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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여성문화이론연구소 자료실

http://www.gofeminist.org/Board/Content.asp?TxtCode=23271&Page=1&BoardCode=Board002

 

 

노라 옥자 켈러 <종군위안부 ( 1997)>

 

 

 

전지구적인 제국주의와 가부장적 식민압제 및 남성주의적 민족주의의 물결이 거셌고 거센 20세기, "아무런 이름이 없던" ("no name") "제3세계" 여성의 원혼들이 태평양을 건너와 딸들을 홀리고 그 딸들의 독자를 홀린다. <여성전사>의 작가 맥신 홍 킹스턴(이 사람은 확실히 대단한 작가다. 적어도 아시아계 미국 문학에서는 비포/애프터 킹스턴이라 할 만허니)이 "이름을 빼앗긴 채 자살해 간" 고모의 원혼이 떠돌지 못하게 글쓰기로 고정하여 달랬던 것처럼, <종군위안부>의 작가 노라 옥자 켈러도 떠도는 여성원혼들을 "고이" 떠돌게 냅두지 않는다.

킹스턴이 자기 고모의 혼령에 홀렸던 것처럼, 켈러도 어느날 하와이에 일본군 성노예의 참상을 증언하러온 황금주 할머니의 증언에 "홀린다." 글쓰기를 통해서 켈러도 한판 "굿"을 벌이며 비체화된 여성들의 원혼을 "달랜다." 이 텍스트를 "쉽사리" 큰 단어들로만 이야기한다면, 20세기의 제국주의와 여성억압(일본군 성노예는 한마디로 저 유태인들이 맨날 산업화하고 기억하려고 열라 애쓰는 사건의 용어를 빌어쓰자면, "성적인 홀로코스트"라 할 수 있겠지)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겠지만, 참으로 복잡한 것이라 차라리 봉합하고자픈 욕구가 솓구쳐 온다.

어쩌면, 아니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젠더화된 억압(억압이란 기본적으로 젠더 억압이며 중층결정의 양식 또한 젠더화 양식이다) 하에서, 여성들에게 글쓰기는 한 판의 "굿"이자 (약한자의 강한?) 무기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글쓰기는 자신과 타자들을 치유하는(이것땜시 모한티는 벨훅스와 트린을 열라 까지만. 여성의 경험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가정을 의문시하지 않는 본질주의적이라고) 샤먼적 힘이 있는 것이라는 진부한 진리를 <종군위안부> 역시 예증한다. 켈러의 책은 여성의 몸이 가장 끔찍한 류의 비체가 되는 방식이 섹슈얼리티를 통해서라는 점 역시 드러낸다. 오, 휴/우매니티여, 섹슈얼리티여!

(참고루, 이 비체, 크리스테바가 말한 비체란 초국가적이고 다문화적이며 문화사 자체가 가장 강력한 설명틀이 되는 우리 시대의 종속화 양식이다. 미국 안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렇다. "법적으로는 느그들도 "우리" 국민이긴 헌데 문화적으론 외국인이여/'우리 것이 아니여'(alien)"함시롱 싸가지 없이 하이픈을 붙여 한국곕네 아프리카곕네 하는 하이픈화의 정치학. 이것은 또한 포용하면서도 배제하는 포용/억제(containment)의 술수이기도 하다. )

자원했던 (자원할 때도 너부리는 이미 후회할 것을 예견했었다......아아! 너부리의 욕망은 언제나 절제를 모르고 그리하야 언제나 후회와 부담을 무릅쓰는고야 마는) 발제 준비를 해야지만, 이 켈러의 "허구적" 이야기에 왜 그리 불편시련 것일까.... 마고약도 아닌 이 책은 가슴의 살을 후벼파고 도려낸다. 20세기 판 말뜻 그대로의 하트 오브 다크니스.

이 책은 픽션이고 문학적 재현일 뿐이다...하고 여러 번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하지만, 일본군 성노예의 역사! 진실!은 그저 (일본 정부에 대해서 한국 정부가 되풀이했던 대로) "과거지사"가 아니다. 이 문제는 전지구화의 압력하에서 점증적으로 악화된 채 갱신되고 있는 (초국가적) 민족주의라는 현금의 문제와도 복잡하게 교직되어 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문학적 재현인 이 소설은 허구와 역사의 경계를 흐뜨러 뜨리고 우리에게 "불편"하라고 강요한다. 또한 이런 것으로서 이 책은 재현 일반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하고, 또한 내가 왜 한국계 여성 미국인 문학 작품을 학위 논문에 한 장이나 그 이상을 할애하고자 하는 개인적 문제도 생각하도록 강제한다.

20여개의 한국 페미니스트 조직이 만든 정대협의 줄기찬 운동/교섭으로 90년대 들어서야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그나마 어느 정도 사람들의 인식에 들어왔다. "진지한" 켈러의 이 책도 분명 이런 물결에 편승, 가세, 공헌했겠지만, 조지고 부시는 텍사스 주의 한 대학원 수업에서 읽자니 참으로 묘한 심정이다. 어찌보면 지정학적으로 구체적인 이 문제를 우리시대의 미국의 생활, 문화와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이런 일도 있었구나....쯧쯧...." 역사의 참상과 차이의 문제들이 대학 제도를 통해서 (이내 또 시들어갈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며) 담론적으로 "소비"되고, 출판 시장을 통해서 문화적으로 "소비"되는 이 미국에서, 텍스트 곳곳 너무나 한국적인 문화적 기호들이 지뢰처럼 박혀있고 한국/동북아 주체들에게 더욱 더 반향과 공명이 많을 이 텍스트에 문학 연구자로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어떤 참신한 언어와 새로와보이는 형식에 담아 "저들"과 나 자신을 위협할 것인가? 이 책의 많은 부분은 보편주의적 글로발 페미니즘에 저항하지만, 동시에 글로발 페미니즘의 우산 하에서라야 읽혀지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너부리는 "잘놀고"(playful), 해러웨이가 말한 "아이러니"의 불경을 일삼으며 재미를 좋아하고(fun-loving), 때로 탈젠더로 가고자 하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

그란데, 이 책은 이런 너부리의 발목을 잡는다.

20세기 후반들어 페미니즘은 지역, 국적, 인종, 성적 지향, 계급, 문화 등의 갈래를 따라 핵분열을 일으켜 왔다. 포스트구조주의가 차이들의 복권에 상당히 이론적 힘을 실어준 것 같지만 (철학자들은 항상 세상이 (자기들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고 믿는 바보들이다), 실상 이런 차이들의 핵분열은 차이들을 위계적인 사유에서 절단탈구시켜 다르게 구성배열하고자 하는 다른 삶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힘을 가동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켈러가 어머니-딸을 중심으로 소설을 썼던 것은 아마도 이런 차이의 핵분열(켈러는 이 핵분열의 가장 비체적인 뇌관을 재현한다)을 어머니로부터 딸들에게 전해지는 여성들 공동의 자산, 유산으로 삼을 필요성이 있으며, 그 역할을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서 스스로에게 위임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주 진부한 또 하나의 페미니즘 상식이 나온다: 재현이란 (알고보면 사이비인) 보편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sympathy)이자 "감정이입"(empathy)이니.

켈러의 아키코/순효 앞에서, 페미니즘 한다는 우리 역시, 또한 "잘들 놀고있는" 미국판 포스트모던 페미니즘들이 여성 섹슈얼리티, 몸을 살아숨쉬는 여성들의 피와 살, 육체적 삶의 현실에서 따로 떼어 관념적인/담론상의 차이의 항으로 만드는 작태에 적극적으로 공모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베카는 알게 된다. 자기 엄마가 겪었던 문제는 봉합해서는 안 되는 점이라는 점을. 순효의 녹음테잎은 위계적으로 봉합해도,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자 하는 (알고보니) 주체인 여성의 욕망과 삶이 그 위계적 봉합선을 넘어서고 튿어낸다는 것, 그리하야 딸들에게 봉합하지 말고 튿어내어 리좀적 주체가 되라는, 살아서는 주체됨을 부정당했지만 증언으로 주체임을 증명한 바로 그 산 주체, 허구상 "우리"를 끊임없이 "홀려대는" 유목적 원혼의 절규였던가. . .

이렇게 쓰고 나도, 이 책이 주는 불편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왜 일본군성노예의 고통스럽고 끔찍한 역사를 다시 기억으로부터/증언으로부터 불러내어 쓰는가? 그리하여 왜 이토록 나를 불편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가?

차학경은 <딕테>에서 이렇게 말한다.

"왜 지금 그 모든 것을 부활시키냐고? 과거로부터. 역사를, 그 오래된 상처를. 오래된 감정을 또다시 말이다.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 지금 그것을 명명함으로써 다시는 망각 속에 잊혀진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라고 (원서, 33).

"위안부"질 당하느라 생긴 몸, 그리하야 정신의 상처를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트라우마라 할 수 있는데, 트라우마란 일종의 "정신은 죽었으나 몸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하게되는 그런 패턴"을 지닌 행동을 하게 된다. (혹자는 이것이 전일본군성노예였던 할머니들이 무당이 된 이유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아까 앞서 말한 종속화의 양식으로서 비체를 일본군 성노예라는 "성적 홀로코스트"의 경우와 연결해보자면, 이 비체를 문학적으로 재현했을때 사회적 침묵시키기(치욕과 민족의 자존심! 말끝을 흐리며 하는 이제와서...라는 레토릭에 숨은 끈질기게스리 남성주의적 민족주의(여기서 여성은 나라요 민족이다)의 욕망)를 초과하는 "말하고자 하는 욕망"(서발턴은 정말로 말할 수 있고 말한다! 보라, 저 할머니들의 증언을! 매주 교회가듯 꼬박꼬박 참여하시는 수요집회를 보라! 단지 우리가 듣지 않고자 무의식적인 척함시롱 싸가지 없이 고의적으로 안들으려 할뿐....)은 때로 유령적 형상으로 드러낸다. 왜 유령이냐고? 문학적 재현상 바로 그 초과/잉여를, 그 모든 구속과 억제, 억압을 뛰어넘는, <주체>로서의 행동*교섭능력과 욕망, 요구를 어떤 합리성과 정확성으로 재현한단 말인가? (<서발턴연구회>처럼? 글쎄....)

"배제와 비가시화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유령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다 (7) . . . 이 이야기들은 재현상의 실수를 고치지도 아니하며, 기억이(즉 역사가) 우선적으로 생산되었던 조건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미래를 위해서 대항기억을 향해간다"(Avery Gordon 22)

트라우마로 남는 몸, 그리하여 정신(pschy)의 상흔들은 유령처럼 출몰하는데, 이 때의 유령은 행동*교섭능력, 욕망을 지니고서 무언가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유령들이다. 켈러가 <종군위안부>에서 불러들이는 일본군 성노예의 유령적 출몰에서 우리는 이 출몰하는 유령들이 "피해자"였던 성노예의 지위에 의해서 부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목도한다. 비유적으로 죽은 아키코/순효는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온 세상에 대고 소리질러 고발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신의 "훼손된" 몸과 정신을 긍정하고자 하는 행동*교섭능력을 가진 유령적 인물이다. 유령은 실제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이며(not actual but real) 물질적 효과를 불러온다.

이 살아있는 유령들에게는 공식 역사가 숨기는 아카이브가 있는데, 트린 민하는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세계 최초의 아카이브 혹은 도서관은 여성들의 기억이었다" (Woman Native Other, 112)

 

----------------너부리

 

 

 

2004/12/22 21:05 2004/12/22 2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