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할인매장에 가지 않아야 자유무역협정을 막을 수 있다

나의 화분 2007/05/25 02:10
나는 평택 대추리에 살다가 지난 4월 초 마을에서 강제로 쫓겨난 뒤 지금은 서울 변두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마을과 도시의 생활은 여러 모로 다르지만 내가 피부로 느끼는 가장 큰 차이라면 마을에서는 사지 않아도 구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도시에서는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점이다. 채소를 비롯한 먹거리를 직접 길러 먹을 땅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제든 가기만 하면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대형 할인점들이 도시 곳곳에 늘어서 있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비중독에 걸리기 일쑤다. 최저 생활비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벌이로 살림살이를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최적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광고를 완전히 무시하기란 솔직히 힘들었다. 그래서 도시 생활에 적응도 해볼 겸 몇 번 대형 할인점에 가보기도 했다.

먼저 놀라웠던 것은 매장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었다. 아파트 단지가 있는 곳에는 거의 반드시 이 대형 할인점이 있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아파트와 할인매장을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본 이웃을 하루에도 몇 번씩 아파트 단지 내에서 만나고, 매장에서 다시 만나기도 하겠지. 주말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다시 마주칠 수도 있을 거야. 어쩌면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이렇게 비슷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자동차를 타고 할인점에 가서 쇼핑을 한 뒤 병원에 들러 검진을 받고, 보험료를 납입하고는 다시 아파트로 돌아오는 삶이 무한정 반복되는 것 같았다. 나도 이런 흐름에 휩쓸려 점점 세계경제에 의존적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대추리에 살던 사람들은 땅에 의존해 살았다. 나무와 풀과 밭과 냇물에 의지해 삶을 지탱해왔던 것이다. 도시인들은 땅에서 쫓겨나 사무실 안으로 버려진 채 모두가 같은 시각에 출근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락 주민들이 해가 뜨면 저마다 일어나 밥을 먹고 각자 논밭으로 나가 일을 하는데 비해 도시인들은 모두가 같은 시각에 회사에 출근해야만 한다. 이에 따라 모두의 삶이 획일화되고 규격화된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한 건물에 길게 모여 살다보니 규격화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되었고, 생활공간 역시 공장에서 만들어진 생산품처럼 모두가 똑같은 형태로 맞춰지게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장점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모두 획일적으로 짜여진 곳에 살게 되었기에 튀지 않고, 남의 눈에 띄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교복을 입혀놓은 학생들처럼 아파트라는 곳에는 익명성이 존재한다. 차이가 있다면 몇 동 몇 호 몇 평 등 숫자뿐이다. 이제 도시인은 숫자로 인식된다.

그들이 대형 할인매장에 가면 숫자의 차이마저도 소멸한다. 남이 무엇을 사든 질투할 필요가 없다. 나 역시 똑같은 품질의 제품을 똑같은 가격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살 수 있으니까. 돈이 없어 문제지 상품은 언제든 거기 앉아 날 기다릴 것이다. 장애인이라고 이주노동자라고 성소수자라고 더 비싼 가격을 물지 않아도 되고, 더 후진 제품을 강요당하지 않아도 된다. 그 탐욕의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내 지갑만을 호시탐탐 노리는 상품들 앞에서 누구든 평등한 존재가 되어버린 대형 할인매장은 이 땅 민주주의 최대 수혜자인 셈이다.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을 안 할 수 있다’던 권정생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아마도 ‘대형 할인매장에 가지 않아야 자유무역협정을 막을 수 있다’고 하셨을 것 같다. 밝은 대낮에도 휘황찬란한 조명이 빛을 발하는 매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싼 상품을 찾아 헤매는 지금 내 삶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세계 자본주의체제라는 수렁에 더욱 깊숙이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지역 공동체의 자립체제를 대안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늘부터라도 대형 할인점에 가지 않아야 겠다. 아니, 약간만 더 솔직해지자.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내 경제사정을 고려해 한 달에 딱 하루만 정해서 대형 할인매장에 가는 날로 삼아야겠다.

찌니님의 [대형할인마트 안가기]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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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5 02:10 2007/05/25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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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acked from 2007/05/25 14:36 DELETE

    Subject: 펌 -- 음.......... 김지훈...control ....

    돕헤드님의 [대형 할인매장에 가지 않아야 자유무역협정을 막을 수 있다] 에 관련된 글. 돕님의 글은 제가 시나리오를 쓰는데 많은 영감을 주시는군요.
  1. 찌니 2007/05/25 15:06 Modify/Delete Reply

    아... 블로그에 올리셨다는 이야긴줄알고 엊그제 와서 뒤지다가...힝... 제가 원래 인터넷에서 뭘 잘 못찾는편이라.. 알고보니...다른 곳에 올리셨다는...참, 말귀도 잘 못알아듣고... 잘 읽고 갑니다.

  2. 2007/05/25 15:39 Modify/Delete Reply

    아니에요. 다른 곳에 올리려고 쓰긴 썼는데, 그냥 그곳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여기에 올린 거에요. 제가 올리기도 전에 글을 썼다고 해서 괜히 혼란스럽게 해드렸나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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