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가 담긴 웃음들

경계를 넘어 2006/03/10 22:50

활동가들은 세계 어디에나 비슷한 것 같다.

특히 지겹도록 회의를 많이 한다는 점에서는 거의 똑같다.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해, 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땅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농사를 지으며 살기 위해 운동을 하는 이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활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시간만 나면 회의를 한다.

 

그래서 내가 한 친구에게 말했다.

회의 좀 그만하자는 시위라도 벌여야겠다고.

당장 피켓팅이라도 해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좋은 생각이란다.

그러더니 곧 다시 이런다.

 

"그럴려면, 항의 행동을 하려면 또 회의를 해야 해.

누군가는 배너를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보도자료를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홍보를 해야 하고, 일을 나누어서 하려면 회의를 해야 하니까, 몇 시에 만날까?"

 

오, 이런.

우리들은 한참을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 국제회의에 인도네시아 친구들도 많이 왔다.

이들은 한국의 농민운동가들과 매우 친하게 지낸다.

한국에도 여러 번 와본 적이 있고, 작년 12월에는 모두들 홍콩에 몰려가 WTO를 무너뜨리기 위해 함께 싸운 친구들이다.

이곳 포르투 알레그에서 3.8 여성의 날 행진에 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그 가운데 아시아 지역에서 온 사람은 극소수였다.

나와 인도네시아 친구들, 네팔과 인도에서 온 친구들 몇몇이 전부였다.

그래서 아마 더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더 친밀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 친구들이 내게 깜짝 선물이 있다면서 식사시간에 날 불렀다.

 

한 명이 가방에서 1kg 짜리 '농협 김치'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오랜만에 김치를 먹었다.

 

인도네시아 말로 사람을 만나서 하는 '안녕하세요'를 뭐라고 하냐고 물어보니까 '아빠까바'라고 가르쳐주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몇 번 인도네시아 친구들에게 그 말로 인사를 하다가 순간, 그 말뜻이 한국어로 해석이 되어서 다시 배꼽을 잡고 웃었다.

거의 10분을 넘게 혼자서 정말 체한 것이 다 내려가도록 웃어제꼈다.

 

아빠 까바!

그래 어디 한번 까보자.

 

이곳에서 나는 많이 웃는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이들도 많이 서로를 챙겨주며 정겨워한다.

 

내 짐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마치 아이가 된 기분으로 당황하던 나를 위해 이들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도와주었다.

정말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아무런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이 활동가 친구들밖에 없다.

 

서양에서 특히 돈이 오고가는 비즈니스 거래는 무조건 서류를 통해 이뤄진다.

서명을 한 서류가 있어야 항공사에 항의도 하고 고소도 하고 뭐든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해주겠다'는 말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서류가 없으면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도 괜찮다.

모조리 잃어버려도,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해도 괜찮다.

서류는 하나도 없지만 이곳 활동가들이 다 괜찮을 것이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나는 서류는 믿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억압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세상을 바꾸자고 같이 활동하는 농민들의 말은 철저히 믿는다.

 

깊은 신뢰를 담아 보내는 나의 웃음을 이들은 얼마나 이해할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
2006/03/10 22:50 2006/03/10 22:50
tags :
Trackback 0 : Comments 3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dopehead/trackback/329

  1. 허용만 2006/03/13 11:11 Modify/Delete Reply

    브라질 가는걸 몰랐다가 사람들한테 들어서 알았어요. 가방을 잃어버려서 어떡해요..갔다오면 많은 이야기 들여주세요. 참, 언제 한국에 들어오시나요? 울진에서 새만금,평택,이라크 전쟁 3주년을 맞아 이번주(3/13~19)생명평화주간 행사를 하는데 3월 17일에 노래부르시는 분들이 왔으면 하는데요. 그날 시간이 되시면 함께 갔으면 해서요. 가능한대로 답변 부탁드릴께요. 울진에 가서 갔다온 이야기도 나누면 좋을듯 해서요..

  2. 2006/03/14 04:33 Modify/Delete Reply

    3월 13일 늦은 밤에 도착했어요. 아직 일정을 천천히 확인해보지 않았는데, 앞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하도 많아서 지금 정신이 없네요. 저는 지금 대추리로 들어가려고 하고요, 평택과 새만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일정을 조정해가려고 해요.
    3월 17일에 울진에 갔다가 3월 18일에 서울 평화난장에 갔다가 3월 19일에 새만금 집중행동에 가려면 차를 타고 계속 이동해야겠네요.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울진으로 평택으로 서울로 새만금으로 이동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네요.
    하여간 상황을 보면서 일정을 조정해서 최대한 저도 3월 17일에 울진에 가보도록 할께요.

  3. 허용만 2006/03/14 11:49 Modify/Delete Reply

    돌아왔군요..^^요즈음 평택,새만금 문제때문에 정신없죠..17일 울진가서 당일날 늦게라도 다시 서울로 올라오려고 합니다(그럼 18일 토요일 새벽에 서울 떨어지겠죠)..18일에 난장 참가하고 저녁에 새만금으로 출발하려고 하는데..하여튼 조약골님이 가능할때 함께가요..금요일 울진 출발시간은 오전 9시 30분 합정역 8번출구입니다..연락주세용..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