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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운 포스터.

* 여기저기 많은 포스트들이 있어서 트랙백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너무 귀찮다!! 1. 이번호 월간 [사람]의 표지도 남성 노동자의 클로즈업 사진이 들어 있다. 이번호에 마침 노동운동 관련 특집기사가 실리기도 했고... 그런데 이번 포스터 얘기 나오는걸 보니 적어도 우리 잡지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사람]표지가 겨울 명동성당에서 질리게, 질기게 투쟁하던 이주노동자의 사진이었다고 하더라도) 2. 귀연이슬의 블로그에 갔다가 한 덧글에 벌컥 화가 났다. 노동운동사 공부좀 하라는 얘기. 아마 진짜 자기 현장에서 투쟁하던 노동자였다면 그런 얘기 못할 것 같다. 진짜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느 순간에 찍힌 사진임을 기억하며 연대하지 않는다. '유명한 사진인데 못 봤나보죠?' 그거 기억하면서 보는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때의 투쟁을 본 받으시오!'라고 할 것 아니면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연대의식이지 훌륭한 투쟁의 모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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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못 해요

자꾸 일정을 까먹는것 같아 수첩에 있던 일정들을 사무실 책상 달력에 옮겨적었다. (내 수첩은 주간단위로 되어 있어서 한달의 전체 일정을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다.) 흠. 학원에 가는 일요일과 밤샘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공식적으로는 가야하는 일정들이 (그러니까, 비공식적으로는 배째기도 하는 일정들 ㅋ) 26, 27일을 빼고는 빠짐없이 꼭 차있다. (물론 24시간 풀 가동은 아니지만.) 그런데 오늘 내 실수로 회의 하나가 미뤄졌다. 그래서 얼떨결에 사무실에 앉아 이것저것 미뤄둔 일들을 정리하려고 했다.


집중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1.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들 각자 자기 일들을 하고 있으니 술마실때처럼 계속 수다를 떨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다 보니 대화의 공백사이에는 컴퓨터, 팩스 돌아가는 소리만이 꽉 차있다. 내 머리속도 같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음악을 틀 수도 없다. 사무실 내 컴 사양이 후진 바람에 미디어 플레이어 프로그램을 열면 다른 작업의 속도가 완/전/ 느려진다. 이어폰을 꽂으면 너무 고립되는 것 같아서 싫고.. 2. 내가 읽는게 글자인지, 그림인지.. 하도 회의나 사람들과의 대화속에서만 상황을 집작하다보니 구체적인 내용들이 들어있는 텍스트를 읽는 것이 고역이다. 조금 전에는 어떤 기사를 읽다가 대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사전적 의미 말고)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냥 창을 닫아버렸다. 공부가 필요하긴 한데, 어디서 부터 손을 대야할지도 모르겠다. 3. 정리를 해보자. 바쁜(척하는) 일과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 할때는 이것저것 해야 할일이 잘도 떠올랐는데, 막상 혼자 앉아서 정리하려니 그때 떠오른 것들은 몽땅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머리속을 좀 먼지들을 청소기로 좀 밀어야 할까나.. 4. 술 생각만 난다. 아니, 사실 술 보다는 사무실 사람들이 지금 손에 잡은일을 대강 마무리하고 나랑 놀아줬으면 좋겠다. 대체 글인지 그림인지 모르는 이것들을 보려고 책상에 앉아있자니 한숨밖에 안나온다. 에효. 죽것다. 5. 원래는 혼자 잘 놀았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요즘 혼자놀때는 TV 드라마에만 푹 빠져있었다. 소연언니가 빌려준 씨디들(이거 언제 갖다주나;; 사무실 먼지 앉겠는데..)도 아직 다 못봤고, CSI LasVegas편도 아직 두 번째 시즌 중간까지밖에 못 봤다. 게다가 한번 빠져들고 나니 보고 싶은 드라마가 더 많아졌다. 아까는 일이 안 잡혀서 드라마 씨디를 돌리려다 실패했다. (내 컴 사양 후지다니깐) 6. 어쩌다 이렇게 의존적 인간이 되어버렸을까? 사람들이랑 잘 지내는 것도 좋지만, 잘 지내려면 나를 만들기도 해야 할거다. 그런데, 내 재산을 만들어내는게 쉽지 않다. 더 열심히 살고 열심히 지낼려면 뭔가 가진게 있어야 하는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 충격에 머리가 멍하다. ....그래도 오늘 밤엔 여전히 드라마의 세계로..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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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놀고 싶다.

지음님의 [Mayday, 블로거 깃발을 들다] 에 관련된 글.

음. 사실 구호 만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내용을 유려하게 만들고 하는 것은 정말 내 체질이 아니다. -_- 그래도 메이데이에 가면 뭔가 즐겁긴 했다. 집회가 즐거운게 아니라 행진이. 그냥 똑같이 걸어가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발랄하고 즐거운 선전물들도 있고, 평소에 만나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행진 중간에 마주치면 대열이고 뭐고 상관없이 반갑게 인사하느라 정신없고;; ㅋ 메이데이가 갖는 역사적 의미의 중요성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투쟁의 방식, 이야기의 방식이 항상 무게를 잡아야 하는것은 아닐거다. 오히려 축제처럼 떠들고 재밌게 노는 것이 사람들에게 훨씬 즐거움을 주지 않을까? 몇 년 전, 지나가던 대오들에게 버스안에서 몸을 내밀고 마구마구 소리를 질러대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우. 우울해. 즐거운 선전물은 아니었지만 예전에 투명 비닐에 페인트로 전쟁 반대 문구를 쓰고 나갔던 적이 있었다. 물론 시선집중 효과는 짱! 예쁘게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즐겁고 행복하게 놀고(!) 싶었던 맘은 전해졌던것 같다. 멋진 글이 아니어도, 강력한 투쟁의 구호와 문구가 아니어도 정말 투쟁하고 이야기 하고 싶은 분위기의 메이데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 아.. 뭐 입고 가지? :P 뱀발 : 근데 여기에 트랙백해도 되는걸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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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의미를 모르겠다.

레이님의 [구속.] 에 관련된 글.

'인권경찰' '인권검찰' '인권 대통령'.. 상품에 '무공해'딱지를 붙여야만 팔리는 것처럼 '인권'이란 단어도 늘상 붙여줘야만 겨우 기억에 남는 그런 사어(死語)가 되어버렸나보다. 법은 다수의 국민들이 뽑은 국회의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실정법을 어기는 것은 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은 사실 그냥 죽은 말일 뿐이다. 저 설명이 말해주는 것은 권력의 이름이 아니라 민중의 이름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힘으로 또 다른 억압을 만들지 않기 위한, 진짜 민주주의를 위한 지속적 열정과 노력이 '법'이라는 틀 안에 화석처럼 가둬놓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오늘, 말도 안되는 저 설명이 얼마나 우리를 숨막히게 할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배울때, 그리고 사회적 합의에 대해 배울때, 그리고 법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배울때, 우리는 진짜 의미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죽은 화석덩어리를 짐처럼 떠안는 것일 뿐이다. 민주주의나 인권따위가 전혀 지켜지지 않았던 대추리 황새울 들판에서 살아있는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활동가들은, 오늘 죽은 민주주의를 움켜쥔 화석덩어리에 묻혀버렸다. '국민의 뜻'인 법의 이름으로. 내가 알고있던 '인권' 개념은, 이 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였나보다. 문득,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 참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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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보라돌이님의 [인권을 구속하다] 에 관련된 글.



무척 화가 나고, 미안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역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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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사람들.

보라돌이님의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가...] 에 관련된 글.

이상한 사람들..이다. 나는 누구처럼 Hot! 하게 운동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승리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붉은사랑님의 포스트)라고 묻는다면 아마 내 대답은 NO! 일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다만, 늘 하는 '승리적 관점'에서의 평가를 모조리 제하고 나면. ^^::


나랑 띠를 한바퀴 돌리고도 3살이 더 많은 선배 활동가(그.. 박모 선배 ㅋ)가 2층에서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야~ 불 들어온다~!"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다 웃었다. 재미있었다. 청소를 대강 마무리하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자리에서 한*레 신문 1면 여성 모델 박모 활동가와 박모 선배가 (허어.. 박씨들..참. ^^;;) 평택에서 감동받고 기뻤던 일을 이야기했다. 누구네 집 수도 연결했을때, 인권활동가들 집 전기 들어왔을때... 밥상 머리에서 그릇을 물리자 마자 또 다른 회의를 하러, 다른 일을 하러 허겁지겁 뛰쳐나가야 하는 고된 생활인데도, 수도가 연결되고, 전기가 들어오니 좋단다. 그만큼 더 일이 많아지는데도 아랑곳 않는다. ...... 지난호 월간 [사람]의 특집 기사는 '인권활동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프로젝트 안한다, 회원 사업도 잘 못한다, 활동비는 없어도 활동가는 늘었으면 좋겠다... 잘 살자고 하는 운동이 자기 생활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는데도 그냥 그렇게 살겠다는 설문조사결과가 나왔다. ...... 박모 선배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다들 왜 그렇게 사는지 몰라..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더니 선배가 묻는다. "너는 (일 생길것 알면서도 쫓아다니면서) 왜 이렇게 사는데?" "몰라요." ...... 대강 청소만 하다가 돌아왔는데 지음과 토리가 "평택 다녀왔어?"라고 물었다. 너무 늦게 들어가서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었다(이렇게 늦게 와서 뭐할거냐? 따위의.. -_-a)고 했는데도 두 사람 대답이 가관이다. "그래도 넌 들어갔잖아.. 가보지도 못한 우리는 뭐냐.." 일 많은 사람들이, 힘들때 같이 못해줬다고 미안해한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찔려하면서 말이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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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처벌에 대한 고민.

트랙팩님의 [어찌할꼬, 전자팔찌] 에 관련된 글.

** "인권아. 어디 있니? - 범죄자 처벌에 대한 고민." : 월간 [사람] 9호에 실린 글입니다. 요즘, 일상 생활이 망가질 정도로 푹 빠져있는 드라마가 있다. 범죄 현장에서 수집한 증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진범을 잡아내는 수사대 이야기, C.S.I : MIAMI 에 빠져있는 중이다. 드라마 속에서 과학수사대 반장 역할을 하는 배우를 특히 좋아하는데, 이 배우 자체가 가진 매력 뿐만 아니라 캐릭터에 반해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중이다. 수사대의 반장은 형사드라마에서 보여지는 아주 전형적인 캐릭터인데,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폭력에 민감하며, 인종차별에 저항하고, 불의를 보면 폭력도 마다 않는 기분파 형사이다. 그런데, 바로 이게 내 신경을 영 거슬린다. 불의를 보면 ‘폭력도 마다 않는’다는 점이 말이다. 사건의 속전속결을 목표로 하다 보니 직관에 의지하고 증거도 없이 용의자부터 불러들여 심문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때 심문하는 과정이 가관이다.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얘는 범인이야’라는 확신 하에서 심문이 진행된다. (물론 드라마이기 때문에 대부분 범인이거나 범죄를 사주한 사람이 바로 용의자로 찍힌다.) 게다가, 드라마에서 나오는 범죄들은 대부분 강력범죄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강한 처벌을 꼭 내려야 하겠다고 범인을 뒤쫓는 수사대들에게 적극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극적 구조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아동 성폭력범죄를 플래시백으로 재구성하면서 보는 사람에게 ‘저 놈은 꼭 사형을 시켜야~!’라는 기분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TV 드라마의 차이점은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 드라마에서 수사대의 반장은 피해자들을 찾아가 늘 다짐한다. ‘당신 대신 내가 꼭 복수해주겠다’ 하지만 이것은 복수에 대한 다짐이 아니라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이다. 약자이기 때문에 범죄의 피해자가 된 그들을 위해 자신의 힘을 이용해 잠시나마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당한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꼭 갚아주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피해자 가족들에게서 형사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 범죄자 하나만 없앤다고 해서 동종의 범죄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TV드라마에서야 극적 재미를 위해 범행 종류와 수법을 달리하면서 범죄를 보여주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비슷한 범죄들이 매번 일어난다. 최근 일어난 초등생 성폭력/살인 사건을 발단으로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처벌 강도를 강화하자는 이야기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성범죄자에게 전자 팔찌를 채워 창살없는 감옥에 가두자는 이야기도 있고, 일부 네티즌들은 궁형(宮刑)이라도 내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지하철에서의 성추행은 물론이고, 나 역시도 아동 성폭력의 피해자였던지라 궁형이라도 내리자는 사람들의 주장에 백분 동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기만 하다. 그런데, 그냥 ‘처벌하자!’는 목소리에 적극 동의하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왜 아이가 죽어야만 이런 격분의 목소리가 높아지는가..하는 점이다. 성폭력상담소의 발표에 따르면 아직도 우리 사회의 성폭력 사건 신고율은 6.1%정도라고 한다. 신고되지 않은 93.9%의 성폭력 사건은 범죄자를 찾을 가능성 조차 희박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폭력범에 대한 처벌 강화가 과연 대책이 될 수 있을 것인가가 의문이다. 재수없게(!) 검거되어 6%의(이것도 다 잡혔을때를 고려한 수치이지만) 성폭력범이 전자팔찌를 차고 있을 때, 아직 꼬리도 잡지 못한 94%의 범죄자들이 거리를 활보할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그 6%만을 보면서 잠재적 피해자들은 과연 충분히 안심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서, 내가 좋아하는 그 반장은 정말 대단한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이다(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한정하는 것이 좀 기분나쁘지만). 상당히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기위해 노력하면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고, 명예/권력/재물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다. 결국 이 사람은 경찰로서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는데만 온갖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덧붙여서 범죄자를 잡기 위한 엄청나게 뛰어난 직관까지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드라마같은 상황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범죄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이 보디가드처럼 나를 지켜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마이애미는 주법(州法)에 의해 사형이 가능한데, 형사들은 이를 협박문구처럼 사용한다. 처벌중심주의가 범죄의 동기를 없앨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처벌 강화는 내성을 키울 수 있을 뿐이지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그동안 처벌이 없어서 성폭력 범죄자들이 계속 늘어난 것일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94%의 성범죄자들은 범죄가 강화되어도 충분히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다. 처벌강화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처벌을 대신하는 경찰과 검찰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성폭력 신고율을 높일 수 있는 방안과, 성폭력이 아예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처벌이 중심이 되는 순간, 피해자들의 안전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복수가 목적이라면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정말 복수를 위해서만 처벌을 하는 것일까?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고려해본다면 처벌강화가 피해자들도, 범죄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밉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만 미워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그놈의 ‘죄’를 찾아서 처벌하는 것이 ‘죄인’을 처벌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게 바로 인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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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시의 문제.

* 데자뷰님의 "나아감이란.." 포스트에 트랙백 되어 있습니다. * 참고 : 경찰폭력뿌리뽑기 프로젝트 '보편적 인권'이라는 개념은 이제는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진부한 것...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사람은 모두가 똑같이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명제가 성립하려면, 그 사람들은 사회에서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동등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입으로 아무리 떠들어 봐야, 대기업 대졸자 사원과 서울역 노숙자의 권리는 전혀 평등하지도 않고 평등해지고 있지도 않으며 평등해질 기미마저 보이지 않는다. 경찰폭력에 대한 비판은 '국가 정책적 실패 문제를 잠시 동안 제복을 빌려 입고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국민을 향해 매번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무게에서 전혀 동일해 질 수 없는 '경찰'이라는 정체성과 '시민'이라는 정체성이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잠시 동안 제복을 빌려 입'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경찰인력은 대체 가능하지만 시민은 대체할 수 없다. 그게 시민과 경찰의 차이다. '경찰'이라는 표상과 개인의 정체성을 동일시 하는 순간 '제복을 빌려 입은 개인'의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제복이라는 것은 결국 시민을 통제하기 위한 공권력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경찰 인권을 얘기하는 순간 '시민이 시민을 통제하는' 성립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한다. 진정 경찰의 인권을 이야기 하려면, '경찰'로서의 인권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인식을 가진 경찰이어야 한다. 올바른 시민성이란, 다수가 지지하는 국가권력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저항을 통해 지배권력의 헤게모니를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 폭력 자체에 대한 비판과 경찰폭력에 대한 비판은 질적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는 패스. + 경찰이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발휘하는 순간 그의 인권을 지켜야 할 대상은 또 다른 시민이 아닌 국가가 되어야 한다. 노동환경의 문제를 제기하시길.


나는 그래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활동가'와 정치적으로 불공정하고 모자란 '사람'의 경계에서 갈등하고 있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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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도 사람, 꼴등도 사람

** 월간 [사람] 6호, '이것도 인권이에요' 꼭지 글. ** 이 글만으로 [사람]의 질적 수준을 판단한다면 경기도 오산입니다. (요즘 쾌변작가 메가쇼킹의 만화에 버닝중;;) ** 황우석 스캔들과 관련해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좋은 글들이 와르르 쏟아져서 사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글들을 쓰는 사람이 주류(혹은 다수)가 아니라는 사실이 참 서글프다. -_ㅜ


1인자가 되어야만 살아남는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늘상 묻는 질문이 있다. ‘너 커서 뭐 되고 싶어?’ 정말 실속 없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분위기를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답변은 그 시대의 경쟁력있는 직업이 무엇인지를 대략 파악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대통령이라는 답변이 많이 나왔을 때는 유신을 지나 땡전뉴스(9시가 울리는 ‘땡’소리 직후 ‘전두환 대통령은~’하고 방송되던 그 시대의 뉴스)가 방송되던, 대통령이 최고의 권력과 권위를 표상하는 상징으로 읽히던 시대였다. ‘과학자’라는 답변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차츰 마무리되고 ‘우리가 가진 자원은 인적 자원뿐’이라는 선전과 함께 실용적인 응용학문들에 많은 투자지원을 하던 때였다. 한류다 뭐다 해서 문화산업이 각광받고 있는 요즘 아이들의 대답이 ‘연예인’으로 바뀐 것은 그들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아이들이 연예인을 꿈꾸고, 과학자를 꿈꾼다고 해서 모두 동방신기나 황우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성과를 거두어야만 하고, 1인자를 만들기 위한 부모들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된다. 박세리 선수의 LPGA 우승 이후에 박세리 선수 아버지의 지도법이 세간의 화제가 되자, 너도나도 아이에게 골프를 시키겠다는 부모들 때문에 골프학원이 특수를 맞기도 했었다. 노벨상 수상자의 15%를 배출했다는 유대인들의 천재교육 십계명 1조는 ‘남과 다르게 되라’는 것이라고 한다. 남과 다르게 되기 위해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에 보내고, 경쟁에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며, ‘이기는 것이 살길’이라는 것을 머리에 각인시킨다. 출발선이 다른 시작 살아남기 위해서는 1인자가 되어야 하지만, 그 경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이제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학교 수업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좋은 대학에 갈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경쟁력 있는 인적자원을 만들기 위해 한글도 떼기 전에 영어부터 배우는 아이들이나,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학원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돈 없이는 경쟁할 수 있는 조건조차 갖추지 못할 것이다. 최근 인하대 수시전형에 합격한 송유근 군의 경우는 이 신동을 위해 과학기술부의 지원계획이 잡혀져 있다(과학기술부에서는 송군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전문가 4~5명으로 구성된 전담지원부를 개설할 예정이다.). 이 경우는 확연히 다른 출발선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에 재능이 있더라도, 국내의 음악 교육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저소득층의 사람들은 음악 공부를 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천재들이 한명씩 등장할 때마다 그 천재의 학습법을 담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그 학습법을 그대로 따라하려면 부모가 아이의 교육에만 신경을 쏟거나, ‘남들과 다른 교육’을 받기 위해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지출해야만 한다. ‘1인자’와 나머지들 또한 사람에 대한 평가 기준이 ‘성과 중심’이 되면서, 노력이 가지는 가치는 그 빛을 잃었다. ‘너도 노력하면 잘 할 수 있어’라는 말은 ‘노력하면’보다는 ‘잘 할 수 있어’가 핵심이다.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인 배형진씨가 빛나는 것은, 그가 정신지체 장애인들의 희망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비장애인들과 비슷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축하이다. 배형진씨가 달리기를 잘하고, 비장애인들처럼 직장을 다니며 일상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장애인들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스티븐 호킹이 위대한 물리학적 성과를 이루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장애인들이 밖을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이동권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기회만 얻으면 스티븐 호킹 말고도 더 멋진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장애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냥 가능성일 뿐이다. 장애인들의 가능성은 펼쳐보기도 전에 차단되고, 그 속에서 삶을 위한 개개인의 노력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배형진씨의 성공기는 헌신하는 어머니가 없는 장애인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경쟁만을 강요하고 1인자가 되기만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확실한 결과물 없이는 존재 가치마저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1인자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싶다. SF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미친 과학자’ 캐릭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통해 치명적인 화학무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가공할 힘을 가진 로봇 따위를 만들어내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무리 똑똑해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세계를 재패할만한 힘이 있어도 그를 올바른 일에 써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지는 못할 망정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할 터인데, 지금의 1인자들 주변에는 온통 피해자들 밖에 없다. 수많은 신동의 부모들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을 것이고, 황우석 교수의 실험을 위해 난자를 제공한 연구원들은 과배란 유도제의 부작용을 걱정해야 했을 것이며,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 채 경쟁에서 밀려난 수많은 패배자들은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할 것이다. 경쟁의 의미가 자신의 능력을 계발 할 수 있는 자극제의 역할이 아닌 ‘1등’이라는 성과를 얻기 위한 것으로 변질된 지금, ‘페어 플레이’정신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된 것 같다. 여러 색깔의 조각천들을 모아 만든 퀼트처럼 세상에는 여러 재능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할텐데,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1인자만 살아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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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만’ 금연 하시죠?

** 월간 [사람] 5호 '이것도 인권이에요'글. ** 사실 [사람]잡지에서 이 꼭지가 제일 허접한데..이래서 잡지 광고가 될까? -_-;; ------------------------------------------------------------------------------


이 꼭지에 ‘길거리에서의 흡연권’을 쓴다니 열광적인 반응이 되돌아왔다. 물론 여성들에게서. 대체 그동안 여성이라는 이유로 길에서 흡연할 때 얼마나 두려움과 모멸감에 시달렸으면 그런 반응이 되돌아올까..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물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지만. “아빠의 금연, 가족의 행복” 예전에는 아주 많이 붙어있었지만 지금은 별로 안 보이는 저 구호가 요즘은 가끔 고맙게도 느껴진다. 아빠‘만’ 금연하면 된다는 얘기 아닌가! ^^이제 담배피우는 사람이 ‘아빠’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구호는 정말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나 알고 있을 뿐,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것. 재작년쯤인가. 어떤 건물 앞에서 남자선배들과 같이 계단에 앉아서 수다를 떨다가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때는 사실 주변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왜? 남자 선배들과 있으니까!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도 막아줄 방패들이 있으니 안심도 되고. (사실 ‘계집애가~’운운하는 소리 듣고 싸우면서까지 담배를 피워야 한다는 게 얼마나 짜증스럽나) 그런데 길 가던 아저씨가 대뜸 내게 다가와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다. 입에 담배를 물고 있으니 굳이 말로 대답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아무 대꾸도 않고 담배에 불을 붙여드렸다. 뒤에 앉아있던 남자 선배 중 한 명 왈‘ 와~ 세상 정말 살만해졌다. 여자한테도 담뱃불 빌리는 아저씨가 다 있네..’ 영문을 아는 다른 선배들은 모두 자지러졌다. 왜? 그 아저씨는 내가 여자인줄 몰랐던게다. 웃자고 한 소리지만 아직도 단신으로 가끔 실리는 기사들 중 잊을만 하면 나타나는 소재거리가 바로 이 ‘여성 흡연’문제다. 길거리에서 젊은 여성이 담배를 피웠다고 얻어맞고, 심지어는 학교 캠퍼스 안에서도 학교에 놀러온 동네 주민들에게 뺨 맞기 일쑤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성들이 ‘길거리 흡연권도 인권이에요’라고 얘기한다는 내 말에 얼마나 열광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여성이 지붕이 없는 곳에서 흡연을 하면 경범죄다’라는 유언비어까지 퍼졌었을까. (실제로 90년대 말 이런 소문이 있었다.) 지금은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로 바뀌었지만, 예전 경고 문구는 좀 더 노골적으로 여성의 흡연권을 무시했었다.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히 임신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 마치 임신과 출산이 모두 여성이 책임인양 떠넘기고자 하는 수작에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건강을 위해’따위의 말로 운운하며 여성의 흡연을 제지하려는 것은 사실 논리적 근거가 되지 못한다. 겨우 오십보 백보 차이인 것을. 어떻든 간에 현재 스코아, 여성에게 길거리에서의 흡연은 정말 심호흡 단단히 하고 저질러야 하는 사고이다. 그런데 이 길거리 흡연, 사실 정말 권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담배를 둘러싼 권리가 ‘맘 놓고 흡연할 수 있는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담배연기가 끔찍하게 싫은 혐연자들에게도 권리는 있다. 간접흡연하지 않을 권리. 흡연량으로 따지면 평균 이상은 되는 나 같은 애연가 여성이라면 당연히 길에서도 맘 놓고 흡연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걸어다니며 담배피우는 사람들을 옹호해주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다. 혐연자/비흡연자들에게는 감사하게도(!) 최근엔 금연석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심지어 아예 금연구역으로 설정한 곳도 많아졌지만(개인적으로 실내에서나 맘 놓고 흡연할 수 있는 여성들에게는 금연구역만 있는 장소가 늘어가는 것은 정말 반인권적인 상활이라고 생각한다.) 길거리에서만큼은 워킹 스모커들을 피해갈 여지가 없다. 대체 걸어다니는 굴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대체 뭐란 말인가? 더구나 하나도 아닌데.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며 담배피우는 사람들. 걸음이 느리다면 그를 앞질러가기도 어렵다. 게다가 길거리에는 또 왜 그리 침은 뱉어대는지. 담배연기에 질식할 것 같은 상황도 모자라 지뢰(!)를 피하기 위해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피해자들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흩날리는 담뱃재가 검은 옷에 붙으면 허연 흔적을 남겨 짜증나고, 튕겨내는 담뱃불에 옷이 탈까 훌쩍 피해야 하며, 담배를 들고 있는 손이 내 옷이나 피부에 스칠까봐 팔짱을 끼고 옷 매무새를 정리해야 하는건 생각보다 무척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다. 뒤따르는 자여, 그대에게 ‘간접흡연하지 않을 권리’란 없다! 그렇게 흡연권이 절대 침해해서는 안되는 절대적 권리라면 왜 여성의 흡연에는 그렇게 관대하지 못한걸까? 최근 일본에서는 걸으면서 흡연하는 것을 금지하는 캠페인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2003년에 일본의 치바현에서 어떤 흡연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며 담배를 피우다가 손에 들고 있던 담뱃불이 뒤따라오던 아이의 눈에 닿아 아이가 실명한 사고가 있었는데 그 후 뉴스나 공익광고등을 시작으로 캠페인이 확산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길거리를 모두 금연공간으로 만들자고 하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다. 다만, 한군데 서서 얌전히 피워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나날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애연가들에게 길거리마저 차단한다는 것도 역시 인권침해다. 다만, 흡연권만이 권리가 아니라는 걸 좀 이해해줬음 한다. 대체 흡연이 뭐 그렇게 자랑할만한 일이더냐. 길거리에 보이는 공공 휴지통에 재떨이가 붙어있는건 장식이 아니다. 재떨이 있는 곳이 곧 흡연 공간이라는 얘기다. 건물에서도 그럴진데, 왜 길거리에서만큼은 사방팔방 흩어지는 재들을 내가 고스란히 참아줘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제대로 피우지도 못하게 만들면서 말이지. ** 일본의 환경 과학자이자 환경, 평화운동가인 토다 키요시의 [환경학과 평화학](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2003)이라는 책에는 담배의 유해성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고 한다. 나는 도저히 그 책을 볼 자신이 없다. 부끄럽게도, 아직 스스로의 ‘완전한 시민권 - 동등하게 흡연할 권리’을 누리는 것이 내게 더 선결과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일까. 커피와 마찬가지로 담배 역시 그 재배과정에서 제 3세계 여성과 아동 노동의 착취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고, 담배를 재배하는데 필요한 비료에는 다량의 우라늄이 들어 있다는 얘기를 얼핏 들으면서도 그 내용들을 아직 자세하게 알고 싶지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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