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2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4/13
    영화 이야기(3)
    hongsili
  2. 2009/04/12
    텍스트와 컨텍스트 - 기형도(5)
    hongsili
  3. 2009/03/29
    안 어울리는 조합의 책들..(1)
    hongsili
  4. 2009/03/26
    베버와 루소(1)
    hongsili
  5. 2009/03/08
    몇 번의 봄(3)
    hongsili
  6. 2009/03/01
    2월의 책과 영화(4)
    hongsili
  7. 2009/02/01
    1월의 책들(3)
    hongsili
  8. 2009/01/26
    영화 세 편(4)
    hongsili
  9. 2008/12/21
    그들의 포스... ㅡ.ㅡ(4)
    hongsili
  10. 2008/10/31
    끝나지 않은 가을(1)
    hongsili

책, 책, 책...

병든 사자가 풀을 뜯어먹듯 마음이 병든 자만이 책을 읽는다 했거늘... #1. 로버트 J 소여 지음, 김상훈 옮김. [멸종] 오멜라스 2009

시간이동, 바이러스, 공룡 멸종, 외계생명체... 소위 SF의 핫 아이템들이 모두 들어있는 소설이다. 공룡멸종의 놀라운 비밀(?)을 주제로 담고 있다. 예전에 재미나게 보았던 일본만화책 [괴수대백과 사전]이 고질라의 존재불가능성을 논증했던 것과 같은 논리를 가져왔다 ㅎㅎㅎ 원저의 제목 [End of an Era]를 잘 살렸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딱히 중요한 대목은 아니었으나 기억해둘만한 문장이라면, 13세기 이탈리아 시인이 이야기했다는.....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장소는 도덕적으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을 때 중립을 지킨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2.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청미래 2002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건 비단 남녀간의 사랑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다른 이의 미덕보다는 악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라, 차라리 서로를 잘 모르는 게 관계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물론, 오랜 기간에 걸쳐 삶을 공유한 후에 배신과 상처가 아닌, 믿음을 얻었다면야 모를까... 이전에 읽었던 보통의 책들에 비해, 좀 공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보니 보통이 이 책을 썼을 때 약관 20대였다. 그 나이를 생각한다면 놀라운 통찰력이기는 하다. 너무도 가깝기 때문에 차분하게 관찰하기 어려운 인간의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이렇게 한발 떨어져 담담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말이다. 허나, 그닥 추천할만큼 좋은 작품이 아닌것만은 분명.... #3.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 행복의 지도] 웅진 지식하우스 2008

이 책을 읽는 동안 행복했다. 매일 우울하고 불행한 소식만을 전하던 기자가, 행복의 비밀을 찾아나선 엉뚱한 여행담... 이 썰렁하고 해학적인 글들 곳곳에는 저자가 발견한(?) 행복비법들이 숨겨져 있다. 저자는, 이토록 불행으로 가득찬 것같은 세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기자와 철학자 탓으로 돌렸다. 특히 철학자 ㅎㅎㅎ "... 그러나 진정한 악당은 바로 철학자다. 유럽 출신의 음침한 백인 남자들. 그들은 온통 검은 옷을 차려입고,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고, 데이트 상대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카페에서 혼자 놀며 우주를 생각하다가 '짠!'하고 결론을 내린다. 우주는 불행한 곳이라고. 우주가 불행한 건 당연하다. 다시 말해서, 외롭고 음침하고 피부색이 창백한 백인 남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18세기 하이델베르크의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바빴기 때문에 먼훗날 세상에 태어나 불루밍턴에서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철학개론 수업을 들어야하는 녀석을 괴롭힐 요량으로 길고 산만한 독설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행복을 성취하고 싶어하지, 그냥 행복을 경험하기만 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심지어 불행을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적어도 불행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행복을 진심으로 음미하기 위해서" "... 행복도 마찬가지다. 유전적 요인이니 공동체적 유대감이니 상대적 소득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빼버리면, 행복도 선택이 된다. 쉬운 선택도 아니고 항상바람직한 선택도 아니지만 선택인 건 맞다. 잔혹한 기후와 철저한 고립 앞에서 아이슬란드인들은 절망 때문에 술독에 빠져 사는 삶을 쉽사리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가 돌아본 나라들에서 얻은 교훈들은 기존의 행복 (happiness), 주관적 안녕 (subjective well-being), 삶의 만족도 (life satisfaction) 에 관한 계량적 연구에서 얻은 것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관용, 신뢰 (가족같은 배타적 혈연 뿐 아니라 얼굴 모르는 이웃들과의 연대감, 타인의 삶에 대한 공동 책임감), 관계와 초월, 실패의 인정 (이건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정신줄 놓기 (이건 좀 아니야!), 우울과 염세를 인정하고 즐기기 쯤? 허나, 그렇게 모두들 아는 것 같아도,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진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저자의 껄렁한(^^) 해석을 읽다보면, 내가 요즘 진행중인 계량적 분석이 얼마나 제한적일수밖에 없는지..... ㅡ.ㅡ 아참,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단 하나의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다음 생에 부탄의 개로 태어나고 싶다." 나도 ㅎㅎㅎㅎㅎ 오늘 어린이날! 주먹도끼는 삼계탕을, 노가다 장은 맛난 커피를 사주었다. 행복했다 ㅎㅎ 그리고 츄파춥스는 '웃는 빵'을 선물로 주었다. 빵은 행복해보였다... 씨익 웃고 있다... 나도 행복했다 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영화 이야기

중간중간 극장에서, 혹은 DVD 로 보았던 영화들에 대한 단상 #1. 스티븐 달드리 감독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2008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영화라서, 풍부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영화라서 좋았다. [타이타닉]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저 예쁜 배우인줄 알았던 케이트윈슬렛은 해가 거듭될수록 진짜 배우임을 스스로 증명해가는 것 같다. 그녀가 있었기에 한나 슈미트에게서 그토록 복잡한 이성과 감정의 딜레마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국에 있는동안 [뉘렌베르크 트라이얼]을 보았더랬다. 그 때도 집단 속의 개인, 자유의지, 인간의 본성 이런 것들에 대해 열띤 토론과 고민들이 오고갔었다 (대화가 영어로 오갔다는 나름 어려운 점이 있었다 ㅜ.ㅜ). 이 영화를 보고나서도 함께 본 친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선/악에 대해 분명한 혹은 단호한 판단을 내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려움... 홀로코스트의 '성실한' 공무원(반인륜적 범죄마저도 성심성의껏 집행한!)이었던 그녀가 20년 동안 수감 생활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었냐는 마이클의 질문에 '읽기'라고 답할 때는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20년만에 얼굴을 맞대자마자 과거를 생각해본적 있냐는 마이클의 질문은, 꼭 저 순간에 저걸 물어봐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 우리가 바로 그 질문을 회피했기 때문에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녀의 자살이 온전히 사적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영화평을 보니 원작에서 그녀는 한나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비롯하여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회고록 등을 읽었단다. 죽음의 의미는 한결 복잡해진다 ㅡ.ㅡ 진지한 영화 속에서 한 가지 옥의 티라면... 독일어 교재라면서 왜 책들이 다 영어로 쓰여 있는지... ㅜ.ㅜ


#2.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그랜 토리노]

영화가 어찌나 훈훈하던지!!! 어찌보면 미국판 [워낭소리]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조금 더 '냉정하게'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어쩜 미국이라는 문화적 거리 때문에 내가 좀더 거리를 두고 영화를 바라보고 있어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바라보는 감정은 정말 특별할 것이다. 그랜 토리노로 상징되는 백인 노동자 계급의 자부심, 집안 가득한 공구 꾸러미, 크지는 않지만 항상 깔끔하게 정돈된 화단과 집안 구석구석, 맥주와 총... 그리고 전쟁영웅... 눈엣가시 같은 다종다양한(!) 이민자들, 부모의 재산만 탐내는 자식들 (거기다 자동차는 일제!), 장례식장에서 휴대전화질에 빠진 개념상실 손주들이라니... 못마땅한 꼴을 마주할 때마다 눈쌀을 찌푸리며 그르렁거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참 그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그만의 모습이다. 느끼한 서부의 총잡이가 저리 변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그의 나레이션과 함께 울려퍼지는 노래 '그랜 토리노'는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희망없는 송가처럼 들렸다. #3. 미셸 공드리 감독 [이터널 선샤인] 2004년

은근 호화캐스팅... 짐캐리에 케이트 윈슬렛... 거기에 커스틴 던스트와 엘리야 우드가 조연으로... 참 독특하고 재기발랄한, 그러면서도 작은 애틋함들이 살아있는 괜찮은 SF 로맨스 영화였다. 이별 후에 그리움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기억을 지웠는데도,다시금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더구나 상대방은 기억이 온전한 상태에서)이건 좀 많이 비극이다. 영화의 주제는, 결국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고 사랑에 빠질 사람은 다시 빠지고야 만다는 숙명론??? 무너지는 기억들 (무너지는 건물로 형상화된) 속에서 소중한 기억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짐캐리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텍스트와 컨텍스트 - 기형도

기형도 시인의 20주기가 되었노라고, 백수 (!) 친구를 꼬드겨 책 선물을 받았다. 완전히 자발적인(!!!) 선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ㅎㅎㅎ # 박해현, 성석제, 이광호 엮음 [정거장에서의 충고] 문학과 지성사 2009

사실, 나는 기형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 많은 줄 몰랐었다. 그의 인기가 이렇게 드높은 줄 안 것은 최근 몇 년... 몇몇이서만 은밀하게 몰두하는 그런 아티스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이돌이었어... 이런 약간의 배신감도 없지않아 들었더랬다 ㅎㅎ 심지어 얼마 전에 들렀던 대학가 앞 서점, 내 앞에 선 대학생이 계산대에 올려놓은 책은 [기형도 전집]이었다. 저 또래의 학생들과 20년이 넘은 시들이 어떤 교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붙잡고 물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 세대로서의 공감 책 앞부분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시인들의 대담이 실려있다. 어떻게 그를 만나게 되었고, 무엇에 공명했으며, 자신들의 삶에서 혹은 시에서 그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는지... 세대론에 그닥 공감하는 편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들을 하고, 또 비슷한 것에 감흥했던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좀 애틋하게 느껴졌다. 시인의 죽음이 가져온 신비화와 극적 효과를 떨쳐버리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야기 - 내가 괜히 유행에 편승하는게 아닌가, 죽음으로 인해 그의 시들이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내외부를 향한 의심!!! - 들에는 참으로 공감이 갔다. 우리는 이미 '요절하기에도 늦은 나이'라는 한 시인의 날카로운 지적과 '지금 죽으면 그냥 사망'이라는 시시껄렁한 농담마저도 ㅎㅎ 한편으로, 요절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망 시점의 나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진정성이 사라진 이 시대, 지금은 어느 나이에 죽어도 요절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은 참... 80년대 학번들이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낮에는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고 밤이면 그들이 허용해준 동시상영관에서 에로영화를 즐기는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학교에서는 박노해와 백무산의 시를 읽고 (또 대자보에 베껴쓰고), 밤이면 기형도의 시를 홀로 읽으며 조용한 위로를 받았다는 증언... 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과 한편으로 (기이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을 얻는 이들이 지닌 윤리적 감수성이 머무는 지점에 바로 기형도 시인이 위치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 어쨌든, 텍스트와 컨텍스트는 분리될 수 없고, 그것이 부당한 혹은 과도한 아우라를 낳던 그렇지 않던 간에,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그의 시, 또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시를 분리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것 같다.


# 시인과 시 기형도의 시는 (몹시도) 어두워보인다. 혹자는 그의 시가 죽음을 예감했다고 사후 논평을 하기도 했고, 누구는 또 그 어두움의 기원을 찾으려 애쓰기도 했다. 불우했던 유년 시절... 하지만 그의 절친했던 동료들이 이야기하는 그의 삶은 그렇게 멜랑콜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시가 어둡다고 시인이 어두운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그 시가 글쓴이와는 아주 무관한 그저 허구의 말장난 인것도 분명 아니리라. 50대 아저씨가 10대 소녀의 아바타로 위장하고 사이버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와 시인의 관계는 약간, 서로 독립적인 것 같다. 이미 20대 중반의 나이에 세상을 다 살아버린 듯 치기어린(?) 단정어를 구사하고 끊임없이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이 감정의 과잉이나 작렬하는 자기애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일상의 유쾌함과 꼼꼼한 성정 탓이 아닌가 싶다. 예의 그 껄렁한 문장으로 그려진 성석제의 회고는 우리가 대학시절 친구를 추억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 저녁이 되면 시장 안의 술집으로 가곤 했다. 기형도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술자리에 자주 어울리다보니 알코올의 도움이 없이도 웬만한 술꾼 정도의 주정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그 재간을 자주 보여주지는 않았다." ㅎㅎㅎ # 자기 통제와 죽음 기형도는 무척이나 꼼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짧은 여행의 기록] 앞부분에 보면 그의 누이가, 동생 허락도 받지 않고 이렇게 그의 글을 세상에 내보여도 되는 것인지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의 유고시집과 산문집을 읽으면서 나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더랬다. 어쩜 이건 보여주고 싶지 않았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들을 세상에 알려준 누이와 친구들에게 독자로서의 고마움과, 자기통제를 열렬히 지지하는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행위에 대한 살짝의 원망... 이 양가감정은 뭐다냐...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어느날 준비되지 못한 죽음을 맞는다면 과연 나의 생을 온전히 '파악'하고 정리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확신컨데, 전모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ㅎㅎㅎ 특별히 사생활(?)이 복잡하고 비밀이 많은 건 아닌데??? 혹시 다중인격??? 그래서, 통장번호나 연루된 인간관계 종류와 특성, 명단 같은 거를 일목요연하게 만들어둬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씩... 갑자기 포스팅이 삼천포로 흐르고 있다.ㅡ.ㅡ #. 김훈의 글 그에 대한 송가 중 애절하기로는 전연욱의 [안개]가 으뜸인 것 같고, 산문으로는 김훈의 것이 아마도... "... 형도야, 네가 나보다 먼저 가서 내 선배가 되었구나. 하기야 먼저 가고 나중 가는 것이 무슨 큰 대수랴. 기왕지사 그렇게 되었으니 뒤돌아 보지 말고 가거라. 너의 관을 붙들고 '이놈아 거긴 왜 들어가 있니. 빨리 나오라니깐' 하고 울부짖던 너의 모친의 울음도, 그리고 너의 빈소에서 집단 최면 식의 쌈움판을 벌인 너의 동료 시쟁이들의 슬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空)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시인이 살아있었더라면 향년 50세를 맞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안 어울리는 조합의 책들..

책 읽고 메모 남기는 것도 일이다. 기록 없이 기억도 없다는 슬픈 현실을 인정하고 몇 글자라도 끄적끄적... #1. 매일노동뉴스 편집국 [현장을 가다] 2008

우연히 채널을 마주치면 입이 쩍 벌어지는 달인의 솜씨에 잠시 정신줄을 놓다가도, 정말 저래도 되나 싶어 항상 마음을 찜찜하게 만드는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다. 노동안전보건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완전 황당한 프로그램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나마 생활인으로서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등장한다는 측면에서는 나름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생산직, 서비스직 노동자는 미디어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노사상생을 노래하는 공익광고나 산재예방 광고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모든 '직장인'(노동자 말고!)들은 쿨한 캐주얼 웨어 혹은 맵시나는 정장을 입고 사무실 책상앞에서 일한다. 사실은 일도 잘 안하고 연애질에 권모술수, 집안 싸움만 하는게 보통이긴 하지만 ㅡ.ㅡ 매일노동뉴스의 [현장을 가다]는 그래서 참 소중한 기록물이다. 조롱하지도, 비탄하지도, 저주하지도 말고, 그저 이해하라는 스피노자 할배의 말씀처럼, 노동의 현장을 '연대의 마음으로' 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조/건설, 금융/서비스, 공공부문의 3부로 이루어진 글들에서, 그야말로 세상을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의 자부심, (생활의 달인에 등장할법한) 현란한 재주와 기술들, 자신이 몸담는 일터에 대한 사랑,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믿음 들을 읽을 수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노동 (그 노동없이 당연히 존재할 수 없는 생산품과 서비스를 앞에 두고도, 나는 너무 자주, 그들의 존재를 잊는다), 때로는 목숨을 내걸고 나서야 하는 험난한 출근길, 점증해가는 고용불안과 팍팍해지는 노동의 댓가... 그리고 이런 것들이 빠져있을리 없다. 현상들을 종합하고 추상을 통해 일반화를 시키는 것이 연구자의 장기이자 소명이라고 하지만, 이런 생생한 일상들을 누군가 대신 그려주지 않는다면 그런 '연구'가 가능이나 할까? 고마운 책이다. 책에 등장했던 모든 분들, 취재하느라 고생한 분들... 모두에게 연대의 마음을!!!


#2. 고종석 [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마음산책 2009

하드커버에다 표지가 너무 대놓고 '어루만지다'를 표현하고 있어 살까말까 잠시 고민했었다. 그래도 고종석의 말/글 책들은 그닥 실망시킨 적이 없어서 또 질렀다. 거듭 확인하는 사실이지만, 이 분의 감수성은, 통상적인 그 세대 한국 아저씨의 것은 분명 아니다 ㅎㅎㅎ 사랑이라는 모티브와 관련된 단어들을 중심으로 글을 풀어놓았는데, 저자가 앞에서 분명히 밝히듯 이건 연애지침서나 사랑학교과서가 아니라 말글 에세이다. 그래도 주제와 관련된 저자의 평소 지론이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다 ㅎㅎ 단어들은 입술, 혀놀림(?), 미끈하다(?)처럼 성애와 좀더 관련시켜 설명한 것들도 있고, 딸내미, 누이처럼 또다른 종류의 애틋한 사랑에 관한 것들도 있고... 참 다양했다. 소개된 많은 어휘들 중 가장 마음을 끄는 아름다운 한국어라면, 역시 제목에 언급한 '어루만지다' 아닐까 싶다. 그것이 누군가의 볼이던, 혹은 마음이던, 그 어루만진다는 구체적/추상적 행위를 그 어떤 다른 말로 대신 표현할 수 있을까??? 몇 가지 허거덕 하는 내용들도 있었다. "...사랑을 낳는 것은 가느다란 신경일테다. 사랑은 무딘 신경. 씩씩한 마음에서 나올 수 없다..." ㅎㅎㅎ 주변사람들이 나보구 성격이 고래심줄 혹은 쇠심줄(영어로는 nerve of steel!!!) 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오늘날 이모양이구나... 큰 깨달음이었다!!! 또 사랑을 함으로써 자기자신(원래 으뜸 존재)과 사랑하는 대상 (버금 존재)의 우선순위를 바꾸게 된다는 점에서 "... 사랑은 정신의 질병이랄 수도 있다" 라고 썼다. 예전에 강유원은 [책과 세계]에서 정신이 병든 자만이 책을 읽는다고 했었다 (마치 병든 사자가 풀을 뜯어 먹듯이!)... 고로, 고종석과 강유원의 주장을 합쳐보자면, 정신이 병든 자는 참 다양한 일을 하는 것이다. 병원에만 가는게 아니라 무려 사랑도 하고 책도 읽는다 ㅎㅎㅎ (옆에서 사자는 풀 뜯어먹고!) #3.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벨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모티브북 2008

벨훅스의 책은 처음 읽어보았다. 어떤 독자들을 상정하고 책을 썼는지 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뭐랄까? 책 전체가 마치 서론처럼 느껴졌다. 뭔가 본론이 나올것 같으면서도 안 나오는 ㅡ.ㅡ 일단, 저자가 생각하는 '계급'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베버나 마르크스 류의 개념적 정의를 해야한다는 건 아니지만, 계급에 대해 논한 책에서 정작 본인이 생각하는 계급이 무엇인지 말해주지를 않으니, 상당히 애매하더라는... 사회과학적 훈련이 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호한 상태와 그닥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재산? 학벌? 집안? 가난??? 어쩌면 사회의 위계 그 자체를 나타내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할지도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흑인)공동체주의가 살아있던, 그리고 가난하지만 현명했던 부모님 세대의 그 시대에 대한 저자의 목가적 향수도 느낄 수 있었다. 일찍이 루소도 안타까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잖아요? 우째야한단 말입니까.... 이런 종류의 책도 쓰고 교육도 열심히 하고,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드는게 첫걸음이기는 할텐데, 어째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말씀만 들어있어서 뭔가 2% 부족한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달까..... ㅡ.ㅡ 한편, 가난한 흑인 노동계급출신으로서, 명문 사립대학을 졸업하고 주류세계에 편입한 저자가 마주쳤던 곤혹스러운 현실, 그리고 그렇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 있는 (어쩌면 축복받은) 조건들에 대한 기술에는 일백퍼센트 공감했다. 이런 신분상승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는 피에르 부르디외나 벨훅스같이 뛰어난 성찰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해봤어? 안해봤음 말을 마세요' 하면서 자수성가 제일주의로 주변에 상당한 민폐를 끼치기도 한다 ㅡ.ㅡ (그 대상이 온 국민 전체가 되버리면 정말 괴롭다!) 그나저나 원제가 [Where we stand: class matters] 인데 왜 한국어판 제목은 저 모양인지? #4. 벨훅스 지음, 윤은진 옮김. [경계넘기를 가르치기] 모틔브북 2008

위의 책을 읽는 중에, 친구네 집에 놀라갔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빌려서 읽었다. 전자에 비해 훨씬 재미있게,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던져주었는데, 딱히 답은 잘 모르겠다. 베버의 지론과는 상충하는 이 열정적인 페미니스트 선생님의 스타일이 바람직해보이기는 하면서도, 나보고 하라하면 별로 하고 싶지 않은 ㅡ.ㅡ; 아마도 학교를 다니면서 하도 싸이코같은 인간들을 많이보고, 도덕적 감화는 고사하고 다른 거 안 바라니 선생이면 전공과목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쳐라... 이런 결론으로 살아왔기 때문인 듯... 앞서의 책보다 저자의 유연하고 민감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어서 좋았다. 이를테면 파울로 프레이리에 대한 태도 - 가부장/백인중심주의의 잔영을 비판하면서도 페다고지 이론 자체의 전복적 성격과 선생의 상호존중하는 태도를 존경하며 적극 수용하는 모습 - 몇몇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남겨둔다. ".. 나는 자아실현과 거리가 먼 대학은, 책에 쓰인 지식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외의 사회적 상호작용에는 부적격인 이들에게 안식처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육이 자유의 실천이라고 한다면 학생에게만 참여하고 고백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학생들에게는 위험을 감수하라고 하면서 교사 자신은 비난받기를 거부한다면 역량 강화는 일어날 수 없다." "'이론'이나 '페메니즘' 같은 특정한 용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론화를 실천하거나 페미니스트 부쟁에 참여하는 삶의 방식을 지닌 실천가는 아니다. 용어 만들기라는 특권적 행동을 함으로써 권력을 가진 이들은 의사소통방식을 이용할 권리를 얻으며, 자신들의 연구와 행동을 설명하고 정의하고 묘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많은 환경에서 지식인들이 퇴출되고, 이론이 종적을 감추며, 침묵이 이어지는 상황을 목격해왔다. 침묵은 공범자가 되는 행위이며, 침묵은 우리가 이론 없이 혁명적인 흑인 해방과 페미니스트 투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영속시키는데 일조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 예를 들면, '흑인성'의 이론을 구축한 몇몇 엘리트 학자들은 그 흑인성을, 선택된 소수만 들어갈 수 있는 결정적 영역으로 만듦으로써 - 인종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이용하여 흑인 경험 영역의 권위를 주장하며, 이론 구축 과정에 민주적으로 접근하기를 거부한다 - 흑인 해방 투쟁을 위협한다. 우리 중 일부도 반주지주의를 조장하고 모든 이론은 가치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이들에 호응하여 흑인 해방을 위한 공동의 투쟁을 위협한다. 이들 두 집단은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었다는 생각을 강화하거나,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조장함으로써 비판 의식을 길러주는 해방 교육의 힘을 부인하며, 그결과로 우리를 집단적ㅇ그로 착취하고 억압하도록 강화하는 환경을 영속시킨다." "정체성 정치학은 억압되거나 착취당하는 집단이 벌이는 지배 구조를 비판하는 관점, 즉 투쟁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위치를 갖고자 하는 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 "진보적인 교수 대부분은 어떻게 계급 편견이 교실에서 일어나는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의문을 갖고 자신의 교육 과정을 개혁하는 경우보다는, 마음 편하게 기존의 연구 자료에 담긴 계급 편견에 도전하려고 애쓴다..." "학교는 낙원이 아니다. 그러나 배운다는 것은 낙원이 만들어질 수 있는 장이다. 교실은 가 자체로 한계가 많지만, 가능성을 지닌 장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가능성의 장애서 우리는 자유를 얻으려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동료에게 우리가 경계를 넘어가려 할 때 겪는 현실에 맞서게 해줄 개방된 사고와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것이 자유실천으로서의 교육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베버와 루소

바쁘더라도 저녁나절 30분은 좀 차분히 앉아 '재미있는' 책을 읽어보자는 결심을, 나름 잘 지켜나갔던 3월이었다. #1.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 2006

크나큰 가르침을 얻기는 커녕, 현재의 업을 접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폭풍같은 회의감이 밀려왔던 책이다. 학문, 혹은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소명도 없이 어쩌다보니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고, 또 딱히 다른 것을 잘 하는게 없어서 어영부영 머무르고 있는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았다. 번역하신 분도 괴로워하신 걸 보니, 나만의 고민이 아님은 분명하다. * 학자가 되는 길의 외적 내적 조건 이미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학자가 된다는 것의 금권적 기반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은 다소 놀라웠다. 또 요행이 이 정도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직업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는 장탄식, '학자의 길은 거친 요행의 세계'라는 지적에서 나도 모르게 깊은 공감의 한숨을 ㅡ.ㅡ 외적 조건보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내적 조건 - 열정과 소명의식이다. "..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학문영역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문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예술가치고 자기 일에, 그리고 오로지 자기 일에만 헌신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한 예술가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괴테같이 위대한..." 결국 나보구 공부 그만두라는 소리다 ㅜ.ㅜ * 합리화 과정과 학문의 발전 "... 진실로 '완성'된 예술품은 능가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것은 낡아버리지도 않습니다....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성취'는 '능가'되고 낡아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능가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멀리 나아가기를 희망하지 않고서는 연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보는 원칙적으로 무한히 계속됩니다." 베버는 오늘날 특허와 지적 재산권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과학계의 비밀주의와 배타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주지주의화와 합리화, 즉 현실세계의 탈주술화가 학문의 소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나 원래 계몽주의자?) *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 베버는 강단과 정치의 분리, 가치판단과 사실 판단의 분리, 교수와 지도자의 엄밀한 분리를 극도로 강조한다. (미국과는 달리) 권력관계가 두드러진 (독일의) 강의실에서 교수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적 성실성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나도 학부의 정규수업시간에는 팩트 이외에 사회적 발언을 절대 하지 않는다.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 수업은 좀 다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든다. 요즘같은 세상에 선생이 이야기한다고 그대로 믿고 따라오는 학생들이 있기나 할까? 선생의 영향력을 오히려 내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주류집단의 지속적인 이념세례 속에서 한마디 정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워드 진이나 벨 훅스가 강의실에서 보여준 태도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원칙에서 베버의 의견에 절대 공감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대학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하워드 진이나 벨 훅스의 교수법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이 강단을 저급한 선동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팩트를 종합하고 전달하는 것 또한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려한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가려진 진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결과가 보수적 온정주의가 되든 급진적 공동체주의가 되든 학생들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정작 어려운 것은, 더이상 성찰과 진지함이 사라져버린 강의실에 어떻게 진정성을 불어넣느냐 하는 것... 학교, 교육제도, 선생을 모두 하찮은 존재로 여기며 보내왔던 지난 시절의 개인적 경험들로 핑게삼아, 좋은 학자, 좋은 선생의 자질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지난 수년을 보냈다는 게 좀 한심스럽다. 다른 거 마땅히 할 것도 없으면서... (어릴 적에, 돈 벌어서 만화가게 차리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아 ㅜ.ㅜ)


# 2.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고봉만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해미와의 첫 책모임 이후 도대체 '사회' '공공'이 무엇이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옛 민주노동당 시절 진보정치연구소에서 펴낸 "사회국가'를 살펴보았다가 잔뜩 실망하고, 고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둘 다 루소 할배의 팬이 되었다. 이 분 엄청 발랄하셔!!! 이 텍스트는 평소의 내 지론대로 컨텍스트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디드로를 비롯한 백과전서파가 얼마나 미워했을지 이해가 충분히 된다. 중세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 겨우 탈주술화/계몽의 가치가 성장해나가기 시작한 그 시점에서, 기술과 학문의 발전이 불평등과 패악의 원인이라 주장하며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니, 계몽주의자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ㅎㅎㅎ (현실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회귀하자는 그의 발상이 목가적 낭만주의를 얼마나 뛰어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당시의) 불평등이 결코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며, '사회와 정신'이 낳은 인위적 상황이라는 예리한 통찰, 법과 제도로 고착화된 추악한 전제군주제에 대한 비판은, 왜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자양분이라 일컬어지는지 잘 말해준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 드러나는 앞서간 (!) 사상은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논문의 헌사에서 제네바공화국 의원들에게 "... 그들 (시민들)은 교육뿐만 아니라 타고난 자연의 권리에서도 당신들과 대등하며, 자신들이 당신들보다 낮은 지위에 머무르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고 당신들의 가치를 인정하여 자진해서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그들에게 일종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 시민의 절반인 '여성'에 대한 언급, 그것이 비록 오늘날의 페미니스트적 관점과는 전혀 다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로서 여성을 언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사랑과 정념의 기원에 대한 나름 냉철한(?) 추론 또한 흥미진진 ㅎㅎㅎ 인간의 이성보다 앞서는 두개의 원리로 자기애와 더불어 '연민'을 꼽고, 이를 확장하여 동물이 불필요하게 인간으로부터 학대받지않을 권리가 있다고까지 언급한 것은 더욱 충격... 연민이라... 루소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선한 존재로 바라보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본능적으로 함께 아파하는 이 마음.... 오늘날, 특히 한국사회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쩌면 연민이 사라져가는 사회? 가장 인상적이었던 표현은 이것이다.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 것인가?" 읽은지 오래되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이렇게 재치있는 말투로 쓰여지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고전이라면 고개를 내저었던 것이 한편으로 한심하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임무를 완수했다는 자부심 이외에, 얼마나 이 내용과 맥락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나이를 먹고, 경험과 지혜(??? 그냥 지식이라고 하자 ㅡ.ㅡ)가 쌓이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참, 이 책이나 베버의 책 모두 보기 드물게 번역글이 아주 매끄럽고, 참고문헌과 해제도 충실하다. 문고판이라 부담도 없으니 주변인들께 널리널리 강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몇 번의 봄

이 나에게 남아 있을까? 유독 짧은 봄과 가을의 입구에 설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다시는 못만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비장하게(!) 찰나를 즐겨보려하지만, 이들은 비정하게도 눈깜짝할새 지나가버리곤 한다. 기차 타고 내려오면서 생각했더랬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흩날리는 매화, 아님 벚꽃바람을 맞고 싶구나~~~ 음.... 책은 어떤게 좋을까??? [노동과 독점자본] [신자유주의] 이건 아닌디??? (책꽂이를 돌아봐도 마땅한 책이 눈에 안 띄는구나. 광물성 인간의 책장이란...) 우쨌든 오늘, 파란 하늘, 따스하고 나른하면서도 아직은 약간 쌀쌀한 바람이 남아있던 이런 날이면 역시나 파블로프의 개 마냥, 어김없이 떠오르는 글 한편.... -------------------------------- 그 리 움 (박노해) 공장 뜨락에 따사론 봄볕 내리면 휴일이라 생기 도는 아이들 얼굴 위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난다 하늘하늘 그리움으로 노오란 작은 손 꽃바람 자락에 날려 보내도 더 그리워 그리워서 온몸 흔들다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진다. 바람 드세도 모락모락 아지랑이로 피어나 온 가슴을 적셔 오는 그리움이여 스물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 오는 가난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2월의 책과 영화

벌써 3월이다. ㅡ.ㅡ 이제 세월의 흐름에 둔감해질 때도 되었건만, 문득문득, 여전히 놀란다! #1. 조한상 지음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책세상 2009

후배라고 대전에 내려왔는데, 서로 애틋하게 챙겨주는 사이는 아니고, 뭐 모른척 지내기도 웃기고... 그냥 만나서 수다만 떨기에는 둘 다 한가하지는 않고.... 비어가는 머리를 채워야겠다는 문제의식은 있고.... 이런 오묘한 사정이 결합하여, 얼마전부터 해미와 간이 강독 모임을 하고 있다.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2주에 한번 정도 맛난 차를 마시며 책이야기를 해보자는... 첫번째 책으로 이걸 골랐다. 몇 년전부터 그 답을 알고 싶었다. 도대체 공공성, 그 실체가 묘연한 이 단어의 '정의'가 무엇인지... 저자가 지적한대로, '공공성'이라는 단어는 여기저기서 유행처럼 쓰이는데, 소위 '개념의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그 누구하나 정확한 의미를 정의하지 않은 채 남발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1장에서 짚어준 공공성 개념의 역사와 핵심 의미요소에 대한 설명은 유용했다. 인민/공공복리/공개성이라는 3대원칙은 상당히 명료하고, 개별 사안에서 과연 이것이 공공성에 부합하는가를 판단하는데 유용한 잣대로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공공성과 국가공권력이 어떻게 등치되었는지, 그것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도 혼란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는 남아있다. 계급분할이 현존하는 이 사회에서 도대체 '공공복리'라는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공공 public'은 과연 누구? '선의'에 기반한 시민사회가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되는겨? 어쩌면 논의는 다시 롤즈의 정의론으로 돌아가, 가장 취약하거나 힘없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가는 편익이 공공성이라고 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ㅡ.ㅡ 첫술에 배부르랴. 어쨌든, 이제 이렇게 논점들이 정리되고 토의가 본격적으로 (?) 시작되었으니 좀더 심화된 연구결과들이 빨리(?) 나와서, 우리같은 어린양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참,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사법관에 의한 헌법해석의 독점을 비판한 부분.... 격하게 공감했다. 헌법해석의 민주화라...


#2. 이영희 [역정-나의 청년시대] 창작과 비평사 1988

링크된 그림은 2006년도 한길사 저작집에 포함된 것이고, 내가 가진건 창비의 오래된 책... 예전부터, 평소의 행적을 볼 때 자서전을 쓰실 분 같지는 않은데 무슨 연유일까 좀 궁금했었더랬다. '책을 내는 변명의 말'을 보면 이에 대한, 그야말로 변명이 나온다. "혁명가는 지나온 혁명이 그 인간의 전기이다"며 자전 쓰기를 거부했다는 모택동과 주은래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본인 책의 독자들에게 대한 도의적 의무감에서 이 글을 썼다는.... 엄혹했던 시절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많은 대학생들이 법정에서 자신의 저서를 통해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후의 실천적 삶의 과정에서 당한 시련과 고통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쁨과 동시에 무거운 부담을 느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에 다시 구금되면서 다시는 지적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전망 하에, 자신의 삶을 털어놓고 지적 인생에 종지부를 찍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연배에게서 동류를 찾아보기 힘든 선생의 까칠함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혼란과 야만의 시대에, 지식인이되 금전이라는 물질적 자본과 학연이라는 사회적자본을 갖지 못한 이의 삶이란... 뭐 글쎄... 약간의 동질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 시대를 살아온 동년배 어느 누가 쉬운 삶을 이어왔을까마는, 갖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 지적으로 사상적으로 성장해나가는 대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후학들에게 귀중한 경험인 것 같다. #3. 이병훈, 윤정향, 김종진, 강은애 지음 [양극화 시대의 일하는 사람들 - 환경미화원에서 변리사까지] 창비 2008

이 책은 희망제작소의 '우리시대의 희망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계획된 시리즈물 중 제 5권에 해당한다. 책의 구성이나 접근 방법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생생한 내러티브를 이렇게 조리있게 재구성하여 문제의식으로 정리해낼 수 있다니... 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들이다. 그런데,결정적으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첫 페이지 소개글이다. "...또 삼성은 '우리시대 희망찾기'의 연구가 실현될 수 있도록 연구기금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런 걸 병주고 약준다고 표현해야 하나?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ㅡ.ㅡ #4. 팔레스타인평화연대 지음 [라피끄 - 팔레스타인과 나] 메이데이 2008

아마도 이 책의 미덕은 그 '눈높이'와 에 있는 '다양한 결'에 있는 것 같다. 국제정세 분석과 통계자료만 나열되었더라면, 그것이 아무리 최신의 자료이고 정치한 분석이라 해도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동시에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역사와 정치를 이야기하고, 또 다른 부분에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적 삶 - 이를테면 검문소, 난민촌 생활, 노동, 물 문제 -을 마치 우리옆에 있는 것처럼 그려내고, 또 사람들의 흔한 오해 -홀로코스트, 테러리스트/자살테러, 부르카 - 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방식이 참 좋았다. 결국 연대의 시작은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네'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주변에 많이 선물해야겠다. 올해의 생일선물로 당첨 ㅎㅎㅎ 국제연대활동이 쉽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꾸준하게 활동해온 팔연대 활동가,회원들이 새삼 존경스러워졌음... #5. 노영석 감독 [낮술] 2009

영화보다가 웃겨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홍보 카피에 "술과 여자의 공통점, 남자라면 거절할 수 없다"라고 쓰여 있어서 저건 또 무슨 마초적 발언? 했는데... 영화를 보면 이해가 간다 ㅎㅎㅎ 그 찌질함과 팔랑귀... 근데 그게 너무 낯익은 설정과 상황이더라는... 누구는, 이 영화가 수컷들의 심리보고서라고 평을 하기도 했던데, 적절한 지적이다!!! 음, 어쩌면 영화의 배경이 강원도 정선이라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 건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우리 서클에서 정선으로 엠티를 갔던 적이 있었다. 정말 그 때 굉장했더랬다. 이틀 밤을 꼴딱 새며 마시고, 아침에는 해장술, 오후에는 체육대회... 무슨 극기훈련 ㅡ.ㅡ 사실, 당시에, 아침에 일어나 우리 너댓명이 해장술로 맥주 한 박스 먹는 걸 옆에서 본 신입생 하나가 도망가기도 했었다 ㅎㅎㅎ 이 영화가 중반 이상으로 넘어가면, 관람객들은 주인공과 함께 숙취를 경험할수밖에 없다. 빈 속에 보면 위험한 영화다. 그리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내내 웃다가 나올 수 있는 영화이지만, 한 가지 교훈은 있다. "낯선 곳에서의 과잉 친절을 조심하라!!!" ㅎㅎㅎ 영화를 본 자만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세상살이가 무료하신 분들께 강추!!! #6. 아리 폴만 감독 [바시르와 왈츠를] 2008

드디어 보게 되었다. 근데 먼저 본 친구들 말대로, 착잡하다... 최근의 가자 지구 공습 사건이 없었으면, 좀더 감동하면서 볼 수 있었을까? 꼭 그렇지도 않았을 것 같다.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반딧불의 묘]를 보면서 가졌던 그 미묘한 감동과 반감의 갈등은 이 영화에서도 재현되었다. 그냥, 이스라엘 사람들 - 자신들을 돌아보는 성찰적 영화라고 단정해버리면 참 괜찮은 영화인데... 영상이나 음악이나, 구성방식이나, 또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 하지만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분리되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나마 이런 성찰적 움직임마저 폄훼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알겠으나, 그리고 극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상' 혹은 '객체'로 그려진 것도 일견 이해할 수 있으나, 나의 즉자적 감정은 영화를 여전히 '변명'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다. 10년 뒤, 혹은 20년 뒤, 올해의 가자 학살을 돌아보는 이런 류의 영화가 또 나올까? 이제 족한 것 같은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1월의 책들

서로 어울리지는 않으나 흥미로운 책 몇 권의 기록을 남긴다. #1.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 웅진지식하우스 2007

키득거리면서 읽되 쌉싸름한 각성을 주는 책... 이런 거 보면 진중권의 글솜씨란 참... 가볍건, 무겁건, 한국인 혹은 한국사회를 낯설게 보기로 객관화시켜 현재의 질서와 습속이 얼마나 괴이하고 폭력적인가를 드러내는 글들이 많아졌음 좋겠다. 물론 읽는 사람이 많아야... ㅡ.ㅡ 몇 가지 기억해둘만한 표현들 남겨둔다 * 보수성은 이론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이론의 반성 없이 습관으로 존재한다. *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어느 작가는 이렇게 물었다. 몰라서 묻는가?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열정과 이해관계]에서 앨버트 허슈만은 (정념을) '이해관계'라고 답한다. 이해관계란 궁정에서는 정치적 이익을, 시장에서는 경제적 이익을 가리킨다. 여기서 모든 정념의 즉발적 표출을 단 하나의 정념, 즉 물질적 소유욕으로 억누르는 근대인의 전형이 탄생한다. 중세인이 질주하는 야생마라면, 근대인은 소유욕이라는 엔진에 계산능력이라는 핸들을 단 자동차다. 이렇게 미래의 이익을 위해 순간의 격정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계산하는 근대인, 그런 인간을 '호모 이코노미쿠스'라 부른다. * 수평적 예의는 수직적 무례로 간주되고, 수직적 예의는 수평적 무례를 낳는다. * 죄책감은 죄를 짓는 순간 발생하나, 수치심은 그것이 드러나는 시간에 비로소 시작된다. * 공포는 판단을 마비시킨다. 말도 못하는 아기들에게 원어민 선생 데려다가 영어를 가르치고, 이제 겨우 두세살 먹은 아기들에게 철학 수업을 받게 하는 '광기'는 공포에서 나온다. 공포는 인간을 잔혹하게 만든다. 유치원 다니는 아이에게 하루종일 과외공부를 시키거나, 영어발음을 좋게 한다고 해서 아이의 부리를 잘라내는 '잔혹극'도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다. 과거에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한 것이 '전쟁'의 공포였다면, 오늘날 한국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시장'의 공포다. * 한국인의 신체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해 보여도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은 바로 그 몸이다. 다만 그 신체는 급조된 근대화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고통받고 있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아직도 과거의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 오늘의 고통을 제거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면 한국인의 몸을 이루는 세 가지 역사적 층위가 최적의 배합을 이루도록 재배치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존재의 미학, 즉 요소들을 선택하는 테크네(techne)와 그것들을 배치하는 메트릭(metrik)이다.


#2. Joe Haldeman [Forever Free] Millenium 1999

말하자면 Forever 시리즈 삼부작의 최종편이자, 직접적으로는 Forever War 의 후일담 소설이라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할더만 할배께서는 이 글을 안 쓰셨어야 했다 ㅜ.ㅜ SF 소설에게 '안드로메다'로 간다는게 욕은 아닐진데, 마지막 장은 정말 이 소설이 안드로메다로 직행하고 있구나 하며 한숨만 푹푹 쉴 밖에... 주제 자체는 심오하다. 심지어 창조주로부터도 독립한 'forever free'라니... 하지만 이건 아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차마 쓰지는 못하겠으나 (누가 읽기는 하려나) 그 어처구니없음이라니... 할배... 너무 섭섭하고 속상해요.... ㅜ.ㅜ #3. 스타니스와프 램 [사이버리아드] 오멜라스 2008

[솔라리스]에 완전 반했던지라, 오멜라스의 램 시리즈 1편인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완전 만족!!! 일리아스의 로봇판 버전인 사이버리아드 - 호쾌한 범 우주적 스캔달과 해괴한 만담, 엽기적 행각... 그리고 그 속에 녹아있는 인간 사회, 지식인, 지배계급에 대한 비틀리고비틀린 풍자... 엄청난 신조어와 패러디 용어가 많아서 번역이 정말 어려웠을텐데, 문맥도 살리고 글맛도 살리고, 번역자 송경아의 능력에도 새삼 감탄했다. 조카 다람쥐가 딱 좋아할만한 스토리인데, 아직 초딩 3학년이 보기에는 불가능하다는게 아쉬울 뿐... 램의 다른 책들도 꼭 읽어봐야겠는걸!!! 이 분은 어쩜 이렇게 박학다식한걸까??? #4.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후마니타스 2008

술자리에서나 논하던 이야기들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서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싶다. 지식인, 특히 대학생태계에 거주하는 지식인들의 현재 모습에 대한 가장 '핵심적' 질문을 책의 앞부분 고병권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때는 (1980년대 지칭) '어느 계급 편에 설 것인가'를 물었지만, 지금은 '어느 계급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당신의 지식은 권력이나 부가 될 수도 있고, 투쟁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사회적 상징자본을 넘어서 구체적일 물질적 부와 정치적/사회적 권력까지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직업이 교수 말고 어디 흔하겠나? 이제 그러한 물질적 토대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의식을 결정하고 있으니, 본능에 충실한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봐야겠다. 이 책이나, 최근 읽은 다른 사회학 논문은 한결같이 대학사회의 미국 편향을 비판하고 있다. 논문은 교수사회의 내면화된 국가주의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발전을 위해!!!)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했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별도의 현상이 아니며, 성찰없는 학문적 자세가 그 본질이라고 본다. 미국에서 공부를 했다고 다 친미적/시장적 시각을 갖게 되는 건 아니다. 리영희 교수도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최장집, 신광영 교수도 소위 미 주류 대학 출신이다. 문제는 얼마나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한국적 맥락에 맞게 해석하느냐 하는 능력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국가주의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났'음을 꾸준히 내면화한 범생이들의 '자연스러운' 귀결인 것 같다. (미국의 과학자들, 특히 NAS에 속한 최고의 생물학자들이 기독교 신자인 경우가 드문 것에 비해 한국의 과학자들 사이에 기독교 신자가 많은 것도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결국, 기존의 것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의심 없는, 즉 성찰없는 모범적(!) 학습행위가 이러한 문제의 근간이 아닐까? 소위 한국사회 최고 엘리트들의 문제를 달랑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고 단정해버리기는 뭐하지만, 달리 다른 답도 잘 모르겠다. 근데 좀 슬프지 않나? 가장 자유롭고 회의적인 이성을 가졌을 거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되는 이들의 모습이 이렇다니... 아참, 한국 사회 지식인의 이념적 지도를 그리면서 리영희 교수를 언급한 부분은 참 인상적이었다. "'해방된 사회에서 동창생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만사에 불편했다'고 되뇌고 했던 그는 평생 누구와 무리지어 세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영화 세 편

이번 설 연휴에 일거리를 잔뜩 싸들고 올라왔다. 논문과 칼럼을 비롯한 각종 원고들!!! 노트북에 책이랑 자료를 바리바리 싸들고 서울역에 도착해보니, 옷보따리만 안들었지, 영락없는 상경처녀... ㅡ.ㅡ 그러면서도, 밀린 영화를 꼭 보고야말겠다는 야심찬 결의를 했더랬다. 그리하여, 어제 그제 낮에 계속 영화를 보러나갔다. #1. [워낭소리] 이충렬 감독 2008년 작

그저께, 모처럼 4인방이 모여 감상. 언론과 각종 개인 블로그들에서의 평은 더할나위없는 상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찜찜한은 도대체 무엇? 한마디로, 영화가 지나치게 매끈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도시 생활의 피로를 절감하면서 부쩍 증폭된 향수를 가진 이들, 딱 그들이 원하는 걸 보여주는 영화가 아닌가 싶었다... 심지어 공사판 장양은 저 9남매를 위한 영화라고까지 '막말'을 했다. ㅡ.ㅡ 농약치고 트랙터로 모심는 옆논의 모습과 철저하게 대비되는 할아버지네 농사모습, 할배할매는 물론, 마을주민과 자식들가지 모두 만날 때마다 소이야기만 하는 모습, 우시장의 부감슛까지... 원래 나는 이 영화가 그냥 '다큐'인 줄 알았었다. 물론 다큐라고 연출이 없지야 않겠으나, 이런 인간극장 식의 감정고양 매끈 연출이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더구나 엔딩 크레딧은 이땅의 모든 아버지들과 소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하니, 도대체 그 뒷바라지 한 이 땅의 모든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죄다 어디로 가신게냐??? 물론, 이 모든걸 덮어줄만한 진실의 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경화된 관절로 한발한발 걸음을 옮기는 소의 애달픈 모습,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기어다니면서도' 소를 챙겨주는 할아버지의 모습, 이 둘을 향한 궁시렁쟁이 할머니의 애틋함 - 그래도 삶은 지속되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 사이의 진심은 통하게 마련이라는 그 서럽고도 애잔한 진실을 내 어찌 폄훼할 수 있을까? 그런데, 죽어라 40년 동안 일만 하다가 스러져간 소는, 할배 할매의 사랑으로 행복했을까?


#2.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타셈 싱 감독, 2006년 작

결국 못 보고 지나갈 줄 알았는데, 보게 되어 어찌나 다행인지... 아마도, 내 평생 본 판타지 영화 중에 최고??? 우선, 그 초현실적인 영상 - 매 장면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뛰어넘고 있었다. 사실, 오프닝 씬에서부터 나는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음악은 또 어떻고? 그리고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거니, 꼬마 알렉산드리아의 감정 연기는 정말... 꼬마아이는 실제로 영화를 찍으며 영어도 배우고, 빠진 앞니도 새로 나고, 그리고 성장했단다. 꼬마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해... 현실과 허구를 연결하는 빼어난 내러티브와 세상에 대한 성찰, 그리고 은근히 귀여운 유머들... 이 감독은 전세계축구 스타들이 공차기로 연결되었던 그 유명한 펩시 광고를 찍은 양반이다. 그렇게 수 년 동안 돈모으고 개인재산 팔아서 이 영화를 찍었단다. DVD가 출시되면 꼭! 장만해두어야겠다... 안 보신 이들.... 어여 보세요. 정말 강추예염... #3. [렛미인] 토마슨 알프레드슨 감독, 2008년작

사실, 친구 M과 함께 이 영화를 본 건 작년 말이다. 여행 떠나는 날 오전에 잠깐... 이것도 금방 극장에서 내릴 줄 알고 서둘러봤는데, 의외로 여태 상영 중이다. 이 영화에 대한 감정은 좀 복잡미묘하다. 인간세계, 혹은 학교라는 정글로부터 외면받은 소년소녀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에 빠져가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리고 눈과 피, 푸른 어둠... 이 서늘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도 잊혀지기 어려운 아름다움. 그런데,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도 좋은 걸까? 주인공 하나 살리기 위해 전 부대가 몰살당하는 헐리우드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이 영화의 플롯은 뭐가 다른 걸까? 본인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뱀파이어 딸 이엘리를 위해 끊임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또 신분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얼굴에 염산을 붓고,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으로 딸에게 자신의 피를 먹인 후 빌딩에서 떨어지는 이엘리 아빠의 모습이나, 뱀파이어로 변한 자신의 존재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는 마을 여인의 모습이 그리 쉽사리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일까?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건말건, 둘이 알콩달콩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더래요... 이건 아니잖아??? 우쨌든, 누군가 초대해주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는 뱀파이어의 모습 ('나를 들어가게 해줘: let me in')은 비단 그 세계뿐이 아니라, 인간 세계에도 들어맞는 것 같다. 누군가 마음을 열고 불러주기 전까지는, 억지로 혹은 강제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니 말이다 ㅡ.ㅡ 이거 같이 보러갔던 친구랑 '바시르와 왈츠를'도 함께 보자고 했었는데 어찌나 시간 맞추기가 어려운지... 영화 내려버릴까봐 걱정일세!!! 혼자 가서 몰래 보면 배신일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그들의 포스... ㅡ.ㅡ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지향 중 하나가 '여한없는 삶'이다. 물론, 세상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나, 최소한, 충분히 할 수도 있었던 선택을 미적거리다 놓친 후 두고두고 아쉬워하지는 말자는 거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김광석 콘서트 한번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못 보게 된 것이, 여한을 남긴 일례가 되겠다. 작은 즐거움과 행복을 유예하지 않는 삶도, 학습과 노력, 심지어는 남들에게 우습게 보일지언정 결단(?)을 요구하기도 한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런 여한 박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오늘 내가 감행한 도발은 대구까지 자우림 콘서트를 보러갔다온 일이다 ㅎㅎㅎ


아주 오래전부터 한번 꼭 보고 싶었는데, 어찌어찌하다보니 기회를 놓쳤던 게 어언 몇 년이던가... 2008년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십장생 같은 일들만 생기는 줄 알았는데, 막바지에 뜻하지 아니한 수확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콘서트 장에서 생긴 일이다. 내가 예매한 좌석에 음향장비가 세워지는 바람에 (이런 황당한???) 주최측에서 자리를 바꿔준거다. 무대 바로 밑으로 ㅎㅎㅎㅎㅎㅎ 이게 웬 떡이냐!!! 그네들의 유쾌한 등장... 사실, 공연에 가서 열렬히 호응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사람들 열광해서 일어나도 마지막에 죽지못해 겨우 일어나는 수준 .... 근데, 오늘 두 시간 거의 내내 서 있지 않을 수 없었더랬다. 심장의 리듬이 리셋되는 기분이랄까? 아우.. 정말 그 대단한 포스!!! (근데 두 시간 지나고 나니까 노친네들이 왜 디너쇼 가는지 알겠더라... 발바닥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ㅎㅎㅎㅎㅎㅎ) 김윤아의 카리스마야 진즉 간파하고 있었지만, 막상 가까이서 대면하고 보니 정말 그 포스가... 자신을 폭발시키는 에너지와 주변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그 내공이 감히 범접할 수가 없더라. 주변에서 기 세다는 사람을 수 없이 보았지만 (심지어 나보고 기가 세다는 사람도 있는데 이건 쫌...), 이렇게 압도당하는 느낌은 처음인 듯... 내 옆에 있던 범생이 스타일 두 남학생은 김윤아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완전 자지러지더라... 윤아 누나 눈에서 나온 레이저 맞고 감전된 귀여운 강아지들 같았음 ㅎㅎ 완전 귀엽더라니!!! 저렇게 다른 이들을 행복하고 즐겁게 만들어줄 수 있다니... 본인들도 행복할거야... (타인들에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는 이들이 꼭 스스로 불행한 건 아니겠지만서도 ㅎㅎㅎ 심지어 거기에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분들도 있는데 뭐 ㅎㅎ) 나도 2008년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주변 사람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듬뿍 나눠주리다. 그러려면 내일 보고서 원고 마무리부터 깔끔하게 하여 공동연구자 샘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ㅎ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