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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지식인 지옥? - <첩첩산중>(옴니버스 영화《어떤 방문》중, 홍상수, 2009)

  • 등록일
    2009/11/28 18:15
  • 수정일
    2009/11/28 18:15

홍상수, 지식인 지옥?

- <첩첩산중>(옴니버스 영화《어떤 방문》중, 홍상수, 2009)

 

 

멜리에스가 환상적인 달나라 여행을 필름에 담아 대중 앞에 내 놓았을 때, 그것은 일종의 마술쇼에 가까웠다(《달나라 여행》, 1902). 그것은 테크놀로지와 놀이의 경이로운 결합이었다. 따라서 “예술은 애초부터 기술이었다”라는 로버트 저매키스(Robert Zemeckis)의 말은 영화라는 매체예술에 이르러 완전히 증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테크놀로지와 예술이 결합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일정정도의 네러티브가 부재한다면 그 필름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이상이 되지 못한다. 거장 큐브릭(Stanley Kubrick)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가 단지 조잡한 테크놀로지의 전시가 아니라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완성된 ‘시네마’(‘무비’가 아니라)로 평가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따라서 영화가 기술이고 또 예술이라면, 거기에는 그 기술-예술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의 창조적 네러티브, 즉 사건구조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사건구조는 시나리오만이 아니라 카메라와 편집을 통한 시공간의 분할을 모두 포괄한다. 작가(감독)의 특유성은 이 사건구조의 창조를 위해 이미지를 얼마만큼 극단적으로 또는 근원적으로 다룰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홍상수는 이 영화예술의 본질을 끝까지 고수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초기작인 《강원도의 힘》(1998)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고집스럽고 때로는 시니컬한 작업방식은 이제 ‘딱 홍상수식’이라는 레떼르를 달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사실 어느 정도 홍상수식 시네마에 물릴 때도 되었건만,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화가 나올 때마다 (정말) 작정하고(!) 본다.

 

희한한 것은 여기에 있다. 내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홍상수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필자를 포함하여) 먹물께나 든 지식인들이다. 그런데 홍상수가 영화 안에서 능청스럽게 놀려대고 키득거리게 만드는 대상이 또 이 지식인들이 아닌가? 언젠가 나는 홍상수의 이 끝없는 지식인에 대한 조롱과 희화는 역설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홍상수 자신의 애정, 결국 자기 자신(작가 자신도 프랑스 유학씩이나 다녀온 지식인이 아닌가?)에 대한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고 썼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파악도 부족할 듯싶다. 왜냐하면 이 ‘나르시시즘’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개봉한 홍상수의 《첩첩산중》은 그 나르시시즘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나는 그래도 창피한 줄 안다’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지만, 어쩌랴, 지식인이란 그런 족속들이다. 간단한 사실을 복잡한 진리(aletheia)로 떠드는 자들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간단한 사실을 사람들이 매우 자주 망각(letheia)하고 살기 때문에 (데리다식으로 말하자면) 지식인들의 ‘경매가’가 한없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가 주장한 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바로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다. ‘창피한 것을 아는 것’과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사이에 무슨, 루비콘 강 쯤 되는 심연이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다들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홍상수는 지식인들을 놀려대면서도 그 지식인들이 창피한 줄도 알고 그래서 ‘괴물이 되지는’(《생활의 발견》 중 김상경의 대사) 않을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홍상수의 적정수준의 페시미즘도 한 몫하고 있다. 사실 창피스러운 줄 아는 것과 괴물이 되지 않는 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굉장한 덕목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테지만 생활과 욕망이란 것이 그 덕목의 실천을 참으로 힘겹게 만든다는 인생관이 그것이다.《첩첩산중》에 등장하는 지식인들도 그렇게 산다. 창피하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을 위무하고 때로는 위악을 떨면서 말이다.

 

거두절미. 홍상수는 이번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후 오랜만에 글쟁이들을 등장시킨다. 주요 등장인물은 4명이다. 전주 어느 대학의 교수 겸 소설가인 전 선생(문성근), 그의 한때 제자이자 애인이었던 미숙(정유미), 그리고 미숙의 예전 애인이자 데뷔한 소설가인 명우(이선균), 마지막으로 미숙의 절친이며 현재 전 선생의 애인이자 또 제자인 진영(김진경). 그리고 까메오로 잠깐 실제 소설가인 은희경씨가 등장한다. 이들 배우들의 역할 면면만 봐도 벌써 실소가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가 애인이고 친구가 또 그 애인의 애인인 이 요지경 상황이란 게 그리 별스럽지도 않다. 그러니까 홍상수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말이다. 작가가 이들 지식인들의 그 별스럽지 않은 삶을 ‘요지경’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이 이러한 삶 자체의 비루함을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나지만 이 영화에서도 지식인들(또는 그 지식인 중 한 명)은 마침내 그 삶의 비루함과 창피스러움을 깨닫게 되는데, 영화의 종반부에 가서 그러하다.

 

이 영화도 그래서 당연히 마지막 장면이 핵심이다. 여기서 극중 모든 등장인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두 모인다. 그 전날 과음(과연 홍상수 영화에서 음주란 무엇일까?)을 한 네 명은 각자의 연인(섹스파트너?)과 모텔에서 하루 밤을 보낸 뒤 모텔 앞 식당에서 딱, 마주친다. 서로 데면데면하게 따로 상을 봐서 먹다가 가려던 찰나, 식당 문 앞에서 마침내 전 선생이 화를 버럭 내며 다른 커플(미숙-동우)을 불러 세운다. “야! 이 새끼들. 일루와! 너네 왜 인사도 안하냐? 어제 진영이만 버려두고 너네 둘이 갔다며? 그래서 진영이가 나한테 전화했다. 그래서 술 마셨고, 늦어서 잠깐 들어가서 쉰 거야.” 전선생과 진영의 사이를 아는 미숙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훽 던지며 말한다. “그만해요! 창피한 줄 아셔야지! (동우를 보며) 야, 나 간다. 넌 뒤에 따라와!” 그리고 화면전환, 모텔촌의 건물들을 비추는 카메라. 첩첩산중, 아니 첩첩모텔중.

 

미숙은 혼자 차를 몰고 어디로 갔을까? 평론가 정성일도 지적했다시피 이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와 클로징 시퀀스가 매우 정교한 장면의 대칭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씨네21』730호 참조). 나는 정성일의 이 평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다. 즉 이러한 구조적 대칭성은 곧장 이념적 대칭성, 다시 말해 이 등장인물들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게 서로의 욕망을 거래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 말이다. 여기서 미숙의 존재는 네러티브 상에서나 구조상에서나 매우 특유하다. 그녀가 보이스오버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러한 장면의 대칭구조에 파열구를 내는 당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미숙은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욕망을 거래의 대상이나 가벼운 섹스스캔들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달리 매우 절실하게 거기 매달린다. 영화의 첫 장면에 그녀가 차를 몰며 전주로 가면서 혼잣말로 뇌까리는 “죽어도 돼, 죽어도 돼”라는 말은 이 절실함이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미숙의 이 절실함의 정체는 분명 문학 창작에 대한 욕망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창작활동을 위해 전선생과 사귀고, 그와 헤어지자 바로 동우와 잠자리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런 혐의가 짙다. 그녀가 충동적으로 은희경의 집을 찾아가서 “선생님이 제일 잘 쓰세요. 이제부터 글만 쓸거에요.”라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하는 것도 그런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일종의 ‘전이’(transference)를 바라는 이런 행동은 매우 유아적이며, 그래서 실현 불가능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자기 욕망에 끝없이 집착하는 미숙이야말로 나름 대로들 쿨한 이들 지식인-작가들과는 달리 지식인의 본질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선생에게 쏘아부친 그 말이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미숙이 어떤 모범적인(?) 지식인상을 드러낸다고 해서는 매우 곤란하다. 홍상수 영화에서 그것보다 더 웃기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란 건 그저 좀 아는(본질적으로는 스스로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또는 창피한 줄 아는) 그런 존재이지, 어떤 휘황찬란한 아방가르드가 아니다.

 

흔히들 홍상수 영화를 지식인들의 희화로 읽곤 한다. 그건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몇 가지 첨언을 해야 완전히 옳을 것이다. 그 희화라는 것을 통해서 당대의 지식인들의 본질이 유전(流轉)된다고 말이다. 예술(pathos)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로고스(logos))에 대한 상당한 부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로고스가 반겨야할 일이기도 하다. 그 로고스가 당대를 지나 살아남는 것은 그러한 부정성의 전염을 통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언제나 로고스는 파토스를 질투하거나(플라톤), 경외하거나(니체), 경제적 하부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것(맑스)으로 간주하지 않았던가? 존경스런 칸트조차 ‘숭고함’에 대면하여 어쩔 줄 몰라 했으니 말이다.

 

혹시 홍상수는 ‘구름’이나 ‘개구리’를 선사하려고 작정한 당대 한국 사회의 아리스토파네스일지도 모를 일이다. 창피스러운 줄 모르는 지식인들을 위해 창피스러운 영화를 계속 만드는 그런 예술가 말이다.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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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

  • 등록일
    2009/11/23 00:12
  • 수정일
    2009/11/23 00:12

- 영가진각이 육조혜능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나오면서 지은 게송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370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송이 꽃에서 전 우주를 본다"고 했고, 라이프니쯔는 모나드가 하나의 무한한 세계 전체라고 했다. 여기엔 어떤 형이상학학적 공명이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 한국사회에선 선거에 이기고 권력에 획득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주택에 관한 납득될만한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건 선거꾼들이라면 다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좌파 선거 정당이 과연 이 짓을 해야하냐는 것이다. 만약 좌파의 정치적 양식에 어긋나지 않고 권력을 획득하려면 이 조건에 급진적 전망을 부가해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해타산에 밝은 소위 서민-중산층 중 어느 누구도 이 전망에 솔깃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좌파들의 고민은 여기서부터다. 이들은 지금부터라도 이에 대한 선거전략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에는 불수의한 또는 미필적인 임무방기가 생긴다. 만약 이 유동적인 서민-중산층 계급의 이해타산을 흡족하게 할 만한 정책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분명 주택-교육 정책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정책은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이익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거정당'이 이들의 요구를 저버릴 것인가? 무리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증후가 드러난다. 즉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이익만을 정책적 대안으로 내세우면서 집권할만한 역량을 가진 진정한 노동자계급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덫이 있기 때문이다. 주택과 교육, 노동자계급정당은 이에 대한 확실한 비판과,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 진리에의 선의지, 그것은 마땅히 플라톤을 위해서만 남겨두자. 우리는 그를 이해하면서 더 심층으로 가야 하리라. 사유의 지층에는 진리보다 거짓이 선보다 사악한 아름다움이 더 많다는 것 .그래서 이제 철학자는 정치가이면서 고고학자, 문헌학자 더우기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철학적 사유는 수학적 계산이나 예술작업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것이다. 무기력한 철학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하지만 활력 넘치는 철학은 이 사실을 부단히 의식한다. 왜냐하면 선의지란 마땅히 미적 활력과 욕망의 표면에 서식하는 이념인 것이며 이 이념이 발생은 미적 무의미 차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더 자주 예술에 경의를 표하곤 했던 것이다. 

 

- 편의상 나누자면 프랑스 철학의 한국적 갈래는 현재 두 계열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현상학과 해석학을 기반으로 논변을 중심에 놓고 체계를 겨냥하는 계열이 있고, 또 한편에는 실증적 과학을 기반으로 논변만이 아니라 개념에 집중하면서 체계보다 현실에 접근해가는 계열이 있다. 전자에는 다수의 아카데미 학자들, 예컨대 일세대 프랑스철학 연구자들이라 불리우는 박이문 등과 그 다음 세대이면서 보다 기독교적이고 전통과 문헌학적 감수성을 중시하는 강영안과 서동욱이 있으며 후자 쪽에는 주로 아카데미 외부에서 활동해 온 이정우, 류종렬, 이진경, 김재인 등이 있겠다. 문제는 이 계열이 좀 더 긴장감 있게 길항하면서 학문의 반성과 비판을 도모한다기보다 각자의 영역에 자족적으로 머물면서 후속세대들에게 어떤 길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데 있다. 특히 실물적 기반을 쥔 강단파에 유학이후 또는 박사 이후 세대원들이 대거 몰리면서 자칫 프랑스철학이 현상학적 해석학적 기반에만 관련된다는 식의 허구가 유포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 해석학적 지평이란 곧 해석의 지평이기도 할 것이다. 해석은 해석학적 대상의 앞과 뒤로 들고 나기도 하지만 그 해석이 시간 자체를 앞뒤로 들고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다시 정당화된다. 즉 해석이 시간이 곧 실존의 시간이라는 것. 난 이 경우를 대중분석의 많은 예에서 본다([씨네 21] 720호 특집 참조). 

 

- 물론 핵심은 칸트적인 통찰이다. 즉 질문보다 그 질문의 가능조건 말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다시 칸트와 결별이 필연적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범주론이 아니라 감성론이며 변증론이 아니라 이념론 그것도 차이의 이념론이기 때문이다. 

 

- 인식근거에서 존재근거로의 전회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가 아니라(사실 이 코페르니쿠스는 가짜다), 맑스와 들뢰즈의 코페르니쿠스라야 가능하다. 존재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의 신체다. 이로써 데카르트의 학문의 나무도 그 뿌리를 바로 하고 서게 된다. 이 뿌리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존재론이며 곧 윤리학이고 정치철학인 게다. 형이상학은 여기서 이 뿌리의 양분을 길어 자라난 열매일 것이고, 이 열매가 바로 일상이고 습관이며, 세계관(Weltanschauung)이다. 

 

- 철학의 적은 분열증이라기보다 언제나 강박증이었다. 강박을 적으로 삼음으로써 철학은 결국 예술보다 빈곤한 어떤 것이 되었으며 그 외부에 스스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남겨두게 되었다. 마치 디오니소스처럼.

 

- 최근 정성일의 말처럼 영화는 상영과 관람을 통해 한시적인 코뮌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영화 내재적 가치와 형이상학 아래에 놓인 영화의 정치학일 것이다.  이때 영화는 영화보기이며 행위주체들은 씨네필이길 넘어 씨네워리어 또는 씨네밀리탕트일 것이다. 68년 혁명 당시 씨네마떼끄 프랑세즈를 지켜낸 누벨바거들이 그들일 것이다.

 

- 한때의 적멸이 스친다. 등언저리가 서늘하다. 여기는 도저한 실재의 난만지대. 난 순간순간 스스로를 잡았다가 놓치기를 반복한다. 포르트다포르트다포르트다...

 

- '非'인가 '反'인가? 하긴 회의론은 스스로에 모순된다. 하지만 회의론이 스스로에게 진리를 요구하지 않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유령, 그것의 도플갱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디오니소스는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다만 생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생성이 '순진무구'한가?

 

- 이제 철학의 임무는 과학과 해석학을 조우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조우는 형이상학과 정치경제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삼위격 안으로 수렴되고 그로부터 발산할 것이다.

 

- 의미론의 연속된 두 층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층위는 천문학적 알레고리로 주로 설명되는 고도로 추상화된 층위(형이상학)이고 둘째는 주로 기계적 역설을 횡단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극사실적인 층위(예술)다. 이 두 층위의 극단적 스팩트럼으로 갈수록 개념과 이념은 점점 더 희박해진 공기 속에서 탄생하며 외연은 뚜렷해지는 대신 내포는 복잡해진다. 그래서 개별성이 보편성보다 앞서는 것이다(이 방면에서 예술과 철학은 구분되지 않는다). 상식(doxa)은 이 두 층위의 혼효면 위에 서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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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할 것인가? 권력이 권능을 멸시하고, 거기에 봉사하기보다 자신의 위세에 나르시시즘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말이다. 만약 이 권력이 그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파쇼화되고 권능의 외침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다중 낱낱이 서로 무관한 듯이 취급한다면 말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단결은 아니고 공명이 이루어지려면 여기서 어떤 전술이 필요할 것인가? 절대적 폭력을 동원해 권력을 단두대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권력을 똑같이 멸시하는 방법을 통해, 권력 스스로가 자신의 노예적 신분을 깨닫도록 할 것인가? 혹은 이대로 멸시와 모멸을 감내하면서 노예의 가면을 마다하지 않으며, 삶을 소모할 것인가?      

- 좌파 진영 내의 중도파를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백낙청과 최장집을 읽어야 한다. 이들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 어떤 책을 내느냐에 따라 이데올로기 진영의 형세가 변동하기 때문이다. 최근 백낙청이 [어디가 중도이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냈고, 최장집은 [민중에서 시민으로]를 냈다. 제목만 봐도 내용이 어떠할 지 윤곽이 잡히는 바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넘어설 수 있을까? 이것이 좌파내 급진 진영의 또 하나의 과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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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6시 수원터미널. 틀어 놓은 티비 두 대에서 각기 다른 방송국의 각기 다른 애국가가 나온다. 터미널 안이 온통 왕왕 울린다. 밖은 짙은 안개가 이미 점령했다. 안개를 뚫고 그 옛날 박정희의 탱크가 불쑥 포신을 내밀 것 같다. 심상치 않은 수원의 새벽이다. 난 광주로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말이다. 박정희 따위는 발톱에 때만한 가치도 없지 않은가? 사랑은 역사보다 더 오래 되었고, 역사보다 더 훌륭하니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동선이 점점 활발해진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들, 좌측 옆구리에에서 불빛이 흘러 나온다. 6시 9분. 이제 날이 훤하다.

 

-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그것이 깨지면 그 이상의 '연대'도 '협력'도 불가능하다. 이명박을 봐라. 어째서 국민 대다수가 그에게 마음으로 협력하지 않는지를.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저 평범한 사람살이의 규칙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요즘 들어 한 가지 일 때문에 자꾸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혹시 나도 또한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 적은 없는가, 또는 나도 모르게 신뢰를 저버린 적은 없는가, 자꾸 묻게 된다. 한 번 신뢰가 깎이면 돌이킬 수 없다. 이후로 신뢰에 관련되었던 그 누구도 그를 완전히 믿지 않을 것이다.

 

- 이제 글을 거두어들일 때다. 한동안 외부에 글을 쓰는 것을 줄여야 하겠다.  

 

- 논쟁적 서평쓰기가 거쳐야 할 것들: 원전대조→발췌→다른 서평 참고→사전숙고→쓰기

 

- 나는 ‘다른’ 글을 쓰고 싶은 거다. 섬 바위에 새기는 외딴 글. 그러나 날빛 글.

 

- 새벽 2시. 혼곤한 정신이다. 머리 속에 N극만 있는 자석 덩어리가 해마 근처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풀벌레  소리가 온 동네에 왕왕 울린다. 멀쩡하게 버틸 수 있을까?

 

-강의준비: 강의교재검토->2차자료검토(프랑스철학+강영안)

 

- 흐린 날, 라디오에서 나오는 피아노는 Listz일까? 낯익다. 감사 때문에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게 분명하다. 어서 이 기간이 좀 갔으면 싶다. 아무리 그래도 연구실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건 그리 좋은 게 아닌 듯 싶다. 어쨌든 내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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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7

  • 등록일
    2009/11/17 02:17
  • 수정일
    2009/11/17 02:17

어떻게 보면 한낱 경제라는 것이 삶의 중심에서 교교하게 그 삶을 좌우한다. 맞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간과했다가는 큰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중추적인 요인을 짐짓, 또는 과감하게 물릴 줄 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 그렇게 물리는 것이 이후에 다른 실익이나 더 큰 명분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특히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하여간 앞으로 꽤 오랫동안은 내 경제의 규모를 너무 과소평가해서 가난을 자처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라는 거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무엇보다 그 경제가 나의 이익이 아니라 나를 지탱하고, 또 나에게 그 온 생을 기댄 한 타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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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느낌이다. 사람이 바뀌었고, 일이 다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내 각오도 다르다. 무엇보다 판단의 신중을 기하고, 집행에 책임을 지며, 반드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돌아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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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4

  • 등록일
    2009/11/14 11:54
  • 수정일
    2009/11/14 11:54

이번 호 [씨네21]을 보다가 영화 [파주]에 관한 김연수의 글에 인용된 중식(이선균 분)의 말이 한참 머리 속을 떠돌아 다닌다. 중식은 왜 이런 일을 하냐, 는 은모의 말에 "처음엔 멋있어 보여서 했고,  다음엔 갚을 빚이 생겨서 했는데, 지금은 일이 자꾸 들어 오네"라고 대꾸한다. 참으로 심드렁한, 그래서 너무나 슬픈 대답이다. 여기에 대한 김연수의 해석이 또 참 서글프고 아프지만 절절하다. 중식의 저 말은 그러니까, '생애전환기'(40대)에 처한 스스로에게 답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난 저 중식의 말과 더불어 '생애전환기'라는 단어에 우뚝, 멈췄다. 생애전환기라... 맞는 말이다. 김연수도 그렇지만, 나도 생애전환기지 않은가?

 

학원 원장에게 대학 강의와 연구실 일로 일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다. 하긴 원장도 고등부 준비를 하면서 예전같지 않은데다, 내가 보기에 더 이상 내가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사표를 날리고 광주로 왔다. 생각했던 대로 그녀는 걱정이 앞서는 것 같다. "3시간 30분 전에 일 그만두고 광주로 달려 왔어요. 그런 얘긴 내일 해도 되지 않나요?" 난 내가 서운한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그녀도 성급했다는 것을 인정하리라.

 

하여간 이제 생애전환기고, 난 그나마 안정적이던 돈줄을 내던졌고, 이제 다시 '안정'을 되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결심도 남았다. 그건 일종의 내개 남은 삶 전반에 대한 성찰, 정도가 될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내 생이 30대 이후로 또 한 풀 꺽여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고, 또 그만큼 삶이 밀도 있게 전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밀도', 그래 밀도가 문제다. 그 밀도를 조절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고, 내가 얼마나 삶을 주도면밀하게 가져가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다. 몇 가지 떠오르는 것. 잠을 줄이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공부를 더 많이 하며, ... 시간을 지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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