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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7/25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4)
    금자
  2. 2006/07/24
    스페인, 말라가와 미하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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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7/21
    이건 좀 아니잖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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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7/18
    아이를 키운다는 것(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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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7/17
    trnaslated woma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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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7/14
    고추 심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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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7/12
    www.xtra.c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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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7/11
    침묵의 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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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아래 글, 스페인의 말라가와 미하스에 이어진 글입니다 :)

 

 

스페인, 말라가의 뭐시기 해변서 두 시간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라나다 (Granada)

미하스보다 훨씬 더 '시내' 여서 규모도 크고 사람도 많아서 그런지

미하스만큼 아기자기한 느낌은 없다.

차비도 더 비싸고 -_-;;;

며칠 조용히 묵고 싶다면, 정말이지 미하스 강추..

 

이슬람이 몇 백년 동안 차지했다는 알람브라 궁전은 볼거리.

 

공공버스 타고 갈까, 기차 타고 갈까 고민하다가

여행사 패키지 상품으로 다녀왔다.

버스비랑 알람브랑 궁전 입장료랑 합하고 가이드도 붙여주고 그러니 

뭐 그렇다면야 남는 장사였던 것.

패키지지만 쇼핑센타 이런데 안 데리고 다녔다.

(한 육만원-칠만원 정도 한 것 같은데 여행사마다 차이가 많으므로 발품을 팔아야!!) 

 

1_그리나다의 시장 쏘다니기




2_ 여행사 버스는 아니지만, 그라나다 시내의 알록달록한 관광버스

 

 

 

알라브람 궁전의 내부, 궁전을 싸고도는 물 때문에 궁 내부는 몹시 시원함

영어 가이드님께서 뭐시라 뭐시라 했지만 -_-;;;

알아들은 것은 아아...

그 옛날에 술탄이 자기 정부랑 바람난 놈을 찾다가 그 놈을 못 찾으니

그 날 그 궁에 있었던 36명의 남자를 모조리 죽였다는 이야기 뿐이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좀 많이 못 알아들었다고나 할까 -_-^

3_

 

4_

 

 

왕의 사적 공간, 가이드 왈 여기가 하렘입니다.

5_

 

여기는 작은 정원 :)

궁전 주변에는 정말 아름다운 정원들이 손질이 잘 된채 놓여있었다

6_

 

 

궁전 전경

7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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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말라가와 미하스

이런데 주저리 주저리 여행 사진을 올리면

마치 '싸이질'이 되는 것 같아 무척 부끄럽지만 -_-;;;; -

('나 어디 가봤어 식의 자랑질' 쿨럭)

 

며칠 전 남들 블로그에서 먹을 거랑 못 가본 데 여행 사진을 봤는데,

한마디로 환장하면서 보게 되었삼..

그리하야 나도 올려봐야지 하는 의욕이 마구마구 들어부렀다...

 

외국인들은 -_-;;; 휴가를 위해서 사는 '할리데이 애니멀'들 같은데

그 휴가 동물들을 따라 나도 난생 처음으로 스페인의 말라가 Malaga와 미하스 Mijas에 가봤다.

 

(내 마음 속의) 고양이에게는 엄청난 밥을, 여행가방에 온갖 작은 샘플들을 쳐 넣고

스페인어 '올라'를 외우면서 즐긴 일주일 여행.

 





 

 

말라가에 있는 뭐시가 해변이었는데 이름은 까 묵었지만,

중앙에 아주 큰 여자 둘의 석상이 서 있었다.

이건 뭐랄까, 레즈비언적 관계를 넘어서

쥬이쌍쓰 (여락)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서 몹시 므흣

 

-> 엄청난 인구의 게이들이 포진하고 있는 해변이었는데 

(뚜드드 '게이다' 마구 작동)

삐끼에게 걸려 들어간 한 바에서 여기가 시내의 유일한 '스트레이트 바'라는 농담조의 말도 들었다. -_- ;;;; 



 

말라가의 뭐시기 해변서 공공버스를 타고 한 시간 쯤 가면

(버스도 자주 있고 가격도 1500원 정도 함, 강추강추!!)

작은 마을 미하스가 있는데,

마치, 엽서에서 지중해 해안의 흰집들 사진을 눈 앞에서 보는 기분.

 

 


 

 


 

 


 

 

스페인의 음식, 타파 (tapa)

마치 '반찬'들처럼 여러종류가 조그만 그릇에 옹기종기 담겨있다.

다만 밥과 같이 먹지 않고 빵이랑 같이 먹는다.

김치처럼 집마다, 레스토랑마다 각기 종류랑 맛이 다르다.

아래 사진에는 오징거를 올리브 오일에 절인 거, 새우튀김을 양념통닭 양념과 비스꾸리한 것에

버무린 것, 페다치즈랑 토마토 샐러드 등이 담겨있다.


 

 

투우는 싫지만 -_-;;; (죽음에도 자비를!!)

투우경기장이 있길래 들어가봤다.

처음에는 고색창연한 옛날 투우 경기장인줄 알았는데

지금도 이주에 한번씩 여기서 투우경기가 열린다고... 쩜쩜...

말라가 해변에도, 미하스에도, 하루동안 머문 마드리드에도

투우사들의 사진과 광고, 경기일정 포스터가 지천에 깔려있었다.


헉 ;;;

스페셜 땡쓰 투, 테일러 


 

온통 흰 집들,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또한 다른 유럽에 비해 미하스는 미치도록 비싸지도 않았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 살이 빠질정도로 입맛이 '꼴보수'인 나지만

음식까지 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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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아니잖아?

 

아빠랑 나랑은 웃고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혼자 찡그리고 있다.

그 그림 아래에는 친절하고 상낭하게도

"청소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 마세요.

우리 뭐시기로 청소하면 훨씬 쉬워요,"

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

 

 



 

     노조원의 가족들이 싸운 도시락을 두고 지어미가 정성스레 싸온 도시락 어쩌고 저쩌고를 읽다보니 머리가 핑, 돌면서 (한겨레 손석춘 칼럼서 '지어미'를 보고 화들짝 놀라부렀다) 성노동자들이 투쟁하던 현장에는 누가 도시락을 싸들고 왔는지 묻게 된다. 나라고 그 도시락을 바리바리 싸고 먹을 것을 챙겨오던 심정에 마음이 핑, 하고 아프지 않겠냐만은

 

      그런 말들, 그런 말들, 아 꼬라지가 나.

 

      언젠가 KTX 여성노동자들이 투쟁하던 곳에 그녀들의 어머니가 와 있는 사진을 보고 좀 뭉클했었다. 아마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가족들이 지지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 낯설어서 그랬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쌍수들어 지지한다고 해도 남성노동자들의 투쟁에만 따라붙는 아빠 힘내세요식의 가족들의 지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하나,

얼쑤. 장하십니다. 이러고 지지하면 되는거야?

 

     나는 남성 생계부양자와 가족임금의 참상을 보는 것 같아 그저 벨꼴린 마음이 앞선다.

 

     그러다가 위의 광고를 발견했는데 역시 꼬라지를 불러일으키는 캐나다의 쌍팔년도식 광고였다. 물론 쌍팔년도에 뿌려진 광고가 아니라 2005년도 광고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빠랑 나랑은 웃고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혼자 찡그리고 있다. 그 그림 아래에는 친절하고 상낭하게도

"청소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 마세요.

우리 뭐시기로 청소하면 훨씬 쉬워요,"

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나도 '쌍팔년도'식으로 중얼거렸다.

      "염병하고 자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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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운다는 것

         

         진보넷 블로그 글들을 보니 엄마가 되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읽으면 좀 가슴이 아프다. 나는 아직 아이도 없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으니 애송이들아라는 말을 듣겠지만 (아 노래방 가고 잡다)  재작년에 여섯날 난 성현이랑 싱글맘 오정이랑 함께 살면서 한 아이를 기른다는 것을 곁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자기 손으로 자기 똥꼬를 닦을 수 있는 인간과 남이 똥꼬를 닦아줘야 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당시 여섯살에 접어든 성현이는 거의 내 몸무게의 절반이 나가는 다 커부렀네는 느낌을 주는 아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똥 싸고 나서 화장실에서 엄마, 엄마를 불렀다. 나는 부모가, 특히 엄마가 내 기저귀를 빨며 날 키운지는 알았지만 저렇게 덜컥 클 때까지 똥꼬를 닦아주면서 키운지는 몰랐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의 의미, 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그렇게 절절할 수가 없었다.

 

          박민규의 말대로 다음 세기에는 이 세계를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 줘야지라는 경건한 마음이 들어드랬다. 모두들 똥꼬를 제 손으로 닦을 때까지 그 무수한 시간들을 누군가의 헌신으로 채운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누군가는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too much work에 힘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



               며칠 전 친구들이 밤늦도록 술을 마시더니 단숨에 아이들을 키우는 화제로 슥슥 이동하였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 뭐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자기 새끼들을 대하는 자세는 어쩔 때 내게 유치하게도 질투심을 유발할 정도였는데 (나도 사랑해줘!) 그런 그들이 이젠 지쳤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Too much work,라고 영어로 이야기했는데 그네들 아이들은 고등학생, 대학생이라서 별로 손이 갈 것이 없고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상황이 좋은 캐나다 사람들임에도 그랬다. 글렌 역시 막내 딸이 19살에 접어들었지만 대학을 멀리 가서 집에 자주 오지 말라고 딸에게 말했다고, 아직도 돈들고 신경 쓰는 일이 너무 많이 남아서 힘들다, 라고 말했다. 그냥 이 사람들이 내가 아는 그 사람들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밤이었고,

그리고, 좀 짠, 했다.

          내 하우스메이트였던 휴지는 논문을 써야함에도 불구하고, 또 휴지통과의 끈끈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에 있는 아달과 1년을 보내기 위해서 올 6월에 한국을 떴다. 지난번 하우스메이트였던 오정은 물론 자기 욕심도 있었겠지만 아달 성현이에게 자기가 겪은 고생을 안 하게 해주고 싶다며 8살난 그 놈 손을 잡고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갔다. 나랑 함께 살 때 오정은 그런 말을 했었다. 아무리 다 잡으려 해도 이혼한 것 때문에 성현이에게 상처준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린다고 말이다. 아마 영어를 솰라솰라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기회들을 성현이에게 주는 것으로서 좀 위로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쳇, 돈도 없음시롱 방값 보증금 빼서 가면 어쩌란거야??) 

          언젠가 내 친구, 씨앗이 잡지사에서 편집일을 하다가 아이를 낳고 일을 잠시 쉬고 있는 선배를 찾아갔던 이야기를 했다. 나름 평등 결혼이런 것을 하고 나름 의식있는 부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 그 언니를 공적인 자리에서 찾을 수가 없어졌다. 씨앗이 그 집으로 찾아갔던 날,  언니는 씨앗을 배웅하면서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서는  집 밖에 나온 것이 오늘 처음이야, 라고 했다. 씨앗과 헤어지는 순간, 이야기를 하는 순간,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는 순간, 순간순간 그녀는 유모차의 손잡이를 잡고 앞 뒤로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진보넷 블로그 글들을 보니 엄마가 되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읽으면 좀 가슴이 아프다. 나는 아직 아이도 없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으니 애송이들아라는 말을 듣겠지만 재작년에 성현이랑 오정이랑 함께 살면서 한 아이를 기른다는 것을 곁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자기 손으로 자기 똥꼬를 닦을 수 있는 인간과 남이 똥꼬를 닦아줘야 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당시 여섯살에 접어든 성현이는 거의 내 몸무게의 절반이 나가는 다 커부렀네는 느낌을 주는 아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똥 싸고 나서 화장실에서 엄마, 엄마를 불렀다. 나는 부모가, 특히 엄마가 내 기저귀를 빨며 날 키운지는 알았지만 저렇게 덜컥 클 때까지 똥꼬를 닦아주면서 키운지는 몰랐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의 의미, 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너무 무거웠다.

 

          박민규의 말대로 다음 세기에는 이 세계를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 줘야지라는 경건한 마음이 들어드랬다. 모두들 똥꼬를 제 손으로 닦을 때까지 그 무수한 시간들을 누군가의 헌신으로 채운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누군가는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too much work에 힘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노동이 한 사람의 여성이나 한 쌍의 핵가족 부부에게만 전가되는 한 사람들은 존재들을 키워가는 것에 진절머리를 치게 된다. 그건 ‘4인용 식탁에 나오는 장면처럼 젖 달라고 기어오는 아이들이 그악스럽게 느껴지면서 자기 새끼를 베란다 아래로 떨어뜨릴만한 고통일지 모른다. 그 뭐신긴가의 말처럼 (아프리카 속담에서 왔다고 했던가, 암튼 고들리에 책에서 봤으)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

 

 

(이렇게 알았으면서도  함께 살때 성현이 구박하고 혼내고 그랬던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네 그랴 -_-;;;; 뉴질랜드에서 잘 지내라옹, 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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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naslated woman


 

Women's Studies/ Anthropology/ South America

 

Ruth Beher. 1993 Translated woman: crossing the boder with Esperanza’s story. Beacon press.

 

 >> 번역은 반역이다

   오래전 이탈리아 사람들은 번역은 반역이다”이라는 말로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어 옮기는 일의 난감함을 토로했다. (권용선2003:5) 이 난감함은 언어들 간의 변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문자로 쓰여진 텍스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 오감을 통해 감각되는 것을 지각하는 일, 대화를 나누고 정서를 교감하는 일 또한 번역(translation)에 포함된다.(Ibid., 5) 하나의 문장을 읽어내는 데에 무수한 각주와 해석과 설명이 동원되는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외부와 만날 때 그 나름의 경험과 지식과 취향을 개입시킨다. 공통감각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번역은,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불통과 불화의 선 뿐만 아니라 소통과 화해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반역의 작업이다. (Ibid., 5) 

 

이 책은 에스페란자와 베하가 나누었던 대화, 번역, 그리고 반역에 대한 글이다.



   I. 에스페란자 이야기, 그녀의 구술사

 

   내가 동네 아줌마들에게 처음 들었던 에스페란자는 남편의 눈을 멀게 할 만큼 독하고 사납고 거칠고, 몰염치의 아성으로 굳어져 있는 그런 아줌마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불렀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그림 속에 나온 그 인디언 여자를 떠올렸다.

   우리는 1985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작고 허름한 집에서 나는 민트향의 냄새를 맡으며 역시 작고 허름한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말이다. 때로는 지겹고 잠이 쏟아지고 황당해서 후딱 깨기도하면서 수많은 밤을, 몇 년간 지속되었던(1990년 초까지) 그 무수한 밤을 그렇게 지새웠다. 에스페란자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귀를 기울인다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짜로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다.

 

   에스페란자의 이야기는, 말들은 끊어지고 반복된다. 처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컬러퍼플(The Color Purple)의 주인공 씰리를 떠올렸다.

   "아빠는 엄마를 마구 팼어. 다섯 살 땐가 여섯 살 땐가의 기억인데 우리들 보는 앞에서 엄마 머리채를 끌고나와 마구 발로 찼어. 엄마를 마체테(machete)로 패고 나서 마마가 널 부러지면 우리들을 팼어. 아빠가 때리고 나서 집을 나가면 마마는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늘어놓았어.

나는 마마가 겪었던 삶을 기억해, 그것은 바로 인디언 여자들의 깜깜한 삶이었어. (black life)"

 

   에스페란자 역시 인디언 여자들의 깜깜한 삶을 살게 된다.

 "나는 울 엄마처럼 남편한테 마체테로 머리를 맞았어. 그 놈은 취해서 울 엄마를 남편도 버리고 도망간 창녀 같은 년, 너도 니 엄마랑 똑 같은 년이라고 했어맞는 순간 핫, 했어. 피가 바닥으로 흘렀어. 아이를 꼭 안고 있었어. 그 때 나는 울었어. 그 때 맞은 곳이 여전히 뜨거워. 아직도 코라제(coraje, 화)를 느끼면 그 곳이 불 붙는 것처럼 아파, 너무 아파."  나는 에스페란자의 머리와 이마에 여전히 남아있는 흉터를 기억한다.

 

   II. Literary Wetback (미국에 불법입국하는 멕시코 인을 경멸적으로 칭하는 용어)

 

    II-1. 실제세계 

   

   “재현은 재현되는 주체에 대한 폭력을 포함하는 작업이다.” 

    사이드(Said)

   

   멕시코의 작은 집에서 풍기는 민트 향의 냄새를 맡으며 식탁 넘어 손을 꼽을 수 없을 만큼의 밤을 보냈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신식민주의가 만들어 낸 국제적 노동 분업 안에서, 그 정치적 자장 안에서 우리는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 에스페란자도,나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문화를 번역하는 작업은 세 살난 내 아들 가브리엘이 멕시코의 다섯 살 배기 동네 애들보다 더 발육상태가 좋다는 현실에서 미끄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행상 다니면서 이것 저것 얻어먹고 남긴 음식 받아오는 나를 보고 거지라고 해. 하지만 자기, 내가 너한테서 뭘 빼앗았어?"

   그녀의 행상을 따라 나선 날 아침, 에스페란자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그 날 거리를 나란히 걷는 우리들만큼 기묘하게 보이는 것도 없었다. 레이밴 선글라스에 카메라 가방을 들고 스웨터를 입은 미국여성과 인디언 복장에 앞치마를 두르고 어깨에 넝마 같은 바구니를 이고 가는 에스페란자.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리가 에스페란자네 식탁에서 백 만번의 대화를 하고 그 시간을 공유한다고 해도 여기는 실제세계였다. 인종적, 계급적 경계가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함께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그 거리에서 조용히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환상일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나를 타고 여기저기의 경계를 넘겠지만 실제의 그녀는 국경선에서 저지당할 것이다. 혹은 고작 해야 미국의 미등록 불법가내 노동자로 비참하게 국경을 넘어야 할 것이다. 에스페란자는 책을 통해 자신(self)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될 저기에서 멕시코 사람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취급당하고 또 얼마나 비참하게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수많은 밤, 아직도 가물가물해지지 않는 기억 속의 그 밤들을 통해 경계를 넘었다고 믿었다면, 에스페란자, 그것은 기만일까?

 

   II-2. 여기, 그리고 저기

 

   “동네 여자들한테는 말하지마에스페란자가 간곡히 이야기했다.

   “저 곳 (over there)에서만 영어로 출판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저 곳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요?”  얼떨결에 에스페란자의 의견을 묻는다.

   “재미없을 거야, 별로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런 말이 있잖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못 느끼는 거 (eyes that don’t see, heart that doesn’t feel)”

   “왜 동네 아줌마들한테 그렇게 비밀로 해야 해요?”

  “나는 멕시코 사람들이 미국에 건너가 몸을 팔아 먹고 사는 것처럼, 여기서 말을 판 거야. 여기서는 어디서도 쓸데 없는 말들을 풀어서, 이런 이야기 거기서는 못 구하는 거잖아. 그런 말들을 판 거야.”

 

   III-3. 진실 혹은 거짓

 

   에스페란자가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 했는지는 나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른다. 아마 극적인 사건을 더 강조했을 것이고 자신의 섹슈얼리티 같은 민감한 문제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으며 어떤 사건은 부풀렸을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의 섹슈얼리티, 관계, 욕망 보다는 그녀의 고통, 그녀가 당한 물리적 폭력, 그리고 그녀의 분노, 종교적 관념이나 의례 등이 더 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그녀에  의해 한 꺼풀 걸러진 삶에 관한 것이다.

   에누리없이 말하자면, 삶에 진실된버전 같은 것은 없다. (there is no true verstion of a life, after all) 그저 삶에 대해서, 삶의 주변을 서성이는 이야기만이 존재할 뿐이다.(There are only stories told about and around a life)

    내가 에스페란자 이야기를 믿느냐고? 내 교육적 배경을 업고서 책이 출간된다면 그녀의 이야기는 진짜가 되겠지.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녀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는 묻혀질 것이다. 에스페란자와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잠든 후 그녀의 작은 식탁에 모였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나에게 해 준 이야기는 다른세상의 사람들에게 보여지기위한 버전의 이야기일 뿐인가?

   에스페란자의 이야기는 생애사(life history) 인가 그저 이야기(life story) 인가? 논픽션인가 아니며 픽션에 해당하는가?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스페인어를 그대로 사용해 historia 라고 칭할 것이다. Historia는 히스토리와 스토리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넘나드는 단어이다.

 

   III-4. 보이는 대상, 보는 주체 (타자화)

 

   페미니즘의 이론화는 분명히 민족지적 기술을 재고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정체성이나 자기/타자 관계의 역사적, 정치적인 구축을 문제로 삼는다. (마커스)

 

   아더 문비 (Arthur Munby)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은 자신의 하녀였던 한나쿨윅 (Hannah Cullwick)천한일들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녀의 사진을 찍고 그녀의 일기를 읽어보는 것을 즐겼다. 그녀는 일기장에 자신의 이야기를 적었는데 이는 그의 주인의 뜻에 따라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문자가 없는여성들의 이야기를 구술사라는 이름으로 정리해갔지만 그들이 우리 시선(gaze)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 그들이 기꺼이 보여지는 주체로서 역할 했다는 사실은 많이 간과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아더 문비의 작업을 도돌이표하고 있는 것일까?

  로잘도는(Renato Rosaldo) 인류학자들은 생애사를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문자없는 여성들 앞에 녹음기를 들이대면서 그들의 삶에 대해서 진짜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물었다. 인간이 고통을 느끼고 표현하고 인정하고 공감하는 행위는 그 사회의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정희진 2002:54) 고통을 보는 작업, 그들의 고통을 느끼는 작업, 그리고 자기와 타자 관계의 구축하는 작업은 보이는 대상과 보는 주체 사이의 정치학을 포함한다.

 

   더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여지는사람이 더 상처받는다.

   그래서 타자화되는 존재들은 상처 받기 쉬운 위치에 놓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주체는 견고한 위치에서 그들을 재단한다. 나는 바라보는 민족지 학자이고 에스페란자는 나의 시선에 의해서 타자화되는 존재이다. 나는 내 콤마드레, 에스페란자의 historia를 내게 반사해 내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통로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통해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아와 타아와 섞인다는 것은, 말만큼 멋진 작업은 아니다. 특히 다른 세계에 속한 여성들이 함께 작업하는 것은 그만큼의 불협화음을 포함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인류학은 이제 온전히 이러한 불협화음을 껴안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름없는 페미니즘과 너무 이름을 가진 나의 페미니즘 사이에서, 나는 이제 에스페란자가 아니라 나를 번역(translating)한다.

 

   III. 에스페란자, 희망

  

    그 시절, 온갖 매체에서 베를린 장면이 무너지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자료를 정리하고 있을 때, 사회주의 국가에 살던 사람들이 서구의 자동차와 아파트를 사탕 가게에서 알록달록한 사탕들을 쳐다보는 아이들처럼 바라보는 사진이 뉴욕타임즈를 장식했다. 하지만 멕시코에서는 국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미국에서 사용된 일회용 기저귀가 시장에서 새 기저귀로 팔리고, 사람들은 쉬쉬하면서 저기에서 온 산업페기물이 싸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살아있는 시체’ (living dead)라고 불렀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선이 전쟁터처럼 되어가고 있었고, 불법으로 미국에 침입한 외부인(illegal aliens)에 대한 기사가 넘쳐 났다고, 나는 그 시절을 그렇게 기억한다.

   당시 남편과 나는 현지조사를 위해 국경을 넘을 때 달러를 건네면서 관광객이라고 말했다. 멕시코로 들어갈 때 솔직하게 신원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요구하는지 알게 되면서 체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우리가 사실은 관광객이 아닐까 의심한다. 학계적인 관광객, 말이다. (academic tourist)

 

   이 책은 1991 5월에서 8월 사이에 쓰였다. 엉덩이에 땀띠가 날만큼 책상 앞에 앉아있는 동안 얼마나 에스페란자네 식탁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그 해 9월 출판을 준비했고, 11월 에스페란자에게서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콤마드레, 멕시코에서 나와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바래요. 당신이 멕시코에 다시 올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게 그 책이 팔렸으면 해요. 내 이야기를 번역할 수 있는 권한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부디 이 이야기가 불법 외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로 읽혀지길 바란다. 또한 멕시코 남성들의 '원초적 가부장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녀의 삶이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에스페란자가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인 여성과 아이들 이외에는 어떤 것도 손에 쥘 수 없었던, 절망적인 멕시코 하층 계급 남성들의 '더 약한 자를 향한 폭력'이 구조적인 폭력 속에서 이해될 수 있기를 바란다. 비록 멕시코 남성들의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 책에 나온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에스페란자는 그녀 스스로 만든 가명이다. 에스페란자는 스페인어로 희망을 뜻한다.

 

권용선. 2003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그린비

정희진. 2002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또 하나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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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심기

도자기를 만드는 내 룸메이트 선주가

'흙을 만지는 기분' 어쩌고 저쩌고 했을 때는 별 실감도 안 났는데

난생 처음으로 작은 나무를 땅에 심고 고이고이 물을 주고 탱탱 영글어가는

고추를 보니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면서 마구 좋아.

 

반육식주의자라고 떠들고다닌지 (그래야 비자발적으로라도 안 먹을 수 있으니까 -_-;;)

까무룩할만큼 오래되었지만

둘둘치킨 앞에서 '컹컹' 코를 낼름낼름거리고

미리 만들어진 1000원 김밥을 사 먹음시롱 '어쩔 수 없이' 햄을 먹는다고 하면서

(버리는 건 더 큰 환경오염이여, 뭐 이런 식으로)

'구공탄 굴뚝 연기에 향수를 느끼는' 비둘기처럼 햄 향기를 느끼던

나이지만,

 

내가 먹을 고추를 땅에 심고 바라보고 애정을 듬뿍 주고 함께 여름을 보내고 있자니

채식이 더 큰 기쁨!!

 

<체리 고추> 동그란 고추 속에 씨앗이 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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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xtra.ca

작년 토론토 게이 퍼레이드 사진들,

엑스트라에서 격주로 발간하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에서 찾아내 찍은 사진들

뿌옇고 흐리고 연하지만,

에너지는 넘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이 나와 있으니.

 

올해 토론토 게이퍼레이드 사진은

http://www.xtra.ca/pridepix/default.html 에서 선명하고 확실하게 보삼.

 

 

 

무슨 연유로 '섹스워크'가 나와있는지 모른 채 그저 난감;;;





 

아아, 다 좋다고.

그런데 신문을 암만 들춰봐도 광고든 기사든

게이들만 우글우글 거리는 것 같았다. 울룩불룩 근육질 남자들이 깔려있는 광고판.

그 많던 레즈비언 언니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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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Carson, Rachel

                  2002 『침묵의 봄』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로.

 

 

한참 거실에서 디브이디 참을 없는 존재의 무거움 보고 있는데 방귀 냄새 킁킁!!

마치 우당탕탕 괴짜 가족의 국회의원 뒷마당에 들어와 막대한 똥을 같았다.

아니 미녀는 괴로워 나오는 뚱녀 변기에 산처럼 쌓인 자신의 똥을

젖가락으로 끊어서 물을 흘려보내는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뒷마당에는 뚱녀 국회의원 아닌

스컹크가 들어와 방귀를 , 뀌고 간거라고 엄이 설명해줬다.

시멘트만 들어찬 서울에서 스컹크는 커녕

비둘기와 고양이 이외의 동물도 보기 힘들고 흙을 밟아보기도 어렵다.

시멘트로 둘러쌓인 아파트 안에는 바퀴벌레와 모기를 쫓는 그 거시기들과,

물먹는 하마, 뽀드득 아주 야무지게도 닦이는 세정제 그런 것들이 마구 있다.

스컹크가 뒷마당에 와서 방귀 끼고 가는 캐나다에 들어앉아 침묵의 봄을 읽으면서,

스컹크 방귀 냄새보다도 독하고 심한 날마다의 생활에 야리꾸리한 감상에 젖었다.

이런 기분은 티벳의 라마승들이

살아있는 작은 모든 것들을 나도 모르는 새에 밟을까봐 봄철에는 발걸음을 되도록 자제한다는 다큐먼터리를 봤을 느꼈던 그런 것이랑도 비슷했다.  

나는 한번도 바퀴벌레를 죽이는 살충제 쓰면서 죄책감을 느껴본 없고 살충제 성분이 무엇인지 궁금해 적도 없었다.

 

아주 추상적으로,

너무 많이 쓰고 많이 가지고 많이 탐내고 그러는 나도 모르게 환경을 파괴하고

그래도 도시생활에서는 어쩔 없고,

그러다가 대안 생리대를 쓰거나 텀블러를 들고다니거나 재활용을 똑소리나게 하는 것으로

자기를 위로하고,

그러다가 쓸데없는 인생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것들이 쓰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이 들고는 그랬다.

존재가 참을 없을 만큼 무거웠다.

 


 


읽을 때는 방만한 증거 자료들에 조금 질리기도 해서 (도대체 살충제는 그렇게 끝이 없이 많고 해악도 그렇게 끝이 없이 많은지)

카슨이 방사능 효능을 들먹이면서 살충제의 해악을 이야기하는지 몰랐는데

후기를 보니 카슨이 비밀 핵실험과 핵비축이라는 장막에 대항하기 위해 책을 썼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녀는 미국 육군이 비키니 섬에서 실시한 원자폭탄 실험의 세부적인 내용을 감추려 연구를 시작해서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핵전쟁이 일어나려는 찰라에 연구내용을 발표했다. (p 337)

(>///< 언니 최고로 멋져!!)

그녀는 박사학위를 갖지 않았다는 점과

어떤 단체나 기관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는 때문에 거의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살충제만큼 독한 화학살충제 기업들과 그에 연루된 박사 학위 가진 과학자들의 공격에 많이도 당했다.

그녀에게 가장 불리하게 작용했던 사실은 대중을 위해 글을 과학자라는 점과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p339)

과학자들과 저널리스트들과 평론가들은 카슨을 감정을 호소하는 단어 사용하는 히스테릭한 여성이며 지나치게 섬세한 본성의 소유자이고 그녀가 책은 자신이 저주하는 살충제보다 독하다 말했다.(p 339)

의학전문 평론가인 빈은(William B.Bean)

“<<침묵의 >> 읽으면 여성과 논쟁을 벌여 이길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라고 말했다. 농무부 장관은 공식적으로 아이도 없는 독신녀가 유전학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라는 의문을 표현하기도 했다.(p340)

이런 놈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이른 나이에 암에 걸리고 회복하지 못한 것이 아닌라는 생각에 분노 게이지 부르르.

 

그들에게는 

"목축업자에게는 초원을 찾아다닐 권리가 있고

나무꾼에게는 벌목을 권리가 있듯이

누군가에게 야생들꽃을 즐기는 것이 도저히 포기할 없는 권리이기도 하다. (p94)"

라는 투의 그녀의 문장이 지극히도 '계집애'스럽고 '비과학적'이고 넌저머리날 만큼 '몰상식하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카슨의 지극히도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이 기록은

가슴을 찡,하게 만들고, 그 수없이 쏟아지는 구구절절한 증거들에 압박당하는 느낌을 준다.

 

책을 보는 내내 한 가지 걸렸던 점은

인간은 도자기 진열장에 들어간 코끼리처럼 자연을 짓밟고 있다 사실에 민감했던

그녀의 책에 동물 실험의 결과들이 너무 태연자약하게 나와 있었다는 점이다.

실험동물들에 대해서 죽음에도 자비를라는 입장과 실험동물자체에 대한 의문이 켜져가고 있는 시점에서 살충제 해악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많은 실험동물들을 생각하니

짚신벌레 위에 있는인간이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지

존재가 한없이 무거워져버렸다.

(물론 카슨이 동물실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책에 나와있지 않다.

그녀는 그저 동물실험 결과들을 들이대면서 살충제의 해악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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