, 평화, 환경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무시하거나 배제할 위험성이 크다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진보적 민족주의도 퇴행적이고 국수주의적인 민족관에 반대하지만 젠더나 다른 정체성을 가진 하위집단의 문제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한계를 지닌다고 권 교수는 주장한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민족주의의 부정적 영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이라는 현실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또 민족을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보는 단순한 시각을 경계한다. 결론적으로 ‘민족주의는 죄악인가’란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대신 민족이란 범주를 고민하면서 페미니즘, 인권, 환경 등을 축으로 한 세계시민주의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할 것을 강조한다.
 
한국사를 세계사와의 유기적 관계에서 파악하고, 민족주의가 지배적 담론의 장에서 약화되도록 다른 가치체계, 이를 테면 사회정의론, 세계시민주의 등을 확산해야 한다는 것 등이 권 교수가 제시하는 방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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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고 곱씹은 민족주의, 고민거리 늘었네 (한겨레, 이권우 도서평론가·안양대 강의교수, 2009-08-07 오후 09:54:17)
이권우의 요즘 읽는 책 / 〈민족주의는 죄악인가〉 권혁범 지음/생각의나무·1만1000원 
 
민족주의를 주제로 다룬 책을 읽을 적마다 곤혹스러워진다. 눈을 덮은 비늘이 몇 껍질 벗겨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어서다. 다른 무엇보다 제도교육을 통해서 내면화한 민족의식이 탈민족 담론에 강하게 저항한다. 하나의 민족으로 오랜 역사 경험을 공유해왔다는 믿음을 깨기는 쉽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식이 감당해온 진보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한몫한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분단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저항담론으로 민족의식은 큰 몫을 해왔다. 세계화한 자본의 공세에 대항하기 위한 방파제로서 민족의식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렉서스’가 세계를 아무리 평평하게 하더라도 여전히 ‘올리브나무’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탈민족주의 담론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불편하고 미심쩍고 염려되는 바가 있더라도 과거를 성찰하고 내일을 새롭게 조망하게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민족은 만들어졌고, 이 담론이 오늘에는 다른 중요한 가치를 억압할 수도 있다는 주장은 파격이기는 하나 곱씹어볼 만하다는 것이다. 이번에 나온 권혁범의 <민족주의는 죄악인가>는 그동안 펼쳐진 민족담론을, 말하자면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으로 그리고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 책의 전반부는 민족의식이라는 것이 결국 근대의 산물임을 입증하는 데 바쳐져 있다. 7세기 무렵 민족통합이 완료되었다는 박호성의 주장은 논박되고, 고려시대 농민들이 외세에 저항한 것은 나라가 아니라 향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임지현의 주장은 옹호된다. 권혁범은 우리의 민족의식이 조선시대 말에서 일제시대 초기에 걸쳐 생겨났다고 본다. 버나드 야크의 말대로 “민족은 근대에 와서야 생긴 개념이고 그것이 구성원 간의 평등한 정치적·시민적 권리 및 동일성을 기초로 발생”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셈이다.
 
이 책의 4장 <민족주의와 젠더>는 자못 도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민족주의가 여성에게 부여한 가치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 앞에서 민족담론의 허상이 드러난다. 우에노 지즈코의 말대로 “자기 민족 여자는 자기 것이며 그 여자가 다른 민족에게 능욕당하는 것은 ‘남자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는 의식이 민족주의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민족은 젠더화되면서 성애화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여러 여성학자의 노력으로 “한국의 민족주의가 사실은 제국주의와 공모하여 여성을 억압하고 성착취/지배를 지속시키는 내부의 구조를 은폐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드러낸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이런 견해가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뉴라이트 주장과 어떤 점에서 다르고, 달라야 하는지를 지적하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민족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든 “한 사회의 핵심이념이 반드시 민족주의일 필요는 없다”는 지은이의 말은 폭넓게 수용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인권, 환경권, 개인 및 생명의 권리 및 평등, 존엄성”의 가치를 실현해 나가는 가운데 민족 문제도 끌어안을 수 있다. 또한 “계급적 정체성이 민족적 정체성에 압도되기보다는 그것과 경합하거나 공존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 높다. 책을 읽고나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느낌보다는 고민할 거리가 많아졌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본디 좋은 책은 그러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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