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통신|융합 - 2007/10/25 21:45

* 참세상에 쓴 글

 

MS제국의 철옹성, 마침내 균열

[기자의 눈] 유럽 반독점 분쟁에서 MS의 굴복이 시사하는 바

 

한국에서 컴퓨터를 사게 되면 대개 기본으로 깔리는 소프트웨어들이 정해져있다. 당신이 컴퓨터에 관한한 대한민국 1%쯤 되는 매니아가 아니라면, 윈도우즈 비스타(Windows Vista) 나 윈도우즈 엑스피(Windows XP)라는 운영체제에 윈도우즈 익스플로러(Explorer)와 미디어플레이어(Media Player)가 세쌍둥이마냥 컴퓨터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MS)라는 하나의 기업이 PC 운영체제 시장의 99%이상을 장악함으로써 민중이 인터넷과 영상을 볼 도구 선택의 권리까지 침해해가는 동안, 거대 독점 세력에 대응하여 우리 사회가 선택한 무관심은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지난 22일 유럽연합(Europe Union, EU)은 MS사가 시장 지배를 통해 경쟁을 제한한 점에 대해 시인하고 EU가 2004년 제시한 독점금지 명령을 이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실제 이번 사건은 1998년 MS의 경쟁사인 선마이크로시스템스(SunMicroSystems, Sun)사가 MS사의 소프트웨어 개발 정보 미공개와 윈도우즈 미디어 플레이어 끼워팔기로 인한 경쟁 방해에 대해 EU에 제소하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EU과 MS사의 반독점 분쟁은 9년을 끌어온 끝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명령의 주요 내용은 그동안 MS가 윈도우즈 소스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타사의 윈도우즈 기반 소프트웨어 개발을 제한했던 관행을 깨고 저렴한 가격의 수수료만으로 별도의 특허권 확보 없이 소스 정보에 대한 접근과 사용을 제공하도록 한 점이다. 또한 타사가 MS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경우 지불했던 특허비용을 매출의 5.95%에서 0.4%로 크게 낮추었다.


더불어 MS사는 비상업용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에 대해 비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 누구나 복제, 재배포할 권리를 인정할 계획이다.


사실 Sun사가 처음 끼워팔기 규제를 제기했을 당시에는 이 정도의 조치만으로 MS의 독점력을 약화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번 발표의 내용을 보면 MS가 보유한 지적재산권에 대한 일정 정도의 제재와 개입을 가하는 수준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후 EU가 조사 중인 구글이나 인텔, 아도비같은 거대 정보기술업체에 대해서도 반독점 정책 적용과 기업들의 보다 수평적 자율 경쟁체제 구축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거대 자본의 독점은 곧 가격 결정권을 자본에게 이양함으로써 파생되는 민생 경제의 종속화를 의미하며, 더불어 특정 기술들이 생활화되면서 우리의 삶에 침투하여 삶의 습관과 문화를 변경, 왜곡시키는 중독현상과 직결된다. 그들이 제공하는 미디어플레이어로 영상과 음악을 듣는 사이 MS사가 제공하는 화면을 소비하게 되고, 익스플로러의 모양새에 익숙해지면서 MS가 추가하는 버튼의 의도나 가져가는 나의 개인정보에 무감각해지게 된다.


EU에 비해 훨씬 타협적인 미국조차도 윈도우즈의 폭압적 시장 점유율에 대해 몇몇 주 정부의 검찰총장들이 나서서 MS 감시기간 연장을 주장하며 공익 차원에서 심대한 문제라고 개탄하고 있다. 반독점 정책을 뿌리내려 민중의 권리를 지켜주지는 못할 망정, FTA를 통한 지적재산권 강화와 이로 인한 독점 강화의 앞길을 터주고 불법소프트웨어 단속에 경찰병력을 지원하는 우리 사회의 무능한 현실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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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5 21:45 2007/10/25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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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10/21 14:41

* 밝은집 님의 한국현대사진의 풍경 에 관련된 글

 

한국 현대 사진계 원로, 중견, 신진들의 사진을 총망라해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별로 3섹터로 나뉜 전시의 구획은 3세대간 구분이기도 하지만, 사진을 통해 바라보는 피사체와 카메라에 대한 작가의 위치같기도 하다.

 

희한하게도 실제 피사체와의 물리적 거리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원로에서 신진으로 갈수록

피사체는 사람-자연-사물(또는 투영되는 사회)로,

피사체와의 거리는 다가옴에서 멀어짐으로,

카메라와의 거리는 도구에서 친구로 변하는 느낌이다.

 

 

1.

1880년대 사진이 도입된 이후 1960년대 프로사진가 개념이 정착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는 1세대들의 사진에서는 대체로 피사체 내부까지 꿰뚫어 사진이라는 정지화면에 담아내고자하는 엄청난 욕망이 느껴진다.

 

육명심 [백민-강원도 강릉](1983)

 

 




주명덕 [논산](1971)

 

심지어 극히 거리감을 두고 싶은 피사체에게조차 바라봄의 거리에 대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러한 거리감 개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만병통치가 아닌- 가벼운 두통을 동반할만큼 피사체에 대한 진중한 고민을 하게끔 유도해낸다.

 

황규태 [만병통치](2000)

 

 

 

2.

중견 집단들은 사진전을 안착화시킨 세대이기도 하다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요인도 많겠지만- 사진의 크기가 커지면서 화면 안에 자연이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혹여 사람이 주요 피사체라 하더라도 주변화하거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묻어나는 피사체에 대한 거리는

피사체의 중심이 사람에서 자연으로 옮겨지면서 보다 드넓은 시야를 선사하는 자연을 닮아가고 있다.

 

민병현 [SNOWLAND.SL165](2006)

 

배병우 [소나무](1992)

b

 

김아타 [ON-AIR Project 056-1](2004)

 

 

 

3.

중견 작가들이 새로이 확장시킨 피사체가 자연이라면,

신진 작가들이 새로이 확장시킨 피사체는 사회다.

물론 1세대도 인물이 있으니 주변의 사회를 담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 '사람'으로부터 파생된 공간을 담은 것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반면, 신진들은 사회 자체가 핵심 피사체로써 사람이나 사물, 간혹 자연이 그 공간안에 배치되어진 느낌이다.

때론 작가가 아닌 카메라가 원하는 대로 찍은 것 아닐까 싶은 사진도 있다. 그만큼 사물을 대한 감정의 깊이가 달라짐을 느끼게 한다.

 

김옥선 [Alex and Eric](2004)

 

 

아래 사진은 너무 작게 축소되어 놓칠 부분이 있는데,

실제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전화박스 바닥에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작은 병정인형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백승우 [Real World II](2006)


 

대체로 감정 투여의 대상을 사람과 자연까지 봐준다 하더라도 사물로 확장시키는 건 이상한 거부감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물과 그 사람으로 구성되는 것이 사회이고,

사회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다보면 사물에 대한 '바라보기'는 당연한 결과치다.

 

확실히 상대를 꿰뚫어 표현하고싶고 관계 맺고 싶은 욕망이 21세기가 된 우리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지금의 시대에 대뇌의 명령을 무시하고 간뇌의 감성을 증폭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젝트일 수 있다.

 

현대인들은 조금씩 사회가 할퀴고 간 상처를 품고 있는 일종의 정신병자들이며, 소외라는 현상의 핵심 대상들이다.

따라서 뭣 모르고 상대방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을 풀가동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는 순간이 오면 - 물론 계속 제정신이 아니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 상대방이 요구하는 감정의 홍수에 휩쓸려버리게 된다.

실제 요즘은 누구를 만나든 마치 정신과 상담 치료를 원하는 사람마냥

끊임없이 말을 한다. 그러나 어떻게 듣는 지를, 관계의 진정성을 잊은 존재들 같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조금씩 감정의 경계선을 긋는다. 

동시에 생존 전략 차원에서 사회를 통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진실,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진리를 찾고자 한다.

 

 

* 사진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한국현대사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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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1 14:41 2007/10/2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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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10/14 12:16

나의 '서커스'에 대한 인상은 정지화면이다.


누군가 몸을 꺾든, 코끼리의 발을 올리게 하든, 어떠한 묘기를 보여주는 과정 후반에는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잠시간의 정지 장면이 연출된다.
이상하게도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이 순간적 적막에 긴장감을 느끼며 '서커스'의 전부 내지는 백미인양 여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커스는 환상적이고 화려한 무대와 사람들이 펼치는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사진에 담아내기 좋은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 속 서커스는 역동성의 발현이 아니라 흡사 발현된 역동성의 박제, 내지는 동(動)을 품은 정(靜)의 숨겨진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왠지 사라져가는 문화로써의 서커스에 대한 아련함까지 겹쳐지는 감정으로...

 

로나 비트너(Rhona Bitner)가 담은 서커스의 모습은 내가 받은 느낌을 그대로 옮겨준 것 같은 정적인 미의 극치다. 

검은 바탕에서 오로지 서커스를 펼치는 주인공들만 존재하는 것 같은 사진들은 상당히 동적인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고요와 테잎 늘어진 동영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서커스에선 동물들의 역할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사라 문(Sarah Moon)의 [앵무새]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붉은 바탕과 검은 링에 너무나 그림같은 앵무새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발타자르 부르카르트(Balthasar Burkhard)의 [사자]는 125*197cm의 거대한 화면에 멍하니 입 벌린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인 나머지,

서커스단에 갇힌 속박감, 자유가 박탈된 자의 비존재감,

서커스 자체가 갖는 우울한 느낌 등을 한꺼번에 표현해주는 것 같다.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가 찍은 크리스텐 멕메나미(Kristen Mac Menamy)의 사진들은 이미 과장된 서커스에 대한 이미지를 한번 더 과장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인물과 공이라는 사물의 배치는 과도한 소형화나 대형화를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3차원적 공간감을 무너뜨린다.

 

 

올리비에 르뷔파(Olivier Rebufa)의 [조종]은 줄을 잡고 있는 사람과 줄에 매달린 인형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사진이 주는 인상은 오히려 줄과 무관하게 무대를 이끌어나가는 주체가 인형이고, 인간이야말로 위태로운 줄에 매달려 상황에 휩쓸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식화된 관계들이 변화 또는 역전되고, 흡사 액자 구조의 문학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위대한 서커스]라는 전시 제목을 들었을 때 속으로 생각한 감상 포인트는 '화려함, 역동성, 고독감'정도가 아니었나 싶었다.

확실히 부합하는 작품이 없지 않다.

아련한 과거에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면도 있고, 피에로의 고독과 카리스마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히 화려함이나 역동성보다는 정적인 아름다움,

고독감보다는 세상에 대한 관조나 이중삼중으로 가려진 풍자 등으로 읽히는 것들이 많다.

 

정(靜)에 숨은 동(動)보다 더욱 광대한 열정과 고요함이 만들어가는 느리고 작은 변화.

 

* 사진출처 : 대림미술관(http://www.daelim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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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4 12:16 2007/10/14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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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7/10/14 11:16

batblue 님의 말대로 흙 많고 굴곡 많아 뛰거나 걷기 좋은 공원.

간만에 산책 좀 가봤슴다.

그런데 확실히 핸드폰 카메라는 색이 안예뻐. 담번에 디카 가지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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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4 11:16 2007/10/1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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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10/03 16:51

* 해멍님의 [전시회 다녀왔다]

민중언론 참세상[참세상 기자들이 추천하는 명절 보내기 비법!] 에 관련된 글.

이 가을, 일민미술관에서 세 작가에게 '미술은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봤다.

그중 한명인 전영찬 작가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림의 진화를 시도중.

 

작품들 중 하나의 제목이자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인 'Inside Out'은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분류하지만

사실은 '당신이 이상해'서 라든가 '당신이 독특해'서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답한다.

그래서인지 애니메이션 하나하나가 때론 비범하거나 때론 비참한 반전들을 준비하고는,

그 이질감에 대해

1) 별거 아니니 크게 놀라지 말라고 토닥거리면서

2)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라고 속삭인다.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





1) 별거 아니니 크게 놀라지 말라고 토닥거리기

 

예를 들면 이런 건데,

[Falling]이란 작품은 침통한 감정으로 빌딩 위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두팔을 들고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화면이 상하 역전되면서 자살자 이외의 모든 이들을 -화면에선 아래가 된- '하늘'로 떨어뜨린다. 그 모습을 본 자살자는 자신을 자살로 몰아넣은 사회인들을 바라보며 크게 웃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하늘로 떨어졌던 사람들이 -화면 위가 된- 바닥으로 다시 올라오면서 두팔로 걷기 시작한다.

아래인 땅에서 두발로 걷던 모든 이들은 이제 위가 땅이 된 곳에서 두 팔로 걷기 시작했지만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는 자 없이 또다시 일상의 쳇바퀴는 돌기 시작한다.

 

[Identity Crisis]에서는 바나나로 원숭이를 약올리면서 폭력을 일삼는 아이와 그 아이의 약을 올리려고 아이스크림으로 꼬시는 원숭이가 나온다.

그리고 아이가 아이스크림의 유혹을 못이겨 원숭이를 따라 들어간 동물들의 세계는 어른들이 모든 동물들을 연기하는 인간의 세계였다.

사실 여기까지면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이나 설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여기서 또한번, '원숭이들이 아이를 징벌하려는 순간 밝혀지는 아이의 진실'이라는 반전을 준비한다.

 

[Identity Crisis]

 

 

2)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는 고양이와 쥐가 조금만 움직여도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질 쪽배 안에서 감격의 포옹을 통해 배의 전복을 막을 중도(中道)를 찾아간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고양이의 먹이사냥은 약자와 강자 사이의 중도란 결코 평등한 길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더불어,과연 고양이와 쥐가 가장 행복했던 그날의 그 순간은 언제였을지, 남은 고양이는 내내 행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Show]라는 작품에서는 몰래카메라로 촬영된 장면을 보는 아이, 그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 그 엄마를 지켜보는 아빠, 그리고 그 아빠를 도청하고 있는 정부기관, 그들을 내려다보는 외계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화면에 잡힌다. 이를 통해 관음증에 사로잡힌 건 한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라는 사실이 조망된다.

 

 

5천만 또는 전세계인 모두 '나는 극히 정상'이라고 외치고 속으로는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시대,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덕분에 우린 겉으로는 원숭이를 약올리던 아이가 쓰고 있던 가면을 쓰거나, 서로의 관음증을 숨기기 급급하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예외없이 누구나 소외되고 갑갑함을 느낀다.

구조에 어긋나는 것들에 자꾸 '이상하다'는 딱지를 붙이면서, 딱지가 많아질수록 격리, 거세시켜버리는 것은 세상이고 사회일 뿐이다.

격리와 거세의 두려움으로 사람을 호령하는 세상에 우리의 딱지를!

 

 

* 그림 출처 : 일민미술관(http://www.ilmi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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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3 16:51 2007/10/0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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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9/29 14:48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19세기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등장할 때까지,

아니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등장한 이후에도,

유클리드가 정리해놓은 기하학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의 주요 이론적 발현체였고,

수학이라는 학문을 공리계의 핵심으로 배치시켜주는 가장 확실한 근거였다.

그러했던 만큼 

알고보면 인간 사고의 결정체라든가 직관에 의거했다기보다 오히려 경험치의 발현이었고, 그 경험이 결코 신뢰할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혼란이란

세계관의 붕괴, 대재앙 그 자체였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적이고 변화와 흐름 자체에 집중하는 동양의 철학에 비해

정적이고 고정된 물체 자체에 집중하는 서양의 철학의 모든 특성을 부여받은 듯한 유클리드 기하학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깨어버리고 싶은 실체없는 거대한 '틀'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 [유클리드의 산책]은 르네 마그리트의 1955년 작품명이기도 하는데,

당시 마그리드는 유클리드의 평행선법칙을 원근법으로 가볍게 어겨주는 예술가적 표현으로, 규정된 상황과 세상의 체계에 대한 논리의 돌파을 보여주었다 한다.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기라도 하려는 듯 경계나 한계를 넘어서기나 hybrid, 기존 논리로 구분된 영역간의 관계나 교류에 대해 모색해보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손정은의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은 세이머스 히니의 시집 제목이라고 한다.

작가는 시집의 시구를 하얀 종이들에 분절하여 적어놓았는데, 관객이 무작위로 종이 하나를 뽑아든 순간 이미 그 시들은 더이상 시인의 그것이 아닌 관객만의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된다.

마치 진보블로그의 모든 글을 탐독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특정 블로거의 특정 포스트를 접하면서 개인이 변화할 수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 개인은 해당 포스트를 접했을 때나 블로그글 모두를 읽었을 때와는 분명 다른 개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전시회 설명글에도 있었지만 저 종이 하나하나가 마치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를 나타내는 듯 하다. 종이 하나를 집었을 때 머리 속을 퍼져나갈 오만가지 생각들이 마치 클릭하면 링크 따라 만날 수 있는 마구 펼쳐질 세상을 의미하기라도 하듯이.




정재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 기록 9]는 한국의 버려진 현수막을 중국, 파키스탄, 인도, 네팔 등지의 현지인들에게 자율적으로 활용하도록 건네고, 일정 기간 경과 후 쓰임새를 관찰한 것이다.

결과물은 사진에 담겨져 있으나 아래의 붉은 천은 작가가 입수한 모양이다. 꽤나 훌륭한 차양으로 변신한 모습 속에서 형태, 문양 등의 문화적 hybrid 를 체감할 수 있다고나 할까?

기와지붕 위에 이슬람문자 프린트가 있다면 보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이중근의 [super nature]는 위에서 바라보면 벌집 모양일 것 같은 공간 내부에 밀림의 사진과 산수화를 오버랩시킨 작품이다. 2미터가 넘을 것 같은 병풍들에 둘러쳐져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보는 지점은 한 곳인데도 여러가지 풍경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박소연의 [Story Telling and Listening Series]는 특정 공간과 소품의 세팅과 주제(story)를 동참하는 관객들에게 부여하여 참여자들끼리 말하기와 듣기를 통한 정서 교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화면에 비춘 모습은 [어머니와 딸의 장소]라는 주제를 주고 '움'으로 끝나는 한글단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단어에 맞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다소 작위적, 또는 유치하다고 생각되는 세팅과 행동규칙들이 때론 생각의 정돈과 집중을 유도하여 감정의 풍요를 유도할 수 있다.

 

김현숙의 [플라모델]시리즈들의 조각들은 매난국죽같은 전통적 코드를 현대의 기성품 생산문화(ㅋㅋ)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왠지, 진짜 조립해보고 싶다.

 

조덕현의 [in/finite 1Channel Projection]은 풍경을 찍은 영상과 거울을 통해 -사실은 한정되어 있으나- 무한한 화면을 제시하고 있다. 원래 작품을 만들 때 고고학적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잘 섞는다는 작가가 택한 풍경도 가야금의 명인으로 알려진 우륵이 태어났다고 추정되는 신화의 장소이기도 한 거창군의 한 마을을 담고 있다.


 

 

윤영석의 [표본실A]는 복제양 둘리 성공에 충격을 받았다는 작가가 인간복제에 대한 공포를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 계산된 수치들과 칩 모양의 돌기들이 생명에 대한 인간의 통제 욕구를 반영하는 듯 하다.

 

 

좀 약올리는 것 같지만, 이 전시... 9월 30일에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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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9 14:48 2007/09/2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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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7/09/26 08:47

한 가을 낮에 만난 길가의 조형물.

선선한 가을 바람을 말하듯, 가고 싶고 되고 싶은 세상을 말하듯 눈길을 잡아 끌었으나,

그저 동아일보사의 홍보물이었을 따름이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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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6 08:47 2007/09/26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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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9/15 14:44

-생물,무생물 다 합쳐서- 내가 최근에 가장 섹시하다고 생각한 캐릭터는

애니메이션 [풍인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만2세만 넘어도 보기 힘들다가 4,50대되면서 종종 나타나기도 하는 항아리형 몸매,

코는 거의 안보이고 입도 희미한데 눈은 햄스터마냥 검은 자위 가득한 얼굴.

그런데 이 애니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면서 머리 속에 절로 떠오르는 말은 '섹시함'이었다.




인간이 가진 보는 능력의 얄팍함을 고려해보건대, 미의 척도란 진정 아~무짝에 쓸모없는 거다.

 

저 유연한 웨이브를 따라가다보면 그 어떤 통자 몸매라도 눈을 홀리는 곡선의 법칙을 발견해낼 것만 같다.

'하늘거린다'는 표현은 끊어질 듯 가는 개미 허리를 위한 지칭이 아니라 

캐릭터의 온몸에서 뻗어나오는 가벼움의 기운을 위한 말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올리며 짓는 옅은 미소에,

무심결 손을 뻗어 뺨을 어루 만질 것 같은 기분.


 

사람이 날고, 고양이가 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이 너무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범한 일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다보니 나 역시 함께 동화된다.

 

에너지도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세상에서,

어쩌면 누구나 바람의 흐름만 읽으면 바람을 타고 훨훨 나는 것이 환상만은 아닐런지도...

 

사람보다 먼저 바람의 흐름을 깨달은 애니 속 고양이들이

거대한 태풍을 타기 위해 서로의 몸을 연결하여 거대한 공 모양으로 하나가 되었듯이,

우리도 언젠가 바람에 몸을 맡겨 하늘에 오르게 되면

서로가 뭉쳐 거대한 태풍을 즐김의 대상으로 받아넘길 그 때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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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5 14:44 2007/09/1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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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7/09/08 21:53

'오늘은 라디오마다 가을을 알리는 노래가 나왔었죠?' -> 그렇다.

'오랜만에 메일이나 핸드폰 문자가 아닌 편지를...'

 

오늘 MBC 뉴스 끝무렵 김주하 아나운서가 날린 멘트다.

 

아직도 메일과 문자, 또는 게시판, 블로그의 글은 가슴을 울리는 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감성계에 있어서 종이 편지의 아성은 영원히 깰 수 없는 그 무엇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시시때때로 등장하는 식상한 멘트 중 하나일까?

 

우린 이미 온라인과 다감각매체를 보며 웃고 울고 기쁘고 슬퍼하지 않는가?

이 감정은 편지의 진한 농도를 확보할 수 없다는 뜻인가?

 

가장 마지막 써본 편지는 고등학교때 남자친구에게 써본 게 끝인지라

편지가 그다지도 다른 매체를 누르는 막강한 농도의 감정선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었는지 도무지 기억해낼 수 없다.

 

예전엔 막연히 '그러게'하고 맞장구 쳤던 것 같지만

편지 이외의 것들에 대해 이젠 너무 많이 쓴다고 괜히 가치 하락시킨 것 같다는 기분도 살짝 든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메일을 보낼 때, 문자를 날릴 때, 온라인에 글을 쓸 때도

때론

'이걸 보고 공감해주세요', '내 마음을 이렇게 담아요'라는 간절한 감정을 실었어야 했을 터인데,

때론

조금 가벼운, 조금 건조해도 무관할 것 같은 기분으로 무성의해져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팸문자와 스팸메일에 시달리다보니 그걸 전달하는 매체가 싫어졌을 지 몰라도,

어쩌다 그 사이 비집고 들어온 반가운 이의 소식은 언제나 기분 좋기 마련이다.

 

난 그냥 평소에 이미 생활화된 매체에 애정을 담뿍 쏟는 방향으로 진행해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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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8 21:53 2007/09/0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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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9/07 12:49

* 민중언론 참세상[팔레스타인의 양심, 나지 알 알리 展] 에 관련된 글.

 

사는 사람들에겐 팔레스타인이라 불리지만,

먼나라 사람들일수록 이스라엘이라 알고 있는 곳.

 

9미터의 돌벽에 둘러쌓여 도망도 못치고,

옆마을과 물건 사고파는 것도 안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히브리어로 40일이내에 나가라는 통보 편지 받으면 아무 말 못하고 나가야 하고,

하루 아침에 살던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열받는 마음에 닿지 않을 곳에서 돌이라도 던질라치면 반드시 닿을 총알로 보답하고,

매일 수시 검문과 이유없는 폭행, 구속이 이루어지는 곳.


 

 



그 곳의 풍경을 뒷짐 진 한 아이가 무력하듯, 또는 관조하듯 바라보고 있다.

'한달라'(맛이 쓴 열매의 이름,'쓰라림'을 뜻함)라 불리는 이 아이는

살던 땅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쫓겨났던 11살의 작가 자신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아이는 때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데 지쳤는지,

살던 땅 그대로 두고 9미터 높이의 돌벽을 쌓고 외부와의 무역도 차단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UN이 이스라엘에게 '점령지에서 철수하라'는 결의안 242호를 채택할 때조차

미국의 단단한 비호 속에 무너지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돌벽을 바라보기도 한다.

 

 

어느날 그 아이는

82년 레바논 침공 당시 사브라, 샤틸라 난민촌에서 자행된 대학살을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 영원한 관찰자일 것 같은 그의 뒷짐은 약간의 변화를 맞이한다.

 

때론

 

예수와 함께 돌을 던지기도 하고

 

이스라엘에게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의 행동에 동참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생존, 정치의 문제 이외에도 민족 이데올로기, 문화적 배타성, 종교의 문제점까지도 신랄한 비판의 잣대를 들이댄 나지 알 알리는

이스라엘 뿐만아니라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표적이기도 했단다.

처음 그림을 봤을 때는 뭔가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것들의 배치 정도로만 인식했었는데,

운 좋게 평화운동가 미니의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의 만화에 표현된 표상들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깨닫게 되었다.

 

오랜동안 살아오던 땅에서 유럽제국주의의 거짓 약속과 이스라엘의 폭압적 정책으로 쫓겨나면서도,

전세계로부터 - 내지는 몇몇 언론에 의해 - 이름 대신 '테러리스트'라는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 것 같은 명칭을 부여받은 자들.

가감 없이 지켜보는 한달라를 역시 지켜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짐을 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지 알 알리가 본질적으로 놓칠 수 없었던 '희망'은 그의 그림 속 꽃을 통해, 서서히 뒷짐을 풀기 시작한 한달라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특히 인상깊었던 작품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돌을 던지는 모습.

종교에 대해서 정말 무식한 내가 몇개월 전 터키에 갔을 때

이슬람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알라였고, 예수는 무함마드와 같은 예언자였다.

그러니 예수가 못박힌 손으로 돌을 던지는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었겠지만, 이슬람교에 대해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면 엄청난 패러디쯤으로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그림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상황을

단순히 종교 문제로, 정치 문제로, 외교 문제로, 내지는 그저 서로 싫은 사람들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거대한 역사적 맥락을 느끼게 한다.

 

그저 모두들 사람답게 살 생각만 하면 안될까?

* 사진출처 : 평화박물관(http://www.peacemuseu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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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7 12:49 2007/09/07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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