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여행 - 2005/01/02 22:30

음... 정말 어쩌다 여행이었죠. 너무 가기 싫었고, 오가는 길에 멀미 엄청 했으며, 해돋이 말고는 별 일정이 없어 연신 먹기만 한 이상한 여행...

그래도 해돋이 만큼은 잘 본 것 같아요.


 

소원을 비는 나무예요.

 

공연도 했었는데 딴 건 별로 재미없었고, 이 북 공연은 아주 재미있던데요.

 

오랜만에 보는 폭죽놀이도 멋졌고...



 

 

그러나 메인이벤트는 역시 해돋이였죠.




 

해 뜨기전 무리가 지고 있답니다.

 

 


반쯤 뜬 해

 

구름에 살짝 걸친 해

 

이제 다 뜬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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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2 22:30 2005/01/02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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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30 21:07

06:00 기상. 02:00에 자서 05:00엔 도저히 못 일어나겠더라. 06:30에 로비로 내려간 후 큰 짐은 가이드에게 맡기고 2층에서 아침부페를 먹었다.
야채가 부족했고, 빵 종류가 여러가지로 나왔다.
식사후 우체국을 찾으려 했으나 프런트의 도우미가 가리킨 곳으로 갔더니 없었다.
연희씨에게 물으니 우편물은 프런트에 맡겨야 하는데 도착 못할 확률이 많단다.
07:20 역시나 단체라서 20분 지체되었다.


이제 우린 천안문 광장에 간다.



중국노인들은 03:00~04:00 면 일어난다. 그후 공원이나 공터에서 운동(모임이 많다). 그후 시장 가서 아침 장 보고 귀가.


북경엔 2대 붙은 버스가 많다. 거리 깨끗하고 지하철("지철"이라고 함)에는 상점이 붙어있다. 여기선 각자 자전거 1대씩은 모두 가지고 있다(평균 한집당 2대). 옛 북경성터 안(4대문 안 지하철 라인과 비슷)에는 문화재 보호차원으로 고층건물을 못짓는다. 가는 길 버스안에서 종루도 보았는데, 3층 기와로 되어있고 굉장히 높다.

 

 

자금성은 1420년이후로부터 세워지기 시작.
마침 8월 1일이 중국인민해방군 창건일이라 군인이 많았으나, 사진 찍을때 군인 나오면 절대 안된단다. 1997년 5월 15일부터 공공장소에선 일체 흡연이 금지됐다.

드디어 천안문 광장 도착

 

 

광장과 건물들 사이엔 도로가 있다.
인민 영웅비는 생각보다 굉장히 컸다. 영웅비의 글씨("인민영웅영생불멸")는 모택동의 친필. 곳곳에 경찰들이 많았다. 가이드에 따르면 그곳의 경찰들은 배경에라도 자신들이 나오면 필름 압수한단다. 영웅비에만도 2명이 서있었다.



인민영웅기념비와 모택동 기념관

 

인민영웅기념비

 

인민대회당


천안문과 앞의 깃발


천안문광장의 노점상

 


멀리 보이는 혁명역사박물관과 도로

 


천안문 앞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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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30 21:07 2004/12/30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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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4/12/30 20:08

여의도 갔었어요.

국회의사당의 오른쪽 대림산업빌딩앞에는 우익 천막들이 있더군여.

 



[해체하라 전교조]샌드백입니다...^^;;

 

 

 

 

 

조선일보독자모임,한국사학법인연합회, 자유사랑청년연합...
새로운 단체이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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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30 20:08 2004/12/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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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4/12/30 00:49
증가의 의미를 잃어버린 보육예산안의 짜임새
-2005년 여성부 영유아보육예산안에 대한 생각

 

보육예산, 50.1% 증가된다던데...

지난 9월 22일, 여성부가 2005년도 여성부 예산안을 발표하였다.
그중 영유아보육예산안은 전년도 예산(4,050억원)에 대비하여 무려 50.1% 가 증액된 6,077억원.
세상에, 증가했다.

보육은 누가 봐도 쉽게 결론내릴 만큼 분명한 공공서비스 영역.
솔직히 이익 추구의 논리를 대고 싶어도 소비의 대상이 자녀 딸린 가족인지라 화려한 수익성은 커녕 머릿속 주판을 잠시 돌려도 밑지는 장사라는 계산은 어렵지 않을 듯.
예를 들어, 만1세아는 교사:아동 비율이 1:5인데, 부모 5가구가 모여 교사 1인 인건비와 급간식비 및 보육시설 유지비, 기타 원장, 간호사, 취사부, 청소부등의 인건비 일부등등을 담보할 수 있을까?
(이 와중에 기저귀 차고, 아직 기어다니며, 말을 안띤 아이 5명을 교사 1인이 보라는 황당스러운 상황에 대해서도 그저 이성적으로만 판단해주기 바란다.)
나 부모 아니라고 조용히 앉아서 보육의 책임을 부모에게만 지운다면 그 혜택 역시 가진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자본의 논리에 놀아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육예산이 증가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보육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볼 때 매우 바람직한 경향이라 하겠다..... 만...

실제 예산안의 구체적인 항목을 살펴보면서
과연 보육 현장을 고려한 현실적인 안인지,
앞으로 보육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
자못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차등보육료 지원과 교사 인건비 지원 감소가 만나면...

여성부가 내놓은 차등보육료 지원에는 크게 4가지 종류가 있다.
① 0~4세 자녀를 둔 저소득층에 대해 소득별로 차등적 보육료를 납부하도록 지원하는 것
② 저소득층의 만5세 자녀에 대해 무상보육료 지원을 확대하는 것
③ 장애아 보육료 전액을 지원하는 것
④ 두자녀 보육시설 이용시 둘째아 보육료 일부를 지원하는 것

이러한 차등적 보육료 납부는
국가가 함께 책임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보육받을 권리를 확대해나간다는 점에서,
부의 재분배에 일정 정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확대가 요망되는 부분이다.

한편 교사 인건비 지원 부분은 아래와 같이 감소할 예정이다.

구 분

인건비 지원방식 (■04■■05)

지원단가

국공립/비영리법인보육시설

(영아반) 90% ■ 80%

원장 23,143 ■ 24,300천원/년

교사 16,626 ■ 17,457천원/년

취사부 12,656 ■ 13,289천원/년

(유아반) 45% ■ 30%

영아전담시설

90% ■ 80%

장애아전담시설

90% ■ 80%

시간연장형시설

90% ■ 80%

민간보육시설 영아반

반당

반당 15만원■45■40만원


국회여성위의 여성부 예산안 심의자료 中에서

원래 교사 인건비는 주로 국공립/비영리법인 보육시설에 집중된 편이며, 기타 특수한 영아전담이나 장애아전담시설등에 지급이 되어 왔다. 그러나 여성부는 이 모든 부문의 인건비 지원 비율을 낮추었고, 앞으로도 점진적으로 낮출 계획이다.

여성부가 밝힌 차등보육료 지원 확대와 교사인건비 지원 감소의 이유는 향후 보육재정 투입 방식을 시설 공급자 중심에서 보육수요자(1차적으로 '부모') 중심으로 전환을 꾀하기 위함인데, 과연 결과가 그렇게 나와줄까?

이번 예산안을 심의한 국회 여성위에서는
국공립보육시설의 수준과 환경이 민간보육시설보다 평균적으로 우수한데 반해 실제 시설 수는 전체 보육시설의 5% 밖에 안되는 상태이므로, ‘아동별 지원의 방식은 수요자의 선택권 확대의 문제로 접근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그나마 국가의 지원을 많이 받아왔던 단위만이 나름대로 보육의 질을 담보해왔으며, 향후 부모들은 여전히 국공립 또는 대학부설 어린이집의 긴 대기표를 뽑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

이러한 상황에서 전체 보육시설들이 갈 길은 무엇이겠는가?
문을 닫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동별 지원을 한푼이라도 더 얻기 위해 보다 화려한 외관 설치와 보육료 경쟁, 보육시간의 유연화등이 진행될 것이며, 결국 보육시설 운영 지출의 가장 큰 부분인 인건비 삭감이 뒤이을 것이다.
얼마전 울산의 한 어린이집 교사에게 확인한 그녀의 월급은 67만원.
그렇게 열심히 여건 조성해주지 않아도 보육 현장은 워낙 열악하다.

공공성 강화인가? 자유경쟁체제 강화인가?

아동별 지원에 뒤이어 거금이 투자되는 부분은 바로 연 500여개의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
대체로 국공립 시설은 국가에서 땅 사고 집을 사거나 지어서 단체나 개인에게 위탁을 주게 되어 있다.
연내에 500개소를 세운다는 게 현실가능한가의 문제도 있지만,
집만 지어놓으면 위탁을 통해 손쉽고도 눈에 띄는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보건복지부가 행하던 보육사업의 성과주의적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스러운 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짓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치자.

여성부가 내세운 보육 공공성 강화의 표면에는 바로 아동별 지원 확대와 국공립시설 확충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교사인건비 지원 감소와 같은 고정적 지원액을 단계적으로 줄여감으로써 결국 부모의 보육시설 선택권의 범위를 넓힌다는 미명하에 시설간 경쟁체제를 유발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진정 ‘보육 공공성 강화’라는 명제에 걸맞는 모습이 갖추어지길 바란다면, 차등보육료 지원과 국공립 시설이 확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사인건비 지원에 대한 확대 역시 균형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산이 지속적으로 증액되어도 인권보육을 생각하는 유효적절한 예산 사용 기획이 담보되지 않는한 보육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하다.

언제라도 빛바래지지 않을 명제,
보육의 질은 보육노동자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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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미디어참세상(http://media.jinbo.net) 과 보육노조(http://kcwu.nodong.org)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죠.
* 처음의 생각은 이것저것 여러 주제 넣어보려했다가 최대한 한가지 주제에 집중해서 쓰려고 노력하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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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30 00:49 2004/12/30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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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8 23:12

* 참고로요. 이 글들은 모두 97년도 제 수첩에 있던 것들이랍니다. 이런 저런 사실도 다 그때 이야기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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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인데다가 휴가철이라 차가 밀릴까싶어 집에서 14:40 출발.
16:00 이전에 가뿐히 김포공항 제2청사 도착.

친구와 16:00에 환전을 위해 만나기로 해서 다행이지.

 

그러나 16:15 이 되어도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순간 드는 나의 생각은 내가 서있는 곳이 1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왔다갔다하던 경찰에게 물어보니, 아니나 달라
나는 2층에서 죽치고 기다렸던 것.

허겁지겁 내려가보니 친구는 이미 14:30에 도착했다던데.

그나마 여권이 없어 환전도 못하고... 또 기다림.

16:45쯤 나타난 여행사측은 17:00가 넘어서 여권을 줬고, 19:10 출발이던 비행기는 21:00로 연발.

장장 6시간을 공항에서 시간 잡아먹기중.

 

비행기에 탑승하자 드디어 여권을 사용한다는 기분이 조금씩 났다.



CHINA AIR. 우연인지 몰라도 스튜어드와 스튜어디스의 비율이 같다.
직업의 기회가 균등하다는 사회주의 국가적 특성인가, 혹은 그 사회에서 인정되는 직업이기 때문일까?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북경 도착 22:00(한국시간으로 23:00. 이후 북경시간으로 표기)

원래는 버스 2대로 전원이 호텔에 직행하려 했으나, 공안국의 제재로 인해 도착비자를 가진 9명은 공안국에서 나온 차를 타고 뒤따랐다.


 

22:50 중국식당에서 식사.

이 시간에 웬 식사?

그러나 안주면 화내는 사람도 있다니 먹어야지.

공항내에서 요기, 기내에서 식사, 더이상 들어갈 배도 없지만 한점씩 먹어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입맛에 맞다. 괜찮은걸.

그나저나 이번 여행은 희한하게도 **신문사라는 주최와 한민족 문화탐방이라는 껄끄러운 주제로 인해 공안국의 눈총을 받고 있나보다.

9명의 도착비자도 불허된 상태에서 다른 단체의 일행인 것처럼 가장하여 겨우 입국후 해결을 본 것이다. 우리가 여행 다닐때 공안국의 부장급 인사가 직접 따라붙는다던데... 와우! 흥미진진하겠는걸.

 

00:40 호텔 도착.

벌써 8/3(일). 배정된 방은 2인실. 들어가는 순간 와! 4星짜리 호텔(한국의 무궁화 4개의 의미와 같음)이지만 한국의 기준보다 떨어진다더니 그래도 너무 좋아. 샤워하면서 수첩 정리하고 있다.

 

 

아참! 버스안에 있는 동안 재중교포 3세인 최연희씨가 여러 이야기를 해줬다.

 

중국은 중국식 경제 개발을 하고 있다. 이제 사유재산도 가능하고 시장경제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다른 점은 모든 토지는 국가의 것이라는 점. 만약 한 기업이 건물을 짓고 싶으면 정부로부터 토지를 임대받아야 한다. 만약 계약을 했다면 임대료는 일시불로 지불.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의 간판은 공항에 깔렸고, 한국의 포크레인은 쉴새없이 북경을 빌딩숲으로 만들고 있다.

 

또하나의 이야기. 최연희씨는 연길 사람인데, 연길만이 유일하게 2차, 3차가 존재한댄다.
조선족이 한국으로 취업 가서 안좋은 술버릇만 배워왔다는 소리. 연길 남자는 술과 마작에 찌들어 나이 40엔 이미 바보가 된단다.
반면 중국인들은 일찍 퇴근해 가족과 TV, Video 보거나 산책하는 것이 최고의 낙. 오후 5시에서 5시 반사이에 퇴근하면 6시 반에서 7시에 식사하고, 7시에 저녁뉴스를 본다.
맞벌이는 보통. 일찍 퇴근하는 사람이 저녁 준비하는데 대체로 남편. 아내는 애보다가 설거지를 한다.
중국은 해산휴가가 1년반~2년으로, 유급 100%.

최연희씨는 다같이 가난하지만 모두 행복한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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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23:12 2004/12/28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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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8 00:13

. 1989년 천안문반란 -

88년까지의 경제위기로 대중불만 고조.

농촌에서의 곡물생산감소 예방을 위한 지배계급의 압박. 예산 적자 증가. 곡물수매가격의 하락. 비료 및 영농자금 공급이 수요에 못미침.

국가 기관에까지 시장심리가 미쳐(능력있는 지방관리가 수매를 많이 함) 수매액을 채우지 못함.

인플레, 사재기 성행. 시장심리와 이윤추구로 인해 사,국기업과 관리부패. 인플레의 해결로 임금인상을 했으나 일부 노동자에게만 혜택 돌아감.

이어 긴축경제정책 취함. 예금인출 제한이 한 방법. 결과 경기 후퇴.

도시거주 농촌노동자가 대거 해고. 고향의 농촌산업의 대부분도 원자재, 자본 부족으로 파산.

1989년초 대다수 주민이 최악의 경제위기에 빠짐. 정부는 긴축경제의 손실을 노동자에게 떠넘김(노동해고).

경제, 정치 위기는 저항의 불씨를 남김.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은 4월 16일 호요방의 국상에서 인민대중이 천안문에 집결. 호요방 찬양에서 정부에 대한 정치적 요구(민주선거, 언론자유, 집회자유, 관료부패척결, 족벌주의종식등). 학생군중은 등소평에 충성하기위해 불렀던 "인터내셔널가"를 <굶주림에 포로된 자 일어나라! 이땅의 버림받은 자 일어나라! 정의가 해방을 몰고 오도록, 더 나은 세상이 태어나도록>으로 바꿔 부름.

이 시위에 노동자 실업자가 가담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 언론인 참여. 지배층은 유혈학살 승인. 시위지배층내 분열조짐. 5월 4일 정부의 운동해체공작과 내부균열과 잠시 와해.  5월 13일 고르바쵸프의 방문사이에 전열을 다듬어 이붕 파면, 등소평 퇴진 요구 시위 재발발.

지방시위자 가담. 철도노동자, 교사대표단 가담후 노동자 대거 가담. 단식투쟁방식 취함. 5월 18일 부패척결, 정권퇴진을 요구한 시위대에 계엄령 선포. 혁명으로 발발. 바리케이트로 무장봉기. 운동시작후 천안문내에서는 성차별, 인종차별은 찾아볼 수 없었음. 6월 3일 발포. 노동자와 학생간의 논쟁(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노동자의 요청에 학생지도부가 불응. 시위 군중 완전 해체. 패조가 짙어지면서 학생들은 노동자에게 파업을 호소.

그러나 총파업 이루어지지않음. (노동자가 혁명 주체로 서지 못하고 감상적 평화주의 소부르주아계급인 학생이 주도였다는 한계).

 

이를 계기로 강택민이 공산당 총서기에 오름. 학생지도부가 서구로 망명하려했으나 서구에 의해 거부당함. '서구민주주의'의 (학생들이 그렇게도 열망하던) 허실을 증명. 학살이후 북경라디오는 '질서가 회복되었다'고 방송.



로자룩셈부르크 -

50년마다 '질서'수호자들의 보도가 세계사적 투쟁의 한 중심에서 다른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기쁨에 찬 승리자는 유혈학살극에 의해 일시적으로만 유지될 수 밖에 없는 '질서'라는 것이 그들의 파멸로 나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천안문 소요로 대중의 역량이 확인. 사회변화의 잠재력과 위기 폭발의 불씨로 여전히 남아있음.

 

이상의 상황을 겪으며 중국은 '일국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세계 경쟁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가 자본주의를 통해 완전히 경제에 대한 지령 권한을 거머쥐고 있다.

경제통제권은 북경 2,3백명의 최고 관리로부터 상당수의 하위관리와 공장경영자들에게 이전되었을 뿐. 경제의 후진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모택동의 파멸적 시도에 비판적 대안으로 내세운 새로운 [세계화]전략은 세계경제의 불황에 따라 주민 대중에게 더 어려운 생활을 가져다 주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낮은(혹은 높은) 임금, 기업도산, 잠재적 실업, 노동자 해고, 가난의 대물림은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 경제의 결과를 가져왔다. 빠르고 효율적 성장을 가져올 방식으로 국가와 시장 규제를 결합시킨 나라는 극히 소수, 주민의 빈곤을 피할 수 있는 나라는 더욱 극소수였다.

 

해방은 어떤 지배전략으로도 노동자계급(가장 선진적 계급)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적 노동계급의 연대야말로 해방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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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00:13 2004/12/2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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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8 00:08

. 시장자본주의의 시작 -

4대 현대화 : 토지는 국유. 경영은 각 농가. 농민이 자금을 상호출자하는 향진기업이 사료생산, 식료품 가공업에 등장(1985년 이들이 농업생산의 반이상 차지. 그러나 경쟁력있는 가호연합체 성격. 농촌 불평등 조장). 이로 생산은 늘었으나 일손이 달리는 소규모 농민들 낙후. 국가 생산력도 증가.


시장자본주의 합리화 주장 : 지금까지 사회주의는 무엇보다 평등강조. 자본주의 불평등을 고치는 게 사회주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거지와 부랑자에게 주택과 옷을 줌. 그러나 11억 국민을 먹여살리려면 평등 분배전에 생산 늘려야 함. 4대 현대화는 생산을 늘리는 것. 이를 위해 자유경쟁을 받아들이는 것. 외자본 도입. 자영업 인정. 실적없는 기업 파산. 주식회사제도 도입.
평등보다 자유를, 그러나 누를 위한 자유인가?



. 시장자본주의의 가속화 -

현대적 공장설비와 기술 수입. 수출지향적 산업 발전. 공업과 농업에서의 국가 중앙통제 대신 '시장관계 도입'. 자력갱생, 포위경제, 주의주의적 캠페인(대약진,문화혁명)을 통한 대중동원력을 내세운 모택동주의를 비판하고 국가 기근을 그의 책임으로 돌림. 20여 해안 도시에 경제 특구 제정. 모든 세금 감면. 토지와 건물 무료사용. 저임금제공. 이는 외국인 투자유치로 가능. 그러나 외국인 투자는 기대와는 다르게 하이테크 산업이 아니라 사무실, 호텔, 가공산업에 집중. 주로 홍콩자본이 다수. 소규모 프로젝트 투자. 외국인 투자는 위장 회사 투자가 많음. 중국상사는 외국인 합작회사로 변신, 현지 기업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득 챙김. 문화 개방으로  수입 증가. 통제력 상실. 그러나 국내 경제의 재편 투자. 생산 목표액에 대한 국가 통제 줄임이 빠른 경제 성장을 나음.


농업개혁은 공동 경작지가 개별 가족 경작지로 해체. 농민은 자신이 원하는 작물을 심어 정해진 세금을 내고 일정량을 국가에 팔고, 나머지는 자유시장. 초기 생산증가, 그러나 곡물의 구입가격 오름. 농민의 재투자 없음. 초기의 증가율 감소. 사회복지비 감소(국가투자 부재). 교육수준 하락(자녀를 노동시킴). 인구증가 억제를 위한 한아이갖기 운동. 이는 여성의 지위 하락. 사내아이만 낳으려함. 여영아 살해. 농업개혁이 처음에는 확실히 생산수준을 향상시켰으나 정부투자가 없어 농민이 더 고되게 일함. 인구밀도 높고 비옥한 곳은 생활수준 향상. 낙후지역은 불이익. 농촌불평등. 사적 임금노동이 농촌에서 대규모로 재등장(향진기업). 형식적으로는 국가 소유 토지이기에 이것이 지주제로의 복귀는 아니나 부유해진 농장관리에 고용된 사람들에게는 지주에와 같음. 지배층은 생산력 증가를 위해 이 불평등 증대를 환영. 증대된 생산과 시장의 성장 결과, 만성적 인플레 야기. 2배의 물가 증가. 곡물 수확량 하락. 이 하락을 완화하기 위해 더 높은 투자. 자유시장에 내다팔 곡물량이 정부투자로 증가하자 일부 농민은 자기 먹을 식량도 재배하지 않음. 농업정체야기.

 

공업도시개혁으로 공장 경영자는 기업이윤권을 거머쥐고 자체판단으로 이윤재투자 가능. 향진기업은 국가 통제에서의 제외. 공업경제의 무정부성. 경제범죄 등장,만연. 부정부패를 통해 국가 통제를 벗어나 이윤을 극대화. 국가가격 보조금과 사회적 임금의 지급중지는 노동자의 불만 초래.


. 인플레이션과 위기 -

물자부족(원료와 에너지 부족), 산업성장의 극심한 불균형으로 야기된 과잉생산품의 낭비, 수송능력부족등의 이유로 물가 폭등. 공급부족. 상품관리자의 이윤축적은 심각. 인플레를 더욱 부추김. 인플레의 고착은 금융, 은행업부문에도 영향 미쳐 자금비축을 위한 소비재 공급억제를 낳음. 국가투자 단절. 지배층은 이 현상에 대해 논쟁이 일어남. 보수파는 국가계획경제를 표방. 성장속도는 지배계급이 경제의 방향과 발전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주장. 등소평 분파는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최우선. 중앙집권은 경쟁에서 뒤쳐지게 함. 분권화와 시장 확대만이 경제역동성을 보장. 경제 통제력 상실은 유감스러운 부작용이라고 주장. 지배계급의 공개적 분열과 지도의 부재. 무리한 경제 개발과 현실사이의 모순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큰 공간을 열어줌.

 

. 소수민족저항 -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항상 소수민족의 언어와 관습을 유지, 발전시키도록 장려. 현실에서는 온정주의에서 노골적 인종주의가 나타남. 이에 경제적 낙후성이 결합해 회교도, 티벳의 저항이 큼. 문화혁명기간동안 티벳문화가 거의 절멸. 그들에게는 잔학한 봉건지배계급이 사회주의로 잘 무장된 잔학한 지배계급의 대처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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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00:08 2004/12/2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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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4/12/27 11:25

* 이 글은 丹風露離.님의 [하울의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성.] 에 관련된 글입니다.

관람 끝나고 나오자마자 같이 본 이가 하는 말.
"아니, 대체 사람들은 왜 전쟁을 하는 거야?"

땡~! 이렇게 반응하면 반칙~!

 

그냥 애가 되었다고 생각해주세요.
그럼 모든 상황이 대체로 이해가 될테니...

 

그럼 그냥 아이가 보는 영화인게 아니냐고요?
그렇게 단정짓기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여주인공 소피.
등장할때마다 얼굴의 주름 갯수와 얼굴크기, 몸 크기가 변하는 소피는 어른이 보기에는 맥락 있어보여도
아이에게는 그저 서로 다른 소피 여러명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
나올때마다 "쟤는 누구야?"라며 물어볼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주인공들의 날고 뛰는 장면들만으로도 모든 것을 용서하며 봐줄거다.

 

그렇긴 해도 이 영화, 역시 주타겟은 어른이다.
그런데 그냥 어른이 아니라 어른의 마음을 버린 어른이야말로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장면중에서
하울의 머리 염색 마법이 풀려 원치 않는 색으로 변한 머리를 보며 오열하는 장면이 있는데,
같이 본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

"꼭 내 딸 **를 보는 거 같더라"

 

나이도 엄청 먹은 거장 주제에 제 나이 까먹고, 남도 까먹게 하는 영화를 만들어버리다니,
미야자키하야오야말로 대단한 마법사.

 



하울 제자의 변신 장면,

하울이 염색 잘못되어 울부짖던 장면,

허수아비가 저주 풀리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장면,

그리고 그녀(소피)의 모든 것.

 

* 사족

전작들과 비교하건대 하야오가 만든 [하울***]은

그닥 메시지 전파에 관심있어 보이지도 않지만,

그저 그런 멜로물도 아닌 것이,

뭔가 한꺼풀 은근슬쩍 넘은 듯 보인다.

 

그게 위로 뛴 건지 옆으로 뛴 건지 뒤로 뛴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쩐지 살갑게 느껴져서 기분 좋음.

 

그래도 그놈의 애정결핍은 나이들어도 어떻게 안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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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7 11:25 2004/12/2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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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6 22:06

. 문화혁명(1960년대) -

지배계급의 권력투쟁이 거리로 연장을 위한 명분. 모택동이 희박해진 권력기반을 정비하기 위해 선동한 캠페인.

자유적인 자신의 적들을 "자본주의적 길을 걷는 권력내부의 사람들"로 공격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하다" (지배자가 허용하는 반란은 정당한 것으로 취급되는 아이러니를 당시 대개의 사람들은 알지 못함)란 구호.

의식적으로 조작된 군대 상층부와 홍위병을 기반으로 적들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정권을 다시 잡음. 그러나 문화혁명은 이제 모택동의 의도에서 벗어나 대중의 자생성에 의해 전국으로 확산. 파업까지 이름.

모택동은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군부 투입(혁명위원회). 내전 일어남. 이 혼란으로 하급관리들은 평화와 안정을 원했고, 산업은 심각한 타격받음. 몇년동안 입은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필요.

과학,기술 발전이 완전히 정지(학교 졸업자가 4년동안 아무도 없었고 지식인들은 은둔). 소련과의 국경분쟁압력. 그러자 미국과 일본에 경제개방을 해야 경쟁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옴(문화혁명기간동안 비난받은 사람들이 이들임). 이에 반대하는 분파간의 복잡한 권력 투쟁 양상. 모택동은 그 권력투쟁위에 군림. 주 투쟁은 4인방(보수)과 현대화분파간의 투쟁. 현대파의 임표 제거. 4인방 득세. 노동자 파업으로 이를 막은 등소평 등장(현대파). 4인방에 분노한 등소평지지자들에 의해 천안문소요 발발.


 

. 1976년 4월 천안문소요 -

현대파 지지자의 4인방에 대한 도전. 주은래 추모식으로 발발. 이로 인해 4인방은 권력에서 고립. 모택동의 죽음으로 4인방 체포. 1978년 등소평의 등장. 반대파 제거. 서방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에 문호개방이 모택동시대의 유산인 정체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 '시장사회주의'발전. 포위경제 포기.


<문화혁명의 종말>

 



*참고1.

핑퐁외교(1971) -

베트남전에서 패한 미국은 중국과 소련의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차단하려 함. 중국은 국내의 비판적 여론을 탄압하고 관심을 돌리기 위해 외교긴장 강화. 소련과의 충돌. 모택동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과의 대립 완화를 위해 미국과의 외료를 함. 이로 미국의 예상대로 중국의 베트남 원조 중단.

*참고2.

중소대립 -

소련은 중국 원조 중단. 중국은 대약진구호를 내걸고 자력으로 갱생하려함. 소련이 '미국을 앞지름'을 내걸자 중국은 '영국을 앞지름'을 목표로 내걸음. 그러나 농업국인 중국은 공업화를 위한 자본과 기술 부족. 이 부족분을 노동력과 정신력으로 극복. 자력으로 원폭 개발. 그러나 전근대적 방법으로는 성공 못함. 농업만 황폐화. 이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공산당내 실권 잃음. 문화혁명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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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6 22:06 2004/12/26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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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6 16:11

함께 중국여행 가기로 했던 친구는 여행가기 3개월전부터 "우리 스터디나 해볼까?"하고 절 잡았죠...-_-;;;

 

그래서 얼떨결에 봤던 책중에 하나가

[바로보는 중국 현대사] - 20세기초에서 천안문 사태 이후까지 -

(찰리호어 지음/조남선 옮김. 풀무질 신서)

입니다.

겉표지가 빨간 벽돌모양이라 우리끼리는 벽돌책이라고 불렀었어요.

이제 보니 그때 요약해놓은 자료도 남아있었네요.



. 중국사회의 개화 -

1840년대 아편전쟁과 함께 시작. 아편전쟁의 시작으로 제국주의가 중국에 침탈. 청조정부는 제국주의의 확장을 지지하는데 철저히 무능력. 자신의 조세권조차 상실.


 

. 1911년의 유산된 민족주의 봉기 [신해혁명으로 이어진 무창봉기] -

노쇠한 제정 몰락. 공화정부 수립.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지방군벌들에 의함. 기근과 내전, 비격단의 역할이 만성화. 혹독한 과세와 군벌의 가렴주구로 농민 핍박. 농민들의 도시이동

 

.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도시화의 가속화 -

식량과 피복에 대한 교전국의 수요증대로 1913~19년 시기동안 40%나 수출증가. 중국과 일본의 자본가 번창. 공업기계류의 수입이 1915~21년동안 13배 증가. 산업노동자계급도 비례증가. 약 150만명 도시 산업노동자 출현. 이들은 가족이나 촌락출신의 끈에 의해 수공업노동자와 운송노동자, 실업자와 연결

 

. 1차대전후의 5.4운동(1919) -

젊은 지식인들은 서구 사상에 영향을 받아 중국 구원의 길로 '과학'과 '민주주의'를 주장. 구래전통을 진보의 장애물로 간주. 그러나 베르사이유 회담에서 일본의 무력점거 협약을 승인한 서구세력에 배신감을 느낀 그들은 1919년 5월 4일 3,000여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집회. 서구열감 비판. 중국의 이익을 팔아먹는 북경정부 비판. 중국 최초의 민족주의 시위. 중국사회의 뿌리깊은 관행과 관습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 여학생들이 중심적 역할을 수행. 여성의 남성에 대한 복종에 도전. 지식인들 주도로 도시의 대중을 운동속으로 끌어들임. 최초의 노동자 파업. 주슬로건: 일본상품 배격, 북경정부의 무기력 비판, 파업으로 체포된 학생 석방, 친일장관 해임.

 

. 중국 공산당 창당(1921) -

지식인이 창당 멤버. 노동자 계급속에 영향력 확대. 노동조합 조직화. 군벌과 적대관계(군벌==중구자본가). 1919년 군소군벌들과 동맹한 국민당 정부(신해혁명 이끔)가 재조직. 국민당은 수동적인 대중기반을 가짐. 국민당과의 합작 결의. 독자적인 공산당 세력이 아닌 국민당의 가장 활동적인 분자로 작업하며 당의 현장기반 구축. 중국 공산당은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음. 노동자 독자당이라기 보다는 제국주의에 대항한 민족주의가 주 슬로건.

 

. 1925년 노동자 혁명 -

임금인상, 파업으로 시작해 공안부대의 노동자 살해사건 발발로 정부와 외세에 대항하는 총파업 확대(공산당 주도). 그러나 중국 부르조아지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외국인 소유공장에 한정하려 했지만, 중국인 소유업체까지 미쳐 제국주의 반대 투쟁이 아닌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독자적인 노동운동으로 확산. 지식인이나 공산당도 노동자세력에 따라가게 됨.

외세에는 반대하나 국가권력의 지도권을 쥐고자 하던 국민당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노동운동을 등에 업었으나, 은밀하게 서방과의 공동이익을 교섭. 농촌에서도 농민봉기(이 봉기로 농민을 유린했던 구관습이 분쇄되고, 여자와 아이의 인신매매가 금지, 아편과 비용이 많이 드는 종교의식 금지, 전족의 악습폐지, 고리대금업자와 지주 추방, 지대와 토지세 중단). 이는 국민당의 이익과 대립되어 국민당은 농촌노동자 탄압 시작. 중간에 낀 공산당은 '악덕지주'와 '선량지주'를 구별해줄 것을 요구. 이는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모순. 노동자, 농민의 반발로 공산당은 중립을 지킴.

혁명기간동안 성장한 공산당은 노동자 대중에 영향력이 막강해졌고, 공산당과 제휴한 국민당은 상해에 입성. 입성후 공산당과 노동계급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 민족주의적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보유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파괴. 이 노동자 패배는 공산당의 노동운동을 철저히 파괴시킴. 그러나 지역국부적으로 노동운동이 계속. 공산당은 체제노선전환(국민당에서 완전독립, 독자적 노동계급조직으로의 전환)하지 못해 예전 역량을 거의 잃음. 공산당이 살아남기 위해 '광동꼬뮌'을 일으켰으나, 이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당의 사업으로 노동자계급과 완전히 고립되어 수행된 모험. 이로 공산당과 노동계급사이의 끈이 완전히 끊김. 위의 공산당은 소련 스탈린에 의해 영향받은 조직.

 

. 모택동의 대장정 -

잔존하는 공산당 세력중 국민당 지방군벌의 힘이 미약함. 척박한 영토를 중심으로 농민집단을 중심으로 확장. 1932년 국민당에 위협세력으로 성장. 국민당의 탄압. [대장정]으로 대응. 모택동 정부의 근거지에 탄압이 들어오자 자구책으로 본거지를 중국 서부의 오지로 옮김. 이 대장정은 1년을 지속. 살아남은 사람이 2% 정도로 고된 여정. 이 대장정의 성공으로 게릴라 근거지 구축. 또한 핍박받는 농민들에게 인간적 대접을 해 농민의 지지를 얻음

 

. 모택동 공산당의 권력 구축 -

대장정이 끝날 때쯤 일본의 침투로 국민당과의 대립을 접어두고, 민족주의 운동을 하기 시작. 같은 일본타도를 내세운 국민당과의 통일전선 구축. 농민의 지지를 받던 독점지주폐지가 없어지고, 투쟁초점은 항일애국연합이 됨. 효과적인 게릴라전으로 일본에 저항 지도 권력을 구축(대장정과정에서 고통스럽게 체득한 게릴라전의 교훈들이 화북평원과 구릉지대에서 눈부시게 적용).

모택동의 공산당은 대중적 농민 민족주의위에서 권력 구축. 대중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잔인한 일본군대의 행동이 농민의 민족주의를 부추겼고, 일보군대를 막아준 모택동군을 의지. 이에 향신세력의 절대권력을 꺾음으로써 더욱 지지받음. 일본군에 승리하자마자 국민당과의 내전이 다시 시작. 이 내전은 게릴라전이 아니라 대중을 구경꿈으로 하는 두 정규군사이의 일반적 전쟁.

두 군대의 근본적 차이는 모택동의 홍군은 자신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신념으로 움직였지만, 국민당 군대는 자동인형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이어야 했으나, 민족 상황에 힘입은 대중과 연결고리가 없는 공산당의 권력장악이 중국 현정부의 수립과정>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4/12/26 16:11 2004/12/2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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