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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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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인간적인 얼굴의 경제학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2007-12-13 07:06) 
  
"나는 인간에게 뼈대가 없다고 가정한 체조학의 전제조건에 관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학의 전제조건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정통 경제학의 기본 전제를 정면으로 거부한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김석희 옮김.느린걸음 펴냄)는 너무나 인간적인 얼굴을 가진 경제론을 담고있다. 마지막까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인력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노동자에게 국가는 노동에 필요한 교육을 충분히 제공하고 숙련된 노동자는 차별없는 대우를 받는 것이 러스킨이 꿈 꾼 이상 사회였다.
 
그는 강제로 어렵고 힘들고 비천한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일이 싫어서 일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노동자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감시나 높은 보수가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최대한의 애정'을 발휘할 때라고 강조했다.
 
일반적인 경제학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도덕'이나 `정직', `애정', `신뢰', `영혼'과 같은 단어들이 그의 사상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굶주린 어머니와 아들이 한 조각의 빵을 놓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는 않는 것처럼 다른 인간 관계도 무조건 적개심을 품고 경쟁하는 것으로 가정할 수는 없다는 논리를 깔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 7년 먼저 세상에 나온 '나중에…'는 애덤 스미스와 맬서스, 리카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지는 정통파 경제학과 배척점에 섰다는 점에서는 자본론과 동일하다. 그러나 러스킨은 사회주의 경제학에 대해서도 `파괴와 죽음의 경제학'이라고 일갈했다.
 
'나중에…'는 그가 잡지에 연재한 논문 4편을 묶어 펴낸 것으로 연재 당시 세간의 온갖 비난 때문에 서둘러 마무리됐으며 정작 그가 `나중에 논할 작정'이라고 한 중요한 사항들은 끝내 연재되지 못했다. 러스킨은 버나드 쇼가 마르크스보다 더 혁명적이라고 꼽았던 인물로, 간디와 영국 노동당 의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저서중 예술 비평서 등 몇 권만이 번역돼있다.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나 화려한 예술 비평가로서 명예로운 삶을 살다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혁명적이었던 그는 결국 심각한 조울증을 앓다가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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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 (서울, 이문영기자, 2007-12-14  22면)
애정·정직·생명… 인간을 보듬는 경제학
 
다양한 시대를 통해 수많은 인류의 마음을 지배해온 갖가지 망상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기묘한-어쩌면 가장 명예롭지 못한-망상은, 사회적 행동의 규범은 사회적 애정의 작용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결정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소위 경제학이라는 근대의 학문일 것이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느린걸음 펴냄)에 실린 존 러스킨의 첫 번째 논문 ‘명예의 근원’ 첫 문장이다. 러스킨에게 과거부터 지금까지 주류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경제학은 늘 ‘먼저 온 사람들’을 위한 경제학이었다.
 
러스킨은 ‘나중에 온 사람(포도밭 주인이 저녁에 나와 일한 사람에게도 아침에 나와 일한 사람과 동일한 보수를 줬다는 성경 비유에서 따온 말)’을 배제하지 않는 ‘인간적 경제학’을 주창한다. 그에게 먼저 온 사람에게 모든 기회가 집중되는 경제학은 ‘파멸의 경제학’일 뿐이었다. 러스킨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출간 7년 전인 1862년에 이미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펴내 사회·경제적 약자를 옹호했던 선구적 사상가였다. 명망 있는 시인과 예술평론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던 러스킨은 공황, 실업, 빈부격차, 고용불안 등 19세기 당대의 폭발하는 자본주의 이면에 주목했다.
 
‘인간은 언제나 이기적이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이른바 ‘정통 경제학’의 대전제는 그에게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국가적 파멸이 있을 따름”인 ‘가짜 경제학’이었다. 그가 창출한 ‘진짜 경제학’의 근간은 정통 경제학이 외면한 애정, 정직, 정의, 생명 등 인간적 가치들이다.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그리고 파멸로 이끄는 물건을 경멸하고 파괴하도록 국민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러스킨의 ‘비과학적’ 경제학이 과학적 논리로 포장된 오늘의 한국사회에 주는 울림은 적지 않다.“금전적 보수는 그가 오늘 우리를 위해서 쓰는 시간과 노동에 대해 나중에 그가 요구할 때는 언제든지 그를 위해서 그것과 동등한 시간과 노동을 제공하거나 알선해주겠다는 약속.”이란 러스킨 주장에 비춰볼 때 만연하는 비정규노동 체제는 부도덕할 뿐이다. 출간 당시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그의 책은 이후 간디, 버나드 쇼, 톨스토이 등의 삶을 통째로 바꿀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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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경제만 살린다면 도덕성은 없어도? (머니투데이, 머니위크 이재경 기자 | 2007/12/20 11:44)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김석희 옮김/느린걸음 펴냄/223쪽/1만2000원
 
경제만 살려준다면 지도자의 도덕성 따위는 문제삼지 않겠다는 우리 사회의 기묘한 기류에 일침을 놓는 책이 발간됐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느린걸음 펴냄)는 자본주의의 폐해와 정통파 경제학의 모순을 목도한 19세기 한 지식인의 고뇌와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경제사상서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지성인 존 러스킨은 자본주의의 폐해와 정통 경제학의 모순 앞에서 '악마의 경제학' 대신 '인간의 경제학'을 하라고 설파한다. 러스킨은 단호하게 "도덕 없이는 경제도 없다"고 선언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중에 온 사람'은 사회경제적 약자이 또다른 이름이다. 자본주의에서 사회경제적 약자의 소외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일지도 모르며 동시에 사회전체를 와해시킬 수도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러스킨은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먼저 온 사람과 동등한 보수를 지불해야 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인간이 이기심에만 경제시스템을 맡기면 결국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부가 감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경제학에도 인간의 영혼이 담겨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또 위대한 사회개혁 사상가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은 고전이다. 변호사 간디도 이 책을 읽고 마하트마 간디가 됐다. 존 러스킨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현재도 영국 사회사상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오랫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건축이나 예술과 관련해서 간헐적으로 소개된 것이 전부다. 이 책은 예술비평가가 아닌 사회사상가로 러스킨을 국내에 소개하는 최초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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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깊이읽기]‘사람’ 그 자체가 경제 목적 (경향, 손제민 기자, 2007-12-21-16:35:32)
 
성경 구절을 딴 이 책의 제목이 모든 것을 함축한다. 예수가 천국을 비유할 때 나오는 구절(마태복음 20장)이다. 포도밭 주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한 일꾼과 나중에 합류해 조금만 일한 일꾼에게 똑같이 품삯을 쳐주자 아침부터 일한 일꾼이 불평했다. 그러자 주인이 “나는 너를 부정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화폐단위)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약속한 너의 품삯을 받아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게 거슬리느냐?”라고 대답했다.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되는’ 그런 사회가 바로 천국이라는 비유다. ‘합리적 이기주의자’를 가정하는 주류·비주류를 막론한 애덤 스미스 이래의 근대 경제학적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들로는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다. 마르크스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 살며 산업화하는 영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지켜본 저자는 자본론보다 7년 앞서 이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을 논했던 마르크스의 사상과 달리 너무 ‘온건했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아니 온건했다기보다 근본적이었기 때문에, 성공한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을 포함한 당시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그래서 외면받았다. ‘브레이크 없이’ 전진을 거듭하는 중이었던 당시 영국인들은 ‘근대 화가론’를 쓴 바 있는 저명한 예술평론가인 저자의 입을 통해 예의 그 고상한 미술론 같은 얘길 듣고싶어 했다.
 
저자 스스로 이 책을 ‘부(富)의 정의’와 ‘정직의 회복과 유지’를 궁구한 글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의 경제사상의 핵심은 ‘사랑’과 ‘정직’, 곧 ‘사람’이다. 그렇다고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뻔한 말씀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그는 ‘부유함’이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 것인지 묻는다. 경제학은 결국 ‘모두 다 부자가 되기 위한’ 학문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는 상대적이다. 내 주머니 속 1만원의 힘은 내 이웃의 주머니 속에 1만원이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저자는 “보통의 상업적 경제학자가 말하는 부자 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내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해두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상업적 경제학이 타인의 노동에 대한 법률적 청구권이나 지배력을 개인의 수중에 축적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경제학은 단순히 유용하거나 쾌락을 줄 수 있는 사물을 가장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생산하고 보존하고 분배하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건초를 베어 들이는 농부, 단단한 목재에 대못을 단단히 박는 목수, 잘 이긴 회반죽에 양질의 벽돌을 쌓아올리는 건축공… 이들이야말로 궁극적 의미에서 진정한 정치적 경제학자이고, 자신이 속한 국가의 부와 행복에 끊임없이 이바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부’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실제로 욕심내는 것은 부 그 자체보다는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라고 본다. 그것은 “단순한 의미에서는 하인이나 상인이나 예술가의 노동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힘이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대중을 다양한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권위”일 뿐이다.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가르치는 학문”이다. 노동자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 최고의 이익을 내는 것은 결코 강한 압력이나 높은 보수를 받을 때가 아니라, ‘최대한의 애정’이 발휘될 때라고 한다.
 
우리는 근대 경제학과 함께 너무 많이 와버려 이런 얘기에 귀기울이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 ‘애정’ 등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합리적 결정을 교란시키는 우발적인 요인이라고 보는 근대 경제학은 옳은 것인가. 효율적이면 다 좋은 것인가. 우리는 이따금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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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 거부한 애정의 경제학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7-12-28 오후 08:50:47)
영국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의 혁명적 사상
부는 ‘제로섬’…‘정의와 애정’이 최선 낳아
“생명 향한 열망 담아야 진짜 경제학” 역설
 
 
산업혁명으로 최성기를 구가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비평가요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느린걸음)에서 애덤 스미스에서 토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진 자본주의 정통 경제학의 전제조건들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는 고용주와 노동자를 포함한 경제 주체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정의와 애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당사자가 저마다 자기 이익을 꾀한다고 가정”(밀)하면서, 이기적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손”(스미스)의 역할을 낙관한 정통 경제학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정통 경제학자들은 예컨대 집주인은 가능한 한 하인들이 빈둥거릴 짬을 주지 않고 그들이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의 빈약한 음식과 형편없는 방을 주고 다른 데로 떠나가지 않을 한도 내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며 매사에 한계점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주인과 사회, 나아가 하인에게도 최대의 이익을 안겨주는 합리적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스킨은 기계와 달리 “영혼을 동력으로 삼는” 하인이 최대한 많은, 질 높은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은 보수나 강한 압력이 아니라 의지나 정신, 친절과 신뢰, 정의, 공평무사, 한마디로 애정이라고 말한다. 공장주와 노동자, 장교와 병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러스킨은 숙련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에 대한 보수도 같아야 한다며, 의사나 교회 목사에 대해서는 그들 솜씨가 좋든 나쁘든 똑같은 사례를 지불하면서 노동자들에겐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노동력에 대한 대가에 차등을 두게 될 때 미숙련 노동자가 싼 값으로 숙력 노동자의 자리를 빼앗거나 임금을 깎아내리고 무한경쟁에 돌입함으로써 대다수가 망하는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조지 버나드 쇼가 카를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혁명적”이라고 했다는 러스킨 사상의 급진성은 부(富)에 대한 그의 생각에 집약돼 있다. 러스킨은 일정한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누구나 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근대경제학자들의 절대적 개념의 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부는 제로섬과 같다. 누구 주머니에 든 1기니라는 돈의 힘은 이웃의 주머니 속에 1기니가 없다는 사실과 그 이웃이 돈을 원한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부자가 되는 기술은 재산을 모으는 기술일 뿐만 아니라 이웃이 자기보다 적게 소유하도록 획책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인 것이다.”
 
러스킨은 식민지경영과 불평등 교역을 통해 전세계로부터 부를 빨아올리며 자연을 파괴·오염시키며 국가간, 그리고 국가내 차별과 불평등을 심화시켜가던 대영제국의 작동방식과 그것을 뒷받침한 근대경제학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했다. 나라 안팎을 넘나드는 주식투자와 신종 펀드들이 난무하고 부동산 투기 등 ‘재테크’가 일상화한 21세기 한국사회는 당시 영국사회와 닮은 구석이 많다. 그런 재테크는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부의 이전과 집중에 따른 불평등을 창출한다. 그것은 내부 양극화뿐만 아니라 전세계 차원의 국가간·지역간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강자들간의 도박게임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나오기 7년 전에 발간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말하자면 150년 전에 거기에 이의제기를 한 것이다. 근대경제학은 그런 불평등을 긍정한다. 그 바탕 위에서 각자 최대의 이익, 이윤을 짜내는 걸 정당화한다. 오늘날 세계와 한국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그 연장이자 필연적 귀결이다.
 
러스킨에게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그리고 파멸로 이끄는 물건을 경멸하고 파괴하도록 국민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자립적 소농경제 쪽을 지향한 마하트마 간디가 러스킨한테서 큰 영향을 받았던 것도 이 부분일 것이다. 자본도 “생명에 유용한 어떤 물건을 공급하느냐, 생명을 보호하는 어떤 구조물을 짓느냐”를 기준으로 봐야 하며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자본의 증식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그런 자본은 아예 없느니만 못하다. “가장 부유한 나라는 최대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사람을 양성하는 나라이고,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기능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여 그 인격과 재산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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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신동아,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인천대 강사, 2008-02-25 10:3)
 
대학 수업시간에 한 경제학자를 초청해 한미FTA에 관한 특강을 하도록 한 적이 있다. 세계와의 경쟁을 통해 선진 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한미FTA가 경쟁에 살아남은 대기업에만 유익할 뿐, 농업의 피폐와 비정규직 양산 및 사회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두 시간에 걸쳐 강의한 경제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했다. “휴머니즘보다 더 위에 있는 경제학은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가 뒤따른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경제학이 사회적 약자뿐 아니라 사회적 강자를 포함한 사회 전체 구성원 모두에게 유익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완벽한 정답일 수는 없지만, 2003년 ‘Nature’에 소개된 미국 조지아 주립대학의 브로스넌(Sarah F. Brosnan)과 에모리 대학의 왈(Frans B. M. de Waal)이 진행한 실험 하나가 눈길을 끈다. 연구팀은 한 무리의 흰목꼬리감기원숭이(Capuchina)가 태어나자마자 일체의 학습 경험을 차단한 채, 우리에 가둬 사육했다. 원숭이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 일정한 양의 조약돌을 준 다음, 원숭이들이 사람에게 이 돌멩이를 건넬 때마다 그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양쪽 원숭이 집단에 모두 오이를 보상으로 제공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한쪽 집단에는 오이를, 다른 쪽 집단에는 잘 익은 포도를 제공하자 오이를 받은 원숭이 무리 중에서 제 먹이를 땅바닥에 패대기치거나 우리 밖으로 내동댕이치면서 저항하는 개체가 나타났다. 상황을 바꿔 여러 방식의 실험을 해본 결과, 욕심이나 좌절 등 다른 요인이 아닌 ‘차별적 처우’에 대한 불만이 이 같은 행동을 야기한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검증했다. 연구팀은 평등의식이나 정의감이 ‘학습’ 이전에 인류 진화 과정에서 발달한 ‘본능’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애정에 입각한 경제원리
먹이를 공유하는 등 협동적인 종(種)들은 불평등을 혐오하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긴데, 이는 그런 정의로운 개체들의 평등을 구현하는 행위가 공동체 전체 구성원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리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른바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 등을 통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인간에게 불평등을 거부하고 서로 협동하는 이타적 본성의 유전인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고, 경제적 인간형(Homo Economicus)에 대비되는 호혜적 인간형(Homo Reciprocan)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류 경제학 교과서의 ‘자유 경쟁’ 원칙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 분야의 이러한 고민을 누구보다 앞장서 개진한 사람이 바로 ‘존 러스킨’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 1권이 세상에 나오기 7년 전, 일찍이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책에 실린 네 편의 논문을 통해 ‘애정’에 입각한 경제 원리를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 이후 맬서스와 리카도를 거쳐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는 정통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준열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러스킨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러스킨은 시종일관 인간의 영성과 사회적 애정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구별된다.
 
러스킨이 보기에 근대 경제학은 “인간이 뼈대만으로 구성돼 있다 가정하고” 그 토대 위에 진보의 골격을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두개골과 상박골로 기하학적 형태를 수없이 조립하고 뼈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보여준 뒤, 미립자로 이루어진 이들 구조물 사이에 영혼이 다시 나타나면 얼마나 불편한지를 성공적으로 입증해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집 안에 빵이 한 조각밖에 없다고 해서 가족들 간에 ‘적대관계’가 형성되거나, 힘이 제일 센 어머니가 빵을 차지하는 결과가 생기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눈앞에서 벌어지는 “득실의 균형에서 행동의 법칙을 연역하려는 노력”들은 한낱 헛수고가 돼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연적 불평등?
러스킨이 이 책에서 시종일관 관철하려는 것은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이다. 이 책의 제목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신약성경의 천국을 비유하는 설명에서 따온 것으로 현재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인력시장에서 일거리를 구하다가 가장 마지막에 포도밭에 일하러 온 일꾼에게도 다른 일꾼과 같은 품삯을 지급하는 것이 바로 천국의 경제 질서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나중에 온 사람’도 동등하게 대우받는 ‘조화로운 불평등’의 사회가 훨씬 더 큰 사회적 부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 러스킨의 주장이다.
 
“빈자는 부자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주지되고 공언되어왔지만, 동시에 부자 역시 빈자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도 주지되고 공언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나 “북쪽이라는 말이 반드시 남쪽이라는 반대말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부유’라는 말도 반드시 그 반대말인 ‘빈곤’을 연상시키는 상대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 역시 ‘인간적인 얼굴을 한 경제학’의 한 단면이다.
 
자신의 그러한 생각이 극단적인 평등주의라는 비난에 대해서 러스킨은 “대령도 병졸과 같은 봉급을 받아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일을 적게 하는 사람과 같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을 고용하여 부리는 이상 일이 서툴러도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 적은 보수를 주면 안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반박한다. “경제학에 널리 퍼져 있는 오류의 대부분은 이런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경솔하고도 불합리한 억측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러스킨이 150년 전에 한 주장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에 놀랍도록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감탄스럽다.
 
따지고 보면,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을 편드는 지식인들의 주장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도구에는 말하는 도구와 말 못하는 도구가 있다. 노예는 말하는 도구이다. 따라서 병든 노예를 버리는 것은 고장 난 호미를 버리는 것과 같다”는 철학자들의 명쾌한 삼단논법이 귀족들로 하여금 병든 노예를 유황광산 밖에 내다버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데 기여했다. “노예도 같은 인간이다”라는 주장을 편 철학자들은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결국 노예제도는 철폐될 수밖에 없었으니 인류 사회의 변화를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얼굴을 한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러스킨의 말을 감히 흉내 내자면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학’이 타당한 것은 ‘정직’이 언제나 옳은 덕목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호혜적 노사관계
19세기 후반 영국 사회에서 러스킨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영혼을 가진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노동당 국회의원들은 그들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거의 모든 의원이 ‘러스킨의 책’이라고 답했다. 변호사로 일하던 마하트마 간디는 열차 안에서 이 책을 읽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오래전, 백남준의 작품 ‘첼로’가 실제로 한구석에 전시돼 있는 여의도의 찻집 ‘첼로’를 찾은 사람들은 주인의 높은 안목 덕분에 르 코르뷔지에의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물질주의 속에서 익사하는 시대”라고 참혹하게 표현한 르 코르뷔지에 역시 “우리의 어린 시절은 러스킨에 의해 훈육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더욱이 필자에게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인도주의적 경향의 예술평론에 일가를 이룬 러스킨이 노동교육을 통해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경제적 구조와 그 운용의 병폐에 통감하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게 리카도의 글을 읽어주다가 한 여성 노동자가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장면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필자는 27년쯤 전의 필자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이 자신의 최대 유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기업은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임금을 주고 최대한 노동을 시키려고 할 것이고, 노동자는 최소한의 노동만 제공하면서 최대한 임금을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업이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을 보장하고, 노동자는 더 많이 노력해 답하는 선물교환(Gift Exchange) 방식, 곧 ‘인간의 얼굴을 한’ 호혜적 노사관계가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현대 경영학의 귀중한 깨달음 역시 그 뿌리를 러스킨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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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여는 책]러스킨의 인도주의 경제학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내일, 박순철 칼럼니스트, 2009-12-18 오후 12:18:19)
‘불평등 기술’ 가르치는 자본주의 통타
사람 중심으로 부(富) 개념 새롭게 정립 … 양극화 사회 되볼아보게 해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1만2천원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읽기를 포기했다. 20년쯤 전의 일이다. 분배론을 전공한 어느 선배의 연구실을 찾았을 때 그는 얄팍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Unto This Last''''-우선 그 책 제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옮긴이는 이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로 번역했다. 좋은 번역 같다. 이 고풍스런 제목은 이 책이 제사(題詞)로 삼은 성경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포도밭 주인이 일할 사람들을 고용하면서 오후 늦게 부른 일꾼에게도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과 똑 같은 임금을 지불한 이야기다. 주인은 불평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여,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 데나리우스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너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이런 계산법은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도 천국의 우의(寓意)라는 문맥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국부(國富)의 명분 아래 개인의 무한한 탐욕을 정당화한 19세기 영국 지식층의 반감은 당연했다. 잡지에 연재된 러스킨의 글에 대해 비난이 쏟아졌다. 네 편의 논문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을 때 그 초판은 10년 동안 겨우 880 권이 팔렸다.
 
하지만 러스킨은 영혼이 있는 인간을 못 박았던 자본주의 경제학의 밑그림에 지울 수 없는 의문부호를 던졌다. ‘마지막 사람’의 관념은 같은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 디킨즈가 크리스마스 정신과 대조시켰던 수전노, 스크루지를 닮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인)의 통념에 도전한 강렬한 상징이었다.
그러면 그건 상징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임금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것은 러스킨의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다. 그가 수요와 공급이 임금을 결정하는 걸 당연시하지 않았다는 건 중요한 쟁점이다. 다만 그것은 부(富)의 정의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전체에 관한 그의 폭넓은 관점에서 살펴볼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을 보았다.
 
여기에서 잠시 경제학은 가정(假定)의 학문이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명한 농담 가운데 이런 게 있다. 무인도에 표류한 배고픈 사람들이 음식이 든 깡통을 찾았는데 따개가 없었다. 그 가운데 경제학자가 말했다. “자, 깡통따개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경제학의 본질을 짚어낸 통렬한 풍자다.
경제학의 화려한 건물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편리한 가정 위에 서있다. 러스킨은 묻는다. 만일 체조학에서 뼈대 없는 사람을 가정해서 사람을 둘둘 뭉쳐 환약처럼 만들거나 케이크처럼 납작하게 누르거나 밧줄처럼 길게 잡아 늘이면 몸에 좋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걸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에겐 인간의 영혼을 부정하는 가정 위에 전개된 경제학의 이론도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생산자를 대표하는 상인은 이익의 인간일 따름이고 명예나 도덕의 인간은 아니라는 전제에 대해 러스킨은 강력히 반발한다. 그는 설교단만이 아니라 시장에서도 순교가 있을 수 있고, 전쟁만이 아니라 장사에도 영웅적인 행위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군인이나 의사, 목사나 법률가에게는 엄격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에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상인에 대해서는 인간의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베니스 상인’ 같은 역할을 맡기고 만족한다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한 이야기들은 모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정말로 이상한 단 한 가지 점은 이 이야기들이 이상하게 들려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톨스토이는 “러스킨은 가슴으로 생각하는 희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는 시대의 밖에 서서 마취된 시대의 쾌락과 고통을 보았다. 이렇게 해서 가슴으로 생각하는 희귀한 책이 태어났다.
 
이 책에는 한 마디로 선지자의 통찰이 있다.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물질이 아닌 인간의 학문이라는 깊은 울림이 있다. 이 책의 핵심은 러스킨 자신이 밝히듯 부에 대한 정의지만 그것은 인간의 행복에 관한 전인적인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부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러스킨이 주목한 것은 타인에 대한 부의 지배력이었다. 그런데 부가 지배력으로 작용하려면 누군가 자기를 위해 일해 줄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경제학이 가르치는 부자 되는 기술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인 것이다. 행복학이 아닌 불행학의 씨앗이 내재한다.
 
부의 본질이 타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에 있다면 소유한 부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들이 고귀한 사람일수록, 부가 커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야말로 ‘부의 광맥’이다. “모든 부의 최종적인 성과와 완성은 원기왕성하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한 인간을 되도록 많이 생산하는 데 있을 것이다.”
 
러스킨은 자본주의 경제학을 속류 경제학으로, 사회주의 경제학을 파괴의 경제학으로 비판했다. 옮긴이는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경제학의 천하를 삼분하여 그 하나를 차지한 촉나라 같은 느낌을 띠는 것이 러스킨의 인도주의적 경제학일 것이다.” 이 얇은 책의 역사적 의미는 그만큼 무겁다. 많은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했던 성경의 한 장면을 상기시키며 이 글을 끝내고 싶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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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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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정치학자가 바라본 '자본주의의 종말'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2007-09-19 06:01)
 
"재생 가능한 에너지 체제에다 거기에 적합한 사회 형태와 연대적으로 조직된 경제가 갖춰지면 이것이 현행 자본주의의 종말이 된다."(27쪽) 베를린 자유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이며 독일 녹색당의 이론적 지주로 손꼽힌다는 엘마 알트파터는 "자본주의의 종말은 어떤 모습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알트파터의 저서 '자본주의의 종말'(동녘)은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미래는 기본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비판은 가치가 있고, 대안들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부자들의 재산은 계속 불어나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또한 생산성 향상을 위해 필요한 자원들은 고갈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고 있다.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원동력은 세계를 지배하는 유럽의 합리주의, 자본주의적 사회 형태, 화석 에너지라는 삼위일체에서 나온다고 말한다.이 가운데 화석 에너지가 고갈된다면? 저자는 석유의 대안으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제시한다. 이 에너지는 생물 자원의 활용, 풍력과 수력의 이용, 지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기초를 둔 생태학적 정치경제학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해 왔다는 저자는 미래의 모습에 '연대'라는 개념을 더한다. 연대의식은 "실업, 빈곤 혹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문화, 민족, 지역, 계층을 포괄하는 인생 경험에 바탕을 두고" 형성돼 있을 수 있으며, 한 사회에서의 공통성과 내적 결속성에 대한 의식을 전제로 한다. 저자는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미래가 현재와는 달리 비(非)자본주의적 세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새로운 사회 형태는 만들어질 수 있으며 역사는 종말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아간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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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공황, 자본주의 붕괴의 서곡? (프레시안,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2008-09-20 오후 12:05:58)
[길에서 책읽기] 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
 
알트파터는 산의 꼭대기에서 마을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의 금융 위기 실상을 명확히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 오늘날 금융은 실물경제와 철저히 분리되어 별세계에서 따로 움직이고 있으며 사회와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전세계 외환 거래 가운데 실제 상품결제 액수는 2%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른바 OECD 국가들의 수출이란 초국적 대기업들의 기업 내부거래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머지 98%는 실물경제와 관련없는 금융거래이다. 정확히 말하면 투기자본들의 이동이다.
 
전세계 금융자산 규모는 2007년 기준 대략 170조 달러 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가운데 60%가 달러화로 20%가 유로화로 보유되어 있다. 전세계 GDP의 3,5배 가량이다. 자본수지가 무역수지와 경상수지를 과도하게 압도하는 이상비대증의 체제는 수시로 다양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마침내는 경제 자체를 붕괴시키고 만다.
 
실물경제가 어려운데 금융이 잘 나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암세포가 점점 커지다 숙주를 압도할 정도로 성장하면 당연히 암세포 자신과 숙주는 생명을 잃는다. 알트파터는 현재의 금융자본주의는 암세포라고 단언한다. 세계화, 글로벌 스탠다드란 결국 투기꾼들의 돈벌이를 위해 만든 고상한 용어라는 게 알트파터의 지적이다.
 
알트파터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이용하면 자동으로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 차로 변하듯 자본주의도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금융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 붕괴의 서막이다. 머지않아 닥칠 에너지 식량위기의 쓰나미와 함께 자본주의는 어쩔 수 없이 붕괴된다. 그 소리가 북극 빙하가 무너지는 소리처럼 굉음일지 아니면 암환자의 고통스런 신음소리처럼 처연할지는 또 아무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사태를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여기서 알트파터가 제시하는 대안은 태양에너지 사회, 연대경제 협동조합을 비롯한 수많은 네트워크가 결합된 연대사회이다. 태양에너지 체제란 농업사회를 말한다. 그는 공업과 산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심은 농업인 사회를 태양에너지 사회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100년간 서구화, 근대화, 산업화를 죽을 힘을 다해 추구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간신히 국민소득 2만불 시대의 이른바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런 풍요가 지속불가능하고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된다니, 조금은 황당한 예측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사치스런 풍요에 안주해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 잊고 있다. 무엇보다도 석유의 고갈과 함께 식량 고갈, 다른 천연자원의 고갈이 머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본주의 산업문명과 풍요의 원천이었던 석유가 사라진다면 당연히 산업문명과 풍요 또한 사라진다.
 
때문에 우리는 사회 체제 자체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모색과 사색의 단초를 알트파터는 다소 무겁게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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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도의 살풍경…결국 '유령'이 도래한다" (프레시안, 박준영 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009-03-21 오후 12:34:55)
[철학자의 서재] 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
 
유령의 도래는 곧 자본의 종말이라는 것, 도래와 종말은 항상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이 끔찍하거나, 즐겁거나, 소란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속으로 들끓으며 비등점을 향해 가기 때문이라는 것, 잠재성이 곧 현실적이라는 것 말이다. 어리석은 지배계급은 이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사실 지배계급이 자본에 대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자본이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을 때조차, 이 무식한 지배계급은 상황 판단이 전혀 서지 않는다. 다만 두려워할 뿐이고, 대책이 없고, 땅만 판다. 거기 겁에 질린 타조처럼 머리를 묻으려고? 대중들의 봉기에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채로, 한 쪽으로는 눈치를 살피고, 다른 쪽으로는 경찰들을 집결시킨다. 하던 짓이 그 짓이기 때문에 '몽둥이와 삽질' 외에 다른 게 생각나지 않는다. 야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야비함은 두려움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종말'은 '유령의 도래'다. 엘마 알트파터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야만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야만은 미래의 주축이 될 것인데, 이 야만이란 '분명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야만'이라는 것은 오래된 진실이다. 자본의 초기 축적은 온간 탈취와 토지에 대한 강제 귀속, 유랑민들에 대한 학살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이 초기조건은 항상 반복된다. 지금도 그렇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원주민 부대에서부터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선 곳, 이곳 용산에 이르기까지 종말을 유예하기 위한 강박적인 반복이 있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이러한 지옥도가 펼쳐져 왔다는 것을 한번 상기해 보는 것만으로도 '종말'이란 얼마나 당위에 가까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정글의 법칙이며, 따라서 짐승의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종말 너머의 유령은 어떤 조건 하에서 도래할 것인가? 알트파터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을 인용함으로써 유령을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 '내인성(內因性)' 쇠약에 의해 붕괴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외부로부터의 아주 격심한 충격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들과 결합해서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브로델이 말하는 바는 매우 명백하다. 순진한 낙관론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에 의해 붕괴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트파터가 뒤에 또 밝히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외인(外因)'이 단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 의식화인 것만은 아니다. 대안이라는 것이 '혁명 전위대' 뒤에서 대오를 맞추어 가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서글프게도 이 방면에서 만큼은 레닌의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면 내부에서 무르익고 있는 대안들과 외부 원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알트파터는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내부모순 외에 외적 요인들로 에너지 고갈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를 든다. 자본주의란 유럽합리주의와 함께 화석연료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합리주의가 그 본래의 철학적 의미를 폐절하고 효율과 이윤 획득 가능성이라는 논리로 정제되기 위해서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낳은 결과는 명백하다. 합리주의, 다시 말해 이성중심주의란 인간 내부의 모순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해야 하며 그를 통해 질서 잡힌 사유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타락한 합리주의는 이러한 사유체계를 통해 모순을 피지배자의 자율적-내면적 훈육체계로, 생체적 메커니즘으로 바꾸어놓는다. 그것은 질서 속에 안주하며, 그것을 강박적으로 강요한다. 질서를 넘어서는 모든 혁명과 소요는 이제 단죄되어야 하는 '괴물'이 되었다. 이제 이성은 경제적 효율성에 봉사하고, '성장'이라는 최고 목표를 향해 가는 것만을 허용할 뿐이다. 마침내 차가운 이성이 탄생한다. 사실 이 차가운 이성이야말로 '괴물'에 다름 아니다.
 
화석연료란 이 괴물의 거의 유일한 먹잇감이다. 맹렬한 식욕 때문에 생태계와 환경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이는 결국 괴물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건 비단 자본만이 아니다. 알트파터는, 만약 여기에 대안이 있다면 '재생 가능 에너지'가 되리라고 말한다. 즉 현행 자본주의의 종말이란 '재생 가능한 에너지 체제', 이 에너지 체제에 적합한 '사회형태' 그리고 '연대적으로 조직된 경제'의 삼위일체가 갖춰질 때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화석에너지', '합리주의'라는 타락한 삼위일체의 반대쪽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들이 발생할 수 있는 자본주의 내적 요인은 무엇인가? 알트파터는 이를 '사회로부터 시장의 유리'라고 정리한다. 사회적 가치가 더 이상 시장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가 차가운 이성에 의해 구성되고 그것이 '성장'이라는 목표에 정향되었을 때 모든 사회적 가치와 공동체 의식은 괴물의 먹잇감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식의 경제를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알트파터는 이 이념이 이미 낡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긴 2008년에 이르러 월가가 나자빠지고,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이 낡은 이념이 임종을 고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소위 '순수한 시장논리'라는 것은 개나 줘야할 처지가 되었다. 알트파터는 그러한 논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공허한 모의 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본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속 빈 논리를 학자들이 대중들에게 유포한다는 것이다. 알트파터가 말하는 '학자들' 속에는 분명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시카고학파 이데올로그들이 속해 있다.
 
사회로부터 유리된 시장, 또는 자본은 반드시 '자폐증적'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는 글로벌화된 자폐증이다. 사회적 가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 자본은 금융자본이 되면서 그 자폐적 특성이 극대화된다. 눈에 보이는 게 돈밖에 없는 노름꾼처럼 매 순간순간의 배팅에서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배팅의 순간순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는 노름꾼 자신의 욕망에서 기인한다. 도대체가 그 욕망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욕망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배팅의 액수를 높여야 하는데, 깔린 판돈이 이 욕망에 따라 가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제 합리적인 이성이 계산을 포기한 지점에 폭력과 탈취, 다시 말해 초기축적의 반복이 다시 생겨나는 것이다. 포드주의의 종말이란 다른 게 아니다. 네그리라면 이를 '가치론의 붕괴'라고 말했을 것인데, 알트파터는 이를 친절하게 풀이해 준다. 즉 실물자본이 추동하는 잉여가치 창출이 금융자본의 수익률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지점, 실물자본의 불행한 회계사가 손익분기점 위로 치솟는 이자율을 공포에 질린 채로 바라보아야 하는 그 지점에서 합리적 경제 정책은 종말을 고하고, 그 대신에 국가 폭력과 탈취가 횡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강대국, 특히 미국과 같은 나라의 군사력은 정치나 지역 방위 체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경제논리(최대 이윤 달성)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여기서 과연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이 부시의 같잖은 종교적 신념이나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보다 더 추잡한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인지 물어 볼 수 있다.
 
거기에 오바마는 다를 것인가? 사실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 짐승의 논리인 신자유주의가 인간 오바마의 의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정이 이런데, 7%씩이나 경제성장을 이루겠다고 사기를 쳐 대고 대통령이 된 자와 이 경제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애초에 그 사기라는 것이 현실이 되기엔 요원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 대통령은 아예 신자유주의 짐승과 하나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을 말하자면, 인간은 동족의 죽음에 애도를 표할 수 있는 입과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양심이 있고 짐승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와 유리된 자본, 윤리적 양심과 유리된 권력은 이래서 일란성 쌍둥이다.
 
타락한 삼위일체가 자본주의의 내외적 요인이라면 그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위력은 이제 노동과 재생 가능 에너지 그리고 코뮤니즘적 경제체제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유령의 도래가 평화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혁명이란 비둘기 걸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성난 맹수처럼 덤벼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용한 혁명, 그리고 폭력적 변화라는 테제는 대립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알트파터가 홀러웨이를 비판하면서 말하듯이 '권력'을 잡지 못하는 혁명이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권력에 집착하는 혁명도 끝내 파산할 뿐이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권력을 위한 정치혁명이 한 쪽에 있다면, 그 다른 쪽에 화석에너지 자본주의의 종말, 재생 가능 에너지 사회체제의 도래가 있다. 오히려 후자가 더 힘들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 자본주의는 초기의 산업자본주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화석에너지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자본은 이를 하루 이틀 만에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심지어 민중혁명의 당사자들조차 그럴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이 공멸의 욕망을 다른 체제로 대체하지 않는다면, 그 뇌관이 터지는 날에 또 다른 지배계급이 똑같은 과학기술을 가지고, 똑같은 에너지체제를 유지하려할 것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규율이 내면화된 다중(multitude)들은 또 다시 죽음의 사이클을 반복할 것이다.
 
따라서 '시장실패'의 원인을 단지 금융자본의 투기욕망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금융자본이 애초에 폐기해버렸던 그 가치, 즉 '사회적 가치'에서 찾아야 한다. 이 사회적 가치에는 '자연'이라는 매우 중요한 존재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명심하자.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체의 존재조건이라는 것이다. 화석에너지의 무분별한 사용은 이 존재 조건에 대한 침해이므로, 결국은 인간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폭력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알트파터의 말대로, 먼저 경제 과정을 단지 가치창출과정으로만 보지 말고, '원료와 에너지 변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그 어떤 체제도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복수는 반드시 회귀한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재촉한 이 복수가 또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연대적 경제(코뮤니즘)와 함께 자연을 지속가능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혁명의 필수적인 조건인 동시에 그 혁명을 또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필수 조건이 된다. 영구혁명이란 정치에 있지 않고 생태에 있는 것이다. 정치 혁명의 성과는 나날이 이어지는 생태 혁명의 엔진이 없으면 채 한 세기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소비에트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추론할 수 있다.
 
알트파터는 현대 자본주의 내에서 성장하는 이들 프롤레타리아를 '목소리'로 지칭한다. 홀러웨이가 '절규'라는 다소 비관적인 톤으로 지칭한 것을 말이다. 확실한 것은 알트파터나 홀러웨이 둘 모두 프롤레타리아를 더 이상 마르크스가 그렸던 방식으로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지금/여기'와 알트파터의 '지금/여기'는 다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계급과 마찬가지로 알트파터의 계급도 막 성장하고 있으며,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뭐라고 했던가? 가장 강력한 위력은 잠재적인 것이다. 레닌이 다시 산다면 이 잠재성의 동력을 뭐라고 했을까? 분명 러시아 혁명 때와는 달리 말했을 것이다.
 
알트파터의 지성은 매우 비관적이다. 역사상 가장 타락한 자본주의 내부에 살면서 지성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비관주의라면 그것은 매우 합당하다. 그렇다면 역사상 가장 타락한 정권 내부에 사는 기분은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스스로 대중의 역량에 기생하면서도, 그 대중을 탄압하는 권력은 결국 제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유령을 부를 것이다. 야만의 자본주의에 비열한 권력, 2009년 봄 현재 한국 사회가 통과하고 있는 지옥도의 살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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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 세미나11: 정신분석의 네가지 근본개념

 

[메인서평] 라캉 안의 라캉 이상의 것 (2009년 03월 14일 (토) 22:43:11 대학신문, 민승기 교수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자크 라캉 - 세미나11: 정신분석의 네가지 근본개념  
무의식, 반복, 전이, 충동이라는 근본개념으로 ‘프로이트 안의 프로이트 이상의 것’을 추구
『세미나 11』은 언어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의 혼합괴물
 
자크 라캉의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은 보이지 않지만 없다고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욕망한다. 무의식, 반복, 전이, 충동이라는 네 가지 근본 개념은 정신분석 ‘속’에서 정신분석을 ‘능가’하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발생한다. 국제정신분석 협회로부터 대파문을 당해 “완전히 (제도) 안에 있지도 그렇다고 밖에 있다고도 볼 수 없게”(p.14) 되었을 때 라캉은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한다. 제도 속에서 제도로 환원될 수 없는 정신분석의 타자성을 찾기 위해 그는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이 돌아가고자 하는 프로이트는 지젝의 말대로 “프로이트의 말(지식)이 아니라 프로이트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프로이트 역시 인식하지 못했던 불가능한 핵”이다. ‘프로이트 안의 프로이트 이상의 것’을 라캉은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는 네 가지 개념들을 통해 라캉은 “실천으로서의 정신분석”(p.19)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다.
 
실천이란 ‘상징적인 것을 통해 실재를 다루는 행동’(p.19)이다. 실재 역시 ‘상징계 안의 상징계 이상의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p.37)고 말했던 라캉은 지금 “무의식의 위상은 윤리적”(p.57)이라고 주장한다. 윤리적인 것은 언어의 타자를 지시한다. 무의식은 언어나 담론이 재현할 수 없는 간극이며 바로 이 간극을 통해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무의식은 상징적 담론’이라는 진술과 “무의식은 실재와의 만남”(p.40)이라는 주장은 그러나 단절이 아닌 ‘네 안의 너 이상의 것’(p.397)을 욕망하는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 실재는 상징적 담론의 틈, 구멍, 실패이지만 상징계의 결핍을 지시하는 요소들은 상징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나에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지요. 폴, 에르네스트, 그리고 나”(p.38)라고 말하는 꼬마의 셈법과도 같다. 셈하는 자가 이미 셈에 포함돼 있는 구조는 셈의 안이자 바깥인 주체가 셈을 불가능하게 하는 틈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빈 공간임을 보여준다.
 
가능성과 불가능성, 부정과 긍정이 같아지는 빈 공간을 라캉은 원인(Cause)이라 부른다. 원인은 (상징적) 법으로 재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인 동시에 법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손자가 실이 감긴 실패를 던졌다 당겼다 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쾌락원칙을 넘어선 이론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프로이트가 이미 그 장면 안에 들어가 있듯이 (그는 이미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실패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다) 『세미나 11』이 보여주는 것은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의 상호함축 또는 ‘뒤엉킴’이다. 정신분석을 기초짓는 네 가지 개념 모두 같은 표면으로 계속 가다보면 이미 반대편에 와 있는 뫼비우스의 띠의 구조를 갖고 있다.
 
라캉은 무의식을 “공시태의 차원에 위치시켜야 한다”(p.46)고 말하는 동시에 “시간적인 박동 속에서 나타나는 어떤 것”(p.218)으로 제시한다. 시간을 알지 못하는 무의식과 기표를 선행하는 시간적인 박동(p.191)으로서의 무의식이 갖는 간극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다시 뫼비우스의 연결방식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라캉이 재현을 넘어선 위상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외상을 초래하는 실재와의 만남인 투케(tuche)는 기표의 공시성이 단순히 비시간적인 공시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표들의 네트워크인 오토마톤(automaton)은 이미 그것을 중지시키는 시간성으로서의 투케를 포함하고 있다. 상징적 오토마톤은 실재의 충격에 의해 구부러져 있는 것이다. 구부러짐은 투케가 상징계의 만곡을 초래하는 순수한 형식으로 이미 오토마톤 속에 기입되어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재현할 수 없는 빈 공간으로서의 투케와의 만남은 그러므로 항상 ‘어긋난 만남, 상실된 만남’(p.89)이다. 상징계의 연속성을 탈구시키는 이 어긋남이 상징계의 외상적 기원인 투케이다. 상징계의 자동성은 그것을 중지시키는 사건으로서의 투케를 포함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충동(drive) 역시 영원성과 시간성 ‘사이’에서 발생한다. 충동을 이루는 네 가지 요소 중 원천과 압박은 칸트의 예지계처럼 최초 대상의 비시간적 반복을 명령하지만 또 다른 두 요소인 대상과 목표는 충동이 이질적 문맥 속에서 재구성된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원천과 압박이 구성하는 순환적 시간성의 축과 대상과 목표로 이루어지는 무한한 차이의 축이 단순한 대립이 아닌 ‘적대’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우리는 대립항의 강요된 선택이 아닌 내부 속에서 내부를 초월하는 외부를 말하고 있다.
 
주체의 형성을 설명하는 소외와 분리의 관계 역시 내재적 초월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의미를 얻기 위해 기표에 종속되는 소외와 기표 체계 자체로부터 떨어져나감으로써 비로소 자유의 가능성을 얻는 분리는 대립이나 차이 이전에 이미 겹쳐 있다. 라캉은 “주체는 타자의 장에 공시적으로 종속될 때에만 주체일 수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그 곳을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한다.(p.285) 주체의 빠져나옴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타자의 결핍이다. 결국 소외와 분리의 겹침 또는 뒤엉킴은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이 겹치는 이중 결핍의 공간 즉 대상 a의 공간을 열어놓고 바로 여기서 분리의 주체는 대상 a의 위상을 갖게 된다. 의미를 박탈당한 대상, 배설물과도 같은 대상이 바로 주체이다. 그러므로 주체의 진실은 “주체가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조차 주체 자신이 아니라 대상 속에 있다.”(p.17)
 
자연적인 성도 문화적인 젠더도 아닌 성욕은 외상을 초래하는 충동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p.267) “무의식의 현실은 성적 현실이다.”(p.226) “시니피앙이 세상에 도입된 것은 성욕을 통해서이다.”(p.228) 기표의 (불)가능 조건으로서의 성욕은 그러므로 타자의 결핍, 타자의 욕망을 드러낸다. 사실 응시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타자의 눈멂이다. ‘깡통은 자네를 보고 있지 않아’(p.149) 깡통은 내가 그것을 보기 전에 이미 나를 보고 있지만 그러나 응시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대타자의 눈이 아니라 눈먼 부분대상이다. 그러나 바로 이 눈멂이 주체와 타자 모두를 거세시킨다.
 
‘라캉 안의 라캉 이상의 것’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하나의 라캉이다. 기표로서의 라캉은 대상 a로서의 라캉과 겹쳐 있다. 대상a 로서의 라캉은 기표 속에서 기표를 능가하는 잉여물로 남아있다. 이 잉여물과의 만남이 윤리학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의 혼합괴물과도 같은 『세미나 11』의 라캉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물음으로 우리를 혼돈스럽게 한다. ‘정신분석이란 스핑크스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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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대전환 | 샌드라 프레드먼 지음 | 조효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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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권 보장은 국가의 의무”…인권개념 재구성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10-15 오후 06:39:44)
새 패러다임 제시한 ‘인권의 대전환’
 
권리와 권리가 충돌할 때 다툼이 생긴다. 재개발 분쟁도 그런 경우다. 대체로 “내 뜻대로 처분하겠다”는 집주인의 재산권과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세입자의 주거권이 부딪쳐 사달이 난다. 공권력이 투입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번지기도 한다. 이 경우 공권력은 백이면 백, 집주인 편이다. 시민들은 방관한다. 재산권이야말로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지고의 권리라는 게 그들이 학습해온 상식인 까닭이다. ‘용산’에 대한 집단 침묵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것도 바로 이 상식이었다. 소유물에 대한 처분권이 인간다운 삶의 권리에 우선한다는 이 비정한 상식은 대체 어디에 근거하는가.
 
출간 시기가 더없이 적절하다. 샌드라 프레드먼 옥스퍼드대 교수가 쓴 <인권의 대전환>(교양인)이다. 2008년 영국에서 출간된 직후 “인권이론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책”이라 평가받았다. 책을 옮긴 조효제(사진) 성공회대 교수는 “인권 개념을 재구성해 그동안 부차적·파생적 권리로 간주돼 온 사회·경제적 권리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고 소개한다. 인권을 자유권(시민적·정치적 권리)과 사회권(사회적·경제적 권리)로 구분하면서 앞의 권리에 역사적·논리적 우선권을 둬온 기존의 인권 담론을 해체함으로써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사회적 권리에 관한 논의에 새 지평을 열어준다는 얘기다.
 
자유권 침범 않는 소극적 국가 넘어 사회·경제 권리 위해 ‘적극 개입’ 주장
프레드먼 명저…조효제 교수 번역, “용산사건 재판부가 이 책 읽었으면”

 
글쓴이가 볼 때 인권은 권리 주체인 개인 뿐 아니라, 의무의 주체로서 국가의 역할을 동시에 요청한다. 모든 ‘권리’ 개념은 권리의 주체가 의무의 주체에게 어떤 근거에서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 논리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적 인권담론에선 권리 주체인 개인만 강조되고 개인의 권리를 충족시켜야 할 국가의 의무는 제대로 부각되지 않다보니 국가가 말로는 인권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에는 소극적인 경우가 잦았다고 글쓴이는 지적한다. 
 
책은 권리 개념에 동반되는 국가의 의무 개념을 도출한 뒤, 이를 다시 소극적 의무와 적극적 의무로 구분한다. 소극적 의무가 개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것(자기 억제)이라면, 적극적 의무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극적 의무가 전통적인 자유권과 짝을 이룬 것이라면, 적극적 의무는 사회권에 대응하는데, 핵심은 이 두 가지 의무가 현실에서 결코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촛불집회를 예로 들어보자. 시민들이 경찰을 향해 광장을 열라, 때리지 말라 요구하는 건 자유권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나오고 싶어도 배가 고파서 또는 신체의 장애 때문에 못 나오는 시민들이 있을 수 있다. 시민적 권리를 주장하려면 적어도 소리칠 기력과 능력은 있어야 한다는 얘긴데, 이것을 보장하는 게 사회권이다. 옮긴이 조효제 교수의 설명이다.
 
“모든 인권 현안에는 자유권적 속성과 사회권적 속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걸 국가의 의무 차원으로 전환해 말하면 이렇습니다. 광장을 열어주고 물리적 탄압을 않는 것만으로 국가는 인권 준수의 의무를 다하는 게 아닙니다. 시민들이 최대한 자유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권리 주장을 펼칠 수 있게 교통을 통제하고, 화장실과 식수 등 편의를 제공하는 것도 국가의 의무에 포함된다는 얘깁니다.”
 
또 책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원이 담당해야 할 능동적 역할을 강조한다. 국가가 인권을 보장하도록 촉구하고 감시함으로써 민주주의 체제를 보존·지원하는 것이 사법부의 궁극적 역할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일종의 ‘민주적 사법 적극주의’다. 물론 이것은 법원의 판결로 정치를 대체하자는 게 아니다. 사법적 절차를 통해 대의제의 단점을 보완하자는 것, 예컨대 법원은 정부가 국민을 위해 지키겠다고 약속한 것을 위반할 경우 재판을 통해 그에 대한 설명과 시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조효제 교수는 “이 책은 민주주의와 사법부의 역할에 대한 숙고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며 “양심과 법에 의거해 초연하게 판결하는 것이 주어진 책무라고 생각하는 양심적 판사들, 특히 방송법 권한쟁의 소송을 다룰 헌법재판소와 용산사건의 재판부가 이 책을 읽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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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개인의 권리인가 국가의 의무인가 (서울, 심재억기자, 2009-10-17  18면)
 
적어도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마땅히 인간이 누려야 할 보편적 가치로서의 권리와 시장 논리가 충돌할 때, 우리가 믿는 진리적 명제로서의 인권은 아무런 가치도, 구속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인권은 한 정치집단의 사회 장악에 거추장스러운 개념일 뿐이고, 그래서 항상 배제되고 도외시된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특히 과거 전체주의적 발상이 견인했던 개발연대를 거쳐 온 기성세대들)이 이런 사실을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자꾸 시장논리를 기웃거리는 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사회에서 인간이 천부적으로 누려야 할 가치가 항상 효율성의 아래에 놓인 선택적 가치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대중독재’ 시절,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라는 프로파간다적 구호에 밀려 인권이나 자유에 대한 옹호가 지적 호사쯤으로 치부되었듯 지금은 ‘조금만 더 합심단결해서 노력하면 우리도 당당히 선진국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해괴한 논리가 또다시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효율성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개발론자들의 발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효율성 추구에 대한 법원의 입장은 어떤가. 원론적으로 짚자면 ‘소수자들이 정치 과정에서 배제될 때, 그들의 목소리가 조직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할 때, 대의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법원의 민주적 역할이며, 사법의 기능이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사법부가 소수자들 혹은 배제된 다수의 권리를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라는 점에 적지 않은 국민들이 동의하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게 현실이다. 신영철 대법관 파동이 시사하듯 권력은 한사코 사법부를 휘하에 편제하려 들고, 사법부 내부에서도 이런 권력의 역학에 편승하거나 이용하려는 세력이 엄존한다. 그렇다고 사법부의 결정 능력에 회의만 할 수도 없다. 지난 9월 내려진 헌법재판소의 ‘야간 옥외집회 금지 헌법 불합치’ 결정에서 보듯 사법의 역할을 다하려는 노력이 있다는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원론적 논의가 따분하다면 불과 얼마 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 ‘공권력에 의한 집단 살인’으로 각인된 용산 참사를 상기하자. 용산 참사는 국가가 소극적 의무와 적극적 의무를 모두 저버린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개입해서는 안될 상황에서는 무리하게 공권력을 투입해 생존권을 지키려던 시민들을 폭압적으로 진압함으로써 자기억제 의무를 지키지 않았고, 시민의 주거권 보장이라는 국가의 적극적 의무는 뒷짐을 진 채 나몰라라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누가 뭐라든 오늘날 인권은 국가의 존립 목적이자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통용된다. 이런 인권 개념을 체계적으로 재조명한 인권 이론서 ‘인권의 대전환-인권 공화국을 위한 법과 국가의 역할’(샌드라 프레드먼 지음, 조효제 옮김, 교양인 펴냄)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그녀는 현재 영국 옥스퍼드대 법학부 교수이자 영국학술원 정회원이다.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인권은 민주주의의 한 귀퉁이에 놓인 뜨거운 감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둥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인권은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국가의 적극적 인권 보호의무는 모든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인 ‘시민 참여’를 달성하는 데 본질적인 요소”라고 부연한다. 나아가 언제나 발생할 개연성을 가진 공권력의 충동적·의도적 인권 침해에 대한 법원의 책무 범위에 대해서도 명쾌한 견해를 내놓는다. 법원은 언제나 국가에 부여된 적극적 의무의 실현 여부를 감시·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적극적 의무가 민주주의를 장려하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된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선출직도 아니고, 정치적 책임도 없는 판사가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심사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일부 비판에 단호하게 쐐기를 박고 나선 것이다. 프레드먼 교수가 발언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렇다. 노숙자들이 자신과 식솔들의 주린 배를 채우거나 몸을 눕히기 위해 헤맬 때, 노숙자의 존엄성만 훼손되는 게 아니다. 그런 노숙자를 낳은 사회와 국가의 존엄성도 함께 훼손된다. 왜냐면 인권이란 국가와 사회가 포괄적으로 규정만 해주는 선언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적용해야 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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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국가의 의무 (레디앙, 2009년 10월 18일 (일) 07:14:53 정상근 기자)
[새책]『인권의 대전환』…인권의 위기에 읽는 참고서
 
용산참사, 미네르바의 구속, 국정원의 개인사찰의혹,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인권이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수장까지 정부와 가까운 인사를 내세우고 있는 이 정부가 ‘국가’를 빌미로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인권의 문제는 국가와 개인간의 문제 뿐이 아니다. 기업과 개인,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인권이 침해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전문가 샌드라 프레드먼이 귀한 참고서를 내놓았다. 『인권의 대전환』(샌드라 프리드먼, 조효제, 교양인, 29,000원)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권 실천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 의무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규명함으로써 인권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인권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이자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단임을 입증한다. 또한 전통적인 인권 담론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국가’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국가는 인권의 주체로서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권 실현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사법부가 국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성을 강화하고 정치 과정에서 주변화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며 시민들의 온전하고 평등한 참여를 위한 물질적·사회적 전제 조건을 보장하는 한편 궁극적으로 심의민주주의의 촉매 기구로 기능하는 역할 등을 수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저자의 지적은 권력과 이해관계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와 ‘해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권은 시민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그의 지적은 현 정부에서 왜 인권의 위기가 닥쳐왔는지 깨닫게 한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형성하고 그것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적극적인 인권 보호 의무를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권은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국가의 적극적 인권 보호 의무는 모든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인 ‘시민의 참여’를 달성하는 데 본질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또한 인권으로부터 발생하는 국가의 적극적 의무는 더는 무시될 수 없으며, 그것이 각종 권리의 범주를 나눈 인위적인 구분 뒤에 은폐되어서도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인권의 의무’라는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저자는 책에서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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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국가의 의무’ 없이는 인권보장 없다 (2009 10/27 위클리경향 847호, 정원식 기자)
ㆍ인권의 대전환 | 샌드라 프레드먼 지음 | 조효제 옮김 | 교양인 | 2만9000원
 
용산 참사는 한국 사회의 아픈 상처다. 주거권을 보장해 달라는 세입자의 요구는 재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건물주의 요구 앞에 무력했다. 공권력의 논리는 ‘법대로’였다. 우리 헌법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었더라도 그랬을까.
 
(1)모든 사람은 적절한 주거 시설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
(2)국가는 가용 자원의 한도 내에서 이러한 권리의 전향적이고 지속적인 실현을 달성하기 위해 합당한 입법 조치 및 기타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3)누구도 법원이 모든 정황을 고려한 후 내린 명령에 의하지 않고 자신의 주택에서 쫓겨나거나 그 주택이 철거되는 일을 당하지 않는다. 어떤 법률도 자의적인 철거를 허용할 수 없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헌법 26조의 내용이다. 우리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주거권을 보장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아공 헌법 28조는 어린이에게 무조건적 주거권을 부여하고, 토지에 대한 공평한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의료, 복지, 건강에 대한 권리와 함께 기본적인 사회권 범주에 들어가는 주거권이 재산권에 선행한다는 인식을 헌법에 반영한 사례다.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을 혁신적으로 전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내용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법학부 교수 샌드라 프레드먼은 지난해 출간된 이 책을 통해 인권 이론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인권 논의는 권리 주체인 개인만을 강조한 탓에 의무 주체인 국가의 역할을 소홀히 다뤘다. 문제는 공동체의 자원을 동원하고 분배하는 힘을 지닌 국가의 역할 없이 인권을 보장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저자는 국가에 대해 소극적 의무(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보장할 의무)만이 아니라 적극적 의무(경제적·사회적 권리를 보장할 의무)까지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적극적 의무에 대한 강조는 전통적 자유 개념에 대한 성찰과도 맞닿아 있다. 자유에 대한 전통적 논의는 개인이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소극적 자유)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국가는 불간섭을 미덕으로 여기면서 실제로는 사회적 불평등을 방치하는 구실로 삼을 우려가 있다. 이 논리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면서 실제로는 기득권층의 권리만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탄생한다.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국가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이러한 우려에 대해 인권 충족 의무는 “국가에 무제한의 권력을 주자는 말”이 아니라 “인권의 진정한 향유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또 법원도 판결을 통해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요청함으로써 사회적 약자 보호와 민주주의 강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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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게 진짜 국가" (오마이뉴스, 09.11.11 17:16  이주호 (fuun))
[인터뷰] 샌드라 프레드먼 <인권의 대전환> 번역한 조효제 교수
 
인권에 대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인권, 그게 뭐에요?"라고 묻는다면, 민주주의와 인권이 같은 것이라고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알게 된다. 신간 <인권의 대전환>은 2008년도에 영국에서 출간된 책으로 최근에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인권의 대전환>은 인권을 국가 정치 공동체의 핵심 구성 원리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책은 인권 개념을 뿌리째 뒤바꾼 대담하고 획기적인 21세기 인권 교과서로써, 국가의 존립 목적이자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서 인권의 재탄생을 선언한다. 또한 이 책은 이론과 실제를 아우름으로써 지구화 시대 민주주의와 인권의 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한 최고의 인권 이론서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 학계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성취
독일 예나 대학의 에버하르트 아이헨호퍼 법학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진정으로 보편적인 인권 이론의 신기원을 연 책"이라고 평했으며 번역자인 조효제 교수는 "세계 학계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는 격조 높은 인권 이론서"라고 말했다. 옮긴이 해설에서 조효제 교수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개혁, 진보 세력의 새로운 방향 설정을 놓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인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길 모색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 책은 그러한 지적 공백을 채워주는 소중한 자산이 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특히 용산 참사에서 국가의 의무에 대한 이 책의 핵심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용산 참사는 엄청난 인권 유린 사태였음에도 사건 해결이 이토록 요원한 까닭은 무엇인가? 옮긴이에 의하면, 여기에는 인권에 반대하는 세 가지 기제가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통념적 이유, 정치적 이유, 그리고 지적, 이론적 반대이다. 그중에서도 인권에 대한 지적, 이론적 비판은 일곱 가지 범주가 있으며, 이 책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하나하나 답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인권의 대전환>이 앞으로 한국 사회의 모든 사회권 논의의 출발점이자 토대가 되는 논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역자는 말하고 있다.
 
샌드라 프레드먼이 지은 <인권의 대전환>을 한국어로 번역한 조효제 교수(성공회대)를 9일 저녁 전화로 인터뷰했다. 인권 학자가 직접 번역한 이 책에서 최신 인권 이론과 실제를 만나보자. 조효제 교수는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겸 NGO 대학원 교수로, 저서로 <인권의 문법>, 편·역서로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전지구적 변환> 등 다수가 있다. 그는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과 연구위원, 법무부 정책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고, 옥스퍼드 대학 비교사회학 석사, 런던정경대학(LSE) 사회정책학 박사이다.
 
조효제 교수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하버드 대학 로스쿨 인권 연구소의 국제 펠로로 재직하던 중 프레드먼 교수의 새 책 집필 소식을 듣고 깊이 공감하여 한국 독자들에게 알릴 기회를 가진 것이 보람이었다고 얘기한다. 또한 그는 옮긴이 해설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인권 추세에 대해, 개인의 자유를 위해 국가가 자기 억제 의무를 실천해야 할 분야, 예를 들어 집회 및 시위의 자유에서는 함부로 개입하고, 국가가 적극적 의무를 행해야 할 경우, 예를 들어 노동자와 취약 계층의 기본권에는 수수방관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적어도 국가의 존재 의의는 망각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국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이야기한다.
 
- 이 책은 인권에 관한 어떤 내용인가요?
"재미없는 책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인권이라고 하면 민주주의의 일부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국가는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성립되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체제이지요. 이 책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같은 것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권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과 같은 말이고, 반대로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이 인권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지요."
 
- 이 책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나요?
"저도 인권에 관한 책을 직접 쓰고, 또 번역했고, 인권에 관한 책은 많이 나와있습니다만, 이 책은 근래에 나온 인권에 관한 최고의 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일반 민주주의 이론과 인권 이론을 완전히 결부시켰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권 이론을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권리 보장의 의무를 누가 져야 하는가, 국가가 어떤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가, 라는 점에서, 어떤 국가가 진짜 국가냐, 라고 했을 때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진짜 국가다, 라는 것입니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인권의 실현이다, 라는 것이지요. 저자는 자유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국가의 적극적 인권 보호 의무를 가로막는 강고한 이론적 비판들을 하나씩 격파합니다. 소극적 자유를 주장하는 결론의 문제점은 국가가 가치 중립적일 수 있다고 가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가 중립이라는 환상 자체가 국가가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실상을 가리고 있지요. "
 
- 저자는 남아프리카 출신인가요?
"남아프리카에는 원초적 조건의 차별로써 흑인들만 사는 거대한 달동네가 있고, 이 사람들에 대한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신 헌법은 세계적으로 앞서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저자는 남아공 출신으로 요하네스버그의 위츠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전국 최고 졸업상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로즈 장학생으로 뽑혀 가게 됩니다.
2000년에 옥스퍼드 법학부 역사상 최초로 여자 정교수가 되지요. 이것은 옥스퍼드 대학이 12세기에 법학부를 개설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 차별의 현실과 직면해야 했던 경험을 살려 평등과 인권을 공부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지요. 옥스퍼드 대학 법학부 교수이자 같은 대학 엑스터 칼리지의 펠로우이며, 영국 학술원 정회원이에요. 인권, 헌법, 평등, 차별, 노동법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고, 유럽연합, 북아일랜드, 영국, 캐나다 정부를 위해 인권, 평등, 노동 정책 자문역을 수행했지요."
 
- 국가의 의무에 대해 책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국가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실천을 위해 역할을 해야 되고, 이것은 진보, 보수의 문제를 넘어서 국가의 의무에 관한 문제입니다. 국가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의무와 반면에 소극적 의무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더 개입해야 할 때가 있고 덜 개입해야 할 때가 있지요. 용산 참사는 국가가 이것을 반대로 한 것인데요, 용산 참사는 국가의 소극적인 자기 억제 의무와 적극적 의무를 모두 저버린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지요. 개입해서는 안 될 상황에서는 공권력을 투입해 생존권을 지키려는 시민들을 진압함으로써 자기 억제 의무를 지키지 않았음과 동시에, 시민의 주거권 보장이라는 국가의 적극적 의무에서는 뒷짐 지고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요.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극명한 예입니다. 이에 대해 대중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보았을 때 대체로 미온적으로 방관자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 이번 용산 참사에 대해 중학생 조카에게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쉽게 설명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것을 개인들간의 사적인 이권을 둘러싼 분쟁이었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사적인 분쟁이기 때문에 분쟁의 내용에 대해서는 국가는 개입하지 말고, 단지 재산권을 지키거나, 또는 이 집을 재개발을 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그 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나가지도 않을 경우에, 쫒아내는 역할은 국가가 좀 해달라 라는 식의, 국가의 역할을 순수히 일종의 교통정리, 또는 경찰의 역할만 하라, 라고 요구하는 한쪽의 시각과, 또 한쪽에서는 이것이 겉보기에는 사적인 계약이나 상인들간의 어떤 이익을 둘러싼 분쟁처럼 보이지만, 그것의 근본 바탕에는 거주권에 관한 국가 정책의 일반적인 성격이나 거주권과 재개발에 대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와 정부의 관점, 이런 것들이 짙게 깔려있는 상태에서 벌어진 분쟁에다가, 국가가 그 분쟁 내용을 조절하려고 하지는 않고, 단지 그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물리적인 상황만 통제하고 진압하기 위해서, 공권력을 투입해서 해결하려고 했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쉬운 설명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할수록 더 어렵게 되네요."
 
-국가의 적극적 의무준수 메커니즘 모델은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가 굶고 있다고 했을때, 헐벗고 굶주리고 부모도 없는 고아가 된 어린 아이가 있다고 치면, 이 아이에 대해서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인권이론에서는 국가가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것만이 인권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국가가 이 아이에게 아무 일도, 아무 간섭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이 아이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닌거죠. 굶주리고 헐벗고 고아가 된 아이가 있으면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가 이 아이의 자유에 대해서 서울역에 오지마라고 쫒아내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에게 음식도 제공하고, 가정도 제공해주고, 교육도 제공해주고, 사회 안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소극적인 국가의 의무가 아니라 국가의 적극적인 의무라는 거죠."
 
-경제학자 아마티야 센의 자유관도 언급이 되나요?
"왜냐하면, 국가의 억압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기도 하지만, 빈곤, 질병, 저발전, 낮은 교육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저자는 노벨상을 받은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의 적극적 자유관을 토대로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주장합니다.
인권에서 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강압이 없는 상태를 넘어,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나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지요. 이런 관점에 따르면 '폭정뿐만 아니라 빈곤 같은, 조직적인 사회적 박탈뿐만 아니라 부족한 경제적 기회 같은, 탄압 국가의 불관용이나 과잉 간섭뿐만 아니라 공공 서비스의 부족 같은, 반(反)자유의 주요 원천을 제거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 인권에 관한 국가의 적극적 의무는 무엇인가요?
"인권은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국가의 적극적 인권 보호 의무는 모든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인 시민의 참여를 달성하는 데 본질적인 요소이지요. 그렇다면, 국가는 사람들이 민주적 권리를 평등하게 행사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장애물 이를테면 지위, 계급, 성별, 영향력, 정체성 등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제거할 의무가 있지요. 이렇게 볼 때 인권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것은 곧 국가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최대한 확대한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지요."
 
- 공화주의 대의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나요?
"대의제란 결국 현대 민주주의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옛날 아테네처럼 직접 민주주의를 하기는 힘든 것이니까요. 대의 민주주의만으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100퍼센트 보장할 수는 없으므로, 이것을 인권 중심으로 보아 대의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결정이 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인권 원칙에 어긋났을 경우에는 그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을 우리가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과연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인가 라는 것을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위해서 사법부와 시민사회와 각종 비사법적인 기관들, 예를 들어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이런 식의 기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것을 위해서 상승작용적 협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법원과 인권운동과 시민운동과 비사법적인 국가기관 같은 여러 주체들이 함께 협력해서 인권의 향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이런 식의 상승작용적 협동과정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 사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사법부는 정치적 책무성을 가지고 감시자로써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 보완이론입니다. 인도의 공익 소송은 사법부의 문호를 대폭 개방한 혁신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법원은 민주적 압력을 위한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어요. 법원은 시민들을 위해 정부를 법원에 출석시켜 특정 정책을 취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게 하고, 정부에 시민사회와 소통하라고 촉구하는 참여적 윤리의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적극적 인권 보호 문제를 법원에서 심사할 수 있을 때, 사법부는 민주 정치에 간섭하여 민주주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기능을 할 수 있지요. 따라서 특히 인권 관련 소송에서 법원은 가장 약한 집단의 목소리를 보장해주어야만 정당한 민주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권의 대전환>은 법철학과 사회학 분야에서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인권 관련 연구를 집대성한 본격적인 인권 연구서이자, 인권 개념의 대전환을 이끌어낸 대담하고 획기적인 인권 이론서이다. 전통적 인권 담론에서는 권리의 주체인 개인은 강조되었지만, 개인의 권리를 충족시킬 의무가 있는 또 다른 주체인 국가는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다. <인권의 대전환>은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인권 개념의 근본적인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적극적 의무란 무엇인가'에서는 인권을 위해서는 국가의 소극적 의무뿐 아니라 적극적 의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법철학과 사회 이론의 측면에서 규명하고, 인권이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임을 설명한다. 2부 '법의 지배와 사법부의 역할'에서는 법원은 민주적 정치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며, 시민들의 참여를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3부 '인권 실현의 권리와 의무'에서는 이론 틀을 실질적 권리에 적용하여, '인정의 평등'과 사회적, 경제적 권리에 나오는 '분배적 평등'의 상호 작용을 검토하고, 모든 인권 이론을 동원하여 주거권, 교육권, 복지권 영역에서 실제 사례 분석을 시도한다.
 
실제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 소송 사례를 통해 법원과 정치권, 시민운동 등이 힘을 합쳐 적극적 인권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도 제안한다. 저자는 10개국(미국,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아일랜드, 체코, 벨기에, 유럽연합,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의 약 100여 개 인권 관련 주요 판례들과 인권 실현을 위한 각국의 정책적 활동을 소개한다. 북미,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의 주요 사법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은 한국 사법부도 국내 적용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하고 연구해야 할 내용이다.
 
더불어 소개하고 싶은 책은 경제계의 마더 테레사라고 불리우는 아마티야 센의 기념비적 저서인 으로 국내에 <자유로서의 발전>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개발, 또는 발전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개발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증진하기 위한 것이다. 한명숙 전 총리가 감명깊게 읽은 책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 책은 절판 상태이다. 명사가 추천하는 책, 지금까지 가장 나를 움직인 책으로 다시 인쇄를 부활할 수는 없을까? 이 책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왜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출판한 세종연구소의 재원이나 독지가의 기부 또는 로또 기금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투자하면 이 책을 단 1만부라도 인쇄하여 전국의 모든 도서관에 보급할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공짜이고, 도서관에서 이 책을 공짜로 읽으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책 가운데 하나를 공짜로 얻는 것이다.
 
국가가 왜 발전해야 하는지 알고 싶은가? 주거, 교육, 복지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를 잊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지금 '인생 뭐 있어?'라는 노래를 듣고 있는가? 이 책의 도입 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개발은 하나의 과정인데, 사람들이 향유하는 진정한 자유를 증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유에 촛점을 맞추는 개발은 GNP 성장이나 산업화, 기술 진보 같은 좁은 관점의 개발과  대비된다. 자유는 교육, 의료, 정치적 권리, 시민의 권리에 의해 결정된다. 자유로써의 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자유의 주요 원천을 제거해야 한다: 빈곤, 폭정, 부족한 경제적 기회, 체계적인 사회적 결핍, 교육과 의료의 부재, 비관용, 정부의 억압 등이다. 자유는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자 발전이 달성하는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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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경제 디자인>(이정우 외 지음, 바로세움 펴냄)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있을 듯 하지만, 전반적인 내용을 알아두면 좋은 책이라고 본다.
   
"내 아이를 위한 가장 좋은 투자는?" (프레시안,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009-12-26 오전 1:26:06)
[철학자의 서재] <행복 경제 디자인>(이정우 외 지음, 바로세움 펴냄)
 
평소 우리 사회가 '좋은 삶'에 대한 지나치게 획일적인 가치 지평밖에 모른다고 한탄하고 다녔더랬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존중 받고 장려되는 사회를 만들자고 떠들곤 했었다. 그러나 어쩌면 나도 내심으로는 딸아이가 외고에 가고 명문대에 진학해서 좋은 직장을 얻는 그런 수순을 따라 사는 통상적인 의미의 '성공한 삶'을 살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닌 척했지만 사실은 더 지독한 속물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겠지만, 엄살이 아니라 학령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 지방대 교수인 나도 자식들을 언제까지 제대로 교육시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내가 벼락부자가 될 일은 없을 것이고, 무슨 대책을 세우긴 해야 할 텐데 앞이 캄캄하다. 백면서생인 내가 '재테크' 같은 것을 할 줄 알 리도 없고 애들에게 '자발적 가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애비 부담을 덜어 줄 길을 가라고 꼬드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정말 큰일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나 자신도 안쓰럽지만 이놈의 나라가 정말 한심하다. 도대체 입시지옥이니 사교육 광풍이니 하는 이야기가 언제 적 이야기인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해가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유학 시절 경험했던 독일 같은 나라를 떠올려 본다. 대학 등록금이 거의 없었던 나라였다. 지금은 사정이 변해 조금은 등록금을 받는다지만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는 학생들이 단순히 등록금이 아니라 생활비까지 거의 무이자로 국가로부터 대출받아, 원하기만 하고 수학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공부를 할 수 있다. 꼭 대학을 안 가더라도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살 걱정 크게 안 해도 된다. 학생 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돈 한 푼 안내고 무슨 질병이든지 치료받을 수도 있다. '껌 값' 정도만 내면 학생들은 대중교통이나 다양한 문화 및 체육 시설을 거의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당연히 무슨 사교육 같은 것이 판을 칠 리도 없다. 정말 자식 키우기 좋겠다며 부러워해 본다.
 
그러다가 문득 '답'이 아른거린다. 결국 문제는 우리나라를 독일 같은 '복지 국가'로 만들면 해결되지 않을까? 달리 별 다른 재산도 없고 돈 벌 재주도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녀들을 위해 마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책은 바로 우리나라를 교육 문제 같은 것은 크게 걱정 안 해도 되는 그런 나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인 투자 같은 것의 엄청난 리스크를 감안한다면, 지금 당장이야 무슨 수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자녀들을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가 아닐까?
 
무슨 수로? 독일 사람들이 자기네 헌법에다 복지 국가를 뜻하는 '사회 국가'에 대한 지향을 못 박아 놓고 여러 제도들을 정비하기 시작하던 때 그들이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1인당 GNP 같은 것이 훨씬 높아서여서는 아니었다. 복잡한 사정을 단순하게 말하는 감은 있지만, 결국 국가의 의무나 책임 또는 민주적 정치 공동체의 목적 같은 것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이 달라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철학을 실천해 온 성숙한 정치의 힘 덕분에 지금 같은 나라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독일 같은 복지 국가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경제 발전이 충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치가 후진적이라서 그런 거다. 문제는 정치다. 만약 우리나라도 좋은 정치를 할 수만 있다면 우리나라를 독일 같은 나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해법은, 갑갑한 마음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제 석학들의 이야기를 모았다기에 들춰 본 <행복 경제 디자인>(이정우 외 지음, 바로세움 펴냄)의 제목을 이용해 표현해 보자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경제를 디자인해서 그것을 차근차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정치'에 있다.
 
경제를 디자인한다는 발상이 거슬리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왠지 망해버린 소련 식 '계획 경제'가 떠올라서 그럴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도 경제는 그저 시장 논리에 내맡겨 두어야 한다고 귀가 따갑게 세뇌 받아서일 게다. 그러나 이병천이 이 책에서 폴라니를 통해 분명히 해 준 것처럼 '시장 사회'라는 것이 사실은 이미 계획되고 정치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그 자체로 얼마나 강한 정치적 프로그램인지는 부자 감세나 노조 파괴 같은 이명박식 정치의 한두 가닥만 떠올려 보면 너무 쉽게 분명히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역시 나름대로 계획된 경제이고 철저하게 디자인된 경제인 것이다. 문제는 어떤 경제인가 하는 것이지 경제를 디자인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아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경제를 디자인하는 것,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만 살아남고 패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죽이는 경제가 아니라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경제를 설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
 
학문적 배경들이 다 다르고 서로 간에 얼마간의 차이들이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분명하게 또는 은근히 '복지 국가' 또는 (좁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광의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라고 부를 만한 경제 체제를 지금은 무너져 버린, 그러나 우리나라는 여전히 열심히 쫓고 있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이 될 행복 경제의 모습이라고 그리고 있다. 우리가 무슨 급진적인 혁명 같은 것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래도 오늘날의 우리 상황에서 우리가 가진 많은 고통스런 삶의 문제들을 얼마간이나마 해결해 줄 수 있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추구해 봄직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 독일 같은 유럽 나라들에서, 그러나 사실은 더 모범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나라들에서 잘 실현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체제 같은 것이란다. 가령 베네수엘라 식의 사회주의는 참된 대안이 아니다(김수행).
 
다른 문제는 제쳐두고 지금 나와 그밖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교육 문제에만 비추어서 생각해 보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그렇게 칭송해 마지않았다는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무슨 민족성 같은 것과는 무관하고 어쩌면 재미있게도 우리나라가 벤치마킹해 보려고 안달이 난 미국형 자본주의 모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장 만능주의 자유시장 경제 모델에서는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주로 개인의 성공과 책임에만 맡겨 놓고 국가가 감당해야 할 분배나 복지 문제는 아주 등한시한다. 당연히 생존 경쟁은 극한적으로 치열해질 것이고 빈부 격차는 끊임없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어떤 생존 전략으로서의 교육열 같은 것이 비이성적으로 불붙을 수밖에 없다.
 
짐작컨대 미국에서는 그 동안 국가 전체적으로 높은 부의 수준 그리고 빈부 격차와 인종 격차의 중첩 같은 요인 때문에 그에 대한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 하거나 은폐되기는 했을 것이다. 이제 쪽박을 차게 되니까 대통령부터 나서서 뜬금없게도 우리나라를 끌어들이며 좀 더 적극적인 경쟁 적응의 필요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미국과는 사정이 달라 그와 같은 연관이 매우 악성적으로 또 아주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치명적인 효과를 낳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만약 사회적으로 생산된 부가 조금만 더 평등하고 정의롭게 분배된다면, 가령 '블루칼라'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격차가 그리 크게 벌어지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합리적으로 조정되어 노동시장에서 덴마크 식의 '유연 안정성' 같은 것이 확보될 수 있다면, 또 예컨대 누구든 수학 능력이 되고 의지만 있다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공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확립된다면, 그래서 만약 사회의 모든 성원이 극한적인 경쟁 구조의 바깥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마도 교육열이라는 이름으로 고상하게 포장된 온갖 종류의 자녀들에 대한 사디즘을 당장이라도 그만두거나 최소한 크게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교육시킬 일이 걱정이 되어 자녀들을 못 낳겠다는 부모들도 줄어들 것이고, 덕분에 앞으로는 나 같은 지방대 교수들이 '입시 시장'에 뛰어들어 학생 모집한다고 혈안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생존'이라는 실체도 모를 '유동하는 공포'(지그문트 바우만)의 장난에 놀아나 온 인생을 어떻게 경쟁에서 살아남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런 이상을 현실의 제약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거기에서 출발하여 그 현실을 변경하고 개선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 지적으로 고안된 현실 그 자체의 가능성으로 가공해 낼 수 있다면, 문제는 우리가 디자인한 행복 경제가 지닌 현실과의 (보기에 따라서는 엄청난) 간극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런 이상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지침으로 삼아 현실을 바꾸어내려는 집합적 의지와 노력이 진짜 문제다.
 
그런 복지를 위한 재원은 어디서 나오느냐고? 여기서는 원론적인 이야기밖에는 할 수 없지만, 큰 틀의 방향만은 분명하다. 손상익하(損上益下). 조선시대 정조 대왕의 원칙이란다(이정우). 오늘날이라면 부자들에게는 더 많은 세금을 매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기본 소득'이든 '마이너스 소득세'든 또는 그 무엇이든 보장해 주는 그런 원칙이다.
 
열심히 일해 큰돈을 벌었거나 앞으로 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훼손할 것이라고? '좌파'라고? '좌도우기(左道右器)'를 표방하는 김윤상의 '지공주의(地公主義)'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시라. 이 땅에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이 이 땅의 토지에 대해 누구든 공평한 지분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로부터 나오는 이익을 공정하게 분배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만 인정한다면, 시장경제와 경쟁을 한껏 인정하면서, 그러니까 우파적으로, 복지와 같은 좌파적 가치를 실현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가 제안하는 '토지 보유세'의 부과 같은 방식으로 복지를 위한 재원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고. 물론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겠지만, 다른 나라들도 다 하는데 우리라고 복지 국가를 못 만들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나도 안다. 문제는 결국 정치다. 복지 국가든 사회민주주의든 그런 것을 추구해야 마땅함직한 이 땅의 진보 개혁 세력의 현실을 생각하면 다시 한숨이 나온다. 지리멸렬한데다 사분오열 되어 있다.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구체적인 방법론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추구하는 정치 이념은 다들 너무 추상적으로만 여겨지고, 내 놓은 정책들이라는 것도 대개는 한 쪽은 너무 우파적이고 다른 한 쪽은 너무 좌파적이다.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는 진보적 대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예 없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보편성을 지향하면서도 '구체성의 우위'라고 할 만한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너무 모르는 듯하다.
 
사회과학적으로 냉정하게 보면 우리나라는 복지 국가나 사회민주주의 같은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이나 토양을 많이 결여하고 있다. 경제 성장이 덜 되어서가 아니라, 가령 잘 조직된 강력한 노동조합도 그에 기반을 둔 정당도 없다. 민주적 연대를 향한 문화적 토대 같은 것도 매우 약하다. 주류 기득권 세력은 너무 막가파식이어서 조그만 양보도 꺼려한다. 이런 조건에서 추상적이기만 한 좋은 이념을 앵무새처럼 되뇌면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현실의 개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상황을 고착시키고 영속화하는 데만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이 책에서 이정우도 유사하게 지적했지만 우리나라에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시민 정치'의 전통이 있다. 지난 '촛불 항쟁'은 여전히 생생하고 확대된 그 전통의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같은 데서는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적 길' 같은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도 있다. 또 그렇다면 아마도 '정치적 자유'에만 집착하는 '개혁 세력'과 '(재)분배'만 고집하는 '진보 세력'의 구분 같은 것은 전혀 무익하고 해롭기만 한 정치적 악일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상상력, 그러나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 위에서 펼쳐지는 어떤 '엄밀한 상상력'(아도르노)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민주주의 또는 정치적 개혁이야말로 한 나라의 복지 국가성 또는 사회 모든 성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시민권의 확보를 위한 참된 지렛대였음을 알 수 있다. 사회의 모든 성원이 민주적 정치 공동체의 평등한 시민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었기에 그 시민들이 민주적 참여와 자유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물질적 조건을 확보하고 양질의 교육을 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도 자리 잡고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것이야말로 참된 보편성일 것이다.
 
분배가 중요하다고 그 가치만을 중심으로 진보 정치를 하자는 것은 내가 볼 때 현실을 조금도 바꿀 수 없는 낭만적 이상주의일 뿐이다. 그 이상주의자들이 폄훼하듯 말하곤 하는 '절차적 민주주의' 없는 분배 실현에 대한 요구는 한갓 연목구어다. 반면 이른바 개혁 세력은 지난 민주 정부 10년이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어 냈지만 너무 신자유주의에 양보하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소홀히 함으로써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그 결과 오늘의 정치 현실을 낳고 말았다는 식의 이른바 진보 진영의 평가에 깊이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설사 그런 평가가 완전히 옳지는 않다 하더라도 사회의 민주적 연대성을 확보하기 위한 사회경제적이고 법적인 제도들의 정착 없이는 정치적 자유는 그야말로 공허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형 사회민주주의'라고나 할까, 아무튼 보편성에 대한 감각과 지향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새로운 정치의 탄생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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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강이현의 <밥상혁명>, 살림터 펴냄

 
"살고 싶다면, 당신의 밥상을 엎어라!" (프레시안,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2009-12-25 오전 9:28:53)
[화제의 책] 강양구·강이현의 <밥상혁명>, 살림터 펴냄
 
요즘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치고 학교 급식에 관심 없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학교 무상 급식을 둘러 싼 대립으로부터 급식의 안전성과 품질 문제 등등. 그런데 이 문제를 하나의 교육 정책 항목으로 다루는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학교 급식이라는 화두를 통해 인간관과 세계관을 조망하는 경지에까지 이를 수는 없을까?
 
이런 점에서 일본의 경험은 우리에게 음미할 만한 사례가 된다. 이른바 '먹을거리 교육'이 그것이다. 교육 이론가들의 아이디어 차원이 아닌 정부 차원의 공식 정책이다. 2005년에 먹을거리 기본법까지 제정되었다. 이 법은 그 전문에서 "아이들이 풍부한 인간성을 키우고 살아가는 힘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먹을거리'가 중요하다. (…) 그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기본이다"라고 선언한 후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국민의 식생활에서 영양 불균형, 불규칙한 식사, 비만과 같은 생활 습관병 증가, 과도한 다이어트, 먹을거리의 안전 문제, 외국 의존 문제가 생기고 있다." 이 한 문장 속에 인간의 삶과 건강, 근대성의 한계, 지구화의 폐단이 강력하게 암시되어 있다. 총리가 의장을 맡는 추진위원회가 생겼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이 정책이 시행되고 있으며, 국회에 매년 이행 사항을 보고해야 한다. 지역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생산자와 영양사가 상의해서 급식의 내용과 질을 결정한다.
 
한 마디로 말해 건강한 먹을거리 문화의 정착을 위해 전 사회가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얌전한 모범생 같아 보이는 정책이지만 그것의 실천적 함의를 살펴보면 식품의 상업화, 다국적 기업, 정치지리학 등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야심이 엿보인다. 이 정도면 일본 생활정치의 수준을 짐작할 만하다.
 
여기서 우리나라를 한번 돌아보자. 학교 급식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시민운동 쪽에서 식생활교육기본법을 제정하자는 요구를 계속 해왔다. (실제로 최근 일본을 따라했지만 그 내용에서는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의 식생활교육지원법이 제정·발효되었다.) 그러나 2006년에 발생했던 기업 제공 식자재 식중독 사건 이후 학교 급식을 2010년까지 직영 급식으로 전환하도록 개정된 학교급식법을 다시 무효로 하려는 개정안을 일부 국회의원들이 제출해 놓은 상태다. 사회적 퇴행의 징표다.
 
우리 식중독 사건을 전해들은 일본의 한 영양사가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학교급식을 정말 대기업이 좌지우지하나요? 어떻게 그 중요한 교육을 대기업에 맡길 수가 있죠?" 아이들의 밥그릇에까지 장사논리를 들이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천박상과 물신성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밥상혁명>(강양구·강이현 지음, 살림터 펴냄)에 소개된 수많은 사례들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생생한 사례들을 훑어가다 보면 어느새 이 책의 마지막 쪽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놀라움과 분노와 희망이 한꺼번에 축약되어 있는 책, 그것이 이 책을 덮으면서 든 느낌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먹을거리에 대한 책들이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밥상혁명>은 몇 가지 확실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 책은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무장한 현직 언론인들이 철저한 현장 조사를 거쳐 완성해 낸 의지와 발품의 산물이다. 먹을거리의 생산과 유통 현장을 찾아 국내를 샅샅이 훑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외국으로도 눈을 돌려 미국, 영국, 인도, 일본, 프랑스, 캐나다 등의 먹을거리 운동 현장을 직접 취재했다. 이 정도로 넓은 폭과 현장성이라면 국제 저널리즘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높은 차원의 시도라 할 만하다. 미국 같았으면 당장 퓰리처상 탐사 보도 분야의 후보 목록에 올랐을 것이 분명하다.
 
둘째, 이 책은 곳곳에서 저널리스트의 날카로운 현실 감각으로 원론적 차원의 문제의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는 수작이다. 그 결과, 스스로 꽤 진보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독자라도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전에 좀 더 깊이 생각해볼 고민거리를 선사 받는다.
 
예를 들어 보자. 건강과 환경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유기 농업 먹을거리와 친환경 식품이 좋다는 데 찬성할 것이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농약 친 농산물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농산물만 찾아 먹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이 책의 '농약에 의존하는 농민, 밉지만…'이라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다음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①먼 나라에서 생산된 유기 농산물. ②제3세계 농민들이 생산한 공정무역 먹을거리. ③관행 농업(통상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지역 먹을거리. 정답은? 세 번째다. 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일찍이 해답을 제시한 바 있다. "덮어놓고 자꾸 차원을 높이는 것은 안 됩니다. (…) 유기 농업을 하는 농민뿐만 아니라 농약을 쓰고 화학 비료를 쓰고 그러는 농민까지 안고 가야 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야 질 낮은 유정란을 생산하는 생산자를 내치는 게 당장은 편하겠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이 땅의 농민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행 농업으로 생산하는 농민들을 끊임없이 설득해 내야 한다. 그게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윈윈(win-win)하는 길이라고 한다. 학교, 직장, 식당에서 지역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구매하면서, 동시에 소비자가 유기농 먹을거리를 원한다는 시그널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격려, 인센티브, 꾸준하고 지속적인 진보의 방향 제시, 대중과 함께 하는 운동 등이 이 교훈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이것을 연대와 상생의 환경-생명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셋째, 이 책은 단순한 계몽을 넘어 책을 덮은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리키는 방향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적절하게 소개되어 있는 각종 참고 자료, 필요하면 당장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국내외의 수많은 단체와 운동과 사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영감을 통해 독자들의 의식을 자극한다. 필자들이 언론인이자 학구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전문가들이었으니 가능한 시도였을 것이다. 실제로 평자는 이 책에 소개된 참고 문헌만 뒤져도 <먹을거리의 사회학>과 같은 강좌를 한 학기 동안 진행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넷째, 이 책은 우리의 먹을거리가 인간에게 존재론적으로 얼마나 근본적인 쟁점인가 하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까지 짚어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먹는 음식들로 이루어진 생명체이다. 이것은 가장 초보적이자 환원 불가능한 원초적 가정에 속한다.
 
이런 전제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만 형이상학이든 종교이든 철학이든, 다음 단계의 사고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물리적 실존의 문제를 시장과 대기업과 로비 집단, 그리고 그들에게 놀아나는 정부에 맡길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라면 인간이 공동체에 뿌리를 내린 존재로서 집합적 차원에서 민주적이고 현명하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이 책의 저변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바로 민주주의의 두 가지 원리 자체를 묻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먹을거리라는 렌즈를 통해 '민의 평등'(육신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그리고 '민의 지배'(엘리트와 권력자가 아닌 풀뿌리 민초들이 자기 삶을 통제하는) 원리를 지금 여기에서 실천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식량 안보가 아니라 식량 주권을 이야기한다. 우리 존재의 근본인 먹을거리를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는 먼 나라 시장 논리에 맡기는 것만큼이나 반민주적인 행태가 어디에 있겠는가? 4대강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양수리 유기농 단지를 엎어버린다면 세상에 그런 반생명적 정치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관점으로 본서를 읽어보면 왜 이 책이 2003년 목숨을 끊은 농민운동가 이경해 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박진도 교수의 간곡한 인터뷰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존의 문제와 실현 가능한 진보의 문제를 실천-이론 양면에서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지구화에 대응하는 논리로 네 가지가 있다고들 한다. 지지, 거부, 개혁, 대안이 그것이다. 이중 <밥상혁명>은 대안의 관점에서 지구화라는 흐름을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이다. 그런데 반지구화 대안론은 공상적이고, 고립되어 있으며, 세상과 등을 진 소수파들의 은둔지향 행위, 아니면 비타협파들의 근본주의적 선택이라는 딱지가 붙기 쉽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고정 관념을 보기 좋게 날려 버린다. 대중과 함께, 실천 가능한 보폭으로, 상상력을 발휘하고 연대하자는 대안론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토피아적 현실주의의 표본과도 같다. 이런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주장 앞에서 우리가 설득당하지 않을 재주가 없을 성싶다. 자기 자신과 우리 이웃과 인류의 삶을 생각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일독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부제가 왜 "세상을 바꾸는 21세기 생존 프로젝트"라고 되어 있는지, 절박하게 따져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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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살리는 ‘반체제 밥상’ (이권우 도서평론가·안양대 강의교수, 2010-02-05 오후 07:26:44)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태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것이 덫이고 함정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불이익을 참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의가 불이익을 안겨주는 일도 왕왕 있다. 더욱이 불이익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불의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불이익과 불의 사이에 인식의 전환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 놓여 있다.
 
먹을거리를 놓고 세상이 온통 시끄러울 적에도 이 점에 착안해 상황을 주시한 적이 있었다. 불이익과 불의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데, 과연 어디로 확산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 뜨거운 열기가 슬그머니 사그라진 것을 보면, 그리고 좀처럼 되지피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불이익과 관련 있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밥상혁명>은 지역 먹을거리로 밥상을 채울 때 세상마저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목만 보고도 여러 가지를 곱씹어 볼 수 있다. 정말 먹을거리 문화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개인 차원에서 혁명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길들어져온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맛있고 싼 것들에만 익숙해졌는데, 가까운 곳에서 유기농업으로 재배된 것으로 밥상을 채운다는 것은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다. 돈도 들고 시간도 들고 입맛도 적응하려면 한참 걸리는 법이다. 그럼에도 건강이라는 이익을 생각하면 발상의 전환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밥상혁명>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밥상에서 시작한 변화가 세계체제를 뒤흔드는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니 말이다. 정의로운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지역 먹을거리를 소비하면 궁극에는 세계 차원에서 식량정책과 무역구조를 재편할 수밖에 없고,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게 된다. 지은이들은 이러한 점을 입증하기 위해 그야말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책에 담았다. 변화의 바람이 곳곳에서 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또다른 핵심어는 식량주권이다. 정부차원에서는 식량안보에 관심을 쏟고 있는데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식량을 확보하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식량주권은 식량자급을 뜻하며, 이 정신에 동의할 적에 밥상혁명은 시작된다. 불이익에 대한 거부가 불의에 대한 저항으로 확대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길이 있단다. 지금 밥상을 엎고 지역 먹을거리로 다시 차리면 된다. 소비자가 건강해지고, 소농이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재래시장이 살아나고, 마을 경제가 활기를 띠고, 굶어죽는 사람이 줄고,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한번 해볼 만한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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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민중사’ 돌풍 (경향, 2009-12-19)

 

하워드 진의 ‘민중사’ 돌풍 (경향, 워싱턴 | 김진호특파원, 2009-12-19 00:13:40)
ㆍ고단한 미국인의 삶에 잇따라 재조명
 
미국 주류 학계·언론계에서 철저하게 이단으로 취급돼온 원로 역사학자 하워드 진(87)이 경제위기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미국민들의 안방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미국 역사를 승자들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애환으로 기록한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어서다. 미 주요 케이블TV 채널인 히스토리 채널이 지난 13일 미국 민중사를 <사람들이 말한다>라는 2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한 이후다.
 
1980년 출판된 진의 저서는 미국 역사를 백인 노동계층과 인디언, 여성, 흑인 등 주류 역사에서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로 재구성한 것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편지 및 당시 언론들의 보도내용 등 풍부한 원문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는 이러한 원문을 읽고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구성돼 호평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2일 진의 저서 가운데 1830년대 한 섬유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가 임금인상과 노동환경 개선을 희구하면서 작성한 에세이를 소개하며 “우리가 지금도 듣고 있는 같은 이야기”라는 진의 발언내용을 전했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진은 “우리는 이라크에서 빠져나와야 하지만, 우리를 이라크로 가게 했던 심리구조에서 먼저 빠져나와야 한다”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말을 빗대 “문제는 오바마 스스로가 그러한 심리구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진은 “오바마는 보건의료 개혁 등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대담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진은 미국 진보진영 내에서 과격한 학자이자 반전론자로 정평이 나 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류 언론에서 철저히 외면해온 지식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출간 이후 20년 동안 100만부가 팔렸던 진의 미국 민중사가 2000년 이후 100만부가 팔려나간 것은 진의 민중사관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미 언론은 분석했다. 진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유대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2차대전에 참여한 뒤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일생을 반전과 노동운동에 바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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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과 폭력…아마르티아 센 | 바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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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정체성에 집착하면 폭력 싹튼다 (경향,손제민기자, 2009-12-18 17:32:21)
ㆍ포용과 배제가 함께 존재하는 정체성은 ‘양날의 칼’
▲정체성과 폭력…아마르티아 센 | 바이북스 | 이상환·김지현 옮김. 1만8000원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을 뜻하는 정체성이란 결국 ‘다른 사람’ ‘다른 사회’를 전제해야만 성립한다. 저자는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폭력과 관계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폭력은 사람들이 어떤 한 정체성을 독보적으로 강조하고 거기에 매달리면서 싹튼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들이 한국인임을 유별나게 강조한다면 한국을 지배했던 역사를 가진 일본인들과 갈등하기 쉽고, 어떤 사람이 기독교도임을 유별나게 강조하면서 무슬림과 갈등하고 종종 폭력이 뒤따르곤 한다. 그것은 스스로 어떤 정체성을 갖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무슬림은 폭력적이다’ 또는 ‘진정한 무슬림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무슬림 아닌 사람이 무슬림을 규정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갈등 요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정체성에 대한 강조가 갈등만 낳는 것은 아니다. 같은 한국인, 같은 기독교도끼리 해외에 나가서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돈독하게 지낸다. 전쟁이 벌어지거나 하면 같은 피를 이어받았다고 여기는 이들끼리는 처음 보는 사이에도 형제애를 느낀다. 그런 점에서 정체성 의식은 양날의 칼이다. 타인을 따뜻하게 포용하기도 하고, 그만큼 많은 사람을 단호히 배제하기도 한다.
 
문제는 어떤 정체성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졌다’는 등의 이유로 다른 정체성에 비해 독보적인 우위를 갖는 경우이다. 국가나 민족, 종교를 이유로 전쟁을 하게 되면 노동자, 페미니스트, 신문기자 등과 같은 정체성들은 사라진다. 저자는 그런 인간 정체성의 다원성이 무시되고 단일의 정체성만 고려될 때 인간의 왜소화는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졌을까. 저자의 개인사와 관계있다. 그는 힌두와 무슬림이 갈등했던 1940년대 인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벵골계 인도인이다. “1월에는 관대했던 사람들이 7월에는 무자비한 힌두교도와 흉포한 무슬림으로 갑자기 바뀐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저자가 속했던 사회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르완다, 보스니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아일랜드·영국 그리고 이슬람세계·미국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어느 하나의 정체성에 과도하게 집착함으로써 벌어지는 일로 해석됐다. 밤낮을 경계로 ‘빨갱이’ ‘반동’의 양극단을 오간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로서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종교, 문명, 국가, 문화 같은 큰 덩어리의 정체성에 과도하게 투사할수록 갈등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결론짓는다. 그래서 해결책도 하나의 정체성이 다른 모든 정체성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세계인,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다문화주의가 좋은 길로 제시된다. 다만 현실에서 (특히 영국에서의) 다문화주의는 문화적 자유를 수반하는 진정한 다문화주의라기보다, 신앙에 입각한 분리주의를 수반하는 ‘다원적 단일문화주의’인 경우가 많다는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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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으로 조작된 정체성은 폭력을 부르고… (한국, 오미환기자, 2009/12/18 22:01:05)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도 출신 석학 아마르티아 센(66ㆍ하버드대 교수)은 폭력의 배경으로 정체성의 갈등을 지목한다. 그는 민족 정체성이나 종교 정체성, 또는 민족과 종교가 결합된 종교적 민족성이 부딪쳐 증오를 부른다고 본다. 하지만 그러한 정체성이 실은 '환영'일 뿐이며,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정체성과 폭력>(부제 '운명이라는 환영')의 요지다.
 
이 책은 정체성에 대한 오해와 왜곡, 그로 인한 환영을 다룬다. 대표적인 것이 정체성은 단일하다는 가정이다. 예컨대 냉전 이후 세계의 갈등을 문명 간 대결로 풀이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하나의 문명권 안에도 다른 문명이 공존하는 현실을 무시한, 그러니까 기본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문명은 충돌한다거나 충돌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문명 공동체라는 '단일 정체성'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 오류라고 지적한다.
 
센은 민주주의는 서구적이라는 믿음,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옹호, 세계화에 대한 거부감 등에도 '단일 정체성'이라는,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환영이 깔려 있음을 날카롭게 간파한다. 센은 야만적으로 조작된 정체성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경고하며 실제 사건들을 환기시킨다. 센은 "단일 정체성이라는 운명은 없다"고 강조한다.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다원적인 것이어서 하나의 낙인을 찍을 수 없다며 개인의 선택과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환영에 덜 감금된 세계를 꿈꾸며' '정체성에 앞서 이성을'이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크고 묵직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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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덴티티…나는 누구인가 (서울, 박록삼기자, 2009-12-19  18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반드시 여러 성격의 공동체에 중복해 속해 있다. 이렇듯 복잡다단한 집단에 속한 그의 정체성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주 과거부터, 지금까지 늘 강조하며 배워 왔던 공동체 의식은 분명 아름다운 것이다. 특정한 공동체 성원으로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서로를 배려하고 연대감이 풍부해지며 자기중심적인 생활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개인의 만족감과 공동체의 소속감도 더욱 커질 수 있다. 다만 이는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때다.

인도 벵골 출신으로 1998년 동양인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76)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정체성과 폭력’(이상환·김지현 옮김, 바이북스 펴냄)을 통해 “정체성 의식이 타인을 따뜻하게 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만큼 많은 사람을 단호히 배제할 수도 있다는 추가적인 인식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정 집단의 정체성에 기초한 인식은 다른 집단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경향을 낳을 수 있고 이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폭력을 유발한다는 얘기다.
 
그는 끊임없이 정체성과 폭력의 상관 관계에 대한 질문과 탐구를 멈추지 않는다. 코소보, 보스니아, 르완다, 부룬디, 팔레스타인, 수단 등 20세기 폭력과 전쟁의 야만이 휩쓴 세계 분쟁 지역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시대에 대한 철학적 통찰과 정치경제학적 혜안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센 교수는 후투족과 투치족의 대량 학살이 벌어진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 사는 ‘키갈리 시민이며 르완다인이고 노동자인 한 후투족’의 예를 들며, 그 사람은 자신의 수많은 정체성 중 후투족으로만 바라보도록 압력을 받고 ‘키갈리 시민이며 르완다인이고 노동자인 투치족’을 살해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특정 정체성에 근거한 분파주의적 증오는 이렇게 야만적으로 조작돼 발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가 던지는 비판은 이른바 ‘문명 충돌론’을 겨눈다. 문명 충돌론은 1990년대 중반 발표된 뒤 9·11 테러 등을 거치며 현대 문명 담론의 기준점이 되어버린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이론이다. 문명 충돌론은 세계를 서구권, 이슬람권, 힌두권, 중화권 등으로 단순화시켜 문명 간 갈등과 충돌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이후 이 문명 충돌론은 많은 비판 이론에 직면하면서도 여전히 세계 지성계에서 정설처럼 간주되고 있다. 센 교수는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고 비판한다. 세계의 사람들을 분류할 수 있는 다른 모든 방식을 배제한 채 ‘문명의 구성원’이라는 단일 집단의 정체성으로만 파악하려는 것은 사람들을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예컨대 헌팅턴은 인도를 힌두문명권으로 분류했지만 인도의 무슬림 인구는 1억 4500만명으로 헌팅턴이 이슬람권으로 분류한 거의 모든 나라보다 훨씬 많은 무슬림이 살고 있는 곳이다. ‘범주의 단순화’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이론이기에 이에 대한 옹호론이나 비판론 모두 잘못됐음을 지적한다.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에 천착해온 센 교수는 ‘정체성과 폭력’을 통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학문이라면 경제학과 철학, 정치학, 외교학, 사회복지학 등이 모두 서로 별개가 아님을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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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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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우리 사회의 ‘상상력 빈곤’ (경향, 김학순대기자, 2009-12-18 17:32:57)
 
‘위약 효과’(플라시보 효과)를 처음 발견한 프랑스의 약사이자 심리치료사 에밀 쿠에는 ‘상상력이 의지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밝혀냈다. 어떤 일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의지력보다 상상력이 한층 더 긴요하다는 의미다. 의지력이 가장 큰 관건이라고 여기는 사회통념을 뛰어넘는 생각이다.
 
쿠에가 강조하는 ‘상상력의 힘’은 세 가지 법칙으로 요약된다. ‘의지와 상상력의 대결에서는 언제나 상상력이 이긴다. 의지와 상상력이 같은 방향으로 발휘되면 그 에너지는 두 배가 아니라 몇 배로 늘어난다. 상상력은 스스로 조종할 수 있는 영역이다.’ 쿠에는 상상력이 의지력을 이기는 대표적인 사례로 아무리 자겠다고 굳게 마음먹어도 졸리지 않으면 즉시 잠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든다. 자기암시를 통해 얼마든지 상상을 좌우할 수 있다는 세 번째 법칙에 주목한 것이다.
 
상상력이 의지보다 열 배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매일 일정 기간 동안 과녁 앞에 앉아서 다트를 던지는 상상을 하면 실제로 연습한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건 심리학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상급 프로 선수들이 철저한 정신적인 예행연습과 상상력 훈련 방법을 통해 골프 실력을 향상시키고 있는 게 요즘의 실정이다.
 
9·11테러진상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의 상상력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는 9·11 사태가 네 가지 종류의 실패를 드러냈다고 본다. 상상력, 정책, 역량, 운영의 실패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실패는 상상력의 빈곤이었다.” 9·11 사태 직전까지 끊임없는 테러정보를 입수하고도 그럴 가능성에 대한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정책의 시발점은 상상력이다.
 
‘유쾌한 미학자’란 애칭을 지닌 진중권은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휴머니스트)에서 21세기에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 힘’이라고 선포한다. 상상력이 곧 생산력이라는 명쾌한 메시지다. 상상력이 부드럽고 유연한 놀이정신에서 나온다는 시선이 책 전체를 관류한다. 미래에는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예언도 들어맞은 셈이다.
 
지은이는 상상력 혁명으로 맞이한 사유의 특징을 비선형성·순환성·파편성·중의성·동감각·상형문자·단자론이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로 감흥 깊게 펼쳐나간다. 책의 내용과 구성도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주사위, 체스, 카드, 불꽃놀이, 마술, 만화경 등 예술 작품에 등장한 스무 가지 놀이가 상상력으로 뻗어가는 방법론을 탐색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책 자체가 하나의 놀이이자 놀이터다. 300여 컷에 달하는 그림에 감춰져 있는 크로스워드 퍼즐 같은 텍스트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상상력의 대표주자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꼽는다. 500년 전 사람이었던 다빈치는 현대 비행기와 유사한 비행기의 설계도를 그렸다. 실질적인 비행에 성공한 최초의 비행기가 20세기 초에 나온 사실에 비춰보면 다빈치의 상상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저자는 다빈치를 상상력에 구속이 없는 ‘영원한 소년’으로 묘사한다. ‘상상력의 세계=어린아이의 세계’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해도 괜찮겠다.
 
그러고 보니 <상상력에 엔진을 달아라>의 저자인 다자이너 임헌우가 일갈했던 말이 떠오른다. “앞으로의 문맹자는 이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말은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는 사진작가 라즐로 모홀리 나기가 1920년대에 “미래의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했던 경구에서 한발 더 나간 것이다. 상상력의 빈곤은 세밑의 논란거리인 광화문 광장 디자인 같은 문화분야뿐만 아니다. 삽질 외에는 두드러지는 게 없어 보이는 정치, 행정, 사회정책 등속에서 숱하게 눈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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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광장의 눈물, 왜 용산을 비켜 흘렀나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9-12-11 오후 07:57:00)
젊은 연구자들 눈으로 본 죽음의 정치학
노무현 추모열기서 엿본 ‘대안 없는 애도’
민주주의 확장 이어지지 못한 원인 짚어

»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산책자·1만4000원 
 
어째서 추기경과 늙은 소를 향해 쏟아졌던 ‘애도의 눈물’이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외면했을까? 100만 이상이 합류한 김수환 추기경 장례 추모행렬과 역시 100만을 넘겼던 독립영화 <워낭소리> 대박 현상을 “도덕적·인권적 감수성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의 징후”로 읽은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정용택 연구원은 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행렬엔 500여만이 공권력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집결했다. 그 사건들 앞뒤로 화물연대 박종태씨, 7명의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목숨을 버렸지만 용산처럼 그들은 잊혀졌다.
 
2009년의 죽음들에 관한 이 뚜렷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 진보적 젊은 두뇌 집단인 당대비평 기획위원회가 엮어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바로 그 현상과 배후를 여러 필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하고 질문한다. 상당한 세월을 지나서인지 해석과 질문들은 정제되고 순도가 높다.
 
‘종교가 되어버린 광장의 애도’라는 글에서 기억의 비대칭을 낳은 “시민사회의 문화적 동학”에 주목한 정용택 연구원은 “마땅히 애도돼야 했던” 용산참사와 “너무 과도하게 애도된” 추기경과 늙은 소와 노 전대통령 현상 사이에 모종의 길항작용이 존재한 것으로 본다. 우선 그는 용산에 대해 대중은 애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도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란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이런 반응은 대개 삶에 대한 총체적인 의욕의 소멸로 집약되는데 심한 애도의 슬픔은 채워질 수 없는 깊은 공허와 무기력을 수반한다.
 
이런 애도가 제대로 수행되려면 애도의 주체가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용산참사는 이명박 정권이 내세운 ‘뉴타운’, 그리고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선진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이라는 성공신화가 허구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애착의 대상을 상실했음에도 그 신화에 애착을 지녔던 대중은 거기에 집중된 리비도를 철회하지 못하고 부유했다.
 
권력의 폭압 속에 대상의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대중은 용산을 외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상의 현존에 대한 불신 또한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들의 귓전엔 용산을 기억하라는 외침이 계속 맴돈다. 그때 추기경이 선종했고 <워낭소리>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대중은 정체 모를 상실감을 거기에 전이시켜 알 수 없는 대상의 상실에 대한 애도를 쏟아부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하나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대로 된 애도가 불가능한 이런 상태는 우울증을 앓는 주체의 행동과 유사하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실을 애도하는 우울증 환자의 애도는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애도는 자아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용산참사로 인한 상실감을 추기경이나 <워낭소리>의 늙은 소에 대한 애도 행위로 극복하려던 대중의 빗나간 애도는 필연적으로 상실감과 슬픔을 더 키웠다. 그 결과 뒤이은 노 전 대통령 타계 때 대중은 더욱 폭발적인 애도를 표시했다. 정 연구원은 사회학자 뒤르켐의 종교적 집합의례 개념을 빌려, 노무현이라는 기표가 그의 자살을 통해 초월적 기의로 기능하면서 성화(聖化)됐다고 본다. 그것은 ‘탈정치화된 정치인’, ‘권력의 술수에 따른 정치적 희생양’, ‘바보 노무현’ 이미지로 재현됐다.
 
성화된 노무현은 물론 실재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양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강행, 평택 대추리 진압, 재임 기간 23명의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노동자 탄압 등 ‘신자유주의’로 포괄할 수 있는 정책들을 노무현·참여정부의 한계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국가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만 돌릴 수 있겠느냐고 정 연구원은 반문한다. 그럼에도 대중은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자 ‘원래 없던’ 성화된·이데올로기화한 그의 자질을 실재한 양 착각하고 그것을 상실한 것처럼 애도함으로써 결핍을 상실로 기만적으로 전이하는 우울증적 주체와 유사한 오류를 범했다.
 
이 모든 현상의 근원에는 이명박이 자리잡고 있지만, 노무현의 실재가 이명박과 얼마나 다르냐고 정 연구원은 묻는다. “우리는 대중들이 갖고 있는 노무현과 이명박의 이 기묘한 대칭구도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 이상화된 노무현의 이미지를 깨버렸을 때, 드러나는 실재의 노무현은 사실 이명박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나아가 지금 대중들은 노무현을 상실해서 우울한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일로 인해 우울하기 때문에 노무현의 죽음을 상실로 인지하고 그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세계 내의 기호, 곧 노무현이라고 하는 상상의 이미지를 삼킨 것임을 말해야 한다. 우울증적 대중들은 자신들이 단 한 번도 소유해본 적이 없는 ‘노무현’ 또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지시하는 ‘민주주의’의 상실을 연기(演技)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민주주의의 회복을 끊임없이 연기(延期)하고 있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애도의 집합의례를 수행하면서 상상의 도덕공동체를 만들었고, 반대자들과 대립구도를 이루면서 서로 배제하며 포함하는 동치(同値)관계를 이루었다. 그 결과 피아의 이분법 속에 제3의 정치적 삶의 자리는 허용되지 않고 대안적 시선은 존재할 여지가 없어졌다. 그렇게 해서 용산과 화물연대, 쌍용자동차의 희생자들은 잊혀졌다.
 
결국 대중이 잃어버린 것은 노무현이 아니라 민주주의이며 민주공화국의 이상이다. 이를 향한 대중의 우울증적 충동은 애도나 촛불집회와 같은 집합의례 형식으로만 살아남아 단지 광장에서 대중들이 모였을 때만 현존할 뿐이다. 그것만으로는 현실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 “모든 죽음의 수행자, 이 시대의 지배적 구조인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저항”을 촉구한 시인 송경동은 가장 단호하게 그런 입장을 견지한다. 이에 비해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적대시한다면, 파시스트들이 자유주의자로 행세하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며 ‘무의식적 보수성’ 극복과 자유주의적 법치 확립을 우선해야 한다고 한 박동천 전북대 교수는 노무현의 공도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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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서 노무현, 김대중까지 (레디앙, 2009년 12월 19일 (토) 12:35:49 손기영 기자)
[새책]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죽음과 기억의 정치학 
 
“우리는 이 세 가지 다른 죽음에 어떻게 애도를 표시했으며, 어떤 침묵을 통해 무엇을 외면했는가? 노무현의 죽음이 ‘정치적’인 죽음이면, 김대중의 죽음은 ‘역사적’ 죽음이다. 용산은 ‘정치 자체’의 죽음이다. 죽음의 의미의 위계화 차별화, 그것은 그들을 추모하려는 사람들의 의지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 본문 중
 
지난 봄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비의 생각 02』를 통해 2008년 촛불 집회의 열광과 좌절을 담아 ‘촛불 논쟁’을 지폈던 당대비평 기획위원회가, 다시금 논쟁과 담론의 마당을 마련하고자『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당비의 생각 03(산책자, 14000원)』을 지난 7일 출간했다.
 
용산 철거민들,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올해 우리는 수많은 ‘죽음’과 마주했다. 이 책은 2009년 한국 사회의 정치적 공간을 배회했던 ‘죽음’을 비판적 반성의 무대로 불러들인다. 이를 통해 죽음 자체의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인 삶의 정체성을 헤아리고,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적 정치를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 책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찾아온 애도 물결과 ‘사회적 우울증’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서 기획을 시작했다. 하지만 뒤이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을 맞닥뜨리고서 당대비평 기획위원회는 ‘용산-노무현-김대중’이라는 질문의 축을 다시 구성하게 된다. 또 이러한 안타깝고 부당한 죽음들을 시민들이 더 이상 열정 속에서 애도하지 못하고 빠르게 잊어버리거나 현상에 주목한다. 이에 권명아 동아대 교수는 이 책에서 ‘워낭소리’, ‘엄마를 부탁해’ 등의 인기를 소개하며 “애도의 열기가 광장에서 사그라진 게, 단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졌거나 애도에 대한 열정이 소진되었기 때문으로 보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더 이상 ‘아름다운 순교자’를 기억하는 것은 결코 대안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며 “대중 그리고 대중운동에 필요한 것은 순교자가 아닌,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이다. ‘아름다운 순교자’를 추억하는 것은 위기를 심화시킬 뿐”이라는 지적을 내놓기도 한다.
 
이 책은 이처럼 ‘강렬했던 죽음의 이미지가 빠르게 망각 혹은 무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학자와 전문가들의 상이한 답변을 담은 2편의 ‘기획의 말’과 10편의 비평, 2편의 이미지 화보로 책을 꾸몄다. 다시 말해 죽음과 기억의 정치학을 보수 프레임, ‘노빠’ 현상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면밀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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