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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노조 게시판에서...

누군가 이렇게 썼다.

-새로운 진보정당, 누구에게 이로운 정당인가?

 

그래서 나도 몇 마디 했다.

신랄하게 하고 싶었지만

'이&실'이라는 필자 또한 내 주변에서 혼자 끙끙거리고 있을 것 같아서

조심조심 내 생각을 적었다.

 

내 생각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대들'이 하는 얘기의 절반 이상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듯이,

내가 내뱉는 얘기의 2/3 이상을 그대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을 수 있겠다.

 

2MB의 문제가 아니라

한 세대를 걸쳐서 관통하는 문제라니깐...!!

 

아, 오후 6시가 지나고 이 시간까지

술 참 많이 마셨고, 회의는 의미있는 수준으로 했다.

술을 많이 마셔도

술에 혹여 취했어도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감출 수는 없는 법...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꿋꿋하고 소신에 찬 모든 동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보낸다.

 

<오늘, 내가 쓴 글>

 

'이&실’ 동지의 글을 매번 읽는 독자 중의 하나입니다. 처음 ‘이&실’이라는 아이디를 보면서 ‘이론과 실천’의 줄임말인가 하고 잠깐 생각했던 탓인지, ‘이&실’이라는 글자는 눈으로만 보고 입으로는 ‘이론과 실천’이라고 불러보곤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론과 실천이 통일된 삶을 꿈꾸어 왔던 저에게는 무척 호감이 가는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공교롭게도 민주노동당에서 다달이 내던 기관지도 ‘이론과 실천’이었네요-.-).

저는 우리 노조의 현안과 안팎의 관심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지혜롭게 글을 쓰는 동지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동지가 실제로 누구인지 알면 온라인 아닌 오프라인에서도 만나서 술 한잔 나누며 토론해봤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만, 그건 동지의 ‘의지’의 영역에 속한 문제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든 내용에 다 공감한 것은 아니지만, 동지의 글은 대체로 내게 부족한 부분을 성찰하게 하고 제가 깨닫지 못하는 부분을 일깨워 주곤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읽기만 해도 흐뭇한 경우가 많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어제 동지가 올린 글(자유게시판 12627번, 새로운 진보정당, 누구에게 이로운 정당인가?)에 대해서는 한마디 참견하고 싶어졌습니다. Edmund Burke의 얘기로 시작되는 1번 내용에 대해서는 특별히 토를 달고 싶지는 않고 새로운 진보정당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진 2번 내용에 대해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편의상 동지의 글 흐름을 따라가면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나서 끝에 가서 종합하도록 하겠습니다. (따옴표는 제가 임의로 표시한 것입니다)

“우리 노동자는 19세기 유럽의 노동자처럼 진보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노동자의 편을 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정작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진보에 대한 개념부터 정리하고 얘기를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워낙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일반명사와 이데올로기 사이를 오가는 단어이기는 합니다만, 한국에서의 진보는 누가 쓰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보수꼴통들은 진보와 친북좌파를 같이 뭉뚱그려 사용하고, 중도우파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보수주의적 색깔을 은폐하기 위해서 자기들을 진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진보를 사회과학적인 개념으로 풀면 현재의 사회체제를 개혁하거나 변혁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저는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쓰든 지난 대선의 결과를 보면, 우리 노동자는 진보에 대한 환상을 갖기보다는 냉정하게 자신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듯이 보이고,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노동자의 편을 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든다고 한다. 어떤 진보냐? 새로운 진보라고 한다. 어떻게 새로운가?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 라는 슬로건을 높이 들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 하는 것이 어디 노무현 정권뿐이겠는가?”

-새로운 진보정당은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할 것 같은 예단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진보정당은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논의만 무성한 단계입니다. 저도 의견이야 여러 가지 있지만 아직은 지켜보는 수준에 가깝습니다. 저처럼 가까이서 보든 아니면 관망하는 입장에서 보든, 새로운 진보정당에 대한 비판과 매도는 성급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동지의 입장에서는 ‘안 봐도 비디오’ 수준이라고 한다면 제가 뭐라 참견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종북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분당이라... (이하 부분 인용) 참으로 궁색한 변명... 예견됐던 문제들을 이제 와서 종북주의라고 매도하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분당을 합리화하기 위한 주장치고는 너무 초라.... 일심회 사건이 결정적이라고 하면... 정말 비상식이다.”

-동지가 그간 올린 글들을 다시 읽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2005년 이후 동지가 올린 글 중에서 이토록 감상적으로 질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궁색하고 초라하고 비상식적인 사람들’, 바로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드는 사람들을 얘기하는 것이겠죠? 동지의 비판적 안목이 한순간에 비난 일색으로 넘어가게 만든 ‘그 사람들’의 책임에도 눈길이 가지만, 그래도 의아스러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예견되었던 문제들’은 맞습니다. 자주파의 주된 이념은 민족주의이고, 그것은 애초에 진보의 이념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주의와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친미 반공 이데올로기를 금과옥조처럼 섬기는 세력이 권력을 잡아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면서 민족주의도 한국에서만은 하나의 진보적 흐름으로 자리잡았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한 현실은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으로서의 고유한 색깔을 갖고 노동자 민중에게 다가가기보다는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진보정당을 그들의 2중대로 만드는 일에 더 치중하게 했고, 결국에 민심은 노무현과 민주노동당을 싸잡아 한 통속으로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대통령선거 과정 그리고 그 평가 과정에서, ‘이미 예견되었던 문제들’이 더 이상 덮어둘 수 없을만큼 커져버린 것이고 그 결과는 지금 진행되는 바와 같습니다. (두 줄로 쓰고 말 내용은 아니지만 오늘은 이렇게 간단히 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필요하다면 추후에 또 쓰도록 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탈당이며 분당이며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의 길밖에 없었느냐 하고 묻는다면 저는 애써 변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원이 아니면서도 손을 내밀면 기꺼이 민주노동당을 후원했던 저의 벗들에게 요즘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다닙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주창하면서도 노동자를 선거 기계로 전락시킨 데 일차적 책임이 있다. 노동자를 주체로 내세우지 못하고 객체로 대상화시켰다는 말이다.”
-저도 상당 부분 인정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해서 뛰고 있는 동지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단병호 위원장(국회의원)의 탈당의 변에 실린 내용을 인용합니다. 동지의 지적과 맥락이 같습니다. “당 위기의 본질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가 그 첫째입니다. 민주노동당 당원의 40%가 노동자 입니다. 그 대다수가 민주노총 조합원입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내에 민주노총 조합원은 있지만 민주노총 내에 민주노동당 당원은 없었습니다. 당의 강령과 기본정책 그리고 당면한 정치방침을 가지고 노동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정치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당원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노동자 대중은 행사와 선거 때 그리고 재정을 조달하는데 필요한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새로운 진보정당’이 어떻게 노동자의 미래가 될 수 있겠는가? 노동자에게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급 정당이 필요하다. 그러나 ‘새로운 진보정당’은 그 디딤돌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지지해 줄 수 있는 버팀목이 아니다.”
-동지의 민주노동당 비판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당 간부의 한 사람으로서 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반성과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고 요즘 제 마음이 그렇기도 합니다.
-‘새로운 진보정당’이 노동자의 미래다, 하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나 동지가 참여해서 노동자의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동지가 말하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급정당’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지는 민주노동당의 연장선위에 놓여 있는 ‘새로운 진보정당’이 노동자들을 지지해 줄 수 있는 버팀목이 아니라고 단언했는데, 동지가 말하는 ‘계급정당’은 아직 실체가 없습니다. ‘이론’과 ‘이상’은 있고 ‘실천’과 ‘실체’가 없다면 공허하지 않습니까? 물론 동지는 그러한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실천적 결단과 용기를 낼 것으로 믿습니다만....

급하게 참견하려다 보니 말꼬리를 다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다소 불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의하신다면, 진지한 후속 토론을 통해서 동지의 생각을 더 알고 싶고 제 생각도 밝히고 싶습니다.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것입니다. 지금,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적극 나서는 동지들이 있고, 노동자 계급정당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동지들도 있고, 민주노동당을 되살려보겠다고 애쓰는 또 다른 동지들이 있고, 이러한 상황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동지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의 변혁과 진보를 위하여 앞장서겠다고 하면 누구에게나 힘든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노조활동이든 당 활동이든 서로 북돋아주고 격려해주면 좋겠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그 길이 차이가 분명해질 때 토론하고 비판하면서 더 큰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을 나서기도 전에 그 길은 아예 길이 아니라고 단정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지는 맙시다. 동지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좀 더 많은 조합원들이 들어서기를 바라고, 조금은 다른 길 위에서 저도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아직은 저 자신조차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분명한 선택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자리잡지 못하면 노동자의 미래는 끝없이 암담하다는 생각에서 적어보았습니다.

이&실 동지와 여러 동지들의 애정어린 의견을 기대합니다.



새로운 진보정당, 누구에게 이로운 정당인가?

 

1.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귀족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영국의 귀족들이 심하게 쫄아 있었다, 그곳에서 혁명이 일어날까봐. 그 찰나 버크라는 인간이 나타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성’이라는 글을 쓰면서, 당시 시민 혁명을 자극하던 자연권, 평등, 자유, 이런 것들을 졸라리 씹어댄다. 요즘 그랬다가는 미친놈 소리 듣기 십상이겠지만, 이것이 근대 정치적 보수주의의 출발점이다.

귀족들 중심으로 보수주의 장막이 펼쳐졌지만, 자유를 향한 시민들의 혁명은 멈추지 않았다. 자유, 자유, 자유.... 1818년, 1830년, 1848년, 1871년..... 그야말로 유럽의 19세기는 혁명의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보는 그렇게 혁명으로 시작됐고, 그 혁명 때문에 자유주의, 민주주의라는 이름표를 단 ‘자본주의’가 국가 체제로 자리 잡게 된다. 혁명때문에...

진보는 혁명으로, 그리고 민중들의 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진보의 결과물이, 그리고 혁명의 결과물이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지는 않았다. 돈이 있는 소수의 시민들은 공장을 짓고 돈을 벌 수 있는 자유가 생겼지만, 대다수의 없는 자들은 그 공장에 자기의 노동을 팔 수 있는 자유밖에 없었다.

똑같이 피를 흘려 진보를 이루었는데, 그렇게 얻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인데, 이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민주란 말인가, 그리고 누구를 위한 자유란 말인가? 노동자도 혜택 받을 수 있는 자유와 민주가 필요했다. 또 다른 혁명이 필요했다. 시민들이 귀족에 대한 혁명을 이루었듯이, 시민 안에서 노동자가 자본가에 대한 혁명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자본가들이 보수주의자가 된다. 19세기의 보수주의자들처럼 자유주의자(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혁명을 걱정한다. 노동에 대한 착취가 없으면 자본은 축적되지 않으니 당연하지. 자본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의 혁명을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그래서 명명한다. 자본가인 자기들이 한 것은 ‘자유주의적 진보’요, 노동자들이 하려고 했던 것은 ‘사회주의적 급진’이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두 계급의 변주곡이 20세기 하늘에 울려 퍼진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다.

2.

우리 노동자는 19세기 유럽의 노동자처럼 진보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노동자의 편을 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정작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진보적 지식인의 대다수는 오히려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아니 결국 자유주의적 성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가 더욱 더 안정적으로 작동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누군가 진보를 말할 때, 노동자라면 그것이 어떤 진보인지, 누구를 위한 진보인지를 반드시 되물어야 하는 이유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든다고 한다. 어떤 진보냐? 새로운 진보라고 한다. 어떻게 새로운가?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 라는 슬로건을 높이 들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 하는 것이 어디 노무현 정권뿐이겠는가? 진보를 운운하는 한국의 먹물들에겐 대중을 선동하기 위한 매우 주요한 전술임을 이제, 모르는 사람 빼고는 다 안다.

그런데, 종북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분당이라...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민주노동당이 대중적 정당으로 출발할 때 이미 예견됐던 문제들을 이제 와서 종북주의라고 매도하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 오랫동안 참아왔는데 이제는 도저히 같이 하지 못하겠다고? 분당을 합리화하기 위한 주장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민주노동당이 선진적 노동자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종북주의는 아니다. 보수 언론 덕택에 속칭 ‘주사파’의 일편단심은 이미 누구나 아는 상식 아니었던가. 무엇이 그렇게 새삼스럽고 놀랄 일이라고, 일심회 사건이 결정적이라고 하면, 이건 정말 비상식이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주창하면서도 노동자를 선거 기계로 전락시킨 데 일차적 책임이 있다. 노동자를 주체로 내세우지 못하고 객체로 대상화시켰다는 말이다. 국회의원 한 사람을 당선시키면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을 노동자 농민에게 주입시켰던 민주노동당이 아니던가. 분당을 주도한 속칭 ‘전진’은 이러한 선거주의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새로운 진보정당’이 어떻게 노동자의 미래가 될 수 있겠는가? 노동자에게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급 정당이 필요하다. 그러나 ‘새로운 진보정당’은 그 디딤돌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지지해 줄 수 있는 버팀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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