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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의 여자, 아니 십이월의 여자

  • 등록일
    2005/03/17 10:52
  • 수정일
    2005/03/17 10:52
* 이 글은 <엄마...>게시판 가기님의 [여성이 되다(뉴스앤조이 기사)] 에 관련된 글입니다.

** 도종환 선생님의 사이트에서 본 글이 알엠님 글과 매치가 되어 옮겨봅니다. 전 되려 사역자이신 분의 글이 이 글과 대치되어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되려 부럽게 다가옵니다. 자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러나 그렇지 못한 무수한 여성들.... 가부장이라는 사회 제도라는 틀에서 억매여 있습니다. 제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지금도 삶을 콘트롤 할 수 없는 사람들..... 누군가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쉽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 삶이 자신의 삶이 아니면 이해는 그만큼 반전된다고 봅니다. 삶은 현재진행형이기에... 자주가는 도종환 선생님의 이전 글에서 쇠망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는데... 알엠님 글과 매치가 될 것 같아서 훔쳐 놓아 봅니다.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온 산의 모든 나무가 잎이란 잎 다 떨구고 가진 것 다 잃어 황량해진 십일월 하순 같은 여자. 산뽕나무 잎이랑 두충나무 잎 군데군데 푸른 잎들도 있었는데 그것들마저 어느 날 한 순간에 다 지고 산천은 갑자기 잿빛의 겨울 풍경으로 몸을 바꾸고 말았는데 인생이 그런 잿빛 풍경 같은 여자.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뚝뚝 떨어지고 문바람 스며 들어와 방안도 썰렁하고 자면서도 어깨가 시려 뒤척이는데 그런 냉기 속에서 일생을 산 여자. 십일월의 여자. 아니 십일월에서 십이월로 옮겨가듯 그렇게 살아온 여자. 그 여자는 "육지 것하고 붙어먹은 년"의 딸이었습니다. 새 아버지는 엄마와 딸을 그렇게 욕하면서 모질게 대했습니다. 일곱 살 된 딸이 있는 여자라는 걸 알고 같이 살자고 해 놓고서도 툭하면 그렇게 몰아부쳤습니다. 낳아주신 아버지는 전쟁 중에 군인들을 훈련시키러 온 군인이었습니다. 엄마를 데리고 한동안 살다가 육지로 가버렸습니다. 가서는 영영 소식이 없었습니다. 생부의 얼굴을 모르는 딸은 씨다른 동생을 업어 키웠습니다. 소 부리듯 일을 시켰지만 보리죽 한 그릇도 배불리 먹여주지 않았습니다. 광목치마 한 겹으로 엄동설한을 낫고 내복 한 벌 못 입어보고 나일론 양말 한 번 못 신어본 채 동상으로 손발이 얼어터지곤 했습니다. 새 아버지의 구박을 견디기 어려울 때면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고아원으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고아원 문 앞에서 붙안고 울다가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친구들은 교복 입고 학교 갈 때 호미 들고 밭으로 갔다가 밤이면 야학당을 다녔습니다. 고단한 몸으로 한밤중까지 숙제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쥐라는 놈이 문틈으로 튀어 들어오다가 등잔불을 떨어뜨렸고 겁이 난 그녀는 어머니의 매질이 무서워 싸락눈이 내리는 새벽 집을 떠나왔습니다. 그리곤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중풍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서 지내야하는 그 집 주인 사장님 병수발을 하고 다른 식구들은 못 알아듣는 사장님의 말을 그녀는 알아듣고 전달해주곤 하였습니다. 병수발 임무를 맡으면서 바깥에서 오시는 손님들에겐 딸 역할을 했고 그 몇 년은 그래도 행복하였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예절과 법도도 배웠고 옷도 좋은 옷으로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아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마침내 사랑고백을 해오고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미친 듯 아버지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아버지를 꼭 만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를 찾아야 자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고향이 경기도라는 것과 최아무개 중사라는 이름만 가지고 병무청을 찾아가서 거머리처럼 매달렸고 온갖 데를 다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병이 들었습니다. 죽을 병이 들었고 삶을 포기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만 어머니를 보고 싶어서 있는 돈 다 털어 제주로 내려가 어머니 집 문 앞까지 갔습니다. 딸을 버린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여서 죽어가는 딸을 버리진 않았습니다. 식모살이 하면서 부쳐준 돈으로 어머니는 땅을 사놓으셨습니다. 그 땅 얘기가 나오자 의부는 그녀가 마시려는 약 그릇을 발로 걷어찼습니다. 문짝을 부수고 어머니를 두들겨 팼습니다. 그녀는 또 떠나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딸이라고 양은솥에다 굼벵이를 달여 먹여가며 살려보려고 애쓴 어머니 힘인지, 병상에서 눈물로 기도해준 이름도 모르는 수녀님 덕인지 겨우 목숨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고아 아닌 고아로 자라 근본도 없는 게 어디를 넘보려 하느냐고 첫사랑은 실패로 끝이 났고 아이 둘이 있는 홀아비한테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 시골집에 갔다 오는 길에 옛 애인 집에 들러 취하도록 마시고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덧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못 되었는데 말입니다. 낳은 지 50일밖에 안 된 딸을 안고 그녀는 통곡했습니다. 자기가 낳은 아이든 아니든 제 자식처럼 키우려고 노점 행상을 하며 손발이 터지도록 일했습니다. 그런데 교통사고 당한 후 아이들 앞으로 나오게 만든 보험료가 있는 걸 알고 시아버지는 그걸 당장 현금으로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서방 잡아먹고 전실 새끼 피까지 빨아먹는 년"이라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살기 등등해져 온갖 욕을 하며 짐승처럼 괴롭히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 보험을 시아버지 앞으로 다 인계해주고 딸 하나 데리고 나왔습니다. 일곱 평밖에 안 되는 작은 꽃가게 한쪽에 주방 겸 잠자리를 만들어 거기서 살았습니다. 시아버지는 쌀 두말과 그 여자 앞으로 들어왔던 조의금 빈 봉투 50여 장을 주고 갔습니다. 우는 아이와 함께 며칠을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정신을 가다듬고 마른 젖을 물렸습니다. 젖은 말라버려 나오지 않았고 둘러보아도 먹을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기운차리라고 돈 얼마를 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가게는 점점 기울고 월세는 밀려 거리로 장사를 나왔는데 시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결혼자금으로 얻은 농협 빚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그녀가 처녀 때부터 운영하던 꽃가게가 당신 아들 것이라며 월 20만원씩의 생활비까지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식 둘 있는 아들 장가보내면서 방 하나 얻어주지 않고 결혼 자금으로 얻어 쓴 빚까지 과부가 된 며느리한테 갚으라는 시아버지였습니다.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술을 마시고 와 쌍욕을 해대고 장사를 망쳐놓곤 했습니다. 나중에 시가 친척 한 분이 그녀를 붙잡고 우시며 하는 말을 듣고 알았습니다. 땅 부자인 그 집에서 맏며느리인 그녀를 제쳐놓고 재산을 분할하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댁의 재산권을 포기한다면 여자도 단독으로 호적을 가질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일가를 창립하여 나왔습니다. 남자 복이 없어도 어쩌면 이렇게 없을 수 있는지 혼자 사는 그 이후의 삶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던 남자가 있었는데 뱀보다 더 싫은 그 남자를 피하는 길은 재혼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자기를 돕겠다는 남자가 있어 서둘러 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남자 사기꾼이었습니다. 남편의 교통사고로 인한 보상금이 두둑한 것으로 착각했다가 뺑소니 사고였다는 것을 알고는 머리채를 잡아끌고 법원으로 갔습니다. 두세 달만에 끝나고만 결혼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청혼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결하겠다는 목사를 만났지만 그 결혼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도시 생활을 접고 딸아이를 데리고 피반령을 넘어 산골로 내려왔습니다. 거기서 채소밭 일구고 꽃 심어 가꾸고 장애로 누워 있는 이들이나 의탁할 데 없는 사람들 돌보며 살고 있습니다. 골짝골짝 다니며 면사무소에서 수당 받고 하는 수급자 실태조사나 인구조사를 하거나 컴퓨터를 가르치기도 하고 찌개를 끓여들고 독거노인을 찾아다닙니다. 그녀가 이사 와 사는 회북면만 해도 스물 한 개 동네에 영세민이 100명이나 됩니다. 자기보다 더 힘든 인생들이 많아서 그들 때문에 바쁩니다. 모녀가 비둘기 같이 지내다가 딸 정이가 올해 고등학교를 청주시내로 가는 바람에 요즘은 혼자 지냅니다. 외롭지 않느냐고 물으면 외로울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고독은 자기를 성찰하게 했고 고독은 글을 쓰게 했다고 합니다. 고독은 아버지 대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했고 고독은 버려진 아이들, 늙고 병든 노인들을 친구가 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고독은 더 이상 자기가 싸워야 할 적이 아니고 생활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독으로 잿빛이 된 십일월의 야산 같은 이 여자가 원고뭉치를 들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있는 동네는 내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터라 맞춤법에 맞지 않는 곳이 많은 그 여자의 글을 읽다가 나는 그 원고를 자주 밀쳐 놓곤 했습니다. 읽고 싶지 않은 날이 많았습니다. 읽다보면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팔자가 기구할까 어쩌면 운명은 이 여자에게 이렇게 혹독한 것일까, 그런 생각에 먹은 것이 잘 안 내려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 여자의 인생 어느 부분을 떼어다 글로 옮겨도 절절하지 않은 구석이 없습니다. 대목 대목이 슬프고 가슴 저립니다. 혼자 딸을 키우며 눈물 흘리는 이야기는 너무 가슴이 아파 원고를 멀찌감치 집어 던져 놓았습니다. 이 여자가 만난 대부분의 남자는 이 여자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제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한 남자들이었습니다. 무책임한 남자들이었습니다. 한 여자의 운명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놓고 떠나버린 남자들이었습니다. 무책임한 아버지가 그랬고, 난폭한 새 아버지가 그랬으며,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남편이 그랬고, 돈에 눈이 어두운 포악한 시아버지가 그랬습니다. 새로 만난 남자들도 모두 그를 이용하려 들었고 탐욕스럽기만 했습니다. 남자들 참 나쁩니다. 남자들 정말 못됐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걱정 되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이 여자의 딸 정이가 엄마처럼 외할머니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에게 당하고만 살아도 안 되고 모든 남자들을 적대시하며 살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고 따뜻하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여자는 남자들을 미워하고 욕해도 되지만 그게 딸에게 그대로 전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세상을 바르게 보고 인격적인 눈으로 대하며 인간적인 배려를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살 때 아빠를 만나러 간다고 들떠서 따라나섰다가 무덤 속에 아빠가 계신다고 하자 󰡒엄마 빨리 삼촌들 오라고 해, 아빠 꺼내서 빨리 병원에 가.󰡓그러면서 눈물 범벅이 되어 몸부림치던 아이,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말해 주었더니 공원에서 놀다가 흙을 한 움큼 쥐고 들어와 󰡒엄마 이것도 아빠야?󰡓 하고 묻던 딸아이는 지금 시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 아이의 별빛 같은 감수성을 잘 키워주어야 합니다. 그런 시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사람을 따뜻하게 만날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엄마는 비록 십일월, 십이월 같아도 딸은 삼월 같이 살도록 해야 합니다. 삭막한 풍경의 끝에서 대나무들은 아직도 푸르게 출렁입니다. 사람도 황량한 사막 같은 인생을 살았어도 그 가슴 한가운데 푸르게 출렁이는 댓잎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여자도 인생의 십이월이 다 가기 전에 꼭 한 사람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남은 생애동안 남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정말 인간적인 따듯한 정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지막 한 사람을 만나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다정하게 팔짱 끼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 먼저 일어나 마당의 눈을 다 치우고 신발에 쌓인 눈도 탁탁 털며 조금 더 자라고 속삭여주는 사람, 부족한 부분도 허물이 될만한 습관도 말없이 덮어주며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 아내의 딸을 제 딸 이상으로 사랑하며 키워주는 사람, 어깨가 넓고 등이 따뜻한 사람, 나누고 베풀 줄 아는 믿음직한 사람을 만나 두 사람의 사랑을 이웃에 나누어 주며 살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꼭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지난 오십 년, 운명의 신은 이 여자에게 너무 가혹했습니다. 이 정도면 갚아야 할 전생의 어떤 업보도 갚았다 할 수 있습니다. 제발 이 삶의 모진 고개를 넘어 모녀가 봄이 되어 활짝 꽃피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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