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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님의 [IN MEMORIAM GILLES DELEUZE] 에 관련된 글.
잠잘 때 뇌는 무슨 일을 할까. 의식과 함께 김 지하의 <서울길>이 찾아왔다.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
아침저녁으로 쌀랑해진, 나락 베기가 다 끝난 가을이었다. 아이는 그날 좀 늦게 일어났다. 전날 저녁 늦게까지 먼 길 떠나 다시 오지 않을 이모는 보따리 짐을 쌌다. 저 멀리 산허리에서 하얀 점 하나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시야로 들어왔다 하면서 움직이고 있다. 집은 바래다주려고 사람들이 다 나가있어서 텅 비어있었고 아이는 혼자였다. 아이는 처음으로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얀 점은 고개를 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눈물의 원천은 마르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 <서울길>을 떠 올려본다. 다 떠오르지 않고 <흰 고개 검은 고개>만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흰 고개 검은 고개>할 때마다 눈물이 나온다. 왜 그러지?
율동이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대상으로 스며들어가 자아와 대상이 일체를 이루고 양자가 오직 운동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자아[시인]와 대상이 일체를 이룬 운동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을 얻었기 때문이다.
흐인 고개
거믄 고개
“ㅡ ㅣ, ㅓ ㅡ”. 엇갈리는 모음에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하얀 점이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다시 아이가 되어, 눈물을 흘린다.
이런 운동을 박노해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자아>의 운동으로 꽉 차있어서 그의 추종자가 되거나 그를 멀리하거나 양자택일 할 수 밖에 없다. 김지하의 <흰 고개 검은 고개>는 추상의 고개지만 <서울>로 가는 구체적인 길인데, 반면 박노해의 <안데스 산맥>은 시공간의 실체이지만, 원천(Arche>와 최후<Eschaton>를 찾아 나서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자아의 추상이다.
그리고 호롱불 하나를 들고 있는 께로족 청년이 시인의 다른 자기(alter ego)가 되고 시인은 존재의 망루에서 마치 구원자를 기다리는 듯이 엄숙한 표정을 짖고 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시인을 향한 말이고,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다.
엮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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