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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봄날...

  • 등록일
    2005/03/10 13:02
  • 수정일
    2005/03/10 13:02
회색으로 온통 단장한 하늘이며 도시를 난 좋아한다. 늘 밝지 않은 내 성격 탓도 있지만 난 그런 회색을 동경하거나 좋아한다. 어릴 땐 파란색을 좋아했고, 20대 청춘 빨간색을 좋아했다. 그러나 30하고도 중간에 다다른 지금 난 회색을 좋아한다. 혼탁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그런 회색... 회색을 이야기할때 드는 생각들 기회주의.... 그래도 그 기회주의자라도 되어보고 싶다. 기회주의자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온통 도시는 회색 그런 색깔로 덧칠된 그런 풍경을 난 좋아한다. 컴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그런 회색도시... 그런 회색은 나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회색하늘을 쳐다보며 이후 어떠한 삶을 살아갈까 잠시 망상에 사로잡혀 보았다. 회색하늘.... 회색 구름이 거치고 나면 찾아올 해를 떠올린다. 그 밝음에 화사함... 눈부심을 떠올린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온통 회색이다.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져본다. 그 회색이 거치고 찾아올 그 태양의 작열하는 모습을.... 그래서 시간의 흐름은 늘 기다림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러나 세상사에 찌들어 지친 사람들은 그 기다림에 갈증을 느끼거나 그 기다림에 조급함에 휘말려 그 태양 빛을 보지 못하고 뒤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그 길에서 많은 이들이 떠나갔고, 몇 안되는 동지들이 깃발만 부여잡고 지금까지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삶을 사는 사람들.... 남들은 미련 곰탱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보라고 한다. 그리고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오자라고 한다. 그래 낙오자, 미련 곰탱이, 바보, 멍청이, 미친 놈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하는 이들의 눈에는 낙오자, 미련 곰탱이, 바보, 멍청이, 미친 놈이라고 말 하는 이들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지 않을까? 보이는 현상만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상주의가 허무주의자 일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지향하지만 그것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일구어가고 있는 역사임을.... 회색도시가 어둠에 휩싸이더라도.. 태양을 기다리는 이들은 늘 있듯이 누군가 이 역사적 길... 그리고 태양이 작열하는 그 광명과도 같은 세상은 끝임없이 이어지리라는 것을.... 흐린 회색이 도시를 감싼 지금... 회색도시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그래 지금은 회색이지만 태양의 작열하는 풍경을 상상하여 살아가 보련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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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내려와서

  • 등록일
    2005/03/10 11:21
  • 수정일
    2005/03/10 11:21
오산이주노동자센터에 내려와서 무엇하나 속시원이 한 것이 없다. 소장님의 경우 바닥을 보지 못하고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말... 맞는 말일 수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바닥노동자들의 삶... 그들의 인식... 그리고 누구하나 자신이 담당하는 것에 대한 책임의 소지를 갖고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분업화 그리고 많은 일들에 대한 역분... 열심히하고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일을 더 열심히하라는 격려와 활동의 기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지당한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뭐 내가 그렇다고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련다.


활동은 전체가 같이 해나가는 과정이기에... 그러나 과정과 절차 그리고 합의한 사항들이 소소한 일상들 이야기에서 바뀌거나 번복되는 모습... 그리고 회의를 통해 이야기되었던 내용들이 전체적 틀에서 변형되는 모습... 지역을 알고 하라는 말은 일정정도 타당할 수 있지만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있어 지역도 열려있는 것이지 무작정 아래만 보고 아래를 지향해야 한다는 말은 어찌보면 열심히 일하라는 소리에 불과하다. 늘 아래는 열려있고 함께하고자 한다. 무엇이 그러나 무엇하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함께 해결할 대책 그리고 활동들을 펼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다. 소장님 또한 이러한 답답함은 날이 가면 갈 수록 증폭될 것이다. 많은 활동을 하는 것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자이다. 일이 힘들다. 그리고 늘어나는 일을 감당하기 힘들다.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간다. 그러나 보자 현장에서 일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불평할 겨를이 있는가?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다보면 자신의 일에만 종속되지 않는다. 다른 일에 엮이거나 아니면 여러가지 일들을 해야 한다. 그래도 우리 노동자들 고된 노동의 현장에서 일을 하고 저녁 늦은 시간 학습과 뒷풀이 까지 하면서 노동운동을 이끌고 견인하지 않았던가? 불과 몇십년전 일이지만 오래된 이야기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정말 그 기간동안 우리내 운동이 쪼그라 들데로 쪼그라 든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삶이 그만큼 절박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증거는 아닐까? 삶이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 삶이 그전에 비해서 많이 나아졌다. 그리고 풍요롭게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피를 요구하였던가? 아직도 모자라 노동자의 죽음을 부르는 사회 그게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고 내가 사아가고 있는 사회이다. 외형은 변하였지만 무엇하나 변하지 않는 현실... 그전에 받았던 월급보다 조금 많은 월급이 보장되는 사회... 여기서 평생일터는 사라지고 없어졌다. 현상을 보면 삶의 질이 향상되어진 것 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삶은 더욱더 궁핍으로 치닫고 있다. 80: 20이라는 사회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만큼 바닥노동자 민중은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활동인지에 대하여 구분이 가지 않지만, 전체가 하향평준화 되었을때의 희망감보다 더한 절망감을 주는 80:20이라는 대칭사회... 계급이 고착되어지고 가난한 이와 부자의 경계가 명확히 구분되는 사회... 이것이 2005년도 한국의 현실이다. 민족주의를 넘어 국수주의로 가는 시대... 아! 대한민국,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한국인 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반 인민들의 모습에서 한국의 미래의 암울한 단면을 비춰본다. 왜 필승! 코리아 인가? 왜 필승 자신이 아니고 필승 노동자가 아니고 필승 민중이 아니고 필승! 코리아 인가? 집단적 전체주의의 신호탄이며 국수주의의 맹아의 태생이라 하겠다. 왜 코리아를 열광하는가? 집단의 광적 히스테리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다. 스포츠라는 매개를 통해 정치적인 선전선동의 도구와 국가 지배전략으로서 스포츠를 이용하는 사회... 스포츠 경기만 열리면 이성은 멈추고 국가라는 이미지와 자신의 소속감속에 차별을 흔쾌히 설치는 모습.... 스포츠에서 명 경기가 나온다고 하지만 다들 사람인지라 편가르기를 위한 하나의 나뉨과 차별을 서슴없이 하는 행위에서 스포츠 정신이란 구별을 위한 또다른 수단이며, 자신이 속한 곳에 대한 맹신적 복종을 위한 수단임을 느낀다. 스포츠 정신은 국가가 서로의 힘을 과시하고 서로간의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며 힘을 응집시키기 위한 전략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올림픽 금메달이 스포츠 선수들에게 염원인 나라 이게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땅이다. 스포츠를 즐기기 보다는 돈벌이 밥벌이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쌓는 수단으로 여기는 한 스포츠는 죽었다고 본다. 이렇듯 우리는 바닥을 이야기하지만 열심히 뛰고 있지 못하다. 늘 뒷북 그리고 역량이 되지 않지만 역분한 일들을 이야기하며 서로가의 학제간 연구나 서로가의 협력을 방해한다. 담당자이기에... 그리고 배우는 것에도 너무 인색하다. 그렇지만 희망을 이야기해보아야 한다. 내 생각이 전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것은 서로의 경험이 중첩되어 하나의 실천과제 하나의 사례로 전체의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만드는 것이기에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운동이라는 도그마에서 중첩과 실천은 서서히 실종되어져 간다. 배워나가면서 함께한다는 것은 오래 있고 적음이 아니다. 어떠한 생각을 그 과정에서 쌓아가며 삶으로서 사유하는 것인가이다. 우리는 삶으로서 사유 그리고 인생을 통한 배움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재단하려 한다. 또한 그 과정이 전부인 줄 착각하고 있다. 내가 존재하는 것 만큼 남의 존재도 소중하다는 것은 서로의 활동과 협력이 어울리는 것이다. 분업화를 위해 체계를 나눈것은 책임지고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오늘 그냥 생각나는데로 글을 써보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을 너무나 많이 상실시켰다. 지금 상실의 시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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