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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설치다. 올림픽이라는 전쟁때문에....

  • 등록일
    2004/08/24 10:48
  • 수정일
    2004/08/24 10:48

어제 저녁 피곤에 찌들어 잠을 청하였는데... 올림픽이라는 국가간 전쟁으로 잠을 설쳤다.

난 개인적으로 스포츠(올림픽, 아시안게임, 국가간 축구전, 야구, 각종 종목 등) 이전에 좋아하였지만, 운동이라는 바닥에 맞닿으면서 스포츠를 직접하는 것은 즐기나 스포츠를 관람하지는 않는다.

 

어제 탁구에서 누가 금메달을 땄다는 기사를 오늘 신문에서 보고서야 어제 우리동네 집마다 환호성이 터져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올림픽이 끝나는 날까지는 잠을 청하기 어렵겠구나....

 

동네가 시끄럽지 않은 곳이라서 귀뚜라미 소리(여름엔 매미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곤 하였는데.... 월드컵 기간이 있는 동안 동네사람들의 환호성에 잠을 자다가 깜짝놀래서 깨곤한다. 동네 사람들 이리도 목청이 큰지는 미처 몰랐다. 허걱^^ 피곤하다.

 

환호성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서글픔이 들었다.



민중들은 올림픽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환호하는지... 자신의 생계보다 더 우위에 놓고 이 무심한 밤  TV(바보상자) 앞에서 기쁨에 환호하는지.... 삭막한 세상 가슴 시원한 일이 없는 이들에게 대리만족 수단으로 전락한 스포츠는 민중들에게 분노를 삭히는 수단일 것이다. 

 

자본은 스포츠 방송 중간중간 광고방송을 통해 물건을 살것을 강요하며 스포츠만 볼 수 없도록 민중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자본은 자신의 상품을 최대한 홍보하고, 공중파 방송 아나운서는 흥분된 어조의 목소리로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라는 맨트를 통해 한국 전민중들은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자가 될 것을 강요한다. 난 텔레비젼을 전원을 아예 올림픽 기간동안 빼 놓았다. 좋은 경기를 보는 이들은 스포츠는 스포츠 자체로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눈총을 주지만, 이 어찌 자유스러운가? 미디어 속성을 아는 이라면 스포츠가 갖고 있는 민중우매화 정책에 대해 잘 알것이다. 

 

공중파 매스미디어들은 스포츠라는 무기를 통하여 자본과 정권 이데올로기를 유포하고 있다. 민중들은 그들의 선전선동에 웃고 울고 분노하면서 그들에게 길 들여진다. 보라 역사적으로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일먼저 한 것을.... 침공한 후 제일먼저 장악한 곳이 방송이다. 이에 레지스탕스는 자체내 구국의 방송이라는 라디오 단파를 통하며 선전선동하며 그들의 독립투쟁을 알렸다... 이렇듯 미디어는 자본과 정권에게 있어 주요 통제수단이 된 것이다. 그 중 국가통제에 제일 이바지하는 것이 스포츠이다. 

 

우리는 스포츠 경기 기간동안 마법에 걸린다. 스포츠를 통하여 민족주의자 나아가 국수주의자가 되고, 이전 벌어진 자본과 정권의 만행을 망각하고 만다.

지금 보라 청와대앞에서는 살아있는 돌부처인 지율스님 단식 56일째 천성산을 살리기위한 하루하루 죽음의 나날을 버티고 있고, 이라크 파병반대의 물결은 붉은악마의 광화문 선전전으로 뭍히고,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 이주노동자, 국회의 파행운행, 태풍 메기로 인한 피해상황 등 다양한 영역에서 민생을 이반은 올림픽에 뭍힌다. 특히, 재해를 당한 수재민들에 대해 방송사들은 수재위헌금 모금운동을 벌이던 방송사들은 올림픽 방송으로 인원이 다 빠져나가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수재민들에 대한 따뜻한 정성을 모금하는 방송도 등안시 한다. 수재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올림픽이 기간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뭐.... 다들 자신의 일이 아니면 초기엔 관심을 갖다.... 잊고 마는데 우리내 인심이 아닌가....

 

자신이 당하지 않으면 초기 마음으로 위로하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 이게 세상사 이치이다. 다들 보라 김선일씨 죽음과 지율스님의 외침에 초기에 관심을 보이다. 

올림픽이라는 기간이 .... 스스로들 민족주의자나 국수주의자가 되어 TV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지 않은가?  난 광화문 붉은악마의 광기에 소스라 친다.... 제발.... 개인이 즐기는 것을 전체국민에게 선전선동하지 말라.... 우리는 싸워야할게 너무 많다. 축구경기를 생활이 빠듯한 민초들이 과연 즐기기나 할 수 있냐...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 낮 뜨거운 뙤앗볕에서 자신의 전신을 들어내면 비질땀 흘리고 노동으로 언명하는 이들에게 스포츠는 사치이다. 간혹 보는 이는 있으나 세상사 그렇게 녹녹치 않다.    

 

스포츠를 통해 민중을 통제하고자 하는 자본과 정권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엘리트 스포츠 금메달을 따면 국민체육기금연금을 준단다.... 이 돈이 있다면 생활대상보호자, 장애인지원기금 등 각종 사회복지기금으로 환원하지.... 금메달이 뭐 대수라고 그들에게 돈으로 보상을 해주는가? 그들이땀흘린 것에 대해서는 환호와 박수를 보내지만... 국민의 혈세가 이러한 돈으로 빠지면서 사회복지기금이 없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월드컵, 올림픽으로 이어지는 스포츠에서 우리는 국가간의 보이지 않는 총성없는 전쟁에 온 국민들은 환호와 열광한다. 민초들의 억압에 대한 또다른 분노의 폭발이라 보이지만 이는 제국과 자본이 만들어낸 민초들에 대한 통제를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미국을 보라 다양한 스포츠와 매스미디어에 의해 미국민들이 얼마나 국가적 통제에 헌신적으로 복무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서 CNN의 언론보도는 마치 컴퓨터 게임(전자 오락기)의 시뮬레이션을 옮겨놓은 듯 공중파를 타고 각 가정으로 방송이 내보내 지고 있다. 마치 전쟁에서 쓰러져가는 병사들의 모습이 컴퓨터 게임(전자오락기)의 가상인물로 표현되면서 말이다. 이 처럼 미디어는 민중을 분노케도 하지만 민중을 통제하고 제도화시키는데 유용한 도구이다.

 

어제 잠을 못잤다. 정확히 말해서 열받아서 잠을 자지 못하였다. 운동을 하는 이들이 여전히 소수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않다. 그래도 내길을 갈란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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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윤동주] 별똥 떨어진 데

  • 등록일
    2004/08/23 21:33
  • 수정일
    2004/08/23 21:33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 또렷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를 나라고 불러두자.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보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초점인 듯 초췌하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 바닥을 반듯이 만들어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 머리를 갑박이 내려누르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마는 내막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도무지 자유스럽지 못하다. 다만 나는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 처공에 부유하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루살이처럼 경쾌하다면 마침 다행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구나!



이 점의 대칭위치에 또 하나 다른 밝음(明)의 초점이 도사리고 있는 듯 생각한다. 덥석 움키었으면 잡힐 듯도 하다.

 

마는 그것을 휘갑기에는 나 자신이 둔질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내 마음에 아무런 준비도 배포치 못한 것이 아니냐, 그리고 보니 행복이란 별스런 손님을 불러들이기에도 또 다른 한 가닥 구실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될까보다.

 

이 밤이 나에게 있어 어린 적처럼 한낱 공포의 장막인 것은 벌써 흘러간 전설이오. 따라서 이 밤이 향락의 도가니라는 이야기도 나의 염원에선 아직 소화시키지 못할 돌덩이다. 오로지 밤은 나의 도전의 호적이면 그만이다.

 

이것이 생생한 관념세계에만 머무른다면 애석한 일이다, 어둠 속에 깜빡깜빡 조을며 다닥다닥 나란히 한 초가들이 아름다운 시의 華詞가 될 수 있다는 것으 벌써 지나간 제너레이션의 이야기요. 오늘에 있어서는 다만 말 못하는 비극의 배경이다.

 

이제 닭이 해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켠으로 휘언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라도 이 마음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랑지길에서 주저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나무가 있다.

 

그는 나의 오랜 이웃이요 벗이다. 그렇다고 그와 내가 성격이나 환경이나 생활이 공통한 데 있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극단과 극단 사이에도 애정이 관통할 수 있다는 기적적인 교분의 표본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처음 그를 퍽 불행한 존재로 가소롭게 여겼다. 그의 앞에 설 때 슬퍼지고 측은한 마음이 있을 거라곤 하였다. 마는 돌이켜 생각컨대 나무처럼 행복한 생물은 다시 없을 듯하다. 굳음에는 이루 비길 데 없는 바위에도 그리 탐탁치는 못할망정 자양분이 있다 하거늘 어디로 간들 생의 뿌리를 벅지 못하여 어디로 간들 생활의 불평이 있을소냐,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심심하면 세가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가고, 촐촐하면 한 줄기 비가 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손도손 이야기할 ㅅ ㅜ있고 - 보다 나무는 행동의 방향이란 거추장스런 과제에 봉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든 우연으로서든 탄생시켜준 자리를 지켜 무진무궁한 영양소를 흡취하고 영롱한 햇빛을 받아들여 손쉽게 생활을 영위하고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뻗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스럽지 않으냐.

 

이 밤도 과제를 풀지 못하여 안타까운 나의 마음에 나무의 마음이 점점 옮아오는 듯하고, 행동할 숭 있는 자랑을 자랑치 못함에 뻐저리듯하나 나의 젊은 선배의 웅변에 왈 선배도 믿지 못할 것이라니 그러면 영리한 나무에게 나의 방향을 물어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등의 어디냐 서가 어디냐 남이 어디냐 아차!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제가 내가 갈 곳인가보다. 하면 별똥아! 꼭 멀어져야 할 곳에 멀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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