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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 등록일
    2004/08/25 02:39
  • 수정일
    2004/08/25 02:39

짧은 생각이 들더군요.

지속되는 회의 그리고 목적의식을 갖는 활동들이 무수히 이 사회를 비판하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들 유의미하고, 유용한 것들입니다. 우선 순위를 정할 수도 없으며,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하기에 이 늦은밤에도 활동을 위해 무수한 활동가들이 문건과 씨름을 할 것이며, 지향하는 바에 따른 신념들을 운동을 위하여 진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들 고전분투하느랴 자신을 돌보지도 못하며, 맡은바 임무에 의해 시간을 쫓겨가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헌신적이지 않고서는 결코 불가능한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또한 개인적 삶을 포기한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개인적 시간을 갖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시간 그리고 활동을 위한 재생산을 위한 투자에 대한 고려는 고려 이상의 의미를 갖을 수 없는 조건입니다. 보통의 체력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를 감당하겠습니까? 더러는 이러한 과정의 누적된 피로로 인하여 재활 치료를 받아가며, 자신의 신념에 따른 활동들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눈시울 붉어지도록 일하는 이들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스럽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각자의 이념에 따라 바라보는 정치 사회적 관점은 다를 수 있으나 세상에 대한 갈구는 동일한 측면이 많습니다, 그래서 같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논의 속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는 것 같지만, 동일하기에 서로가 자신의 검열 속에서 현실태들에 대한 차이를 만들어가며,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해나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로 다름은 존재하나 토론의 치열함은 동일한 관점을 수립하기 위한 또다른 작업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서로가 추상적으로 바라는 사안들을 구체화된 태로서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이 속에서 입장의 동일함.... 신영복 선생이 말하는 관계의 최고형태는 형성됩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 함께 같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치열한 논의 과정에서 도출하는 결과물이 아닐까요.)을 구현하는 과정의 치열함이 늘 운동이라는 긴장속에서 파생합니다. 그래서 늘 같이 회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한 연대와 그분들의 활동에 있어서 동지애적 신심이 생겨납니다. 오히려 저 같이 부족한 사람이 같이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늘 하루하루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활동에서 우린 동일한 입장을 도출하고 활동에 대한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윤곽 정도를 들어낼 수 있는 활동들을 초기 진행하면 하나하나의 구체적 틀을 맞추어 나갑니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해도 활동이라는 합목적성을 쟁취하기 위한 기나긴 투쟁을 전개한다 할 수 있습니다. 참 어려운 과정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활동의 최대 형태입니다.

 

짧으면 짧다 할 수 있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4년이란 기간동안의 정보통신운동에서 내가 지향하면서 참 많은 것을 내 주변 분들의 활동 속에서 주어담아 들었습니다. 문건을 통해서 참고할 만한 많은 정보들을 취득하여 사안에 대하여 알 수 있었고, 기간 파생된 활동에서 중요한 활동에 대해서 참여하면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식견이 없지만 참여할 수 있었던 기억들이 참 행복하다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저의 짧은 인식에서 내가 지금하고 있는 운동에 대한 방법론에 대한 고민들이 밀려왔습니다. 오래된 고민은 아닙니다. 그리고 저혼자 해결 할 수도 없는 사안입니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전문가 영역으로 운동을 국한두면서 활동의 폭을 확대시키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라는 고민과 대중성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라는 참 초보적인 고민입니다.

 

제가 운동할 당시만 해도 이렇게 부문운동이 확장되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지 못한 상황이었지요. 운동의 사회적 확대가 미진한 상황이었다고 개인적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시대상황은 정치사회적 명확성과 합목적성은 있었습니다. 거대한 담론도 아니었으며 참 소박하지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절박한 상황이었죠. 유신철폐, 근로기준법 준수,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주의 쟁취, 민주노조 사수, 노동해방, 전노협 건설, 민중의독자적정치세력화(이하 민독정), 노동자민중의정치세력화, 사회주의, 사민주의 등 년도를 거듭할 수록 록 사회적 정치투쟁에 대한 정치적 각성과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를 보고 어떤 이들은 사회적 운동이 확장되지 않았던 시기에 나타날 수 밖에 었는 전형적 운동방식이고, 당면 운동에서 군부독재에 의해 필연적으로 파생된 문제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이는 저의 짧은 소견으로 보았을때 89년을 정점으로 한 이념운동의 르네상스시대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을 까요. 명확한 타도의 대상이 있었고, 이를 통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해결해야할 절박한 심정에 대한 전사회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학생들은 학생 나름데로 군부 탄압이 있었고,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필요가 있었습니다. 노동운동이 7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주요한 운동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그들의 계급성이라기 보다는 운동이라는 지형에서 투쟁하고 실천하는 단위가 그들뿐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라는 개인적 판단을 가져봅니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판단이 들더군요.

 

89년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는 좌파라 통칭하는 운동단위에게 있어서 시련과 모색이라는  명제를 던져주는 참옥한 고통의 시작기였습니다. 그 수많았던 강단좌파들은 하나둘 모델 사회주의 실패를 보면서 자신의 이론적 업적과 이념을 폐기하거나 수정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들은 포스트주의의 선봉장으로 대거 이탈하였습니다. 이외에 모델적 사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고의 티토즘을 차용하거나, 이탈리아 그람시, 프랑스의 알튀세르. 헝가리 루카치 등 다양한 사상가들에 대한 활동에 대한 사상에 대한 접근적 시도가 한창 남한 좌파운동의 부흥이라는 미명하게 진행되던 시기이도 합니다. 맑스와 레닌책도 다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들의 책까지 읽어야 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모색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작업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더욱더 맑스-레닌주의에 귀착하여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이 기류는 막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갑갑한 현실이었습니다. 90년대 중초반과 후반에 나온 노래들을 보시면 다 서정적이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최면에 빠진 노래가사들을 접할 것입니다. 96년도말97년초 노동악법철폐투쟁이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기 이전까지는모든 운동단위들은 모색이라는 미명하에 수없는 단체들이 형성되고 없어지고 다른 형태로 운동을 보존하는 활동들이 주를 이루면서 운동을 이끌어갔습니다. 참 혹독하게도 유의미한 단체들이 운동적 전망과 비젼이라는 혹은 이론적 자기 도그마에 빠져 수 없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또다른 자양분을 만들었습니다. 시민사회운동의 형성.... 경실련의 출현과 참여연대.... 그리고 환경운동연합.... 초기 이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바라본 저로서는 초기 그 당시만 해도 그들 활동에 대해서 그리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제 판단 준거는 그들 운동은 명확히 개량적이고 계급대중에 대한 이해를 복무하는 운동이 아니기에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메이져 운동을 자청하면서 모든 사안에 있어서 그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실천적 활동은 미약하였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그들만큼 우린 대중 활동공간에서 멀어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장기인 조직화, 교육, 정치투쟁은 위기이니 시련이니 모색이라는 자신의 도그마에 빠져서 수렁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판단하기로 노동법개악저지투쟁 이전까지는 이러하였습니다. 우리는 97년 초반의 힘을 갖고 대중활동에 대하여 힘찬전진의 발판은 마련하였지만, 장기인 조직화 선전선동, 투쟁은 이전에 비해 많이 거세되었습니다. 지금 민주노총이 버티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97년 투쟁과 비정규직,이주, 장애, 여성노동자와 중소영세사업장투쟁, 장기투쟁사업장의 투쟁 신심으로 버티고 있다라 판단이 듭니다. 우린 우리스스로 자랑스런 노동자임을 간혹 망각할 때는 없는지... 민주적 회의체인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조합원의 이익집단이라고 자본과 정권에 의해 규정받는 것은 이전에 비해 노동조합의 정치사회적 투쟁이 많이 약화되었기에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직접적 공세를 받고 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엄연히 이익집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이익집단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목소리를 내는 가장 민주적이고 조합원 대중들과 호흡하는 대중조직입니다. 이전 전투적 노동조합론, 민주적 노동조합론, 자주적 노동조합론 등 노동조합을 둘러싼 노동조합 대중운동론은 정치세력화가 미약한 우리 지형에서 가장 유용한 무기였고, 해방구였고, 투쟁의 구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90년대의 무수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을 빼앗기거나 스스로 잃어버리도록 방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책임이 노동조합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를 이끌었던 활동단위의 근시안적이고 자신의 이념적 토대를 형성하기 위한 자기 도그마에 빠져 송두리채 우리 스스로가 팽개친 것입니다. 누구를 탓할 수 있습니다. 선배열사들이 자신의 몸을 사르며 지키고자 하였던 그 공간은 많이 변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이도 있겠으나 과거에 비해 많이 변하였습니다. 발전적으로 변하였냐 결코 발전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이전에 비해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저는 판단이 듭니다.  

 

시민사회운동세력은 스스로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어가며 자신의 운동영역을 계급적 기반에는 복무하지 않았지만 형성하여 나갔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담론들이 형성되면서 운동에 있어서 동일성은 많이 희석화 되었습니다. 이전 이론의 빈약함에서 그런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정보의 홍수에서 우린 지킬것과 계승할 것에 대한 많은 사안들을 정리하지 못한채 새로운 이념 모색과 위기극복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발전동력은 정리하지 못한 점이 정말 아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원동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당시에 대한 활동들은 회자하지만 그 회자는 술안주가 되어버린지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습니다. 활동가들의 치열함은 존재하나 그 회자가 술안주로 전락한 지금,,,,, 우리의 진단이 얼마나 정확할 수 있을까요. 단적으로 구호는 과격하되 실천은 부재한 우리의 모습에 전 서글픔이 밀려옵니다.

 

부문운동의 발전은 또다른 운동의 원동력을 낳았습니다. 이런 원동력에 우린 다시금 귀기울여야 합니다. 운동사회내성폭력, 노동자계급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정보통신 및 미디어 전략), 평화와 인권, 빈민, 소수자(장애, 이주, 여성, 성적소수자, 비정규직 등) 운동이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늘 존재하였지만 운동이라는 대의에 의해 그들의 목소리는 무마되거나 사장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조직발전과 운동발전이라는 우스운 논리앞에 무력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계급성과 노동자계급연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지금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입니다. 노동자계급운동에 복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운동은 이전 우리가 이루어내야할 운동적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민주노조 쟁취이니 독재타도이니 이러한 사안에서도 우린 그들의 상황에 대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었어야 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나서기 이전에 하였어야 합니다. 그들이 나서는 모습에 부끄러움이 들어서 어리론가 숨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고민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 그들이 가져왔던 운동사회내에서의 억압과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라는 이중적 탄압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 알 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지금 운동의 동력인 이들이 아직도 사회적으로 그들의 지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이제 희망을 우리가 말해야 할 때입니다.

파편화되어지고 전문화되어진 현재 우리의 모습이 과연 올바른가에 대한 진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동의 대상의 명확성과 사회적 공익성이라는 명제에 대해서 우린 천명해 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연대가 단체간의 연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안별 투쟁을 통하여 우린 우리 스스로의 단위가 규정한 운동범주에 머물지 않고, 광범위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전국민중연대 전국조직이 건설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러한 단위를 만들어 봐야 전 운동에 있어서의 발전을 이끌 수 없다고 봅니다. 작지만 소소한 단위들이 이라크 파병반대 투쟁, 소수자운동 연대, 노동자투쟁 결합, 사회적 억압에 맞선 투쟁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될때가 아닐까라는 판단을 해봅니다.

 

저는 오늘 삼성공대위 회의에서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의 고민점에서 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서 저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뽀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린 이전에도 이후에도 뽀족한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투쟁을 통해 우리는 나갈 것입니다. 이 투쟁에선 이전과 같이 집회를 통하여 전경과 극한 대치를 하면서 우리의 주장을 알려나가는 투쟁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문영역을 살리는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사안에 대하여 대중적 투쟁으로 이끌어낼 것인가입니다. 그리고 이 당사자들이 이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입니다. 지난한 삼성생명, 삼성일반노조 해복투 투쟁은 우리가 삼성공대위 결성하여 이번 불법복제폰을 이용한 핸드폰 위치추적사건 이전에도 벌여 왔습니다.

 

소박하지만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투쟁,... 그들이 승리할 수 있는 투쟁을 우린 전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지만 갑갑한만 듭니다. 과연 무엇을 해야 우린 승리할 수 있을까 참 조급하고 급급하기만 합니다.

 

이제 우리 우리 스스로의 울타리를 넘어서고 시선을 보다 확장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대가 확장된 연대가 아닌 연대로 머물고 있는 상황, 우리의 투쟁에 대중적 동력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의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가 우리는 소수야라 자위하기 이전 우리도 다수야 말 할 수 있는 활동을 꿈꾸며, 저의 잡생각을 마칠까 합니다.

 

무엇을 위해 운동을 지향하는지 참 의식을 부여하고자 부던히 노력하지만 저의 짧은 머리로서는 도저히 답이 안보이더군요. 조급함과 급급함만이 밀려오는 어제 였습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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