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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팻걸 - 까뜨린느 브레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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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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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걸 - 까뜨린느 브레야


 

지난 여성영화제에서 "지옥의 해부"를 보려다 줄거리를 읽어보고 "아~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없겠군(-_-;)"이라고 생각하고 브레야 감독의 영화는 못 보았었다.  이번에 팻걸이 개봉을 했길래 지나가다 이래저래 보기는 했는데 보고 난 후 굉장히 불편했다. 특히 마지막 5분은 너무 당혹스러웠다.

 

원제가 "내 자매에게"이고 한국개봉시 제목이 "팻걸"인 것처럼 감독은 팻걸 "아나이스"의 입을 통해 "내 자매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 듯 한데, 나는 그저 줄거리만 쫓아갔을 뿐 주인공들의 감정의 상태에 전혀 동화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극장을 빠져나왔던 것 같다. 역시 나는 남성이기에, 그리고 삶의 경험이 일천하기에 절감할 수 밖에 없는 한계인 것 같다.

 

"여성"에 대해서 내 나름의 기준으로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 영화였다.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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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포인트

 

오랫만에 극장가서 본 영화였다. 지난 주에 너무나 더운 날씨에 짜증이 나서 친구에게 푸념을 좀 했더니 친구가 "더위를 잊는 데에는 공포영화가 짱이지"라며 알포인트를 보러 가자 그랬던 거다. 근데 막상 오늘 날씨는 왜 이리 선선한지 공포영화를 봐야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예매를 했고 약속도 잡았는지라 그냥 봤다.-_-a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들었던 느낌은 한국의 오락용 공포영화치고는 잘 만들었다는거다. 공수창 감독의 전작이 미썸씽이어서 재미없을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번 건 그럭저럭 괜찮았다. 99년 여름에 한국에서 시도된 최초의 하드고어 스릴러라는 포스터만 보고 텔미썸씽을 봤었는데 그땐 실망을 이만저만 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토리라인은 일본스릴러를 어설프게 따라한 티가 팍팍나고 감독의 연출력이 문제인지 영화는 긴장감없이 한없이 늘어지고, 게다가 심은하는 역시 분위기잡는 역할은 안 어울렸다. 심은하가 분위기를 잡으려면 입을 열면 안된다는 선례를 남긴영화였다.(심은하가 출연한 최고의 영화를 꼽으라면 난 주저없이 미술관옆동물원과 8월의크리스마스를 꼽겠다. 다른 건 정말 아니다.)

암튼, 이번 영화는 배경이나 소품 등등 공을 들인 티가 많이 나서 볼만했고 일본공포영화에서 따온 거겠지만 귀신의 시선으로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시점샷도 좋았다.(소름이 돋더만=_=;;) 무리없는 오락영화를 만들려는 감독의 의도를 알겠기에 전쟁의 광기보다 초자연적인 힘에 영화의 무게가 실렸던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괜찮냐고 친구가 물어보면 그럭저럭 재밌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최태인 중위역을 맡았던 감우성의 연기도 꽤 괜찮았다. 오늘 영화가 시작하기 전 거미숲 예고편이 나왔는데 꼭 극장가서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적이고 지적이면서 뭔가 상처를 품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의 역에는 역시 감우성이 잘 어울린다.

근데 점점 우리나라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들이 일본귀신을 닮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동북아 3국의 귀신을 비교해보면 중국귀신은 왠지 공포스러운 것보다는 코믹할 것 같고(강시?), 일본귀신이 제일 무서운 것 같다. 우리나라는 그 중간쯤??? 우리나라의 귀신은 자신에게 직접적인 해코지를 한 인간에게 복수를 하거나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며 보통사람들에게 나타나 애원을 하는 수준이다. 애원하러 온 귀신을 보고 놀라서 사람이 죽는 걸 귀신보고 책임지랄 순 없다. 근데 일본의 귀신들은 어쩜 불특정다수를 타겟으로 삼고 사람들을 죽여대는지.. 이건 완전 도살 or 살육수준이다. 그리고 생긴 것하며... 난 작년여름에 링하고 주온을 본 다음날 아침에 머리감을 때 눈을 못 감았었다. 무서워서...-_-;;;

더운 날씨에는 역시 공포영화가 짱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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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헌터

 

 

이 영화의 배경은 펜실베니아의 제철공장지대다. 2차대전 이후 “세계의 공장”을 자처했던 미국 위상의 급격한 하락을 상징하듯 영화의 배경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퇴락해 보인다. 게다가 이 마을의 주민들은 러시아를 그 출신지로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마을 중앙에는 커다란 러시아 정교 교회당이 들어서 있고, 마을공동체라 불리울만한 유대관계를 맺고서 살아간다. 육체노동을 하며 미국사회의 하층민으로 살아왔던 이민 1세대처럼 이 영화의 주인공인 이민2세대들도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들에게는 언어적, 문화적 충돌과 어려움이 덜하다는 정도일 것이다. 사회적 신분의 상승(이른바 입신양명)과 러시아적 정체성의 유지(그들은 그들의 자식들이 러시아 출신과 결혼하는 것을 바란다)를 희구하는 그들의 부모들에게 엿을 먹이려는 듯 그들의 삶은 공장과 선술집, 그리고 가끔씩의 사슴사냥 속에서 부유한다. 그들은 애초부터 앵글로 색슨이 지배하는 미국사회에서 신분의 상승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그들 자신이 미국의 쓰레기라는 한계를 철저히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미국이라는 국민국가의 일원으로서 ‘자랑스러운’ 징병의 대열에 합류한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약간의 두려움과 머뭇거림의 흔적을 엿볼 수 있지만, ‘전쟁도 사슴사냥과 같은 하나의 게임일 뿐’이라는 말로 위안을 삼으며 그들은 전장으로 향한다. 그들이 거기서 본 것은 전쟁의 광기와 어떠한 도덕적 주저함이 없는 살육의 현장이었다. 게임이 지속된다면 게임의 참가자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는 러시안 룰렛처럼, 베트남전속에서 참전자들의 생명은 하나둘씩 스러져 가고 미쳐간다.

 

그 와중에 참전했던 세친구 중, 닉은 탈영을 해서 자취를 감추고, 스티븐은 반신불수가 되고, 마이클만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나중에 닉이 패망직전의 베트남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한 마이클은 다시 베트남으로 들어가 닉을 구하려고 하지만, 닉은 러시안 룰렛판에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만다.

 

감독 마이클 치미노는 이 영화를 통해 미국사회의 주변인들이 베트남전이라는 광기어린 전쟁을 통해 파괴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 이후 최초의 진지한 영화적 시도였던 이 작품은 미국의 주류계급이 원하는 도식적인 결말로 허무하게 끝난다. 베트남으로부터 도착한 닉의 시신을 묻고 난 후, 옛친구들은 식사를 하며 미국찬가를 조용하게 부르는 것이다. 영화 곳곳에서 베트남인을 비하하는 영화적 장치가 눈에 거슬리기는 하였지만, 생명주의와 反戰이념을 기초로 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수시간동안 영화를 봤던 내게 있어, 이건 완전한 反轉이었다. 별로 권할만한 작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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亂-구로사와 아키라

ㅇ 줄거리 :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 시대극으로 옮긴 작품. 한 늙은 영주가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눠주기로 결심한다.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은 그 얘기를 듣고 매우 기뻐하지만 막내는 그의 형들이 서로 싸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70대의 구로사와가 만든 <란>은 그 스스로 자신의 남아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고 말한 그런 영화이다. 여기서 구로사와는 우선 스크린 위에 장대한 비주얼을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들였고 그 결과 표현주의적 작품에 가깝다고 할 만큼 시각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다른 한편으로 <란>은 하늘에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 조건을 내려다보려는 야심찬 시도를 행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출처:서울아트시네마 홈피)

 

ㅇ 평 : 나에게 '세익스피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애틋한 감정을 지우기는 어려운데, 그 이유는 무엇이든 읽으며 공부하는 걸 좋아한 어머니였지만 당시 어려운 집안 때문에 고등학교만으로 배움의 기회를 접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야 형제분들 모두가 그러셨으니 그러려니 말씀하시지만 말이다.

 

내가 어릴 적, 책 외판원 아저씨들이 우리 동네에 참 많이도 드나들었다. 물론 우리집 앞에서도 지나치지 않고 초인종을 눌렀는데, 그 책값이 무척 비쌌다. 당신이 책을 많이 보지 못하고 자랐다는 후회 때문이었는지 어머니는 자식들이 책을, 아니 무엇이든 읽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 외판원 아저씨가 내미는 카탈로그를 바라보면서 참 많이도 망설이셨을 것이다. 당신의 어린시절을 뒤돌아보면,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는 사줘야겠는데, 책값이 너무 비싸니... 당시 어렸던 나조차 어머니의 얼굴에 가득찬 망설임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쉬웠다. 그러던 중, 거듭 우리집 공략에 실패하던 한 외판원 아저씨가 머리를 쓴 것이 무조건 책을 가지고 우리집에 찾아오는 거였다. 자기가 책을 팔러 왔는데, 도저히 책들이 무거워 다시 가져가기가 어려우니까 일주일 후 자기가 여기에 다시 올 때까지 맡아달라고 했다. 그때 두고 간 것이 삼성출판사에서 펴낸 세계문학전집 50권짜리였는데, 지금 생각하기에도 그 빼빼 마른 아저씨가 그걸 혼자서 어떻게 날랐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참 고생했을 것 같은데... 암튼 일주일동안 어린 우리들은 밤새도록 책을 몇권씩 읽어댔고,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모종의 결단을 내려 일주일후 아저씨에게 책 구입의사를 밝히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어린 우리들만 그 책을 읽었던 게 아니었다. 당시 어머니도 몇권씩 빼서 같이 책을 읽곤 했는데, 지금 여렴풋이 기억나는 어머니의 모습은 '세익스피어 이야기'를 읽는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세익스피어'라는 단어를 들으면 책을 읽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거 이야기가 샜다. 그것도 옆길로 많이도 샜다.

영화를 보기전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각색한 작품이란 말을 듣는 순간 김이 팍 샜다. 줄거리가 너무 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이 영화는 세익스피어가 쓴 리어왕의 플롯을 충실히 따랐다. 결말까지 내 예상과 정확히 드러맞았다. 세 딸들이라는 소재가 세 아들들로 바뀌고, 중간중간에 일본적인 소재를 차용한 정도만 다르다고 할까? 그렇지만, 3시간여의 영화를 보면서 왜 세익스피어라는 작가가 널리 추앙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릴 적에 세익스피어를 읽었지만, 세익스피어는 6살도 안 된, 그것도 남자아이가 완전히 이해할만한 작가는 아니었다(요즘 나는 여자아이가 조숙하다는 말을 처절하게 인식하며 살고있다). 이 영화을 통해 다시 보게 된 세익스피어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세계의 비정함과 잔인함, 무모한 사랑, 그리고 탐욕과 배신, 인생의 허망함이 총체적으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극 중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의상과 건축물, 당대의 전쟁씬도 굉장한 볼거리다. 현재의 일본의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 의복문화가 화석화된 것이라고 하는데, 중심부에서 변경지역으로 갈수록 종교나 문화가 도그마화 된다는 것의 실례라고는 하나 너무나 아름다웠다. 물론 입는 사람들은 고역이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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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업 - 니콜라 필리베르(2002)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의 산골분교를 찍은 니콜라 필리베르의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에는 천진난만한 여남은 아이들과 20여년동안 이 마을에서만 근무해 온 조르쥬 로페즈 선생이 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프랑스인들의 교육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시골마을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있어 교육이란 행복한 삶을 살아나가기 위한 그야말로 기본적인 덕목을 배우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으로부터 숫자를 세는 법, 글자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만, 그 외에도 함께 생활하는 법과 서로 이해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의 중반, 감독은 로페즈 선생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짧막한 인터뷰를 한다. 로페즈라는 姓이 말해주듯이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에서 넘어온 이민1세대였고, 이민1세대들의 삶이 으례 그렇듯이 선생의 아버지는 공사판을 떠돌다 가난한 소작인으로 이 지방에 정착했다. 왜 선생님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로페즈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어릴 적부터 동무들과 학교놀이를 하면 자신이 선생님역을 도맡아 했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고 말이다. 선생의 부모도 아들이 교사가 되는 것이 일종의 신분의 상승이라고 간주해서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단다.

로페즈는 말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이 필요한 일이지만, 나는 이 일을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그 말마따나 다큐멘터리 내내 로페즈선생과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지리하게도 길게 나온다. 내가 선생님과 일상적으로 저렇게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기억을 해보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내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로페즈 선생은 손을 씻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손을 씻어야 하는 이유를 납득시키려 하고, 서로 싸움을 한 아이들에게도 왜 싸웠는지 왜 싸움이 나쁜지,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지리하게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키우는데 따른 고민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길게 선생님과 나눈다. 이럴 때 보면 그들은 선생과 학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을 양육하며 비슷한 고민을 하고 살아가는 친구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꼬맹이들에게나 중학생이 되기 직전의 아이들에게나 급우들은 경쟁에서 이겨 짓밟아야하는 대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야 할 친구들로 거듭 인식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열한 경쟁, 명령과 불복종에 대한 폭력이 상시화된 공간이 학교라고 생각했던 내게 프랑스의 학교는 너무나도 생경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영화의 마지막, 로페즈선생의 마지막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이다.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입을 맞추고 작별인사를 한다. 아이들 하나하나와 진심어린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노선생은 마침내 눈물을 흘린다.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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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
 미디어

기관지노힘  제47호
김명준 (노동자의 힘 회원)

p54_1.jpg p54_1.jpg(67 KB)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


2003, 아일랜드, 74분, 킴 바틀리/돈챠 오브리에인
2003, Ireland, 74min, Kim Bartley and Donncha 'Briain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래, 바꿀 수는 있다. 다만 바꿔내기가 쉽지 않고, 지켜내기란 더욱 어려울 뿐이다. 미국의 텃밭 라틴 아메리카에서 베네수엘라 민중들은 바로 지금 그 힘겨운 변혁의 시기를 거치고 있다. 지난 제7회 서울 국제 노동영화제에서 소개된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 베네수엘라를 무대로 차베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혁명과 반혁명, 정치투쟁과 미디어, 군부와 계급투쟁의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하는 다큐멘터리다. (필자의 시각으로는) 작년 우리나라에 소개된 어떤 영화보다도 역동적이며 극적이다.
사실, 영화의 출발은 원래 소박한 것이었다. 아일랜드의 두 다큐멘터리 감독은 차베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에 대한 인물 다큐멘터리를 찍을 생각으로 베네수엘라로 향했다. 하지만 2002년 4월11일, 우연히도 터져 버린 쿠데타와 그에 대항한 민중의 봉기는 작품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꿔버렸으며, 쿠데타 직전의 7개월과 쿠데타 이후 48시간만에 이루어진 드라마틱한 복권과정은 혁명의 연대기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상업방송이 총격사건 현장의 상황을 철저하게 왜곡보도하며 기득권을 대변하는 장면, 쿠데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직후 대통령 관저에 모여있을 때 대통령궁 경호를 맡은 특수부대원들이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총부리를 돌리는 장면 등은 정말 충격적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세계 각국에서 이구동성으로 격찬을 받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영화제작자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 만들어낸 모범적인 작품이며, 각각의 시퀀스들은 강렬한 긴장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시네마 베리떼이다."(버라이어티, 2003년 7월) 그 결과,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작품은 TV에 나오지 않았던 혁명을 TV로 진출시키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지금까지 이 작품은 급진적 색채가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치고는 보기 드물게도 BBC, ZDF(독일), Arte(프랑스/독일), NPS(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의 주류 방송 채널에서 방영되었으며, 베네수엘라 현지에서는 올해 4월에 상영되었다.
하지만, 이 예기치 않은 성공은 바로 그 성공 때문에 격렬한 반발과 증오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차베스의 변혁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과 그 동조자들은 이 작품을 묻어버리기 위해 전세계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그 압력은 이메일의 발송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캐나다에서 있었던 앰네스티 영화제에서 이 작품은 상영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가 영화제 직전 갑작스럽게 최종 상영작 명단에서 탈락되었다. 반대파들은 이 상영 취소가 자신들의 비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환호했지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영 프로그램을 확정한 이후, 앰네스티 본부는 베네수엘라의 앰네스티 지부로부터 심각한 내용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것은, 만일 이 작품이 상영될 경우 베네수엘라 앰네스티 지부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격렬한 투쟁이 진행중인 - 그래서 차베스 정부의 평화적인 대응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있는 - 베네수엘라에서 이 협박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고, 결국 앰네스티는 오랜 고민 끝에 감독의 양해를 구하고 상영을 취소하기에 이른다.
정말, 혁명이 TV에 나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진행중인 혁명이라면 더욱 그렇다. 격렬한 사회적 격변기를 담아낸 작품은 그것이 담아내는 대상만큼이나 격렬한 투쟁의 한가운데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는 분명 전쟁터이다.
차베스 정부도,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민중도 바로 그런 현실인식에 기초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수개월 전 차베스 정부는 3백만 달러를 공동체 미디어에 대한 지원금으로 내놓았다. (사실, 쿠데타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베네주엘라의 독립 매체인 공동체 TV는 큰 역할을 했고, 당시 공동체 TV가 기록한 화면들은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유력한 대안적 매체인 인터넷을 활용한 비상업적 미디어의 활동도 서서히 힘을 얻어가고 있다.
과연 이러한 노력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보수파들의 쿠데타 시도와 일상적인 사보타지를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힘들다. 다만, 미디어가 얼마나 사회적 변혁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그러기에 미디어에 대한 총체적인 전략과 실질적인 투자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는 입증한다.
덧붙여 또 한가지 중요한 초점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의 미디어 운동이 어떻게 베네수엘라로부터 교훈을 얻고, 거꾸로 지난 20여 년의 우리 경험에 기초해서 어떤 비판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지, 그래서 그 과정에서 어떻게 국제적 연대를 발전시킬 것인지의 문제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한 나라에서 고립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적 변혁이 얼마나 쉽게 붕괴되고 심지어 역사에서 지워지기까지 하는지, 우리는 지난 20세기 내내 지겹도록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 추신: 한가지 아쉬운 점은 아직 이 작품이 국내에서 배급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면 1월31일 서울 광화문의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저녁 6시에 개최되는 서울국제노동영화제 첫 번째 월례 정기 상영회가, 한국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박스))

감독: 킴 바틀리 / 돈챠 오브리에인
킴 바틀리는 주로 아프리카와 남미의 위기 혹은 갈등 상황을 소재로 국제기구들을 위해 단편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여성 감독이다. 돈챠 오브리에인은 최근 1년여에 걸쳐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에 참여한 세 명의 청년들을 소재로 한 작품 <신학교>를 완성한 바 있다. 그는 최근 아일랜드 출신의 극지 탐험가 톰 크린을 소재로 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베네주엘라의 혁명과 반혁명
세계 4위의 석유수출국이며 미국의 주요 석유수입국 중 하나인 베네수엘라에서,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우고 차베스는 부정부패를 종식시키고 국민의 80%에 달하는 빈곤층에게 석유 이익을 재분배할 것을 약속했다. 그의 약속은 기득권층과 관료적 노조집단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고 그 결과 차베스는 대통령이 된 첫날부터 베네수엘라 내외로부터 강력한 적들을 직면하게 된다. 영화 속에 담겨진 쿠데타는 그러한 기득권층의 가장 노골적인 도발이었고, 차베스의 복귀는 민중의 반격의 결과였다. (보다 자세한 정치적 분석은 원영수의 글을 참조하기 바람: 노동자의 힘 2호, 6호,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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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놈일수록 잘 잔다

ㅇ 줄거리 :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구로사와의 비판이 가장 강력하게 표출된 영화 중 하나. 대기업 회장의 딸과 회장 비서의 성대한 결혼식장에 의문의 케이크가 배달된다. 그 케이크는 몇 년전 그 기업의 뇌물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해 강제적으로 투신자살했던 어느 간부의 아들, 바로 그 결혼식의 신랑이 복수의 서막을 알리기 위해 보낸 것. 절대 권력의 제도와 투쟁하는 한 개인의 고독한 면모를 그린 이 영화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은 영웅의 비극적 최후를 장엄하게 고하고 있다. (출처:서울아트시네마 홈피)

 

ㅇ 평 : 1960년에 제작되었음에도 무척 재미있는 영화이다. 45년 패전이후 일본의 경제적 풍요의 뒷모습인 정,재계의 유착구조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주제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일본의 문화적 전통에 맞게 재해석(내게 있어 근대화, 서구화에 대한 일본인의 편집증적 집착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항상 난감한 문제다)해 온 감독답게 극적 전개를 고려한 짜임새있는 구성이 돋보인다. 화면의 전환, 배우들의 극적인 대사와 연기로 인해 한편이 연극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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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소동 - 샹탈 에커만


 

한마디로 경쾌한 코메디물이다.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모~옵시 좋아진다. 현실감이라고는 없는 어리버리한 주인공인 샤를로트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감독의 말에서 샤를로트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했는데, 감독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샤를로트는 에로소설류를 의뢰받아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프리랜서 작가다. 글을 써서 살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한국이지만 벨기에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외로움을 느끼던 엄마가 샤를로트의 집으로 쳐들어온다. 수년간 따로 살아왔으니 라이프스타일도 완전히 다를 것이고, 급기야 자신에게 사랑과 애정을 가져달라며 계속 칭얼거리는 엄마 때문에 강박증에 시달리던 샤를로트... 마침내 집을 팔고 이사를 가기로 결심하고 집을 내놓는다. 집을 보기 위해 꾸역꾸역 모여드는 사람들. 이들과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에피소드들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앞서말했듯이 주인공인 샤를로트는 에로소설작가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의 경험조차 없고 그에 대해서 무지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샤를로트는 자신의 언어로 소설을 쓰지 못한 채, 옆집에서 들려오는 교성과 남들이 사랑에 대해서 하는 말들을, 그것도 단어로 분절적으로만 수첩에 끄적거릴 뿐이다.

 

그러나 집을 보러 오는, 아이를 낳기 직전의 젊은 부부, 장년의 권태를 느끼는 부부 등과 교감을 하게 되면서 변화를 겪게 되고, 샤를로트는 여타 여성들의 삶의 문제들에 공감을 하게 된다. 즉, 먹고 살기 위해 엉터리 포르노소설을 쓰는데(남성들의 관음증적이고도 억압적인 성관념)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런 간단한 주제와 더불어 이 영화에는 자신만의 자아를 위한 공간을 갖기 원하는 여성의 심리, 딸과 엄마 사이에서 벌어지는 애증의 관계, 노년들의 애정에 대한 욕망, 상상력과 공통경험을 통한 공감이라는 많은 꺼리들이 코믹적 요소들과 잘 버무려져 있어 2시간의 러닝타임이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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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 마스무라 야스조(1967)

 

이번 6회 여성영화제 상영작이다.

 

6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라고 믿겨지지 않을만큼 현재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된 유머러스한 부분도 현재의 관객들에게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재미있는 영화다.

 

영화의 무대는 18세기 말의 일본으로 화타와 같은 명의를 꿈꾸는 의사 하나오카 세이슈와 그의 아내 카에, 시어머니 오츠기가 영화를 끌어가는 주인공이다. 카에는 어린 시절부터 사모했던 하나오카 가문의 오츠기를 사모하여 그의 며느리로 들어간다. 시어머니 오츠기는 인자하고 현숙한 부인이지만(그리고 카에도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츠기의 아들과 가부장제적 질서에 대한 집착은 카에에게 당황스럽게 비춰졌다.

 

세이슈가 에도에서 화란의 의술을 배우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보이듯이 극중의 여성들은 세이슈의 세속적 성공을 위한 도구다. 어머니 오츠기, 아내 카에,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두 여동생들 모두 세이슈를 위해 가사노동과 세이슈의 에도유학비 마련을 위해 매진한다. 특히 오츠기와 카에는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고 파괴하는 정도를 자신의 세이슈에 대한 사랑의 강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로 삼으면서, 서로에 대해 우위를 점하려고 경쟁한다. 이들의 경쟁은 세이슈가 만든 마취약의 최종실험을 위해 자원을 하는데서 정점에 달한다.

 

외과수술을 위해서는 전신마취를 해야하는데 당시에는 환자들이 수술을 고통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취약이 존재하지 않았고, 전신마취만 가능하다면 나름의 멸균법을 통해 외과수술을 해서 많은 생명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네덜란드의 의술을 접했던 세이슈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서로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아달라고 애원하자 세이슈는 오츠기와 카에 모두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여 마침내 전신마취제 개발에 성공하고 세계최초의 마취수술에 성공한다. 그러나 실험과정에서 마취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카에는 실명을 하게 되고, 아들과 며느리에 의해 자신이 속은 것을 안 오츠기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한편, 세이슈는 당대의 명 외과의로 승승장구하여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되고, 결과적으로 마취약 개발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카에는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감독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세이슈의 누이동생이 종양으로 죽는 장면인데, 자발적으로 자신을 파괴해가며 가부장제적 질서에 경쟁적으로 순응하는 여성들의 어리석음을 여성(세이슈의 누이동생)의 입을 빌려 통렬하게 비판한다.

 

아멜리 노통은 그의 소설 [사랑의 파괴]에서 사랑을 자발적인 자기파괴과정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떤 인격적 실체에 대한 비합리적(?) 끌림으로 인해 가학과 피학의 행위가 발생하게 된다고 말이다. 물론 노통의 소설에서는 나와 엘레나라는 두 여성이 등장하고, 그러한 자기파괴과정의 수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처리되고 있지만, 이 영화의 감독 마스무라 야스조는 가부장제와 그 안에서 경쟁적으로 발생하는 자기파괴과정의 수혜자가 결국 남성임을 분명하게 지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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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제6회 여성영화제 상영작이다.

마그레테 폰 트로타 감독 특별전 형식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 중 한 작품이었는데,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책으로만 읽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생을 영상으로 본다는 기대감을 안고 본 작품이었는데, 장면 장면마다 왜 이리 가슴이 불편한지 ...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단병호씨를 인터뷰하다가 그의 나이보다 팍싹 늙어보이는 외모에 불편함을 느꼈다고 썼는데, 오늘 본 로자 룩셈부르크가 내게 그랬다.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생각도 많이 변화하기도 했고, 나름대로 나 자신을 합리적인 사민주의자로 규정하곤 했는데, 대학 때 읽었던 맑스를 생각해 보면 왜 이리 창피하고도 답답하냔 말이다.

 

암튼, 영화에는 당시 맑시즘의 교황이라고 일컬어지던 카우츠키와, 베벨, 베른슈타인, 클라라 제트킨을 볼 수 있고, 리프크네흐트의 공원연설장면도 등장한다. 당시의 사진과 비슷한 외모의 배우들을 기용하고, 당시 연설장면을 재연한 것만 봐도 감독이 당시상황의 고증에 상당히 집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변 : 내 기억으로 1968년은 우리 모두가 정치적으로 긴장했을 때였다. 나는 그 때 로자 룩셈부르크의 책인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와 개혁 또는 혁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 글 뒤에 숨어있는 여성을 생각하며 언젠가 그녀의 일생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오 요기헤스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며, 로자의 옥중 서신을 통해 그녀가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지만 여성으로서의 감성 또한 잃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2,500통의 서한을 썼고, 이 편지들은 영화를 만드는데 최고의 자료가 되었다. 서한들은 그녀가 얼마나 감성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했으며 따뜻한 여인인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역동적이고 전투심이 넘쳤는지도 보여준다.
로자는 정말 완벽할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인간보다 자연에게 더욱 가까운 ‘유대감’을 느꼈다. 그녀는 문학과 음악, 미술과 식물학(사실 식물학에 대해선 전문가였다), 지질학에 대해 관심이 높아 촘촘하고 깔끔한 글씨로 공책 가득 메모를 하곤했다. 그녀는 언제나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무슨 일을 하든 열정을 가지고 행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 특유의 발랄함과 인내심으로 친구들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관해 모은 자료들이 너무 많아서 두 편의 영화를 더 찍어도 될 정도였다. 그녀는 평생을 바쳐 연구해도 아깝지 않을 여성이었다. 몇몇 역사가들은 내 영화가 매우 부족하다고 말한다. 나는 역사물을 만들거나 로자의 완벽한 초상을 그리는게 목표가 아니었다. 나의 영화로 인해 로자 룩셈부르크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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