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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9

(§9) 지가 이렇게 앞으로 끌려 나아가는 양식과 그 필연성에 관하여 예비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에서 할말을 다한 마당에, 서술의 전개방법에 관해서도 미리 몇 가지 사항을 상기시키는 것이 쓸모 있을 것 같다.

학문이 지와 다투는 일은 보류하고 무대에 등장해서 운동하는 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취지아래 이루어지는 이 서술은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지에 대한 학문이 취하는 일정한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때 학문이 취하는 태도는 인식의 실재성을 조사하고 그의 진위를 가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뭔가를 전제하고 이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척도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서술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진위를 가르는 조사는 척도로 삼은 잣대를 조사 대상에 갖다 대어 재보는 것으로서 조사 대상과 잣대가 서로 맞아떨어지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따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척도라는 것은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1] 여겨지기 때문에 학문이 척도가 된다면 학문이 또한 그런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 되겠다. 그러나 학문이 갓 등장하는 이 마당에선 학문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아무것도 본질이나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정당화될 수가 없다. 사태가 이렇게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을 기준으로 택할 수가 없다면 허실을 가르는 조사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럴듯한 질문이다.



[1] 본문 . <본질>이라고만 하지 않고 머리 아프게 라는 말을 삽입했는가? 살펴보자. Wesen(본질)은 우선 고대 그리스어 ousia의 번역이다. Ousia의 번역 역사를 보면 라틴어로 substantia 또는 essentia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ousia가 갖는 바탕에 깔린 것(hypokeimenon,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참조.)이라는 의미와 우리가 무엇을 무엇으로 알아보는데 그 무엇을 그 무엇으로 알아보는 속성으로서의 근거 (to ti en einai: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Z)에서 토론됨.)라는 의미가 전자는 substantia, 후자는 essentia로 옮겨진 것이다. 독일에서는 라틴어 substantia essentia의 변형인 Substanz Essenz라는 낱말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지금은 지배적으로 이라는 낱말이 ousia의 번역으로 사용된다. 이라는 동사의 어원인 인도게르만 낱말 <머무르다> (Verweilen), <어디에 입주해 있다, 살다>(wohnen)라는 의미가 있다. 은 이런 의미로 18세기까지 사용되어 오다가 이라는 동사로 대치되고 이 지녔던 뜻은 이라는 동사가 물려받게 된다. 그래서 은 그리스어 ousia 또는 라틴어 substantia essentia보다 훨씬 더 동사적인 의미, 즉 능동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이라는 동사의 명사형 이라는 동사가 갖는 의미를 물려받아 <한때 존재하다> <한때 어디에 입주하여 존재하다>라는 의미가 강하고 <영원히 그렇고 또 지금 그렇다>라는 의미는 뒷편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리고 의 개념은 바탕에 깔려있는 것 이라는 의미와 함께 자연이 부여한 속성이라는 의미로 동시에 사용된다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12, 622쪽 참조). 본문의 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를 형식적으로 (peri autou/수박겉핥기와 같이 사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물 주변을 맴돌면서) 보면 본래적인 속성이라는 혹은 자연이 부여한 속성이라는 의미의 auto>와 같은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 4 1029b11 이하 참조). 그리고 잣대는 변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옮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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