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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encore

§2를 한번 더 살펴보자.

 

<정신현상학>이란 드라마를 보러 오는 우리 구경꾼은 <직접지unmittelbares Wissen>가 1막 1장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고있다.

 

역자는 이 <직접지>를 주객의 구별이 없는 <꿈 같은 상태>로 이해했다.

 

근데 §2로 넘어가면서 뭔가 달라진 것 같다. 원문을 살펴보자.

 

„Der konkrete Inhalt der sinnlichen Gewißheit läßt sie unmittelbar als die reichste Erkenntnis, ja als eine Erkenntnis von unendlichem Reichtum erscheinen, [...]. Sie erscheint außerdem als die wahrhafteste [...].”

 

역자는 §2를 처음에 이렇게 이해했다. 무대에 등장하는 <직접지>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 어린아이가 자랑 삼아 내놓는 것이 따져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근데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아니 잘못되었다기보다는 덜 익은 생각으로 번역을 한 것 같다. 질문은 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몇 가지 질문을 정리해 본다.

 

1.

우선 눈에 띄는 것은, §1에서 §2로 넘어가면서 아무런 구별이 없었던 <직접지>에 구별이 생긴다. <구체적 내용konkreter Inhalt>과 <감각적 확신 sinnliche Gewissheit>이 그것이다. 왜 이런 구별이 생기는가? <등장erscheinen>하기 때문에? 뭔가 석연치 않다.

 

2.

<erscheinen>하면 <무엇이> <누구에게> 등장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극장이라는 기본구도를 염두에 두어야 했었는데 역자는 처음에 이 점을 간과했다.

 

<무엇>의 문제는 §1에서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근데 뭔가 석연치 않다. §2의 주인공은 <감각적 확신>이 아닌가? <직접지>가 왜 <감각적 확신>으로 둔갑했는가?

 

<누구에게>라는 문제는 더 헷갈리게 만든다. <직접지>가 철학=헤겔=구경꾼에게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감각적 확신>이 뭘 모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인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 <감각적 확신>에게도 자신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나타나는가?

 

원문을 살펴보자.

 

„Diese Gewißheit aber gibt in der Tat sich selbst als die abstrakteste und ärmste Wahrheit aus.“

 

역자는 처음에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감각적 확신은 이런 <확신>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진리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자신을 더없이 추상적이고 빈곤하기 짝이 없는 진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철학=헤겔=우리가 이런 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원문은 앞에서 제기한 질문에 기대여 완전히 거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직접지>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고 보는 것은 철학=헤겔=우리고, 자신은 추상적이고 텅 비어있다고 신분증을 제시하면서(sich ausgeben) 말하는 쪽은 대려 <감각적 확신>이 된다.

 

이렇게 해 놓고 보면 등장하는 주인공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떠돌아다니면서 세상만사를 다 본 노인네다. 이 노인네에 한겨울 담요를 뒤집어쓰고 벽난로 앞에서 „cogito“하는 데카르트가 겹치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에밀 시오랑(E. Cioran)이[1] 겹친다.

 

직접적이기는커녕 엄청난 반성을 한 지가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1]“Il existe une connaissance qui enlève poids et portée à ce qu'on fait: pour elle, tout est privé de fondement, sauf elle-même. Pure au point d'abhorrer jusqu'à l'idée d'objet, elle traduit ce savoir extrême selon lequel commettre ou ne pas commettre un acte c'est tout un et qui s'accompagne d'une satisfaction extrême elle aussi : celle de pouvoir répéter, en chaque rencontre, qu'aucun geste qu'on exécute ne vaut qu'on y adhère, que rien n'est rehaussé par quelque trace de substance, que la « réalité » est du ressort de l'insensé. Une telle connaissance mériterait d'être appelée posthume : elle s'opère comme si le connaissant était vivant et non vivant, être et souvenir d'être. « C'est déjà du passé », dit-il de tout ce qu'il accomplit, dans l'instant même de l'acte, qui de la sorte est à jamais destitué deprésent.” (출처: De l'inconvénient d'être né. 태어나 있다는 것의 모순[l'inconvénient/불편을 모순으로 번역했다], 3번째 단장;www.scribd.com/.../Cioran-De-l-inconvenient-d-etre-ne-Syllogismes-de-l-amertume-textes-integraux, 강조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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