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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2/05
    Eden - 아모스 지타이(2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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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4/11/21
    Made In China - 데이비드 레드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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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4/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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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4/09/12
    파리대왕 - 해리 훅 감독(19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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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4/09/09
    굿바이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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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4/09/07
    EBS 다큐페스티발 "오세이선생의 교육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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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4/08/29
    애정만세 - 차이밍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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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en - 아모스 지타이(2001)

오늘밤 EBS 세계의 명화에서 보았다.

 

영화의 배경은 1940년대의 팔레스타인. 2차대전이 한창이던 때 다양한 인물군상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온다. 주인공 사만다와 그녀의 남편 도브(건축가)는 시오니즘과 맑시즘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약속의 땅(Eden)'에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희망을 품고 미국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온다. 그리고 그의 오빠는 돈만 아는 속물로 팔레스타인에서의 대박을 꿈꾸며 미국과 팔레스타인을 오간다. 또한 서점주인 칼코프스키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홀홀단신으로 이곳에 온 불법이민자로 팔레스타인인과 유태인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날을 꿈꾸는 그야말로 이상주의자이다.

 

그들은 저마다의 꿈을 안고 팔레스타인에 들어오지만 현실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지리한 전쟁은 계속되며, 칼코프스키가 보내는 편지와 서류는 다시 반송되어 서점 한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영국은 불법이민자들을 체포하여 추방하는가 하면, 제국주의국가들의 지배에 맞서 폭탄테러가 종종 발생하곤 한다.

 

그러던 어느날 도시건설에 몰두하며 사만다에 관심조차 주지 않던 남편은 독일에서 벌어지는 유태인학살소식과 불법이주유태인에 대한 입대명령으로 영국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남편의 부재중에 사만다는 칼코프스키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발견하고 관계를 갖는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남편은 많은 것이 변해있다. 자신이 강간한 여성에 대해 키득거리면서 말하고 "파시스트니까"라며 자신을 합리화하기까지 한다.

 

이에 혐오감을 느낀 사만다는 남편을 떠나 칼코프스키에게 가지만 현실(독일의 가족들의 죽음, 격해지는 팔레스타인과 유태인의 대립 등)에 절망한 칼코프스키는 그의 서점에서 자살해 버리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장면에서 40년대의 거리를 걸어오던 무표정한 사만다가 코너를 돌자 현재의 텔아비브 거리가 나타난다. 저마다의 이상향을 찾아왔던 사람들 중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은 돈만 아는 속물인 오빠와, 파시스트가 되어버린 그녀의 남편 도브, 그리고 이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을 무표정하게 지나쳐가는 사만다가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출신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데 이 감독은 이런 영화 만들고 이스라엘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비록 영화의 시선이 담담하게 처리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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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In China - 데이비드 레드몬

* 이 글은 트랙팩03-노동영화제에 관련된 글입니다.

 

오늘 오후에 가서 본 3개의 영화중 가장 흥미롭게 본 영화였다. 미국 뉴올리언스의 마디그라 축제에 사용되는 저가 구슬목걸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추적함으로써 세계적 규모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본질을 폭로한 다큐였다.

 

문제의 구슬목걸이의 생산지는 중국 푸저우. 시간당 10센트의 임금을 받는 중국의 10대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통해 만들어지는 목걸이는, 1세계 사람들의 일회용 즐김(?)을 위해 사용되고 하룻밤만에 쓰레기가되어 길거리에 나뒹군다. 구슬을 사는 미국인들은 그 구슬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미국으로 흘러들어오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설사 알게 된다고 한들 "그건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는 체념내지는 "어떻게 그런 일이..."라는 즉흥적 분노로 그칠 뿐이다.

 

언젠가 미국 월마트에 의류를 납품한다는 한국업체의 수출신용장을 본 적이 있다. 원자재는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이동한 뒤 현지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가공되어 완제품이 바로 미국으로 수출된다. 그런데 웃긴 것은 신용장의 기타조항에 "제품의 생산에 아동노동이 이용되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첨부할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다. 그 증명서를 누가 발급하는줄 아는가? 바로 그 한국업체의 사장이 발급하게 되어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한다라는 건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것 같다. 내게는 신용장의 그 증명서조항이 가진 자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으로 다가왔다.

 

비록 짧긴 하지만, 직장생활이라는 걸 하다보니 학생시절 책으로만 읽었던 내용이 현실에서 버젓이 행해지는 걸 목격할 때가 많다. 특히 금융업종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일하다 보니, 현재의 많은 법적, 경제적 제도들이 착취를 합법적으로 제도화시키고 은폐시키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왜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생계를 걱정하면서 뼈빠지게 일을 해야만 하는가? 왜 나는 점심시간에 주방일을 하기 위해 식당 전단지를 들고 식당의 위치를 묻는 삶에 찌들고 환갑이 넘은 아주머니들을 종로바닥에서 만나게 되는가? 이 세상은 서민들로 하여금 돈을 빌려쓸 수 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를 유지시키면서 "돈을 빌렸으면 이자와 원금을 내야한다"는 원칙만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은 강제력이 있는 법이다. 오늘 영화에서도 목걸이제조업체 사장은 "우리는 법을 잘 준수하고 있다"고 반복해서 외쳐댔다. 그는 법을 지켰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착취를 당하는걸까? 

 

이 세상의 누군가가 자신의 노동이 아닌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며 살아간다는 건 죄악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죄악으로 생각지 못하게끔 생산과 소비과정을 철저히 파편화, 분절화시켜버렸다. 그러는 사이 자본의 세계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많은 부분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시작부분 마디그라축제용 목걸이가 지구를 묶고 있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지금, 영화 속의 미국인들을 통해 내 자신을 돌아본다. 나도 이미 많은부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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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싸이클 다이어리 - 월터 살레스(2004)

 

노동자대회 가기 전에 광화문에서 봤다. 조조인데도 사람들이 꽤 되더라. 역시 '게바라'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잘 먹히는 상업적인 아이콘(?)'이다. (몇년전 체게바라평전을 읽은 어떤 친구놈은 내게 게바라처럼 꿈과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잘 나가는 자본가가 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_-;;) 씁쓸하긴 하지만 뭐 어쩌랴?

 

영화를 보면서 좋았던 건 게바라의 일대기를 영화로 본다는 기대감, 주연배우들의 연기력, 화면 가득히 담긴 남미의 아름다운 풍광들이었다. 게바라역을 맡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확실히 연기력 하나는 출중한 배우다.

 

영화의 시작과 말미에 이 영화가 위대한 혁명가의 일대기가 아니라 단지 길을 함께 걸었던 두 인간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이 영화는 평범한 인간 게바라가 여행을 통해 남미의 현실에 눈떠가고 변화해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어떤 장면에서는 눈물이 조금 나기도 했는데, 게바라가 변화해가는 과정이 너무 도식적으로 처리된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 든 전체적인 느낌은 그저 그렇다는 거다. 나 역시 놀랍다. 게바라의 영화를 보고 어찌 기분이 이렇게 맹숭맹숭할 수가 있단 말인가! 역시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체게바라 평전을 읽어본 후 언젠가 다시 한번 영화를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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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셋 - 리처드 링클레이터(2004)

* 이 글은 시와님의 [다시 만난 셀린느와 제시]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하다가 이번 주말에 가서 봤다. 9년전에 보았던 "비포 선라이즈"는 대강의 줄거리만 기억이 나는데 어떤 분위기였는지는 다 까먹었다. 그렇다고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분명 아니고...

 

연인들의 9년후의 만남이라는 소재는 적잖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자그만치 9년전 헤어졌던 사람이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고 또 나와 보냈던 시간을 글로 썼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나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특별하게 기억되고 있다는 생각은 항상 기분좋은 일일 것이다.

 

영화 속의 쥴리 델피는 그 나이에도 참 아름답다. 오히려 9년전의 모습보다 훠~얼씬 매력적이었다. 약간 마른듯한 얼굴에 눈가의 주름이 특히나...  에단 호크도 전보다 훨 낫다. 9년전 내게 거부감이 들게하던 느끼한 후까시도 많이 죽은 듯하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시간의 무게답게 저마다 생활속에서 느끼는 여러 고민들에 대한 대화도 간간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겐 비포 선라이즈에서의 "사랑의 찬란함"보다 비포 선셋에서의 "사랑과 일상"이 더 마음에 들었다.

 

가정있는 유부남인 제시는 만남 초반부터 셀린느에게 다가가려 애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는 달리 셀린느는 나름대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는 인상이었다. 서로에 대한 호감은 있으되 그것을 섣불리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30대초반의 미혼여성과 "내 결혼생활은 불행해"라고 말하며 옛사랑에게 "사랑해 줘, 사랑해 줘"라고 징징대는 30대초반의 남성이라... rivermi님 말대로 이것이 나이를 먹어 좀더 유들유들해진 남성의 모습인가? 흠흠

 

영화의 중반이후 셀린느의 감정상태의 변화 등등을 감안하면 제시가 비행기를 안 탔을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난 제시가 비행기를 탔으면 싶다. 아마도 난 일상이 된 사랑을 두려워하는 갑다. 사랑이란 천상의 것인게야... -_-a

 

사족1)영화속에서 셀린느의 직업은 환경관련단체의 상근자인 것 같다. 그럼에도 그녀의 삶은 그리 궁핍해보이지 않는다. 프랑스 파리라는 공간, 여름같아 보이는 화창한 날씨, 그리고 내가 서유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 빈곤하고 고단한 삶까지도 여유있고 풍요로운 삶처럼 보이게 만들었을까? 만약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다면 여주인공의 직업을 그렇게 선택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내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번쯤 유럽에 가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돈 모아서 한 20년 뒤에. 크크크

 

사족2)자동차 안에서 이루어지던 셀린느가 제시에게 말하며 울먹이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가 아닐까? "빌어먹을 남자들이 다 나랑 헤어진 다음에 결혼한다며 찾아와서는 고맙다고 해. 내게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줘서 너무 고맙다고 말이야." 그거 보고 너무 웃겨서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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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그램

* 이 글은 sopoi님의 [21 grams 감상]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금요일 <21그램>을 봤다. 사무실에서의 일상에서 벗어나 수요일부터 안국동에서 3일간 연수를 받았는데 그 마지막날 수업이 오후 3시에 끝났기 때문에 뭘 할까 하다가 영화를 보러갔다. 저녁에는 스머프님의 오프모임이 안국동에서 있었기 때문에 지척에 있는 허리우드 극장으로 갔다. 

 

상영중인 영화중에 <21그램>이 눈에 띄었다. 감독이 알레한드로 곤쌀레스 이냐리투였기 때문이다. 그의 전작 <아모레스 페로스>를 너무나 재미있게 본 적이 있었던 나는 그냥 <21그램>을 끊고 들어갔다.

 

'삶'과 '사랑에의 집착'이라는 의미에서 <21그램>은 <아모레스 페로스>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럼에도 나는 <21그램>에서 <아모레스 페로스>에서 느꼈던 신선함과 강렬한 영상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영화를 보는 도중 조금 지루하기도 했고 뭐랄까 왠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지워지지가 않았다.(아직도 그 이유는 모르겠다. 생각을 정리해서 나중에 더 쓰도록 하겠다.) 더군다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장면을 혼합하여 편집한 것도 왠지 나는 거북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이 영화 속에서 어느 누구도 죄인은 아니다. 그저 우발적으로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뿐이다. 감독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 그리고 삶의 가벼움을 설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게 있어 이건 거의 성인의 수준이 아닐까 싶다. 신이 할 수 있는 용서를 인간세계에 강요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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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교육 - 페드로 알모도바르(2004)

 

금요일에 공짜휴가 하루를 받았다. 예정된 출장기간 하루전에 일이 다 끝났는데 팀장은 그냥 하루 쉬란다. 남들 다 일하는데 하루 쉬는 건 정말 좋더라. 평일임에도 늦잠도 자보고 점심은 서대문근처에서 일하는 친구를 불러내서 먹고 혼자 영화한편 보러갔다. 코아아트홀에서 "나쁜교육"을 아직 하고 있어서 표 끊어서 들어갔는데, 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거의 혼자서 띄엄띄엄 앉아 있어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알모도바르 영화는 몇개 본게 없지만(키카, 그녀에게 2편?) 본 후에 후회한 적은 없었는데 이 영화도 역시나 그렇더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인물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넘들이다. 앙헬은 "아모레스 페로스"에서 형수와 바람난 옥따비오역으로 나왔던 배우고, "그녀에게"에서 봤던 등장인물들이 여럿 보인다. 신기하고도 반갑다. 특히, "그녀에게"에서 베니그노역을 맡았던 하비에르 까마라는 이 영화에서 많이도 망가지더라.

 

영화에는 남성들만 나와서 저마다의 사랑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나름대로 복잡한 스토리를 무리없이 잘 연결시켰다. 후반부의 반전도 쑈킹했고 말이다. 알모도바르를 나르시스트, 혹은 악동이라고 하는데 저 정도 재능이라면 그의 나르시즘은 귀엽게 봐 줄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겐 아직 "性"과 "예술"은 버거운 주제다.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태도가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내 현재의 생각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갈피를 잡기가 힘들다. 이 영화를 보면서 참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그런 이유에서 이 영화의 가치에 대해서 판단을 할 수는 없었다. 다만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낳게 되는 극도의 집착과, 사랑의 이기적인 속성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예전에 누가 쓴 글에서 "사랑 = 정주고 쪽파는 것"이란 표현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을 넘어서 버린다. 완전히...

 

암튼,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역시나" 화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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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 해리 훅 감독(1990)


 

같이 사는 누군가가 비디오가게에서 빌려왔는지 집에 뒹굴고 있더라. 그래서 오늘 일요일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불살랐던(?) 영화였다.

 

1983년 노벨상 수상작인 윌리엄 골딩의 동명소설을 극화한 영화로 소설을 읽어보지 못해서 영화화가 제대로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재미있었다.

 

하도 유명한 소설이라 줄거리는 많이 알려져 있는대로다. 십수명이 아이들이 난파되어 무인도에 상륙하게 되고 순진무구한 주체인 아이들답지않게(?) 그 안에서 권력이 발생하고 나름의 독재체제가 성립되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내용이다.

 

난파된 아이들의 리더격인 랄프는 합리적이고 선한 인간의 본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무인도상륙초기 아이들은 랄프를 따른다. 랄프는 외부로부터의 구조를 기다리며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정의와 사랑을 강조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려 애쓴다. 그러나 랄프의 라이벌격인 정의롭지 않은(?) 잭이 랄프와의 불화로 아이들을 이끌고 떠나자 아이들은 2개의 무리로 나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동굴 속에서 괴물을 보았다는 한 아이의 말에 의해 어이없는 공포가 아이들 사이에 유포되고 잭은 이 공포를 교묘히 이용한다. 외부로부터의 누군가에 의해 내가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아이들로 하여금 다른 무리에 대한 공격과 따돌림, 심지어 살인을 하게끔 만들고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고 따랐던 랄프에 대해 무지막지한 공격에 나서게 한다.

 

여기서 제목인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은 혐오스러운 독재(자)의 상징으로 드러난다. 원인모를 공포의 공간인 동굴앞에 아이들이 박아놓은 돼지머리는 흉칙하게 썩어가며 파리떼를 끌어모은다. 흡사 합리적이고 선한 개개인의 아이들이 잭의 주위에서 흉칙한 파리떼의 모습으로 변해가듯...

 

작가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합리적이고 선한 인간개개인이 모인 공동체도 항상 합리적이고 선한 전체일 수는 없다는 것과, 권력의 횡포는 원인모를 공포에 대한 집단무의식을 통해 확대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요즘들어 국보법 폐지문제로 온 사회가 뜨겁다. 50년이상 "원인모를 공포"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그들만의 기득권을 유지해온 세력이 발악을 하고 있다. 남한의 인민들이 구역질나는 돼지머리(파리대왕)의 주위를 맴도는 소심하고 흉칙한 파리떼로 남을 것인가. 귀추가 주목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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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레닌

* 이 글은 미류님의 [굿바이 레닌, 그래서... 진실인 것이다]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작년 어느 금요일 저녁 퇴근해서 본 영화다. 굿바이 레닌.. 가보니 객석이 만원사례였던 걸로 기억난다. 게다가 늦은 시간임에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단체관람을 하러 와서 놀랬다. 역시 현실은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다.



영화를 보기전에는 어머니를 위해 쇼를 벌이는 한 아들의 눈물겨운 일화라고 하길래 내가 공감가는 얘기는 아닐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조금씩 앞으로 달려가던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나름대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했다고는 해도 그리고 그 나라들이 실제로 '공산주의'를 실현했느냐라는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일단 그 나라들은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고 실존했던 것인만큼 특히 그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필요하다. 아님 무식한 내가 모르고 있었던가..

 

영화속 어머니는 고지식한 열혈공산당원으로 이상주의자다. 그녀의 남편은 당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독 체제에서 왕따를 당하고 괴로워하다 서독으로 망명한다. 그녀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남편과의 망명을 계획하지만 실행하지 못한채, 서독 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족을 버렸다고 아들과 딸 그리고 동독정부를 속인다. 그녀에게 동독체제는 완벽한 '공산주의의 이상향'은 아니었다. 당원/비당원 간의 차별, 낮은 생산능력에 따른 인민들의 열악한 생활 등 개선되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생활주변의 사소한 것조차 조금씩 고쳐나가며 언젠가 '이상향'이 도래하기를 바랐다. 동독여성들의 체형에 맞지 않는 옷의 치수에 관해 장문(!!!)의 편지를 당에 보내는 그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자유를 위한 시위에 참여하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을 본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긴 혼수상태에 빠진다. 다시 깨어난 어머니는 충격을 받게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 하지만 이미 몇개월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의 곳곳에 자본주의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이에 아들은 동독체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거짓말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서독인민들이 동독으로 대규모 망명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짓말까지 하게 된다.

 

이영화에서 재미있는 점은 아들이 처음에는 어머니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만, 나중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대신 어머니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는데 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웃들과 다정하게 살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도 소박한 이상의 하나일 거다. 그리고 현존 사회주의를 일구었던 초기 인물들도 그런 이상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그 진행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거나 희망을 잃어갔다. 영화속 어머니도 그런 사람이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서독으로 망명한 이후 어머니가 열혈공산당원이 되는 걸로 나오지만 난 그 이유가 생존을 위한 거짓 연극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 사람이 서독인민들이 경제난으로 대거 망명을 해서 베를린시의 주택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말에 자신의 집을 선뜻 내어주려고 하겠나. 오히려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는 체제를 자신의 희생과 노력으로라도 조금씩 개선해보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아들은 어머니가 그토록 갈구했던 이상을 한편의 쇼로나마 실현시키고 감격한 어머니는 편안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골은 그녀가 그토록 염원했던 이상이 존재하는 곳(하늘)을 향해 '발사'된다.

 

이 영화가 통일독일에서 개봉한 이래 역대 2번째로 높은 흥행실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만큼 내용면에서나 대중성면에서나 충실한 작품이며, 또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일국민 대다수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영화는 몰락하여 서독에 흡수된 동독을 망할 수 밖에 없었던 후진적인 독재체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실험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살던 많은 사람들 각자의 이상찾기(!)를 인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승자의 우월감에서 나온 포용력인가? 그건 아닐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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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페스티발 &quot;오세이선생의 교육혁명&quot;

 

 

EBS 다큐멘터리 페스티발에서 “오세이 선생님의 교육혁명”을 봤다. 내겐 일본의 제도교육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교육자로서의 이야기보다 죽음을 앞둔 고뇌에 찬 한 인간의 이야기로서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 작품이다.

 

평소 이지메현상과 등교거부 등 일본의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도시아키 오세이선생은 하마노고 초등학교의 신임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학생들을 위한 참교육을 위해 노력한다. 그에게 있어 교육의 목표란(특히 초등교육의 목표란) 아이들에게 “삶의 가치”와 “배움의 기쁨”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교육이란 단순히 지식을 나열하고 암기토록 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읽을 수 없는 붕어빵같은 존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아이들의 경험, 지식, 판단력을 존중함으로써 아이들이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갖고 사고할 수 있게끔 수업방식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는 학교 선생님들의 잡무를 과감하게 줄이고 교사들로 하여금 정기적인 공개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효과적인 수업방식을 개발하도록 했다. 다큐멘터리를 찍기 전 그는 말기 위암판정을 받는다. 수술도 했지만 몇 개월의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자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오세이 선생님의 도덕시간, 그날의 주제는 “인생”이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한편의 동화를 먼저 읽어준다. 늙은 오소리가 죽자 그의 친구들이 오소리가 그들에게 가르쳐준 많은 일들(과자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일화, 넥타이를 메는 법을 가르쳐준 일화 등등)을 추억한다는 내용이다. 오세이 선생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소리는 죽었냐고, 죽은 게 맞다면 오소리와 그의 친구들과의 관계가 끝난 것이냐고, 관계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면 도대체 그들을 연결해 주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어떤 한 아이가 대답한다. “추억”이라고, 그들이 함께 했던 “추억”이 그들을 연결해 주고 있다고 말이다. 선생님은 자신이 늘상 어깨에 메고 다니던 링거주사액을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말한다. 자신도 죽어가고 있고, 곧 죽을 테지만 너희들과 함께 있을거라고.

 

한학기가 끝날 때까지 오세이 선생은 동료 교사들과 다음 학기의 수업계획과 새로운 교재개발에 대해 열띤 논의를 한다. 그리고 학기가 끝나고 짧은 방학을 맞이한지 2일 후 갑작스런 병세악화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머리맡에는 다음 학기 “인생”에 대한 수업계획안이 놓여져 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몸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몹시도 두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주어진 시간동안 아이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했고 그러한 그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겨지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 추억이 오세이 선생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같은 기간 방영되었던 “어느 암환자의 해피데이”에서 주인공 쉴로미는 그야말로 발버둥을 친다. 신에게 의지하며 수술과 치료의 고통을 참다가도 어느 한순간에는 격한 감정에 휩쓸린 나머지 치료를 거부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살고 싶다며 흐느끼기도 한다. 그의 감정상태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아마도 죽음을 앞둔 보통사람이라면 그리고 나라면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타인을 위해 삶의 마지막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오세이 선생 같은 삶을 보면 괜시리 눈물이 난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나의 대학시절 맑스, 체게바라, 트로츠키, 김산과 같은 혁명가들이 멋있으면서도 그들이 왜 그토록 힘든 삶의 무게를 선택했을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다. 당시의 인텔리였으니 자기 한 몸 건사하며 호위호식할 수 있었을테고, 더군다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유물론자들이지 않는가? 내세를 믿는 것도 아니니, 현세의 모든 고통을 신이 보상해 줄 것으로 믿지도 않았을텐데. 바로 그러한 나의 물음을 해소해 준 것은 ‘추억’과 ‘기억’에 대한 문학평론가 김명인씨의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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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역사가 대가 끊기는 것으로 종지부를 고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역사는 우리 당대에 반드시 모든 것이 실현되지도 않을 뿐더러 오래전 많은 지식인과 민중들이 희망했던 유토피아로서의 사회주의 혁명 자체가 저절로 그런 유토피아를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아직도 진보를 말하고 희망을 말하는가? 그것은 진보가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구체적 일상과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과 일상에 대한 하나의 자세이자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제한된 수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왜 막 살아버리지 않는가?

 

루이 아라공은 말한다. "죽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닐터 타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있어 가장 최후의 무기는 기억이다. 우리의 기억은 곧 역사의 현장이며 잊지 않기 위한 투쟁의 현장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종이로 씌어지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할 수도 있다. 많은 이름없는 이들이 그렇게 사라졌듯이. 그러나 우리는 그 이름없는 패자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기억함으로써 비록 당대에는 승리할 수 없음에도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전수해주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교사이고, 교육이다. 미래에 대한 나의 솔직한 전망은 그런 것이다. 나는 내 삶으로 나를 짊어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내가 당대에 이루지 못한 것일지라도 인간의 역사, 사람의 역사가 아이들에게서 다시 아이들에게로 이어지는 동안 언젠가는 변화될 것이라 믿는 것이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희망의 교육학”에 대한 서평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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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세계의 명화"에서 이번 주말 틀어주더라. 박찬욱 감독이 나와서 이 영화는 이러저러한 영화다라고 말해 주는데, 다분히 스포일러성이 짙다. 영화 다 끝난 다음에 나와서 "전 이 영화를 이런 이유로 재미있게 봤고, 저한테 이런 영향을 준 것 같아요."라고 인터뷰 한번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괜히 앞에 나와서 산통 다 깨 버렸다. 마치 식스센스보고 "주인공이 유령이래매!"라고 외치는 놈처럼 말이다.

 

현대인의 소외에 대한 감독 나름의 고찰이라고 하는데, 영화 내내 분위기가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워서 ... 좋았다. 더위가 가신 늦여름밤에 어울릴만한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딱 세번 웃었던 것 같은데 모두 극중 사강의 행동을 보고 그랬다. 사강이 혼자서 수박에다 키스를 할 때, 볼링공처럼 굴릴 때, 그리고 욕조에서 빨래하는 모습을 보고서 말이다. 그러고보니 이강생이라는 이 배우 우울하고 소심한 게이역을 참 충실히 소화해 낸 것 같다.

 

평소 현대인의 소외는 별로 좋아하는 주제는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며 피부로 느끼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가까운 문제이기에 단순히 관념적인 문제라거나 사회적인 문제로 치부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속의 우울한 사강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미친 짓이냐"라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오버랩되더라. "머릿속에서 지향하는 나"와 "현실의 나" 사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마치 경계인처럼 느껴졌다. 소외란 일상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인데 우연히 이런 영화를 통해서야 깨닫게 되다니... 일상을 통해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 미쳐버릴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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