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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도둑질을 잘해야 한다.

문득, 학문은 도둑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이 <문득>이지 사실 그렇지 않다. 잡다한 생각을 글로 옮기려다 보면 그런 잡다한 것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는 난제에 빠지게 되는데, 그때마다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말이 <문득>이라는 낱말이다.

 

진보넷에 블로그를 만들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라이선스 선택에서 를 골랐다. 그러다가 뭔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것을 <정보공유라이선스 4>로 고쳤다. 그런데도 <뭔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떨어지지 않고 집요하게 따라 다닌다. 그리고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면서 문득(!) 내가 도둑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학문을 제대로 하려면 도둑질을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몇 자 적어본다.

 

Karl Krauss가 그랬던가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지적인 것은 <남의 것이 될 수 없는 내 것>(Eigentum)이 아니라 <누구 것이든 하여간 내가 소유>(Besitz)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70년대 말부터 90년대 말까지 간행되었던 라는 잡지가 있는데 는 국가의 허락을 받고 이적국가의 선박을 약탈하는 해적을 일컫는 말이다. 학문은 학문의 허락아래 Freibeuter처럼 도둑질을 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문제는 도둑질을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면서 내가 도둑질해서 쌓아놓은 <지의 창고>에 들어가 뭐 쓸만한 것이 없나 하고 들여다보니 쓸만한 것이 별로 없다. 마치, 미술박물관에서 들어가서 진품은 가만히 나두고 그림아래 붙어있는 딱지만 열심히 모아 논 것 같다. 진품을 들고 왔어야 했는데. 그래서 학문의 박물관에 잠입하여 도둑질을 다시 해야 하는 판이다. 짜증난다. 왜 그런 멍청한 좀도둑이 되어서 진품은 그대로 나두고 그런 쓸데없는 것만 잔뜩 모아놓았는지.

 

그러다 보니 학문의 전통은, 학문의 대행진은 큰도둑들의 대행진으로 보인다. 좀도둑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큰도둑들은 도둑질하는 기술을 닦고 또 닦아서 진품을 귀신같이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학문 박물관의 경비가 심해졌고 또 전시품을 이리저리 나눠나 도둑질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짜증만 내지 말고 어디에나 거침없이 들어가는 큰도둑이 되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물론 도둑질해온 진품에 딱지를 붙이는 일은, 즉 출처를 밝히는 일은, 도둑놈이지만 신사적인 차원에서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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