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5/03/03 20:19

* 이 글은 쭌모님의 [그녀는 왜 신나할까?]푸른 솔님의 [다시 한번,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에 관련된 글입니다.

 

보육노조 서울지부 출범이래 첫 싸움이 2월 21일에 시작되었다.

부당해고 땜시 정신없이 노조를 찾아온 조합원.

 

모대학 부속 보육교사교육원을 졸업하고,

그 대학 부속 어린이집에 들어갔는데 인턴교사부터 시작해야 했다.

정교사와 근무시간은 똑같되 본봉 50만원 받고 시작한 인턴 생활은 말그대로 인턴일 뿐이었다. 그렇게 11개월이나 근무한 어느 날, 실장이 퇴직을 종용한다.

좀 개겼더니 약간 겁났던지 2월 17일 원감이 다시 불러 12개월 근무로 쳐주고 퇴직금 줄테니 나가란다.

 

(* 이 원의 관리자급은 원장 > 실장 > 원감 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싸움은 시작되었다.



19일(토)~20일(일)

 

회의의 회의를 거듭.

요구안을 만들고 행동방안 고민하고...

요구안은 '부당해고 철회와 정교사 복직, 체불임금 지급, 인턴제도 폐지'.

하도 기본적인 것들이라, 물러설 요구안도 없고... 참... 쩝...

 

2월 21일(월)

 

- 해고된 조합원은 출근 투쟁을 시작하고, 서울지부장 중심으로 꾸려진 교섭단은 조합원 출근 시에 같이 가서 원감 면담을 시작했다.

혹시 강하게 반발하면 면담요청공문이나 전달하고 올까 했는데, 왠걸 잔뜩 긴장한 원감이 원의 월급명세서니 인사규정이니 증거 자료가 될만한 걸 많이 복사해주었다.(?)

(* 보육교사들은 월급명세서 못받고 일하는 사람들 많습니다요)

덕분에 조합원 본봉이 50만원 인것도 알게 되었고, 인사규정상 수습기간 1개월로 되어있는데 스스로 규정 깨먹고 12개월이나 인턴 시킨 것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인사규정에 '3호봉 이상 지급 불가'라고 되어 있는 걸 보니 3년차 이상은 모두 해고시키는 건가? 왜 해고했냐고 했더니 지각이 많았단다.

- 결국 어찌저찌하여 실장에 원장까지 다 만나보긴 했는데, 거기엔 '당신이 사용주!'라는 말에 황당해하는 실장, 원장 감투 쓴 교수들이 앉아있었고 내일 다시 만나 교섭하기로 했다.

- 대학 부속 보육교사교육원 홈페이지엔 항의 글이 마구 올라가고 있다.

 

2월 22일(화)

 

- 오후 2시에 보자길래 갔더니, 원장이 자신은 '사용주'임을 이번에 처음 인지하였고 최대한 의견을 경청하고 반영하겠단다.

그래서 의견 제안하러 온게 아니라 협상하러 온거고 요구안 받을 건지 아닌지 이야기해보라 했더니 고민하게 월요일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 이미 해고된 채 출근 투쟁하는 조합원도 있고 요구안도 워낙 명확해서 23일 12시까지 요구안 수용여부에 대해 전화든 뭐든 확답을 달랬더니, 너무 촉박하댄다.

 

2월 23일(수)

- 12시가 되었는데 전화도 팩스도 아무것도 안온다.

- 오후 2시 좀 지나서 경찰서에 집회 신고 하러 갔다. 집회장소 약도가 정확하지 않아서 사무실에서 확인후 다시 갔더니 그새 어린이집 원장을 만나고 왔다.

원장이 복직시켜 준다고 하던데 집회신고 왜 하냐고 그런다.

- 오후 6시 넘어 어린이집에서 팩스가 왔는데 원장의 교섭권을 원감에게 위임하고 구체안에 대해 논의하고 싶단다.

 

2월 24일(목)

- 어린이집 오리엔테이션에서 조합원이 부모들에게 반을 맡은 정교사로 소개되어졌다.

- 3월 3일쯤 실무자 중심으로 합의안 작성을 위한 교섭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원감이 구두로는 복직시킨다고 확답했다.

 

2월 28일(월)

- 조합원이 아프단다. 그래서 복직하고 싶지 않단다...(헉...-_-;;;)

갑자기 서울지부 첫 투쟁이 공중부양했다.

(교육선전담당으로서) 생각같아서는 관행적인 인턴제도는 언론에 홀라당 까발릴 생각이 굴뚝이었는데, 혹시나 복직된 후 힘들까봐 짬 보고 있다가 완전 망했다.

 

3월 1일(화)

- 솔직히 원망은 둘째치고 망연자실 그 자체... 교섭상태 하 수상했으면 더 괴로웠겠지만, 모두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가장 쉬운 싸움'이었다고 인정하는 바 '어쩔 수 없지'하는 체념 모드...

- 내일 지방 내려간다길래 저녁때 한번 봤더니만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말하는 데, '젠장, 누구 경험 쌓으라고 했나?'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쭌모님이 바란대로 1주일만에 초특급으로 정리가 되긴 했는데, 이런 정리는 아니었지만...

마인드 콘트롤이나 잘해놔야지.

 

역시 '조합원 없이 노조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 와닿는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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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3 20:19 2005/03/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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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5/02/28 19:22

예전엔 강의동 세우기 바빴는데 잘 나가는 대학은 사정이 틀린가보다.

조합원 부당해고 관련 교섭 때문에 가봤다가 우연히 '찰칵'했는데,

다음부턴 좋은 일로 찾아갈 수 있길...

소복히 쌓인 모습이 더 좋았는데 내 카메라는 발빠른 아줌마의 손길보다 게을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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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8 19:22 2005/02/28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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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5/02/23 10:39

원래는 동의하지 않으면 광고성 스팸메일 보내지 못하게 되어 있던 멀쩡한 법을 뜯어 고쳐,
수신거부를 하기 전까지는 보낼 수 있도록 해놓고...

 

이 덕분에 스팸메일 판 치는 세상을 결국 본 것 아니던가?

 

그러더니 이젠 수신자가 스팸할 이메일주소를 nospam.go.kr 에 등록시켜놓고
혹시나 등록된 메일주소로 스팸을 보내면 불법이 되도록 고친다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도 아니고,
국고 낭비 한번 제대로 하는구만.

 

* 음 하긴 전 스팸을 무지 싫어하는 편견있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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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3 10:39 2005/02/2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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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5/02/21 18:10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2월, 꼭 껴입은 옷 사이사이로 칼바람이 스며든다.
같은 시기 몰아치는 또 하나의 칼바람, 보육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해고 바람이다.

 

언제나 2월이 되면 날리는 해고 바람의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다던데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거다.

2월이 되면 어린이집 부모들은 설날로 잔뜩 비는 빨간색 휴일들을 바라보면서, 학교 입학 준비를 해야 하는 7세 아이들을 학원으로 옮기면서, 그렇게 원아들은 하나 둘씩 줄어간다.
원장들은 3월이 되면 다시 원아로 빼곡히 채워질 반임에도 불구하고 앞뒤 생각 없이 과감히 ‘경영상의 이유’로 교사에게 해고의 칼날을 들이댄다.
여성부 예산도 ‘보육료 지원 증가, 인건비 지원 감소’ 된 마당에 원장의 앓는 소리는 점점 높아만 간다.



혹시나 이 바람이 아니라면 다른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부담임이나 보조교사 또는 인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정체 모를 직책들이 어린이집 밖으로 쫓겨나가는 바로 그것이다. 대체로 학기가 시작하는 3월이나 2월말 쯤 취업하여 일반 평교사와 동일한 근로시간을 가지면서도 계약기간이 언제까지인지, 자신의 임금이 얼마인지 제대로 한번 묻지도 못한 채 ‘잘 보여 평교사 되어보겠다’는 일념으로 묵묵히 업무에 임한다.

 

올해 2월에도 어김없이 인턴으로 일하던 한 교사가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근로계약서도 없고 근로기간 명시도 없이 그저 인턴이라 불리웠던 선생님의 자리.
1년만 지나면 인턴 딱지 떼고 정교사가 될 거라는 생각에, 동일근무시간에 동일업무를 하여도 터무니없이 적은 월급봉투를 꿋꿋이 참아냈는데 결국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1년짜리 계약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그 어린이집 관계자중 하나가 지나가는 말로 던진 한마디는 바로 ‘인턴 1년 더 해볼래?’

 

그렇군. ‘우린 전문직’이라고 말로만 외쳐왔는데 결국 사용주가 인정해주는 건가? 2년이나 인턴 시키려고 하는 걸 보니 ...
그런데 왜 기간만 강요하나? 웬만하면 근로조건도 좀 맞춰 줘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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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1 18:10 2005/02/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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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02/13 20:46

[갤러리 현대]는 경복궁 오른쪽면의 '미술관의 거리'에 있는데 오늘 처음 가봤다.

내부는 그다지 넓지 않다. 좁지만 깔끔.

그래도 왠지 Andreas Gursky 와 Thomas Struth 두 사람의 작품을 같이 전시하기엔 왠지 너무 좁아 아쉬웠던 공간...




토마스와 안드레아스는 독일사진의 미래라 불리우는 사람들이란다.

이번 작품들은 모두 사진이고, 가로 또는 세로 길이중 하나는 반드시 내 키보다 큰 작품이었다.

 

먼저 지하 1층의 토마스 작품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Thomas Struth

 

[Paradise 25]이라는 이 작품은 브라질의 열대우림인가보다. 우림을 보면 항상 느끼는게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인간이란 존재는 발디딜 틈이 없어보인다. 마치 오지 말라고 밀어내고 있는 것 같다.

희한하게도 계속 쳐다보면 사진의 가로 가운데, 세로 아래에서 1/3 지점으로 눈의 초점이 돌아와버린다. 그건 바로 그 지점 말고는 초점이 다 깨져서이다. 눈을 어디 둬도 소용돌이처럼 그 지점으로 고정된다.

 

 

[Pargamon Museum 2]인 이 작품은 베를린의 박물관인가보다.

박물관의 사이즈에 놀라워해야 할지^^;;, 어떤 건축물인지 몰라도 외벽을 통째로 옮겨놨다.

박물관에 갇힌 것 자체는 굉장히 답답해보이면서, 반대로 박물관안의 디스플레이만 생각하면 매우 세련되고 숨통 트여보인다.

 

[National Museum of Art Tokyo] 인 이 작품은 그 유명한 프랑스 혁명 그림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서 우러러보고 있다.

일본의 집단의식으로 해석할지 혁명에 대한 경외로 해석할지 고민하는 가운데,

하층민의 봉기가 조명발 좋은 두꺼운 유리안에서 번쩍이고 있는 이 언밸런스한 상황 또한 머리를 멍하게 만든다.

 

 

 

Andreas Gursky

 

[Klitschko]인 이 작품은 가운데 사각 링이 있는 걸 보니, 복싱 아니면 레슬링이나 격투기 같은데 잘 모르겠다. 가운데 메인 빼고도 스탠드만 3 단인 이 거대한 공간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오로지 가은데 링만을 주시하고 있다.

묘하게 눈길을 끄는 사진이다. 사진과 동일한 사이즈 포스터가 있다면 사고 싶을 정도인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Hong Kong Stock Exchange], 이 엄청난 사람들이 보이는 사진은 가로로 나란히 걸려있었다.

오로지 주식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이런 사진은 언제나 현대인의 공포를 자극하기 충분하다. 바라보고 있는 모니터보다도 가치없어 보이는 자신...

 

 [Parada III], 이 작품은 프라다 매장의 검은 니트 옷이 엄청 곱게 접혀 전시되어 있다.

배경색도 좋고 디스플레이도 좋고...

그러나 공허함이 느껴지는 저 청결함에 질려버릴 것 같다.

 

 

이상하게도 토마스의 작품은 볼때마다 뭔가 불편하다.

사진을 못찍은 것 같지도 않고, 꽤 있을법한 장면들인데도 말이다.

이 불편함은 마치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은 곳에 뭔가가 끼어든 것 같은 느낌이다.

간혹 그런 존재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물건이 되기도 한다. 

 

반면 안드레아스의 사진은 공허하다. 매번 깨닫는 사실인데도 현대는 정말 공허하다. 그리고 이젠 좀 적응될만도 한데 사진을 보니 또 느껴버렸다.

절어버린 사람들에게 잠시 눈감고 있었던 사실을 회귀하여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사진...

 

* 맨처음건 내가 찍은 거, 나머지는 : http://www.galleryhyunda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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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3 20:46 2005/02/13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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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5/02/04 16:03

아니 뭐,

내가 일이 많아서 정신없었던 건 아니고

오히려 일해야 하는데 나의 머리속을 방해하는 무리들이 심심치 않게 많았달까?

 

남들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나에게는 의미가 커보인 여러 일들이 촘촘이 들어선 한 주였다.



2일...

 

노조 소식지를 공공연맹 마스터기에 빌붙어 복사하려고 아침부터 공공연맹 사무실에 갔으나 마스터기 고장~~ 헉-________-;;

그러다가 간만에 본 감비에게서 커피 한잔 얻어먹으면서 1일 총연맹 임시대의원대회에 대해 들었다.

집에 TV도 없는지라 멍하게 듣고 있다가 금방 분위기 눈치 채버렸다.

나같은 허접한 인간하고라도 이야기 나누고 싶어하는 감비의 말 속에 침통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솔직히 매우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좀 쪽팔리고 비통하긴 한데,

언론의 근본을 파헤치지 못하는 보도 방식에 열받긴 한데,

한편 말로만 심각하다고 외친 '비정규', 노조 안에서도 밖에서도 이젠 더이상 빼도박도 못하고 물러설 수 없는 부분임이 확고해진 느낌도 있다.

 

사무실로 돌아와 미디어참세상 영상을 보는데,

머리속으로는 '전국비정규직 일반노조' 만들자고 해야 하나, 대의원부터 따내야 하는거였냐 같은 온갖 잡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

 

3일...

 

사무실 이사 가야하는데 같이 가기로 한 단체 중 하나가 파토를 내버려서

갑자기 이틀안에 실평수 10평짜리 사무실 자리를 미친듯이 알아보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몇군데 찍어놓고 사무처장이 부동산 찾아보러 나갔다.

 

좀 있다가 여연 활동가가 문을 벌컥 열더니 "호주제 불합치 결정났어!"라고 말하며 울먹인다. 좀 있다 다른 단체 활동가들도 돌아가면서 소식을 전해준다.

그래, 헌법재판소에서 호주제 불합치 결정이 났다.

3층 계단에선 여기저기 소식 알리기 바쁜 사람들이,

2층 계단에선 열받은 유림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저녁 11시가 되니 지율스님이 단식을 푸셨단다.

며칠전 정토회관 인터뷰가 더 충격적이었는데, 가시는 마지막길 잘 봐드릴 예정이라고...

사람은 이렇게도 죽는 거구나 싶다.

제발 별 탈없이 건강 회복하셨으면 좋겠다.

 

4일...

 

아침에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지율스님 옆에 계신 정토회관 스님의 전화인터뷰가 있었다.

공사중단도 아니고 조사나 한번 해달라는 거였는데 사람 죽일 뻔 했다.

 

법원에서 새만금 사업이 경제적 타당성이 없는 만큼 사업계획을 취소하거나 변경해야한다고 판결 났다.

 

YTN 에 갔더니 돌발영상에 "패러디"라는 영상이 올라가있다.

민주노총의 국회 패러디... 근데 얘네도 강경파라 쓰는군.. 음..

혹시나 궁금한 사람들을 위하여 URL을 ==> http://www.ytn.co.kr/spnews/sudden_list_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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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4 16:03 2005/02/04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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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2/01 20:18

.광개토대왕시기의 고구려

(아래의 내용은 호태왕비에 수록된 것임)

 

- 남만주 지역에 고구려 건국 100년전부터 중원의 지방정원인 현도군과 요동군 존재.

현도군은 한무제때 조선 동북부와 동만주를 지배. 그 뒤 고구려 판도내에 귀속되면서 혈전.

요동군은 중원 정권의 한개 변방 군현. 고구려에 의해 현도군이 무순으로 쫓기자 요동군이 부분을 현도군에 주고 고구려에 대항(400여년간).

5호 16국시대 모용선비 쳐들어와 미천왕 무덤 유물 도굴당하고 봉호라는 신하호칭 받는 치욕받음.

광개토대왕때 모용선비가 신성과 남소성 침략하자 숙군성 공격하고 요하벌 진출. 이후 북연과 중원들과 화친.

장수왕도 안정 고수. 이후 남방진출 도모

 

- 내몽골 동부 선비족은 거란, 고막해 ->8개부로 발전.

광개토대왕시기 392년 친히 거란 정벌. 포로 500여명. 소수림왕시기의 고구려 포로 10,000여명 귀환.

8개부중 비려가 계속 침략. 395년 다시 정벌.

당시 고구려군은 중국의 富山, 負山 거쳐 염수까지 들어가 무순 이남지방의 비려 3개 부락 600~700영 점령.

그 뒤 거란은 오늘의 대릉하 동쪽에 정착.

 

- 동부여는 고구려와 같은 족속. 초기 강성. 3대 대무신왕에 패해 고구려 부속국으로 전락. 훗날 중원과 연맹해 고구려 견제.

태조왕태 현도, 요동 등의 군현 및 고구려와 대적. 242년 관구검 침입시 위를 도움.

광개토대왕 말년 고구려는 동명왕 때부터 부여가 속국임을 운운하며 410년 국도 함락. 494년 완전 통합.

 

- 311년 고구려의 낙랑군(평양벌) 점유와 백제의 대방군(한강벌) 점유로 국경 접한 고구려 백제 100년간 혈전. 고국원왕때 백제가 평양성까지 침입.

광개토대왕 즉위후 첫해(391) 13개 백제성과 관미성(백제의 북침거점) 함락.

5개성 찾은 백제는 394, 395년 고구려 침입. 396년 고구려는 백제 정벌 단행. 한강 건너 서울까지. 백제는 항복후 1,000명 포로, 베 천필, 58개성, 700여 촌 바침.

황해 남, 경기 북, 서해안이 고구려에 복속됨. 광개토대왕은 백제왕의 아우와 10여명의 대신 데리고 개선.

397년 백제는 왜와 손잡고 398년 한산 북쪽까지 군사 출동. 다음해 신라 공격.

고구려는 신라의 군병 요청에 4000년인 해 50,000 보병과 기병 파견, 신라 구함. 신라는 국왕이 직접 고구려에 찾아가 감사.

404년 백, 왜 연합이 대방지구까지 침입. 적의 허리를 끊는 광개토대왕의 전술로 왜 침은 끝남.

407년 백제 정벌.



.위 기록은 호태왕비에 수록됨

 

- 그러나 중국고서적과 삼국사기사이에 어긋난 점이 있다. 신빙성은 크지만 글자 마모가 심해 해석 논쟁이 끊임없음.

국내성 지역은 청조부터 200년간 봉금지역. 청 말 봉금령 해제되면서 호태왕비 발견됨.

처음엔 이끼로 인해 몇자만 탁본. 초기 쌍구본 탁본 -> 석회탁본 : 학술상 글자 모양 논쟁 조성됨. 의도적 역사 왜곡 논쟁 야기(석회로 글자변조).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가 일본이 왜곡한 왜, 도, 해, 파(矮, 渡, 海, 破) 자를 폭로.

기타 나라에선 "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 속국으로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백제, 왜, 신라를 파해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고 해석.

이 밖에 20년대 초 화재, 관리 부실, 글자체 뒤섞임으로 해석 어려움.

 

 

.호태왕비는 태왕릉의 비인가, 장군총의 비인가?

 

장군총의 비라는 주장 근거

- 비와 묘 사이 무덤이 없다. 규모 어울림. 태왕릉과 비 사이엔 다름 무덤들이 있다.

묘비석 안치 습관이 광개토대왕부터 무덤위로 바뀌었다는 것이 태왕릉비에 나옴.

태왕릉은 서향, 비는 동남향.

태왕릉의 비라는 주장 근거

- 비와 묘 사이 무덤은 고구려 이후 후세의 것. 비와 장군묘 사이엔 큰 개울이 흐름.

무덤이 무너질까봐 비는 평지에 세운 것이다.

방향은 시대적 차이(묘는 광개토대왕 시기, 비는 장수왕 시기)로써 관념이 교체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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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1 20:18 2005/02/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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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1/30 19:50

* 오랜만에 1997 중국여행 글 재개...

고구려 문화에 대한 글은 아마도 [고구려 문화유적 산책] (1996,김삼,재단업인 대륙연구소) 내용을 축약해서 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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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集安)

 

 - 고구려 유리왕 22년(서기 3년)부터 장수왕 15년(서기 427)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수도. 

고구려의 전기부터 중기,말기 초반까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중국 길림성 남부에 위치한 행정구역상 길림성 통화시에 소속.

집안은 통구 분지에 위치하였으며 통구분지는 압록강 중류 일대에 위치한 폭이 좁고 길며 비교적 큰 평원이다.

동서 길이 10km 남북 폭은 약 5km이다. 노령산맥에서 발원하는 통구하는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른다.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흐르는 압록강을 마주하는 집안시는 지리적으로 오랜 동안의 수도로서 입지조건을 완벽히 갖춘 지역이다.

12,000여개의 고분군과 국내성, 환도산성,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등이 있다.칠개정자관액등이 수상통로 통제초소였다.

 

 



. 국내성(황성옛터)

 

- 원래 졸본(요녕성 부근)에 도읍했던 고구려는 주변 세력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자원이 풍부한 내지로 천도.

성터 북쪽은 노령산맥, 남쪽은 압록강이 있는 충적평야, 북으로 5.2km의 환도산성이 있음.

짐승과 야생수곡이 풍부. 수렵경제 발달. 강수량 많고 기온 높음.

통구하와 압록강 합쳐지는 지점으로, 물고기 많고 수상운송 편리.

장수왕의 평양천도전까지 약 425년간.

국내성은 장방형으로, 동벽이 554.7m, 서벽이 664.6m, 남벽이 751.6m, 북벽이 715.2m, 총둘레 2686m.

평지에 있음.

남벽 서쪽은 3~4m 높이로 잘 보존. 동벽은 2~3m 높이로 파손 심함, 가옥이 쌓여있음. 북벽은 밑부분만 곧게 뻗어있다. 성곽은 동북쪽만 둥글고 나머지는 직각.

전국시대 유물도 발견(고구려 이전에 이미 토성 존재). 이는 고구려의 전신이라는 주장과 한사군의 고구려현 치소라는 주장이 대립중. 유물이 BC 1000년 것이므로(한사군 설치 전) 첫번째 설이 신뢰 감.

고구려 10대 산상왕 때 환도산성을 국도로 정하나 요동 침입. 다시 국내성으로 국도 옮긴 후 고국원왕시 재축조. 또한 후기 태조왕조, 1921년 초기 만주국시기에 재축성.

북벽만 순수 고구려 성곽. 층계식 축조는 고구려식. 크고 육중한 돌로 쌓고 작은 돌로 가공. 축성법. 장방형 석조. 안쪽으로 4m 자연석을 규칙적으로 쌓고 외벽 결구가 치밀. 성벽속에서 동기, 철기, 도자기 조각 발굴. 석재가 불균일하여 위아래 다름.

원래 4방 6개 문 있었는 데 국공전쟁때 소멸. 집안시 주도로인 승리로는 동쪽 집문문과 서쪽 안무문 연결 통로.

길이 8~10m, 너비 6~8m의 치들은 서로간 50~80m 거리 둠(화살 명중거리 계산한 설계). 42개나 있다(높은 방어력).

요동 공손도, 위 관구검(247), 모용선비 진공(342)에 함락.

이후 시대엔 낙랑, 현도, 요동(한반도 북부), 신라, 백제, 왜(남부) 제패하고 부여도 병합, 말갈도 복속시키는 번영 누림. 이러한 고구려 번영설은 일제 사관(만주국의 합리화 위한) 에 의한 과장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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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도와 압록강

 

- 남도, 북도(육로), 압록강(수로)은 국내성의 3통로. 고구려의 혈맥이자 침입경로.

통화->집안까지 버스길은 북로 그대로 사용. 북로는 완만한 반면 남로는 험난.

모용황이 342년 남로로 침입하여 환도산성 함락됨. 고국원왕때이던 이때 북도에서 고구려군 승리(관마산성). 혼강 ~ 국내성 은 90km, 관마산성 ~ 환도산성 53km.

압록강은 동북 -> 서남으로 흘러가는데, 봉오리가 험해져 물살 세짐. 이후 강면 넓어져 유유.

배는 외차하 일대에 정박, 사람들은 달구지로 물건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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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

 

-  국내성터 동으로 4km된 우산 남쪽 기슭에 위치.

대지 한가운데 정방형. 방단계단식 석실묘.

2번째로 크며,  장군묘의 5배 크기. 파괴 심함.

첫계단 기단은 6겹 석조로 쌓음. 석조는 2m, 매 계단은 장방형 석조.

위의 석조를 안보다 들여 쌓고 밀리지 않도록 홈과 턱을 쪼아 맞물림. 7층 높이(지금은 소실).

제일 꼭대기 설치된 묘실은 한 변 길이가 2.8 m 인 정방형. 무너져 내려 공간 거의 없음.

묘실내 돌판은 5.4m * 4.2m (이 돌판은 총 13.5m 높이에 있다.)

외장력 방지 위해 화강암 거석 버텼으나 실패(20개 중 7개 소실).

왕릉 남쪽 180m 에 제단으로 추측되는 8각기등 받침과 주춧돌 있음.

[태왕릉이여 산악처럼 견고하라]라고 무늬기와에 쓰여있음

광개토대왕 == 19대 담덕왕 ==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 == 영락태왕.

호태왕비문 유적을 통해 광개토대왕 무덤임이 증명(태왕 명칭은 광개토대왕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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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  피라미드 모양. 방단계제식 석실묘. 화강암. 토구자산 빠져나오면 보임.

12.4m 높이. 무덤바닥 한변 31.5m. 밑면적 960제곱m, 위면적 270제곱m,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석실묘. 1100여개 석조 사용. 석재량은 6000세제곱m.

이전 무덤이 내부에 강바닥 자갈을 깔은 반면 겉벽이라도 석조로 구성. 묘실은 3층계단에 설치. 무덤길은 5층 계단 가운데 축조.

정방형 묘실. 외장력 고려해 묘실 작아짐. 내벽은 6층 석조로 쌓음. 천정과 어기는 모서리에 각기 큰 석조로 대들보 만들어 1층 겹침 형태로 천정돌과 만남. 천정은 거대한 석판(50톤, 60여 평방제곱m).

관대 2. 유골, 유물 도굴당함. 묘실은 서남향이고 4각은 방위선상 위치.

일출, 일몰 볼 수 있다. 무덤 꼭대기 윗면은 흙으로 다져짐. 변두리 석조 윗면에 일정간격으로 20여개 구멍(기둥박은 흔적). 남벽 (묘문)은 도굴 당시 깨져 바윗돌 형태로 잔존. 묘 동남쪽 20m 에 묘에 고인 물 나오는 함동 있음.

고구려는 일찍부터 무덤을 만드는 풍속 있어 평양 천도한 장수왕 묘로 추정됨. 산상왕 묘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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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단계제석실묘

 

-  정밀가공석조로 기초석 계단 다지고 그 안에 낙석을 같은 높이로 채움.

외관 웅장. 피라미드 모양으로 2~7층까지 쌓음.

4세기 중 출현하여 1세기동안 유행. 4세기 들어 토묘로 교체(평양천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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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

 

-  집안시 동쪽으로 4km거리인 우산기슭 구릉지대 위치. 남으론 압록강, 동으로 용산기슭에 의지해 통구평야 한가운데 위치.

묘역시설이 소멸되어 태왕릉과 별개로 보임.

37톤. 방주형 옹근 통돌 손질. 1775자 새김. 높이 6.39m, 밑부분 너비 1.34 ~ 1.97m. 꼭대기 너비가 1~1.6m.

화강암. 장수왕이 광개토왕 위해 세움.

비의 내용 : 고구려 건국신화, 광개토대왕의 위엄과 영토 확장의 공로, 비석과 능묘 지키는 수면인연호의 내력과 직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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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30 19:50 2005/01/3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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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5/01/29 00:26

* 이 글은 간장 오타맨...님의 [기아자동차노조 때리기....] 에 관련된 글입니다.

나 오늘(이제 내일이네), 아무래도 간장공장과 동일한 뉴스를 봤나보다.
그런데 희한하게 간장공장만큼 열받지 않았다.  

그게 참, 아직 노동운동 초년생이라 몰라도 너무 몰라서 일 수도 있고,
워낙 정규 TV 채널에 대한 미련 버린지 오래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느 다큐에서나 볼 수 있던 87년 현자부터 나오는데,
정말 TV로 보다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사회변혁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던 노동운동"(이 비슷한 말이었던 거 같은데...)이라고 나오는데,
'진짜? 니들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이라고 방송국에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중간에 민주노총 교선실장이 나와 '사측의 교란'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놀라웠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도 내주었는데, 지금 노동운동은 중요한 기로에 와있단다.



내가 이 뉴스에서 가장 열받은 부분은
'노동운동이 도덕성 갖추고 신뢰를 갖게 되면 국민들이 받쳐줄거다' 뭐 이 비슷한 말이 나왔을 때다.
세상에 이런 대단한 뻥이 다 있나?

혹여 그들이 -열심히도 안바란다- 그냥 사실 그대로만 방송해주면 약간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80년대 장면중 오늘같이 정제된 노조 모습 처음이다. 멘트에 따라 느낌도 돌변...
맨날 염병 던지는 거 찍기 바빴으면서, 대놓고 구라구라...
그러고보니 좀 속상하네.

확실히 기아차노조 빌미로 노동운동 때려잡기 느낌이 확~ 풍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만큼 열받지 않은 건

노동운동이 기로에 섰다는 그 한마디를 완전 나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점도 있고,
속으로 찔릴만한 짓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결국 한 깃발 아래 모였으니 똥물이든 꽃가루든 같이 받는 건가 싶어서 그러하기도 하다.

 

확실히 간장공장의 말처럼 언론의 세치 혀에 노동운동, 노동조합운동 전체가
부패와 권력의 도가니로 밀어넣어지는 건 너무 과도,부당하다.
기아 위원장의 '사측이 더 헤쳐먹었다'는 울부짖음은
일반 국민이 보기엔 재수없었을 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겐 통탄스러운 아저씨의 분노가 느껴진다.
그래도 솔직히 옆에 가서 '아저씨, 왜 그랬어요?'라고 하고 싶은 마음도 좀 든다.

 

그리하여 나의 머리는 대단히 복잡하다.

심플하게

사과받을 이한테는 사과하고, 과장하는 이에게는 부당함을 외치고, 궁지로 모는 이에게는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너의 도덕적 기준이 뭐냐라고 물으면 세심하게 답해줄 자신은 - 이라기보다 생각은- 없다.

 

어떻든 내 마음속은 확실히 노동운동과 노조운동이 기로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자본에 의해 촘촘히 짜여진 덫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미 눈에 콩꺼풀이 씌워져서 어쩔 수 없는건지도 모른다.

꼴같잖은 권력 가지고 한방에 바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민중의, 그 안의 노동자의 힘을 더 키워야한다는 말에 공감도 가고...

그러나 한편으로 노조활동가들의 도덕성 회복 역시 부르짖고 싶다.
어쩌면 그저 그놈의 금품수수땜에 운동 말아먹는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심정일 수도 있고,

공세적이든 수세적이든 뭐든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하는 만큼은 해나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아윽~~~ 정리도 안되는데 적당히 배설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서 주저리주저리...-_-;;;

역시 스포일러 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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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9 00:26 2005/01/29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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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01/29 00:04

원래 나의 만화 중독증상은 나름의 주기가 있어서 대체로

'3개월 빠져줌'과 '9개월 멀리함'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대로 가다간 개월수 뒤집힐 판이다... 헉...-_-;;

정신없이 '빠져줌'을 제대로 못하고 지나서 그래... 훗~!

 

덕분에 요즘-까지도- 애독하고 있는 '야오이와 BL'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장르가 되었다.

원래 만화보면서 심도깊은 생각이나 장르 구분 같은 거 안하고 사는데

코믹플러스에서 작년 8월부터 연재중인 유유의 일본여성만화이야기를 보면서 

여성만화의 입장에서 야오이와 BL의 위치에 대해 맥락 파악정도 한 느낌이다.

 

몇가지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는데..

 

1. 참 덧없고 실속도 없고 매정하기 까지 한 '사랑'의 감정에 신물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 순정만화 그리고 싶어도 리얼리티가 워낙 떨어져 스토리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혹시라도 반작용같이 남자의 우정이라는 다소 오래 갈 것 같은(?) 감정에 기대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은 좀 좀 좀 그렇잖아?)

 

2. 왠지 '여자보다 남자가 그리기 쉽다'는 점 적극 동감.

아무래도 의식되는 대중들 앞에

그야말로 '막나가게 그려도 될 것 같은' 캐릭터는 역시 남자가 좋다. 어떤 감정선 표현에도 사람들의 편견 없이 소화되기 수월할 것 같다.

 

3. 확실히 여자들은 -만화 하나 보면서도- 관계성에 대한 통찰을 염두에 두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걷지 않는 쉽지 않은 길을 뚫고 나가는 사람들은 

관계에 대한 진정성과 지속성이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요리 하나 근사하게 만들거나 손오공이 여의주 10개를 모두 모으는 것과 같은 과제 수행적 스토리보다는 관계의 깊이나 지속성이 담보되면 'The End' 해도 되는 것이다.

순정만화의 끝에 잘 등장하는 '결혼' 역시 과제 달성의 외피안에는 지속성의 담보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닌지...

 

 

뭐 혹여 여성만화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면

나름대로 적절한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내용성과 상징성을 담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솔직히 야오이, BL, 여성에로만화, 모두 그닥 맘에 드는 건 아니다.

음... 하지만 좋은 점만 보려는 jineeya가 그런 점은 닮은 것 같은 유유의 글을 보면서 재미있어하는 건,

어떻든 '여성의 눈으로 들여다 봤더니만 그래도 그안의 변화로운 움직임을 눈치챌 수 있더라'는 점이 기뻤기 때문이 아닐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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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9 00:04 2005/01/29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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