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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Robert Satloff의 다큐 "Among the righteous" (www.pbs.org/newshour/among-the-righteous)
를 참조해 볼 수도 있겠다. 2차대전시 위험을 무릅쓰고 유태인을 구출한 아랍인에 대한 다큐다. 유태인 학살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야드바셈"은 이 아랍사람들을 "정의로운 이방인"으로 기념하기를 거부하고 있지만...
(§28) 지금까지는[1] 개인이 교육을 통한 교양을 쌓지않은[2] 상태와 입장에서 벗어나 지를 향하도록 하는 과제가 보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았는데, 이것은[3] 보편적인 개인, 즉 자아의식 수준에 와 있는 정신의 형성을[4]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젠[5] [교양을 갖추지 않은] 개인과 보편적인 개인과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보편적인 개인 안에서는 모든 계기가[6]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온갖 요소들이 [보편적인] 형식을[7] 구체적으로[8] 취하기, 즉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지기[9] 때문이다. [반면] 특수한 개인은[10] 일개의 형태만을 붙잡고 있는 구체성으로서 모자란/부족한 정신이다[11]. 이러한 정신이 현존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눈가리개가 채워진 말처럼 뜻하는 바가 하나밖에 아닌] 일개의 규정성이[12] 삶 전체를 지배하여 [인상에서와 같이 움푹 페인 선명함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규정성들은 오직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일그러진 흔적으로만[13] 남아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고, 이러 저리 흩트려진 상태로[14] 있을 뿐이다. [그러나 교양을 쌓아가는 정신은 여러 단계를 거쳐 위로 올라가는데] 정신이 올라와 있는 지금단계와 그전 단계를 보면 정신이 낮은 단계에서 향유했던 구체적인 삶이[15] 지금단계에선 [잠재적 기억과 같이] 잠잠한[16] 품위(品位)로[17] 침강되어있는 상태다. 예전엔 모든 정성과 힘을 들여 붙들었던 일이[18] 이젠 겨우 흔적으로 남아있고, 뚜렷했던 그 형태의 이모저모는 [마치 어렴풋한 느낌에 쌓여있듯이] [아무런 식별이 없는] 단순한 그림자가[19] 되어버린 상태다. [특정한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높은 정신의 단계로 계속 올라가는 개인에게는] 바로 그 높은 단계의 정신이 [그런 개인 안에서 태동하는] 실체가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개인에게는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가 위와 같은 [삶의 진행 속에서 누적된] 과거가 되고, 그는 이런 과거를 더듬어 나아가면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인식하는데], 이는 보다 높은 학문에 도전하려는 사람이 오래 전에 터득한 예비지식을 다시 한번 더듬어보면서 그 내용을 되살리는 것과 같은 양상을 띤다. 그러나 기억 속으로 침강한 예비지식을 되살린다고 해서 다시 한번 그 예비지식 자체에 푹 빠져들어가[20] 그것을 움켜 안으려고[21]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개인은 또한 내용면에서도 보편정신이 거쳐간 모든 형성단계를[22] 거슬러 올라가 스스로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개인이 통과해야 하는 도정은 보편정신이 이미 그때그때 취하고 벗어놓은 단계적인 형태로서 평탄하게 닦아놓은 도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수준을 놓고 보자면 예전 시대엔 성숙한 정신수준에 오른 성인이나 고민했던 것들이 이제 와선 어린아이들에나 어울리는 지식으로, 그들을 훈련시키는 연습용으로, 아니 그들의 심심풀이용으로 침강한 것을 볼 수가 있고, 그리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학교교육의 진학단계에서[23] 세계 교양의 역사를 그림자의 윤곽을 도려낸 것과 같이 뚜렷하게 알아볼 수가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신이 과거에 영위했던] 삶을[24] 자신의 소유물로 이미 획득한 보편정신이 [더 높은 정신의 단계로 올라가려는] 개인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실체는 개인에게 외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런 외적인 실체로서 정신은] 개인에게 [사람이 무기적 자연과 유기적 관계, 즉 자연의 산물을 먹고 싸는 관계와 유사한] 무기적 자연과 같은 것이 된다. — 이처럼 내용적인 면에서 교양을 쌓으라고 교육이 다그치는 것은[25] 개인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와 같이 널려있는 것을[26] 애써 획득하라는[27] 것이다. 즉 [자신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무기적인 자연을 다 섭취하고 소화하여[28]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부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29] 이런 [개인이 교육을 통해서 교양을 쌓아가는 운동을] 실체로서의 보편정신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것은 실체가 스스로 자아의식을 발동시켜 자신의 [이리저리 갈라지는 외화로서의] 생성과 [이런 외화에서 다시 단순성으로 침강하는] 자기 안으로의 반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에 사용되는
[4] 원문
[5] 원문에 사용되는 <->가 시각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이렇게 번역하였다.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17] 원어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21] 원문
[22] 원문
[23] 원문
[24] 원문
[25] 원문
[26] 원문
[27] 원문
[28] 원문
[29]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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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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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이 맞습니다. 아랍어나 히브리어는 모음을 표기하지 않아서 다른 발음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그래서 문장의 뜻이 달라지기도 하지요. 그래서 옛부터 읽어오던 발음을 무척 중시하고요, 그래서 그들의 전통을 특히나 중시하는 문화가 생겨난 것입니다. 동시에 그쪽 종교들은 경전 해석의 문제가 매우 심하게 대두되기도 합니다. 국내 외국어 표기법도 무슬림이 맞고, 국제적으로도 muslim 으로 표기되며, 영어사전에서 moslem을 찾으면 muslim을 찾으라고 나옵니다. 마호메트, 모하멧 등등으로 불리는 사람 역시 무하마드가 맞습니다. 코란이 아니라 꾸란이라고 해야 맞고요. 꾸란은 신의 말씀이기에 번역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몇 년 전인가 최초로 한글 꾸란이 나왔지요. 이슬람은 평화라는 뜻으로 이를 회교라고 칭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제멋대로 붙인 이름으로, 에스키모(날고기를 먹는 야만인)라는 이름처럼 쓰이지 말아야 하는 단어입니다. 아울러 영국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반영하는 중동이라는 명칭도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2000년대 초부터는 서남아시아로 바뀌었습니다. 이거 바꾸는 데도 상당한 위협과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었다고 합니다. 좋은 다큐 소개 감사합니다.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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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님,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부가 정보