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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9

(§19) [지적직관과 관련하여 사태가 이렇기 때문에] 신의 역사와[1] 신적인 인식은 [자위행위와 같이] 자기 자신과 놀이판을[2] 벌이는 사랑으로[3]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부정적인 것을 대하고 그것을 안고 싸우는 진지, 고통, 인내, 그리고 노고가 결여되어 있다면 사랑의 유회라는 그럴싸한 생각은[4] 뭔가 위대한 것 앞에서 엄숙해지고 가슴을 부풀리는 것이지만[5] 김이 바로 빠져 푹석 주저앉고 말 것이다. 원상적으로[6] 신의 역사란 티없이 맑은 자기 동일성과 자기 통일성임에는 하자가 없다. 이런 동일성과 통일성 안에서는 신이 타자존재가 되어서 소외[경험]을 하고 또 그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대결이[7]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의 원상은[8] 추상적인 보편성일 뿐이다. 이러한 보편성 안에서는 살아 역사하는 것의 본성,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켜 다듬어 나가는[9] 속성과 함께 형식의 자기운동 전반이 간과되어 있다. 형식과 본질의 동일성이 진술되는 가운데[10] 이런 명제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인식은 원상[11] 또는 본질만을 다루는 것으로 충분하고 형식은 생략할 수 있다는 것, 즉 절대적인 기본명제 또는 절대적인 직관이 그 기본명제의 전개나 직관의 발전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바로 본질에 있어서 본질뿐만 아니라 형식 또한 본질적이므로 본질은 한낱 본질로서, 다시 말하면 단지 직접적인 실체 또는 신의 순수한 자기직관으로서만 파악되고 표현되어선 안되고 그에 못지않게 형식으로,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12] 형식을 두로 발전시킨 완벽한 풍부함으로 파악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서 본질이 실재적인 것으로[13] 파악되고 표현되는 것이다.



[1] 원문 . 역자는 여기서 <>으로 번역하지 않고 <역사(役事)>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 생명>이란 창조하는 자연>과 같이 뭔가를 창조하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절대자>를 사유하는 지적직관과 함께 신을 로 사유하는 철학은 중세철학의 시초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구분론/de divisione naturae/Periphyseon>에서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800-877)는 자연을 창조되지 않고 창조하는 자연”(natura quae creat et non creatur=), „창조되었지만 창조하는 자연“(natura quae creatur et creat =창조된 모든 것의 본체/causa primodialis), „창조되었고 창조하지 않는 자연“ (natura quae creatur et non creat=시공간에 존재하는 피조물), 그리고 창조하지도 않고 창조되지도 않은 자연“(natura quae nec creat nec creatur) 4개로 구분하고, 신은 모든 범주를 뛰어넘기 때문에 [오성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단지 묵상(contemplatio), 또는 „notitia intellectualis“(지적 앎/같은 책, 2, 20)를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신을 인식하는 것과 신에게 예배하는 것은 하나다“(„Cognoscere ergo et facere die, unum est.“같은 책, 2, 20)라고 한다.

[2] 원문 . <놀이/Spiel>개념은 쉴러에게 중요한 개념이었다.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일련의 편지>에서 쉴러는 인간의 욕구(Trieb)를 감각적이고 질료적인 소재충동“(Stofftrieb)과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형식충동“(Formtrieb)으로 구분하고 이 둘을 매개하는 것으로 놀이충동“(Spieltrieb)을 제시한다. 소재충동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으로서 시간의 흐름이 [새로운] 내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형식충동은 시간이 지양(사상)되어 아무런 변화가 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충동이 합해져서 움직이는 충동을 당분간 놀이충동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물론, 앞으로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놀이충동은 시간의 흐름을 시간의 흐름 안에서 지양하는 쪽으로, 생성을 [변함이 없는] 절대존재, 그리고 변화를 정체성과 연합하는 쪽으로 방향이 맞춰져 있다.“(Schiller, Ueber die aesthetische Erziehung der Menschen in einer Reihe von Briefen). 그러나 이런 놀이충동은 사이비세계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텅 빈 주관적인 행위이고 현실을 변혁하는 힘이 없다는 것을 느낀 쉴러는 <놀이충동>을 주관이 스스로 만들어 갖고 노는 을 대상으로 하는 미적세계로 제한하고 삶을 편하게 하는 것, 좋은 것, 그리고 온전한 것“(das Angenehme, das Gute und das Vollkommene)을 대하는 태도로는 진지한 대결“(Ernst)을 요구한다. 결국, 쉴러는 세계에서 이룩한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을 실재하는 현실세계로 옮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초기 낭만주의, 특히 노발리스는 <놀이>를 우주전체에서 작동하고 그것의 구조를 결정짓는 원칙으로 간주한다. „신과 자연이 놀고 있지 않는가? 놀이이론, 성스러운 놀이, 순수한 놀이론 비속한 그리고 고귀한 놀이론. 응용 놀이론.““(„Spielt Gott und die Natur nicht auch? Theorie [de]s Spielens, Heilige Spiele, reine Spiellehre – gemeine – und hoehere. Angewandte Spiellehre.“ 노발리스, 보편초안/das allgemeine Brouillon) (참조: Joerg Neuenfeld, Alles ist Spiel, 2005. 위 쉴러와 노발리스에 관한 인용은 이 책 42(쉴러) 50(노발리스)을 따름 (구글 도서검색 가능).

[3] 원문 . 독어에서 사랑> 성적인 의미도 있다. 예컨대 하면 <성관계를 갖다>라는 의미다. 여기서 지적직관이 신을 향한 지적사랑과 비교되어 이야기 되는데 스피노자는 이와 관련 윤리학 5부 명제 36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사랑이 바로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신의 사랑이다. 이것은 신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무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원의 관점아래 바라본 인간정신의 본질을 통해서 신이 설명될 수 있다는 점에 한해서 그렇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사랑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신의 사랑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Mentis amor intellectualis erga Deum est ipse Dei amor quo Deus se ipsum amat, non quatenus infinitus est sed quatenus per essentiam humanae mentis sub specie aeternitatis consideratam explicari potest, hoc est mentis erga Deum amor intellectualis pars est infiniti amoris quo Deus se ipsum amat.“)

[4] 원문 이념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ür sich>

[10] 아리스토텔레스/셸링

[11] 원문

[12] 원문 설명하는 <그리고>

[13]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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