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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Melanchton, Loci Communes seu Hypotyposes Theologicae, 1521]
신학의 주요 관점(loci communes) 혹은 [본이 되는/본받아야 하는, 딤후 1.13] 전형(hypotyposes)
각 학문마다 보통 그 전체를(summa) 담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그 목표로서 모든 연구를 지도하는 몇몇의 주요 관점들을 정리한다. 신학에서도 옛 교부들이 이런 [관례를] 따른 걸 볼 수 있다. 다만 흔치 않고 볼품이 없다. 최근의 교부들 중에서는 다마스케누스와 롬바르두스의 [정리를 예로] 들 수 있는데, 둘 다 쓸모가 없다. 다마스케누스는 너무 철학에 치우쳐 있고, 롬바르두스는 성경의 말씀을(sententia) 전하기(referre)보다는 인간의 생각들을(opiniones) 주워 모으는데 급급하다.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이런 유의 대전(summa)으로 학생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질 생각이야 없지만, 그래도 연구가 어느 방향으로 지도되어야 하는지 인식할 수 있도록 어떤 주요 관점들에 사태의 전체가(summa) 달려있는지 최소한 암시해 주는 게 필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과 같이 대략 신학의 주요 관점들을 정리해 본다.
신 - 하나님 (Unus) – 삼위(Trinus) – 창조 - 인간, 인간의 능력 (vires) – 죄 - 죄의 열매, 악습 – 벌 – 율법 – 약속 - 그리스도에 의한 거듭 태어남 – 은혜 - 은혜의 열매 – 믿음 – 소망 – 사랑 – 예정 - 성사적인 표징(signa sacramentalia) - 인간의 신분(hominum status) - 공권력(magistratus/위에 있는 권세) - 주교 – 저주[지옥행] - 복(beatitudo)
이런 주요 관점들 중 몇몇은 [당장은] 전혀 (prorsus/[앞으로 있을 결과를 봐야 비로소 이해되는?]) 이해할 수 없으나, 다른 몇몇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이라면 모두가 [듣고 경험한 것을 돌이켜보면서?](rursus) 최대한 엄밀하게 깨닫기를 원하신다. 신성의 비밀들은 우리가 경배해야지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신성의 비밀들을 조사의 대상으로 삼고 시험하는 건(tentari), 성인들조차 몸소 자주 경험해야만 했듯이, 항상 커다란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선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성자를 육신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보내 시사 그로 하여금 우리를 하나님의 존엄을 바라보는 일에서 육신을, 곧 우리들의 허무함을(fragilitas) 바라보게 하는 데로 인도하시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내어(고전 1.21) 지혜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세상이 자기 지혜로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stultitia praedicationis)으로, 즉 온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 하였다. 따라서 신학의 가장 고귀한 주요 관점들, 즉 신, 유일성, 삼위성, 창조의 비밀, 성육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탐구하는데] 그토록 많은 노력을 투자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네게 묻겠는데 단지 이런 주요 관점들만 가지고 수백 년 동안 엎치락뒤치락해온 스콜라 신학들이 달성한 게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이 주고받은 말들이(disceptatio),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공허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평생 동안 고작 보편적인 것, 형식적인 것, 주해 등 여기 다 나열할 수 없는 무의미한 말들을 놓고 지껄이다가 그걸 기록하기만 했기에 그렇지 않았는가? 그들이 주고받은 멍청한 말들이 복음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선하신 일들을 어둡게 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의 미련함을 가만 놔 둘 수도 있겠다. 이런 하찮은 것들을 놓고 내게 통찰력이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게 딱 내키지는 않지만, 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교조적인 믿음의 증명이라고 내놓는 것들은 모두 쉽게 무너뜨릴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증명들을 제시하는 그들이야말로 [정말] 가톨릭의 교리보다 일종의 이단들을 더 지지하는 게 아닌가 한다. 그 외 나머지 주요 관점들, 즉 죄의 권능, 율법, 은혜 등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어떻게 그리스도 인이라고 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런 주요 관점들을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그리스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건 그가 행하신 선한 일들을 아는 것이지 저들이 가르치는 것, 즉 그리스도의 본성이나 그의 성육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눈 여겨 보는 게 아니다. 어떤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셨는지 모른다면, 그 생의 줄거리를(historia) 줄줄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의사가 약초의 형상과 색깔을 알고 그 겉모양을 그릴 줄만 안다면, 그걸로 충분한가? 약초의 본능인 치유하는 힘을 아는 것, 이게 중요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치유제로, 성경의 말씀을 따르자면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스콜라 학자들이 제시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알고자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로부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공급 받을 수 있는지, 어디로부터 죄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미끄러져 넘어지는 정신을 일으켜 세워 악마와 육신과 세상을 대항하게 할 수 있는지, 어떻게 깨진 양심을 위로할 수 있는지 등을 아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인의 앎이 될 것이다. 스콜라 학자들이 이런 걸 가르치는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 인의 가르침의 개요를 집필할 때 삼위일체의 비밀, 성육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능동적인 창조, 수동적인 창조 등을 놓고 철학 했는가? 아니면 뭘 다뤘는가? 그리스도의 앎을 온통 담보하는 주요 관점, 즉 율법과 죄와 은혜를 다룬 게 확실치 않는가.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폭넓은 앎을 얻기 바란다고 [셀 수 없이] 증언한다. 이유는 구원의 주요 관점들을 방기하면 우리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신을 생명이 없고(frigidus) 그리스도와는 동 떨어진 논쟁으로 돌릴 거라고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심어 주고(commendare), 양심을 강건하게 하고(confirmare), 정신을 일으켜 세워 사탄에 대항하게 하는 주요 관점들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자(rationem delineare)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서 단지 덕과 악습에 관한 상투적인 지침들(locos) 만을 주문한다. 그러나 이 따위 일에 신경을 쓰는 건 철학자나 할 일이지 그리스도 인이 할 일은 아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잠시 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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