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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8

(§8) 지에게는 필연적으로 그 도정에서 이정표와 같이 달려있는 일련의 형태를 모두 통과해야 하는 끌려나아감이[1]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그 목적지도 이미 요지부동하게 정해져 있다. 이런 목표가 되는 지점은 지가 자신을 딛고 뛰어넘어[2]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는 지점, 달리 표현하면 지가 자기자신을 완전히 발견하는 지점, 즉 개념이 대상과 같아지고 대상이 개념과 같아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이 목표를 향한 끌려나아감은 막을 수가 없고, 목표에 도달하기 이전의 그 어떤 단계에서도 만족을 느낄 수가 없다. 자연의 울타리에 갇혀 살아가는 것들은, 자신의 힘으로, 그 울타리에 그저 붙들려 존재하는 존재양식에서 한치도 떨어져 나올 수 없고 단지 타자에 의해서 그런 존재양식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이렇게 타자에게 붙들려 밖으로 질질 끌려가면 찢겨 죽음을 맞이한다. 반면 의식이란 스스로 자신을 이런 울타리 밖으로 붙들어 내는 것으로서[3], 의식하는 순간 붙들려 있는 상태를 초월하는 것이며, 그리고 붙들려 있는 상태가 의식에 속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뛰어 넘는 것이다. 의식에게는 의식 안에 있는 개별적인 것과[4] 동시에 의식의 뒤면이[5], 비록 의식의 이런 관계를 공간화하여 의식뒷면을 개별적인 것과 같은 옹졸한 것 옆에 나란히 자리잡게 할지언정,  하여간 의식뒷면의 것이 설정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의식은 이와 같은 옹졸한 만족감을 망치는 폭력을[6] 자기 자신으로부터 당한다. 이와 같은 자신을 향한 폭력을 어렴풋이 느끼는 의식은 불안에 쌓인 나머지 의식뒷면에 있는 진리로 향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서 상실될 위험에 처해 있는 옹졸한 만족을 건져내보려고 애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불안에 빠진 의식은 편안을 찾을 수가 없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데로 살아가는 나태함에 머물러 있으려고 해도, 아니면 모든 것을 긍정하고 만물이 그 나름대로 적절하다고 단언하는 감상주의라는 성을 쌓고 거기서 은신해도 편안을 찾을 수가 없다. 사상 앞에 무사상은 자취를 감추고, 쉬지 않고 운동하는[7] 사상이 나태함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그리고 바로 나름대로밖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보는 이성이 감상주의적 긍정에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혹은 또 의식 뒷면에 있는 진리를 보고 겁에 질린 나머지 의식은 자기가 진리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그럴듯한 생각으로 은폐하여 자신과 남을 속일 수도 있겠다. 즉 진리에 대한 불 같은 열의 때문에 바로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고, 아예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열의에 차 있기 때문에 자기의 사상이건 타인의 사상이건 하여간 어떤 사상보다 더 앞서가는 사상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허영심으로 가득찬 이 진리 외 다른 진리를 발견하기란 결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허영심은 온갖 진리를 모두 다 물리치고 의기양양하게 아성으로 입성하는데 도가 텄다[8]. 이렇게 온갖 사상을 항상 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9] 일체의 내용 대신 무미건조한 나만을[10] 찾는 지성에[11] 흐뭇해 하는데 이런 만족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허영심은 보편적인 것은 멀리하고 오직 홀로 우쭐해[12] 하기 때문이다.



[1] 원문 . 에 스며있는 강제적인 요소를 이렇게 옮겨보았다. 이 도정은 지가 행진가를 부르면서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전진>은 아닌 것 같다.

[2] 원문 <über sich>

[3] 본문 ür sich selbst sein Begriff.>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의식이란 스스로 자신을 이런 울타리 밖으로 붙들어 내는 것으로서>라고 번역한 것은 문맥의 흐름상 이렇게 번역한 것이지 원문의 이해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삭제 줄을 그어 놓았다. 원문은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다. 지금까지는 꼼꼼히 읽으면 헤겔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먹을 수 있었는데 ür sich selbst sein Begriff.>는 뜽금없이 나타난 괴물 같다. 이 문장의 내용이 뭔가 중요한 것 같은데... 우선 눈에 띄는 것부터 살펴보자. 지금까지는 자연적인 의식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이 문장에서 이야기되는 의식은 자연적인 의식하고는 뭔가 좀 다른 것 같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지금까지는 인식론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여기선 좀 존재론적인/실존적인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동물은 이렇게 사는데 사람은 이렇게 산다는 식으로. 그 다음으로는  이 문장의 내용이 <정신현상학>의 엔진이 된다는 느낌이다. 앞 문단에서부터 계속 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자력으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여기에 대한 답이 아직 없다. 이 본문에 그 답이 있지 않는가 한다. 본문을 다시 살펴보자. ür sich selbst sein Begriff.> 여기서 ür sich>눈 뭐고 는 뭐고 는 또 뭔가. 이렇게 한번 읽어보자. ür sich.> 그리고 이렇게 해놓고 보니 아리달송한 것이 좀 사라지고 뭔가 이해되는 것 같다. ür sich>§2에서 <따로>라는 의미로 접한 적이 있다. 그럼 <의식은 왕따>라는 말인가? 어원사전을 뒤적거려보니 하고 아주 가까운 친척 관계란다. 와 같이 공간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런 공간적인 사용은 가 다 차지하고 는 이젠 거의 전의적인 의미로만 사용된다고 한다. 이런 전의적인 의미로는 <규정>, <목적>, <보호>등이 있는가 하면 <대신>이라는 의미도 있단다. 예를 들어 하면 <너보다 가지라고 네 앞에 놓여진 책>이라는 것이고 하면 <기침이 나오지 못하게 그 앞에 세워진 것>이라는 의미란다. §2에서 <따로>라고 번역한 을 자세히 살펴보니 의식이 자기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절대자와 어떤 막연한 관계 안에서 이렇게 자기는 <따로>라고 하는 것 같다. 반면, 에서는 이와 달리 의식이 이런 어떤 것과의 막연한 관계 안에서의 가 아니라 뭔가 정확하게 자기 앞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달리 표현하면 자연적인 의식은 뭔가에 대한 의식으로서(Bewusstsein von etwas) 의식 밖의 뭔가와 막연하게 관계 짖고 있는데, 는 자기 안에, 즉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뭔가와 정확한 관계를 갖고 있고, 바로 이 관계가 가 아닌가 한다. 그럼 이젠 을 살펴보자. 이 문장에는 혹은 이라는 부사가 빠진 느낌이다. 이렇게 해 놓고 보니 좀 쉽다. §6의 첫 문장 에서 자연적 의식에 대한 평가와는 정반대인 것 같다. 자연적인 의식은 껍데기개념 뿐이다. 반면 는 스스로 개념이 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개념>은 애초부터 <알차고 완성된> 개념인 것 같다. 왜 그런가? 이것은 의식이 애초부터 자기 안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이기 (Bewusstsein von sich) 때문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으로 바꾸면 <의식은 애초부터 자아의식이다.>라고 옮길 수가 있겠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별거 아니다. 동의어의 반복이다. 이런 동의어의 반복이 어떻게 에너지의 흐름이 되어 <정신현상학>의 엔진이 될 수 있을까?  란 말은 더 살펴보자. 이 문장을 우선 데카르트를 따라 <의식은 자기가 의식하는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cogito cogitans cogitum) 정도로, 즉 뭔가를 의식하는 행위에 자아의식이 같이 실려있다는 (con-scientia) 정도로 이해해 보자. 이렇게 하면 진리의 개념이 변하여 진리의 핵심요소가 <확신>이 된다. 칸트에 이르면 가 선험적(transzendental) 인식으로서 모든 경험적 인식의 바탕이 되고 이것이 <근원적 통각> („ursprüngliche Apperzeption“), 즉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transzendental) „의식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태를 자각하는 것“ („qui est la conscience ou la connaissance réflexive de cet état intérieur“, Leibniz, zit. nach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1, S.449)이 되어 모든 표상이, 표상이 되려면, 관계해야 하는 것이 된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A 117). 이런 선험적(transzendental) 통각이 바깥세상에 대한 오성의(sinnlich) 모든 관계를 제쳐놓고 의식의 자기자신에 대한 관계로 제한해서 피히테는 <지적직관>(„intellektuelle Anschauung“)이란 개념을 도입하고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나로 인한 나의 행위>(„absolute Selbsttätigkeit des Ich“)로 철학의 출발점을 삼는다. 이렇게 해놓고 보아도 본문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현상학>의 엔진이 되는 부분이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 부분을 실존적으로 이해해서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으로 가는 병>, 혹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 이해가 다 안됨 점을 머리에 간직하고 헤겔을 더 따라가 보자.

[4] 이것은 Bewusstsein von etwas 이해해야 같다.

[5] 원문 . 의식의 저편이나 의식 밖의 것이 아니라 의식의 뒷면, 즉 의식의 자각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한다. 이것은 역자주 66과 함께 역자가 더 숙고해야 할 문제다.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ösen>

[10] 원문 .

[11] 원문

[12] 원문 ürsichs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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