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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1
    사회주의는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지양할까
    PP

사회주의는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지양할까

지난 3월6일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 사회주의노동자연합 등 사회주의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분들의 고민과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 전교조 서울지부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토론이 진행되면서 애초 가졌던 그런 기대는 알 수 없는 갑갑함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것은 자신만의 어떤 경계를 설치하고 그것을 옹호하고자 하는 완고한 경향이 지배하는 토론 분위기 때문이었다. 
정당건설의 과정에서 제반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조직된 토론회인 만큼 그것은 특정한 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고 설득, 관철시키기 위한 것을 넘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문제의식을 경청하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하는 자리가 되어야한다. 하지만 토론회 분위기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토론의 공간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생각을 전달하는 선거유세의 공간이었다고나 할까. 이런 토론회라면 공개적으로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거기에는 그 적실성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나름의 어떤 정답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정답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의지의 과잉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의지의 과잉에 의해 자신들의 이론, 실천이 지니고 있는 여백과 한계,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 어떤 유보와 주저, 그리고 그것을 채울 내용과 방법에 관한 진지한 논의 등은 온전히 숨 쉴 수 없었다. 정당을 포함하여 그 무엇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데 정작 ‘정치의 빈곤’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단지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환경·생태문제, 젠더의 문제, 평화의 문제 등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즉 그것이 자신의 문제라고 여긴다면 어떤 이론적, 실천적인 변화가 필요한가를 물었지만, 그에 대해 답은 쓰레기분리수거 문제에 대한 단상,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에 지배되고 있는 기존 주류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유지할 때만이, 그러한 문제들 또한 올바로 해결될 수 있다는 통상적 언술의 형태로 되돌아 왔다. 그것도 유보 없이, 단호하게 말이다. 주로 사노련 활동가들에 의한 답변이었지만, ‘어떤 정답’을 듣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또 ‘정답’을 바라고 질문한 것이 아니었기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론, 실천의 수준에서 현장 활동가들이 직면한 짙은 고민의 흔적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 아쉬웠다. 
밀린 원고 때문에 먼저 토론장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에 이런 자문자답을 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어떻게 대상화하며 자신을 지양할 수 있을까. 자신을 이룬 다음에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이미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환경 및 생태, 젠더, 평화 문제 등을 자기화한 ‘사회주의자들’이 가져야 할 기본 발상, 태도의 준거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광일 | 성공회대 연구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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