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프리챌커뮤니티 다큐나루에 썼던 제작일지 중에서
1. 류미례가 나를 <엄마...> 촬영스텝으로 등록해서 아이디카드를 장만해줬는데도'
부산영화제에 못갔다
서울을 맘대로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사실 그 영화에서 내가 촬영한 장면은 스텝 스크롤이 올라가는 맨 마지막 장면에
단 한 컷만이, 그것도 스틸로 들어가 있을 뿐이며
하은이가 날마다 가는 놀이방에서 단 하루를 찍었을 뿐인데도
번번이 스텝이라고 챙겨주는 게 고맙고 늘 미안하다
2. 이사를 앞두고 하드 디스크가 망가졌을 때
과장 안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 디스크는 자막 작업을 위해서
그리고 <돌 속에 갇힌 말>과 <금禁>마스터를 저장해두기 위해
직접 용산에 가서 구입한 것인데
편집본 프로젝트 파일들이 저장된 다른 드라이브에서 사고가 잦아서
그것을 그대로 본체에 설치해서 사용하던 중이었다
내 맘대로 설정을 건드리거나 함부로 만지지도 않았고
컴을 잘 다루는 사람이 와서 점퍼 위치까지 세심하게 관찰해가며 달아준 것이다
그래서 안심하고 수정을 했고
'이제사 마스터를 출력하는구나'하고
export tape을 클릭하자 마자...사라졌다
J드라이브였는데 그 안에 들어있던 모든 폴더들이 사라졌다
표용수씨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영상미디어센터에서 거래하는 데이타복구업체를 소개해줬고
헐레벌떡 달려갔더니 전문가들도 원인을 알 수 없다며 고개를 설레설레했다
열심히 해보기는 하겠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리는 그들에게 그 물건을 넘겨주고
G와 H에 남아있던 최근 프로젝트 파일들을 끌어모으다가 이사를 했다
오늘 그 하드디스크를 받았는데 마스터 파일의 절반만 겨우 살아났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말했다
당신이 뭘 잘못한 게 아닙니다, 기계가 잘못된 것도 아니구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운이 나쁘다, 운이 나쁘다...그 말도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석 달동안 운이 나쁠 수가 있을까
3.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아무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더라도
잠시 마음이라도 달래주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면서 냉정해지는 사람도 있다
폭염 때문에 감기몸살때문에
혹은 장염으로 체력저하로 밥을 못먹고 잠을 못잘 때
상한 내 얼굴을 측은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련하게 일한다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한때는 믿고 좋아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도와주신 분들에 그 이름들을 다 새겨넣었다
어쨌건 사람공부를 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니까
나는 사람보는 눈이 정말 없다
바보다
3. 새로 이사한 집은 사무실 짐과 내가 살던 집의 짐이 다 들어가지지가 않아서
책장과 소파와 기타등등 많은 짐을 버려야 했다
가져가기로 한 사람들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재활용센터에 전화를 했는데 그들도 휙 둘러보더니 그냥 가버렸다
충분히 5년은 더 쓸 수 있는데...
동사무소에 가서 폐기물신청을 했더니 그 담당자가 그랬다
요새는 물건이 하도 많이 나와서
재활용센터에서도 값나가는 거 아니면 싣고 가지도 않아요
우리도 이런 물건들 처리하느라 아주 골이 아픕니다
언제나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가보다
씁쓸하다
스티커를 부착해놨는데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인지
아니면 간밤에 비바람이 불면서 그 스티커에 적은 물품 목록이 지워진 것인지
다른 것들은 치운 모양인데 소파가 건물입구에 덩그렇게 남아있다
도로 가지고 들어갈까? 쳐다볼 때 마다 답답하다
저 소파에서 여름을 세 번 났는데...밤샐 때 마다 나를 편안하게 쉬게 해준 친구였는데...
처음 그것이 합정동 사무실에 들어오던 날 정말 기분좋았었는데...
아쉽지만 하는 수 없다
4. 새 공간은 좋다
따뜻하고 밝다
사실...집을 옮길 때 마다 그 집이 마음에 든다
집 보는 눈도 별로인데 그저 마음을 편하게 먹어서 그런걸까?
5.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면서 살 수는 없는걸까
사람이 무섭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만나야지
그러지 못한다면 다큐멘터리도 일상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는 누구보다 심약하면서 겉으로만 야멸찬 듯 행동하는 나 자신을
조금씩 이끌고가야만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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