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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각적 확신은 이렇게 순수한 존재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확신은 이 <순수한 존재>에 온통 기대고 있고[1], 또 <순수한 존재> 이상의 것을[2]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헤겔]가 <순수한 존재>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에게만 드러나는 것이[3]있다]. 즉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순수한 존재에 사실] 다른 것들이 다양하게 들러리하고[4]있다는 점이다. [이점을 감각적 확신이 실지로 하는 행위에서[5]살펴보자.] 이런 [수행적인] 감각적 확신은 [물론] [아무런 구별이 없는][6]순수한 직접성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감각적 확신은 동시에 순수한 직접성이 직접 <들러리>로[7]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8]이때 순수한 직접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들러리를 선다. 그래서 순수한 직접성안에 나타나는 차이가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성이 어떻게 들러리를 서든지, [아무런 주름이 없다는] 순수한 존재에서 감각적 확신이 등장하는 그 순간[9]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지시적인 것>[10], 즉 <이사람>으로서의 <자아>와 <이것으로서의 대상>으로 주름지어지는 주요차이로 발견하다. <우리>가 이 차이를 성찰해 보면 전자, 후자 그 어느 것도 감각적 확신 안에서 <직접적>이지만 않고, 어디까지나 동시에 <매개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자아가 확신하는 것은 타자, 즉 대상이 되는 사물을 <통해서> 그렇고, 사물이 확신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의 타자인 자아를 <통해서> 그렇다.
[1]원문 <Wesen/본질>. 여기서 <Wesen>은 <감각적 확신>이 존재하는 터전을 의미하는 것 같다.
[2]원문 <Wahrheit/진리>. 여기서 <Wahrheit>는 참과 그릇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이 <나는 더 이상의 것을 담지 않는다>라는 허위와 대립되는 의미로서의 <진리>인 것 같다.
[3]원문 <an dem reinen Sein>
[4]원문 <beiherspielen>. 헤겔이 여기서 <Beispiel>을 <부수적인 것>,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symbebekos=accidens>으로 사용하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매개/Vermittlung>에 가까운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5]원문 <wirklich>. 여기서 감각적 확신이 하는 행위는 자기수행적 모순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wirklich/실재하는>를 <자기수행적>이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6]원문 <diese>
[7]원문 <ein Beispiel derselben>. <Beispiel>을 <사례>, 혹은 <부수적인 것>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순수한 존재>에서 <이사람>, <이것> 둘 중 하나가 들러리로 등장한다는 말이다. 소유격을 주격 소유격으로 이해한 번역이다. 이 문단에서 헤겔이 토론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댄 본질과 <symbebekos/beiherspielen>의 관계가 아닌 것 같다.
[8]이에 대한 대답은 헤겔과 직접지의 <대화>에서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9]원문 <sogleich>. 직접성과 매개가 동시에 [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맨처음부터 매개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10]원문 <die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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