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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박노자는 되고 우리는 안되는가?

  • 등록일
    2005/07/10 08:39
  • 수정일
    2005/07/10 08:39

왜 박노자는 되고 우리는 안되는가?

 

[비나리의 초록공명] 김지하, 이문열, 진중권, 21세기에 살아남을 사람은

 

 * 출 처 : 대자보(http://www.jabo.co.kr)

 

 * 글쓴이 : 비나리

 

박노자는 73년생이고, 오슬로에 있다. 나보다는 다섯 살 어리다. 물론 나이가 문제는 아니지만, 박노자 앞에서 부끄럽고, 또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박노자가 우리 앞에 던진 질문에 대해서 사실 잘 모를만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박노자만큼 철저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21세기로 살아서 건너온 사람은, 박노자 밖에는 없어보인다.

 

장정일은 살아서 건너온 줄 알았다. 찡인 장정일은 90년대 혼자였지만, 혼자서 "섹스에 미친 시대"가 암 것도 아니라고 외치고 있던 건 장정일 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는 나도 살아서 건너온 것이 신기할 정도로 혼자였고, 지금 돌아보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것에 다름아니다. 강남의 재즈바와 이태원의 일탈들, 이런 것 다 그냥 “섹스에 미친 시대의 부자들과 그 언저리의 일탈에 다름아니다”로 외친 건 장정일 밖에는 없다. 89년도에 사망한 기형도가 만났던 시인만이 있던 도시의 "이상한 소년", 그 장정일은 90년대를 혼자 넘어왔는데, 그 장정일이 아직 살아있을까? 나는 장정일에게 지지를 보내고 싶지만, 지금의 장정일의 모습은 잘못된 이론가들 앞에선 "꽃돌이" 모습에 더 가깝다. TV에서 장정일의 망가진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난다. 장정일도 21세기로 살아서 건너오지는 못한 것 같다.

 

조정래는 살아서 건너왔을까? 참여연대의 참여사회연구소에서 활동하던 시절 조정래 선생을 처음 보았다. 멋졌다. 그렇게 말 잘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러나 지금의 조정래는 영 아니다. 조정래가 변한 것이 아니라 너무 변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조정래는 지금 "완화된 민족주의"의 화신에 다름 아니다. 동북아중심국가를 염두에 두면서 일본에게 대해서 끝없는 적개심을 보이는, 그래서 아직도 서정주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 서정주는 이미 사회적으로 폐기처분 된지 오래된다. 그렇지만 조정래는 21세기에도 서정주를 극복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이미 서정주의 친일성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된 상태에서 조정래에게 남은 것은 완화된 민족주의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대응체를 찾지 못하고 굳어가는 민족주의 밖에는 없어 보인다.

 

백기완 선생은 살아서 21세기를 넘어왔을까? 이제 남은 것은 강연하면서 받은 돈을 혼자 가졌다니, 한 번도 밥사준 적이 없고, 옛날부터 자기 영광 외에는 생각한 적이 없다는, 20년도 더 된 무용담이 전도되어 21세기에 동동 떠 있는 셈이다. 지금도 민주노동당이나 지역운동 했던 할아버지들이 술자리 안주 그 어떤 것도 아닌, 살아서 21세기로 넘어왔다고 평하기가 쉽지 않다.

 

김지하 선생, 소위 지하선생은 살아서 21세기를 넘어왔을까? 본인 스스로도 이제 다음 세대에게 넘긴다고 하였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문득 지하 선생의 큰 그늘 아래에서 나 역시 숨쉬고 살아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시인임에 틀림없고, 또 나오지 않을 정도로 호쾌하고 호방한 시인이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틀림이 없다. "오적의 김지하"는 분명 사회의 것이었고, 그 재능을 하늘이 사람들을 위해서 내려준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토를 달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이제는 촌스러운 노인에 불과하다는 점에 대해서 더 눈이 많이 간다. 생명이라는 질문이 작으냐? 작지 않다. 동양이라는 질문이 작으냐? 작지 않다. 그러나 21세기에 김지하 선생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남아있지만, 정작 김지하는 70년대보다 더 옛날로 가버렸다. 흔히 얘기하는 "죽음의 굿판"이 잘못되었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라는게 내 어리석은 생각이다. 다만 너무 촌스러웠다는 아주 사소한 데에서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인다. 훌리건을 처음 본 이 순박하고 마음만은 청년, 김지하 할아버지는 감격했다. 그래봐야 그건 훌리건에 불과하고, 1만 불 시대의 훌리건들은 3만불 국가의 훌리건처럼 국경을 넘나들 경제적 힘이 없고. 경찰 통제와 미디어 지원 하에 국가 폭력과 교묘하게 결합된, 공공질서라는 또 다른 힘에 기대어 연명하는 그야말로 훌리건에 불과하다. 훌리건들에게 "우주의 질서"를 읽는 늙은 시인, 거기에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가? 나에게는 극우파의 기세등등만이 느껴진다.

 

박노해와 김남주, 두 시인의 차이는 생각보다 깊다. 나는 김남주의 시를 더 좋아했다. 내 주위에는 박노해를 더 좋아하는 사람과 김남주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김남주를 더 좋아했다. 민족해방전선의 맨 앞에 서 있었다고 하지만, 나는 김남주의 서정성과 시어들을 좋아했고, 솔직히 시인 김남주를 오랫동안 흠모했다. 별 볼일 없는 시인이고, 나치에게 총살당했다는 것 외에는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기억못할 시인이지만, 폴 엘뤼아르를 좋아하게 된 것은 김남주의 시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엘뤼아르를 좋아해서 김남주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김남주를 좋아했기 때문에 엘리아르라도 좋아하게 된 셈이다. 94년도에 김남주는 옥중에서 퍼진 암을 이기지 못하고, 결혼하자마자 죽었다. 그래서 살아서 21세기로 넘어오지 못했다. 살아서 넘어왔다면 험한 꼴을 보았을 것 같다. 박노해는 살아서 넘어왔다. 사노맹의 박노해, 그에게 21세기는 없는 것일까? 영 없어 보인다.

 

정작 살아서 넘어온 것은 신중현이다. 신중현이 매주 연주하던 우드스탁의 라이브를 접은 것은 2002년 겨울의 일이다. 우드스탁의 녹음실만을 남겨놓고 카페를 접은 다음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회를 했다. 마음 속 깊은 얘기 한 마디를 남겨 놓았다. "한 명만 있었어도 계속 할려고 했었다..." 아마 우드스탁에 재수없게 한 명도 안 간 날이 있었을 거고, 그 날 신중현은 숨 남아있을 동안에는 끝까지 할려고 했던 우드스탁의 라이브 공연을 접었다. 그러나 아직도 신중현은 서슬 시퍼렇게 살아서, "그런 건 음악이 아니야"라고 여전히 열심히 작곡하고 있다. 그래도 조만간 신중현의 음악은 21세기를 헤치면서 진화하고 있다. 이상은, 이상은은 살아서 21세기 땅을 밟은 드문 경우이다.

 

김광석이 죽고, 꾼 에서 살아남은 이상은은 일본이라는 땅에서 21세기를 만났다. 확인되지 않은 이상은의 여러가지 전설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독립된 개체로서 21세기라는 땅을 밟았다. 부럽고 또 부럽다. "쥐고 있던 초록빛 씨앗 보라색 흙에 담그리" (로만토피아 중, 6월 발매) 21세기의 서막이 걷히고, 대한민국 땅에서 진정으로 21세기가 시작된 건 2005년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누가 살아서 건너왔고, 누가 건너오지 못하고, 90년대라는 덫에 걸리거나 자빠져 있는지 조금은 명확해졌다. 나는 시체로 넘어왔다. 89년도에 전체 단식을 기획하던 우석훈은 그야말로 진기 한 줌 남지 않고, 시체로 21세기를 넘어왔다. 90년 10년 동안 한 줄의 글도 남기지 못하고,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못하고, 시체만이 남아서 21세기에 흔적만이 넘어왔다.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그날, 난 페트병 3개의 소주를 다 마시고, 그야말로 시체만이 넘어왔다.

 

로렌스 올리비에의 소설 '어리석은 사람"대로 술을 마시고 자살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시체만이 21세기로 넘어왔다. 왜 박노자는 가능하고, 다른 사람은 불가능했을까? 그리고 왜 박노자는 진화하는데 다른 사람은 퇴화화거나 퇴행의 길로 빠져들게 될까? 누구나 다 아는 문제 같아 보였고, 다만 박노자는 "금기"로부터 자유로와서 그걸 얘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정도의 평가를 받던 박노자는 이제 한국 최고의 학자가 되었고, 한국 최고의 지성인이 되었고, 또 아직도 계속해서 아픈 질문들을 던지고, 그 아픈 질문들을 증명해나가고 있는데, 다들 21세기라는 공간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죽었을까? 주사파의 패싸움으로도 문제는 풀리지 않고, 박노해식의 단일 전선으로도 문제가 풀리지 않고, 기타등등의 각패 전선으로도 문제가 하나도 풀리지 않을 뿐더러 더 심각하게 꼬이는 현재의 상황... 도대체 무엇이 차이일까? 왜 박노자는 되고, 진중권은 안되지? 다들 고만고만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는데? 왜 훌리건이 박노자에게는 잘못된 근대화의 결과물로 보이고, 왜 김지하에게는 우주의 맥박처럼 보이는 거지? 더 어린 사람들이 등장하면 좋아질 것이라던 80년대의 대체적인 공감이 20년이 지났는데, 왜 더 문제가 복잡해져버리고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 거지? 조한혜정 교수의 해방구, 홍대는 왜 "걷고 싶은 거리"에서 "굽고 싶은 거리"로 바뀌어 버린 거고, 레이지본의 2집은 쫄딱 망한거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놓고 진화시키면, 나쁜 것들의 진화가 더 빠르다는 이유 때문일까? 박노자가 좌파야 좌파가 아니야? 왜 이런 쓸데없는 논쟁들이나 하게 되는 거지? 착하게 살아보자고 모인 사람들이 덩치만 좀 되면 금방 파쇼 집단같이 되어버리는 거지? ‘노빠’들도 원래 모일 때에는 감동과 선 같은게 좀 있었쟎아? 노빠라이제이션 같은 이상한 법칙이 이 땅에는 흐르는 거야? 그러면 박노자는? 도대체 어떻게 출현과 진화가 가능한 거야? 진보이냐, 진보가 아니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민주노동당이 있어서 세상에 도움이 되었느냐? 평가하기는 쉽지는 않지만, 도움이 된 것보다는 도움이 되지 않은게 더 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현재의 모습으로서는 그렇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삶을 빨아먹으면서도 갈 길을 잃고 비둥거리는 공룡 같다.

 

지금은 마치 종교처럼 동지와 동지 아닌 사람들을 구분한다. 그리고 자기처럼 희생하지 않으면 동지 아니라고 삐지기 일쑤다. 시민단체는? 너무 많아졌다. 그리고 기형적으로 커졌다.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서 유지하기 위해서 고생해야 하는데, 정작 "아웃풋"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결과물이 너무 조금이다. "에게, 이걸 할려고 그렇게 고생한 거야?" 더 문제인 것은 젊은 활동가들의 성과물을 몇 사람이 너무 쉽게 챙겨가 버린다는 거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조직들이 너무 많지만, 눈물만으로 서로 버티고 잇다는 건 실상을 너무 어렵게 만든다. CEO급과만 대화하겠다는 몇 단체는 눈쌀없이 보기는 어렵지만, CEO들이 신경도 안 쓰는 대부분의 단체를 눈물없이 보기는 어렵다. 이 단체들 역시 21세기에 살아서 도착했다고 평가하기에는 어렵다. 21세기에도 아직 남아있는 90년대의 흔적 언저리에서 버둥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도대체 21세기,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질문이 세기의 질문이고, 세기는 떠나서라도 지금 우리나라에게 적합한 질문일까? 내가 보기에는 박노자가 옳고 김지하가 틀렸다. 노빠는 틀렸고, 노무현은 많이 틀렸는데, 그렇다고 민주노동당도 별로 맞아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던져진 질문을 쉽게 바꾸어보면 "독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이다.

그래도 독도는 우리 땅. 개인들은 이렇게 가도 좋지만, 이렇게 대답한 학자들은 전부 죽는다. 이문열은 살아남는다. 그래도 이문열은 이 공간에서 별 얘기를 안했다. 나름대로 최선의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생각보다는 험악하게 살아남았다.

 

이순신은 명랑해전의 12척의 전선이라고 대답하면 시장에서는 잠깐 살아남겠지만, 학자로서는 꽝이다. 문인으로서도 꽝이고, 예술가로서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에 대해서 비판할 자격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넘이 그넘이다. 질문은 몇 개 있다. 독도, 지율, 김선일, 훌리건... 또 몇 개의 질문이 더 있을 수 있다.

청계천, 뉴타운 그리고 기초의원 정당공천... 이 몇 개의 질문에 하나씩 답을 하다보면,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될 것 같다. 박노자는 독도, 김선일, 훌리건에 대해서 사회적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김지하 선생이라면? 독도는 우리 땅, 지율은 우리 편, 김선일 불쌍해, 훌리건 좋은 것, 청계천 좋은 것, 뉴타운 몰라, 기초의원 몰라...

노무현이라면? 독도 우리 땅, 지율 나쁜 사람, 김선일 골 아파, 청계천 답답해, 뉴타운 화나, 기초의원 정당공천 당근 해야지... 민주노동당? 독도에 깃발 꼽고, 지율 우리편, 김선일 큰 일이다. 훌리건 좋은 거, 청계천, 노동운동, 뉴타운 나빠, 기초의원 정당공천, 글쎄... 나는? 독도, 시끄러, 지율, 어려운 질문, 김선일, 죽일 넘들, 훌리건, 극우파들, 청계천, 위험한 것, 뉴타운, 나쁜 넘들, 기초의원 정당공천, 어렵다... 여기에 애매하지만 질문 하나를 보태면 황우석이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던지면 통일은 어떻게? 박노자는 정치인이 아닌 학자지만, 어려운 질문들에 하나씩 답하는 진화를 하고 있다.

그래서 박노자와 답하지 않고 도망갈려고 한 사람들의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정답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답할려고 시도한 사람과 시도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결국 많은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박노자의 얘기가 전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전부 감추고 있던 이전 사람들과 박노자는 확실히 다르다. 나이 가지고 얘기하는 건 좋은 자세는 아니지만, 하여간 박노자보다 먼저 뭔가 한다고 방방거렸던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전부 접싯물에 코 박아야 한다.

 

* 사진출처 : 한겨레21

* 필자는 경제학박사로 초록정치연대(www.greens.or.kr) 정책실장입니다. 최근 <아픈 아이들의 세대 - 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뿌리와이파리, 2005)를 출간했습니다

* 필자의 블로그안내 http://blog.naver.com/wasan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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