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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8

  • 등록일
    2010/07/28 12:53
  • 수정일
    2010/07/28 12:53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분명 둘이라는 사실, 이 사실 앞에서 스스로를 다잡아 본다. 맑아져야 한다. 그 사람이 날 더 잘 볼 수 있도록. 깨끗해지고, 담백해져야 한다. 

 

이제 다른 날이, 다른 삶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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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3

  • 등록일
    2010/07/23 10:22
  • 수정일
    2010/07/23 10:22

비가 쏟아진다. 어제는 상견례를 했고, 내 삶의 한 고비를 넘었다. 행복하다. 좀 느긋해지기로 한다. 이제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더 많은 자존감을 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중심에 놓지 말고, 나 스스로를 하나의 동심원처럼 생각하는 것. 그 주위로 깨끗하고 명쾌한 선들이 생겨나게 하는 것. 그 선들을 타고 삶의 위도와 경도를 작성하는 것. 그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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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

  • 등록일
    2010/07/16 11:00
  • 수정일
    2010/07/16 11:00

주체의 '구성'이라는 과녁은 통상 정치철학의 주제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축이 어떤 집단성(collectivity)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데카르트에 대한 스콜라적 번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면에서는 마리옹(Marion)의 기여가 참조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학적 방식의 주체 구성은 필연적으로 대타자인 '신'의 위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인식론적으로는 주체가 우위를 점할지라도(ratio cognoscendi) 존재론적으로 신의 우위(ratio essendi)를 실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결국 이러한 주체-타자 관계의 비대칭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리꾀르가 마리옹과 더불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정치철학적으로 조우와 교전(encounter)인 것이 이들에게는 타자에 대한 ‘응답’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신학적 방식의 기여가 주체의 정치철학적 구성이 겨냥하는 바를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일반적으로 주체의 정치철학적 구성을 프로이트와 맑스를 통해 거듭하는 방식 외에 신학적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여기에는 물론 프로이트와 맑스도 필요하겠지만, 라캉과 언어철학의 기여를 참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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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9

  • 등록일
    2010/07/09 21:21
  • 수정일
    2010/07/09 21:21

바쁘고, 정신 없다. 그럴수록 난 조심한다. 스트레스에 약한 성향 때문이다. 마음이 느긋하게 돌아가지 못하면 어김없이 과부하가 오는 이 성벽이라니. 기형도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의 감성을 작은 충격에도 바르르 떠는 셀룰로이드에 비유했었다. 그 구절이 자꾸만 맴도는 것도 어쩌면 참, 문제다.

 

어쨌든 이 성향을 쉽게 고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조심히 다룬다. 나 자신을 말이다. 양생술? 글쎄 그런 건 아직 없다. 마음을 시시각각 느끼는 것 밖에 다른 수가 없다.

 

지금은 [Green day]의 새로나온 베스트 앨범을 듣고 있다. 볼륨을 20까지 올렸다.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듣는다.

 

삶이 안녕하기만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다만 조금씩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새로운 가족이 나와 그녀를 통해 생겨날 것이다. 행복한 가족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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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6

  • 등록일
    2010/07/06 21:52
  • 수정일
    2010/07/06 21:52

많은 일들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 가족과 가족 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때로는 이 '이성'이라는 것이 속절없다. 근본적으로 이성은 '자기중심적'이다. 거기서 벗어나는 어떤 일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삶은, 또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이래서 난 영원히 그저 먹물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먹물을 이상한 이물감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말이다.

 

작은 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했다. 과연 철학이 또는 학문이 이 모든 일상의 '조우'와 우연성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

 

분명한 것은 '환원'이라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삶의 모든 것이 철학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그것은, 철학은 삶의 예외이며, 삶은 철학에 있어서 '경악'이다.

 

칸트가 '경이'를 말했을 때 그것은 예술에 한한 것이었으나, 삶 자체에 이르러서 그것은 경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방면에서 들뢰즈는 옳다. 그것은 경이를 넘어선 폭력이며, 그것을 통해서 사유는 단련된다. 이때 사유의 주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이 주체를 확증할 것인가? 아닐 것이다.

 

많은 일들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 가족과 가족 간에 일어난다. 이것은 '초월적'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재적'이다. 이 이율배반은 칸트의 것보다 깊고, 들뢰즈의 것보다 심오하다. 다만... 너는 '해석'할 수 있을 뿐인가? 응답을 기다릴 뿐인가?(Ricoeur)...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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