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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과 검찰의 대립을 보는 노동자민중의 시선

 최근 법원이 PD수첩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자 강기갑 의원 사건, 전교조 시국선언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것까지를 포함해 검찰 당국, 한나라당, 보수언론 그리고 우익 세력이 일제히 담당 재판부는 물론 사법부 전체를 향해 거의 막무가내로 원색적인 비난과 협박을 질러대고 있다. 반대로 민주당과 진보진영에서는 무죄 판결은 검찰의 무리한 기소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이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하는 것으로 이는 민주주의 근간인 삼권분립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광경을 보면서 몇 가지 근본적인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사법부의 역할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이며, 둘째는 자유민주주의 또는 삼권분립 그 자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고, 셋째는 노동자 민중은 어떤 전망과 대안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법부는 행정부의 부속 기관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즉 삼권분립의 한 주체가 아닌 권력의 시녀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나름의 역할과 그 중요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탄핵, 행정수도 이전, 미디어법 등에 대한 헌법재판소 판결을 들 수 있다. 이들 사건에 대한 사법 기관의 판단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이른바 국가 중대사의 일부가 사법 기관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또한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최근 일부 법원의 잇다른 무죄 판결은 일부 검찰권 행사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사법부가 마치 민주주의의 보루인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법원은 여전히 가장 보수적인 기관이며 지배계급의 이해를 지키는 권력 기관이다. 수많은 반노동자적, 반민주적 판결이 아직도 절대적으로 압도하고 있다. 일부 법원과 법관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이른바 386세대의 활약 정도로 이를 바꾼다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자 유민주주의는 삼권분립에 의해 보장되지 않으며 그것에 의해 운영되지도 않는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종속된 체제이며, 삼권분립은 그를 위한 형식적, 제도적 장치에 불과하다. 이번 경우에도 보듯이 한나라당은 사법부를 마치 일개 행정 기관 대하듯이 하고 있다. 지배계급 스스로 삼권분립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폭로해 주고 있다. 지배계급은 민주주의를 흔히 법치주의라고도 한다. 걸핏하면 ‘법과 원칙에 따라’를 앞세워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법이 자신들에게 거추장스러울 때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안면을 바꾼다.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하는 힘의 원천은 국가의 직접적 폭력 장치이다. 검찰, 경찰, 군대, 감옥 등이 아니고는 자유민주주의는 하루도 지탱하기 어렵다. 헌법을 비롯한 법률도, 선거를 통한 의회의 구성도,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도 실은 그러한 억압적 국가 기구에 의해 힘을 부여받지 않고는 그 정당성을 지속하기 어렵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본 모습이다.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현실의 민주주의는 누구를 자신의 지배계급으로 선출한 것인가, 또는 어떤 방식을 통해 자신의 생존권과 정치적 권리를 빼앗길 것인가를 결정할 것을 강제, 강요받는 제도에 불과하다. 물론 노동자계급도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며, 그것도 가장 앞장서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인민 자신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느냐에 있다.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직접적 투쟁으로만 이를 현실화 할 수 있다.  

고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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