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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장로교회, '신자유주의 반대'를 선언하다

  • 등록일
    2004/12/20 08:44
  • 수정일
    2004/12/20 08:44

* 이 글은 노동목사님의 [ 10/28 반세계화 공동투쟁 선포] 에 관련된 글입니다.


세계 장로교회, '신자유주의 반대'를 선언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경제구조로"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박성원 신학박사. 세계개혁교회연맹 협력과 증언부 총무

 

“우리는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도록 제외시켜 그들과 계약 맺으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현 세계의 경제질서를 거부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든 절대적 계획경제든 마찬가지다. 우리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뒤엎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통치에 적대적 행위를 하는 모든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제국을 거부한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시장의 광포한 소비주의와 경쟁적 탐욕, 이기적 속성의 문화를 거부한다. 우리는 또 어떤 구조를 가졌든 자신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체제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미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가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많은 부분을 파멸로 이끈, 규제받지 않는 부의 축적과 무한 성장을 거부한다.”

 

“우리는 수익을 인간 앞에 두고 모든 피조물을 더불어 돌보지 않는 경제체제와 이념을 거부한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을 사유화하는 경제체제와 이념을 거부한다. 우리는 이런 이념을 복음의 이름으로 지지하는 것을 거부한다. 또 이런 이념에 대한 맹종을 정당화하는 가르침을 거부한다."

 

전 세계 개혁교회를 대표하는 세계개혁교회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은 지난 7월 30일부터 8월 12일까지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열린 제24차 총회에서 위와 같은 신앙고백의 언어로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에 반대했다. 이를 '아크라 고백신앙'이라고 부른다.

 

세계 장로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다

한국에서는 장로교회란 이름으로 알려진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16세기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존 칼빈의 신학노선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인데, 칼빈은 소위 '자본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 후예들이 자본주의의 가장 열악한 형태인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아니”라고 고백한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125년이 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전통을 가진 세계개혁교회연맹은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무너지고 난 뒤 세계갈등의 틀이 냉전시대의 정치와 이념에서 경제로 바뀔 것이란 예상을 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제1차 걸프전 직후인 1992년부터 '신앙과 경제'란 주제로 일련의 연구를 시작한 세계개혁교회연맹은 199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가진 협의회를 시작으로 각 대륙을 순회하면서 각 지역의 경제현실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다.

 

이중 1995년 아프리카 잠비아 키트웨에서 가진 아프리카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아프리카는 세계경제에서 완전해 제외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역은 세계경제지도와 G8의 세계경제계획에서 이미 사망선고된 지역으로 선포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전 세계 개혁교회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에 대해 '고백신앙'을 선포하도록 건의했다.

 

'고백신앙'이란 당대의 조직적 불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행동중 가장 강도가 높은 대응이다. 어떤 불의를 용납하면 자신들의 신앙 자체가 위협받을 것으로 간주될 때 발동하는 '긴급 행위'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교회가 '고백신앙'으로 대응한 여러 사례가 있는 데 그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바르멘 선언'이다. 히틀러가 등장해 자신이 아리안족을 위한 메시아란 암시를 주기 시작했을 때 소수의 독일교회가 이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여기고 '고백신앙'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 인종분리 정책으로 백인들이 아프리카인들과 유색인종들의 정치사회적 권리를 조직적으로 박탈하고 제외했을 때 교회는 '벨하 신앙고백'으로 대응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성찬식을 함께 나눌 수 없게 하는 인종분리 정책은 복음과 정면으로 위배되므로 신앙적 차원에서 저항하고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고백신앙의 전통

이런 경험은 우리 나라에도 있다. 일제식민강점 시기가 말기에 달했을 때 일제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이를 특별히 기독교회에 집요하게 강요했는데 찬송이나 성경에서 천황에 도전하는 모든 개념의 사용을 제한하고 일본신사를 강제로 참배하게 했으며 특히 예배전엔 동방요배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때 소수의 목회자와 신자들은 일제의 강요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판단, 순교적 각오로 이를 거부하는 고백신앙의 행동을 했다.

 

이번 세계개혁교회연맹이 채택한 '아크라 고백신앙'은 바로 이런 바르멘 선언이나 벨하 신앙고백의 정신으로 전개된 것이다.

 

세계개혁교회연맹 총회는 다음과 같이 이번 고백의 신앙적 배경을 밝혔다.
“개혁전통과 시대의 징조가 가리키는데 따라 세계 경제정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및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제자됨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현 구조에 대해 침묵하고 행동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 신앙의 온전함이 위태롭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과 서로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세계개혁교회연맹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세계화에 대해 이렇게 신앙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었던 긴급현실은 무엇인가. 무엇이 세계개혁교회연맹으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적 경제세계화에 대해 고백적으로 대응하게 했는가.

 

우선 아크라 신앙고백은 '이 시대의 징조가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계속해서 속박 속에서 탄식하며 구원을 갈망하고 있음을 듣고 있다”(로마서 8장 22절)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지금 전 세계의 고통받는 민중과 상처받는 피조물 세계의 탄식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으며 “세계민중의 고통과 생태계에 가해진 상처가 중첩되는 극적 현실을 보고 있다”고 고백의 전제상황을 설정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엄청난 위협의 근본원인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권력과 군사력의 비호 아래 전개되는 불의한 경제구조의 산물임이 분명하다”며 '현 세계의 부끄러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 세계 1퍼센트의 부자들에 속하는 연간 수입이 가난한 자 57%의 연간수업과 맞먹는다. 하루에 빈곤 및 영양실조와 관련해 죽는 사람의 수가 매년 2만4천명에 이르고 있으며 가난한 나라의 외채는 끊임없이 원금을 갚아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여성과 어린이들이 빈곤층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루에 1달러 이하의 생계비로 살아가야 하는 절대 빈곤속에서도 세계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우상 숭배'

이어서 아크라 신앙고백은 경제 세계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심각하게 지적했다.

"부국들의 무한 경제성장 정책과 다국적 기업의 이윤추구 극대화 지향이 생태계를 약탈하고 환경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1989년엔 하루에 한 종(種)의 생물이 사라졌으나, 2000년에는 시간 당 한 종(種)이 사라지고 있다. 황폐화의 결과로 기후변화, 어족의 고갈, 벌목, 토지의 부식, 물의 오염 등이 나타나고 있다. 공동체는 파괴되고, 살림살이는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해안지역과 태평양 섬들은 침수될 위협을 받고 있다. 폭풍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고농도의 방사능 방출이 건강과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구조와 문화적 지식이 경제적 이윤추구를 위해 특허화되고 있다”며 생태계의 상업화를 고발한다.

 

아크라 고백은 이 위기의 주범은 바로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라고 분명히 밝히고, 오늘의 위기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진행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단언한다. 고백이 밝힌 바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바탕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무한경쟁, 소비주의, 무한경제성장, 부의 무제한 축적이 전 세계를 위해 제일 좋은 방안이다.
■사유재산권은 사회적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자본투기, 시장의 자유화와 탈규제화, 공기업과 국가자원의 민영화, 규제없는 외국자본의 투기와 수입, 낮은 세율, 통제받지 않는 자본의 자유이동 등이 모든 사람의 부를 성취하게 할 것이다.
■사회적 의무, 가난한자와 사회적 약자의 보호, 노조, 사람들의 관계성 등은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의 과정에 부수적이다.

 

특히 아크라 고백은 “신자유주의는 가난한 자와 자연으로부터 끊임없는 희생을 강요하며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강변하는 이념”이라고 규정한다. 또 “이것은 경제가 생명위에 주권을 행사하고 우상숭배에 이르게 하는 절대충성을 강요하면서 부와 번영의 창조가 세상의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거짓 약속”이라며 그 허구성과 사기성을 폭로했다.

아크라 고백은 이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또 이런 이념의 프로젝트는 누구의 비호아래 전개되는지를 명쾌하고 밝히고 있다. 아크라 고백은 "힘없고 고통 받는 자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려는 진리와 정의의 구도자” 시각으로 분석할 때 “현 세계의 질서(혹은 무질서)는 '제국'의 극도로 복잡하고 비도덕적인 경제구조에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제국'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제국이란 강대국이 자기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하여 구성한 지배구조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군사적 권력의 총체적 집합을 의미한다.”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에서 국가는 시장경쟁에서 사유재산과 계약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했다. 그 후 국가는 노동운동의 투쟁을 통해 시장을 규제하고 국민의 복지를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자본의 이동이 초국화하면서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복지기능을 해체하면서 시장을 세계화했다. 이에 따라 시장을 보호하는 정치적·법적 기구들도 세계화되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정부는 국제금융기관들(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과 함께 정칟경제·군사적 협조를 하면서 자본가들의 이윤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크라 고백은 “경제세계화와 지정학이 신자유주의의 지원으로 결합해 오늘의 경제위기를 극도로 심화시키고 있다”며 “이것이 바로 가진 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현재의 세계체제”라고 단정하고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경제구조로

"예수는 하나님과 맘몬(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누가복음 16장 13절)고 하셨다. 이 말씀을 근거로 세계개혁교회연맹은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의 동기를 밝힌다.

 

“성서적으로 볼 때 가난한 자를 희생시켜 이루는 부의 축적 구조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못하다. 이 같은 구조는 인간의 고통(예방할 수 있는)을 가중시키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맘몬에 해당한다.”

 

아크라 고백은 세계교회에 심각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고백의 과정에서 줄곳 주저하면서 고백에 참여하기를 꺼렸던 유럽 및 미국 교회들도 현재는 아크라 고백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분주하다. 남미, 아프리카 등 남반부 교회는 지구적 경제정의 투쟁에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된다고 판단하며 흥분하고 있다. 이번 고백으로 세계신학의 축이 서구에서 제3세계 교회로 전환되기도 했다.

 

혹자는 경제는 경제인들의 영역으로, 영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할 교회가 경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현상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경제의 어원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서의 경제는 ‘집안 살림’이란 뜻인 ‘Oikos’ 에 규범이란 말인 ‘Nomus’가 연결되어 나온 개념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된 것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인데 ‘하나님의 집안 살림살이 법칙’이란 뜻이다. 이 ‘Oikos’ 란 말에서 경제를 가리키는 영어인 'Economy'와 생태계를 의미하는 'Ecology'가 나왔다. 에큐메니컬(교회통합운동)의 정신인 '오이쿠메네'(Oikumene, 지구상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공동체)란 용어도 ‘오이코노미아’에서 나온 것이다. 경제란 것은 이처럼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경제가 인간의 손에 들려지면서 인간의 탐욕의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때문에 경제는 신앙과 관련된다는 것이 세계개혁교회연맹의 인식이며 이 때문에 경제를 윤리나 도덕이 아닌 신앙의 문제로 보려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경제를 윤리나 도덕의 문제로 보면 남의 가난이 남의 문제로 보이지만 고백의 문제로 보면 이웃의 가난은 곧 나의 문제가 된다. 바로 이 신앙의 발로가 이 사회를 사랑하는 교회의 사랑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에도 이 같은 깊은 신앙고백적 행동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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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슈퍼장애인'이라 부른다

  • 등록일
    2004/12/20 08:21
  • 수정일
    2004/12/20 08:21

[문화인물탐험] 연극배우· 방송인 한석준 
 
 
                                                          이오성 레이버투데이 기자 dodash@labortoday.co.kr
                                                          사진 허태주 기자 tjheo@digitalmal.com

 

한석준씨(23)는 사랑이 하고 싶다고 했다. 세상은 비록 웃기고 자빠진 3류 슬랩스틱 코메디 판국이지만, 그는 정말 ‘찐한 멜로’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불편한 팔과 다리로 무대에서 노래하고 이야기하듯 그는 ‘우리들의 사랑법’을 모두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멜로 영화 찍고 싶어요. 아주 분위기 있는 걸로요. 장애인도 남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하지만 아직까진 한번도 내 마음에 쏙 드는 멜로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실은...멜로 영화 보면 자요...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그냥 자는 거죠. 그래서 배우고 싶어요... 그 사랑이란 것을..."

 

스물세 살 청년의 꿈

그랬다. ‘연애와 연예', 스물세 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으랴. ‘장애인의 사랑법’을 절절이 담은 '찐한' 멜로물의 주인공을 꿈꾸는 그에게 영화 「오아시스」는, 그래서 '불편한 기억'이다. 그는 “오아시스 역시 오래된 고정관념을 깨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한다.
 




“장애인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엔 언제나 두 가지 이야기가 있어요. 고생과 노력 끝에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거나, 아니면 너무 못 사는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예요. 한쪽은 칭송하고, 한쪽은 아주 동정하고···. 절대로 중간은 없어요.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어요. 사람들은 보통 장애인들 생각하면 무조건 천사 같은 이미지만을 떠올리잖아요.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아주 성질 더럽고 나쁜놈도 많이 있어요(웃음).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각양각색이에요. 하지만, 오아시스 역시 그런 시각에서 못 벗어난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그 역을 진짜 장애인이 했다면 정말 좋았겠죠.”

 

이제껏 장애인을 대상으로 삼은 영화와 드라마는 숱하게 많았지만, 장애인이 스스로 주연이 된 작품은 거의 없었다. 단지 ‘대상화의 대상’을 넘어 스스로 주체가 되려는 ‘욕심’. 이 23세의 앳된 청년은 참으로 야무진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데 그건 인생의 '두 번째 꿈'이란다. 그의 첫 번째 꿈은 대체 뭘까.

 

"야이 병신아, 병신아!"
11월 5일 저녁, 대학로 외진 곳에 있는 한 교회. 문을 열자마자 난데없이 "병신"이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는 장애인 극단 '휠'이 다음 주에 열릴 정기공연을 앞두고 맹연습 중인 가운데 튀어나온 소리다. 뇌성마비, 시각장애, 언어장애 등 갖가지 장애를 지닌 젊은이들이 모여 대사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휠체어를 탄 주인공도 있고, 목발을 짚은 조연도 있다. 이 중엔 아예 앞이 보이지 않는 '참관인'도 있다. 하지만, 이들에겐 '장애'가 아무런 벽이 되지 않는다. 교회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들은 '에너지' 그 자체다.

 

1인 2역의 중증장애인

한석준은 이 연극에서 '취객'과 '장난전화 거는 꼬마' 역을 함께 맡았다. 1인 2역이다. 고작 해야 잠깐 등장하는 단역에 불과하지만, 언어장애를 지닌 데다 전동스쿠터가 아니고선 무대에서의 이동도 쉽지 않은 그가 1인 2역을 맡은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만난 그의 얼굴에 흉터가 하나 생겼다.

 

"마지막 리허설을 하다가 무대에서 넘어졌어요. 취객 역할이었는데 발이 꼬여서. 원래는 누워서 잠 자는 걸 연기하면 되는 건데 한번 서서 자는 연기를 해봤어요. 많이 취한 사람은 서서 잘 수도 있잖아요. 연출하시는 선배님이 그게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서 있는 게 쉽지는 않지만요."

 

그는 흉터 진 얼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다. 결국 그의 상처는 그가 자초한 것이었고, 이는 온전히 그의 남다른 '끼' 탓이었다. 그의 끼는 공연 당일에 빛을 발했고, '단역 중 단연 최고'라는 평도 받았다.

 

게다가 뜻밖이지만, 그는 '방송인'이라는 '직함'도 가졌다. 그는 매주 월~ 목요일 오후에 방영되는 KBS 2TV의 장애인 전문 프로그램 '사랑의 가족'에서 사회자를 맡고 있다. 매주 수요일, '기획진단-함께 가는 길'에서 장애인이 겪는 사회적, 제도적 문제점들을 시청자와 함께 나눈다.

'연극배우 겸 방송사회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실은 연극이건 방송이건 데뷔 1년을 넘기지 못한 '초짜'에 불과하다. 연극무대엔 올 2월부터, TV 브라운관엔 5월부터 얼굴을 내밀었다. 흔한 말로 '벼락출세'한 셈이다.

 

"연극할 때 방송사에서 잠깐 취재를 왔는데, 얼마 뒤에 연락이 왔어요. 장애인방송의 사회자를 구하는데 해보고 싶냐고. 흔쾌히 응했죠. 원래 꿈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날 택했는지 그 이유가 뭔지는 몰라요.(웃음) 지난 방송도 안 보고, 그냥 무작정 가서 내가 아는 것만 이야기했더니 호응이 좋았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장애인 한 분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분이 몸도 자연스럽고 너무 이야길 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비장애인 취재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다들 웃더라고요. 그날 바로 합격을 받았죠. 그런데 방송이란 게 굉장히 줄 알았는데 훨씬 편하더라고요. 왜냐면 내가 알고 있는 것, 경험한 것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되거든요."

 

그는 지금은 본인도 '깜짝 놀랄 만큼' 언어장애가 나아졌다고 말한다. 자칭 '인간승리'란다. 기자가 "말을 그냥 잘할 뿐 아니라, 참 재미있게 한다"고 추켜세웠더니 돌아온 대답이 이랬다. "이렇게 해야, 먹고 살죠(웃음)."

 

"저는 손을 못 쓰니까, 말로 승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밖엘 못 나가니까 동네 아줌마들하고 많이 놀았어요. 아줌마들이 집에 놀러오면 같이 수다떨고 했던 게 제일 즐거웠어요. 그래서 그런가, 가끔 애늙은이라는 말도 많이 들어요(웃음). 특히 어머니가 제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셨어요. 친구들 집에 데려오면 너무 좋아하시고. 제 성격이 이렇게 밝은 것은 어머니 탓이 크죠."

 

놀랍게도 그는 소시적 '동네 골목대장' 출신이다. '골목대장'이라면 비장애인도 역임하기 어려운 유년 시절 최고의 '감투' 아닌가. 비록 어린 시절이지만, 그의 유달리 밝은 성격 앞에 '장애아'라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때 애들이 내 휠체어를 끌고 다니면서, '대장' '대장' 했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최고의 연예인이 되고픈 까닭

지금 그의 첫 번째 꿈은 '연예인'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과 연예인',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방송사의 '흥행코드'에나 어울릴 법한 구도지만, 그의 바람은 절실하다. 그는 자신이 지금 '1인 시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애인이 연예인이 되면 정말 많이 바뀔 것 같아요. 연예인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에 그 힘을 이용하고 싶어요. 제 말 한마디에 모두가 주목해 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홀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혼자 아무 데나 막 다니고, 일부러 지하철만 타고 다녀요. 우리집 면목동에서 대학로까지 리프트를 타면 비장애인들의 두세 배는 걸리지만, 그런 행동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제 꿈은 두 번째로 밀렸죠. 우선은 장애인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게 중요하죠. 아직도 집에만 있는 장애인들이 많고, 제 몫은 그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처럼 높고 견고한 ‘사회적 벽’ 앞에선 차라리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다.

 

"제가 방송 나가고 이러는 것 보면서 어린 녀석이 설치고 다니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제 행동을 이해 못 하시는 분들은 욕도 많이 하시죠. 그런 분들 보면, 너무 안타까워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저 같은 장애인들이 많아지면 우리나라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를 왜 못 할까요. 사람들이 절 보고 힘을 많이 얻었으면 좋겠어요. 서태지처럼."

'세상 밖으로' 나서다

 

그는 뇌성마비 1급의 장애를 가진 청년이다. 뇌성마비는 유전은 아니지만, 선천성에 가깝다. 태어날 땐 몰랐지만, 돌 때쯤부터 목을 전혀 가누지 못했다. 뒤늦게 장애를 발견했을 땐,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손발도, 입도 자유롭지 못한 그가 받을 수 있는 학교교육은 없었다. 동생이 다니는 학교에 엄마 등에 업혀서 딱 두 번 가본 게 '학교생활'의 전부다. 스무 살이 다 되도록 그는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평생 집에서만 지내다가 열여덟 살 때, 교회에 처음 나갔어요.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굉장히 궁금하고, 또 두려웠어요. 난 그때까지 내 또래아이들과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용기를 내서 장애인특별반으로 들어가지 않고, 일반 고등부로 들어갔어요. 처음엔 다들 경계하는 눈빛이었어요. 교회에 세 번째 나갔을 즈음인가, 누군가 인사를 했어요. 안녕. 그리고 그 친구가 이름이 뭐냐고 묻더군요. 그게 나이 들어서 제일 처음 사회적 경험을 한 것이었어요."

 

교회를 통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 성격이 바뀌면서 생각이 바뀌었고, 그러자 모든 게 달라졌다. 그는 유배생활을 청산하고, 비로소 '세상 밖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지금은 부모님께서 '한씨 집안에서 네가 제일 출세했다'고 하지만, 전엔 달랐어요. 아버지는 그냥 집에서 몸 관리나 하면서 칩거하길 바라셨어요. 별 기대를 하지 않으셨죠. 두 살 아래인 동생에게 가장의 역할을 바라셨어요. 혼이 나도 동생이 더 많이 혼났고. 하지만 전 맏이로서 그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장애인들 보면 밖에선 물론이고, 집에서도 왕따를 당하잖아요. 그것만큼 비참한 것이 없어요. 저는 그런 가족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었어요."

 

이 나라의 경우 아직 장애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천박하다. 온 몸에 쇠사슬을 묶고 지하철 철로에 뛰어들어 목숨 건 시위를 하거나, 심지어 온 몸에 불을 사르며 생존권과 이동권을 요구했음에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시 버스개편'이라는 천지개벽 속에 떡 고물처럼 떨어진 것이 아주 가끔 눈에 띄는 '저상버스'다. 그러나 여전히, 혹은 당연히 '가뭄에 콩 나듯'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장애인은 찾기 힘들다. 어쩌면 그들에게 세상은 더 악랄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물었다. 예컨대 이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장애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의 대답은 조심스럽다.

 

"솔직히 잘 몰라요. 그렇게 제도를 바꾸려고 시위하는 것, 옳다고 생각은 해요. 그런데 왠지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뭔가 철창 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느낌. 그 생각이나 행동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자꾸 그 안에 머물게 되는 것 같아요. 무슨 느낌인가 하면, 뜨질 못 한다는 거예요. 자신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자리예요. 저는 어떤 장애인이 능력이 있으면 그걸 사회적으로 띄워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장애인들이 잘 돼야, 우릴 보는 시선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그의 생각은 틀렸을 수도 있다. 게다가 충분히 위험하다. 어쩌면 현실을 외면한 '출세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23세 청년의 '자의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그의 고민을 포용하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의무이고, 몫은 아닐까. 청년의 말은 이어진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에게 너무 의지를 많이 하는 것도 문제예요. 너무 받으려고만 하니까요. 이를테면 함께 밥을 먹을 때도, 밥 그릇을 절대 안 치워요. 당연히 누군가 치우겠지, 하는 거죠. 말로는 비장애인들과 똑같다고 하고, 똑같아야 하겠지만 할 수 있는 걸 안 하는 경우도 많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사람들은 지금 그를 '슈퍼장애인'이라고 부른다. 손발이 성치 않은 데다, 약간의 언어장애까지 겹친 그가 연극무대는 물론, 공중파에서까지 '맹활약'을 펼치는 것을 두고 어떤 '팬'이 그에게 '슈펴장애인'이란 별명을 붙여준 것이 계기였다. 조금 있다 그는 "이 별명을 퍼뜨린 것은 실은 나 자신"이라고 실토했지만, 그 별명이 너무 좋단다. 슈퍼장애인. 언뜻 형용모순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처럼 '혈기왕성한 장애인'을 부르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어 보인다.

 

'희망의 휠체어'가 되어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죽음'이 드리웠던 시절이 있었다. 3년 전,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던 한 형이 아파트에서 투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날마다 만나 고민을 나눴을 만큼 의지가 되던 사람이었다.

 

"진짜 좋아하던 형이었어요. 장애인 단체 활동도 함께 했고. 저보다 세 살 많았는데... 그러니까 지금 제 나이 때 일이죠. 전 정말 몰랐어요. 그 형이 그렇게 힘든지. 항상 웃고 다녔고... 미소가 정말...천사 저리 가라 같았어요. 그 형은 저보다 손을 좀 썼고, 걷지는 못하고, 기어다니는 정도였지요. 아버지와 둘이 살았는데 매일 술에 쩔어 사셨어요. 미래가 없었나 봐요. 그래도 자살까지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그때 나도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나는 그 형보다 손도 못 쓰고... 저도 같이 따라갈까 생각을 잠깐 했었어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태지처럼 유명한 연예인으로 뜨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어쩌면 그때 비롯된 건지도 모른다. 우스꽝스러운 무좀양말을 신은 채 발가락으로 전동스쿠터를 조작하는 언어장애인이 방송에 나와 요란을 떨며 만인을 웃길 때, 많은 이들의 생각은 달라질 것이다. 그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생각이고, 그 생각이 바뀌면 모든 게 달라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득 문득 '죽음'과 직면하게 되는 '장애형제들'에게 그는 '희망의 휠체어'가 되고 싶은 것이리라. 그 휠체어가 어두운 '장애의 벽'을 넘는 날, 그는 '두 번째 꿈'을 찾아갈 것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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