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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도정일]「젊은 시인들을 위하여」

  • 등록일
    2004/09/01 12:03
  • 수정일
    2004/09/01 12:03
     ■평론■
     
                                          문학의 숲, 시의 길 
                                    - 젊은 시인들을 위하여 -
     
     
                                                                                                         도 정 일 
                                                                 1 
      
인문교육의 위기가 문학의 생산과 수용에 필요한 훈련된 문화인구를 길러내는 데 극히 적대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이즈음에도, 해마다 일간지 <신춘문예>에 많은 문학도들이 작품을 보내고 그 가운데  일정수의 신인들이 작가, 시인, 평론가로 <등단>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신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문학 수업을 받은 것일까?   
      
문학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적 인문문화의 한 강대한 전통이자 제도이기 때문에 문학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이 반드시 정규 교육을 받아야만 유능한 창작자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문학의 오랜 전통에서 보면 자고로 문학만큼 정규 교육의 테두리 바깥에 설 수 있었던 문화적 실천도 드물다.  정규 교육에 부과되는 규칙성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그런 규칙성의 권역 바깥에 서고자 함으로써, 문학은 문학일 수 있었다고 말해도 된다. 문학은 문학을 생산하고 문학 창작자를 길러낸다.  문학이 이미 그 자체로 <제도>인 것은 이처럼 문학이 정규 교육제도의 바깥에서도 제 스스로 문학 생산자/수용자를 재생산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진 문학도들은 어쩌면 정규 교육의 문 밖에서 문학 자체의 전통에 기대어,  혹은 공교육제도의 기능주의 테두리 안에서도 문학이라는 별개 전통에  끊임없이 안내되고 그 유혹에 이끌려,  제 각각 외로운 문학수업을 진행해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의 인문교육이 부실성의 극점에 도달하고 인문문학적 가치가 위기의 절정을 맞고 있는 지금  문학이라는 형태의 창조성에 헌신 코자 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줄지어 등장한다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시인 황지우의 시에 나오는 한 화자는 어째서 이 시원찮은 세계에서도 그럴듯한 여자들은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라며  신기해 한 적이 있다. 이 시원찮은 세계에서도 시인들은 어째서 작년의 각설이마냥 죽지 않고 계속 나타나는가. 
      
시인들을 계속 나타나게 하는 이상한 숲,비너스의 계곡처럼 검고 깊은 그 숲을 우리는 <문학의 숲>이라 부를 수 있다.하이데거의 말대로 철학의 길이 <철학의 숲> 속에 있다면, 문학의 길은 문학의 숲 안에 있다. 그 숲의 다른 이름은 <전통>이며,  이 전통은 그 내부에 어떤 언술 형식을 특별히 <문학적 언술>이라 불릴 수 있게 하는 일련의 어법, 규약, 관습들을 갖고 있다.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라든가,  문학적 언술을 특별히 "문학적"이게 하는 담론의 성질은 무엇인가 등등의 문제는 아직도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어떤  특수한 성질이 있다면 거기 <문학성>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쉬운 일이지만  문학 담론 또는  문학적 언술이 그런 "고유의" 성질을 갖고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꺼내 놔봐라")라는 문제가 이론의 층위에서 쟁점화할 때에는 어떤 손쉬운 논의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이론적 쟁점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문학성>이라는 용어를 쓸 때 충분히 조심하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학의 숲을 말하고 문학적 언술을 특별히 문학적이게 하는 어법,규약,관습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법, 규약, 관습이 불변의 고유자질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고 형성되어온  <역사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구성물은 본질론적 실체도 형이상학적 불변성의 자질도 아니다. 그것은 가변적 규약이고 관습이며 특정의 언어 사용법에 붙여지는 분류학적 명칭으로서의 <어법>이다. 이것들이 문학의 숲, 문학의 전통을 이룬다.  시인 엘리엇은 이 전통에 대한 의식을 가리켜 시인의 <역사의식>이라 부르고  "25세가 넘어서도 계속 시를 쓰려는 사람은 그 역사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물론 엘리엇의 <역사의식>은 특별히  유럽 문학의 전통에 대한 숙지를 의미한 것이지만 이 제한을 풀 경우 "전통의 숙지"는 세계 문학의 숲을 이루어 온 역사적 어법, 규약, 관습에 대한 지식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지식은 흔히  "문학적 능력"이라 불리는데,  까닭은 그 능력이 문학의 생산과 수용에 필요한 능력을 상당 부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길이 문학의 숲에 있고 시인이 그 숲에서 길러진다는 것은 그곳이 문학적 능력의 함양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시인, 작가만이 거기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도 거기서 길러진다.  예건대 문학적 능력이 모자라거나 문학의 숲에 들어가본 일이 없는 사람은  시를 잘 읽지 못하고 읽어도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를 잘 판별하지 못한다. 
      
해마다  <신춘문예> 제도를 통해 등장한 우리의 젊은 시인들 가운데 25세 이후까지도 시를 계속 쓰는 사람은 도대체 몇 퍼센트나 되는가,  시 쓰기를 그만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이런 질문들에 답해줄 <문학사회학>은 이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은 젊은 날의 어느 한 순간 어떤 관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평생 시인인 것은 아니다.  죽는 날까지 시를 쓰는 사람만이 시인이다.  실증적 연구가 없어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인으로서의 공식 등단과 함께 소멸하는 시인들이 많고,  이 좌절의 원인을 추측하게 하는 사회적 요인들도 많다. 그러나 시인으로 출발했다가 이내 시정인으로 돌아서는 많은 사람들,  시인으로 행세는 하면서도  시다운 시 한줄 써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 좌절과 시적 빈곤의 원인이  반드시 사회적 요인들에만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인에게 천국을 주었던 시대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이 사는 땅과 시대가 천국이라면  시를 쓸 이유도 없지 않은가. 
      
내가 보기로는,  젊은 날 시인으로 나타났다가 조만간 사라져버리는 사람 들의 그 "실종"은  외적 요인들 못지않게  내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 같다. 내적 요인이란 말할 것도 없이 문학수업의 빈곤이다.   물론 이 빈곤 역시 외적 요인에 연결되어 있다.  지금 이 땅의 공교육 환경은 문학수업에 완벽하게 적대적이다.  특히 문학적 감성의 계발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중고등학교에서의 <문학교육>은 사실상 실종상태이고 교육까지는 안 가더라도 문학의 숲을 들락거릴 수 있도록 숨통을 열어두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학지망자들이 공교육의 장 밖으로 아주 뛰어 나오지 않는 한  그들이 문학의 숲에 빠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 다.   
      
그러나 이런 환경으로부터 초래되는 문학수업의 빈곤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문학지망자 그 자신에게 있다. 적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가 문학을 하기로 한 이상  그 환경을 극복하는 것은  그의 일이고 책임이기 때문이다. "당신 시가 왜 이래?"라는 질문 앞에서는  "환경이 나빴다"가 변명이 되지 않는다. 문학수업의 빈곤이 내적 요인이 되고 책임사항이 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문학을 하는 데는 감성이 큰 몫을 차지하지만 문학은 감성만으로 되지 않는다.  엘리엇이 역사 의식을 강조한 것이나 문학수업의 중요성이 자고로 강조되어온 까닭도 거기에 있다.  랭보처럼 일찌감치 어린 나이에 시를 쓰고  젊어서 떠돌다 죽어버리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적어도 나이 25세 이후까지 시를 쓰려는 사람들은 자기 문학의 <장수 프로그램>을 스스로 짜고 문학의 숲에서 긴 호흡을 위한 자기 연마와 <수업시 대>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학의 숲,그 전통의 힘은 그래서 중요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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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강조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전통주의자, 문화 보수론자, 반동으로 몰리기 꼭 좋은 노선을 선택하는 일 같아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문학지망자들이 다시 전통의 힘에 눈 돌려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첫째, 전통이 지금처럼 홀대되고 무시 당한 때가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 전통적인 것으로부터의 부단한 이탈과 기존의 규약/관습에 대한 끊임없는 위반이 바로 문학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전통의 홀대가 시류라면 시인은 이 시류를 따를 이유가 없다. 시인은 언제나 자기 시대의 거역자이고 대중화한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이탈자이며  지배적 에피스테메(인식틀) 속에서도 그 인식틀을 비판적으로 객관화하는 국외자이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고 기능이며 그 전통이자 방법론이다. 역설적으로, 시인은 전통적인 것으로부터 이반하는 그 순간에 이미 문학의 전통 속에 있다.  옛 것의 신성화를 기도할 때 보수적 전통론자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말했듯 문학의 전통은 불변의 것도 불가수정의 것도 아닌 역사적 구성 물이며, 이 구성물은 언제나  새로운 이탈과 위반에 의해 수정, 보강, 확대된다. 이 의미의 전통은 옛것만을 지키기위한 전통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전통이다. 
      
95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젊은 문학도들을 향해 우리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금년 여러 신문이 당선작으로 뽑은 시들에게서 거의 하나같이 발견되는 것은 문학수업의 빈곤을 절감케 하는 영양실조와 기술 결핍, 위반다운 위반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영양실조란  시가 내적 비전, 힘, 절실성을 갖지 못해 추수 끝 빈들의 낡은 허수아비처럼 간신히 흔들거리며 서 있는,  더구나 서 있을 이유조차 모르면서  그냥 <시>라는 이름 하나로 버티어보는 창백한 타성을 말한다. 신진 시인들의 시가 낡고 빈 허수아비의 몰골로 간신히 흔들거리며  타성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모양은 신인다운 패기의 시를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의 순간에 이미 기진맥진한 조산아를 보듯 사람을 안쓰럽게 한다. 
      
<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중앙일보), < 이런 세상 어떠세요 > (동아일보)등의 시는 시 자체의 영양부실을 통해 <배고픔>과 <빈곤>을 절감케 한다. 스스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시는 배고픔의 세상에 대한 시적 표현이 되는가? 아니다. 이 종류의 무매개성은 사회학적 징후일 수는 있어도  "배고픔" 또는 "이런 세상"에 대한 시적 변환으로  대접하기 어렵다. 배고픔을 노래할 때에도 그 스스로는 내적 비전의 절실성과 풍요로운 상상력을 지녀야 하는 것이 시의 운명이다.  < 자전거에 대하여 >(세계일보)도 시의 이같은 운명에 대한 사색이 모자라고  왜 시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절실성의 체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빈곤을 면치 못한다. 
      
기술결핍이란  언어의 시적 사용법에 대한  수업과  연마의 부족을  말한다. <문학만의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의 "문학적 사용법"은 존재하고 이 사용법에 통상적으로 붙여지는 이름이 문학적 언어  또는 시적 언어라는 것이며 언어의 시적 사용법, 그 수사적 능력을 가리켜 <기술>이라 한다. 시는 기술만으로 되지 않지만 기술 없이는 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앞서  <어법>이라 칭한 것은 주로 이  수사적 기술을  의미한다. 수사적 기술은 놀랍고 새로운 이미지의 언어적 제시, 낡고 친근한 세계를 깨부수는 이상한 형상화,  신선한 비유언어에 의한 간접화의 기술이다. 수사적 기술이 극히 중요한 까닭은 시가 무엇보다도 <언어에 의한 세계의 변환>이고 이 변환을 어법의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이 수사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 식빵을 꺼낸다. 우유와 땅콩 버터를 꺼낸다. 키보드를 두
       드려 본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
       수진수영종...깜빡이는 커서,  깜빡이는 그리움...우유 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중략)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식구들이 잠든 여름 밤, 녹아버린 땅콩 버터를 바라보며 느끼

       는 허기는 슬픔이거나 그리움이다.
                 
                        - <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 부분 
        
라는 대목은 (이 부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체가 그러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이미지의 시적 제시나 간접적 형상화가 아니며  따라서 그것이 성취하는 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산문적 진부성이다. 이 시인은 이를테면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거나 "우유 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혹은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등의 진술이 어째서 시적 진술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이런 류의 진술을 다른 형태의 진술로 <바꾸고자> 할 때 시가 탄생한다. 춤이 보행(步行)을 모태로 하듯 시도 산문을 모태로 삼지만 시는 언제나 산문적 진술(혹은 산문적 세계)의 변환이기 때문에 시이고  이 변환된 진술로서의 시적 언술은 산문적 언술과 다르다. 춤이 보행에서 나오면서도 이미 보행이 아니듯이.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같은 대목도  신진 시인이라면 결코 흉내낼 필요 없는 진부한 표현이다. 이번 신춘시에서 비교적 나은 편에 속하는 < 漁盛田의 봄 >(경향 신문)에서도
     
         강이 얼 때부터 녹기 시작할 때까지 마을은 고요하다
         나는 고요하다
         고요가 고혹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같은 대목은  시적 언술형식에 대한 인식과  어법 연마의 부족을  드러낸다. 시는 그 자체로 표현이지 "표현하고 싶다"고 진술하는 것이 아니다. "고기들이 많이 사는 강,사람들은 이 마을을 漁盛田이라 한다 / 바다는 바다 사람들의 밭이라면 강은 고기들의 밭이다"라는 구절도 얼마든지 많은, 그리고 더 나을 수 있는, 시적 표현의 가능성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목재소에서>(조선일보)의 시인도 자기 시가 더 치밀한 형상화의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이 시인은 "짙은" "하얗게" "말갛게" 등의  낡은 형용사 사용이 시의 어법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가령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같은 대목에서  "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 마당 가득 흩어지면 "이라는 설명조 묘사는  이 신진 시인만이 아니라 기성 시인들도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그래서 한국시의 고질적 미숙성이 되어 있는 표현방식이다.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는 세번째 행에 나오는  "그리움"의 신선도를 미리 반감시킬 뿐 아니라 "향내"를 수식하기 위해  이처럼 단조로운 산문적 어구를 쓴다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또 시가 "향내"를 표현하기 위해 "짙은 향내"라고 쓸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짙은"이라는 산문적 형용사가 쓰이는 순간  이미 그 향내는 죽어버려  짙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 형용사나 긴 수식어구로 표현될 것들을 형용사로 나타내지 않고 이미 지화하는 것, 그것이 시의 어법이고 기술이다.  에즈라 파운드는 젊은 시인들에게 "형용사를 쓰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시적 형상화는 이미 그 자체로 형용이며, 형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미지이다.  물론 파운드의 충고를 형용사의 전면 제거 요구로 받아들일 것까지는 없다.   다만 우리 젊은 시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형용사의 적절한 절제가 시의 긴요한 요청이라는 점이다. 
      
시가 산문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현상은  <산문체 시>의 만연 현상과 함께 적절한 비평적 개입을 요구한다.  산문체 시는 이번 신춘시편들에서도 부쩍 눈에 뜨이고 젊은 시인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한 경향이다. 시가 산문체로 씌어지지 말라는 법은 물론 없다. 그러나 산문체를 사용하는 시인은 그 형식의 선택을 정당화할 이유를 보여주어야 한다. 불행히도 근자에 나타나고 있는 산문체 시들은 어떤 정당한 이유보다는 "편해서"  산문체를 쓰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신진 시인들이 알아야 할 사항은 그들이 시적 생애의 어느 순간에 산문형식을 취택하거나 실험해보는 때를 갖는다 하더라도 초장부터 산문형식을 시도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이 형식의 시 쓰기는 아직 문학의 초기에 있는 시인들을 가장 확실하게 타락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시 쓰기란 <편한 길>에 대한 치열한 거부이며,언어의 절제, 감정 통제,표현의 정밀성과 압축, 여백과 내적 운율을 생명으로 하는 시적 언술형식은 그 형식의 차원에서 이미 편한 길에 대한 거부를 선언한다.  형식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산문과는 달리, 절제된 시 형식은 그 자체로 나태의 거부를 보여주고 정신의 치열성을 증언한다.  이번 신춘시들에서 보이는 긴장감 없는 산문체 형식의 잦은 사용과 진술문장 자체의 산문화 현상은 <산문성으로부터의 세계의 구출>을 주요 기능으로 하는 시의 규약( 이 규약 때문에 시는 언어적 춤이고 음악이다 )에 어긋난다는 점에서  그 문제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 좋은 사람들 >과 < 그날엔 >(한국일보) 같은 작품은 안이하고 느슨한 산문체를 쓰고 있는 데다가  강한 통제요소를 결하고 있어 이미지들이 끈 떨어진 여러 개의 연처럼 맥없이 표류한다. 우리의 경우 이런 산문화 현상이 문제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시적 언술형식,  또는 시적 장르 규약으로부터의 새롭고 과감한 이탈이나 위반이 어서가 아니라  이미 있는 기성 시인들의 작품에 대한 추종이고 모방이기 때문이다. 
      
금년도 신춘문예 당선시들을 보며 전반적으로 갖게 되는 의문은  무엇 때문에,  왜 시를 쓰는가라는 질문이  젊은 시인들에게 자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절절하고 가차없는  내적 심문으로 던져지는 일이  적지 않은가라는 점이다. 왜 시를 쓰는가?  시인 되는 길은 출세와 별 관계 없고 돈벌이와도 대체로 먼 거리에 있다.  직업으로서의 시 쓰기는 남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길, 아무도 좀체 가지 않으려는 길의 선택이다. 시는, 그 말의 한자 표현(詩)이 잘 보여주듯, 언어로 지어진 사원 또는 <언어의 사원>(Temple of Words)이다.  그러나 그 절간을 왜 짓는가? 왜 지어야 하는가? 돈벌이도 되지 않고 장사꾼도 잘 꾀지 않는 그 절간을 짓고,  그것도 "잘" 지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나 모종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의 젊은 시인들에게 그 질문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던져졌을 것이고  장차 지속적 심문이 될것이며 그 질문을 시로 대답하기 위한 긴 도정이 시작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하나일 필요가 없고 응답의 방식이 꼭 하나여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얘기가 어차피 문학의 숲과 그 숲의 어법, 규약, 관습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된 이상  그 부분에 대한 몇 마디 사족을 달아 시의 길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규약과 관습이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물론  보존과 계승의 필요성이 인정된 전통적 요소이다. 그러나 이부분에 대한 오해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다시 밝힌다면, 문학의 전통적 규약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진부하게 말하지 않는다"라는 약속이고,  전통적 관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위반의 관습>이다.  소설은 소설로, 시는 시로, 비평은 비평의 방식으로 이 규약과 관습을 계승하고 전통으로 보존한다. 그 규약과 관습으로 문학은 모든 굳어진 것, 고착유형으로 정형화된 것, 이분법적 스키마 속에 화석화된 것들을 풀고 되살려 낸다.  세상의 관습을 깨는 이 위반의 관습으로 문학은 세계를 늘 새롭게 하고자 한다.  손쉬운 예로,  시의 어법에서  장미는 그냥 장미가 아니라 "땅속에서 풀려난 요정"(신경림)이고 풀은 풀이 아니라 "땅의 푸른 뿔"(최승호)이다.  랭보나 보들레르의 경우 미역은 "뒷걸음질 치는 익사체"이고 창녀는 "검은 태양"이다.  구태여 이런 이름 바꾸기의 예를 들어보는 것은  우리의 신진 시인들이 문학의 숲에서 무엇부터 배워야 할 것인가를 예시하기 위해서이다. 시인 되려는 사람이 시문학 수업에서 일차적으로 시도할 것은 세상 모든 것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보는 작업이고  바꿔 말하기,  또는 이상하게 말하기를  연습하는 일이다. 이 어법연습이 새롭게 말하기의 규약과 위반하기의 관습을 익히는 길이다. 장미를 장미라 부르는 것은  세상의 언어적 규약이지만  이 규약을 위반하는 것은 시의 규약이고 관습이다. 이 방식으로 시는 세계를 새롭게 할 뿐 아니라 풍요롭게 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현실을 제시한다. 이것이 시의 길이다. 
      
그러나 문학적 위반의 전통이 위반의 어법만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5세를 넘어서도 시를 쓰려는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위반의 역사적 시각과 비전이며 그 비전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쉬운 예로, 자본주의 질서가 세계를 지배하고 그 문화적 상징체계가 세상을 정의하고 있을 때 시인은 그 질서의 밖에서 (혹은 그 질서 "안"에서도 "바깥" 을 성취하는) 위반의 시각과 비전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고?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는  모든 지배적 질서는  반드시 억압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억압의 체계가 억압하는 것은  다른 질서,  다른 삶의 양식, 다른 가치, 타자성과 타자의 존재이다.  지배질서는 그 질서 이외의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여 억압한다. "억압 당하는 자의 편에 서는 것이  문학의 불가피한 운명"이라는 것은  남아공화국 작가 나딘 고디머의 말이다.  미하일 바흐찐은 "타자성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소설의 "소설성"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내고 있다. 고디머가 말한 "문학의 불가피한 운명"은 시의 운명이기도 하며,  바흐찐의 소설성 개념은  그의 동의 여부에 관계 없이 문학 일반의 경우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문학은 현상질서와 가치체계로부터 이탈하고 그것들을 위반함으로써 사람들이 당대의 에피스테메 속에서 잊어버린 이상한 진리를 이상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언술양식이다. 이는 시의 양식, 시의 길이기도 하다. 
      
위반은 모든 경우에 진리에의 길인가 ? 아니다. 위반을 위한 위반은 진리에의 길도, 진리와 소통하기 위한 방법도 아니다. 시의 경우 위반의 어법이 반드시 세상에 대한 비전과 경건한 믿음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위반을 위한 위반은 가장 좋게 보아서 유희이고 나쁘게 말하면 손장난이다. 특히 시에서의 과도한 일탈성,통제되지 않은 비유,이 상성만을 추구하는 언술 등은 시 자체의 존재 이유를 무화시켜 시를 박제화한다. 위반을 위한 위반이 지니는 가장 부정적인 국면은 그것이 삶으로  부터, 세계로부터, 모든 경건성의 추방을 기도한다는 데 있다.  경건성의 도살이 가져오는 것은 세계의 표피화, 경박화, 박제화이다.  스스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쓰여지는 시도  세계의 박제화에 기여한다.   
      
지금 세계는 매우 빠른 속도로 놀이와 오락에 의한 삶의 표피화를 진행시키고 있고  문학은 이 오락화하는 카지노의 세계로부터 긴 편차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물론 이 논평들은 금년의 신춘시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 그 논평의 배후에는 우리 신진 시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기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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