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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책장. 일부
    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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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애인이 옛 애인을 만난다면-(6)
    나은

리틀 칠드런

  • 등록일
    2007/02/27 18:49
  • 수정일
    2007/02/27 18:49

인터넷 뉴스 기사를 보다 딱 두 단어를 보고 충동적으로 보기로 결심한 영화.

"불륜"

"유아기"

 

영화를 보는데 어쩜 또 이런 대사가 나오던지.

"내가 자초했어. 입을 꿰매버려야 해"

 

한편 결말은 진부한 나레이션으로 끝난다.

"과거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미래에는 더 잘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지금 달라져야 한다..." 이런 식.



  현대의 어른들, 불륜으로 성장한다?
  [뷰 포인트] 불륜에 관한 흥미로운 해석, <리틀 칠드런>
 
  2007-02-26 오전 9:53:28
 
   
 
 
  
소리소문없이 개봉돼 서울 대학로에 있는 예술영화전용관 하이퍼텍 나다에서 상영중인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영화 <리틀 칠드런>이 국내 영화팬들에게 조용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단관개봉 영화여서 많은 영화팬들을 만나지 못해 아쉽지만 뛰어난 작품성과 배우들의 돋보이는 연기력에 대한 입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 영화의 내용은 무엇인지, 어떤 점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알아 본다. - 편집자

  나체를 드러낸 두 주연배우의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는 제목이 정면 충돌하는 포스터를 내세운 영화 <리틀 칠드런>은 인간 행위에 있어 그 역사가 유구한 대표적 금기 중 하나인 '불륜'이라는 행위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해석을 제공한다. 불륜을 다룬 기존의 텍스트들이 가장 흔하게 취한 입장이 열정적, 비극적 로맨티시즘을 극도로 과장하는 것이고, 그보다 좀 냉정한 입장에서는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에 대한 일탈 욕망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가 취하는 입장은, 오히려 성장을 유예당한 현대 '어른아이'들이 겪는 성장통 중 하나로 불륜을 가정하는 것이다.
  
 
리틀 칠드런 ⓒ프레시안무비

  근대 산업사회, 그리고 대도시 중심 사회로 이행한 뒤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망망대해 위에 나무판자 하나와 함께 떠 있는" 존재임을 자각한 현대인들이 맞게 된 딜레마 중 하나는 이것이다. 사춘기가 점점 길어진다는 것. 기술과 의학이 발전하고 사회가 점차 고단위 자본주의화가 진행될수록 무한경쟁과 저성장, 고령화가 함께 진행된다. 전통적인 농촌사회에서 이미 '성인'이자 '어른'이었던 이들이 이런 사회에서는 여전히 '젊은이'로 분류되고, 몸의 성장은 이미 10대 때 다 겪었음에도 정신적 사춘기는 20대를 넘어 30대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20대부터 성인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자신이 "성인의 몸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현대인들 중 절대다수가 "신경쇠약 직전"의 공포와 불안을 느끼며 끊임없이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자아 확립이 지상 과제인 사춘기 소년, 소녀들이 또래집단과 선배, 혹은 멘토를 통해 자아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이 욕망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인정해주는 다른 존재에 대한 동일시와 합일의 욕망으로 진화한다.
  
  <리틀 칠드런>의 주인공들이 바로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문제를 겪고있는 사람들이다. 그 누가 알겠는가, 아무리 봐도 애까지 딸린 아줌마, 아저씨가 정작 스스로를 '아이'로 여기며 두려움에 떨고있는 속마음을. 비록 겉으로는 아닌 척, 고상한 척, 능숙한 척 한다 하더라도. 사회적 성취를 꿈꿀 수 있고 그 기회가 열린 사회가 됐지만 여전히 출산과 양육의 의무에서 해방되지 못했기에 결국 자신의 꿈을 접으며 결핍을 느끼고 있는 여성, 자신이 능력있는 숫컷임을 스스로와 주변인들에게 증명하지 못한 남성은 자신의 존재목적을 확인하고 싶은 이른바 '자아 확인'의 욕망에 시달린다. 이 욕망은 자신의 생활 반경 바깥에 있는 이성 중 우연한 '접촉'을 공유한 상대와 물질적 – 육체적 교류를 욕망하는 형태, 즉 '불륜'의 모습으로 표면화한다. 여기에 감독은 소아성애자 로니 맥고비(재키 얼 헤일리)를 등장시켜 외적으로는 영화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시키는 한편 내적으로는 욕망이 유아기에 고착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이들이 겪고 있는 딜레마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리틀 칠드런 ⓒ프레시안무비
 

  에로틱한 탕녀 혹은 남자들에게 끌려다닌 줏대없는 여성의 대명사 정도로나 여겨지곤 하는 보바리 부인에 대하여, 영화의 주인공 새라는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여성'으로 해석한다. 브래드와의 불륜은 새라에게 있어 지나가는 짧은 호기심이나 일탈의 욕구, 혹은 쾌락의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처절할 정도로 절박한 자기 확인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새라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은 브래드가 유일하기 때문에, 그를 향한 새라의 욕망은 더욱 집요해질 수밖에 없다. 주말 휴가를 떠나는 브래드를 새라가 몰래 훔쳐보는 장면, 브래드가 풋볼경기에서 터치다운으로 역전을 이룰 때 어느 순간 나타나 환호하는 새라와 이를 본 브래드의 표정에 일순간 스쳐지나가는 당혹감을 묘사하는 장면을 상기해 보라. 약간 유머러스한 감각으로 묘사된 이 장면들은 새라의 소녀적 측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새라에 대한 브래드의 욕망은 새라와는 달리 그렇게까지 절실하지 않다. 그는 새라를 아름답고 능력있는 아내 캐시(제니퍼 코넬리)와 끊임없이 비교한다. 이는 그가 새라 외에도 여러 가지 통로로 자신의 자아 확인 욕망을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캐시로부터 소외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오히려 그의 바람을 감지한 그녀와 장모로부터 감시를 당한다), 원치 않음에도 친근하게 접근하는 래리(노아 에머릭)가 있고, 그를 통해 풋볼팀에 소속되며, 일정한 성취를 통해 풋볼팀에서의 소속감을 확실하게 인정받는다. 그러니 '도망치기로 한' 그 날 밤 집을 나선 그가 자신을 부르는 스케이트 보더들에게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정신을 빼앗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는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이 장면에서의 브래드는 주책맞고 철딱써니 없게 묘사된다.) 새라를 향한 그의 욕망에는 새라만큼의 절박성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애초에 그가 '자신의 취향이 아님에도' 새라를 욕망하게 된 계기는, 놀이터에서 자신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이가 바로 그녀라는 사실 때문이다.
  
 
 
리틀 칠드런 ⓒ프레시안무비
 

  든든하게 자신을 보호해주었던 어른 – '어머니' – 의 존재를 상실한 후, 어른이 아닌 '착한 아이'(good boy)가 되기 위해 성기를 스스로 절단하는 로니의 모습, 감독은 '그것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강변하는 것이 아닐까. 유아기에 고착된 그는 사회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타협하는 방식을 배우지 못한 채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거세라는 이 행위 자체는 그가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지만, 마을의 모두가 그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하며 당연시하던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결국 감독은, 현대 사회가 아무리 '성인이 되지 못한 성인'을 뜻하는 '피터팬 콤플렉스'니 '키덜트'니 하는 말들을 통해 마치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개인들 스스로가 한심하게 선택한 일인 것처럼 포장을 하고 그들을 질책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이들이 어른이 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사회의 암묵적인 강요임을 웅변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공식적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브래드와 새라, 로니, 또한 래리의 사연을, 얼마간은 살짝 놀리는 듯한 터치가 분명 존재한다고는 해도 전체적으로 이들의 고통과 절망을 연민과 위로의 손길로 감싼다. 비록 이들이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어린아이적 특성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일탈의 끝을 스스로 정리함으로써 성장통을 넘긴다.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안고 미안하다며 연발하든, 자신이 (가장이 될 수 없는) 무능력한 남편임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아내를 부르든, 자신의 성기를 스스로 잘라내든, 그를 부여안고 생애 가장 빠른 속도의 운전으로 병원으로 달려가든.
  
  그러므로 신이시여, 제발 이 가련한 "어린 아이들(Little Children)"을 굽어 살피소서.
   
 
  김숙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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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 일부

  • 등록일
    2007/02/26 20:56
  • 수정일
    2007/02/26 20:56

필름 한 컷이 남아서...

 

 

어릴 적 읽던 것들이 주로 꽂혀 있군 허허..

노동의 새벽, 처음 사서 부모님 못 보게 숨겨놓고 읽었던 생각 난다.

경찰서여 안녕, 유쾌한 소설이다. 전의경 스토리가 많이 등장.

액자는 선물 받은 것인데 가끔 사진을 갈아 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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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깨달은 것, 그리고...

  • 등록일
    2007/02/26 02:15
  • 수정일
    2007/02/26 02:15
아직도 내가 심지 곧고 신념에 찬 활동가라는(혹은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것은 아닌가?


*
이게 자꾸 어리광 부리는 응석받이가 되어 간다는 느낌.


**
손으로 편지 쓰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양 손으로는 타자치는 손짓을 보여주던 그 동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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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과 젠더 - 경험

  • 등록일
    2007/02/16 02:44
  • 수정일
    2007/02/16 02:44
달군님의 [화장실과 젠더 이슈] 에 관련된 글.

그동안, 성폭력 예방을 위해 숙소를 분리했던 것처럼
화장실도 분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왔다----------

**

학교 다닐 때, 대규모 술자리를 많이 기획해 봤다.
당연히 단체로 많이 앉을 수 있으면서도 싸게싸게 먹을 수 있는 집을 선호하다보니
항상 학교 부근의 허름한 술집들이 선정되었다.
이른바 '누나집', '고모집', '이모집' 등등의...
(이건 따로 써야 할 것도 같은데... 가게의 호칭들도 반영하는 무언가가 있다. 바로 주인 여성들-주로 중년 혹은 노년-이 남학생들에 의해 '모성의 상징'이 되어 있는 거 아닌가?. 여대 앞에도 이런 이름의 가게들이 있었을까? 문득 궁금.)

그런데 그런 술집들의 최고 단점은 바로 화장실.

보통 시설이 낡은 데다가, 좌변기는 찾아보기 힘들고 양변기 하나 달랑 있는데다가
물 내리는 장치도 없는 경우가 많아 수돗물에서 물을 틀어 바가지로 물을 퍼 내리는 방식이 주였다.
물론 성별 구분은 되어 있지 않았다.

즉 '머물고 싶은 화장실'과는 완전 정반대의 화장실들이었던 것.

처음엔 청소가 되어 있던 상태라도 점점 사람들의 이용이 많아지고,
특히 서서 오줌누는 것 등의 여파로 (결정타는 오바이트;) 금새 화장실은 지저분해졌다.

그때는 그냥 내가 쓰기에도 더럽다, 지저분하다, 이 정도만 생각했다.
그래도 재빨리 볼 일 보고 나와버리면 된다는 정도만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나중에 여성 문제 토론하다 생각해 보니,
(그리고 종종 뉴스에서 남성 화장실보다 여성 화장실을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보면서)
 남성들이 소변볼 때와는 달리 여성들은 어떤 경우에든 더 불편했을 거란 생각이 미치자, '그땐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하는 반성이 들었다.

단순히 청결함의 문제만은 아니다.

다양한 방식의 성폭력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입장에서는 칸막이가 있다 해도 남성과 같이 화장실을 사용한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그 이후론 처음 가보는 술집이 있으면 화장실을 꼭 확인해 본다.
화장실이 깨끗한지, 성별 구분이 되어 있는지를 본다.
그리고 아는 술집 갈 일이 있을 때면 화장실도 조건에 넣어서 선택을 한다.

내가 일하던 사무실은 쬐끄만 빌딩이어서 칸막이로만 남녀 구분이 되어 있었다.
세면대에서 청소, 설거지 등을 하고 있다가 여성들이 들어오는 것 같으면 슬쩍 나갔다가 나중에 화장실을 쓰곤 했다.

***

그런데 All Gender화장실에 대한 얘기가 있네?
이런 생각도 있었구나.
'양성 평등'보다 '성 평등'이 낫다는 것처럼,
또 하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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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조심을 해야지.

  • 등록일
    2007/02/13 18:11
  • 수정일
    2007/02/13 18:11
사회생활 하는데 필요한게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부정적 의미에서) 표정관리.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입조심.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맨날 "과묵하다", "왜그리 말이 없냐", "말 좀 해라"
등등의 소리를 달고 다녔는데

크고 나서는 왜
말이 많아서 잔소리가 되고
상대가 듣기에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얘기들을 많이도 늘어 놓는지.(특히 편한 관계에서)
나서길 좋아하는 운동권이 된 탓인가.

게다가 진실은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쓸데없이 한 얘기가 이상하게 꼬여서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한 판 싸움도 벌어졌고,

위험한 줄타기 설득판에서
괜히 카드를 많이 벌이는 바람에
일은 더 꼬이기만 하고.

2년 동안 묵언수행이라도 해야 할 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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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피기 좋은 날 & 결혼식

  • 등록일
    2007/02/12 17:42
  • 수정일
    2007/02/12 17:42

**

동지가 보재서 아~~~무 생각 없이 영화표를 끊고 봤는데.

 

전~혀 새롭지 않은, 뻔하디 뻔한 그런 영화.

'돈 참 쉽게 벌려고 하는구만' 싶더라.

극장에서 보니까, 모텔 침대신에서는 계속 관객들의 웃음이 작게 터지긴 하는데

나로선 너무 뻔한 남성 판타지와, 남성들의 심리가 속 보여서

혀만 끌끌 찼다. (그렇다고 내가 완벽히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정희진이 한국에 여관이 그토록 많은 것에 대해 묻는 외국인에게

"그만큼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있다는 증거지"라고 둘러댔다는

문구가 계속 생각이 났는데,

 

정말 너무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결말.

오늘 아침에 면도하면서 '바람난 가족'은 정말 이거에 비하면 같은 소재를 다뤄도 훨씬 낫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영화 주제곡이 "바람아 멈추어다오"였으니깐. 훗.

**

가족이 결혼식에 가는데 같이 가서 밥이나 먹자고.

간만에 호텔 결혼식에 가서 커다란 홀의 커다란 원탁에 앉아 결혼식을 감상.

 

주례사가 좀 웃기군... 하는 생각 외에는 별 거 없었다.

(참고로 주례사의 주 내용 : 서로 꿍해서는 안 된다. 내 생일을 미리 알고 있나 까먹었나 두고 보자... 이러지 말고 미리 말하고 선물 뭐 해달라고 얘기하면 싸울 일이 없다... 는 둥. 참 실생활스러우면서도 역시 고전적인 주례였다)

 

옛날에는 가끔씩 결혼식에 가면,

이 담에 결혼식은 평등부부 선언대회 식으로 치를까. 가끔 이런 생각했는데.

예를들면,

주례 없이 여러 사람들의 축하사로 대신하고,

입장할 때 같이 손잡고 입장하고,

부부평등 선언문 같은 거나 낭독하고.

결혼식 참가자들, (아니 하객들이군; )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의식개혁을 촉구하는-

 

그러나 오늘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결혼제도에 편승하면서 내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적 작태를 버리고

결혼 자체를 거부하는게 차라리 낫겠다. 고 생각했다.

 

영원한 부부관계가 어딨냐. 흥.

 

뭐 어쨌든 한 끼 식사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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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읽은 후 단상.

  • 등록일
    2007/02/07 00:34
  • 수정일
    2007/02/07 00:34
*
왜, 가끔 물에 불린 미역을 흐르는 물에 씻으면,
흐물흐물-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잖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뇌가 흐르는 물에 씻겨지면서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을 받았어.


#
머리말을 읽으면서부터 굉장히 쉽게 읽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계속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들었고.
정말 솔직하게 썼다고 생각한다.
머리말에서 한 남성 장애인과의 에피소드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에 여성주의는 사실상 '외부로부터의 도입'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소위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트기에 적합한 책이 아닐까 싶다.
기존 운동의 딱딱하고 난해한 만연체 문장과 달리
정희진은 깔끔하고 톡톡 튀면서도 쉽게 얘기를 하고 있다.


&
우리는 일상적으로 '부정적' 표현들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특히 우리자 주력하고 있는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일단 '한계'부터 짚고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사회주의자들이 좀더 넓게, 유연하게 세상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하는데,(이게 지나친 열등감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고민과 차이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참 좋았다.
하나의 인간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인정한다.
그리 딱딱한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없지 않나.


*
3부로 가면서는 조금 어렵기도 했다.
내가 많이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라.
특히 연령주의에 대한 문제도 그렇고.
성매매에 대한 이야기는 여성운동 내부의 차이와 고민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볼 만 했다.
개인적인 상태 때문인지 "군사주의와 남성성" 파트를 읽으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
개인적 차원의 실천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온당히 정당하다.
한편으론 나에 대해 비통하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함께 읽고 같이 얘기해 보면 건질 게 좀 있을 것 같다.


$
나는 얼마전에  '여성주의'란 표현을 남발하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한 적 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조건 속에서 전술적으로 '여성주의'란 개념을 남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도 얘기했다.

지금도 추상적인 표현을 남발하는 것에 대해서는 습관적으로 고쳐 나가야 한다고 보지만,

정희진에 대한 어느 남성의 충고 - "페미니즘은 자기 주장을 하기 전에, 남자는 불쌍하다, 남자도 피해자다.... 이렇게 남자들을 달래고 위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는 부분을 읽고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내가 했던 생각이 저런 태도 - "그 '효율성'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분석이 필요한 논리"와 맞닿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여성'에 대한 나의 의식은 한참 퇴보하다가
이 책 덕분에 겨우 각성의 실마리를 다시 부여잡은 듯 한데,
좀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다시 퇴보하겠구나 +.+


"앞으로 딸들은 아버지의 검은 잉크를 엎어버리고 어머니의 젖이라는 흰색 잉크로 어머니에 대해 다시 써야 한다. 이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식욕, 성욕, 수면욕은 인간의 3대 욕구가 아니라 남성의 3대 욕구인 셈이다."

"'북핵 문제'라는 말은 조지 부시의 언어다."

한국에 여관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있다"여서? ^^

"가부장제 사회의 관습대로 남자는 늑대이고 여자는 여우라면, 늑대는 늑대끼리, 여우는 여우끼리 사랑하고 섹스하는 것이 '정상'이다. 늑대랑 여우랑 섹스를 하다니!"

"마르크시스트든 파시스트든 집에서 설거지 안 하기는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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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동지들을 보면서

  • 등록일
    2007/02/06 10:33
  • 수정일
    2007/02/06 10:33
얼마 전 법원에서 이주노조 설립은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판결이 났고,
참세상에 이주노조 총회 기사도 실렸다.

내가 정식 연대활동을 통해 처음 이주노동자 동지들과 맞닥뜨린 것이 2003년.
그때 활기차게 활동하던 동지들 몇몇은 여전히 활발하게 노조활동을 하고 있다.
수많은 단속과 추방 압력 속에서도 꿋꿋이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
대부분이 불법체류로 사실상 '비합법'신분으로 언제 들려 나갈지 모르는 와중이지만
꿋꿋이 움직이는 동지들을 보면, 나의 결의가 참 부족한 것 같아 참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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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애인이 옛 애인을 만난다면-

  • 등록일
    2007/02/05 21:53
  • 수정일
    2007/02/05 21:53
"어떻게 해야 될까요?"

라디오 상담코너에 흔히 소개되는 사연중 하나 아닐까.


.
얼마 후면 새로운 환경 속에 내던져진다는 걸 핑계삼아
꽤 오랜 시간 연락이 되지 않던 옛 연인에게 연락을 했다.
사실 별로 할 얘긴 없고 얼굴이나마 잠깐 볼까 했는데,
그 친구의 뜻대로, 보지 않기로 했다.

헤어진 이후에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몇 번 만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의 현재 애인과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연락을 먼저 끊었단다.
지금도 굳이 만나고 싶진 않다고 한다.

친구의 결정은 전혀 섭섭하지 않다.
물론, 하나의 관계가,
이제는 정말,
과거로 자리잡았다는 생각에 잠깐 슬프긴 했지만.


.
문득, 사랑 혹은 연애에서 발생하는 것.
질투심, 소유욕, 혹은 사람을 독점하고픈 욕구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전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나도 질투심을 느껴보기도 했고,
상대가 나와 사실상 '구애 경쟁관계'에 있는 이성을 만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기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라면, 즉 너무너무 좋아한다면 감정적으로 당연한 것일까?
아니면 가부장적인 일부일처제 사회가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는 것일까?


.
예전에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면서 내가 주목한 것은
(나중에 다른 블로거들의 감상을 보면서 흥미로웠다)
배타적, 독점적 연애(그리고 결혼)에 대한 반성이었다.

현재의 결혼제도-일부일처제-가 가부장적 사회와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기제라고 본다면,
연애 역시 사실 결혼제도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고민했다.
배타성과 독점적 소유욕이 다양한 문제를 불러오고 심대한 감정낭비를 불러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다.

그래서 내가 지금 머리로 내리고 있는 결론은
이른바 자유연애 더구체화하자면 비독점적 다자연애(?)에 대한 지지다.
단, 상대자와의 사전 합의와 동의 과정을 전제해야겠지.

며칠 전에 본 "나는 섹스중독자"의 카베 자헤디는 "사유재산제에 반대한다면 자유연애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 것처럼 대안체제를 지향하는 이는 자유연애를 지지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
그런데 이게 말이 되는걸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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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나는 섹스중독자&quot;

  • 등록일
    2007/02/03 23:53
  • 수정일
    2007/02/03 23:53
영화볼거 없나 하다가 순전히
주연을 겸한 감독이
한때 보봐르와 사르트르의 자유연애를 신봉했는데 어쩌구에 끌려서 본 듯 하다.

영화는 재미있다. 계속 킬킬거리면서 봤다.
남성의 성적 판타지의 일면을 보여주는 영화.
그 때문에 사실 불쾌한 장면도 살짝 있기도 하고.
정말 수많은 성판매 여성들이 등장한다. (감독은 성판매 여성과의 오럴섹스에 집착했으므로)
그런데 배경이 한국이라면 더욱 무거운 마음으로 봤을텐데
서구가 배경이어서인지 왠지 다른 느낌을 받았다는 것 정도가 좀 특이했고.

또 하나.
종종 '너무 정직해도 탈'이란 얘기를 하는데.
감독은 자신의 집착증을 나름 극복(?)해 보기 위해 자신의 애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honesty전략을 써 보기도 한다.

그걸 보면서
정직한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죄책감을 더는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위선을 부릴 수도 있지 않을까.
나도 좀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흠...

여하튼 좀 웃기는 짬뽕 같은 영화.
사유재산제와 일부일처제를 동일시하면서 자유연애를 실천하던 20대 청년이
영화 맨 마지막에 자기는 섹스중독증을 고쳤고 세 번째 결혼을 한다고 자랑하는 건 참 아이러니다.



발칙하고 도발적인 유머 <나는 섹스중독자>
2007.01.17
 

가장 발칙하고 유머러스한 중독기, 감독의 솔직함에 경배를

나이 들어 머리숱도 적고, 비쩍 말라 볼품없는 남자가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페티시즘과 강박증에 대해서 속사포처럼 중얼댄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다. 신경증적인 뉴욕 지식 남성의 치부를 영화 가득 담아내었던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우리는 ‘섹스에 관해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영화적으로 배웠다. 그러나 R등급의 우디 앨런이라는 별명이 붙은 카베 자헤디는 앨런이 철저하게 지켰던 그 영화적 거리를 파괴한다. 우리는 우디 앨런의 실생활에서의 여성 편력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영화가 감독의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거나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카베 자헤디는 자신의 삶과 영화를 혼합한다. 우디 앨런은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을 차용할 때, 그것이 의도된 페이크다큐멘터리임을 감추지 않으며 그런 기법은 현실에 대한 풍자의 강도를 높이거나 아이러닉한 상황에 유머를 더욱더 가미하기 위해서 쓰인다. 그러나 카베 자헤디는 실제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영화의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 존재했던 인물과 자신의 과거를 기록한 필름들을 활용한다.

카베 자헤디의 <나는 섹스중독자>는 세 번째 결혼을 앞두고 대기실에 있는 감독이 ‘나는 한때 섹스 중독자였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과거를 재구성한 재연 화면, 사귀거나 결혼했던 여성들을 담은 실제 영상, 자신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애니메이션 화면이 자헤디 감독의 친절한 설명을 배경으로 이어진다. 감독은 자신과 함께했던 여인들과의 관계를 반추하면서 자신의 내밀한 욕망들을 거침없이, 매우 솔직하게 늘어놓는다. 그는 영혼의 동반자라고 생각했던 첫사랑 애나와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관계처럼 개방된 연애를 꿈꾼다. 하지만 그가 비자가 만료되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애인 캐롤린을 옆에 두기 위해 결혼하면서 자유연애는 종지부를 찍는다. 결혼이란 ‘베트남전을 일으킨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그것을 일부일처제적 사랑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일종의 행위 예술이라고 치부해버린다. 영화 때문에 파리로 건너간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아내 캐롤린을 닮은 창녀를 만난 이후 창녀와 오럴섹스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자신의 내밀한 성적 욕망과 결혼 혹은 연애 관계를 지키려는 자헤디의 눈물 나는 투쟁기가 시작된다.

사랑에 관한 통속적인 정의 가운데, ‘사랑은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와 ‘사랑은 평생 서로 마주보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있다. 전자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상과 지향의 일치를, 후자는 둘간의 독점적이고 지속적인 관계 유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자헤디는 이 두개의 정의들이 함축하는 사랑의 모습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려고 하지만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할 뿐 좀체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금지된 욕망을 금지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즉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인정받음으로써 그것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설을 세운 것이다. 그의 아내 혹은 애인들은 처음에는 그가 수줍게 털어놓은 비밀을 충격적으로 듣는다. 나의 남자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 그것도 창녀를 욕망하다니. 서럽게 울거나 구역질내던 그녀들은 이내 그의 솔직함을 인정하고 그의 판타지를 용인하고 공유해주기로 마음먹는다. 자헤디와 그의 연인들은 오래도록 서로 마주보기 위해서 같은 곳을 바라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 사랑에서도 ‘솔직함이 최선의 정책’이 될 수 있을까? 예일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자헤디 감독은 온갖 지적 담론들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사랑을 둘러싼 두 가지 본능에 대해 실험한다. 하나는 성욕을 일대일의 독점적인 관계 속에 묶어두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그러므로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가는 욕망에 대해 좀더 솔직하고 대범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첫 번째 것과 매우 모순적인 것인데, 주체는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을, 특히 성적인 면에서 독점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헤디는 자신이 창녀들에게 가지고 있는 욕망을 애인과 공유하기를 원하면서 자신의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에 대해는 다스릴 수 없는 질투에 휩싸인다. 감독은 관계의 황금률을 지키지 못하는 스스로를 목격하며 욕망의 딜레마에 빠진다. 지식인 남자가 가진 욕망의 천박함 혹은 편협함을 인정하는 이런 솔직함이 이 영화가 가진 강점이며, 이 영화가 남성 본위의 성적 판타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데빈과의 관계를 통해 카베는 자신을 비추어본다. 알코올중독자인 그녀를 참아낼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여자들을 괴롭혀온 자신의 욕망도 일종의 중독 증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고 자신을 ‘섹스중독자’라고 규정한다. 결혼과 사랑 그리고 성욕에 대해 대담하고 솔직했던 서두와 본론에 비해 그를 섹스중독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결론은 다소 상투적이고 낭만적이다. 그렇지만 <나는 섹스중독자>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쉽게 보기 힘든, 발칙하고 도발적인 유머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확실하다.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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