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얼거리다

from 돌속에갇힌말 2005/01/31 16:3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2004년 7월,  프리챌커뮤니티 다큐나루에 썼던 제작일지 중에서

 

 

1. 류미례가 나를 <엄마...> 촬영스텝으로 등록해서 아이디카드를 장만해줬는데도' 

    부산영화제에 못갔다

    서울을 맘대로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사실 그 영화에서 내가 촬영한 장면은 스텝 스크롤이 올라가는 맨 마지막 장면에

    단 한 컷만이, 그것도 스틸로 들어가 있을 뿐이며

    하은이가 날마다 가는 놀이방에서 단 하루를 찍었을 뿐인데도

    번번이 스텝이라고 챙겨주는 게 고맙고 늘 미안하다

 

 

2. 이사를 앞두고 하드 디스크가 망가졌을 때

    과장 안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 디스크는 자막 작업을 위해서

    그리고 <돌 속에 갇힌 말>과 <금禁>마스터를 저장해두기 위해

    직접 용산에 가서 구입한 것인데

    편집본 프로젝트 파일들이 저장된 다른 드라이브에서 사고가 잦아서

    그것을 그대로 본체에 설치해서 사용하던 중이었다

    내 맘대로 설정을 건드리거나 함부로 만지지도 않았고

    컴을 잘 다루는 사람이 와서 점퍼 위치까지 세심하게 관찰해가며 달아준 것이다

    그래서 안심하고 수정을 했고

    '이제사 마스터를 출력하는구나'하고 

    export tape을 클릭하자 마자...사라졌다

    J드라이브였는데 그 안에 들어있던 모든 폴더들이 사라졌다

    표용수씨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영상미디어센터에서 거래하는 데이타복구업체를 소개해줬고

    헐레벌떡 달려갔더니 전문가들도 원인을 알 수 없다며 고개를 설레설레했다

    열심히 해보기는 하겠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리는 그들에게 그 물건을 넘겨주고

    G와 H에 남아있던 최근 프로젝트 파일들을 끌어모으다가 이사를 했다

    오늘 그 하드디스크를 받았는데 마스터 파일의 절반만 겨우 살아났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말했다

    당신이 뭘 잘못한 게 아닙니다, 기계가 잘못된 것도 아니구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운이 나쁘다, 운이 나쁘다...그 말도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석 달동안 운이 나쁠 수가 있을까

 

3.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아무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더라도

    잠시 마음이라도 달래주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면서 냉정해지는 사람도 있다

    폭염 때문에 감기몸살때문에

    혹은 장염으로 체력저하로 밥을 못먹고 잠을 못잘 때

    상한 내 얼굴을 측은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련하게 일한다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한때는 믿고 좋아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도와주신 분들에 그 이름들을 다 새겨넣었다

    어쨌건 사람공부를 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니까

    나는 사람보는 눈이 정말 없다

    바보다

 

3. 새로 이사한 집은 사무실 짐과 내가 살던 집의 짐이 다 들어가지지가 않아서

   책장과 소파와 기타등등 많은 짐을 버려야 했다

   가져가기로 한 사람들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재활용센터에 전화를 했는데 그들도 휙 둘러보더니 그냥 가버렸다

   충분히 5년은 더 쓸 수 있는데...

   동사무소에 가서 폐기물신청을 했더니 그 담당자가 그랬다

   요새는 물건이 하도 많이 나와서

   재활용센터에서도 값나가는 거 아니면 싣고 가지도 않아요

   우리도 이런 물건들 처리하느라 아주 골이 아픕니다

    언제나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가보다

    씁쓸하다

    스티커를 부착해놨는데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인지

    아니면 간밤에 비바람이 불면서 그 스티커에 적은 물품 목록이 지워진 것인지

    다른 것들은 치운 모양인데 소파가 건물입구에 덩그렇게 남아있다

    도로 가지고 들어갈까? 쳐다볼 때 마다 답답하다

    저 소파에서 여름을 세 번 났는데...밤샐 때 마다 나를 편안하게 쉬게 해준 친구였는데...

    처음 그것이 합정동 사무실에 들어오던 날 정말 기분좋았었는데...

    아쉽지만 하는 수 없다

 

4. 새 공간은 좋다

    따뜻하고 밝다

    사실...집을 옮길 때 마다 그 집이 마음에 든다

    집 보는 눈도 별로인데 그저 마음을 편하게 먹어서 그런걸까?

 

5.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면서 살 수는 없는걸까

   사람이 무섭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만나야지

   그러지 못한다면 다큐멘터리도 일상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는 누구보다 심약하면서 겉으로만 야멸찬 듯 행동하는 나 자신을

   조금씩 이끌고가야만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2005/01/31 16:35 2005/01/31 1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